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가 건너야 할 세 강 수4:1
이한규 목사
이스라엘 사람을 ‘히브리인’이라고 하는데 "강을 건넌 사람"이란 뜻이 있다.
아브라함이 유프라테스 강을 건넘으로 말미암아 그 후손에게 붙여진 별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다음과 같이 세 번 강을 건넜습니다.
① 아브라함이 건넜던 유프라테스 강
② 애굽에서 나올 때 홍해라는 강
③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 요단강
①아브라함이 건넜던 ‘유프라테스’ 강은 <믿음>의 강이라고 할 수 있고,
②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건넜던 ‘홍해’ 강은 <세례>의 강입니다.
③마지막으로 ‘요단’ 강은 <죽음>을 뜻합니다. 자아와 육신과 정욕의 죽음입니다.
이 요단강을 건너야 풍성한 축복을 누립니다.
세례의 강을 건넜다고 신앙의 어떤 경지에 도달한 것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세례는 소중한 의식이지만 나의 신앙을 공포하는 하나의 외적 의식입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끼리 부부가 되기 위해서 결혼식을 올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결혼식을 올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부부간의 연합된 삶입니다.
마찬가지로 세례 받은 사람들에게도 자기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고
이제는 내 안에 주님이 사신다는 그러한 주님과의 연합이 있기를 힘써야 합니다.
<주님과의 영적인 온전한 연합을 요단강을 건너는 것으로 상징화시켜 표현합니다>
세례 받은 자는 내 안에 주님이 살고, 나는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 산다는(갈 2:20)
십자가에 못 박힌 자, 즉 자아의 죽음의 요단강을 건넌 자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홍해를 건널 때는 장정 60만 명이 건넜습니다.
그러나 요단 강은 장정 중에서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건넜습니다.
왜입니까? 요단강은 죽음의 강이기 때문입니다.
요단강은 자아의 죽음의 강입니다. 보통 사람은 못 건너가는 강입니다.
육신적으로 말하면 죽어야 가는 강이요, 영적으로 말하면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고 자기 죽음을 가지고 건너가는 강입니다.
이 요단강을 건너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갑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는 참으로 고통스런 존재였습니다.
저들이 하나님의 만나는 먹었으나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생수를 마셨으나 갈증에서 허덕여야 했습니다. 겨우 생명을 유지할 정도였습니다.
저들의 옷이 떨어지지 아니했으나 좋은 옷은 아니었습니다.
겨우 겨우 연명하는 생활이었습니다.
영적으로 살펴보면 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고통했습니까?
요단강은 (자아와 육신의) 죽음으로 건너가는 강인데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광야의 신자와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10년 전에 세례의 강을 건너간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렸을 때, 태중에서 어머니와 함께 세례의 강을 건넜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은혜의 경지에 들어가지 못하고 메마른 생활을 합니다.
사실상 우리의 목표는 홍해를 건너자는 것이 아닙니다.
빨리 요단강을 건너는 것입니다.
누가 요단강을 건널 수 있습니까?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는 성결한 자입니다.
또한 자기를 포기하는 자입니다. 육신이 깨어진 자입니다.
<요단강은 (제사장들이) 발바닥으로 건너갔습니다.>
홍해는 신을 신고 갔으나, 요단강은 발바닥으로 건너가는 강입니다.
애굽에서 신고 온 것은 다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요단을 건넙니다.
신을 벗는다는 것은 자기를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모세의 신이 벗겨지기까지 40년이 걸렸습니다.
자기를 포기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사용할 수도 없고 안식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그토록 탄식하고 광야를 벗어나지 못한 것은
자기를 포기하려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정과 욕심과 자기 판단을 버리고 가나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외적인 표식만을 붙들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오직 표식일 뿐입니다.
예수 안에서 나 자신은 죽고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역사가 없으면
우리에게는 진정한 안식이 없고 신앙이 주는 오묘한 기쁨을 알 수 없습니다.
요단강을 건너야 합니다! 그러나 요단강은 죽음의 강임을 잊지 맙시다.
가나안을 얻기를 원하면 항상 고백하십시오. "나는 죽어야 한다."
바울처럼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백을 드리면서 가나안을 누리게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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