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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마가복음 5:25-34

by 【고동엽】 2021. 12. 18.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마가복음 5:25-34

25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26많은 의원에게 많 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 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예수 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 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29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 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 라 30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 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 니 31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 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 되 32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 33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 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 을 여짜온대 34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 할지어다


세계 제2차대전이 끝난 후에 이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을 묘사하는 말 가운데 우리가 자주 듣게 되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절망' 이라는 단어이고 또 하나는 '소외' 라는 단어입니다. 절망과 소외 - 그것은 주로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나 작가들을 통해서 현대인을 묘사 하는 가장 중요한 단어로 많이 씌 어졌습니다. 절망과 소외. 전쟁후에 폐허를 디디고 현대인들은 다시 문 화를 복구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 습니다. 좀 더 잘 사는 세계가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의 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내가 왜 사 는지도 모르고 또 무엇을 위해서 사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또 내 일에 대한 어떤 구체적인 희망을 갖지 못합니다. 이것이 절망하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절망도 비극이지만 더 커다란 비극은 이런 세상에 살 면서 나하고는 통할 사람이 없어 요. 우리는 사람들에게서 벽을 경 험합니다. 통할 수 있는 인간을 느 끼지 못합니다. 갑자기 어저께 제 마누라가 저보고 당신하고 나하고 는 잘 통하지가 않아요. 그러더라 고요. 그래서 지금 이틀동안 지금 까지 혼돈이 계속되고 있어요. 그 래서 내가 이 설교를 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나도 그런 느낌이 있는데.. 그래서 이유가 뭐냐? 그랬 더니 이유도 없대요. 그래서 제가
"그것이 바로 인간의 실존이다."
그랬습니다. 실존적인 고독,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러한 고독 을 현대인들은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사실 그것이 현대인들 만의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 다. 그것은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 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살지 못할 때, 창조주의 품에서 살지 못할 때 혹은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할 지라 도 하나님과의 관계나 교제가 흔들 릴 때 끊임없이 삶의 장에서 경험 해야 하는 삶의 고통 - 그것은 절 망과 소외라고 생각이 됩니다. 오 늘 우리는 이런 절망속에, 소외속 에 살던 한 여인의 모습을 성경에 서 발견하게 됩니다. 자 우선 본문 에 나타난 이 여인의 절망의 원인 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되고 있습니 까? 이 여자에게 병이 있었지요? 자, 본문에 보면 이 여인이 앓고 있었던 병이 무슨 병이 었습니까? 혈루증이다 그랬습니다. 피를 쏟는 병, 하혈하는 병입니다. 그러나 이 하혈은 단순한 생리적인 사건이 아 니고요, 우리가 특별히 이런 문제 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레위기 15 장을 집에서 연구해 보십시오. 이 레위기 15장에서는 이 병을 유출병 이라 그랬습니다. 특별히 정상적인 생리적인 출혈말고 그 밖의 이유로 출혈하고 있었던 병, 우리가 레위 기 15장을 연구해 보면 주로 이런 병들은 성병으로 말미암은 임질같 은 그런 질병 때문에 하혈을 하게 되는 그런 케이스가 아니겠는가? 라는 이런 추측이 가능합니다. 어 쨌든 그 시대로 보아서 난치의 질 병을 앓고 있었던 여인의 모습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병을 앓아도 고쳐질 희망이 있다 생각하면 견딜 수가 있습니다. 그 러나 이 여인의 경우에는 고칠 희 망이 없습니다. 여기 이 여인의 절 망이 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을 본문은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26절을 같이 읽어보겠어요.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 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 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자, 이런 병을 얼마동안 앓 았습니까? 12년 - 25 절에 보시 면 '열 두해를' 열 둘이란 숫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만수입니다. 아주 긴 세월을 말할 때 '열 둘', ' 사십' 이런 숫자가 많이 등장합니 다. 12년이나 앓았어요. 희망없이 앓아왔습니다. 자기 병을 고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받쳤습니다.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양의, 한의, 차병원, 경희대학 한방 병원, 민간의학.. 뭐 이런 노력들을 다 받쳐 보았지만 희망이 없었어 요. 여기 이 여인의 절망이 있습니 다. 이제는 죽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상태, 이것이 이 여인이 처하 고 있었던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 다. 그러나 이 절망이라는 고통보 다 더 커다란 고통은 이 여인이 주 변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삶을 살 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당시 에 이런 혈루증, 소위 출혈병을 앓 게 되면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소외 를 당했습니다. 종종 이런 사람들 은 부끄러운 병이다라고 해서 그 당시 시대의 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무지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성 바 깥으로 쫓겨나 성 바깥에서 살아야 헸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접근하는 것도 금지됐고, 회당예배에 참석할 수도 없었습니다. 가정에서도 남편 이 이런 여인과 이혼해도 무방한, 합법화 되었던 그런 시대속에서 이 여인은 철저한 외로움, 아무도 받 아줄 수 없는 사회가 버린 사람, 사랑하는 남편도 버리고, 사랑하는 자식들도 외면한 이런 철저한 소외 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여인이 었습니다. 여기 이 여인이 경험하 고 있었던 절망보다도 더 커다란 고통, 소외의 고통을 경험하고 있 었던 여인의 모습을 우리는 성경에 서 볼 수가 있습니다. 외경에 보면, 성경은 아니지만 성경 바깥의 문서 들을 모아놓은 외경에 보면, 혹은 교회 전승에 의하면 이 여인의 이 름이 베로니카라고 합니다. 베로니 카라는 여인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언덕을 향해서 오르 실 때 넘어지시고 다시 일어나시고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시면서 가 실 때 그 얼굴의 땀방울이 핏방을 이 되어 떨어지고 있었을 때 이 예 수님을 조롱과 모욕에 찬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무리들 가운데서 뛰 쳐나와 자기 손수건을 가지고 예수 님의 이마에 땅방울을 씻어 주었던 여인, 그랬더니 뜻밖에 그 손수건 에는 예수님의 거룩한 얼굴의 흔적 이 새겨졌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를 남긴 여인 - 베로니카, 이 여인의 이름은 아마도 베로니카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이 여인이 절망 과 소외속에 있었던 이 여인이 예 수님 만나고 치료를 받습니다. 새 삶을 살게 됩니다. 자, 이 여인이 치유를 경험했던 전기는 어떻게 이 루어집니까? 치유의 계기 - 두 가지 결정적인 사실이 이 여인에게 치유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 여 인에게 치료의 새로운 전기를 만든 이 사건을 본문은 이렇게 보도합니 다. 본문의 27절을 같이 읽겠습니 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 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 을 대니"
여기 매우 중요한 동사가 두 가지가 나옵니다. 자 어떤 단어 가 나옵니까? '듣고' 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 다음에 어떤 단어가 나옵니까? 동사 '손을 댔다' touch했다. - '듣고 손을 댔다.' 이 것이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바 로 이것이 여인에게 치료를 가져온 전기가 된 것입니다. 듣고 만졌습 니다. 듣고 손을 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복음서를 읽다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구원 을 받습니다. 치료를 경험합니다. 인생이 새로워집니다. 그러한 사건 을 보도하는 대목마다 이 두 가지 단어가 어김없이 등장하는데 그것 은 '듣고'라는 단어와 또 하나는 ' 믿고'라는 단어입니다. 예를 들어 서 우리가 잘 아시는, 여러분들이 대부분이 잘 아시는, 그러나 어떤 분은 아직도 모르실 요한복음 5장 24절 같은 말씀에 보시면 자,
"내 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 니 내 말을(뭐라 그랬어요?) 듣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또 나 보 내신 이를 (뭐예요?) 믿는자는 (자, 듣고 믿는 자는 어떤일이 일어납니 까?)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 겼느니라"
자, 두 가지 때문에 '듣 고 믿었기 때문에' 자, 이 위대한 역사는 들음에서 시작됩니다. 본문 에 나타난 여인이 뭘 들었습니까? 본문의 27절에 보시면 뭘 들었지 요? 예수의 소문을 들었다. 이것이 여인의 운명을 바꾸는 전기가 됩니 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 는 자마다 삶이 바뀔 것입니다. 운 명이 달라질 것입니다.
팔자도 바뀔 것입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예수! 왜 그래요? 여 러분, 예수가 복음입니다. 예수가 구원이십니다. 예수가 소망이십니 다. 예수가 생명이십니다. 기독교의 복음의 핵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가 구원이라는 사실이예요. 예수 의 소문을 들었어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 할 수 있는 모든 노력 을 다 했지만 이 여인은 병을 고칠 길이 없었습니다. 미래가 없었습니 다. 그런데 어느 날 소식을 들었어 요. 예수가 오신다. 우리 마을을 지 나가신다. 예수! 눈이 번쩍 뜨였어 요. 예수라고?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에게 치유를 제공하고, 사 람들의 운명과 인생을 바꾸고 계시 는 갈릴리 사람, 나사렛 사람, 저 예수! 예수가 오신다. 복음이었습 니다. 그것은 마지막 잎새같은 최 후의 희망, 이 여인이 걸 수 있었 던 마지막 희망, 예수의 소문을 들 었습니다. 듣고 어떻게 했습니까? 그 다음에? 예수님을 향해서 달려 갔어요. 그리고 예수의 옷자락을 만졌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달라집 니다. 들으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예 수의 소문을 듣고.. 지금도 예수의 소문은 복음인줄 믿으십니까? 믿음 은 어디에서 나와요? 들음에서 나 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다. 예수가 오신다. 내가 그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 그 예 수님을 경험할 수 있다. 이 사건은 지금도 복음인 줄 믿습니다. 예수 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댔다.
랍비라고 불리워지는 사람들은 그 당시에 보편적으로 거리를 다닐 때 옷을 하나 더 입었어요. 겉옷을 입었어요. 그리고 겉옷은 직각처럼 떨어집니다. 귀퉁이에 딱딱하게 된 곳에 수를 달게 되어 있어요. 청색실 끈이 매달립니다. 아마도 이 여인은 밀리고 밀리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예수를 만나야 한다. 어떻게든 만나야 한다' 사람들을 비집고 비집고 들어가서 가까스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가만히 만졌을 것입니다. touch했습니다. 손을 댔 습니다. 만졌습니다.
저는 그 당시에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사람은 이 여인 뿐만 아니 라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본문의 정황 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렇게 보도합 니다. 31절 다시한번 읽어보세요. 31절 읽겠습니다. 시작
"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 들이 어떠했습니까? 에워싸 밀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었어요. 예수님은 여전 히 수퍼스타였습니다. 많은 사람들 이 그분을 만나고 싶어했습니다. 인산인해였습니다. 무리들이 붐비 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호기 심으로 예수님을 만지고 있었고 어 떤 사람은 지나가다가 예수님을 밀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 들이 예수님께 손을 댔지만 전혀 다른 종류의 만짐. 전혀 다른 종류 의 touch. 이 만짐을 예수님은 즉 각적으로 느끼셨습니다. 그리고 물 으셨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다르게 만진거예요. 이여인은. 어떤 의미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 을까요? 그것은 믿음의 만짐이었습 니다. 믿음의 만짐. 어떤 믿음이었 어요? 자, 28절 읽어보겠습니다. 본 문의 28절. 다같이 시작.
"이는 내 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 을 얻으리라 함이러라"
그 예수. 어쩌면 내 인생의 마지막 희망일 수 있는 예수. 나는 저 예수에게 기대를 한다. 그 예수님이 내 삶을 바꿀 수 있고 나를 해방하시고 내 인생에 새로움을 줄 수가 있다. 이 믿음으로touch한 것입니다. 믿음으 로 만진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이란게 뭐예요? 믿 음은 믿음의 대상과 나를 연결 시 키는 것입니다. 연결시키는 것이예 요. 자, 결혼식에 서서 부부서약이 이루어집니다. 서약에 깔린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그 바탕에 깔린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
나는 이남자를 믿습니다. 나는 이 여자 를 믿습니다. 그리고 내 일생을 의 탁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향한 신 뢰를 바탕으로 부부서약이 이루어 집니다. 우리가 믿는 순간 그 믿음 은 상대방을 나와 연결시키는 것입 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믿습니 다."
그순간 나는 상대방과 연결되 요. 그것은 위대한 것입니다. 내가 주님앞에 연결되는 그 순간 내가 그를 신뢰하는 그 순간, 당신은 나 의 구세주. 나의 주님.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를 신뢰하는 바로 그 순간, 그 찰라 그를 향한 그 믿음이 고백되 는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나요. 나는 주님만 믿습니다. 그때 어떤 사건이 일어났습니까? 29절 읽겠습 니다.
"이에 그의 혈루의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줄을 몸에서 깨달으니라."
순간적으로 병이 나 았습니다.
자., 어떻게 병이 나을 수 있었 습니까? 그 다음 구절이 설명하죠. 30절에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 에게서 나간줄을 아시고.."
여러분 부부가 서로를 향한 신뢰를 전제로 결합하는 순간 그순간부터 부부는 모든 것을 공유하게 됩니다.남편 것이 마누라것이고 마누라 것이 남 편것이 되요. 물론 그렇지 못한 집 구석도 많이 있더라구요. 문제예요. 문제. 그러나 진정한 신뢰를 바탕 으로 결합했다면 모든 것을 공유하 게 되요.
주님 제가 주님을 믿습니다. 그 리고 자기 일생을 의탁하는 바로 그 순간. 주님께서 허용하신 놀라 운 사실. 주님 안에 있던 능력이 그 믿음의 통로를 타고 상대방에게 흘러가는 것이예요.
저는 동일한 사역이 문자 그대 로 지금도 일어날 수 있다고 믿습 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순간. 인생 의 무력함에 시달리던 사람이 예수 님을 touch하고 만지는 그 순간. 예수 안에 있던 능력이 내게 흘러 들어올 줄 믿습니다.
인생의 불안과 허무속에 헤메 던 사람이 예수님 앞으로 달려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만지는 그 순간 예수 안에 있던 엄청난 평화가 내 가 밀려올 줄 믿습니다 .예수안에 있던 구원이 내게 허락됩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거예요.
믿음으로 주님을 만진 순간 주 안에 있던 능력이 그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자, 이 놀라운 사건이 일 어난 후에 그에게 어떤 요구를 하 십니다.
이것은 치유받은 자의 책임이라 고 할 수 있어요. 내가 예수믿고 구원을 얻었다면 내가 예수 믿고 평화를 얻고 예수믿고 고침받아 새 로운 삶이 열렸다면 주께서 요구하 시는 책임하나가 있습니다. 이 책 임을 위해서 주께서 이런 질문을 하십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주님은 그녀가 예수님을 신뢰하고 믿음이 그녀에게 치유를 일으켰다 는 사실을 이미 아셨습니다. 그리 고 그녀에게 공개적으로 나타날 것 을 요구하십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31절.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 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그러나 이 여인은 알았습니다. 피할 수 없는 것을 알았어요. 이미 주님의 은혜가 여인에게 전달된 것 을 숨길 수 없게 된 이 여인. 마침 내 그 정체를 드러냅니다.
"예수께 서 이 일을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 러보시니.."

나타납니다. 드디어 나타납니 다.
자, 33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그 앞에 와서 모 든 사실을 여짜오되..
"
여러분 성경에 일관성이 있어 요. 주님이 사람들에게 요구하시는 일관성입니다. 내가 주의 은혜를 받았다면 구원을 얻었다면 주의 은 혜를 경험했다면 반드시 요구하시 는 한가지가 있습니다. 주께서 내 게 역사하신 그것을 나타내야 한다 는 사실이예요. 그것이 전도예요. 그것이 간증인 것입니다. 주님이 내게 이루신 사실. 사실. 그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사람들의 은혜를 받은 사 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은혜 의 복음은 이웃들에게 전달됩니다. 나는 이것을 숨길 수가 없어요. 종 종 교회나오는 어떤 사람들이 공공 칠 크리스챤이 되는 것을 기쁨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나는 예 수 믿는 것을 숨기겠다'
제가 실제로 어떤 회사의 간부 되시는 분을 한분 만났는데 그분 만나자 마자 그분 회사에 우리 교 인이 다니는 것이 생각이 났습니 다. 그래서
"아무개 아십니까?"
물 어보니까
"알죠"
그래요.
"저희 교 회에 나오십니다"
그랬더니 이분이 갑자기 정색을 하시면서
"아. 그분 도 크리스챤입니까?"
그래요.
제가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몰 라요. 땅으로 기어들어가고 싶었습 니다. 숨기고 있었던 거예요.
오늘날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 습니다. 아니, 주님과 내가 상관없 다면 상관없는대로 그대로 계십시 요. 그러나 내가 주의 은혜를 체험 한 사람, 주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 구원을 체험한 사람이라면 우리는 나타날 수 밖에 없어요. 그것이 정 상이예요. 그리고 그런 방법을 통 해서 복음은 전파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게 어떤 일을 행하셨습니 다. 주님이 내게 구원이셨습니다. 주님이 내게 생명이셨습니다. 주님 이 내게 평안이셨습니다.주님이 나 의 삶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사실 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 그것이 전 도예요. 사실 아닌 것을 말하려고 하지 마십시요. 그것은 허구입니다. 그것은 소설이예요. 그러나 사실 그대로 말하는 것. 그것이 간증이 고 그것이 전도인 것입니다. 자신 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이 내게 어떤 일을 하셨는지 이 절 망과 이 소외속에 있었던 내 인생 을 바꾸어 주신 주님. 그리고 이토 록 충만함과 이토록 삶의 감격을 주신 주님. 그 주님을 나타내십시 요. 이것이 크리스챤의 새로운 삶 의 출발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 다. 이 공개적인 첫번째 고백의 사 건. 그것이 바로 침례의 사건이예 요. 혹은 세례. Baptist. 침례를 받 는다. 나는 예수 믿고 새로운 사람 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새 로운 인간으로 만드셨습니다. 그것 을 고백하는 시작이예요. 그러나 그 침례라는 의식은 단 한번이지만 그러나 우리의 삶의 장에서 신앙의 고백은 날마다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직장에서 우리의 가정에서 우리의 거리에서 주께서 나를 고치 셨다구요. 예수가 나에게 평안을 주셨다구요. 주님이 나에게 새로운 삶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 삶을 이 여인에게 요구하신 것입니 다. 그러면서 마지막 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 34절 다같이 읽어보겠습니 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 으니 .."
딸아..이렇게 부르십니다. 딸아..사랑하는 내 딸아.. 이 여인은 예수님을 신뢰하고 먼저 건강을 얻 었습니다. 저는 이 여인이 병의 치 유를 위해서만 예수님을 믿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해서 내 삶의 근원이신 예 수님 믿음은 이 여인과 예수님을 연결시켰고 그리고 주님과의 빼앗 길 수 없는 흔들릴 수 없는 관계속 에 들어갔고 그녀는 하나님의 딸이 되는 놀라운 경험을 시작합니다. 내 딸아..주님의 부르심은 얼마나 감격이었을까요?
"내 딸아..네 믿음 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평안히 갈 지어다"
원문에 보시면 평안히 가 라는 말이
"평안을 향해 가라.."
이 렇게 되어 있어요. 직설적으로 번 역했으면 더 좋았겠다. 저는 이렇 게 생각이 들었어요. 더 아름다운 말이예요. 너는 평안의 땅을 향해 가라. 네 인생은 새로워 졌느니라. 이제 평안을 향해 갈지어다. 약속 의 땅으로 새로운 삶을 향해 새로 운 미래를 향해 갈지어다.
"내 딸 아 평안을 향해 가라"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저와 여 러분은 그 평안의 땅을 향해 가고 있습니까? 약속의 땅을 향해 가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내 교 회생활. 그많은 연륜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치료의 체험이 변화의 체험 이 없었다면 왜 그럴까요? 어떤 사 람보면 교회와서 설교한번 듣고 인 생이 바뀌어요. 저 그런 사람 여럿 봤어요.
딱 한번 설교듣고 인생이 완전 히 바뀌어요.
근데 어떤 사람은 제 명설교를 듣고도 10년 20년 역사를 자랑하는 교인이 되고도 설교를 골백번 듣고 도 절대로 안바뀌어요.
그리고 어제도 오늘이나 변함없 이 그대로 앉아있어요. 그 차이가 어디에 있을까요? 한사람은 사람은 설교 딱 한번만 듣고도 바뀌어요. 그것은 믿음의 차이예요. 저 말씀 속에 내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생명 이 있다.
하나님 어떤 분이신가? 이 말씀 속에게 내게 오실 주님의 말씀을 기다린다.
주님.. 오늘 이말씀으로 저를 바 꾸셔야 합니다. 주님. 제가 이 말씀 을 기다립니다.그것은 주님의 말씀 입니다. 제가 주의 진리를 기다립 니다. 이 목마른 심정으로 주님께 대한 기대를 가지고 이 말씀을 받 아들일 때 믿음을 통해 그 인생이 새로워질 줄 믿습니다. 믿음으로 말씀을 받기 때문에 그래요.
저는 찬송부르다가 인생이 바뀌 는 사람을 봤습니다. 찬송부르다가. 그럴수 있을까요? 찬양하다가 인생 이 바뀌어요.

"목사님. 저 오늘 찬양하다 인 생이 바뀌었어요."
제가 이런 간증 들었어요. 찬양 그 자체가 바꾼 것 은 아닐 것입니다. 찬양의 가사, 그 찬양부르다가 그 가사속에서 주님 을 만난 것이예요. 그는 믿음으로 찬양을 부른 것입니다. 그 찬양의 가사가 나의 신앙의 고백이 되었고 내 신앙의 구함이 되었습니다. 주 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갑자기 그 찬양속에 임하시는 주님을 경험하 고 눈물이 흘러요.. 어떤 사람은 ' 어? 오늘은 이상한 노래 나왔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이것은 모 르는 건데..잘 안불러진다..'
그리고 가요.그냥, 찬양이 아니 고 노래예요. 찬양과 노래의 차이 가 어디에 있어요? 믿음으로 드리 는 것.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그리 고 하나님께 내 기쁨을 드리는 것. 믿음으로 연결된 찬양. 그 찬양은 인생을 바꿀 줄로 믿습니다. 노래 아무리 불러도 인생 안바뀌어요. 감상은 있지만 변화는 없습니다.
전. 기도하다 인생바뀌는 사람 봤어요. 기도하다가 갑자기 인생이 완전히 달라져요. 기도하다. 기도하 다 은혜를 받습니다. 왜그럴까요? 믿음으로 기도하기 때문에 그래요. 믿음으로 기도하기 때문에.

"주님..제가 주님앞에 나옵니다. 주님.. 제가 제 문제를 내어놓습니 다. 주님만이 나를 아시죠? 주님만 이 내 기도를 들으시지요? 주님만 이 응답이시지요? 주님. 나의 최후 의 희망, 나의 마지막 소망되신 주 님.저는 주님만을 신뢰해요. 기도하 는 순간 성령이 임하시고 주께서 내 모든 짐을 담당하시고 나를 바 꾸시는 은혜를 체험합니다. 믿음의 기도는 내 인생을 바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온지 세월이 오래되니까 기도의 형식을 배웁니 다. 머리숙일줄 압니다. 손도 모을 줄 압니다. 경건한 모습을 나타낼 줄 압니다. 그것은 형식입니다. 형 식의 기도. 종교에 속한 기도.
그 기도는 인생을 바꿀 수 없어 요. 믿음의 기도는 우리를 바꿀 것 입니다.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믿음으로 예배하십니까? 믿음으로 말씀을 들으십니까? 믿음으로 기도 하십니까? 믿음으로 찬양하십니 까? 내 인생의 절망과 그리고 소외 와 고독을 끌어안고 그러나 주님앞 에 오늘 나아오십시요.
오.주님. 제가 할 수 있는 방법 을 다했지만 그것이 내 삶을 바꿀 수 없었고 내 삶은 여전히 고통이 었습니다.그러나 오늘 주님 앞에 나아옵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집니다. 단 한 번의 touch도 단 한번의 만짐도. 내가 믿음으로 주님을 만지는 그 순간. 바로 그 순간. 그 순간. 주님 안에 있던 능력이 나에게 흘러들어 올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이 능 력이 흘러 나온다는 것은 주님편에 서 보면 능력을 비워내는 것이예 요. 여기 십자가가 있어요. 주님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 를 가난하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그가 스스로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이 십자 가의 고통과 이 아픔을 전제로 주 께선 오늘 나를 치유하기 위해 기 다리십니다.
이 사랑하는 주님앞에 내 모든 고통을 끌어안고 함께 고통하시는 주님 앞에 오늘 가스펠송의 가사처 럼 고통가운데 계신 주님..왜 이 고 백이 나왔을까요?
그는 우리의 고통 때문에 함께 아파하십니다. 자식이 고통스러워 할 때 부모도 함께 고통스러워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고통 때 문에 함께 고통하시며 십자가를 짊 어지신 주님. 오늘 고통중에 있는 인생을 향해서 부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나는 내 인생의 절망 과 그리고 불안과 이 고독을 끌어 안고 오늘 사랑하는 주님앞에 나와 오직 그분이 내 희망일 수 있고 오 직 그분이 내 사랑일 수 있고 오 직 그분이 내 삶의 새로운 날을 줄 수가 있음을 믿고 주앞에 나와 그 분을 만지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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