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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천년, 주여 나를 보내소서/이사야 6:8-사도행전 1:8

by 【고동엽】 2022. 1. 3.

새천년, 주여 나를 보내소서/이사야 6:8-사도행전 1:8

 

매년 9월이 오면 각 교단마다 총회가 열립니다. 이 총회는 교단의 대표 목사님들이 모여서 1년동안 교단의 정책과 방향을 설정해서 교단의 사업을 추진하는 모임입니다. 금년에 저희 교단은 주제를 새 천년-주여 나를 보내소서로 정했습니다.

올해가 1999년이고 내년에는 2000년인데 내년은 앞으로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는 해가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는 때는 어느 때든지 다 중요하지만 지금 이 시대에 사는 것은 참으로 의미가 깊습니다. 왜냐하면 지나온 천년을 마감하는 해이고, 또 새로운 천년을 나아가는 중간 지점에 우리가 살기 때문에 우리는 2천년을 내 한 몸으로 맞이하게 됩니다. 이런 때 우리가 태어나서 산다는 것이 굉장히 큰 복입니다.

새 천년-주여 나를 보내소서이것은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6) 이 말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증인은 땅끝까지 나아가는 사람들인데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할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주의 부름에 응하는 사람들이 증인입니다.

한국교회가 시작된 것은 1886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두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옴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지금부터 113년 전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1886 4 10일 부활주일에 인천항을 통해서 한국에 처음으로 왔습니다. 원래 언더우드는 인도 선교사로 가려고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그가 인도 선교사로 가기 위해서 모임에서 회의를 하는데 한 사람이 한국 선교에 대한 보고를 했습니다. “한국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의해서 아직도 복음을 받지 않은 나라, 어둠에 싸여있는 나라다라는 보고를 받고 그는 하나님 앞에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한국 땅에 선교사를 보내 주시옵소서. 저는 인도로 가지만 한국 땅에 선교사를 보내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할 때 성령께서 언더우드에게 언더우드야, 왜 네가 가지 않고 남을 보내달라고 기도하느냐 한국 선교사로 네가 갈 수 없느냐하는 감동이 왔습니다. 그때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그는 한국 땅에 처음으로 선교사로 갈 것을 결정하고 그가 인도 선교를 포기하고 1886년 처음으로 한국 땅에 와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한국 땅에 복음을 들고 온 지 113년이 지난 지금 한국은 무려 4 5천나 되는 교회가 서 있습니다. 그리고 천 2백만의 기독교인이 이 땅에 복음을 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그런 위대한 일이 일어난 것은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하는 주의 음성을 듣고 스스로 결단한 그의 삶에서 되어진 것입니다. 모두 다 그런 음성이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소명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일생에 있어서 가장 큰 사건은 주의 소명을 받는 것입니다. 소명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선교사의 소명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발견할 때 그것을 소명이라고 말합니다. 구원받은 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을 할 수 있는 소명이 주어지기를 바랍니다.

소명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구원적 소명이 있고 특별한 소명이 있습니다. 구원적 소명은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받도록 부르셨다는 소명입니다. 성도들은 구원받는 소명은 다 받았습니다. 특별한 소명은 보통 사람은 거의 받지 않습니다. 이것은 소수의 사람들이 받는 소명입니다. 이 소명을 받은 사람은 자기 생명을 걸고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당이나 가면 되지, 예수 믿고 기도해서 내 문제나 해결되면 되지이 생각을 가지고 일생을 삽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자기 할 일을 찾아야 합니다. ‘내가 이 땅에 태어나서 무슨 일을 해야 되겠다는 소명도 받아야 됩니다.

이사야의 소명은 특별한 것입니다. 이사야가 어느날 환상을 보았는데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고 그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하였습니다. 그리고 스랍들이 주를 모셔 섰는데 각각 여섯 날개가 있어 두 날개는 얼굴을 가리었고 두 날개는 발을 가리었고 두 날개는 날면서 큰 소리로 노래하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3)라고 했습니다.

이 찬양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연기가 성전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사야 선지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5)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스랍 하나가 제단에서 타는 숯불 하나를 화저로 가져다가 이사야의 입에 대면서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또 바로 이 음성이 들립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그 때 이사야 선지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했는데 온 땅에 하나님의 영광의 충만을 본 사람이 누구일까? 물론 이사야가 보았습니다. 그러나 온 땅에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하도록 만드신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그의 생애 전체가 영광을 보았고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살았으며 온 땅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다록 그의 생을 제물로 내놓았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영광스러운 은혜를 입을 때 자기 자신이 죄인됨을 보게 됩니다. 인간이 짓는 죄 가운데 많은 죄가 있습니다. 마음으로 짓는 죄, 생각으로 짓는 죄, 행동으로 짓는 죄가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많은 죄는 입술로 짓는 죄입니다. 남을 정죄하고, 비난하고, 쓸데없는 말을 하고, 입술로 마음에 없는 거짓된 기도를 하고, 이것이 다 입술로 짓는 죄입니다.

우리가 일생에 짓는 죄 가운데 거의 대부분의 죄가 말로 짓는 죄입니다. 입술로 지은 모든 죄가 사함받기를 바랍니다.

이와같이 이사야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후에 소명을 받는데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할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합니다.

이사야는 물론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했지만 사실 이사야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예언하는 종입니다. 이사야서 전체가 예수님의 탄생과, 예수님의 고난과,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증거하는 책인데 특별히 예수님의 고난에 대하여 예언을 많이 했습니다.

또한 이사야는 이스라엘 민족이 앗수르나 바벨론으로부터 해방을 받고 평화가 온다는 예언을 한 희망의 예언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의 희망적인 예언은 지평 너머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예언이었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늘 보좌에서 천사들과 함께 어전회의를 하는 모습입니다. 그 영광을 이사야가 본 것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고백하고 있는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해서 누가 이 인류를 구원하러 갈꼬 누가 이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꼬할 때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하고 주님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사야의 고백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보좌에 앉아 있는데 그 옷자락이 온 성전에 충만한 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본 것입니다. 온 천지에 그리스도의 영광이 충만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심이 온 땅에 영광의 충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는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사셨습니다.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내가 누구를 보낼꼬할 때 주님께서 친히 내가 가겠습니다.” 하고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온 땅이 하나님으로 충만케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십자가에서 들리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우리는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버림받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이 음성을 들을 때 우리는 한없는 영광을 자기에게서 보게 됩니다. 그 음성을 듣는 자는 한없는 행복을 느낍니다. ‘나 같은 비천한 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큰 일을 이루시다니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시려고 부르시다니 이것이 엄청난 사건이구나!’ 하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 음성이 하늘의 우렛소리처럼 들려오기를 바랍니다.

이 음성을 한번 들음으로 말미암아 내 인생 전체의 삶이 바꾸어질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해서 갈꼬그 음성이 저 보좌에서 들립니다. 이제는 보좌에서 들리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들립니다.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온 땅의 영광을 위해서, 만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내가 십자가에 죽나니 누가 이 소식을 전하여 만 백성을 구원할꼬우리는 이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1905년 알버트 슈바이처가 30세 되던 해에 자기 아버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잡지에서 이런 글을 보게 됩니다. “콩고 지방에서 선교사를 부르고 있음. 누구든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고 응답하는 자가 바로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자임.” 이런 내용으로 쓰여 있었습니다.

그는 20살 되던 해 부활절이 지난 다음날 그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30세까지는 학문과 나를 위해서 살고 30 이후에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아야지 예수님이 30세까지 사적으로 살고 30세 넘어서 공적으로 사신 것처럼 나도 30세까지는 이렇게 살아야지하고 그가 30세까지는 철학박사, 음악박사,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유명한 교수로서 명예를 다 얻었습니다. 그가 30세 되던 해 이 부르심을 입고 의과대학에 입학해서 6년동안 공부를 한 후에 그는 콩고 지방에 선교사로 갑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미쳤다고 했습니다. “그대는 백인의 묘지라 불리는 아프리카에 들어가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이냐많은 사람들이 그를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의 부르심을 입고 드디어 가족을 거느리고 떠납니다. 그래서 그는 거기에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20세기 인류의 박애자, 성자로 역사에 길이 남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해서 갈꼬이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존경하고 있는 마더 테레사는 금년에 성인으로 추대를 받았습니다. 1946 9 10일 마더 테레사는 다르질릉이라는 곳에 기차를 타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그에게 감동을 합니다. “테레사야, 칼커타로 가라. 그곳은 많은 거지들과 문둥병자들이 거리에서 나서 거리에서 살다가 거리에서 죽는단다. 너는 그곳에 가서 그들에게 살아서는 잠자리를 주고 죽어서는 무덤을 주어라그는 이것을 부르심 중의 부르심이라고 하는 그의 생애 소명으로 받습니다.

그는 드디어 이 음성을 듣고 기도하고 고민하다가 2년 후 1948 8 8일에 수도원을 떠납니다. 수도사로서 입은 복장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는 수녀복을 입고 그는 칼커타로 갑니다. 가면서 그는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주여, 오늘밤 나는 어디에서 잠을 자야 할지 모르고 떠납니다. 내일 아침 나는 어디에서 먹어야 될지 모르고 떠납니다. 나는 이 한 벌 옷이 해어지면 무슨 옷을 입을지 모르고 떠납니다. 주께서 떠나라 하시기에 나는 떠나오니 주여, 내 생애를 책임져 주시옵소서.”

그는 드디어 칼커타에 가서 연약한 여자의 몸, 오척단신 작은 체구로 다만 주의 부르심을 입고 그의 생애를 바쳤습니다. 드디어 그는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하며 눈물을 자아내는 위대한 한 생애를 실현한 여인으로서 그의 생애를 마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 음성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 음성은 어떤 특수한 사람들에게만 들려오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에게 들려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다 자기 가정을 떠나고, 직장을 떠나서 선교사로 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렇게 살아야 할 사람도 있지만 우리는 현재 우리가 서 있는 직장과, 사업체와, 가정과 일터에서 이런 삶을 살면 됩니다. 주께서 친히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이 곳에 보냈다. 내가 너를 통해서 내 일을 하기를 원하노라

이제 우리는 내가 어느 곳에 가든지 주님께서 대신 보내심으로 살고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20:28)

우리는 내가 선 자리에서 비록 나약한 인간이요, 죄인 중에 죄인이요, 아무것도 세상에 내놓을만한 것이 없는 비천한 사람일지라도 분명한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여기에 살고 있는 것은 내 뜻이 아니다. 주님의 뜻이다. 나는 분명히 이 곳에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곳에 들어가든지 주께서 나를 선교사로 보내셔서 여기 살고 있다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감사한 것입니다. 나 한 사람을 이 세상에 보내시기 위하여 부모님들이 먼저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나 한 사람을 이곳까지 인도하기 위해서 배후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했고, 때로는 죽어야 했으며, 나 한 사람을 구원시키기 위해서 창세전부터 하나님은 수없는 세월 속에서 많은 계획과 일을 했던 것입니다.

나 한 사람을 구원시키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싼 값을 지니고 살아있는 것입니다. 나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죽으신 예수 값을 지니고 여기 있는 것입니다.

한국 기독교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1866년 토마스 목사가 대동강에 복음을 들고 먼저 왔습니다. 1866년 토마스 목사는 중국에서 선교사를 하다가 24살에 자기 부인이 열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토마스 목사는 계속 선교 해야 할 것인아니면 영국으로 돌아가야 할 것인지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 한국에서 온 천주교 신자 김자평과 최선일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한국 땅에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이 없이 죽는다는 말을 듣습니다. 이 말을 들은 토마스 목사는 영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한국 땅으로 가기로 결정하고 드디어 미국의 셔먼호라는 배를 타고 한국 대동강에 들어옵니다.

그때 당시에 평양 감사였던 박규수는 셔먼호를 못들어오게 하기 위해서 밧줄로 막아버리고 배에 불을 지릅니다. 거기에 탔던 많은 사람들이 대동강에서 익사했습니다. 토마스 목사도 가지고 갔던 한문 성경을 대동강에 던지면서 이 성경이 녹아 흘러가는 물을 마시는 자마다 복음이 들어가게 하옵소서. 이 성경이 녹아 흘러가 땅을 적실 때마다 복음의 땅이 되게 하옵소서.” 하고 대동강에 뛰어듭니다. 하지만 그는 잡혀서 대동강 양각도 섬 위에서 사형을 당하게 됩니다. 망나니 박춘권이라는 사람이 칼을 들고 그의 몸을 돌면서 망나니 춤을 출 때 토마스 목사는 성경을 들고 형제여, 예수 예수하고 외칩니다. 그때 망나니가 칼로 팔을 내려칩니다. 다른 손으로 성경을 들고 예수 예수할 때 또 다른 쪽 팔도 내려칩니다. 그래도 , 형제여 예수 믿으시오.” 할 때 그의 목을 내리쳤습니다. 드디어 토마스 목사는 대동강에서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그때 토마스 목사가 대동강에 던졌던 성경을 주운 최초의 어린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바로 최치량이라는 아이였습니다. 주운 성경을 가져다가 그 집 벽에 발랐습니다. 그래서 그 집이 여관이 되었습니다.

20년 후에 존 마팻이 선교사로 평양에 들어가서 어느 여관집에 들어갔는데 한문 성경이 벽에 붙어 있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최치량에게 묻습니다. 그때 최치량이가 내가 어렸을 때 대동강에 갔다가 예수쟁이가 목이 잘릴 때 던진 그 성경을 주워다가 이 벽에 발랐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드디어 그는 존 마팻 선교사를 통해서 전도를 받고 한국교회 최초 장로가 됩니다.

그 후에 토마스 목사의 목을 쳐 죽였던 박춘권이는 김익두 목사님의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예수를 영접한 후에 자기 과거를 회개하면서 자기 집을 교회에 바치고 예수를 믿어서 장로가 됩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기까지는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재산을 바치고, 집을 바치고, 굶고 헐벗고 고생하면서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6.25 전쟁에서 죽은 순교자의 피가 얼마이며, 그들이 고난 당한 것이 얼마이며, 수많은 선배들이 토굴 속에 갇히면서 고생하면서 복음을 전한 것이 얼마입니까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들으면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놀라운 소명의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복음을 들고 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누구에게든지 만나는 사람마다 복음을 전해서 주님께서 나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몸이 말을 듣지 않으면 제단에 와서 기도로 복음을 전하면 됩니다. 시간이 없어 복음을 직접 전하지 못하는 사람은 물질로 하나님 앞에 선교비를 내면 됩니다. 그래서 모두 다 하나님께 이 소명에 응해야 됩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말합니다.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우리의 가진 것은 다 흔들립니다. 다 없어질 것입니다. 이 땅에 아무것도 남아있을 것이 없습니다. 모두 다 연기처럼 소멸해서 사라질 것입니다. 남는 것은 오직 복음과 구원받은 영혼만 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위해서 우리의 시간도, 물질도, 우리의 재능도 아낌없이 바쳐야 합니다. 영광스러운 주의 부름에 응하는 사람을 지금도 주님은 찾고 있습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 될 사람이 누구냐?” 할 때 바로 저희입니다. 저희를 들어 써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응하고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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