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겸손의 삶(마 3:13-17 ) / 이철신 목사

by 【고동엽】 2021. 12. 26.

겸손의 삶

마태복음 3:13-17

 

 

 

* 논지 : 예수님께서 겸손히 자기를 낮추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을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셨다.

 

 

 

어린시절에 우리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육신의 부모님께도 순종하였습니다. 누가복음 2장 51절에도 보면, “예수께서 한 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시고, 그리스도이시지만 자기의 때가 올 때까지 부모님 아래에서 부모님께 순종하며 삶을 살았습니다. 부모님을 따라서 목수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대팻밥을 온몸에 묻히면서 먼지 속에서 나무냄새를 맡으면서 30세가 될 때까지 부모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목수일을 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사역을 하는 것과는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목수로서 자신의 일을 성실히 하고 충실히 해서 부모님께 순종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순종하는 훈련을 함으로써 순종 속에 그리스도의 사역을 잘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

 

 

 

가. 예수님의 겸손 (13)

 

1. 예수님은 이제 사적인 생활을 다 마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때가 온 것입니다. 그리스도로서의 사역을 감당할 때가 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제 육신의 부모님과 가족들을 다 떠나게 되었습니다. 30년 동안 목수일을 해 왔기 때문에 그것이 몸에 익숙해지고 손에 다 익어서 안정된 생활을 떠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안정된 모든 생활을 떠나고, 더군다나 사랑과 관심을 늘 기울이던 부모님을 떠났습니다. 그 부모님이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셨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고난을 겪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위해 떠나셨습니다. 아들을 군대에 보내는 어머니들이 열이면 열 다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딸을 시집 보내는 아버지들이 결혼식장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을 내 품에 안고 있다가 떠나보낼 때에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이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그 아쉬워하고 애처로워 하는 부모님을 떠나는 예수님도 마음이 그렇게 편치 않았습니다.

 

2. 가족과 집을 떠난 예수님께서 먼저 요단강으로 가셨습니다. 요단 강은 세례 요한이 활동하던 곳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험악하게 생활을 하던 선지자였습니다. 오랫동안 선지자가 없었던 이스라엘에, 요한이라고 하는 선지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그 당시 이스라엘의 타락한 죄악상을 가차없이 책망하고 지적했습니다. 요한은 얼마나 독설가였는지 사람들을 꾸짖고 책망할 때,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아주 혹독하게 책망하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고 사람들의 심령을 찌르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 앞에 나가서 회개의 세례를 받도록 만들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고 사람들을 회개케 함으로써 메시아가 오실 것을 미리 준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고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분명히 안 분입니다. 그래서 ‘나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할 사람’이라고 스스로 이야기를 한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세례 요한 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서 요단 강으로 가셨습니다.

 

3.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세례를 받고 시작하기 위해서 요단강으로 가셨습니다.

 

1)그러나 요한이 주는 세례가 어떤 종류의 세례입니까? 그 세례는 회개의 세례입니다. 죄 지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고, 죄를 씻고, 죄사함을 받는 그런 세례가 바로 세례 요한의 세례입니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자기 죄를 다 자복했습니다. 세리들도 나오고 군인들도 나오고, 많은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그 당시에 백성들을 압제하고 백성들의 것을 착취하던, 죄 가운데에 있던 사람들이 회개의 세례를 받기 위해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회개의 세례가 필요 없는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의로우시고, 거룩하신 분으로서 회개와 죄사함이 필요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께서 죄인들이 회개의 세례를 받는 그 자리에 오신 것입니다. 죄인들과 같이 회개의 세례를 받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예수님께서는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기 까지 낮아지시고 겸손하여 지셨습니다.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시기 까지 낮아지시고 겸손해 지셨습니다. 목수 일로 생활하기 까지 낮아지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인간의 죄와 수치와 그 모든 것들을 회개하는 가장 낮은 자리까지 예수님께서 내려오셔서 낮아지신 것입니다. 죄인들 처럼 회개하는 사람들의 틈에 끼어서 회개의 세례를 받기까지 낮아지신 것입니다. 최대로 겸손해 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낮아지는 고통, 겸손의 수치와 고난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을 준비하셨습니다.

 

2)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는데,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세례 요한은 하나님 집의 종이고 사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종이 높습니까, 주인의 아들이 높습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자기 아버지 집의 사환에게 세례를 받는 것이지요. 오히려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주면 마땅할 텐데 거꾸로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자존심, 체면들을 모두 내버리고 낮아지셔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로서, 메시아로서 사역하려면 무언가 호화롭고 장엄한 대관식 같은 것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환호하고 축하하는 의식이 필요할 것 같은데, 그러한 화려한 의식이 아니라 사환에게 머리를 숙여서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사역이 시작된 것입니다. 겸손하게 낮아지셔서 죄인같이 부끄러운 자리에 서서, 그 곳에서부터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겸손하신데, 이에 비해 우리 사람들은 얼마나 교만합니까? 얼마나 자존심과 체면이 강한지요.

 

오래 전에 제가 섬기던 교회에서 심방을 갔는데, 교적부를 보니까 다른 식구들은 모두 세례를 받았는데 그 집의 가장이 되시는 중년 남자분이 세례를 받지 않았더라구요. 이름만 교적에 올려놓고 교회 출석을 잘 안하는 가 보다 생각하고 물어봤더니, 교회 출석도 잘 하신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왜 세례를 안받으셨는지 여쭤봤더니, “제가 뭐 믿음이 있어야죠” 라고 말씀을 하세요. 그래서 제가 가만히 점검을 해봤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습니까?” “아, 그거야 믿지요.” “그러면 됐지, 왜 세례를 받지 않습니까?” 그랬더니, “제가 뭐 믿음이 있나요. 제가 교회에서 하는 일도 없고, 제가 뭐 세례를 받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세례라는 것은 완성된 사람이 받는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처음 출발하는 사람이 받는 것이니 세례를 받으라고 강권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나중에 이 분이 세례를 안받는 본심을 실토하였습니다. 세례를 받으려면 교육을 받아야 하는데, 그곳에는 보통 어린 중 고등학생들이 대부분이다 보니 어린 학생들 틈에서 세례를 받는 것이 창피해서 세례를 못 받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분을 잘 설득해서 결국 세례를 받았습니다마는, 하나님 앞에서 세례를 받는다고 생각을 안하고 사람들 눈을 보고 체면과 자존심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지요.

 

제가 잘 아는 원로 목사님께서 목회하시던 얘기를 제가 들었는데, 그 교회 집사님 중에 큰 대기업 회장님이 계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분이 헌금, 안내위원을 안 하신다고 합니다. 왜 그런가 해서 보니, 연보대를 들고 쭉 돌아다니면서 헌금을 걷는 것이 창피해서 못하겠고, 문간에 서서 주보를 나눠주고 자리 안내해 주는 것이 창피해서 그것을 못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 하시던 집사님이 계셨는데, 그 분이 헌금위원도 하고 안내위원 하는 것을 보고 그제서야 이 분도 헌금,안내위원 봉사를 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존심과 체면이 있어서 교만한 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가 만난 분 중에 가장 겸손한 분이 있다면, 한경직 목사님이십니다. 그분은 어린 저한테도 가장 최대의 존댓말을 하셨던 어른이십니다. 제가 그 분께 기도요청을 하기도 했지만 목사님이 저한테 기도요청을 하기도 하셨습니다. 어제 제가 한 목사님과 같이 찍은 사진을 보면서 그분의 겸손하신 사랑의 모습이 그립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믿기는 한 목사님이 예수님을 가장 잘 닮은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체면을 내세우고, 교만한 중에 있을 때에는 예수님을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닮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교만함과 자존심과 체면을 꺾고 낮아지고, 겸손해져야 예수님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 예수님을 닮아서 겸손한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나. 하나님의 뜻 이룸 (14-15)

 

1.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하니까, 세례 요한이 만류를 했습니다. 요한으로서는 그리스도이신 예수께 세례를 준다는 것은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결국 세례를 받았습니다.

 

2. 왜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의 만류를 뿌리치고 세례 받기를 고집했을까요? 15절 하반절 말씀을 보면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겸손하기 때문에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체면이라든지, 자존심 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 수치스러운 자리에 서기 때문에 부끄럽고 고통을 받고 고난을 당한다는 것 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리시는 이야기를 했을 때 베드로가 만류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고난, 자기 체면, 자기 자존심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갔습니다. 우리가 늘상 외우는 주기도문에서도 예수님께서 어떻게 기도를 가르쳐주십니까?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고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예수님께서 살아가는 모든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 보좌를 차지하신 분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그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인간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죄인들과 함께 회개의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겸손하게 사람들 앞에서 낮아지게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그의 최대의 목적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우리 인간은 어떻습니까? 우리 인간은 그 교만이 하늘을 찔러, 심지어는 하나님 앞에서까지 교만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기 때문에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자복하지 아니하고 자기 죄를 합리화시키고 정당화 시킵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기 때문에 하나님 뜻에 순종하기 보다 자기 계획과 자기 생각을 내세웁니다. 잠언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의 갈 길은 멸망으로 가는 길 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높이심 (16-17)

 

1.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나님 앞에 겸손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니까, 하나님께서 너무나 기쁘셔서 예수님을 높이셨습니다. 16-17절 말씀을 보시면,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올라오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강림했습니다. 그때까지 이스라엘에는 선지자도 없었고 하나님의 계시도 없었고, 여호와의 신이 임하시는 적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떠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올라오실 때에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그들 가운데에 다시 임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버림받은 백성에게 다시 돌아오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예수님과 함께 계시고 인도하시고 능력으로 역사를 하시게 되었습니다.

 

2. 또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있기를 예수님을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고 기뻐하는 자’라고 선포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사랑스럽게 보시고, 기뻐하시고, 인정하시고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뜻을 잘 순종하는 효자가 부모님이 기뻐하는 자들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9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때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높이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예수님께서는 겸손하신 분이셨습니다. 죄인들 자리에 서서 회개의 세례를 받기까지 겸손하셨습니다. 모든 자존심과 체면을 내버리고 겸손하셨습니다.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 앞에서 겸손하시길 바랍니다. 겸손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시오. 겸손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룰 때에 하나님께서 높이실 줄로 믿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