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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한 칼빈주의 / Ian Hamilton / 신호섭 역

by 【고동엽】 2021. 11. 4.

당당한 칼빈주의

- Ian Hamilton/신호섭 역


겸손은 그리스도인의 덕목이다. 겸손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이 기질적으로 얼마나 조용하고 얌전하며 공격적이지 않은지 관계없이 전혀 선천적이지 않은 덕목이다. 따라서 칼빈이 야고보서 4장 10절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를 강해하면서 어거스틴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는 것처럼 기독교 신앙과 생활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겸손이다. "나무가 뿌리를 땅 아래 깊숙이 박고 있어야 높이 성장하는 것처럼, 만일 우리가 겸손에 깊이 뿌리박고 있지 않다면 그는 멸망을 향하여 자신을 높이 드러내는 자가 될 것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칼빈과 같은 사람이 겸손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칼빈주의'는 자만과 비판의 대명사가 아닌가? 칼빈은 '무정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칼빈주의적 선택과 예정 교리는 어절 수 없이 겸손보다는 자만을 가르치지 않는가? 그러나 칼빈에 의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칼빈은 "우리에게 겸손이 없다면 우리는 자신들의 멸망을 향하여 스스로를 높이는 자가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칼빈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때로 건방지고 교만하게 행동하며 차갑고 냉소적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문제는 그들이 이런 행동을 통해 칼빈주의라고 불리는 참된 특성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노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벤자민 워필드는 칼빈주의를 "하나님의 위엄 하심이 인간의 모든 삶과 경험에 가득 차는 것"으로 정의한다. 워필드가 의미하는 바가 거룩하신 여호와의 영광이 잘 드러나 있는 이사야서 6장에 그림같이 표현되어 있다. 이 엄청난 사건은 이사야를 우쭐하게 하거나 교만하게 만들지 않았다. 어찌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오히려 이 사건은 이사야를 파멸로 이끌었다. 그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라"고 외치고 말았다. 여기 진정한 칼빈주의의 참된 모습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열쇠가 있다. 칼빈주의는 절대로 교만하거나 차갑거나 냉소적이거나 당당할 수 없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단 한가지 이유 즉 우리는 결코 높아지신 위엄의 '위엄의 왕을 볼 수 없기 때문'이며 우리의 타락한 심령을 가지고 그의 존전에서 결코 당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워필드가 칼빈주의의 근원은 신학적 체계에 있지 않고 '신앙적 자의식' 안에 있다고 말한 의미이다. 칼빈주의의 뿌리는 (낮이 밤으로 연결되는 것처럼) 그곳으로부터 특별한 신학이 나타나는 '신앙적 태도'에 심겨져 있는 것이다.


워필드는 '우리 삶에 있어서의 칼빈주의의 성취는 신학적 체계의 과학적 진술에서 만나는 근본적인 신앙적 의식의 발진'이라고 말했다.


바로 이것이 칼빈주의를 지지하고 후원하는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실수이다. 그러므로 칼빈주의는 우선 신학적 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좀더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신앙적 태도' 즉 특별하고도 엄밀하며 그렇지만 하나님 영광을 중심으로 하는 신학적 체계를 태동시키는 마음의 태도이다. 칼빈주의를 구성하는 주요원리는 많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예정론이 아니라 오히려 전능하신 우리 주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사실을 좀 더 자주 높이 선언해야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칼빈주의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내가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가 아니라 '하나님께 어떻게 영광을 돌릴까?'이다. 다시 한번 워필드를 인용하자.


자신을 선택하신 분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아는 사람은, 또한 자신의 전 구원의 과정과 매 국면의 삶이 하나님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믿는 사람이 그 구원의 모든 영광을 전적으로 하나님과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선택적 사랑에 돌리지 않는다면 그는 실제로 배은망덕한 자가 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했던 데이빗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의 열정이기도 하다. 그의 마지막 일기의 한 부분에서 브레이너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오늘 나는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영원토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나를 행복하게 하실 수 없으며 그렇게 되면 다시는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이 세상에서 나를 데려가 사람들과 천사들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지고한 천국으로 날 이끈다고 해도 나는 영원토록 비참한 사람이 될 것이다. 오, 더욱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찬미하게 하라. 하나님을 더욱 더 영원토록 기쁘시게 하라! 바로 이것이 내 영혼이 갈망하는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더욱 원하는 한 가지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오, 하나님께서 지상에서 모든 영광을 받으시기를!


진정한 칼빈주의는 선천적으로 온유하다.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왕이시며 자신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와 사랑과 자비하심에 빚진 자라고 고백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교만하고 거만한 체하며 다른 죄인들, 심지어 다른 그리스도인 형제들을 경멸하고 멸시한다면 그는 자신이 진정한 칼빈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노출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노출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본받음


다시 한번 뒤로 돌아가 보자. 사람들이 '겸손'이란 말을 들을 때마다, 언제나 그들의 마음에 떠오르는 것은 약함과 눈물이다. 그렇다면 누가 겸손하길 원하겠는가? 그 누가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처럼 순종적이길 원하겠는가? 그런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셨다(마11:28-30).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큼 악과 위선과 무정함을 책망하시는 분이 누구이겠는가?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큼 그 말씀과 행위에 있어서 권위로우신 분이 과연 누구이겠는가?


우리 구세주에게는 결코 영적 우유부단이란건 존재하지 않았다. 연대를 무시하고 말하자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한 칼빈주의자의 본질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인성을 통하여 구원이란 하나님의 주권적인 권한에 달려있음을 배우셨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11:25-26).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사람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임을 잘 아셨다(요6:39). 예수께서는 또한 역사 속에 모든 사건들이 하나도 예외가 없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작정되어 있음을 아셨다(마10:29). 이러한 지식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더 악한 죄인들을 향하여 교만하고 무정하게 하며 냉소적이고 경멸하게 만들었는가? 예수님께서 당신의 '칼빈주의'를 모든 사람에게 자랑한 적이 있으신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종이시자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아들이셨다. 그에게 임하신 성령은 '제한이 없으신 분'이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것 때문에 성경은 예수님에 대하여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마12:18-20)


성령으로 충만한 예배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겸손이 우리 삶에 어떤 변화를 초래하는가? 그것은 모든 방면에서 매우 풍성한 변화를 초래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예배 가운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것인가를 결정해준다. 기독교 예배의 다른 요소들은 차치하고라도 우리의 예배 모임은 하나님의 영광의 위대하심과 인간의 무가치함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만일 우리가 겸손이라는 은혜의 강물에 더 깊이 잠기기만 한다면, 현재 복음주의권 안에 팽배해 있는 오늘날의 예배의 가벼움과 하찮음은 하룻밤에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다음과 같은 말씀은 우리의 표제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다음과 같은 말씀은 우리의 표제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찌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히12:28-29).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근엄하고 지루한 예배를 옹호하는 사람이라고 착각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는 결코 그럴 마음이 없다. 하나님을 높이고 인간을 겸손하게 만드는 예배는 하나님의 영의 생명으로 충만한 예배인데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사람을 높이는 예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예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예배란 설교의 거장이나 음악의 거장의 숙련된 모습이나 연주를 보고 박수를 치고 칭송하는 공연이 아니다. 예배란 그 어원의 의미 그대로 엎드려 무릎을 꿇고 부복하는 것이다. 아니 하나님의 영광의 위엄 앞에 엎드리는 것이며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철저하게 의식적으로 의지하는 것이다.


목사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를 닮은 겸손의 또 다른 증거는 설교자의 개성이나 재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좌우되는 설교에 있다. 제임스 데니(James Denny)는 "설교자 자신이 재주 있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시다는 것을 동시에 제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복음으로 죄인과 성도를 동시에 변화시킬 수 있음을 믿는가? 당신은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을 믿는가? 당신이 설교자라면, 당신의 모든 준비가 바로 이 확신에 가득 잠겨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떠나서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혜가 그 열매로 증명되듯이 겸손 역시 어린아이와 같은 우리의 삶을 통해서 드러나야 한다. 슬프게도 아주 종종 나는 강단에서 똑똑하려고 노력하곤 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영적인 것으로 보이겠지만 실제로 그것은 겸손치 못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효과적인 그리스도인의 삶과 기독교 설교는 오직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과 자신을 낮추는 겸손을 통해 발휘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5-6).


겸손을 짓밟고 교만을 조장하는 것은 진정한 칼빈주의가 아니다. 진정한 칼빈주의는 온유하고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마음을 낳는다. 그렇다면 당신과 내가 온유하고 겸손하신 구세주와 함께 연합해 있으면서 어떻게 교만하고 냉소적이고 차가운 기독교를 만들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당당한 칼빈주의는 궁극적으로 모순되는 어법이다.


그렇지만 나로 하여금 칼빈주의는 또한 실제로 당당하다고 말하게 하라. 칼빈과 그의 신학적 영적 후예들이 당당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당당함이나 자랑은 결코 '우리 안에' 있지 않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받기에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고백해야만 한다. 우리는 활활 타오르는 불 가운데서 건짐을 당한 자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너무나 사랑하셨다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버리셨다"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놀라운 사실에 놀라야만 하는 자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 우리의 당당함이 어디에 자리할 것인가? 우리의 오만함이나 방자함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우리의 자랑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오직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되는 것이다. 모든 진정한 칼빈주의자들의 자랑은 바울의 고백과 함께 고동치고 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칼빈주의는 당당하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구세주의 당당함일 뿐이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과 그의 은혜의 당당함이다. 그것은 높으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비천함을 위하여 스스로 낮아지시는 수치를 당하심으로 그의 낮아지심을 통하여 우리가 높아질 수 있는 당당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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