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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 제6강(김세윤 교수)

by 【고동엽】 2021. 11. 4.

바울신학 제6강

 

지난번에 바울의 소명까지를 한 것 같다. 오늘은 바울이 받은 계시로부터 시작하겠는데 오늘은 주로 바울이 받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대한 계시를 하고 다음부터는 바울이 받은 계시를 하려고 한다. 첫째로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αποκαχυπειν / αποκαλυψις이것이 계시란 말의 전문언어이다.

 

그런데 바울은 갈1:12-16 바로 이것이 묵시문학의 전문언어, 하나님의 계시를 두고 말하는 묵시문학의 전문어를 써서 자기의 다메섹 도상의 체험을 기술하고 있다. 갈1:12에 보면 “나는 사람으로부터 그것(복음)을 받은 것이 아니고 가르침을 받은 (배운 것)도 아니고 αποκαλυψις Ιησου  χριστου 예수 그리스도이 계시로 말미암아 복음을 받았다” 그 말을 16절에 펼치기를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나에게(문자 그대로 하면 -내 속에)αποκαλυψις(계시)하였다. 나로 하여금 그들 이방인들 가운데 복음으로 선포하도록 하기우해서 가를 나에게 αποκαλυψια 했다. 이렇게 묵시문학에서의 하나님의 계시를 위해서 쓰이는 전문언어를 쓰고 있다. 또 엡 3:3에는 또 하나의 묵시문학의 전문 언어인 μυστηριον 비밀 이라는 말을 이 αποκαλυψις이라는 말과 겸해서 사용한다. 그래서 엡 3:3 κατα αποκαλυψιν εσνωρισθη μοι ο μυστηριον 계시에 의해서 το μυστηριον 그 비밀이 내게 알려 지게 되었다.

 

또 고후 4:6에는 또 하나의 종말론적인 개념이 δοξα(영광) 이라는 말이 αποκαλυπτεα 같이 쓰인다. 바울은 이렇게 일련의 묵시문학적 전문 언어를 써가지고 지금 말한 갈 1:12,16/엘3:3 이라든가 고후 4:6 등은 다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을 기술하는 것들이다.

 

유대 묵시문학에서 이것은 전문언어라고 했는데 그것이 무슨 뜻을 가진 것인가?두가지 뜻이 있다. 사실은 하나의 뜻인데 서로 연결된 두 대목으로 되어 있다는 뜻이다. 첫째로 유대 묵시 문학에서 계시만 새로운 시대 곧 구원의 시대를 드러내는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사건을 두고 말한다. 곧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의 실현을 말한다. 그것은 종말에 이 세상 끝에 하나님이 구원을 완성해서 그 구원을 실현해서 구원의 시대 오는 세상을 본다는 말이다. 이 사건을 두고 말할 때 계시라고 한다(원래 의미).

 

그러나 동시에 두번째 의미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종말론적 구원에 대한 소망을 갖고 율법에 순종하도록 권면하기 위해서 꿈이나 환상들을 통해서 그 종말에 실현된 구원의 계획을 미리 선지자들이나 묵시가들에게 나타내 보이는것도 계시라 한다. 그러니까 계시는 종말에 일어날 것이다. 이것이 원래 근본적인 의미이다. 그런데 조말에 일어날 구원의 실현, 게시를 미리 이 세상에 있는 선지들이나 묵시가들에게 꿈이나 환상들을 통해서 나타내 보여서 이 선지자들이 종말전에 미리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대해서 선포하여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소망을 갖도록 하고 위로를 받도록 하고 그들에게 하나님께 순조하여 살도록 권면하게 한다. 그래서 계시가 이런 이중 구조를 갖게 되었다.

 

이런 개념적 배경에 비추어서 갈 1:12과 16절에서 바울의 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첫째로 갈 1:12,16에 있어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그리스도의 부활 출현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도의 부활 나타남을 의미한다. 그것을 바울이 말한다. 다메섹 도상에서 자기가 체험한 그리스도의 부활 나타남을 두고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한다. 부활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서(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해서 거기서 무엇을 깨달았어요) 바울은 종말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과 함께 시작되었음을 알았다. 왜냐하면 유대교에서 부활은이 시대이 끝과 새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행위로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부활이 일어났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바로 이 시대의 끝과 새 시대의 시작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갈 4:4/롬3:2ff/고후6:2 에서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그 구원의 사건 그리스도의 사건과 더불어 하나님의 구원이 실현되고 종말이 시작된 것을 선포한다. 그것을 두 두마디로 합쳐서 말하면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이 시작되었음을 알게 된다.

 

고후 6:2에는 무엇이라고 해요?“지금은 구원의 시대다 .종말에 일어나리라고 하는 구원이 일어났다” 갈 4:4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냈다” 하나님께서 종말에 굳원읠 실현할 때로 미리 예벙한 그 때가 되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냈다. 그래서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열렸다. 롬3:21절도 마찬가지다. “이방인들이나 유대인들이 다 죄아래 있었는데 이제 하나님의 의가 율법 밖에서 일어났다. 계시 되었다. 나타났다” 거기도 계시란 말을 쓰고 있다. 그런데 거기는 동사가 φανερι인데 αποκαλυπειν과 동의어 이다.

 

둘째로 그러나 이 종말적 구원의 시대가 실현되지 않았음도 동시에 깨달았다. 그래서 갈 1:14에 “그리스도가 그 스스로를 우리 죄들을 위해서 내어 주셨다”고 그래서 우리가 악한 세대로부터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선택 받았음을 말하고 있다. 이 악한 세대가 지금도 계속된다는 것을 깨달았고 고후 4:4에 보면 이 세상에 지금도 사단이 통치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 세상 신이 안 믿는 자들의 마음을 안믿는 자들의 이해하는 능력을 소경이 되게 눈을 멀게 했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영과의 빛을 못보게 만들었다. 이 세상이 아직도 이 세상은 이 세상의 신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다. 그래서 악한 세상이다. 곧 그리스도의 주권이 전 세계적으로 인정되지 않고 있다(고전 15:24ff). 그러면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무엇이냐?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에 불과하다(고후15:30). 아직 완전한 수확이 일어나지 않았다. 바울의 논 밭에 나가면 처음 나온 이삭에 불과하다. 그 처음 나온 이삭은 첫 열매이다. 이제 종말에 구원의 시대가 시작된 것에 불과하다. 그 그리스도의 부활은 첫열매에 해당한다. 아직 완전하 수확의 때는 당도하지 않았다 .그래서 바울은 롬 8:23에 이 성령의 첫 열매를 가지고 있는 우리 자신들도 και τοι αυτηυ αμαρχην του πνευματος εχοντες αμεις και αυοτι.....

 

우리의 하나님의 아들됨이 온전히 효력을 나타내기를 기다리면서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자들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 구속의 완성을아직도 기다리는 자로 표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좀 더 전문적인 언어를 써서 그는 고린도 전서 1:17/ 살후 1:7/골 3:4에서 그리스도의 αποκαλυψις를 기다린다고 말한다. 이 때는 αποκαλυψις의 원래 의미, 종말의 사건으로서의 그리스도의 계시(αποκαλυψις)를 기다린다. 곧 그의 재림을 기다린다. 고전 15:23/살전2:19/3:13/4:15/5:23/살후2:1,8f/빌3:20.

 

그때의 그리스도의 계시가 최후의 심판과 우리의 구원의 완성을 가져올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바울은 그리스도를 무엇에 적용하는가? 예수의 재림때 이것은계시의 원래 의미로 그런데 자기가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한 그리스도도도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그런 묵시문학적인 계시의 전먼운어의 틀 속에서 바울은 쓰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두 계시 종말에 일어날 재림을 두고 말하는 계시와 바울에게 다메섹 도상에서 주어진 게시의 관계를 어떻게 말해야 되느냐면 종말에 일어날 그리스도의 계시가 선취되었다. 그래서 종말에 일어날 그리스도의 계시와 더불어 올 구원의 실현과 지금 선취되는 구원 지금 우리가맛보는 구원과의 관계를 어떻게 나타내느냐? 바울은 첫 열매와 완전한 추수(완성)로 표현한다. 바울의 종말론도 이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구조가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과 연관이 되 있고 또 그것을 그리는 바울의 전문 용어를 통해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처음 오신과 그가 이룬 구원은 그의 최후의 계시와 최후의 구원의 임시적 실현이었음을 바울은 알게 되었다. 그래서 바울에 의해서 선포된 구원은 종말 때 계시될 최후의 구원의 선취의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러기에 바울은 구원을 현재의 실재로 선포하면서 벌서 우리가 맛볼 수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적어도 첫맛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으로 그 구원에로 사람들을 초청한다. 동시에 바울은 그것이 종말에 완성되는 것으로 가르치며 그 완성을 기다리는 특징으로 가지고 있다. 그래서 아까 내가 불러준 그 많은 구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린다. 대표적으로 빌3:20 “우리가 하늘로부터 오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이 비천한 몸을 그의 영광의 몸에로 완전히 변형시킬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미래에 오는 분으로 우리 몸을 비천한 몸을 영광의 몸으로 변형시킨다. 영화의 상태로 변형시킨다. 이것은 미래에 있을 구원의 완성이다. 그래서 구원의 3시제가 발생한다. 구원은 미래에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구원은 미래의 종말론적 실체이다. 그러나 현재에 이미 첫맛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그의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심으로 이것이 구원의 현재성이다. 아니 현재 우리가 못볼 수 있는 것은 그 구원 사건이 이미 일어났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음을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구원의 과거에 참여하고 미래에 올 구원을 향해서 가는 구원의 현재성. 그래서 구원의 3 시제를 가지고 있다. 바울의 서신에 보면 어떤 것은 우리가 믿음을 이미 구원을 받았다. 의롭다함을 받았다느 과거 부정과거 시제로 말하면서도 또 빌 3:20,21/롬8:23 등에서 구원을 미래로 말한다. 우리 몸을 완전히 변화시킬 것이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바울이 종말론적 전문 언어들을 써서 다메섹 도상에서의 계시의 사건을 기술한다. 그 말을 하기 위해서 몇 가지 사건을 덧붙인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을 하는이유가 오늘 집중적으로 추궁할 이 비밀이 하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비밀(μυστηριον)-mystery or secret 또는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영어판에서는 secret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μυστηριον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즉 재림 때까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취적 계시를 선포하는 복음은 유대의 묵시가들에게 주어진 계시와 같이 한 비밀이다. 왜냐하면 복음의 내용 곧 그리스도 안에 구원의 밸생했다는 것 그의 재림 때 그것이 완성될 것이라는 것은 이 시새에서는 믿는 자들에게만 환히 보이는 것이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감추어졌다는 말이다. 비밀이다. 아까 고후 3:4이 왜 그것이 감추어졌다고? 이 시대의 신이 그들의 마음을 눈멀게 해서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계시곧 재림 때 그것은 모드 자들에게 환하게 보일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지금 이 시애에서는 구원의 계시이면서 동시에 감추어진 것이다. 누구에만 계시해요? 믿는 자들에게만 그래서 계시와 감추어짐의 변증법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 복음을 비밀이라고 한다. 가령 고전 2:1 같은데 보면 사본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데 우리말 개혁 성경은 μυστηριον이라고 읽게 해서 “하나님이 증거”을 그렇게 번역을 했는데 요사이 댑분의 사본가들이 택하는 것은 거기 μυστηριον이 μυστηριον του Θεου이라고 읽는다. “하나님이 비밀을 내가 너희들에게선폰할 때에 내가 성숙한 자들에와 같이 하지 못하고 애들에게 하는 것처럼 한다”고 말한다. 즉 바울이 자기가 고린도에서 선포한 복음을 하나님의 μυστηριον라고 부른다.

 

2:6 이하에서 복음을 무엇이라고 하냐면 Θεου σοφιανεν ‘하나님의 비밀로 되어 있는 하나님의 지혜’ 그렇게 말한다. 이처럼 μυστηριον이라는 말을 자꾸 쓴다. 이것은 계시와 감추어짐의 변증법적 관계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바울은복음과 그 복음의 내용인 그리스도에게 라는개념을 적용한다. 고전 1:18-2:16에 대표적으로 그러는데 그 중에서 1:23/2:1,6/4:1 등 또 골 1:23-29와 엡3:1-13 까지에는 이른바 계시의 형식, Yale대학에서 오래 가르쳤던 노르웨이 신학자 N.A.Dahl은 이것을 “Revelation Schema”라고 하였다. 골 1:23-29까지 읽어보면..

 

그런데 거기서 집중적으로 26-27을 보세요. “ 이 비밀이 만세전과 모든 세대 전부터 감추어진 것인데 이제 그의 성도들에게 계시되었다” 거기서 φανερω가 αποκαλωτειν 이란 말과 동의어이다. 계시되었다는 말이다. 곧 하나님께서 이런 계시를 하나님의 영광이 이방인들 가운데 이 신비의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한 자들에게 계시되었다. 그런데 이 계시가 무엇이냐면 ο εσην χριστος(너희들 가운데 곧 이방인 너희들 가운데 선포된 그리스도가 바로 이 비밀이다). 그가 영광스러운 소망으로서 곧 비밀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에게 적용하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감추어졌던 것이 이제 계시되었다. 엡3:1-13도 바로 이런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고전 2:6-16가지도 마찬가지로 이런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지혜가 곧 하나님의 εν μυστηριον 비밀에 싸여 있는 지혜가 2:6에 보면 이러한 지혜는 이 세대의 지혜도 아니고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지혜도 아니다. 멸망하도록 되어 있는 폐기되어가는 이 세상의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다. 우리가 비밀 속에 싸여 있는 감추어진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데 하나님께서 이것을 만세전에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곧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예정하신 것이다. 8절에 이 세대의 통치자들 중 아무도 이 비밀을 담지 못했다. 그들이 만약 알았다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다음 성경 증명이나오고 10절에 보면 “그러나 하나님께서 영을 통하여 이 비밀을 우리에게 계시하셨다” 지금 무슨 소리예요? 이 비밀, 고전 2:6-10까지에 이 비밀 또는 이 비밀로 둘러싸여 있는 하나님이 지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이 세상에는 완전히 감추어져 있다. 이 세대에 속한 것도 아니고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전혀 모르는 것이다. 감추어진 것이다. 그래서 이 세대에서 전혀 몰랐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계시하셨다. 그래서 감추어졌던 비밀이 이제 계시되었다.

 

그것을 계시의 형식이라 그러는데 지금 고전 2:6ff와 골1:26,27/엡3:1-13까지 나오고 있다. 그런데 골 1:26,27에서 그리고 엡3:1-13에서 바울은 무엇을 비밀이라고 부르냐하면 그리스도를 비밀이라고 부른다. 그리스도가 비밀로서 옛날에는 감추어져 있었는데 그것이 계시되었다. 그것을 비교해보면 재미있다. 갈1:16/골1:26,27/엡3:1-13 여기서는 무엇이라고 하느냐면 하나님께서 그이 아들을 계시하셨다. 이방인들 가운데 그의 아들을 복음으로 선포하도로 ㄱ하기 위해서 여기서는 무엇이 비밀이예요? 너희들 가운데 선포된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이방인들 가운데 선포된 그리스도 그래서 이방인들 가운데 살아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가 비밀이다.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하나님의 구원을 나타내는 분, 실행하는 분이다. 엡3:3-

3절에 이 비밀이 계시를 통해서 내게 알려졌다.

 

4절에 보면 이 계시를 그리스도의 비밀이라고 한다. 즉 그리스도가 비밀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5절에 봄녀 다른 세대에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제는 이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그의 성령을 통해서 계시되었다. 여기서도 감추어졌다가 계시됨의 형식이 나온다. 지금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이 비밀의 내용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3:4에 그리스도의 비밀이라 해서 그 비밀의 내용이 그리스도란 말이다. 그것을 다시 한번 정의한다. 6절에 이 비밀이 무엇이냐면 이방인들이 그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부름을 받고 한 몸이 되고 구원의 약속에 동참자가 되었다는 것이 비밀이다. 여기서 비밀을 두번 넣었다. 비밀의 내용이 그리스도이고 그 다음에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것을 하나님의 구원의 성취로 간주한다. 누구와 더불어가 강조되어 있지 않으나 그 언어상 들어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εν χριστω 한 몸이 되고 구원 약속의 동참자가되었다 그래서 곧 이방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에 참여하게 돔 이것이 바울이 비밀이라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를 알 수 있는데 하나는 바울은 계시의 내용 곧 비밀의 내용을 기독론적으로 정의할 때 그리스도가 그렇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인데 무엇을 항상 내포하냐면 이방인들이 구원의 대상이라는 것을 내포한다. 이방인들의 구원의 혜택을 받는 자라는 것을 항상 내포한다. 이것은 그의 아들을 복음이라고 그런다. 여기서는 이방인들의 선포된 그리스도를 비밀이라고 그런다. 여기서는 아예 이방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의 동참자라는 것이 강조되었다. 그래서 기독론적인 정의에서 점차 교회론적인 또는 구원사적인 구원의 계획적인 강조점의 이동이 생긴다. 그런데 지금 이 구절들이 전부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을 두고 이야기한다. 자기가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계시 받았을 때의 체험을 두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무슨 가설을 얻을 수 있냐면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자라는 게시와 더불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원자로 내세울 때 이방인들도 구원하기 위한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방인들의 구원도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의 일부였다는 것을 바울이 깨달았다. 그렇게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로마서 11:25,26절에 나오는 비밀을 이해해야 한다.

 

롬 11:25,26 “형제들이여 내가 여러분들이 이 비밀을 모르기 원치 않는다 또는 형제들이 여러분들이 이것을 알기를 원한다는” 말은 중요한 선언을 위한 엄숙한 선언의 형식이다.아주중요한 내용을 전달하기위해서 독자들의 주의를 집중시키는 것이다. 자 이비밀이 무엇이냐면 그 다음 왜 그들이 이 비밀을 알아야 되느냐면 그들이 거만해 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다. οτι절 이하가 μυστηριον의 내용이다. 비밀의 내용이 무엇이냐면 부분적인 심장의 강퍅함(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이 이스라엘에게 임했다. 언제까지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드러올 때까지 역서 들어온다는 말은 전문용어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더는 말이다.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들어올 때까지 이스라엘에게 πωρωσις απο μεριυς 이것이 번역하기 힘든 말인데 이스라엘 백성의 일부가 왔다는 말이겠지. 숫적으로 (질적으로 보다는) 일부는 안강퍅해지고 일부 강퍅해져서 일부 하나님께순종하고 일부 안순종하고 그런 말이 아니고 이스라엘 전체에서 일부에게 심장의 강퍅함이 임했다. 여기서는 이것도 하나의 passium dividium이다. 하나님의 행위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심자에 강퍅함이 왔다는 소리는 누가 그들ㅇ의 심장을 강퍅하게 했다는 것이예요? 하나님이 그들의 심장을 강퍅하게 했다는 것이다. 언제까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때까지 그게 비밀이다. 그 다음 26절은 그 비밀의 내용에서 바울이 결론을 도출한다. 그러므로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이 비밀이 무엇을 내포하냐면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우리를 위한 구원의 사건이라는 것으로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을 이루고 종말에 우리의 구원을 완성할 분이라는 그것만을 내포한 것이 아니고 그 속에 무엇을 또 내포하느냐면 이방인들도 그 구원의 혜택을 받는다는 것도 내포되어 있다. 이 두가지가 비밀이라고 그런다.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자꾸 가면서 사상의 진전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받는다는 말은 성경적인 증거를 댄다. 기록된 바와 같이 곧 시온에서 구원자가 올 것이다. 그가 야곱으로부터 불순종 또는 불경건을 떨구어 버리고 등등..해서 사59:20/시14:7/렘31:33/사27:9 등을 겸하여서 인용함으로써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받는다는 결론을 성경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어디서 나온 말인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때까지 하나님께서 대부분의 이스라엘의 심장을 강퍅하게 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심장이 강퍅한 상태는 시간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언제까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올 때가지. 그러니까 여기에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구원에 이른다. 그것에 댛나 성경적인 증명이 여기 이사야서 시편 예레미야서 등에 나온 말이다. 자 그래서 여기서 바울은 무엇을 비밀이라고 하냐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비밀이라고 그런다. 먼저 이바인들의 충만한 수를 하나님의 나라에 데려와서 구원하고 그 뒤에 모든 이스라엘을 구원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인데 그것을 비밀이라고 한다.

 

이 일련의 비밀과 이것이 어떻게 내용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는가? 여기서도 전부 계시를 두고 말하면 항상 계시의 내용이 무엇이냐?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원의 사업 또는 하나님의 구원의 게획을 비밀이라고 그런다. 그런데 그것은 항상 무엇을 했어요? 이방인들이 구원의 혜택을 받는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롬 10장에서는 여기서는 아예 기독론적인 요소는 없고 구원의 게획만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다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언어상 하나 고찰할 것은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받는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랍비들의 숙어이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로서 그런 말이다. 그러니까 개개의 유대인 전부가 모든 개개의 유대인 이란 말이 아니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로서 그런 말이다. 바울이 자기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계시 체험을 그리고 이방인 사도로 부른 그 체험을 사 6장과 49장에 비추어 해석함으로써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을 터득했다고 나는 주장을 한다. 내 책에 대단히 길게 주장을 했다. 그걸 이제 증거를 좀 대야지 왜? 그렇게 생각하냐?

 

1)갈 1:15-16절에서 바울은 사49:1-6에서 나오는 주의 종의 부름을 인용해서 자기의 이방인 사도로 부름을 기술하고 있다. 갈 16:15,16에 바울은 두개의 구약 부름의 이야기 등을 인용하고 있다. 하나는 렘 1:5에서 선지자 예레미야를 부름, 또 하나는 사49:1-6에서 주의종의 부름. 모태로부터 이방의 빛이 되도록 부름. 그래서 바울은 자기 다메섹 도상에서 이방인 사도로의 부름을 어떻게 이해했다고요? 예리미야와 같은 선지자 주의 종의 부름, 이사야에 있어서 주의 종의 부름으로 곧 자기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부름을 예레미야서와 시아서야 49장의 빛 아래 비추어 해석을 이해했다. 사 49장에 근거해서 바울은 자기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부름을 해석했다는 것은 증명이 되었다. 그러면 사 6장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바울의 용어상 직접 관계 있는 것은 없다. 갈 1:15,16에서 사 49:1-2을 용어상 반영하듯이 바울의 어떤 말이 사 6장을 반영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우리로 하여금 사 6장을 유의하게 한다. 사 6장은 선지자의 부름의 전형이다. 그래서 그 곳에 하나님의 왕좌와 하나님의 궁정의 전경에 환상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진다. 그때 주로 부정적인 토론이다. 왜 그러냐면 랍비들의 언어에 이런 말이 있다. 조상들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등의 조상의 공로로 그의 후손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받는다는 것을 랍비들이 즐겨 천명한다. 그리고는 예외가 있다. 다름과 같은 놈들은 구원을 못받는다. 우상 숭배자들과 간음한 자들, 도적질 한 자들, 십계명을 어긴 자들은 구원을 못받는다고 들어 놓았다. 그러니까 모든이르사엘이 구원받는다는 소리는 개개의 구원받지 못한 이스라엘도 있다는 것을 항상 천명하는말이다. 유대인 전부가 구원받는 소리가 아니고 이스라엘 전체로서(대체로서) 그들이 구원받는다는 말이다.

 

자 이비밀을 바울은 왜 이스라엘의 메시야로 예수가 왔는데 정작 구원에 예정된 구원의 약속을 받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므로 구원 밖에 있느냐는 중요한 문제를 다루는 롬 9-11장 까지의 클라이막스에서 이 비밀을 지금 말하고 있다. 이 비밀은 분명히 바울이 터득한 구원의 계획은 분명히 바울의 선교 전략을 지배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구원의 계획을 바울이 터득했기 때문에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이다. 대부분의 초대교회의 사도들이 유대인 선교에 집착할 때에 바울은 그게 아니다. 지금은 어느 때요? 이스라엘의 심장을 하나님께서 강퍅하게 한 때이다. 아무리 가서 선포해 보아도 별 볼일 없다. 지금이 어느 때요? 이방인에게 복음을 선포해서 이방인의 구원의 충만한 수를 가져올 때이다. 그러니까 바울은 아주 과감히 이방인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선포한 것이다. 그래서 이 방인의 충많나 수를 채우려고 한 것이다. 자 이러한 비밀의 계시 곧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가 바울에게 언제 어떻게 임했느냐? 우리는 지금까지 이 배경에서 볼 때에 그리고 바울이 자기의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에 대해서 계시라든지 비밀이라든지의 묵시 문학적인 전문 언어를 적용해서 기술하는 것을 보아서 어떤 가설을 세울 수있는가? 이 구원의 계획도(롬1:25에서 말하는) 이 비밀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계시를 받았을 것이다. 그런 가설을 그러면 어떻게 받았느냐? 거기에대해서 자세헤 토론하는 주석가들을 보라. 여러가지 가설이 많이 있는데 나는 내 책에서 무엇을 강력히 주장했느냐면 사 6장과 49장에 근거해서 이사야 6장에서의 토론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어전회의라고 했는데 이사야가 하나님을 보았는데 하나님이 보좌에 높이 앉아 게시고 또 그곳에 천사들 스랍과 체루빔들이 부복하고 있다. 거기에 선지자 이사야가 환상 가운데 옵저버로 서 있다. 하나님이 자기 천사 대신들과 무엇을 상의해요? 이 패역한 이스라엘 민족을 심판해서 싹쓸이를 해버리고 다시 새 그루터기에서 나오는 새싹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새로 시작하겠다는 것을 상의한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상의하는 것인데 주로 심판을 상의한 것이다. 이 궁정회의에서 이것을 하나님께서 종말에 미래에 이루실 것이다. 이 계획은 그럼 우리가 누구를 보내서 이 패역한 민족에게 선포할 것인가?

 

그래서 이 패역한 민족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회개케 할 것인가? 그렇게 묻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그럼 누구를 보낼 것인가? 누가 가서 구원 계획을 선포할 것인가? 그러니까 이 천사들은 부복하고 감히 한 말도 못하고 가만히 있는데 이사야가 환상 중에 옵저버로 참석했던 사람이 한발 다가가서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소서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가 선지자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선포하는 자로 선지자의 부름을 받은 것이다. 메시지를 계시받고 그 메시지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다. 그것을 서너포하느 자로 부름을 받고 위임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가 거기서 보냄을 받는다. 이런 것이 선지자들의 부름에 늘 되풀이되는 것이고 묵시가들이 계시와 부름에서 되풀이 되는 것으로 이것을 רוס 또는 דר 라 그런다. 곧 하나님의 어전회의라고 한다. 영어로는 a Heavenly Assembly라고 한다. 즉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의 회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어전 회의에서 결의되는 하나님의 구원계획도 רוס 라고 한다. 그러니까 어전회의가 רוס이고 그 어전회의 결성사항인 구원의 게획도, 하나님의 뜻도 רוס라고 그러는데 이 때의 רוס를 헬라어로 번역하면 μυστηριον라 한다. 곧 비밀 구원의 게획이다. 묵시문학에서 비밀이 어떻게 계시되느냐면 이와같은 어전회의를 통해서 이다. 이것이 사 6장에서 나타난다. 그런데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높임받은 그리스도를 본 것도 사 6장과 아주 비슷하다. 사 6장과 평행점이 많다. 무슨 평행점이 있느냐? 첫째로 아까우리가 힘들여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 계시란 말 ποκαλυπειν 또는 ποκαλυψις,μυστηριον이라는 말을 계속 바울이 쓰고 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생각하게 하냐면 바울이 선지자와 묵시가들의 하나님의 메시지를 계시받을 대의 전형이 이사야 6장에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그런 형식의 계시를 기술하기 위해서 전문적으로 쓰이는 언어가 계시란 비밀이라는 것이다. 바울이 자기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을 바로 이와같은 계시란 말과 μυστηριον 이란 말로 기술하고 있음으로 해서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깨닫게 하냐면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부활하신 높임받아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본 사건도 이 선지자들이 또는 묵시가들의 하나님의 궁정회의를 보고 그것에서 μυστηριον을 계시받은 사건과 비슷한 사건이었을 것이라고 깨닫게 한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사 6장과 바울의 부름, 이사야의 환상과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환상 여기서 환상이라는 말은 vision과의 유사점을 살펴보면 첫째로 이사야도 주를 보았으며 내가 주를 보았다. 바울도 고전 9:6에 주를 보지 않았느냐? 자기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을 두고 하는 이야기인데 이사야도 그 주를 영광의 빛 속에서 보았다.

 

바울도 마찬가지로 그 주를 영광의 빛이 내리 쪼이는 상태에서 보았다. 고후 4:6/행9:2/26장에 보면 그 영광의 빛이 바울의 눈을 소경을 만들 정도로 찬란하게 나타났다. 영광 가운데 이사야도 주를 영광 가운데 보았다 .이사야도 자기의 선지자의 부름 때 용서와 화해를 체험했다. 이사야 6:7 ‘그것을 내 입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제단의 숫불로 이사야의 입술을 지진다. 그래서 죄로부터 해방시키고 깨끗하게 한다. 이 의식은 레위기 16장에 나오는데 구속의 날에의 속죄와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화목의식이 이사야에게 베풀어진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사야가 용서를 받고 하나님께 화목된 하나님의 거룩한 종으로 쓸만한 자로 갖추어짐을 의미한다. 그런데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그는 하나님의 원수로 행하며 교회를 핍박하는 자로서의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해를 받았다. 하나님이 바울을 화목시켰다. 자기의 원수로 자기에게 대항하던 바울을 자기에게 화목시켰다. 그래서 바울에게 있어서 우리가 나중에 바울의 구원론에서 자세히 살펴 보겠지만 가령 고후 5:17f 이하에 나오는 화목이라는 καταλαγη는 카테고리, 그리고 롬 5장에 나오는 화목이라는 카테고리,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이 죽음이 소외된 또는 적대 관계에 있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제사라고 해석하는 것을 화목이라는 카테고리, 메타포, 그림언어는 신약성경에서 바울만 쓰는 언어이다. καταλαγη 화목(reconciliation) 에수 그리스도의 제사를 화목제물로 해석하고 그의 십자가의 죽음을 하나님과 인가이 다시 친구가 되게 하는 화목하게 하는 주로 설명하는 것은 바울만이 쓰는 언어이다. 그래서 나는 내 책에 무엇을 괴장히 강조하였느냐 하면 바울이 이와 같은 독특한 자기의 하나님과의 적대라는 메타포 언어를 개발한 것은 또 이것의 전제가 무엇이냐하면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적이며 원수이다는 말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원수이다. 가령 롬 5장에 우리가 원수 였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기의 사랑을 베푸시고 우리를 자기에게 화복시켰다. 이런 원수라든지 화목이라든지 하는 언어는 신약성경에서 바울만이 쓴다. 왜 바울이 이런 언어를 개발했느냐? 자기 과거 때문이다. 자기가 하나님의 원수로 행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의 하나님과 화목되는 것을 체험했다. 그래서 사실은 고후 5:1-12이 전부 다메섹 도상에서의 바울의 체험에 근거하고 있다. 내 책의 1장에서 그것을 길게 증명을 했다. 그러니까 이사야가 그의 부름 때에 레 16장의 대 구속의 날, 제사 행위를 통해서와 마찬가지로 용서받고 화목되는 체험을 했듯이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의 원수로 돌아다닐 때에 어쨋다고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고 화목되는 체험을 했다. 그래서 사6:7과 고후 5:18/고전 1:8을 비교해 보라. 또 이사야가 하나님이 나타날 때 보냄을 받은 것같이 그때 나오는 동사가 הלשׁ이다. 이것은 αποσολλειν이다. 우리를 위해서 누구를 보낼꼬? 그런데 마찬가지로 바울도 그리스도가 나타날 때 보냄을 받았다. 그래서 자기를 뭐라고 부르는가? 보냄을 받은자, 사도라고 부른다. 사도란 말이 αποστολος 이다. 고전 1:23에서 바울이 무엇이라고 하는가? 그리스도가 나를 보낸 것은 세례를 주기 위해 보낸 것이 아니고 복음을 선포하라고 보냈다. 그렇다. 그리스도가 자기를 보냈다. 그래서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이 이사야를 보낸 것과 같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를 만났을 때 주가 바울을 보냈다. 그래서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이다. 가령 고전 1:17/롬1:1 등을 참조하라.

 

*구약의 묵시문학도 이미와 아직의 긴장이 있기는 하다. 그런데 거기서는 이미 쪽은 조금이고 아직 쪽은 많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오심으로부터는 이미 쪽이 많고 아직 쪽이 조금있다. 그래서 어느 계시나 이미와 아직의 구조가 있다.

출처 : 잭슨빌 교회개혁포럼

글쓴이 : JaxHope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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