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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연구 총정리〓/바울 신학(김세윤)

바울신학 제5강 (김세윤 교수)

by 【고동엽】 2021. 11. 4.

바울신학 제5강

 

지난번에 바울이 그리스도인 되기 전에 가진 신학적인 입장과 바울이 교회를 핍박한 이유까지 했다. 이 시간에는 다메섹 사건을 하겠다. 다메섹 사건을 위해서 무슨 준비가 있었다고 볼 수 있는지의 여부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보도록 하자.

1.바울의 다메섹에서의 변화에 대한 준비가 있었느냐?

 

바울이 교회를 핍박했다는 것은 그가 회심전에 초대교회,특히 헬라파 유대교의 선포를 알았음을 전제로 한다. 교회가 무엇으로 선포하는지를 알았기 때문에 그 선포라는 것이 마음에 거슬려서 교회를 핍박했을 것이다.

 

그래서 회심 전에 바울은 초대교회 특히 헬라파 유대교회의 케리그마를 알았다. 그는 아마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부활된 주라고 하는 교회의 신앙고백을 알았을 것이다. 또 그리스도의 죽음이 인간들의 죄를 위한 속죄의 죽음으로 구원의 사건의 의미를 알았고 그리하여 구원의 수단으로서의 율법이 효력을 잃었다는 정도의 헬라 유대교회의 케리그마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지나번에 이야기 한대로 바울이 교회르 핍박한 이유 두가지 중에 첫째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그리스도로 선포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율법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정도는 바울이 신학적으로 알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것을 준비라한다면 준비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것은 긍정적인 준비라기보다는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준비이다.

 

그런데 다메섹 사건의 바울의 회심에서 준비된 것이 있었느냐를 논할 때는 대개 심리적 준비과정이 있었느냐를 주로 논한다. 여기서 주로 토론되는 자료는 롬 7:7-25인데 이 구절이 바울의 자서전적인 자료로서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율법을 지킴으로서 의를 얻고자 하였던 바리새인으로서의 내적 강등을 그리고 있는 바울의 자서전적인 성격의 것이냐?

 

아니면 바리새인적인 것으로 바울 자신이 과거의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지킴으로 의를 얻고자 하는 바리새이으로서의 투쟁과 갈등을 그리고 있는 것이냐?

 

이것이 바로 토론의 주제이다. 만약 그렇다면 롬 7장은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회심 이전의 심리적 준비 과정을 그리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바울이 율법을 통해서 의를 얻을려고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자기의 죄악스러움을 깨달아서 율법으로는 도저히 의를 얻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라고 정말의 소리르 부르짖고 있는 것이다. 아마 여러분들이 다음과 같은 설교를 들었을 것이다. 바울은 자기가 핍박한 그리스도인들이 다 평화롭게 순교학도 의연하고 찬란히 얼굴이 빛나고 그래서 뭐 저런 사람들에게는 무엇이 있는가보다고 생각하고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핍박하다가 점점 핍박당하는 그 사람들의 신아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결정적인 단계가 다메섹에서 일어났다. 요새는 그런 설교 하지 않아도 옛날에는 많이 했다. 한국에서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이런 설교가 많으데 요새는 대개 그렇게 보지 앟는다. 그것은 다 가짜다.

 

왜냐하면 빌 3:5f와 갈 1:14ff을 보면 바울은 자기 자신의 다메섹 이전의 바리새인으로서의 삶을 그리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긍정적으로 본다. 긍정적으로 볼 뿐만 아니라 빌 3:5에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한다. 그래서 자기가 율법지키는데 어려움을 느기고 내가 율법을 못지켜서 ‘오호라 곤고한 자로다’가 아니고 나는 이만하면 됐다. 나는 흠없는 자다. 율법을 완전히 지켰다고 자부할 수 있는 자였다고 한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의 바리새인으로서의 과거, 율법의 행위를 알던 과거에 대해서 ‘오호라 곤고한 자’로 여기지 않는다. 전혀 긍정적으로 만존해 한 것으로 본다. 그래서 롬 7장을 말할 대 요새는 바울의 바리새인으로서의 과거를 자서전적으로 그리는 것이라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롬 7장이 무엇이냐? 크게 두가지 설이 있다 바리새인으로서의 자서전적인 것이 아니라면 하나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성화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요구와 그래서 의인으로 살고자 하는 과정 중에서 겪는 투쟁,갈등 이런 것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음으로 인하여 의롭다함을 받았으며 또한 동시에 아직 죄인ㅇ니 상태로서 성화의 과정에 있는 소위 Simuliustus et Peciator를 나타낸 말이다. 그리솓인이 믿은 후의 성화의 과정을 그린 것이라는 이런 설이 있다.

 

그런데 요새 지배적인 설은 그게 아니고 이건 전혀 자서전적인 요소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의 상황을 그린 것도 아니다. 바울이 아담의 상황, 또는 아담적 인간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또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나타난 이 구원의 사건의 빛 아래에서 보아서 객관적인 상황을 그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요새 주로 학자들이 많이 취하는견해이다. 율법 아래 있는 아담적 인간의 객관적 실존을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설을 제일 먼저 객관적 실존을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설을 제일 먼저 강력하게 창시한 사람은 W.Kummel이었고 그 이후 모든 Bultmann학파가 있고 그것을 좀더 세련되게 한 것이 E.Kasemann이다. 그래서 Kasemann의 주석책을 보면 이 설이 아주 대표적으로 잘 묘사되어 있다. 율법 아래 있는 아담적 인간의 상황을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빛 아래 객관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롬 7장에는 자서전적이 아니고 객관적인 것이니까 바울의 일생에 잘 맞출 수없는 요소들도 포함되어 있고 또 거기에는 보통 인간의 경험들 특히 율법을 지키는데에 대한 회의가 극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보통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율법 지키는 것이 그렇게 힘들지 않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즉 그리스도인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유대인들의 율법지키는 행위가 사실은 얼마나 어려운 행위였고 불가능한 행위였나를 안다. 유대인 자신들은 피상적으로 지키는 것으로도 만족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의가 아니고 진정한 의는 이러이러한 것인데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깨달음을 어떻게 알게 되느냐?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롬 7장에는 보통 인간의 경험들 특히 율법을 지키는데에 대한 인간의 능력에 대한 회의가 극단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율법 아래 있는 아담적 인간의 완전한 무력에 대한 통찰력은 율법 아래 있는 아담적 인간이 율법의 의를 이룰 수 없으며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에 대한 통찰력은 열성 있고 성공적이었던 바리새인 바울에게는 오직 회심 후에야 비로소 생겼을 것이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이 견해를 따르고 한동안은 이런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어던 사람들은 견해 1을 어떤 사람들은 격해 2를 부활시키는 경향이 없잖아 있다. 그런데 나는 3의 견해가 맞다고 본다.

 

견해1:자서전적인 성격으로 보는 견해

 

견해2:회심 이전의 심리적 준비과정으로 보는 견해

 

견해3:아담적 인간의 객관적 실존을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건의 빛 아래 조명한 것이라는 견해.

 

이에 대한 자세한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Kummel의 책에서부터 읽기 시작하여 최근에 나온 J.Dunn의 로마서 주석도 한번 보고 H.Gundry(LA 옆에 있는 바바라에서 가르치는 복음주의 학자)의 Article을 보라. 이런 사람들의 최근 경향은 이 두설(1,2) 중에 하나를 부활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견해 3이 일관적으로 맞다고 보느데 다만 거기에 내가 한가지 좀더 조정을 한다.

 

그러니까 롬 7장은 바울이 율법 아래 있는 아담적 인간의 상황을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그리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기는 한데 이 율법 아래 있는 아담적 인간을 그리는데 있어서 바울은 자기의 과거 율법 아래에서의 경험을 자료로 쓰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도둑질 하지 말라는 계명이 자기로 하여금 탐심을 일으키는 경험을 바울이 한다고 하는 인간으로서 그런 경험을 바울은 자료로 쓰고 있다. 그래서 견해 3이 맞는데 바울은 어떻게 해서 율법 아래 있는아담적인 인간의 상황을 알수 있느냐 하면 자기 스스로 율법 아래있는 아담적 인간으로서 과거에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자서전적인 요소가 있다. 과거 율법 아래서의 자기 경험을 일부 반영하고 있다. 그래서 자서전적인 요소들이 일부 있다. 그런데 율법 아래서는 율법을 지킬 수 없다. 그래서 ‘오호라 곤고한 자로다’ 그런 율법에 대한 절망은 과거의 자기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새롭게 깨달은 바 갈1:14이나 빌3:5f에서의 바울은 우리에게 자기 과거에 대해서 정반대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호라 곤고한 자로다’하기는 커녕 율법의 의로는 흠없는 자라고 스스로 말할 정도로서 만족하고 썩 자랑스러운 과거를 생각했다. 그래서 이 7장의 일부 바울의 자서전적인 요소들이 있으나 율법의 지킴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율법을 통해서 의를 얻는 것을 절망적으로 본 것은 과거의 요소들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깨달은 뒤에 자기가 자기의 과거를 뒤돌아 보았을때 ‘아 율법 아래 있는 아담적인 인간의 상황이 이것이구나’하고 깨닫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롬7장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에 대한 심리적 준비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이 회심은 심리적으로 준비되었다거나 조건되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았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준비가 있었느냐 할 때 일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초대교회의 케리그마를 알았던 것은 긍정적인 준비라기 보다는 사실은 부정적인 준비였다. 왜냐하면 그 케리그마에 반항을 했으니까 그렇다. 그러나 심리적 준비 같은 것은 없다. 예날에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바울 신학을 심리적으로 이해하려고 그랬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제 부활하신 에수 그리스도의 나타남을 본 사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가 바울에게 나타났다. 이때 쓰는 전문 언어가 ωφθη이다. 부활하신 예수의 나타남. 부활하사 예수가 보여졌다는 말이다. οραω의 aorist passive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보여졌다. 나타났다는 말이다. 그래서 부활하신 에수의 나타남을 말하는 전문적인 동사인데 바울은 바로 이 동사를 고전 15:8에서도 계속 사용한다. 그리스도가 죽고 장사되고 하나님께 일으키심을 받아서 게바에게 보이시고(ωφθη:보인 바 되고)그 다음 열 두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그 다음 야고보에게 나타나고 그 다음 모든 사도들, 그다음 오백여 형제들에 나타난다고 하는 series가 두개의 series다. 나에게도 나타났다(8절). 이것이 나타남의 series이다. 그런데 이 게바에도 ωφθη를 야고보에게도 ωφθη를 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면 다메섹 도상에 부활하신 에수의 나타남은 부활하신 에수의 게바에게 나타남과 야고보에게 나타남,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남과 동질의 것이다. 같은 Quality의 나타남,부활하신 예수의 나타남이다. 그러니까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보았다(εορακαΊ고전 9:1). ‘내가 주를 보지 않았느냐?’바울은 그렇게 이야기한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스스로를 부활의 증인들 중의 하나로 꼽는다. 그런데 자기가 마지막 증인이다. 자기에게 알려진 부활한 예수의 나타남은 여기까지이다.

 

그런데 만삭되지도 못한 자기에게도 나타났다. 그래서 만삭되지도 못한자는 문자 그대로 하면 유산된 자 같은 나에게 도 나타났다는 것이다. 자기가 부활의 증인들 속에 끼어들어간다. 끼어들자마자 그 문을 닫아 버린다. 자기가 마지막이니까 자기 뒤에는 없다는 말이다.

 

부활하신 예수의 나타남. 그러니까 그 뒤에도 예수가 가끔 나타나겠지요. 황상봤다는 사람이 하도 많으니까..... 그런데 그것은 부활-나타남과 다르다. 전문어로 쓸 수 있는 부활-나타남 그것은 바울이 아는데 까지는 여기까지 밖에 없다. 그런데 바울이 그 속에 자기를 유산된 자 같이 힘들여서 문을 열고 들어가서 마지막 부활의 증인으로 끼원놓고는 넣자마자 문을 닫아 버렸다. 그래서 자기가 예수의 부활의 증인들 중의 하나다. 따라서 초대교회의 사도직의 객관적인 조건을 충족시켰다고 본다. 누가에 의하면 초대 교회의 사도직의 조건이 두가지이다. 누가가 맛디아를 유다 대신 뽑는데 사도직의 조건을 두가지로 내었다. 하나는 세례요한 때 부터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때까지 우리와 함께 예수를 따라 다니면서 예수에게서 배워서 예수를 증거할 수있는 자, 즉 역사적 예수의 증인, 두번째는 부활의 증인 이조건을 엄격히 바울에게 적용하면 바울은 사도가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에게서 예수가 세례 받을 때부터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때까지 바울이 예수를 따라다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가가 바울을 사도로 인정했느냐 안했느냐 하는이것이 중요한 신학적 논점이다. 사도행전에서 누가가 바울을 한 두번 사도로 부르지만 그 외에는 사도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러면 누가에게는 사도는 12사도만 사도였느냐? 누가가 이른 바 구원사적 신학에 의해서 열두 사도에게만 사도직을 국한시켰느냐 아니면 바울도 사도로 인정했느냐? 이런 것이 누가 신학에 있어서 중요한 논점이다. 그런데 그것과 관계없이 바울은 이 사도직의 조건을 무엇으로 보느냐면

 

(1)그리스도의 부활-나타남(ωφθη)의 증인이어야 할 것

 

(2)그 부활-나타남 때의 높임 받은 주로부터 정식으로 보냄을 받았을 것.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자기가 사도라도 주장을 한다. 어쩌면 방금 예로 든 누가와 바울에게 있어서의 사도직에 대한 조건의 정의가 약간 다르면서도 우리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그 이유는 초대교회에서 바울의 사도직이 그렇게 인정이 안되어 가지고 바울이 자기의 사도직을 강력히 주장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점이 이해가 된다. 그래서 가령 갈라디아에서도 바울의 사도직이 좀 의심을 받아 가지고 문제가 많았다. 고린도 교회에서도 문제가 많았고 어쩌면 로마 교회에서도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상황을 우리가 잘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런 교회에서도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상황을 우리가 잘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런 교회들처럼 자기 사도직에 대해서 의심을 갖고 있거나 이를 부인하는 적대자들이 침투한 교회들에 쓰는 편지의 서두에는 바울이 항상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도로 임명된 바울’이라는 자기의 사도직을 제일 먼저 강력히 내세운다. 그러나 자기의 사도직에 대해서 다 인정하고 문제삼지 않는 빌립보 교회나 데살로니가 교회들에 쓸때는 구태여 자기가 사도라는 것을 별로 쓰지 않는다. 그 편지의 서두에서는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 디모데와...에게 편지를 쓴다’는 식으로 되어 있다. 자기의 사도직의 권위를 강조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편지의 서두에 자기의 사도직을 강조한 편지인 롬,고전,고후,갈라디아서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 교회들에서는 바울의 사도직이 문제거리였다. 고린도나 갈라디아에서는 문제가 되고 로마 교회에서 사도직이 인정되지 않는지 확실히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바울이 상당히 자기의 사도직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바울이 사도였는가 아니었는가를 다루면서 자기가 자꾸 사도라고 주장을 하는 것은 아마 예루살렘에서 파송받아서 고린도에 온 자들을 바울이 냉소적으로 위대한 사도, 초특급 사도라고 냉소적으로 그린다. 그러면서 그들을 거짓사도라고 한다. 이 친구들은 예루살렘에서 임명장, 추천장을 가지고 와서 ‘우리는 사도직이 예루살렘에서 다 공인된 사람들이다’고 했을 것이다. 바울은 이런 것이 하나도 없다. 종이짝 한장도 못 내놔봤다. 박사학위도 없고 목사 안수증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친구가 자기가 돌아다니면서 사도라 한다.

 

이처럼 고린도에 와서 고린도 교인들을 충동하니까 그 교인들은 ‘아 진짜 바울의 사도직에 결함이 있긴 있는가 보다. 왜 사도라면 당연히 우리더러 헌금 내가지고 그 헌금으로 월급 받고 먹고 살아야 할 터인데 그렇지 못하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집에 취직해서 열심히 천막을 만들어 가지고 월급 받아서 먹고 살면서 우리 교회에서 목사 노릇하는 것을 보니까 뭔가 캥기는게 있나보다’ 이렇게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바울은 고전9:1 에서 ‘내가 주를 보지 않았느냐?’그러니까 바울에게 있어서 부활하신 주를 보는 것이 사도직의 첫째 되는 요건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가사도임을 증명한다. 고린도전서에서는 그렇다. 그러면 에수도 복음을 전파하는 자들은 복음으로 먹고 살아가라고 그랬는데, 그권리를 포기하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천막 사업에 취집해 가지고 먹고살았느냐? 농담이 아니고 진짜로 그렇다. 왜 바울이자기 손으로 일해서 먹고 살았느냐? 바울은 자기가 복음을 공짜로 선포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자랑으로 여겼다. 그래서 자기는 사도의 당연한 권리를 스스로 포기했다고 한다. 자기가 사도직에 뭐 캥기는게 있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포기했다고 한다. 고전 9장에서는 그 정도로 설명하다. 그런데 고후 10-13장에까지 보면 이 친구들이 자꾸 그걸 가지고 물고 늘어졌다. 바울이 자기네들과 함께 그 교회에서 목사할 때는 자기들한테 돈 하나도 안받는 것이 바울이 사도직에 결함이 있으니까 캥기니까돈 한푼 안받고서는 에베소로 간 뒤에는 자꾸 디모데를 보내고 디도를 보내 가지고는 자꾸 헌금하라고 한다. 명목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교회에 갖다 준다고 헌금하라고 한다. 그래서 바울이 사기꾼이라 한다. 이렇게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오해하고 욕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거짓 사도다 결함이 있다. 예루살렘에서 안수증,임명장 잔득들고 온 사도를 보라. 당당히 사도권을 행사하고 헌금 내라고 해서 먹고 사는데 바울은 그렇지 못하고 여기 있을 때는 말도 똑똑히 못한 친구가 간 뒤에는 편지는 좀 무게 있게 쓴다. 진짜 그렇다. 고린도전후서를 읽어보라. 그러니까 바울이 아주 냉소적으로 말을 해요. 그렇게 전 상황에서 방루의 사도직을 의심한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진짜 바울의 사도직을 의심했든지 안했든지 바울은 그들이 자기 사도직을 인정하고 자기 복음을 인정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의 악수를 나누었다고 한다(갈2:9). 그런데 예루살렘 사도를 빙자하여 고린도 교회에 침투한 이른바 사도들은 바울 사도직을 부인했다. 그럼 그들이 맞느냐? 아니면 자기가 사도라고 끝까지 주장한 바울이 맞느냐? 우리가 지금 현재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느냐? 그래서 고후 10-13장이 바울은 자기의 사도의 표징들을 댄다. 사도의 표징이 무엇인가?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할례를 받고 율법 잘지키고 또 예루살렘과 연관되어 있고 또 환상을 보고 큰 성령의 은사를 주장할 수 있고 이런 것들의 사도의 표징이라고 내세웠다. 그래서 바울이 화가 나가지고 그런 것들이 사도의 표징이라면 나도 그들에게 부족할 것이 하나도 없다. 나오 아바르함의 자손이고 베냐민 지파이고 8일만에 할례를 받았도 또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고 나도 성령의 은사, 환상을 보고 무슨 이적을 행하고 그런 것들로 말하자면 그것데서도 뒤질 것이 하나도 없다. 나도 천상의 3층까지 갔다온 사람이다. 그리고 능력의 이적을 다 한 사람이다. 그런데 바울은 그 말을 하자마자 뭐라고 하는가? 이런 것들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여러분들이나를 자꾸 이런 말을 하도록 병신 만든다. 강요해서 내가 바보같이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표준이 아니라 그들은 그런 것을 표준이라 하는데 그런 식으로 하면 나도 그런 것 다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진짜 사도의 표징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으로서 그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여서 그의 사도직을 수행하는 과정에 있어서 고난을 자기 사도직의 표지으로 바울은 내세운다. 그래서 십자가의 복음을 선포하는 자로서 그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한 것, 자기의 사도직의 고난을 표징으로 바울은 내세운다. 그러면 우리에게 있어서 바울의 사도직을 그렇게 강력하게 내세운 것은 얼핏 읽으면 너무 자기 망상증에 빠진 자기 집착증에 빠진 정도로 오해받을 만큼 자기의 사도직을 강력히 내세우는 이유는 자로 사도직이 복음의 권위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 복음의 진리성과 복음의 권위와 직결되어 있다. 만약 바울이 사도가 아니면 그가 선포한 복음이 권위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복음의 진리성과 권위를 위해서 바울은 자기의 사도직을 방어하지 않으면 안된다. 변증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우리가 바울의 사도직을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의 문제는 결국 무엇에 달려 있는가? 바울의 선포한 복음의 진리성에 달려 있다. 그래서 바울의 사도직과 복음이 같이 간다. 바울의 복음이 진리이면 그는 진정한 사도였고 우리가 바울의 복음을 배격하면 그의 사도직도 배격할 수 밖에 없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그런 위기에 놓여 있었고 고린도 사람들도 그런 위기에 놓여 있었다. 어쩌면 갈라디아의 고린도에서의 바울의 그 엄청난 투쟁의 소문이 로마까지 퍼져가지고 로마 사람들도 바울의 사도직과 복음에 대해서 오해가 있을 가능성이 많으니까 바울이 로마서를 체계적으로 쓴 것이다. 자기 복음의 진리를 밝히기 위해서 로마서를 쓴 목적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그러면 어떻게 인정해야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기준은 그의 복음의 진리성이다. 우리가 그 복음을 진리로 받아들이면 우리는 바울의 사도직을 인정하는 것이고 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으면 바울의 사도직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부활의 증인으로서 사도로 부름 받았다고 주장을 한다. 그러니까 다메섹 사건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본 사건인데 이 사건은 한 편 사도로의 임명의 사건이었다.

 

둘째로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계시의 사건(αποκαλυψις 라고 한다.(갈1:12). 또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계시한 사건이라 그런다(갈1:16). 그래서 두번 모두 갈1:12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αποκαλυψις라고 하고 1:16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바울에게 계시하셨다. αποκαμυπτιν라는 동사형을 쓰고 있다. 이 αποκαλυψις와 αποκαμυπτιν라는 동사는 묵시문학적인 전문언어이다. 계시라는 묵시문학적인 전문언어이다. 이 전문언어로서 하늘에 이미 결정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이 세상 끝-종말에 하나님에 의해서 이 세상에 그 구원의 계획이 드러나게 하다는 것을 계시라 한다. 그래서 이것은 종말론적인 개념-묵시문학적인 개념이다. 이미 하늘에 있는 하나님이 구원의 계획이 이 세상 끝에 드러남, 그것을 계시(αποκαλυψις)라 한다. 이것이 종말론적인 첫째 의미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이 종말에 세상의 역사 속에 드러나서 새 역사 새 세상을 시작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선지자들이나 묵시자들에게 미리 나타내져서 선지자나 묵시자들이 종말에 만 천하에 드러나 모든 사람에게 계시될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미리 알고 미리 선포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이 세상의 고난 속에서 희망을 가지고 살도록 위로하고 권면하고 또 타락하지 않도록 경계하고 그런 역할을 하도록 한다. 그래서 이렇게 선지자들이나 묵시자들에게 미리 나타낸 것도 계시이다. 이런때 쓰는 말이 αποκαλυψις이다. 그러니까 이것이 원래 의미이다. 종말에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사건으로 드러남-구원이 성취되어서 드러남 이것이 계시이다. 그것은 선취로서 미리 드러남이 계시의 두번째 의미이다. 이런 의미를 갖는 전ㅁ누언어로 αποκαλυψις라는 말이 쓴인다. 그런데 바울이 바로 다메섹 도상에서 자기에게 나타난 예수를 바로 이런 언어를 사용해서쓴다. 여기서 또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바울은 나중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αποκαλυψις라는 말을 재림에 대해서도 쓴다. 고전 1:7에서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린다. 그때 쓴 말이 αποκαλυψις라는 말이다. 재림을 기다린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살후 1:7/골3:4에서도 비슷하다. 이렇게 바울은 예수 재림의 원래 의미로 αποκαλυψις라는 말을 쓴다. 종말에 나타나서 구원이 완성되고 새하늘과 새땅이 시작된다.

 

그런데 바로 종말에 그리스도 예수의 αποκαλυψις가 있을 터인데 자기에게 미리 다메섹 도상에서 αποκαλυψις가 일어 났다는 의미로 쓰고 있는 것이다.(갈1:12,16). 여기서 우리는 좋은것 하나를 발견한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의 αποκαλυψις-그 재림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다메섹 도상에서의 계시는 종말에 있을 계시의 선취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한 영광가운데 나타났고 그래서 자기에게 온 예수를 즉 자기에게 일어난 예수의 오심-παρουσια를 재림할 영광가운데 오실 (παρουσια할 또는 αποκαλυψις할)주 예수 그리스도의 선취라고 보았다. 그것을 뒤집어 말하면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예수의 계시를 체험하고 곧 그가 자기에게 오심-παρουσια를 체험하고 그것이 종말에 있을 παρουσια와 αποκαλυψις의 선취로서 종말에 바로 자기가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한 그 예수의 계시와 만남이 있을 것을 확신했다.

 

이와 같은 묵시구조 때문에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 허락된 예수 그리스도의 αποκαλυψις는 재림의 선취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는 영광의 빛에 휩싸여서 나타났다(고후4:6/행9:3/22:6/26:13). 여기서 바울은 예수를 그리스도,주로,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형상등으로 깨닫게 되었고 이 체험은 바울에게 있어서 내적 개종을 가져오는 사건이었다. 곧 자기의 죄악스러움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체험하고 또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하였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됨을 체험했다(고후5:17). 고후 5:17도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을 반영하고 있다. 내 책 첫 부분에 내가 상당히 자세히 그것을 논의 했다.

 

이러한 현상이 다메섹 도상에서 일어났다. 자 그러면 이런 현상들을 자세히 보기 시작하다.

 

a.준비

b.그리스도의 부활-나타남,다메섹 도상에서의 사건 자체

c.사도로의 부르심

 

다메섹 사건을 바울은 사사로운 회심으로 이해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도로서의 부르심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가령 고전15:8ff/9:1ff/갈1:16에 이런 것이 강력히 나타났다. 구체적으로 그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깨달았다. 이방인들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 그래서 다메섹에서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은 바울의 복음과 그의 이방인을 위한 사도직으로 부름의 원천이었다(갈1:12/16).이러한 사실을 바울은 누차 강조하고 있다(살전2:4/갈2:7/롬1:1,5/15:15/고전1;17 등등).

 

그런데 많은 학자들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후 여러해 후에야 비로소 이방인들을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깨달았다고 보려고 한다. 그들은이런 가설을 전제하고 있다. 회심 후 바울은 유대인들 간에 복음 선포를 하였으나 그것을 실패하고는 후에 ‘아 지금이 유대인들에게 설교하는 때가 아니구나 유대인들은 그 심장이 완약해져서 지금 구원받을 때가 아니다 그러니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겠구나’하고 그 후에야 ‘이방인들에게 가서 복음을 선포하자’고 하였고 그들의 반응이 좋자 자기가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는 확신을 점차 가지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것이 다 옳지 않음을 내 책에서 자세히 밝혔다. 갈1:16에 바울의 논증을 자세히 보면 자기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계시하심은 그의 아들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으로 선포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그래서 자기를 이방인 사도로서의 부름과 그 부름의 내용은 다메섹 사건과 직결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나중에 자기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을 그런 식으로 해석했다고 그러는데 그렇지 않다. 지난번에 더 내가 이야기했을지 모르지만 그래서 바울은 혈육과 의논하지도 않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사도들한테 더 조언을 받을 것도 없고 곧장 아라비아로 갔다. 그런데 아라비아 사막의 뙤악 볕 밑에 가서 2,3년간 묵상기도 하러 간게 아니다. 많이 그렇게 해서 쓸데없는 은혜를 끼치는데 그러지 않았다. 아라비아로 간 이유는 바로 전도하러 갔다. 아라비아가 지금의 사우디 아라비아가 아니고 다메섹 성밖 아라비아이다. 다메섹 언저리에 있다. 거기에 당시 나바티아 왕국이 있었다. 나바티아 왕국에 가서 이방인들에게 열심히 전도했다. 자기가 부름받은 대로 계시 받은 대로 복음을 선포했다. 그러자 거기서 반대측 사람들에게 몰려가지고 나바티아 왕 아레타스 4세가 바울을 체포하려고 다메섹 성밖에 경비원,전경들을 풀었다. 그래서 바울이 광주리를 타고 도망했다. 기도원에 조용히 굴속에 들어가서 기도하는데 뭘하러 잡으려고 애썼겠는가? 열심히 가서 예수가 하나님이 아들이고 우리 죄를 위해서 죽었다고 그러니까 그곳의 종교와 엇갈려서 ‘이놈 안되겠다. 귀찮은 놈이다’고 하여 체포하려고 한 것이다. 이렇게 바울은 처음부터 열심히 복음을 선포하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아라비아로 간 것은 기도원에 간 것이 아니고 전도하러 갔다. 그래서 처음부터 이방인 사도로 나서서 아라비아에서 전도하다가 거기서 쫓기고 자기 고향 다소로 가서 거기서 전도하여 상당히 명성을 얻었다. 목회를 잘한다. 전도를 잘한다고 명성을 얻었다. 그래서 이제 안디옥 교회가 번성했다. 안디옥은아마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혼합교회였던 보양인데 거기에 교회가 자꾸 팽창을 하니까 예루살렘에서 바나바 목사를 목회하라고 파송했다. 그래서 바나바가 가만히 보니까 자기가 혼자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자기 보더 좀 더 똑똑한 길리기아 지방 다소에서 목회를 아주 잘한다고 바울 목사를 청빙하러 가서 청빙해왔다. 그래서 바울이 바나바의 부목사 노릇을 좀 하다가 같이 선교사로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서 선교하다가 두번째 선교부터는 그 역할이 뒤집어져 버린다. 첫번재 선교 여행 도중에 아무래도 바울이 더 능력있는 설교가, 목사이니까 바울이 당회장 목사가 되고 바나바가 부목사가 된다. 사실 그런 것이 은혜있지 아라비아에 가서 혼자 뙤악볕 밑에 기도한 것은 은혜가 하나도 없다. 또 이렇게 바나바 같은 훌륭한 목사, 번성하는 교회를 자기가 감당하기 힘드니까, 자기보다 능력있는 사람을 부목사로 청빙해온다. 우리 한국 교회에서는 자기보다 능력있는 사람을 절대로 부목사로 안쓰지. 교회 뺏기고 자기 왕국 뺏기니까 절대로 안쓰지! 바나바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가? 또 바울도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가? 갈1:14에서 자기가 자기 동료들 중에 최고였다. 유대 율법 가말리엘 문하에서 자기가 최고의 학자였다. 자기가 다메섹에서 엄청난 계시의 체험도 하고 다소에서 지금 목회에 괸장히 성공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아닌 바나바가 나같은 사람을 부목사로 오라고 해? 에이 나 그런데 안간다 고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바울도 얼마나 훌륭하고 겸손한 사람인가? 아여간! 그런 것이 은혜이지 쓸데없이 아라비라에 간 것, 은혜 하나도 없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이방인 사도로 부름을 받았짐나 바울이 가는곳마다 전략적으로 그의 설교를 유대 회당에서 시작을 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두고 바울이 원래 이방인 사도로 다메섹 도상에서부터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고 그냥 복음선포하는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가 처음에는 유대인들에게 열심히 선포하다가 유대인들이 마음이 강퍅해져서 복음을 잘 안받고 도리어 이방인들이 복음을 잘 받으니까 ‘아 유대인들은 지금은 구원받는 때가 아닌가 보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선포에 전력해야 하겠다.’하고서 비로서 그때에야 이방인 사도라는 확신을 갖고 자기의 다메섹 사건을 뒤돌아보면서 ‘아 그때 사실 내가 이방인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는 식으로 추후에야 해석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대개 이런 것을 근거로 둔다. 바울이 가는 곳마다 유대 회당에서 시작했다.

 

그런데 이것이 말도 안되는 소리가 바울이 자기가 이방인 선교라고 강력히 주장한 것이 바로 갈라디아서 같은데서 이다. 갈라디아서가 AD49년 쯤에 쓰였다. 그러니까 자기가 이방인 사도라고 강력히 주장하는 갈라디아서 같은곳에서도 주후 49년 이후에도 가령 바울이 고린도 같은데에 50-52년 쯤에 가서도 회당에서 시작을 하다. 바울이 유대회당에서 복음 선포를 시작하는 것과 그의 이방인 사도라는 확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유대 회당에서부터 시작한 것은 다른 이유가 있다. 자기가 이방인 사도라는 확신이 없어서가 아니고 이방인 사도지만 유대 회당에서 시작을 했다. 그 이유는 첫째는 신학적인 이유이다. 이것은 복음이 구원사적 우선권이 유대인들에게 있다. 그래서 심지어 바울이 57-58년에 로마 사람들에게 쓰는 편지에서도 복음이 먼저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그것은 구원사적 우선권이다. 그들이 먼저 선민으로 먼저 차지할 수있다. 그러나 시간적이 우선권은 아니다. 바울은 이것을 롬 11:25,26에서 밝힌 것이다. 시간적으로는 이방인들이 먼저 충만한 수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야 한다. 그리고 나서야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받은 것이다. 시간적으로 먼저 이방인들이 우선권이 있다. 그러나 구원사적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어서 그들이먼저 복음을 들을 권리가 있다. 그러나 복음을 덧입고 하는 것은 이방인들이 먼저다. 그래서 구원사적 우선권을 위해서 일단 회당에 먼저 가다.

 

그러나 그보다는 더 실제적인 장점들이 회당에 더 많이 있다. 당시 회당은 여행하는 유대인들에게 여관,호텔 노릇을 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에 갔다. 그러면 어디가서 자느냐? 제일 잠자기 좋은 데가 회당이다. 또한 회당에서는 노동중계도 했다. 그래서 회당에 가서 ‘내가 어디 어디서 온 유대인인데 원래 다소 출신인데 한 도안 예루살렘에서 살았소. 그리고 우리 집안 대대로 천막을 만드는 사람이요. 회당장! 어디 직장 알선좀 해주시요.’ 그러니까 ‘아 그래요, 여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라고 하는 큰 천막 회사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원래 로마에 본점이 있었고 고린도, 에베소에 지점이 있는데(요새말로 하면 다국적 기업가 였다. ) 글라우디오 황제가 로마에서 유대인들을 다 내쫓아 버리므로 지금 고린도의 지점에 와서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거기가서 어떻게 일자리는 구해보자!’ 그래서 거기서 바울이 취직을 했다. 회당에서 취직 알선도 해준다. 그래서 바울이 법을 벌어 먹고 일할 수있었다.

 

그런데 회당에는 이방인들이 있었다. 두 종류의 이방인들이 회당에 있었다. 하나는 개종자들:이들은 아예 할례를 받고 유대인이 된 사람들이고 유대 율법대로 할례까지 전부 받아서 유대인들이 된 개종자들(αροσελυτης)이고 또 하나는 유대교에 매력을 느끼고 유대의 신앙과 유대 도덕을 높이 평가해서 유대의 회당의 예배에 참석하면서 유대교의 가르침은 받으나 할례를 받고 아직 개종하지 않은 자들, 이런 자들이 하나님을 경회하는 자들(σεβομενον)이라 한다.

 

바로 이런 두 부류의 이방인들이 여기 회당에 앉아 있었다. 이 사람들은 구약으로 잘 준비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회당에 가서 에배때 앉아 있으면 유대 회당에는 목사가 없고 회당장이 예배의 리더였다. 회당장이 안식일 그 날에 읽기로 되어 있는 율법 모세 오경 중의 한 구절을 읽고 그런 것을 언제 시작했느냐에 대해서는 토론이 많다. 어쩌면 선지서에서 한 구절, 또 거룩한 책, 시편 이라든지에서 한 구절 읽는다. 그런 것을 lectionary라고 하는데 lectionary가 정확히 언제 시작되었느냐에 대해서는 토론이 많다. 어쩌면 바울 이후에 시작되었는지 바울 때 이미 시작됐는지 우리 기독교에도 카톨릭이나 성공회,루터교에도 그런 것이 있다. 1년 52주 매 주 읽는 성경 구문을 정해 놓았다. 구약의 한 구절,복음서 한 구절,서신서 한 구절,설교도 될 수 있으면 정해진 본문을 따라서 설교한다. 이런 것을 lectionary라고 한다. 그 흐름을 따라 읽는다. 읽고나서는 회당장이 우리 중에 누가 좋은 권면의 말씀이 있으면 나와서 하라고 하면 바울이 저 뒤에 앉아 있다가 후다닥 나와서 바로 오늘 그 읽은 말씀 나사렛 예수를 통해서 성취가 되었다 하면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개중에 유대인들 몇은 ‘하 그것 그럴 듯하다. 좀 더 들어보자’고 바울에게 요구하겠지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이런 못된 놈이 어디가 있느냐 당장에 나가라’고 한다. 그런데 이 개종자들 특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아주 솔깃하다. 자기들은 유대 회당에 백년 다녀 보았자 겨우 2등 시민 구원 받을가 말까 할 정도인데 조금 설교를 관대하게 하는 이른바 자유주의자는 우리에게도 구원이 있다고 그러는데 유대 민족 보수주의자니 보수 근본주의자는 이방인이 개종해도 할례 받아도 소용이 없고 겨우 유대인들 종노릇이나 하므로 찌거기나 조금 얻어벅는다고하다. 그런데 바울은 뭐라고 하는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아무 차이 없다. 하나님의 은혜로 빋음을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의롭다 함을 받는다. 그러니까 ‘야 그것 썩 좋은복음이다. 그것 우리끼리 좀 더 들어보자’ 해가지고 바울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간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서도 유스도 집에 간다.

 

바울이 이 σεβομενον들 일부 이방인 개종자들을 데리고 교회를 세웠다. 얼마나 훌륭한 준비된 사람들인가? 복음은 딱 알아 듣게 준비된 자들 바로 이런 실제적인 선교적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 바울이 회당에 간다. 우리가 아는 바에 의하면 행 16장에 보면 바울이 빌립보에 갔는데 그속에는 유대 회당이 없다. 유대인 회당이 있을려면 유대인 남자 10명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정족수이다. 남나 10명이 있어야 유대 회당이 생기는데 당시 빌립보시 사정상 유대인들이 별로 없었나 보다. 그래서 남자 10명이 없어서 회당이 없다. 그래서 안식일날 바울이 시냇가 빨래터에서 하나님을 경회하는자 몇이 모여서 기도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간 것이다. 거기서 만난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루디아이다. 그래서 그에게 선포해서 빌립보 교회를 세운다. 그래서 바울 선교의 첫 target는 바로 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이다. 그래서 이들 유대 회당에 먼저 가서 복음을 선포한 것은 바울의 이방인 사도직을 충실히 이행함의 일부이지 그가 이방 사도라는 확신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래서 바울이 다메섹 도사에서 이방인 사도로 부름을 받고 먼저 어울리기 시작한 것이 헬라 유대 그리스도인들 소위 헬레니스트들이다. 그래서 바울이 아라비아에 가서 복음 선포를 하고 나바티아왕 아레타스에 의해서 쫓긴 뒤(고전11:32/행9:24) 다소로 가서 거기서 목회를 했는데 바나바가 안디옥으로 보셔다가 이방인 선교사가 되었다. 바울의 이름이 좋은 목회자로 훌륭한 목회자로 명성이 높았다. 갈1:24에도 반영되어 있다. 바울은 이때의 자기의 사도직의 부름을 자기로서는 저항할 수없는 강제성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가령 빌3:3에 바울은 그리스도에 의해 붙잡혀 체포되어 징집되어 복음을 선포하도록 하는 숙명적 하나님의 강요를 받은 것을 느겼다. 고전 9:16ff에서는 복음 선포하는 것이 나의 숙명이라고 그랬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안으면 나에게 화가 있다. 교회를 핍박하는 그리스도의 원수로 행하고 있을 때에 그리스도가 그를 체포하여 자기의 종으로 만들고 복음을 선포하도록 임무를 주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그의 주로 부터 복음을 선포해야 할 필요성 숙명αναγκη로 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가 없었다. 그 부르심은 구체적으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것이었고 그래서 바울은 헬라인들에게나 야만인들에게 다 빚진자라고 한다. 롬 1:14(οφειλετης)에 보면 바울이 자기가 헬라인들에게나 이방인들에게나 빚진자라고 그런다. 이것의 의미는 많은 사람들이 하듯이 우리가 다 미국 사람들이 복음 전해 주어서 우리가 복음을 공짜로 받았으니까 그복음을 인도네시아 사람,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어야할 복음의 빚을 졌다고 하는 의미도 아니다. 또 도시 사람들이 농촌 사람들의 피땀 어린 농사를 지어서 그것을 먹고 살고 공장 큰애기들이 옷을 짜주어서 입어서 빚졌다는 의미도 아니다. 이 빚졌다는 말은

 

1.상법적 개념으로서 채무자라는 뜻이다. 그래서 빚을 갚아야할 의무가 있는 자.

 

2.전의어:‘...할 의무를 가진 자’라는 뜻으로 지금까지 많은 주석가들이 대개 이런 식으로 바울이 자기가 헬라인이나 야만인들에게 즉 모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해야할 의무를 가진 자라는 것을 강력히 표현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썼다고 많이 주석을 한다.

 

나는 주장하길 원래 바울은 (1)의 의미로 쓴다. 바울이 실제적 이방인들에게 빚을 졌다. 왜 바울이 빚을 졌다고 그러느냐면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사건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본다. 그래서 부른다는 말 καλειν이라는 말을 바울은 보통 자기 아닌 다른 사람들,구원의 사건을 두고 말한다. 또 은혜라는 말도 그렇다. 은혜(χαρις) 라는 말도 보통 바울은 다른 사람에게 쓸 때는 구원사건을두고 말한다. 그런데 바울 자신에게 대해서 이말을 쓸때는 항상 자기 사도직을 두고 말한다. 자기 사도직으로의 부름,자기 사도직의 은혜(롬1:5/15:15ff)것을 말한다. 그래서 바울은 ‘주어진 은혜’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이 말은 아예 자기의 사도직을 말한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런 말은 구원의 사건을 말한다. 바울은 이 현상에서 우리가 무엇을 발견하게 되느냐면 자기에게의 구원이 자기의 사도직의 형태로 왔음을 암시하고 있다. 바울의 구원은 자기의 사도직으로의 부름에 내포되어 있다. 어째서 바울은 이런 인식을 하게 되냐면 아주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이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구원했다. 여기서 바울은 내가 구원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축복받았다로 끝나지 않는다. 그의 사고가 이렇게 끝난다면 이것은 자기 중심적 사고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분으로 인식이 된다. 그러나 바울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으로 하나님이 나를 구원했다는 것은 내가 우주의 중심이고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기 뒤애서 존재하는 내 종이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주의 중심이고 그 우주의 중심인 주권자가 그의 주권자적인 뜻에 의해서 나를 구원했다면 그주권자의 뜻을 위해서 나를 구원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어디다 쓰기 위해서 구원한 것이다. 하나님이 구원자로서 나를 구원한 것은 그의 뜻이 있어서 나를 구원했는데 그 뜻은 나로 하여금 그를 섬기도록 위해서이다. 그러면 나를 구원한 그 뜻은 무엇이냐? 바울은 무엇을 깨달았는가? 갈1:16 등에서 보면 이바인들을 구원하려는 뜻,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해서 이방인들을 구원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 그래서 갈 1:12,16에서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구원의 사건을 항상 부르심으로 그린다. 이방인들에게 사도직하라고 사도직으로 부르심으로 그린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구원의 사건을 단순한 구원의 사건으로 즉 자기가 구원받아서 나는 좋다는 식의 사건으로 보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쓰시기 위해서 부른 사건으로 본다(고전9:16αναγκη). 그 하나님이 쓰시기 위한 부름 속에 자기의 구원이 내포된 것이다. 왜냐하면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자기 주권자적으로 나를 쓰기 위해서 구원한 것이다. 나를 쓰기 위해서 선택하고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해서 그러니까 갈 1:16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그의 아들을 복음으로 선포하도록 하기 위해서 나에게 그의 아들을 나타내리라’고 되어 있ㄷ. 그럼 거기에서 강조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께서 바울을 불러서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한 목적이 무엇인가? 바울을 구원하기 위해서인가? 그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게 큰 목적이고 그 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바울을 쓰기 위해서 바울을 구원했다. 그러면 바울이 누구 덕분에 구원받은 것인가? 이방인 덕분에 구원받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방인이 아니었다면 바울이 구원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바울이 이방인에게 빚졌다. 자기의 구원의 빚을 졌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신실하게 이행하므로해서 자기는 그 구원의 빚을 갚는 것이고 자기 구원을 체험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로서는 상당히 긴 설명을 해야 겨우 알아 듣는 사실인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너무나 구원을 우리 중심적으로 생각해 왔다는 것을 말한다. 신본주의 입장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우리 각자가 구원받았다면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았담녀 우리는 무엇을 물어야 하는가?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무엇에 쓰기 위해서 나를 구원했나?

 

그러면 우리는 바울과 같이 구체적으로 답할 수있다. 어떤 사람들은 중국 사람을 위해서, 어떤 사람은 이북 사람을 위해서, 어떤 사람은 아프리카 사람을 위해서 아니면 어떤 사람은 전라도 광주 사람을 위해서, 어떤 사람은 서울 사람,아니면 내 학새들을 위해서 부름 받았다는 식으로 우리가 어떻게 알아 들어야 하냐면 우리가 그 사람들 덕분에 구원받은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빚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으로 심지어 우리의 구원사건까지 하나님 중심적으로 보았을 때, 우리는 빚진자임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와 우리 회중과의 관계가 섬김의 관계가 되어야 한다. 내가 내 회중 덕분에 구원받은 것이니까 내 회중을 빚진자의 심정으로 섬기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그리스도인들간의 상호관계는 빚진자와 섬김의 관계이다. 그래서 빚진자로서 섬김이 상호관계이다. 이럴 때에 목사는 회중 위에 군림할 수 없고 선생은 학생들 위에 군림할 수가 없다. 섬김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웃은 이웃에게 군림할 수 없다. 이웃은 이웃 덕분에 구원받았다. 그래서 이웃을 빚진자로 섬겨야 한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인들의 관계는 사랑의 섬김의 관계가 되어야 한다. 바울은 이와 같이 자기가 빚진자이기 때문에 자기 구원이 사도직으로 왔기 때문에 이웃에게 복음선포하는 것으로 왔기 때문에 고전 9:16에 복음 선포하는 것이 나에게 숙명αναγκη라고한다. 그래서 이 숙명을 거스리면 자기가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내가 복음 선포하지 않으면 화가 있다. 이것은 내가 멸망을 받는다. 그래서 이와 같은 필연성, 그리고 강제성, 이런 것들을 바울은 아주 강력한 말들로 표현을 한다. 빚진자,숙명,빌3:14f ‘그리스도에 의해서 체포된-징집된’ 이런 식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우리도 우리 소명감에 대해서 이런 확신을 갖고 덤벼야 바울 발바닥이라도 따라 갈 것이다.

출처 : 잭슨빌 교회개혁포럼

글쓴이 : JaxHope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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