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의 원인 (막 9: 25-29)
임 영 수 목사
오늘의 본문에 나타나 있는 인간의 욕구와 제자들의 실패에 대한 일화는 예수가 없는 세상에서의 삶의 현실이 어떠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공생애 활동을 하던 시대에 말을 못하게 하는 귀신들린 아이를 가진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가 모두 몇 명의 자식들과 함께 살았는지 알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에게 있는 한 아이가 온전치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아이는 아버지에게 언제나 무거운 짐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에게 더욱더 짐스럽게 느껴진 것은 아들이 그렇게 된 것이 그의 부모나 자기 자신의 죄 때문일 수도 있다는 죄책감이 그를 더 괴롭히기도 하였습니다.
때때로 아이가 경련을 일으키며 발작을 할 때 그 모습을 지켜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몹시 고통스러웠습니다. 아버지는 오로지 어떤 방법으로라도 아이를 온전하게 치료해보고자 하는 일념뿐이였습니다.
어느날 아버지는 아이를 데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있는 곳을 찾아갔습니다.
마침 그 때 예수님은 몇 명의 제자들과 함께 따로 높은 산으로 올라 가시고 제자들만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어떻게 누구의 소개로 그곳에 왔는지 자세히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아버지의 마음에는 그곳에 가면 반드시 고쳐 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와보니 예수님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아홉 명만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이를 제자들에게로 데리고 와서 고쳐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하였는지는 모르지만 귀신들린 아이를 고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믿음과 희망은 무너졌습니다.
마침 그때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시고 계셨습니다.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이 다른 아홉 명의 제자들에게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제자들의 둘레에 모여있는 많은 무리들과 그들과 논쟁하고 있는 서기관들을 보았습니다. 논쟁의 주제가 무엇인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을 보자마자 크게 놀라 달려와 그에게 문안하였습니다. 그들이 놀란 것은 예수님의 변화의 모습에서 나오는 후광 때문이 아니라 예수께서 예기치 않게 곤경에 처한 제자들에게로 적절한 때에 오셨기 때문이였습니다.
예수께서 논쟁이 "무엇에 대한 것이였냐"고 아홉 명의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때 귀신들인 아이의 아버지였던 군중 속의 한 사람이 그 상황을 예수께 설명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이러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선생이라고 부르면서 자기에게는 귀신 들린 아이가 있는데, 귀신은 간질병의 징후인 격렬한 발작으로 종종 그를 경련을 일으키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아이를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귀신을 내쫓아 달라고 데리고 왔으나 그들이 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군중들과 제자들에게 깊은 탄식으로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라고 하시면서 "아이를 그에게로 데려오라" 명하셨습니다. 귀신의 영이 예수님을 보자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여 아무도 도울 수 없는 지경에 처하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그 아버지에게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애정어린 질문에 아버지는 자기 아이가 어릴 때부터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아이의 상태는 오래 계속되어온 것이었고 비관적인 것이였습니다.
아버지는 예수께 반신반의 하면서 "당신이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자기와 아이를 불쌍히 여겨서 도와달라고 "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서도 아버지의 믿음이 제자들로 인해 흔들렸습니다. 예수께서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고 아버지의 의심하는 말을 받아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아이를 고치는 예수님의 능력이 아니라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아버지의 믿음의 능력이라는 것을 아이를 고쳐주심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 아버지는 즉각적으로 "나는 믿나이다"라고 자신의 믿음을 선언하고 또한 자기의 약점을 인정하면서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흔들렸던 아버지의 믿음은 예수님을 대면하고 나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갖게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호기심 많은 군중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시고 악한 영에게 "그 아이에게서 나오라 그리고 다시는 그에게 들어가지 말라"고 꾸짖었습니다. 귀신들은 소리지르며 마지막으로 심한 경련을 일으키면서 나갔습니다. 그 아이는 탈진하여 마치 죽은 송장처럼 힘없이 누워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를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집에 들어간 후에 제자들은 개인적으로 왜 자기들은 귀신을 쫓아 낼 수 없었는지를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종류는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나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하였다는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들은 과거의 성공을 믿었다가 실패하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이 이야기에는 우리에게 주는 깊은 교훈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귀한 선물을 주십니다. 그 때 그것을 주신 분의 의도대로 살리느냐, 죽이느냐? 하는 문제는 그것을 주신 분과 지속적인 교제를 유지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지속적인 교제를 유지하지 못할 때 우리가 그 분으로부터 선물과 함께 받은 아주 귀하고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1. 우리는 영적 생동감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가 받은 선물을 값진 것, 위대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살아있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영적 능력을 잃어버리게 될 때 그것은 단지 인간적인 행동에 불과 하거나 종교적인 형식에 불과하고 하나님이 받으시는 산 제물은 되지 못합니다.
노래를 잘 부를 수 있는 선물을 받은 사람이 영적 생동감을 잃어버릴 때 기교는 나타낼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 노래는 부를 수 없습니다. 그의 노래는 단지 소리에 불과 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입술의 열매는 되지 못합니다.
2. 우리는 겸손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가 겸손을 잃어버리게 될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어져야 할 것들이 우리 자신을 위해 사용되어지게 됩니다. 거기에는 덕이나 평화가 없어지고 분열과 경쟁심만이 있게 됩니다. 그때 이미 그는 사탄의 종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경쟁심과 인기에 노예가 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행하게 됩니다.
3. 우리는 평강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는 섬김의 자리로 부름받고 있습니다. 그 섬김의 자리에서 평강을 잃어 버리게 될 때 다른 사람을 바르게 섬길 수 없습니다. 섬기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소중한 것들은 따뜻함, 친절, 부드러움입니다. 그런데 평강을 잃어버리게 될 때 매우 불안정하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안정과 희망을 주기 보다는 상처를 주기 쉽습니다.
4. 교제가 끊겨진 가운데서 영적 성숙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타성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타성, 진부함은 하나님의 희망 가운데 있는 우리 자신의 미래를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희망의 부르심 가운데 있습니다. 그 희망의 부르심에는 현재의 내가 아닌 새로운 나로 부르심이 있습니다. 그 길로 나아가는 데는 하나님과 교제가운데서 지속적인 응답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중요한 사역의 책임을 맡고 있으면서 영적 성숙이 중단된 사람을 많이 보게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신의 미래를 포기한 사람과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신령한 영향력을 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의 법정이나 경찰서, 행정관서, 교육기관에 가서 해결할 수 없는 생의 문제를 가지고 교회로 찾아옵니다. 그들은 교회에서 그 무엇인가 해답을 기대합니다. 그 때 교회로부터 아무런 희망적인 해답을 얻지 못할 때 그들은 교회에 대해 깊히 실망하게 됩니다. 교회가 세상에 대해 줄 수 있는 것은 물질이 전의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는 당신의 문제에 해답을 줄 수는 없지만 우리가 믿는 창조주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이라는 확신과 믿음을 갖게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 어느날 오후 세시 기도를 하는 시간이 되어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인 사람을 다른 사람들이 데리고 왔습니다. 그들은 성전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게 하려고 그 앉은뱅이를 날마다 "아름다운 문"이라는 성전 문 곁에 앉혀 놓았습니다.
그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보고 구걸을 하였습니다. 그 앉은뱅이는 무엇을 얻으려고 두 사람을 빤히 쳐다 보았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말하기를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는 즉시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 벌떡 일어나서 걸었습니다. 그는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교회는 앉은뱅이와 같이 자신의 생의 문제에 짓눌려 걷지 못하는 사람들을 교회에 끓어모아 먹여 살리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 급식소가 아닙니다. 교회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어나 자신의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게 하는 곳입니다.
교회의 생명력은 거기에 있습니다.
여로분은 삼손을 잘 아십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아름다운 용모와 힘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 있지 않게 될 때 그는 힘도 잃어버리게 되었고, 나중에 처참한 자리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삼손과 함께 했던 하나님의 영이 떠날 때 그는 완전히 무기력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실패의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을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원인은 나에게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고 살아가는 나에게 그 원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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