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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연구 총정리〓/바울 신학(김세윤)

바울신학 제8강(김세윤 교수)

by 【고동엽】 2021. 11. 8.

바울신학 제8강

 

지난 시간에 아마 갈1:11,12 그리고 15,16 등에서 바울이 복음을 계시로 받았다는것을 주장하는 것과 고전 15;1-8까지에서 바울이 자기가 복음을자기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로부터 전승으로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을 우리가 대조하면서 그것이 어떻게 각각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지난번에 설명을 한 것 같다 .

 

그래서 복음이 계시이면서 동시에 전승이라는 것. 예수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한 종말의 구원사건이라는 것이 복음인데 이것은 계시로 알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 구원의 사건이 역사적 예수,나사렛 삶과 가르침과 죽음과 부활이나는 역사적인 사건들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 복음은 동시에 전승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나사렛 예수의 사건(삶과 죽음과 부활)이 그냥 평범한 인간의 생애가 아니고 이것이 우리를 위한 구원의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만 확인이 되는것이다. 그래서 이 복음은 계시이면서 동시에 전승이라는 그런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는 왜 이 복음의 계시성을 강조하느냐면 자기가 받은 복음은 곧 하나님의 은혜로만 우리가 의롭게 되고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을 믿음으로만 우리가 의롭게 된다는 자기 복음이 갈라디아 교회에서 그 교회에 침투한 유대주의자들에 의해서 공격을 받기 때문에 바울이 자기가 예루살렘 사도로부터 받은 복음을 인간들에 의해 더 쉽게 받아들여지도록 하기 위해서 왜곡한 것이 아니다. 자기는 원래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의 계시로 이 복음 곧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전파한 복음, 지그 유대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와서 공격하는 이 복음을 자기가 사도로 부름받은 때에 계시받은 복음이다. 이렇게 주장하기 위해서 자기의 복음의 계시성을 강조한 것이다. 반면에 고전 15장에서는 바울의 주안점이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했다는 사실 그것이 복음의 핵심인데 이 핵심을 온 세계 교회가 같이 고백하는 것이고 이 신앙고백 위에서 우리들이 다 장래의 부활을 소망할 수 있는데 이 지금 고린도의 사람들이 부활을 부인함으로 바울이 그들에게 전세계 교회의 공통된 신앙고백, 또 공통된 복은 자기가 고린도인들에게 선포한 복음 자기가 먼저 사도된 자들로부터 전승받은 복음을 상기시킴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인할려고 부활의 신앙을 끝까지 겨지해야 했다. 그것에 근거해서 우리가 우리 개인들의 장래의 부활을 소망할 수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바울이 전승된 복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니까 바울은 한편으로는 복음을 전승받고 계시받았다. 곧 계시 받았다는 말은 예수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사건이다. 그를 통해서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계시받았다. 그런데 바로 그와 같은 사실(예수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종말의 구원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우리를 위한 구원자다. 예수의 사건은 우리를 위한 구원의 사건이다)등을 그런 뜻을 나타내는 신앙고백 이게 전승이다. 이 전승으로 또 바울에게 주어졌다. 그게 어떻게 되었느냐면? 예수가 그리스도이다. 예수가 주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등을 전승되었고 또 그가 우리를 위해서 죽고 부활했다 등으로 전승되었고 또 예수가 우리를 위해서 죽고 부활했다 등으로 초대교회가 이렇게 신앙고백을 하고 이러한 신앙고백을 선포의 형식(Kerygma)으로 삼았다.

 

복음 ??계시

??전승-신앙고백-예수=그리스도 ??

주 ?⇨바울신학

하나님의 아들 ?

죽고 부활함 ??

 

그래서 이런 것들이 복음의 구체적인 표현의 형식이다. 복음에 에수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종말의 구원의 사건이다는 이 복음의 구체적인 표현형식이 이런 식으로 초대교회에서 되었다. 바울은 자기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종말의 구원의 사건이라는 계시를 받고 그 복음을 초대 교회에서 이미 성립된 복음의 표현형식을 전승받아서 그것을 빌려서 그 형식들로 표현한 것이다. 다만 바울은 이것을 그냥 전승받아서 그대로 쓰기만 한게 아니고 자기의 신학적인 통찰력 특히 구약과 또 자기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 이런 것의 빝 아래 더욱 풍부하게 그 의미를 함축시켜 가지고 이 초대교회가 이렇게 예수가 그리스도,예수가 주,예수가 하나님의 아드, 죽고 부활함 등으로 신앙고백할 때 또는 그런 형식으로 복음을 선포할 때에 뜻했던 것보다 더 깊이 그리고 더 큰 의미를 부과해서 다시 말해서 더 발전시켜서 이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울신학이다. 바울은 이러한 과정중에서 초대교회가 미처 쓰지 않는 복음선포 형식도 스스로 개발하게 되었다. 그래서 일종의 기독론적인 표현형식이 예수가 하나님이 형상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예수가 마지막 아담이다. 이런 것들은 바울 신학에서만 나오는 예수에 대한 선포형식이다. 그러니까 바울은 일부 초대교회(자기보다 먼저 그리스도인 된 사람들)의 복음의 표현형식을 빌려서 그것을 더 풍부하게 해서 예수를 하나님의 종말의 구원의 사건이다고 선포하기도 하고 일부 자기가 직접 새로운 신학언어들 기독론적인 칭호들을 개발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종말의 구원 사건됨을 선포한 것읻. 이런 것들이 바울신학이다.

 

그래서 우리가 바울신학 할때 이런 것들을 바울신학이라고 그러는데 바울신학의 독특성을 말한다면 이 초대교회의 공통된 케리그마를 바울과 신약에서 바울 외의 문서들(요한,마태,마가,누가,히브리서) 등과 비교해서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때 어떤 점에서 바울이 요한,마태,마가,누가,히브리서 저자와 어떤 점에서 같이 또 어떤 점에서 좀더 색다르게 선포하는가 또는 이 ‘주’라는 칭호는 또 어떻게 바울과 신약에 있어서 바울이 아닌 다른 저자들과 어떻게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어떻게 좀 색다르게 사용하는가 하는 이런 것을 살펴봄으로 바울신하이 독특성이 나타난 것이다. 물론 이것(예수=그리스도,주,하난미이 아들,죽고 부활함)은 완전히 바울신학의 독특성이다. 이런 것들을 이제 전부 가려서 생각을 해보면 바울신학의 전제를 그릴 수 있고 또 바울신학이 초대교호의 보편적인 신학과 공통신앙이 어떻게 일치하며 어떻게 독특한 점이 있는가 하는 이런 것들을 우리가 헤아릴 수 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좀 해볼려고 한다.

 

바울은 복음을 기독론적으로 정의하고 구원론적으로도 정의한다.

 

가령 기독론적으로 정의하는 것은 롬1:2-4/고전15:3-5/고전1:23/갈1:12,16/고후4:4 등 또 구원론적으로 정의하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롬1:16등. 그런데 기독론과 구원론은 두개이 상이한 서로 분리될 수있는 교리가 아니라 한 교리의 양면이나 우리가 편의상 이렇게 분리하는 것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기독론은 구원론의 근거이고 구원론은 기독론을 인간론적인 응용(적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구원론은 무엇이냐면? 기독론을 우리 인간들에게 그리고 이 세상에 적용한 것이다. 우리 인간들에게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의 의미를 파헤친 그것이 구원론이다. 그래서 기독론이 구원론의 근거이기 때문에 이 ‘바울신학’은 기독론 중심이라 할 수 있고 우리의 바울 연구에 있어서도 기독론 중심으로 펼쳐져야 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불트만 학파에서는 길고 실존주의 신학에서는 구원론 중심으로 바울신학을 전개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이 사람들은 인간론이 중심이다. 인간론이 바울의 사고에 있어서 우선한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데 이것은 옳지 않다. 이 옳지 않음을 가장 예리하게 지적한 사람이 전에 불트만의 제자였던 E.Kasemann이다. 그래서 바울의 사고에 있어서는 인간론보다는 기독론이 우선하고 기독론을 인간에 적용한 것이 곧 그리스도의 인간을 위한 의미르 이제 해석할 때에 비로소 기독론이 구원론이 된다 하는 것을 밝혔다. 자 그러면 우리가 그리스도라는 칭호,또 주라는 칭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 또 하나님의 형상,아담,이런 칭호들을 따져가면서 바울신학의 연구를 할려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 해결할 것이 있다. 아까 이야기한대로 바울 전에 신학의 단계가 어느정도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바울이 그러니까 다메섹 도상에서 복음을 계시받고 사도로 부름받았을 때에 당시 교회의 신학이 어느정도 발달했나 곧 당시 교회가 복음을 어떻게 선포하고 있었나? 아까 이야기하대로 바울은 당시 교회가 선포하고 있던 복음을 전승받아서 그 표현 바업으로 자기의 계시 받은 복음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더 풍부하게 했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사도로 부름받고 복음을 계시받을 그대 즈음에 그러니까 이게 시간적으로 말하면 AD32-34 이쯤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한 것이 AD 30년 쯤이다. 그러니까 예수의 십자가 죽고 부활하심과 바울의 다메섹 도상의 사건은 불과 2,3년 떨어진 사건이다. 그런데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직후 이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이 나타나고 예수를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으로 선포하는 복음 선포 양식들이 발달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울전에 얼마만큼 발달해서 바울이 이때부터 받은 복음의 계시를 어떻게 이들이 먼저 이룬 그 복음이 표현 방법들(이것이 전승이다)에 의해 표현되게 되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대표적으로 우리가 볼 수 있는데

 

첫째로 고전 15:3-5 여기에 보면(지난번에 고전 15:1-2은 살펴보았던 바울이 랍비들의 전무 개념인 전승받고, 전승하는 전문언어를 써서 복음을 자기보다 먼저 그리스도인 된 자들로부터 전승받아서 고린도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으로 제일 먼저 전승한 것이다.그 믿음 안에 이들이 서 있고 그 복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다는 말이다) 그리고는 3절부터 그 내용이다. 그리스도가 우리 죄들을 위해서 죽었다. 성경의 예언대로 죽었다. 그 다음에 4절에 그가 장사되었다. 이게 다 ‘οτι’라는 절이다. 영어로는 that 절이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죽었다. 또 ‘οτι’ 장사되었다. 그 다음 4절 후반부에 첫째로,둘째로,세째로 그 다음에 3일만에 부활되었다(일으킴을 받았다). 이것도 성경대로 그 다음에 게바에게 보여졌다(나타났다). 그러니까 부활해서 나타남 게바에게 나타나고 그 다음에 열두 제자에게 나타났다. 12제자 12사도가 전문용어이다.여기까지가 ‘οτι’절로 되었었다(that절). 그 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나타나고 그 다음에 모든 형제들,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났다. 그 다음에 6절에 500여 형제들에게 나타났다. 게바에게 나타나고 12제자에게 나타나고 500여 형제에게 나타나고 그리고 괄호속에 그 중에 많은 사람들이 몇은 죽었어도 아직도 살아남아 있다. 이런 것은 괄호에 들어가는 것이다. 7절에 그 다음에 야고보에 나타나고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났다. 그 다음에 8절에 마지막으로 바울 자신에게 나타났다. 우리 성경에는 ‘유산된자’와 같은 자기에게 나타났다. 여기 이 두부분(7절,8절)은 ‘οτι’로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대개 학자들이 3-5절까지가 원래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초대교회가 선포했던 신앙고백을 바울이 이어 받았다. 지금 부활 나타남을 씨리즈로 말하고 있다. 세 씨리즈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바울이 이 부분(7-8절)은 원래 복음에 덧붙인 것이다. 돼 덧붙였냐면 지금 고전 1장에서 바울의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가 가지고 있는 부활 나타남에 대한 정보를 원래 복음에 덧붙인 것이다. 왜 덧붙였냐면 지금 고전 15장에서 바울의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가 가지고 있는 부활 나타남에 대한 정보를 원래 복음에 덧붙인 것이다. 게바에게 나타났다는 것에 있어서 그러니까 원래 여기 (3-6)까지 복음이다. 초대교회가 선포한 복음이다. 그런데 여기서 살펴보면 첫째로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썼다. 예수가 메시야다라는 칭호를 썼다. 예수가 구약에 예언된 종말의 하나님의 구원자다. 메시야다. 그러니까 예수가 성경예언을 성취하신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사건은 하나님의 성경에서 구원의 약속을 성취한 사건이다.

 

둘째로 우리 죄 문제를 해결한 사건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예수의 그리스도됨. 즉 종말론적인 구원자 됨을 무슨 정치적인 해방으로 무슨 다윗과 같이 왕조를 재건하고 이방인들을 정복하는 이런 식으로 해석하지 않고 우리 죄를 속죄,죄문제를 해결한 분으로서 그리스도됨이다. 우리 죄문제를 해결하는 구원자적인 행위는 죽고 부활한 것이다. 이 나타남은 부활의 확인이고 그래서 예수의 그리스도 사건은 예수의 그리스도로서의 행위는 구원의 행위는 종말 구원자의 행위는 죽고 부활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성경대로이고 그러니까 그것이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 주 문제를 해결하는 구원의 사건이다. 이런 식으로 바울 전에 이미 교회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했고 예수의 그리스도됨을 그의 죽음과 부활에 핵심이 있다고 보았고 그의 그리스도로서의 행위는 무슨 정치적인 군사적인 구원이 아니고 우리 죄 문제를 해결할 구원으로 보았다. 이렇게 바울 전에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제 이게 οτι절로 되어 있다.

 

이제 하나하나가 사실은 이 순서를 가만히 보면은 우리가 마가복음의 순서와 많이 일치한다. 영국의 신약학자 C.H.Dodd는 ‘이 고전 15:3-5에서 그리고 사도행전 전반부에서의 사도들이 설교에서 그리고 마갑고음에서 공통적인 내용과 순서를 기출해 냈다. 가령 “성경의 메시야에 대한 종말의 구원에 대한 예언들이 성취할 때가 왔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게 성취되었다.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바로 우리를 위한 구원의 사건이다. 회개하고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덧입어라 그러면 성령이 너희들에게 주어진다” 이런 내용들을 초대교회에서 공통적으로 설교했다. 그래서 C.H.Dodd는 이런 것을 Kerygma라고 그랬다. 초대교회의 설교다. 그래서 초대교회 선교가 이와같은 공통적인 내용과 순서로 되어 있다고 보았다. 마가복음도 마찬가지이다. 마가복음도 막8:27-31 이것의 내용은 “베드로가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장면이다. 그러니까 예수가 자기 그리스도됨을 장로들과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에게 넘겨줌을 받아서 대속의 죽음을 하는 여기서부터 죽음을 예고한다”이게 마가복음의 분수령이다. 그전은 예수의 메시야됨을 설명하는 서론에 해당한다. 여기서(막8:27-31)부터서 예수가 메시야이고 제자들에 의해 고백되는데 어떻게 원수들에 의해 체포되고 어덯게 재판받고 수난받고 죽고 어떻게 부활했는가? 이게 예수의 수난사(Passion narrative)이다.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막은 예수의 수난사의 긴 서론이 붙은 것이다. 이렇게 말할 정도이다(막 전체가) 사실은 막 8:27-31 안에서도 계속해서 예수의 죽음의 사건이 반영되어 있다.(예고되어 있다. 간접적으로). 그래서 막에서도 예수의 수난이 복음의 중심이다. 막 8:27-31에서도 보면 예수의 메시야됨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C.H.Dodd는 이런 것을 Kerygma라 불렀다(고전15:3-5 사도행전에서는 초대교회 사도들의 설교 요약, 그리고 막에서 그 순서를 추출해서) 이런 것을 알려면 C.H.Dodd의 책을 읽어보면 도움이 된다. 이 책이 한때 영향력 있는 책이었다.

 

한말 더하고 넘어가면 요 말들이(고전15:3-5) 가령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서 죽었다 .그가 장사되었다. 이 하나하나가 한 문장 한문장이 사실은 예수의 수난사 전체에 대한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그래서 여기(고전15:3-5)서 한문장 한문장은 한문단의 제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가령 초대교회 사람들이 이 복음을 선포할 때에 왜 사람들이 말하는 사영리식으로 했다(사영리→인간은 죄인이다-4개의 진리가 요약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을 소개할 때도 우리는 인간은 죄인이다라고 말한다. 이 말만 하는가? 왜 죄인이고 죄인이란 뜻을 설명한다. 둘째번하고 또 설명한다. 이것도 마찬가지이다. 초대교회 교인들도 이것을 복음으로 선포할 때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죽었다. 그가 장사되었다. 그 말만 한게 아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죽었다는 것을 그리스도가 어떤 사람이며 어디서 났으며 무슨 일을 했으며 무엇을 가르쳤으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치고 어떻게 가르쳤고 제자들을 모아서 어떠헥 했다. 그런데 이것이 그원수들에게 어떻게 이용당해 가지고 그리스도가 재판받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되었다. 그 내용을 요약하는 제목이다. 그다음에 예수의 장사된 것은 성경에 많다. 어떻게 여자들이 향료를 준비하고 또 아리마대 요셉이 어떻게 예수를 사랑해서 무슨 향료 그런 것들을 가지고 와 가지고 자기 집안의 무덤에 묻었다는 이런 이야기등이 있다. 이게 제목이다. 이것을 선포할 대는 예수가 어떻게 향료를하고 어떻게 묻고 그런 것이다. 그 다음에 그가 삼일만에 성경대로 살아났다. 이것은 또 예수의 빈무덤 이야기 이런게 주욱 나온다. 예수의 나타남 게바에게 나타났다. 성경에 보면 제일 먼저 예수가 누구에게 나타났는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났다. 그런데 여기 왜 막달라 말리아가 나타났느다는 말을 쏙 빼고 게바에게 나타났다고 했는가? 당시 여자들은 증인 자격이 없었다. 여자들이 증인서면 역효과가 난다. 그래서 빼버린 것읻아. 그래서 게바가 제일 먼저 나온다. 초대교회의 케리그마는 복음의 공식적인 표현은 제일 먼저 게바에게 나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서들에는 게바 전에 마리아가 예수를 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가령 M.Hengel같은 사람은 그게 아주 우리 복음서의 성격과 역사성,신빙성에서 좋은 증인을 해주고 있다고 한다. 복음서가 만약에 초대교회 신앙을 그냥 역사화 시키기 위해서 만들어낸 이야기들로 구성되었다면 -그것이 불트만 학파의 양식사학파들의 주장-복음서에 게바가 예수를 제일먼저 본 것으로 되어 야 할 것이다. 마리아가 본 것은 삭 빼버렸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여자가 증언하면 역효과가 날 판에 왜 마리아가 제일 먼저 보았다고 하는가? 마리아가 게바 다음에 보았다고 해도 좀 어설픈데 게바보다 먽 보았다고 한다. 이것은 왜 그런가?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까 이것을 신실하게 기록한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복음서의 역사적 신실성을 말한다. 그래서 이제 게바에게 먼저 나타났다고 하지만은 아마 우리 복음서에 있는데로 이라 선포한 사람들은 어덯게 여자들이 이제 향료를 준비해가지고 갔는데 마리아에게 나타났고 마리아가 어떻게 게바에게 가서 알려가지고 게바에게 준비했는데 예수가 그에게 나타났고 이런 예수의 나타남의 이야기를 쭉했다.

 

그래서 이 이야기들을 풀면 아까 이야기한데로 οτι절(That)들은 다 무엇이냐면 각각의 이야기들의 요약하는 제목이나 마찬가지이다. 이 제목에 함축된 이야기를 다 풀면 무엇이 되느냐면 막 같은게 된다는 말이다. 복음서들 같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복음서에서 복음서들이 나온 것이다. 그래서 마가가 복음을 펼친 것을 뭐라고 말했느냐면 복임이다. ευαγγελιον이라 했다. 그래서 복음이라는 것은 고대 문학장르에서 아주 독특한 장르이다. 신약성경의 현상이다. 복음이라는 문학장르가 있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날도 학자들이 복음이라는 문학장르를 고대 알렉산더 대왕같은 헬라 영웅의 전기와 비교해볼 수 있을까 아니면 모세에 대한 전기(유대 사람 전기)와 비교해 볼 수 있을까? 아니며 이게 무엇이냐? 이렇게 해서 문학장르를 새롭게 정의할려고 하는데 그런 전기와도 일부 공통점이 있지만 전기가 아니다. 헬라식으로 전기가 아니다. 복음서가 전기이기 위해서는 에수가 어떻게 자라고 교육받고 성격이 어떻고 기런 것이 있어야 하는데 이런게 하나도 안나타난다. 복음서에 보면 무엇에 집중하고 있는가? 예수이 공생애의 가르침과 선포와 그의 투쟁과 죽음과 부활에 집중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사건이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임을 깨닫고 믿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의 믿음을 유발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는 전기라기보다는 선포(Kerygma)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트만과 같은 양식사학파들은 복음은 전적으로 전기의 성격이 전혀 없고 선포의 성격만있고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결단을 요구하는 선포의 성격만 있다고 강조해서 양식사학파의 대전제이 하나가 이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학자들은 이 복음이라는게 독특한 문학장르이지만 일부 당시의 전기와 비슷한 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러니까 당시의 전기,극작(드라마),헬라의 비극작품들과도 일부 비슷한 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아주 독특한 문학장르이다. 그런 류는 바로 이와같은 복음의 선포에서 복음서들이 나왔기 때문에 그렇다. 또 (바울전의 신앙고백)을 살펴볼 수 있는데 롬 1:3-4에서 바울은 롬1:1에 “예수의종 마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성별되고 사도로 부름받고” 바울이 그 다음 7절에 로마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들, 성도로 불림움 받는 자들에게 편지를 쓴다고 되어 있다. 발신은 바울이고 수신은 로마에 있는 성동들,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들에게 쓴다. 그런데 바울이 자기가 어떤 사도인가 설명하는데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 사도로 부름받았다.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받았다. 또는 분별되었다는 사도” 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는 2절에 그러면 하나님의 복음이 무엇이냐를 또 길게 정의를 한다(2-4절까지).그래서 그 과정 중에 복음을 여러가지로 정의한다.

 

복음이 첫째로 하나님의 복음. 복음이 저자가 하나님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복음의 신적 quality를 말한다. 복음이 인간적인 사건이 아니고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의 사건을 말한다. 그러니까 신적 quality로 되었다. 인간적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적인 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둘째 그 다음 2절에 하나님의 복음은 무엇이냐면 성경들이 그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미리 약속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이 무엇이냐면 성경에 있어서의 선지자들의 예언, 또는 선지자들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의 성취이다. 성취가 복음이다. 이 복음을 이렇게 두번째로 정의하고 있다. 이것은 구원사적으로 복음을 정의하고 있다. 그러니까 종말론적 사건이다.

 

세째 복음의 내용이 무엇이냐? 3절에 그의 아들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이 아들이 복음의 내용이다. 나중에 보겠지만 바울은 아주 자주 복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로 요약한다. 여기서도 복음이 그의 아들에 관한 것이다. 그의 아들이 복음이다.

9절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아들의 복음. 그의 아들을 내용으로 하는 복음을 섬긴다고 바울이 말한다.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을 복음의 내용으로 정의한다. 그 다음에 이제 3절과 4절에서 지금까지 복음이 정의였고 이제 그의 아들에 관한 정의를 두부분으로 되어 있다. 하나는 3절에 그이 아들이 어떤 분인가? κατα σαρκα(육신적으로는 다윗의 아들이라) 그 다음에 4절에 κατα πνευμα αγιωσυνης (성결의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 우리만 번역은 잘못되어 있다. “성결의 영으로...”“능력으로”가 어순이 잘못되어싿.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홣여”이렇게 원인적으로 번역할 수도 있고 또 시간적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죽은자들로부터,부활할때부터) 능력을 행사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러나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된 것이 아니고 능력을 행사하는 전권을 행사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말이다. εν δυναμις가 하나님의 아들(명사)를 수식하는 말이다. 동사를 수식하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능력으로 임명된 것이 아니고 능력을 행사하는 전권을 행사하는 하나님이 아들로 등극했다는 말이다. 거기_____ 이말이 임명되었다는 말도 되지만 등극했다는 말도 된다. 내용이 이렇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내용을 헬라어로 쓴 이유가 있다. κατα σαρκα(육신에 의거해서) 이말이 번역하기 어려운 말이다. 지금 σαρκα(육신)과 성령을 대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인데 이게 정확히 무슨 말이냐? 아니면 예수가 육신적으로는 다윗의 아들로 낳지만 성령에 의해서 잉태된 성육신한 자로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인가? 이게 아주 번역하기 어려운 말이다. 이걸 논할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을 대부분의 학자(바울 전의 교회의 특히 아람말을 쓰는 팔레스틴 유대 기독교의 복음 또는 신앙고백을 바울이 여기서 인용하고 있다고 본다. 그것은 금방 나타난 것과 같이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그렇다. 여기서 성령을 성결의 영이라는 표현은 이것은 완전히 셈족언어의 형식이다. 바울은 성령을 항상 το πνευμα το αγιων 으로든가 το αγιων πνευμα 그러지 이런 식으로 πνευμα αγιωσυνης로 쓰기 때문에 이것은 분명히 셈족언어 스타일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유대셈족 말을(아람어를) 쓰는 유대 기독교가 정의한 복음 또는 신앙을 바울이 문자 그대로 직역했다는 말이다. 그런 흔적이 여기 남아 있다. 또 하나 κατα σαρκα와 κατα μνευμα를 대조시킨 것이 바울신학이기는 한데 그것이 대표적으로 롬 8장에 나온다. 그러나 바울은 σαρκα 와 πνευμα를 이런 식으로 쓰지 않는다. 방루에 있어서 σαρξ는 육신은 항상 하나님을 대항하는 자로서 인간을 말한다. 여기서는 그런 뜻이 있지 않다. 이것은 도리어 구약과 유대교적인 의미로 רשׁב 이다. 그냥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인간 우리 몸을 가지고 물질적인 세계에 사는 존재 이정도 뜻만 있는 것이지 하나님에 대항하는 자로서의 인간을 말하지 않는다. 바울에게 있어서 육신이라는 말은 살덩어리라는 소리가 아니고 하나님께 대항하는 자로서의 인간을 육신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런 의미가 전혀 없다. 그러니까 이게 바울적인 언어가 아니다. 이런 것도 신앙고백이 바울 전의 기독교의 복음을 바울이 여기서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롬 1장에서 복음을 또 한번 정의한 것이다. 롬 1:16에서 복음을 정의하는데 그전 (롬1:1-9)에 복음은 기독론적으로 정의하고 롬 1:16에서는 복음을 구원론적으로 정의한다.

 

그런데 나중에 보겠지만 이 두정의가 일핏 보기에는 이렇게 완전히 다르지만-하나는 구원론적이고 하나는 기독론적으로-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 두정의가 똑같은 것을 말한다. 여기서 이게 ①κατα σαρκα②κατα πνευμα αγιωσυνης 바울전의 기독교 복음이다는 것이다.

 

아까 고전 15:3-5까지를 대강 분석함으로서 바울 전의교회가 무엇을 복음을 보았으며 그 복음을 어떻게 선포했는가를 대충 살펴보았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이 복음 선포할 때 예수를 다윗의 아들,하나님의 아들로 지칭했다. 그런데 몰1:3-4은 삼하 7:12-16까지를 근거로 삼고 있다. 이른바 구약의 나단의 예언 또 나단의 신학이라고 하는 이 부분을 근거로 삼고 있다. 이 나단의 예언은 아주 중요하다. 이것은 하나님이 선지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 다윗에게 약속하는 것이다. ‘네 수가 다하면 그러니까 네 씨, 다윗의 아들 하나를 일으켜서 그를 네 왕 위에 앉히고 내가 너희 집을 세운다(너희 왕조를 세운다). 그를 나의 아들로 선언한다.’ 곧 하나님의 백성 예수를 하나님을 댓니 통치하는 자라고 선언한다는 말이다(자기 아들을 세운다는 것은) 그리고 그로 하여금 나를 위해서 집을 짓도록 하겠다. 성전을 짓게 하겠다. 이것이 나단의 예언의 내용이다. 나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준 약속이다. 그러니까 다윗의 씨가 하나님에 의해서 일으킴을 받아서 다윗 왕위에 앉혀지고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솔로몬 위에 처음 약속이 성취된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씨(솔로몬)을 일으켜서 그를 다윗의 왕위에 앉히고 그를 예수의 왕으로 세워서 하나님이 자기 아들로 선언했다. 자기 아들로 선언한 의미는 자기 백성 예수 위에 자기(하나님) 대신 통치하는 자로 만들었다는 말읻. 그리고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다. 그 뒤 이 약속에 근거해서 예수 왕으로 등극할 때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백성 위에 합법적으로 통치하는 자라는 것을 선언하였다. 이것이 시편의 등극시에 잘 반영되어 있다(시2편,89편 등). 가령 2:7(예수의 세례 때 울려퍼진 소리)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이렇게 다윗의 왕위에 등극하는 다윗의 아들(예수 왕)을 하나님께서 자리도 선포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 대신 통치하게 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구약에서 메시적으로 해석이 된다. 그게 이제 스룹바벨과 바벨로니아에 포로로 잡혀 가고 또 돌아오고 하는 다 이런 과정들도 있지만 선지자들 또는 시편의 기자들 나단의 예언을 계속 자기들을 실망시킨 다윗의 자손에서 그것이 실현될 수 없을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다윗과 솔로몬을 정점으로 다윗 왕조가 퍠역한 타락의 길로 간다. 그러니까 여기서 성취될 것으로 못본다.

 

또 나중에 바벨로니아에서 돌아온 다윗 왕가의 마지막 왕자인 스룹바벨을 통해서 성취되리라고 굉장히 기대를 했는데 그것도 흐지부지 되었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점점 이 예언을 종말에 성취될 예언으로 본다. 그래서 이 예언이 바로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의 뿌리가 된다. 그래서 메시야의 칭호들이 전부 다윗의 씨,다윗의 다들,다윗의 가지,하나님의 아들 등이 메시야의 칭호들이 된 것이다. 다 여기서 나온것이다. 예수의 사건, 삶과 가르침과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기독교 공동체는 바로 예수가 이 예언을 성취한 것이다. 복음이 선지자를 통한 약속의 성취이다. 예수가 바로 이 약속을 성취한 것이다. 왜 육신적으로는 다윗의 아들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일으켰다.(부활로 4절 εξ αναστα...그를 부활시킴으로 말미암아) 이 말은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켜서 하나님의 아들로 왕위에 등극하게 했다. 그러니까 다윗의 아들로 예수가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다. 육신의 삶에서도 그는 다윗의 아들로 메시야로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러나 부활전에요 부활후에가 완전히 다르다. 부활 전에는 감추어진 아들이다. 그래서 믿음 있는 자들만 그를 이해할 수있고 믿음 있는 자들만 그의 하나님의 아들됨의 권능을 덧입을 수 있었다. 그래서 믿음 있는 자들만 그의 하나님의 아들됨의 권세로 치유함을 받고 용서함을 받는 그런 권능을 덧입었다. 그러나 그게 대게는 감추어 졌다는 것이다. 이제 부활로 말미암아 만유의 주로 등극했다. 어떤 권세를 행사하는 주로 등극했다는 말이다. 능력을 행사하는 하나님의 아들로 등극했다는 말이다. 이제 감추어진 것이 싹 벗겨졌다. 빌2:9-11과같이 하나님께서 그를 자기 우편에 올리셔서 온 우주로 하여금 그를 주로 고백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의 신앙고백이다.

 

그래서 바울 전에 이미 예수의 사건이 나단의 예언을 성취한 사건으로서의 유대메시야적 기대를 충족시키는 분이라는 것,그가 다윗의 아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그가 만유의 주로 이제 능력을 행사하는 분으로 이제 사단의 권세의 영역에서 인간들을 해방시켜서 자기의 의와 사랑으로 다스리는 권세(주권)의 영역으로 들여오는 주권자라는 것(골1:13) 등의 의미를 바울 전에 이미 예수에게 신앙고백한 것이다.

 

또 하나 많은 학자들은 롬 3:24-25에서 초대교회 예루살렘 공동체의 신앙고백의 모습을 볼 수있다고 한다. 불트만 학파는 헬라 유대교회의 신앙고백이라고 본다(3:25f) 아주 어려운 것이데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피를 통한 ιλαστηριον으로 세웠다(25절)”“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ενδειξιν 하기 위해서이다. εις ενδειξιν της δικαιοσωνης αυτου(=Θεου)이다. 그 다음에 δια την παρεσιν των προγεγονοτων αμαρτηματων 이렇게 되어 있다. 26절 εν τη αρχη του Θεου προς την ενδειξιν της... 바울이 여기서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은혜로 의롭다’하시는가?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됨의 근거를 설명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선언하고 어떻게 해서 우리가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느냐를 설명하는 장면이다. 그 근거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ιλαστηριον으로 세우셨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해석은 구구하다. 크게 두 해석의 주류가 있다.

 

하나는 전통적 해석 방법. 이것이 무엇이냐면 ιλαστηριον이라는 말이 라틴어에서 온 것으로 영어로는 propitiation이다.내용상으로 무엇이냐면 하나님께서 우리 죄에 대해서 진노하신다. 그래서 우리 대신 벌받는 대속물을 바침으로써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노를 풀어버린다. 이것을 ιλαστηριον라고 한다. 하나님은 우리 죄에 대해서 노하신다. 그래서 우리를 벌 주시고자 한다. 그런데 예수가 우리 대신 벌을 받아 버림으로 말미암아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 버린 것이라는 것을 ιλαστηριον이라고 하고 propitiation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버린 사건이다. 우리 대신 벌을 받으시므로 말미암아 그 진노를 풀어 버린 사건이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의’를 증명했다. ‘하나님의 의’가 증명이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동안에 과거에 지은 죄들을 하나님께서 간과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를 증명하 필요가 있었다. 전통적 해석 방법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오래동안 인류의 죄를 정죄하지 않고 그냥 회개하기를 기다리시고 오래 참았다. 그러니까 인류는 계속 죄를 쌓아가지고 역사 속에 의로운 하나님이 인류를 다스리심과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 있나 없나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문제 삼기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의를 증명하기 위해서 인간들을 벌주어야 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간들에게 벌을 주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또 사랑의 하나님이라 그래서 인간들에게 내릴 벌을 자기 아들 그리스도에게 내림으로서 그리스도로 하여금 인간들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공의의 벌을 받도록 함으로써 이 공의를 만족시켜서 (만족시킨다는 교리가 여기서 나온다)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서 더 이상 진노하지 않도록 그의 노를 풀어 버렸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제 의롭다고 선언할 수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은 자기를 의로우신 분임을 증명하게 되었다. 이게 전통적인 해석방법이다.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에 근거해서 왜? 대속의 죽음은 ιλαστηριον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것은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대신 받아서 그의 노를 풀어버려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이상 진노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를 더 이상 그 진노의 상태에서 해방시켰고 의롭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해석은 이른바 penal substition theory 라고 그런다. 그리스도가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셨나? 또는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어떤 근거에 의해서 의롭다 하시는가? penal 그러면 형법적인 벌주시는 대치이론이라는 말이다. 우리 대신 그리스도가 대신했다(substitution) . 그래서 벌을 받았다. 이런 이론이다. 이것은 그래서 atonement 그리스도가 어떻게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고 의롭다고 했느냐에 atonement 이론 중 중요한 penal tubstitution theory라 이것을 형법적인 카테고리로 설명을 하는 것이고 벌주는 것으로 말한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벌받음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와 벌 받음에서 자유롭게(의롭게) 되었단 말이다. 이런 것을 penal substitution theory 라고 한다. 이것이 전통적인 복음주의 구원론의 기초이다. 이 때의 ‘하나님의 의(δικαιοσυνη)’라는 것은 어떤 놓음,규범에 맞지 않으면 벌주는 법적 개념으로서 ‘의’라 즉 forensic(법적 재판적 개념)의 ‘의’이다. 이때의 δικαιοσυνη의 ‘의’를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하면 ‘의인 되었다’는 소리는 무슨 소리이냐면 재판정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는 그말이다. 재판정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서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의 재판정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서 하나님의 진노함의 벌을 받지 않게 되었다. 이제 ‘의인’되었다는 소리이다. 칭의라는 말이다. 이게 하나의 해석의 system이다.

 

그러나 최근에 독일에서부터 강력히 일어나는 해석방법은 이것(위엣것)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오해에서 출발한 것이다. 또 penal substitution theory는 하나님을 너무나 헬라적인 벌주기를 좋아하고 또 무슨 제사 바치면 화를 풀어버리는 이런 우상적인 개념으로 하나님을 격하시킨 것이다. 구약성경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구약성경의 하나님은 언약의 하ㅏ니이고 그의 백성이 설령 언약에 신실치 못하고 죄를 지어도 그들을 사랑하는 하나님이지 벌주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는 것은 하나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하나님을 그냥 인간적인 편협한 존재로 격하시키는 것이다. 또 ‘의’라는 개념은 이것은 재판적 개념으로는 로마(헬라)적 개념이다. 구약적인 개념으로 ‘의’는 법적인 개념이 아니고 관계론적 개념으로 관계에서 나오는 의무를 충족하는 것을 ‘의’라고 한다. 그러니까 구약에서 הקדצ에는관계론적 개념으로서 이 관계에서 나오는 의무를 충족할 때 그 ‘의’라고 한다. 가령 부자간의 관계에서 아버지에게는 그 아들을 보호하고 양육하고 사랑할 의무가 주어진다. 아버지가 그 아들에 대해서 의무를 다할 때 아버지는 의롭다. 아들은 이 관계에서 아버지를 공경하고 순종할 의무가 있다. 그런 의무를 다할 때 아들은 의롭다. 이웃과 이웃의 관계 속에서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 관계에서 나오는 이웃에 대한 의무이다. 이 의무를 다할 때 이웃이 의롭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그의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은 스스로 언약으로 의무를 진 것이다. 언약의 관계가 하나님게 지우는 의무가 무엇인가? 하나님 스스로 이 언약의 관계로 이스라엘을 부름으로서 자기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 노릇해주겠다는 의무를 진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인도하고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의 관계에서 나온 의무이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는 의무를 진 것이다. 이스라엘이 어느때 의로운가?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할 때 의롭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언약을 지키지 못한다. 언약의 관계에서 나온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불의하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언약을 안지키고 하나님 노릇 안해주면 하나님도 불의하다. 이스라엘은 언약의 관계에서 나오는 의무를 다하지 못해서 불의하지만 하나님 만은 그 언약에서 나온 의무를 신실히 지킨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의롭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에서 ‘하나님의 의’는 이런 법정의 개념이 아니라-잘못하는 자를 벌주는 개놈이 아니라-그의 언약의 신실함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 곧 그의 언약에 신실함은 항상 이스라엘 대한 구원의 형태로 나타나다. 왜?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 노릇 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약에서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신실함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 또는 구원의 힘 등을 의미한다. 그래서 가령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셨다. 이 과정에서 애굽의 군사들을 다 홍해에 수장시켜 버렸다. 그것을 시편 기자들은 하나님이 그의 ‘의’를 나타냈다고 그런다. 법정개념으로 어떻게 사람을 작뜩 죽인 것이 의로운가? 또 이스라엘로 하여금 가나안을 차지 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거기에 사는 사람들을 싹쓸이를 해버렸다. 헬라적인 ‘의’개념으로는 객관화되고 추상화된 ‘의’의 개념으로는 불의한 일이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이 그의 의를 나타냈다고 그런다. 또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그의 ‘의’를 나타내서 이방민족들 다 정복하고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을 주리라고 한다. 헬라적인 의미로 이방민족을 다 죽인 것이 무슨 ‘의’인가? 그런데 왜 ‘의’라고 그러는가?

 

이것이 이스라엘(선택한 백성)에게 하나님 노릇해주는 것이란 말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짓밟는 이방인들을 싹쓸어야 구원할 수있다는 말이다. 즉 언약의 관계에 충실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의’라는 것이다. 이 일부의 독일 학자들로부터 시작해서 최근의 학자들은 롬 3:25-26의 결정적인 말씀을 바로 이 카테고리(구약적인 ‘의’-관계론적)로 해석한다. 그래서 여기에서 그의 ‘의’가 나타났다 하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낸 사건이다. 이 소리는 에수가 우리 대신 벌 받았다는 소리가 아니다. 무엇을 전제하냐면 언약의 관계를 인간이 지키지를 못한다. 그래서 우리가 불의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언약에 충실해서 우리에게 이 언약의 관계를 회복하는 수단을 제공했다. 이 ιλαστηριον이라는 말이 바로 이 말이다. 즉 언약을 회복하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ιλαστηριον을 성전에 있었던 시은석으로도 해석하기도 한다. 시은석은 언약궤 뚜껑 위에 하나님게서 앉아 계셨다고 보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어좌가 언약궤 뚜껑에 놓였다고 보았다. 이 언약궤 뚜껑에서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헤가 베풀어졋다고 보았다. 언약궤 위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말은 ‘하나님은 언약에 근거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신다는 말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언약을 파괴해 버려서 하나님과 관계가 절단이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해서 은혜를 베풀어 그들로 하여금 다시 한번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 되게 한다는 말읻. 그래서 언약궤의 뚜껑이 하나님의 어좌로서 이것이 은혜를 베푸는 자리라는 것이다 . 그래서 시은석을 우리 죄를 덮어 버려서(expation) 하나님과 우리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래서 인간들과 하나님을 다시 한번 회해시킨 사건이다. 그래서 현대의 독일식으로 해석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하나님이 그의 언약에 신실해서 우리 인간들에게 자기와 화해의 수단을 허락하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자기 ‘의’를 드러냈다. 자기 의는 바로 언약의 신실함 즉 우리에게 하나님 노릇해 줌이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을 지켜서 우리를 다시한번 그의 은혜의 관계 속으로 회복되게 한 우리를 자기에게 화해시킨 사건이다. 이런 식을 해석을 하는 것이다.

 

이 두해석 하나는 penal substitution theory해석과 현대 독일 신학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가 어려운 이유가 있다. 바울 신학을 공부하다보면 두 요소가 다 있다.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부터 하나님의 진노함이 계시되었다고 그런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를 열심히 말한다. 진노를 벌 주는 개념이다. 또 바울은 열심히 최후의 심판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할 것이라고 말한다. 가령 살전 1:10에서 우리가 그의 아들을 하늘로부터 기다린다 그의 아들이 우리를 그의 진노함으로부터 건져낼 것이란 말을 한다. 그러니까 ‘의롭다함’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최후 심판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것이다. 무죄 석방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penal conseat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바울에게 있어서 관계론적인 개념도 있다. 그런데 구약에서 ‘의’의 개념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아직도 이 부분이 정리되지 못하고 있다 이 부분이 바울 신학이 구원론에 있어서 핵심이다. 다시 말하면 칭의론이 핵심이다. 그래서 옛날에 조직신학을 한 사람들은 penal substitution theory가 전부인줄 알고 안주해 버렸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penal substitution theory는 부도덕한 걸로 본다. 어떻게 하나님이 죄인 아닌 사람을 죄인 대신에 벌 주느냐? 이것은 부도덕하다고 본다. 특히 영국사람들이 그런다. K.Barth는 영국은 지금까지 펠라기우스 전통이 살아있어 가지고 도덕적 개인주의(개인이 자기 자신의 잘못을 책임짐) 때문에 이것은 부도덕하다고 본다. 이런 것은 현대적인 해석에 별 의미가 없다할 망정 이 바울 신학에 자세히 보면 두가지가 다 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이게 아직도 석연치 않아가지고 구약과 신약에 있어서 ‘의’개념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있어서 책이 엄청나게 많이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교통정리가 덜 되었다. 그래서 내 책에 두 가지 해석을 다 써놓고 나는 결정못하겠다고 했다. 이 말은 둘다 옳다는 말이다. 전통적인 해석도 옳고 최근에 새로운 통찰력도 상당히 의미가 있다. 우리가 이것을 토론하기 위해서 자세히 설명한 것이 아니고 많은 학자들은 특히 후자 쪽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롬3:25-26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를 위한 하나님이 자기 의를 나타내고 우리 죄를 대속해서 자기와의 화해관계로 환언시킨 의미로 그의 피흘림이 제사이고 그런 의미로 구원의 사건이라는 신앙고백이 많은 학자들은 바울 전에 이미 이루어졌다고 본다. 그러나 롬3:25-26은 고전 15:3-5/또 롬1:3-5과는 좀 달리 아까 고전 15:3-5/롬1:3-5은 독선적으로 바울 서신에 있는 모든 것이 바울이 썼다고 주장하지 않는 한 대부분의 학자들이 바울 전에 교회의 신앙고백을 바울이 인용하고 있다고 본다.

 

고전 15:3-5에서는 바울이 자신이 인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두곳은 바울 전의 것이라고 다 인정한다. 그런데 롬 3:25-26은 지금도 상당히 많은 소수의 학자들이 바울이 직접 쓴 것이라고 본다. 다수 학자들은교회의 신앙고백을 바울이 인용하고 있다고 본다. 어쨌든 우리 성경롼에 아무 관계 없는 것이고 차리라 바울 전의 것이라면 보수 신학자들에게는 더 좋은 것이다. 보수 신학자들은 현대 신학자들이 새로운 것을 발견하면 무조건 이단자가 발견했다고 해서 의심하고 들어간ㄴ데 바울 전에 교회가 발견했다는 것은 무슨 소리인가? 바울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AD32-33년에 되었다. 그러니까 이와 같이 엄청난 신학이 바울 전에 이루어졌다면 예수의 십자가 죽음 직후에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엄청난 신학적 통찰력이 예수 그리스도와 직결됨을 증명해 준다. 이것이 만약에 바울 전의 것이라면 그렇다. 그래서 우리가 신학을 하면서 보수신학의 이해관계로 따진다면 이것이 바울 전의 교회에서 이미 이루어진 것을 바울이 인용하고 있다면 우리에게 더 유익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는 바로, 멍텅구리들은 이런 소리 하면 이단으로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불러주고 바울이 썼으니가 바울에게 있는 모든 것을 바울이 써야 했는데 무슨 소리냐? 바울 전에 교회가 하는 것을 바울이 인용했다고 그러면 영감이 좀 떨어지고 그러는 것이 아니다. 바울 전에 교회가 영감받아서 이렇게 신앙고백 했으면 이것이 더 귀중하다.

출처 : 잭슨빌 교회개혁포럼

글쓴이 : JaxHope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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