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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백성을 위로하라
본 문 : 이사야 40장 1절 ∼ 8절
1978년 로마교황 요한 바오로1세가 서거하셨습니다. 취임한지 겨우 33일만의 죽음이었습니다. 온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장례절차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교황이 이 짧은 임기 동안에 특별히 임종직전에 남긴 일기문이 공개되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자들이여, 가난한 자들을 기억해 주십시오. 직장인들이여, 무직자들을 기억해주십시오. 건강한 자들이여, 병든 자를 기억해주십시오. 남을 위해서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라고 하는 간단한 기록입니다.
이 일기문이 온 세계에 공개되게 될 때에 제일 먼저 충격을 받은 것은 노벨평화상 위원회였습니다. 저들은 곧 반응을 나타내서 깊이 심사숙고한 끝에 인도의 빈민굴에서 한평생을 바친 테레사 수녀에게 평화상을 수여하게 되었습니다. 본래는 중동문제의 해결을 위해 수고한 카터 대통령에게 주기로 내정되어 있던 것입니다. 생각을 돌려서 테레사 수녀에게 평화상을 수여한 그러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테레사 수녀의 기록을 보십시다. "가장 큰 질병은 결핵이나 문둥병이 아닙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아무도 위로하지 않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이것이 가장 무서운 질병입니다. 세상에는 빵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도 많지만 작은 사랑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해마다 성탄을 맞습니다. 성탄의 의미를 여러분은 실제적으로 어떻게 마음에 되새기고 있습니까? 성탄을 맞는다면 성탄의 의미를 내 마음에 기리고 그 성탄의 의미로 향해서 내 마음과 인격과 생활이 변화될 때에 거기서 성탄의 실존적 의미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 외칩니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 여러분 어떻게 위로하며, 어떻게 위로 받을 수 있는 겁니까. 그것이 빵입니까? 그것이 직장입니까? 아니면 건강입니까? 무엇으로 위로할 수 있으며, 무엇을 통해 위로 받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까? 요새 저는 많은 생각을 해봅니다. 이 나라에 실업자도 있고 기술자도 있고 또 그리고 정치가도 있고 학자도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도자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소망을 주고 용기를 주고 신바람을 넣어주고 그리고 삶의 의미를 찾아주는 지도자가 없습니다. 기술자는 넘쳐흐릅니다. 공부 많이 한 사람들 많습니다. 소위 정치가들이라는 사람도 만원인데 그런데 정말 우리 국민 앞에 참으로 용기와 위로를 주고 소망을 주는 지도자가 보이질 않습니다. 문제는 소망의 문제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Messianic Expectation, 메시아적 대망입니다. 메시아의 나라, 메시아의 세대가 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 그 소원이 이루어지리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미래의 문제요 메시지의 문제요 복음의 문제입니다. 메시아의 영광, 메시아의 세대를 간절히 간절히 바라고 오늘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목말라 기다립니다. 우리는 과거와 현재로부터 논리적으로 추리하여 미래를 생각해 봅니다. 이러한 것을 소위 Futurology 라고 합니다. 미래학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과 관계없이 아주 비약을 해서 결정적 미래를 생각하고 그 미래로부터 현재를 생각하는 것을 Eschatology, 종말론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항상 종말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종말론적 신앙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종말론적 신앙의 핵심은 오늘 본문에 보는 대로 복음이요, 복음의 핵심은 사죄입니다. 죄사함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사랑 중에 가장 큰 사랑은 용서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말합니다. 복역의 때가 끝났다. 하나님의 진노가 여기서 멈추고 은총의 해, 은혜의 해가 앞에 온다고 외쳐라! 하고 말씀합니다.
결정적 미래, 밝은 소망의 메시아의 세대를 외치라고 말씀합니다. 그건 바로 용서를 의미합니다. 메시아의 임함은 바로 용서를 말합니다. 구제 받을 수 없는 용서. 우리는 많은 문제를 놓고 잘했느냐 못했느냐 어디까지 사실이냐 어지간히 그렇게 비판을 해봅니다마는 이 시시비비를 통해서는 절대로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과거를 청산해야 미래가 보인다고 하나 과거 청산할 길이 없으니 미래도 안보입니다. 언제까지 이 시비 속에 이 절망 속에 살아가야 합니까. 우리는 저 미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죄의 은총입니다. 율법을 초월하여 죄인을 사랑함으로만이 다시 소생하는 길은 있는 것입니다.
헤밍웨이의 단편 모음집 중에 이런 짤막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스페인에 어느 엄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 아들과 건건이 사사에서 충돌이 됩니다. 아버지의 시각으로 볼 때에 그 아들이 하는 일은 못마땅합니다. 아버지가 볼 때는 그건 말도 안되고 사람도 아닙니다. 계속 충돌하는 나머지 이 아들은 집을 나가 버립니다. 가출을 해서 몇 해 동안 방황을 합니다. 아들을 내보내고 나서 아버지는 괴롭습니다. 그래서 항상 가슴 아파합니다. 잘못이 있어서, 내보낼 수밖에 없어서, 사람답지 못해서, 소망도 없어서 내보냈지만 아들을 내보낸 아버지는 여전히 괴롭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아들을 용서하지 못한 아버지는 절대로 편안할 수가 없었어요. 마침내 용서하기로 굳게 결심하고 신문광고를 냈습니다. 짤막하게 "파코", 그 아들의 이름이 파코입니다. "파코! 화요일 정오 몬타나 호텔에서 만나자. 다 용서했다. 아빠." 신문광고를 냈습니다. 예정한 시간, 정오에 호텔에 가보았더니 무려 800명이나 되는 젊은이들이 모였더랍니다. 파코라는 이름이 아주 흔한 이름이라서 파코라는 이름으로 집나간 아이들이 이렇게 많다. 800명이 모였더라 그런 얘기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아빠는 너를 용서했다.' 여기 무슨 조건이 있습니까? 여기 무슨 시비가 있습니까? 무슨 이유가 있고.... 아무 변론이 없습니다. 거저 용서했다. 내 사랑으로 너를 용서한다. 내가 너를 다 용서했다. 돌아오라 이거죠. 이것이 복음입니다. 문제는 이 복음에 대한 예비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 복음을 맞아들이는 것, 그것은 믿음입니다. 여러분, 이 파코라는 청년이 아버지의 이 광고문을 보면서 '아버지 웃기누만' 이렇게 생각했다면 어떻겠습니까? 이 아버지의 말은 믿을 수가 없어! 그랬다면 어떻겠습니까? 결국은 믿음이올시다. 그도 함께 괴로워하던 중에 아버지가 다 용서했다는 말 한마디를 전적으로 믿고 감격하여 가슴을 활짝 열고 자기가 잘했느니 못했느니, 뭐 얼마는 잘하고 얼마는 못했느니, 알 바가 아니요. 다 지워버리고 그대로 염치없이 아버지께 돌아오고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것이요. 그것이 믿음이요 그것이 크리스마스의 의미올시다. 우리는 탕자 비유를 이제 늘 봅니다. 탕자가 집을 나갔다가 돌아옵니다. 이 돌아오는 일은 중요한 신앙이올시다. 그는 미래를 생각했습니다. 그는 미래에 대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아버지의 넓은 마음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찾아왔습니다. 아버지는 그의 과거를 묻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스스로 생각하면서 나는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아들의 자격이 없습니다. 아들이라고 부름받을 수도 없습니다. 머슴꾼의 하나로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당연하지요! 머슴꾼의 하나만한 자격도 없지요. 그러나 아버지는 이 모든 것을 불구합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 죽었다 살았고 잃었다 얻었노라. 잔치를 하라!" 잔치를 배설합니다. 아들은 체면이 없습니다. 어떻게 이 잔치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염치가 없습니다. 뻔뻔합니다. 그래도 아버지의 기뻐하는 마음을 절대로 그렇게 무시할 수가 없고, 아버지의 마음을 다시 섭섭하게 할 수가 없어서 그는 부끄럽지마는 의젓하게, 형이 질투하는 것도 알면서 그 잔치에 앉아서 잔치를 받아먹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가끔 똑똑한 분들이 대개 이렇게 말하데요. "그 예수 믿는 사람들은 좀 뻔뻔하고 체면이 없어요" 그래요. "왜요?" 그러니깐 "아니 죄지었다고 회개하고 또 죄짓고, 회개하고 또 죄짓고, 다신 안그러겠다고 또 하고.... 아 그거 평생 그러구 있으니 그 사람들 그 뻔뻔한 거 아니요."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뻔뻔한 사람입니다. 제가 어찌 하나님의 딸이고 제가 어찌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이요. 제가 어찌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그런 사람이라는 말이요.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랑을 믿습니다.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나 하나만이 당신의 사랑하는 자인 것처럼 우리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여기에 약속이 있습니다. 여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대로 그 엄청난 사랑을 영접하되 자 보세요.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내가 너를 용서하노라. 내가 너를 용서한 증거로 네 죄를 내가 대신 지노라." 그래서 오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이죠. 이제 예비하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산은 낮아져야 되겠다고, 골짜기는 높아져야 되겠다고, 첩경을 곧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오시는 예수, 그 복음을 영접하려면 산이 낮아져야 됩니다. 바리새주의적인 교만, 자기 의를 의지하는 교만, 잘났다고 하는 교만, 뭔가 자기가 이룬 것같이 생각하는 교만, 다 낮아져야 됩니다. 낮아지고 또 한번 또 한번, 발바닥이 땅에 닿을 때까지 낮아져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는 오시는 주님을 바로 영접할 수가 없고 내가 네 죄를 사했느니라 하는 이 복음을 내가 수용할 수가 없는 것이에요.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데 있어서는 겸손해야 되고 끝까지 겸손해야 됩니다. 깨끗하게 마음을 비워야 됩니다. 그리고 골짜기는 높아져야 됩니다. 마치 옛날 그 세리와 같고 창기와 같은 사람들, 천대받던 사람들 그 신분을 높여야겠습니다. 나는 소망이 없다 생각하지만 주님이 나를 사랑하면 소망이 있습니다. 그가 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면 나는 아들입니다. 그가 나를 하나님의 사랑하는 딸이라고 부르면 나는 딸입니다. 누가 뭐래도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확실한 주의 자녀입니다. 그런고로 내 천한 신분, 더러워진 과거, 씻을 수 없는 더러운 추한 것들 툭툭 털어버리고 골짜기는 높아져야 됩니다. 주님과 만날 수 있을 만큼 자기자신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랑 받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나가서 첩경을 곧게 하라 그랬어요. 굽어진 마음, 갈고리 같은 마음, 편견, 오해, 이런 이야기 다 지워버리고 순진한 마음, 깨끗하게 주를 영접할 수 있는 사랑을 영접하는 자의 수용자세가 분명해야 됩니다. Acceptance가 필요합니다. 어느 중년남자가 일주일 동안 해외 여행을 갔습니다. 해외 출장을 갔는데 갈 때 생각은 아침저녁으로 내가 전화를 걸어서 마누라한테 문안을 해야겠다 생각을 하긴 했는데 가서 처음에 도착하자마자 '잘 왔습니다' 한마디 해놓고는 그만 이래저래 그 출장간 일이 바쁜 일이라서 그만 전화를 한번도 못 걸었어요. 아마 저 같았던가 봐요 저는 뭐 전화 잘 안 거니깐. 그런데 이러다가 내일 돌아가게 되었어요. 일주일이 지나니까 좀 미안한 마음도 있고 해서 전화기를 손에 들고 전화를 걸면서 생각하기를 '당신이 보고 싶었소. 여보,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렇게 말하리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수화기를 들었는데 수화기를 딱 들고는 하는 말이 "집에 아무 일도 없어? 애들은 다 잘 있소? 강아지도 잘 있고? 난초에 물은 주었소?" 여기까지 얘기를 했어요. 잠시 후에 아내는 "당신, 해도 너무합니다!" 울먹울먹하면서 딸까닥 전화를 끊었어요. 자 여러분, 이 마누라가 듣고 싶은 말이 뭡니까? 우리가 뭐 강아지까지 챙기면서 제 마누라는 챙기지 않았대요. 뭐 뭐 다 챙기고 중요한 사랑을 잃어버렸어요. 이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어요. 우리가 왜 힘듭니까? 왜 이렇게 어려운 겁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렸어요. 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할 거 같지 않아. 사랑 받을만한 존재도 못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참사랑은 모든 율법적 비판을 초월하는 것이에요. 이유 없어요. 절대적으로 사랑하면 우리는 절대적으로 받아 들여야 되요. 무조건적으로 사랑한다면 무조건적으로 수용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탄의 의미입니다. 참 위로는 오로지 죄 사함에 있고 참사랑에 있고 그리고 만나 주심에 있습니다. 그가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체적으로 만나주십니다. 대신 십자가를 지십니다. 이제 이 위로를 받아들이는 길은 자기 자신을 완전히 부정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새로운 소망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하겠습니다. 해마다 성탄을 지키지만 금년은 새로운 의미의 성탄이 되어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오늘도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사랑을 확정해 주시건만 어느새 우리는 이 사랑을 잊어버리고 살 때가 많고 스스로 사는 것처럼 교만하기도 하고 또 아무 소망도 없는 것처럼 사랑 받지 못하고 저주받은 자인 것처럼 절망할 때도 있습니다. 주여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참 메시아로 오시는 주님을 새로운 마음으로 영접하게 하시고 그 크고 놀라운 뜻이 우리 인격에 우리 마음에 우리 생활에 그대로 다시 실현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메시아로 오신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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