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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직업관은(살전 3:1-12) / 박조준 목사

by 【고동엽】 2021. 12. 18.

성도의 직업관은

데살로니가후서 3:1-12

 

 

 

인간의 조상 아담에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 중에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으리라"(창 3:19)하신 대목이 있습니다. 얼굴에 땀을 흘린다는 말은 일하는 것을 말합니다. 일을 한다는 것은 우리 생명과 생활의 가장 중요하고 가장 근본적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떠나 광야생활 할 때는 하나님께서 매일 만나를 내려 주셔서 먹고살았습니다. 그러나 가나안땅에 들어가 정착하게 될 때 만나가 끊쳤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광양에서는 일할 수 없이 자주 옮겨야 했으니까 만나를 주셨지만 가나안에서는 이제 일할 수 있으니까 일해서 얼굴에 땀을 흘리고 먹으라는 것입니다.

 

인생은 먹고 마시고 놀고 춤추는 향락의 놀이터가 아닙니다. 인생은 저마다 자기의 직분과 책임을 수행하는 창조의 일터입니다. 우리는 창조의 일터에서 자기의 사명을 다해야 하는 창조적 인간입니다.

 

발명왕 에디슨은 "일하는 것이 나의 인생 철학의 근본이다"고 말했습니다. 의미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도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일을 해야 건강하고 거기서 기쁨을 느낍니다. 무위도식의 허송세월은 우리의 생명을 좀 먹고 정신을 퇴보시키고 성격을 병들게 하고 영혼을 타락시킵니다. 사람이 할 일 없이 놀기만 하면 우리는 권태에 빠지고 생의 허무감과 무의미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나 일을 하면 성취의 기쁨이 생기고 일을 계획할 때 희망의 기쁨이 솟습니다. 일에 열중하면 시간 가는 줄을 모릅니다. 구슬도 닦아야 빛이 납니다. 자주 쓰는 호미는 광채가 납니다. 그러나 쓰지 않는 호미는 녹이 씁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을 해야 우리의 심신이 건강하고 쾌적합니다.

 

서서의 철학자였던 칼 힐티는 그의 저서 『행복론』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의 행복의 최대의 부분은 계속되는 일에 있다. 인생의 가장 행복한때는 일에 몰두하고 있을 때다. 행복하기 원하는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일을 찾아라" 일의 의미와 가치를 아는 사람의 말입니다.

 

'부지런한 꿀벌은 슬퍼할 틈이 없다' 는 말이 있습니다.

 

시인 괴테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 시간을 짧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활동이다. 내 시간을 지루하도록 길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태다" 옳은 말입니다. 활동(活動)은 문자 그대로 살아서 움직이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살았다는 것은 움직이는 것이요, 움직인다는 것은 활동한다는 것입니다. 활동한다는 것은 일하고 창조한다는 것입니다. 크게 활동하는 사람이 큰 사람이요, 크게 활동하는 민족이 훌륭한 민족입니다. 적게 활동하는 사람이 적은 사람이요, 적게 활동하는 민족이 적은 민족입니다. 우리는 활동적인 사람 활동적인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독일의 철혈 수상이라고 말하는 비스마르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청년들에게 권하고 싶은 것은 오직 세 가지 말뿐입니다. 일해라. 좀더 일해라. 끝까지 일해라" 우리는 일하고 활동하는데서 인생의 보람과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일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을 하느냐. 누구를 위하여 나느냐. 무슨 일을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귀도 부지런히 일합니다. 도둑놈도 열심히 활동합니다. 그런데 마귀나 도둑놈의 일은 파괴적 행동이요, 악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일의 내용과 목적이 중요합니다.

 

직업이란 무엇입니까? 사람이 생계유지를 위한 기본 수단입니다. 그래서 직업을 생업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업(業)이란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일이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행동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일을 시작하는 것을 시업(始業)이라하고, 일을 마치는 것을 졸업이라, 종업이라 합니다. 일을 해야 할 내용과 사항을 업무라 하고, 일의 성과나 성적을 업적이라고 합니다. 큰 일을 대업이라 하고, 일하는 사람을 업자라고 합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을 창업이라 하고, 공부하는 일을 학업이라 합니다.

 

이렇게 사람은 일을 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의 문명이란 것은 일의 산물입니다. 사람이 일하지 않으면 살아 갈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모든 위대한 것, 모든 가치 있는 것은 피와 땀과 노동의 산물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하는 일이 고역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기쁜 마음으로 일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하는 일을 고역이라고 생각합니다. 무미건조하고 단순한 작업을 기계적으로 반복할 때 그 일은 권태와 실증을 느끼기 쉽습니다. 그런 사람은 일에 기쁨과 보람과 재미를 느끼기 힘듭니다. 그렇게 되면 일한다는 것이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요 저주스러운 고역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러시아의 작가 막심고프키는 "일을 즐거움이라면 인생은 낙원이다"고 말했는데 바꿔 말하면 일이 의무라면 인생은 지옥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의 일이 기쁨의 원천이 되고, 창조의 보람이 따를 수 있을까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언제나 즐거운 마음으로 일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현대 산업심리학과 도덕의 문제입니다.

 

영국 격언에 '근면은 행복의 오른손이요, 절약은 행복의 왼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일을 하고 직업에 열성을 다 한다는 것은 행복의 필수조건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직업은 사회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직업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직업을 생계유지를 위한 기본 수단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적 차원에서 보아야 합니다. 직업이란 무엇입니까? 인간의 사회적 역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직책 또는 직분이란 말을 씁니다. 사회는 하나의 유기체로서 다양한 부업체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누구는 농부가 되어 농사일을 맡고, 누구는 교수가 되어 가르치는 직책을 다하고, 누구는 상인이 되어 장사를 하고, 누구는 공무원이 되어 행정의 일을 맡고, 누구는 군인이 되어 국토방위의 책임을 다 합니다. 이 땅의 직업을 세분하면 4만가지가 넘는다고 합니다.

 

직업은 사회라는 유기체 속에서 각자가 맡은 사회적 역할이요, 사회적 분담이요, 사회적 기여입니다. 직업은 일면으로 우리의 생계유지를 위한 경제활동으로서 생업인 동시에 다른 편으로 보면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직업은 우리의 직분이요, 직책입니다. 직책이란 직업에다 책임의식을 더한 것입니다. 그리고 직분이란 말은 직업에다 본분의식을 더한 것입니다. 자기 직업에 대한 투철한 본분 의식을 느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직책관념과 직분의식을 갖는 사람은 자기의 직업을 단순히 먹고살기 위한 생업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맡은 직업을 성심 성의껏 열심히 감당하는 것이 내 인생의 책임이요 본분이라고 생각하고 정열과 성실을 다 합니다. 이것을 직분사상, 직책사상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자기의 직업에 대해서 이런 고도의 직업윤리를 가져야 합니다. 사람은 사회에서 살아 갈 때 저마다 지위가 있고, 그 지위에는 반드시 따르는 역할이 있습니다. 자기가 맡은 직무에 대해서 강한 사명감과 성실한 태도와 헌신적인 봉사의 정신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는 것이 직분사상입니다.

 

사회는 무대요 우리는 그 무대에서 자기의 역할을 맡은 배우와 같습니다. 배우는 자기의 역할을 연출할 때 열심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열연이라고 합니다. 명배우의 명연기는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감동을 자아냅니다. 우리는 저마다 세계라는 무대, 사회와 역사라는 무대에서 자기의 역할을 맡습니다. 우리는 내가 맡은 역할을 잘하는 명연기자가 되어야 합니다.

 

인생에서 역할처럼 중요한 것이 없고, 구실처럼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제구실을 다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사회에서 제 구실이란 무엇입니까? 어떻게 제구실을 표현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자기의 직업을 통해서 표현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직업은 사회적인 구실이요 사회적인 역할의 표현입니다. 교수가 되었으면 교수구실을 잘하고, 의사면 의사의 구실을 잘하고, 회사원이 되었으면 회사원의 구실을 잘하고, 기업가면 기업가의 구실을 잘하고, 정치인이면 정치인의 구실을 잘하고, 군인이면 군인의 일을 잘하고, 가정주부면 가정주부의 구실을 잘하고, 학생이면 학생의 구실을 잘하면 되는 것입니다.

 

공자선생은 '군군 신신 부부 자자'라는 말을 했습니다. 임금님은 임금님다워지고, 신하는 신하다워지고,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지고 아들은 아들다워지는 것입니다.

 

이름이 있으면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알맹이와 자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천하만물에는 다 이름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이름 속에 담겨 있는 알맹이가 중요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저마다 저다워지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저마다 자기가 종사하는 일에 일인자가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 방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는 분투노력이 필요합니다. 고심참담의 훈련이 있어야 합니다. 장고나 피리도 10년을 해야 제소리가 난다고 합니다. 지난달 Boston 마라톤 대회에서 월계관을 쓴 이봉주 선수가 하루 이틀에 세계의 일인자가 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낙심하지 아니하고 포기하지 아니하고 계속 훈련해서 세계마라톤의 정상에 오른 것입니다.

 

걸작이나 대가가 우연의 산물이 아니요 요행의 결과가 아닙니다. 피와 눈물과 땀의 산물이요, 정성과 고생의 결과입니다.

 

물건을 만드는 것은 동시에 내 인격을 만드는 것입니다.

 

일에 열중하는 것은 내 인격에 열중하는 것과 같습니다. 직업을 통해서 우리의 인격이 성장합니다. 로마의 철인 세네카는 "일은 고귀한 마음의 영양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자기 일에 전심전력하고 자기 직분과 직책에 헌신 몰두 할 때 우리의 정신은 고귀해지고, 우리의 인격은 심화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우리 성도의 직업관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직업을 단순히 먹고살기 위한 경제 수단으로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직업을 사회적인 역할로만 보지도 않습니다. 물론 어떤 특수한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직업에 별 다른 것이 없습니다. 같은 직장에서 같은 일을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하는 직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성도는 그 직업관이 비신자와 의미가 아릅니다.

 

직업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 사명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한 천직으로 믿는 것입니다. 직업은 하나님이 나를 불러서 나에게 맡긴 소중한 일이요, 책임이요, 위탁이요, 사명이요, 심부름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신성합니다.

 

직업을 나타내는 영어단어는 일곱 개가 있습니다.

 

job, business, profession, occupation, calling, vacation, employment라는 말은 쉽습니다. 그런데 이중에서 천직사상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 세 개뿐입니다. calling이라는 말 vacation이라는 낱말 그리고 profession 이라는 말입니다.

 

calling 이란 말은 부른다는 뜻입니다. 왜 천직을 calling 다시 말하면 부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까? 직업은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불러서 나에게 맡긴 일이요 사명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기드온을 부르셨습니다. 이사야을 부르셨습니다. 사울을 불러 바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긴 일을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내 정성과 능력과 지혜와 책임을 다해서 열심으로 해야 합니다. 내 전력을 기울여 헌신적으로 일해야 합니다.

 

직업은 천직이요 소명입니다.

 

vocation 이란 말도 있는데 이 말은 본래 라틴말 vocare 라는 말에서 온 것입니다. vocare 라는 말은 '소리'라는 뜻입니다. 직업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는 소리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불러서 나에게 맡긴 일이요, 소명입니다.

 

profession 이란 말은 직업중에서도 고도의 지식과 기술과 훈련을 요하는 전문직업을 의미합니다. 가령 의사, 변호사, 대학교수, 목사가 여기에 속합니다. profession 이란 말은 profess에서 나온 말인데 profess는 서원한다. 맹세한다. 공헌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직업은 맹세하는 것입니다. 누구와 맹세합니까? 누구와 서약합니까? 하나님과의 서약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불러서 나에게 맡긴 일을 성심성의를 다해서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 없이 열심으로 하셨다는 하나님과 엄숙히 맹세하고 서약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직업관입니다. 얼마나 투철한 생각입니까? 얼마나 놀라운 직업관입니까?

 

그러므로 꼭 같은 일을 해도 그의 직업관에 따라서 다시없는 기쁨과 보람과 축복이 될 수도 있고, 더 할 수 없는 저주와 고역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죽지 못해서 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은 한없이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의 직업관은 노예적 직업관입니다. 그런 사람은 직업을 저주받은 인생의 고역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인생은 지옥이나 다름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정이 있으니 처자가 있고 처자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 일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은 생업적 직업관을 가진 사람입니다. 물론 죽지 못해서 일한다는 사람보다는 훌륭합니다. 그러나 그의 삶에서 보람이나 의미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한다는 천직적 직업관을 가지고 일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천직적 직업관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고 보람있는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일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커다란 축복이요, 보람된 행동입니다.

 

중세 라틴말 격언에 'Laborare est orare'란 말이 있습니다. '일하는 것은 기도하는 것이다' 하는 뜻입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 하는 일은 하나님께 드리는 경건한 기도와 같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일해야 합니다. 일속에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 할 때 어떻게 합니까? 정성을 모읍니다. 정신을 집중합니다. 기도 드릴 때 왜 눈을 감습니까? 다른 뜻이 없습니다. 눈을 뜨고 하면 보이는 것이 많으니까 정신집중이 안됩니다. 그래서 정신을 집중하느라고 눈을 감고 기도합니다. 기도 드릴 때는 우리 마음이 순수해 집니다. 우리는 일을 할 때도 이런 정신 이런 자세로 해야 합니다.

 

노동은 신성합니다. 왜냐하면 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 사명이고 심부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민주 사상가인 토마스 제퍼슨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선민을 택한다면 땅위에서 땀을 흘리는 사람들만이 아마 하나님의 선민이 될 수 있을 것이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천직의식과 소명사상을 가지고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일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선민자격이 있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구체적 표현은 일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고 했습니다.

 

영국의 이상주의 철학자 카알라일은 '과거와 현재'라는 그의 글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최후의 복음은 네 천직을 알고 그것을 하라는 것이다" 자기의 천직을 알고 자기의 천직에 헌신하는 것이 이 세상의 최후의 복음이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천직 속에 축복이 있고, 보람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의 직업과 신앙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막스웨버라는 사람은 '개신교의 윤리와 자본주의정신'이란 책에서 신교의 금욕적 합리주의 윤리가 근대 자본주의 정신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말했습니다. 카톨릭교회는 개신교에 비해서 근대자본주의 정신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속직업활동을 별로 중요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개신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종교개혁의 창시자였던 마틴 루터는 세속생활을 경시하는 중세사상의 편견을 깨뜨렸습니다. 우리의 직업은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보고 직업소명사상 다른 말로 만인제사론을 강조했습니다. 성직자만이 하나님을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하는 우리의 직업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믿고 열성을 다하는 것이 성직자가 예배를 인도하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종교적 가지와 의미를 갖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근대자본주의 정신을 형성하는데 적극적인 영향을 준 것이 요한 칼빈을 위시한 금욕적 신교정신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금욕은 욕망을 끊는다는 고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을 위해서 훈련하는 것은 의미합니다. 나태, 향락, 사치, 안일, 불규칙한 생활이나 방심같은 인간의 약점을 억제 극복하고 근면, 성실, 규칙적 생활 정직, 검소의 정신을 가지고 자기직업에 헌신몰두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시간을 아끼고 돈을 아꼈습니다. 돈은 하나님의 소유요 인간은 하나님의 재산관리자, 청지기로 믿었습니다. 그들은 잘 관리하고, 많이 증식시키는 것이 인간의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개신교의 이러한 금욕적 합리주의가 근대자본주의 정신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개인의 영리만 추구하는 이기주의 경제 윤리는 소위 천민자본주의 윤리인데 비해서 청교도들의 금욕적 직업윤리는 합리적 자본주의 윤리를 이룩하게 된 것입니다.

 

건전한 경제윤리가 확립되지 못하면 자본주의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잊어버리고 사리사욕을 채우는 일에만 몰두하는 천민자본주의와 배금주의로 전락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돈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맑고 깨끗한 돈이요, 다른 하나는 추하고 더러운 돈입니다. 옳은 수단과 정당한 방법으로 번 돈은 정재요, 부정한 수단과 불법의 방법으로 모은 돈은 부정재입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번 돈은 깨끗하고 축복된 자랑스러운 돈이요, 부정한 수단과 방법으로 번 돈은 더러운 돈이요 저주스럽고 부끄러운 돈입니다. 돈은 바른 방법으로 벌어야 합니다. 남보다 부지런하고, 남보다 검소하고, 남보다 용감하고, 남보다 뛰어난 아이디어가 있었고, 남보다 더 저축했고 남보다 더 좋은 상품을 만들었고, 남보다 더 훌륭한 기술과 시장을 개척했기 때문에 돈을 벌고 부를 축적한 사람은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요 존경받아 마땅합니다. 그런 부야말로 축복과 갈채와 찬양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천직적인 직업관을 가지고 가지 일에 몰두하는 사람은 인생의 다시없는 행복자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자기 직업을 천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불행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직업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의 직업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직업에 열성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여유시간이 늘어나고 유흥과 소비에 휩쓸리기가 쉽습니다. 인생은 일하고 활동하는 것보다도 소비하고 즐기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런 향락주의에 휩쓸릴 때 우리의 정신은 병들고, 생활은 타락하고, 사회는 부패하고 맙니다. 소비와 향락을 위주로 하는 생활은 긍지가 없고 보람이 없습니다. 창조의 기쁨이 없고, 향상의 만족이 없습니다. 인생은 향락의 놀이터가 아닙니다. 창조의 일터입니다. 우리는 창조적 생산적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갈 때 참 행복 할 수 있습니다. 직업은 하나님의 우리에게 맡기 천직입니다. 올바른 직업관을 가지고 맡은 일을 성실하게 감당해서 이 땅에서도 보람되게 의미 있게 긍지를 가지고 행복하게 살고, 하나님 앞에 설 땐 칭찬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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