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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신조

by 【고동엽】 2021. 11. 4.

고대신조"신조는 왜 있어야만 하는 것일까?", "성경만 믿으면 되지 도대체 성경도 아닌 신조를 중요시 여기는 것은 구시대적인 발상이 아닌가?"라는 질문을 오늘날 우리는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야 말로 위험한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왜 위험한지에 대한 궁금증은 바른 신조가 왜 그토록 중요한 것인지에 대한 설명을 하고나면 자연스럽게 풀릴거라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신조가 무오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바른 신조는 성경의 진리를 위해서 작성된 것이기 때문에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일지라도 신앙의 유산물로 주어진 귀한 자료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존경하는, 세계 3대 칼빈주의자로 알려진 바빙크(Herman Bavinck)의 견해롤 통해서 이러한 궁금증을 풀어보자. 바빙크는 교회의 소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하고 해석하여 설교하고 적용하며 번역도 권고하고 변호하는 일이라고 한다. 교회가 소명받은 모든 활동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일이요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헌신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헌신이란 성도들의 집회에서 그것이 설교되고 해석되며 적용될 때요, 언약의 표징에서 그것이 분배되고 훈련 가운데 보존될 때인데, 좀더 넓은 의미에서 말씀의 헌신에 속해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마음과 생활에서, 직책과 상업에서, 가정과 일터에서, 과학과 예술에서, 국가와 사회에서, 구제와 선교사업에서와 같은 생의 모든 영역과 방향에 따라 이 말씀이 적용되고 효력을 발생하며 지배케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여기 땅에서 세상에 대항하여 진리를 나타내고 보존하며 세우는 대들보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이것에서 이탈하였을 때, 이러한 교회의 소명을 어기기 시작하자마자 일반적으로 곧장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미에 대해서 의견차를 드러내게 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경우는 사도적 교회에서 이미 있었던 것이다. 이러할 때 이단들을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교회가 단호하고 분명하게 말할 책임이 있다.따라서 크고 작은 종교회의들이 생겨났던 것이고, 이러한 회의를 통해서 교회의 교리로 생각하는 것을 함께 모여 세움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책임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교리는 모든 성도들의 고백으로, 이 고백이 성문화되어 신조가 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바빙크는 신조의 기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잘 가르쳐 주고 있다. 성경을 뒤로 밀어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존하고 그것의 개인적인 자유분방한 사용에 대한 보호에 있다. 신조는 양심의 자유를 훼방하기는커녕 약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의 유혹을 꾀하는 여러 이단 영들을 대항하여 양심의 자유를 지지한다. 또한 지식의 발달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바른 궤도로 유지, 인도하고 그들 자체는 모든 세대에 걸쳐 부조리할지라도 신앙의 유일한 규범인 성경에 비교하여 수정되어야 한다.그리고 이 외에도 토마스 빈센트라는 개혁교회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신조의 기능을 밝혀 주고 있다. 소요리문답을 가르쳐야할 중요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무지를 헌신의 수단으로 삼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카톨릭을 빗대어) ② 기독교의 본질과 원리를 잘 가르칠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특별히 무식한 자들과 연소한 자들에게도) ③ 처음부터 그리스도 말씀의 원리에 대해 기초 훈련을 받지 못하면 미궁 속에 빠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를 방지해야 한다.물론 신조라고 해서 모두 다 긍정적인 것은 아니며, 또한 모든 신조를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우리의 모임을 통해서 어떤 것이 바른 개혁교회의 입장에 서 있는 신조인지를 연구해야 하겠고 그러한 신조들이 어떠한 배경에서 발생했는지? 어떤 이단들을 배척했는지? 나아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떠한 가치가 있는지? 등을 살펴보는데 본 연구의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이 글은 위의 정신에 바탕을 두고 초대 신조인 사도신경, 니케아 신조, 콘스탄티노플 신조, 칼케돈 신조, 아다나시우스 신조를 각 신조별로 ① 작성배경 및 기능 (성경의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고백하기 위해서 작성, 이단을 대항하여 기독교의 본질과 원리를 잘 가르치기 위해서) ② 특징 및 영향 ③ 평가 ④ 신조 내용의 순서에 따라 작성하였다. 신조에 대한 발표자의 안목이 미약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믿고 확신할 수 있는 학자들의 견해를 중심으로 작성하였고 그 외의 학자들의 글의 도움을 받고자 할 때는 주의를 많이 기울였다. 역사적인 자료는 도움을 받았지만 그들이 신조에 대해서 평가한 부분은 조심스럽게 받았다는 것을 미리 언급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혹시라도 각 신조의 가치를 편엽되게, 혹은 그릇되게 평가하는 실수를 줄이고자 했기 때문이다.1) 사도신조(1) 사도신경의 작성배경 및 논쟁 내용 (기본목적: 성경의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고백하기 위해서, 이단을 대항하여 기독교의 본질과 원리를 잘 가르치기 위해서)사도신경에 대해서 우리는 크게 칼빈(John Calvin)과 바빙크(Herman Banck)의 설명을 통해서 자세한 내용을 배우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한다. ① John Calvin칼빈의 1536년판 기독교 강요는 본문이 크게 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에 사도신경은 십계명이나 주기도문과 같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우리는 살펴볼 수 있다. 사도신경이 성경에 없다고 하여 무시할 수 없는 것임을 칼빈은 종교개혁 당시 그의 저서에서 우리에게 밝히 보여주고 있는 바이다. 칼빈은 사도신경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얼마나 커다란 가치가 있으며, 그 내용이 성경과 어느 정도나 일치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1559년도 판의 내용을 발췌하는 것으로 칼빈의 입장이 얼마나 분명한지 살펴보고자 한다. 사도신경은 우리의 구속의 중요한 점들을 간단히 요약하며, 그리스도에 대해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일들을 일일이 분명히 보여 주는 일람표와 같은 구실을 하고 있다. 나는 신경이라고 부르지만, 그 저자 문제2)는 전연 고려하지 않는다. 고대 저술가들은 신경을 사도들에게 돌리는 점에서 상당히 의견이 일치했다. 사도들이 공동으로 써서 발표했다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전한 가르침을 충실히 수집하며 요약한 것이므로 넉넉히 사도들의 이름을 붙일 만하다고 생각했다.신경이 어디서 나타났든 간에, 교회의 바로 초창기 즉, 사도 시대에 모든 사람이 이구 동성으로 그것을 공중 고백서로 인정했다고 나는 확신한다. 어느 한 개인이 사적으로 쓴 것 같지 않고, 사람들이 회상할 수 있는 가장 오랜 옛날부터 확실히 모든 경건자들이 그것을 신성한 권위로 인정했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유일한 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전연 없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즉, 우리의 믿음의 역사 전체가 신경에 간명하고 질서 정연하게 요약되었으며, 성경의 순수한 증언에서 보증을 얻지 못하는 것은 하나도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점을 이해한다면, 저자 문제로 불안을 느끼거나 남과 논쟁하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다. 물론 성령의 진리를 확실히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누가 그것을 말했다거나 썼다는 것까지 알지 못하면 만족하지 않는 사람은 문제가 다르다. 김영규 교수는 기독교 강요와 사도신경의 관계에 대하여, "칼빈에게 있어서 참된 신앙의 구성요소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notitia)이 포함하고 있다. 즉 사도신경이 기독교 강요 전체 내용의 저변을 이루면서 '우리가 믿는다(credimus), 나는 믿는다(credo)'는 것을 하나님을 아는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했다고 볼 수 있다"고 제시하고 있다. 이상으로 사도신경의 내용이 성경과 무관하지 않다는 정도가 아니라 성경의 보증을 받고 있음과 칼빈 자신이 그 가치를 일찍이 깨닫고 기독교 강요를 집필했다는 것을 통해서 개혁교회에 있어서 초기신조였던 사도신경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 왔었는지를 알 수 있다.② Herman Bavinck바빙크는 사도신경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되는 줄의 역할을 했다고 우리에게 밝히 가르쳐 주고 있다. 사도신경은 가장 오래된 신조다. 그것은 사도들 자신들이 규정한 것은 아니지만 일찍이 2세기 초에도 존재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 자신이 주신 삼위일체적인 세례명령으로부터 발전되었던 것이다(마 28:19). 근원에 있어서는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짧지만3) 기초형태는 같았다. 즉 그것은 기독교가 의존하고 있는 그 큰 사실들의 짧은 요약이었고 그와 같이 계속해서 그것은 공동체적인 근원이 되어 왔고 모든 그리스도 왕국의 통일의 끊을 수 없는 줄이 되고 있다.바빙크는 사도신조의 처음 논쟁이 되었던 주제는 "당신은 그리스도를 누구라 하느냐?"였다고 한다. 이것은 교회가 주님의 말씀 자체로부터 모든 세계에 대하여 대답해야 할 전 지배적인 물음이었는데 이것으로부터 잘못된 형태들이 나왔는데, 그 예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유대주의를 따르는 무리들이란 예수를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의 인간, 기이한 재주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 선지자적 영으로 영감된 인간, 말에나 역사에 능력 있는 인간, 그러나 그 나머지에 있어서는 하나의 인간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하려는 모든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교주의 편에서는 예수 안에서 신들의 아들, 하늘로부터 온 신형체(Godsgestalte)로 보려는 자들, 구약의 천사들과 같이 잠시 땅에 나타나 그림자의 몸을 취하였던 인물로 보려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그를 육신이 되신 아버지의 독생자로서는 고백하려고 하지 않았다.(이단)이 두 이단들을 대항하여 교회는 성경에 맞게 그와 같이 그리스도는 참으로 육신으로 오신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참된 독생자이심을 주장해야 했다. 이것을 교회는 긴 싸움 끝에 위에서 말한 신앙고백서들로 고백했고, 사도 요한과 더불어 하나님의 아들이 육체로 오신 것을 부정하는 모든 교리를 거절했다(요일 2:18, 22; 4:2, 3). 그와 같이 그리스도적 교회는 그의 본질이요 핵심이 기독교의 특별한 전체 특성을 주장했다.이것이 이 큰 일을 행한 공의회와 종교회의가 전체 기독교에 있어서 근본적이고 커다란 의의를 가진 이유다 (작성배경). 사도신경에서 요약하고 있는 기독교의 사실들, 그리스도의 인격과 하나님의 삼위적 본질 속에 그리스도 교회들 사이에 존립하는 통일점이 있으니, 이 통일점은 그들 모두가 서로 유대주의와 이교주의를 반대하는 데 하나가 되게 하고 교회를 분리하는 무서운 의견차이에서도 잊게 되거나 무시될 수 없게 한다.(2) 사도신경의 특징 및 영향사도신경의 특징은 먼저 가장 오래된 신조라는 것과 매우 단순하고 간결하여 어떤 수준에 있는 사람이건 어떤 예배를 위해서건 다 만족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학적 지식이 매우 수준급에 있는 사람들에게 공적인 교리를 규정해줌에 있어서도 매우 적절하다는 것이다.사도신경은 다른 신조들의 기초 역할을 하였다. 예를 들어 니케아 신조는 사도신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교리를 보다 분명하게 확대시켰고, 아다나시우스 신조는 사도신경의 삼위일체 교리와 그리스도의 품위에 관한 교리 전체를 더욱 확대시켰다.(3) 사도신경에 대한 평가칼빈은 사도신경이 성경의 내용과 잘 일치한다고 평가할 뿐만 아니라 사도신경을 믿음의 요약이요 총체라고 평가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의 본질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사도신경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사도신경은 우리의 구속의 중요한 점들을 간단히 요약하며, 그리스도에 대해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일들을 일일이 분명히 보여 주는 일람표와 같은 구실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핫지(A.A.Hodge)는 영국에서는 소요리문답을 처음 출판했을 때 주기도와 십계명과 사도신경을 첨가했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 "사도들이 작성했다거나, 성경의 일부분으로 여길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 신앙의 요약이며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며 그리스도의 고대 교회들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라고 설명을 첨부했다고 한다.이 외에도 많은 평가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우리는 이상의 평가만으로도 사도신경이 초대 교회 이후에, 종교개혁 시대조차도, 아니 오늘도 교회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심각한 점은 오늘날 이단들도 사도신경을 외형적으로는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단지 사도신경을 받고 있다고 바른 교회라고 인정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즉 이단이 그만큼 자신들을 속이기 위해서 많은 포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각 분파마다 사도신경을 어떻게 받고 있는지를 더욱 깊이 조사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그리고 더욱 안타까운 일은 오늘날 일반교회에서도 이 사도신경이 가르쳐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예배때 신앙고백의 순서에 의해서 이것을 암송하지만 그 의미를 소개받는 것은 전무하다는 것이다. 즉 10년, 20년 신앙생활을 해도 이 사도신경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소개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형편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외형적으로는 사도신경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결국 내용은 모른채 외형만 받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오늘 우리의 모습 속에서 이 사도신경이 어떻게 취급되고 있는가를 보면 우리의 교회 모습이 전통적인 개혁교회의 모습과 얼마나 다른지를 알 수 있다. 즉 당시 교회에서는 이 사도신조의 공통적인 고백과 표현을 통해서 교회를 세워 갔고 또한 이단과 거짓교사를 막으면서 교회를 지켜 왔던 것임이데 오늘날에는 전혀 의미가 없이 교회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교회 모습이 신조를 얼마나 무시하고 무가치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2)니케아(Nicaea)신조 - A.D. 325(1) 니케아 신조의 작성배경 및 논쟁 내용(성경의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고백하기 위해서, 이단을 대항하여 기독교의 본질과 원리를 잘 가르치기 위해서)니케아 신조가 작성되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 아리우스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 성부의 신성과 동일하지 않다는 생각에서 말씀 곧 성자는 지으신 일종의 피조물로서 시작이 있었고 따라서 한 때 그는 계시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고 말했는데, 이러한 사상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는 성육신 신앙에 위배되는 것임을 아다나시우스(Athanassius)가 지적하고 아리우스와 논쟁을 하게 된 까닭이다. 이 논쟁은 자유를 얻기 시작한 기독교의 통일과 평화를 위협하는 것이었으므로 콘스탄틴 황제는 325년에 세계교회 회의를 니케아(Nicaea)에 소집하여 이때까지 이론(異論)이 많았던 기독론의 교리를 확정하여 올바른 신앙고백을 제정할 것을 기도하였다.그렇다면 이단으로 지목을 받았던 아리우스의 주장과,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무엇 때문에 그토록 싸웠는지를 보다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오늘날 우리도 그런 잘못에 빠지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하겠다.① 그릇된 교리 {아리우스(아리안주의)의 주장에 대해서}가. John Calvin칼빈은 아리우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그의 거짓된 교리에 대해서 잘 설명하고 있다. "아리우스라는 사람은, 명백한 성경을 반대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으며, 또 자기가 올바른 일을 하기나 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과 의견을 같이 하는 척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그리스도가 창조되었으며, 다른 피조물들처럼 시작을 가진다고 주장하기를 계속하였다". 여기서 보면 입장을 약간 바꾼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약간이 가장 근본적인 내용을 변질 시키고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여기서도 칼빈이 지적하는 것은 "아리우스는 예언서와 사도 문서에 포함된 교훈 전체를 믿노라고 했지만 니케아 교부들이 하는 말에는 찬성하지 않았다"라는 지적처럼 성경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당시 교회의 객관적인 신앙고백을 부정하게 되었을 때 이단으로 정죄된 것을 가르키고 있는 것이다. 즉 객관적인 신조의 내용을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인해서 어떻게 정죄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결국 당시 교회가 이처럼 정죄할 수 있었던 근거는 아리우스가 자신의 입장을 속이기 위해서 잠시 성경을 받아들인다고 했지만 객관적인 신앙고백을 받지 않는 것은 결국 성경도 인정하지 않는 것임을 파악하고 정확하게 아리우스의 입장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과 신조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신조를 부정하는 것은 곧 성경을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인 것이다. 나. Herman Bavinck바빙크의 다음 글에서도 아리우스의 잘못된 사상이 얼마나 비뚤어져 나갔는지를 살펴보자. 또한 왜 잘못 되었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 생긴 이단들은 무엇인지를 배우도록 하자. AD 2세기와 3세기에 있었던 아리안주의자들의 선구자들은 그리스도를 단지 초자연적 방식으로 낳은 사람으로만 여기고 그가 세례 때에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아서 그의 사역에 적합하게 되고 주로 높여졌다고 생각하되, 그의 영원전에 존재하심과 신적 본성을 부인하는 에비온주의자들(the Ebionites), 알로기파(the Alogi), 떼오도투스(Theodotus), 아르테몬(Artemon), 사모사타의 바울(Paul of Sanosata) 등이다. 그들은 양자론적 기독론(an adoptionistic Christology), 즉 예수님이 피조되어 아들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4세기에 이 신념이 루시안(Lucian)과 그의 제자 아리우스(Arius)에 의해서, 또한 아에티우스(Aetius)와 유노미우스(Eunomius)에 의해 옹호되었다.아다나시우스에 의해 그 단편들만이 보존되어 있는 The Banquet 라는 제목의 작품에 의하면, 아리우스는 하나님이 불출생적이고, 시작을 가지지 아니하시는 한, 그는 절대적으로 독특하시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하나님은 형언할 수 없고, 다 알 수 없으며, 무한하시므로 직접적인 교제 관계에 들어갈 수 없고, 그의 존재를 부여할 수 없으며, 불출생적인 것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존재 밖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의 뜻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고, 피조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영원부터 아버지이신 것이 아니고, 창조로 말미암아 아버지가 되셨다즉, 그는 그의 피조물들의 아버지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창조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그를 통해서 모든 것이 창조될 매개자로 행동할 일종의 존재, 즉 성경에서 지혜, 아들, 로고스, 하나님의 형상으로 불리운 구별된 '휘포스타시스'(hypostasis) 또는 구별된 본질을 존재케 하셨다. 이 로고스는 하나님의 본질로부터 낳아진 것도 아니고, 성부와 동일본질이신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렇다면 두 신(two Gods)이 있게 되겠기 때문이다.그는(예수님) 오히려 '무로부터' 낳아졌고, 또는 피조되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뜻과 경륜에 의해서' 존재케 된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사역'이다. 그러므로, 비록 그가 '시간들과 세대들 이전에', 즉 '우주' 이전에 피조된 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가 있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므로 이 로고스는 성부와 동일본질인 것이 아니고, 그와 완전히 구분된다. 그는 성부처럼 불변적이지 않고, 선 뿐만 아니라 악도 선택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온전한 피조물"이다. 그는 선을 선택하였고 그럼으로써 불변성을 얻었고 그리하여 신성에 이르렀다. 이 로고스는 또한 사람이 되어 진리를 선포하고 우리의 구속을 이루셨다. 따라서 우리의 영예를 받으시기에는 합당하나 우리 경배의 대상일 수는 없다."우리는 이런 주장을 살펴보면서 단순히 성경을 인정한다고 해서 성경에서 제시되고 있는 하나님을 바르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성경을 받아들여도 자신의 생각과 방식으로 전혀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아리우스는 성경을 자신이 생각하고 이해한 대로 받아들인 것이지 교회의 객관적인 신앙고백적 기준을 통해서 받아들인 것이 아닌 것이다. 즉 사도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객관적인 성경이해의 내용들이 교회 안에 있었으나 이것을 부정하고 자신이 생각한 독특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받아들였던 것이다.이런 모습을 통해서 오늘날도 객관적인 신앙고백적 기준과 상관없이 자신이 이해하고 생각한 대로 성경을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이처럼 개인적인 생각으로 성경을 받아들이게 되면 진리의 참된 내용은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즉 여러 사람마다 각자가 이해하고 생각하는 성경의 내용이 다르다면 누구의 이해가 진리인지 알 수 가 없는 것이다. 결국 객관적인 절대적인 진리가 없어지게 되고 수많은 내용이 가지각색으로 소개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성경의 기준이 있음에도 왜 신조라는 객관적인 신앙고백적 기준이 또 필요한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성경을 보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다양하기 때문에 성경의 의미가 전혀 다르게 왜곡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의 의미가 어떤 것이 바른 이해인지를 객관적인 신앙고백을 통해서 정리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신조는 성경을 무시하고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절대적인 기준을 가장 깊이 있게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신조는 필요없다고 하면서 단지 성경만 잘 믿으면 된다'고 하는 말을 매우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이 말은 아주 그럴싸 하지만 함정이 숨어 있는 것이다. 즉 이런 정신은 자신의 이해한 대로 성경의 의미를 마구 왜곡하기 때문에 결정적으로 성경을 곡해하고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② 바른 교리 {아다나시우스(Athanasius)의 주장에 대해서}우리는 아리우스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개혁주의의 입장을 바르게 정립했던 아다나시우스의 핵심 사상을 이해하는 것은 더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가. John Calvin칼빈은 아리우스의 주장을 교활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면서 고대 교부들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선조들은 아리우스의 꾸불꾸불한 술책을 그 은신처로부터 끌어내기 위해 한 걸음을 앞질러 가서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영원한 아들이요 아버지와 동일본질(homoousios)이라고 선포했다. 그러자 아리우스주의자들의 불경이 끓어올라서 동일본질이라는 말에 대하여 증오와 저주를 가장 사악하게 퍼붓기 시작했다. 만일 그들이 처음부터 진지하고 또 전심으로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던 것이라면 이렇게 그가 아버지와 동일본질 이라고 말하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 가지 작은 단어 때문에 아무리 열띤 논쟁이 불붙고 또 교회의 평화가 방해를 받았기로서니 누가 그 고결한 사람들을 말장이니 궤변가들이라고 독설을 하였겠는가? 하지만 그 아무 것도 아닌 단어 하나가 순수한 믿음을 소유한 신자들과 거룩한 것을 짓밟는 아리우스주의자들 사이에 구분을 지어 주었던 것이다".이처럼 아다나시우스와 당시 교부들은 바른 신앙고백을 하기 위한 한 단어를 목숨처럼 지키는 일들이 있었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즉 단순히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의 핵심의 흥망성쇄가 달려 있었던 문제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교회의 목회자와 성도들은 성경을 통하여 객관적인 신앙고백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드러남과 가리움에 해당된 문제였기 때문인 것이다. 나. Herman Bavinck바빙크는 아다나시우스가 그리스도의 신성과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아다나시우스는 그의 동시대인들 중 어느 누구보다, 기독교가 그리스도의 신성과 삼위일체에 대한 고백 여하에 따라 서기도 하고, 폐해지기도 한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전 생애와 그의 모든 힘을 이 교리의 변증에 쏟아 부어 넣었다. 그래서 그는 철학적 문제를 위해 투쟁한 것이 아니고, 기독종교 자체, 하나님의 계시, 사도들의 가르침, 교회의 신앙과 고백을 위해 투쟁한 것이다.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를 신적 존재 내의 구별(성부,성자,성령)을 부인하는 유대교와 하나님의 단일성(한 하나님)을 거부하는 이교로부터 원칙적으로 구별시키는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여겨졌다. 따라서 아다나시우스는 존재론과 우주론의 철학적 혼합을 완전히 거부한다. 그는 하나님과 세상에 대한 영지주의적, 아리안주의적 이원론을 거부하고, 따라서 매개적 중간존재들에 대한 이론도 모두 거부한다.아다나시우스는 모든 낯선 요소들을 배제한 삼위(三位)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즉 삼위(三位)성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연합이 아니고, 그 성격상 온전히 신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위(三位)성은 영원하다. 하나님 안에 비(非)본질적 요소들이라고는 없다. 그는 어떤 것이 되지 않으신다. 그는 영원히 모든 것이시다. 삼위(三位)성이 영원부터 있는 것처럼, 이는 영원까지 있다. 따라서 성부, 성자, 성령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것이다. 성부는 항상 성부이시다. 성부됨은 그의 성질에 속한다. 사람에게 대해서는 그와 같이 말할 수 없다. 햇빛을 떠나서 해를 인식할 수 없고, 그 물을 떠나서 그 물의 원천을 인식할 수 없듯이, 성자를 떠나서는 성부를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교통할 수 없는 분이 아니시다. 오히려 그는 항상 말씀하신다. 삼위(三位)성을 부인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생명 없는 원칙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며, 우주의 영원한 존재사실에 대한 교리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생명 없는 원칙이 아니시므로, 성자의 출생은 영원하다. 성부도, 성자도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결코 피조물일 수 없고,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 태어난 것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존재(본질)로부터 출생한 것이다. 성령에 대해서도 이미 마찬가지이다. 비록 아다나시우스가 성령에 대해서 많이 언급하지는 않고 있지만 말이다. 이 삼위는 참으로 구별된다. 그들은 하나의 전체의 세 부분이나 하나의 동일한 대상에 대한 세 이름이 아니다. 성부만이 성부이시고, 성자만이 성자이시며, 성령만이 성령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다나시우스는 이 삼위(三位)가 그 본질과 실체와 속성에서 같다고 하며, 성부는 신성의 첫 원리요, 원천이라고 하고, 삼위(三位)가 서로 안에서, 서로를 통해 존재한다고 하며, 그들이 그 행위에서 하나이시라고 가르침으로써 삼위(三位)의 통일성을 주장한다.(2) 니케아 신조의 특징 및 영향니케아 신조의 특징으로는, "니케아 신조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고 또한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한 아버지와 본질이 '동일'(Homoousios)하다는 표현이다. 이 표현은 니케아 이후 계속되는 논쟁의 발단이 될 정도로 당시의 삼위일체 교리의 핵심적인 내용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 표현을 통해서 아리안주의 뿐만 아니라 당시에 '유이'(Homoiousios)를 주장하면서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려고 했던 유이설자들도(동일함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은 비슷하다라고 해서 유이설이다) 배격되었기 때문이다." 니케아 신조의 또다른 특징으로는, 본래 아리안주의를 향한 저주문이 첨가되어 있었으나 훗날 이것이 생략되었다는 것이다.우리는 여기서 객관적인 신앙고백의 기준을 벗어나는 행위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 즉 당시 교회에서는 "저주문"을 통해서 이런 행위가 성경을 깨뜨리는 행위며, 또한 하나님을 모욕하고 대적하는 행위가 됨을 분명히 지적했던 것이다. 이처럼 객관적인 신앙고백은 교회를 보호하고 또한 성경을 지켜가는 큰 권위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니케아 신조의 영향에 대해서는 바빙크의 설명을 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신조 이후로 삼위일체 교리에 새로운 의미가 부가되었다. 니케아 공의회는 하나님의 존재의 위격적 구별을 주장하였고, 성부와 성자(그리고 성령)가 하나님이심을 고백하였다. 그 이후로 삼위의 구별을 믿는 이가 하나님의 통일성(단일성)에 관한 진리를 무효화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만 하였다. 니케아 공의회 이전에는 주된 쟁점이 어떻게 통일성(단일성)으로부터 삼위성을 이끌어내는가 하는 것이었는데, 그 이후에는 그 반대의 쟁점4)이 나타났다. 이제 삼위일체론은 그 나름의 독특하고 독자적인 가치와 신학적 중요성을 갖게 된 것이다.우리는 이 니케아 신조의 특징을 살펴보면서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앞에서도 보았던 것처럼 당시 참된 교회에서 바른 신앙의 내용을 드러내고 지키기 위해서 취했던 방법은 객관적인 신앙고백적 기준을 교회 안에 세우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서 선조들은 목숨을 걸고 당시대의 이단들과 거짓교사들과 싸웠음을 기억해야 한다.이처럼 우리는 니케아 신조가 어떻게 작성되었으며, 또한 그 중요성을 살펴보았는데 마지막으로 그 결과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처럼 목숨을 걸고 바른 신앙고백적 기준을 드러내었음에도 교회는 금새 이런 정신을 잃어버리고 오히려 아리우스의 신앙적 내용들을 받아들이게 되어서 아타나시우스와 이 신앙고백적 기준을 받아들이는 성도들은 교회적 엄청난 핍박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타나시우스는 피난길을 떠나야 했고, 결국에는 붙잡혀 극형에 처하는 형편을 맞이했던 것이다.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아타나시우스가 "동일본질"이라는 표현만 바꾸면 얼마든지 교회에서 교직자의 직분을 유지할 수 있는 타협이 있었음에도 아타나시우스는 이를 거절하고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객관적인 신앙고백적 기준 때문에 순교도 할 수 있는 역사를 만나게 된다. 즉 그만큼 신조의 정리는 교회에서 중요한 것이었기에 결코 양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을 양보하게되면 성경의 거부와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과 또한 교회의 부패를 가져오게 되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신앙고백의 내용을 지켰던 것이다. 결국 이런 역사를 통해서 신조가 초기교회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와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신조를 교회에서 표명하고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얼마나 엄밀하고 철저하게 고백하고 받아들이는지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3) 니케아신조에 대한 평가바빙크는 니케아 신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교회는 니케아 공의회(A.D 325)에서 오리겐의 종속론(예수님이 성부보다 낮아서 종속되었다는 것)을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온전하고도 참된 신성(성부와 동일성)을 고백하였다. 이 고백은 그 성격이 전적으로 종교적인 것이었다. 즉, 그것은 기독교의 구원론적 원리를 드러낸 것이다." 그 외에 "서방 교회에서 추가한 조항이 없는 니케아 신조는 희랍교회에서 큰 권위를 인정받아 사도신경이 라틴교회나 프로테스탄트교회에서 차지하는 것과 버금가는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하지만 "니케아 신조는 '동일'이란 표현을 통해서 일체성에 대해서는 극복을 했지만 이 하나의 본질에서 어떻게 삼위가 바로 주장되면서 또한 어떻게 서로 구별되는가에 대한 문제가 남게 되었던 것이다. … 다음으로는 성령에 대한 표현이 좀더 구체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을 믿습니다'라고만 되어있기에 어떤 방식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 전혀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단순성 때문에 후에 '성령 피조설'(성령도 만들어졌다는 것)을 말하는 이단들이 발생되었고 이 영향은 콘스탄티노플 감독에게까지 영향을 주게 되었다"고 하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3) 니케아-콘스탄틴노플(NicaeaConstantinoplis)신조-A.D. 381(1) 콘스탄티노플 신조의 작성배경 및 논쟁 내용 (성경의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고백하기 위해서, 이단을 대항하여 기독교의 본질과 원리를 잘 가르치기 위해서)이 신조는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모인 에큐메니칼 공회에서 150명의 감독들이 채택한 신조로 알려져 있고, 승인을 받은 것은 451년의 칼케돈 에큐메니칼회의라고 한다.앞에서 본 신조들의 작성 배경에는 이단의 잘못된 사상을 대항하기 위함과 바른 교리를 지키려는 끊임없는 싸움이 있었음을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가 살피고자 하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도 그러한 환경에서 작성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칼빈은 콘스탄티노플 신조의 작성 배경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아리우스가 일어났을 때에 니케아 회의가 소집되었다. 회의는 그 권위로 저 불결한 사람의 악한 노력을 분쇄해서, 그가 흔들어 놓은 교회들의 평화를 회복하며 그의 모독적인 가르침을 물리치고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을 주장했다. 그 후에 유노미우스와 마케도니우스가 새로운 소동을 일으켰을 때에 콘스탄티노플 회의가 그들의 미친 생각에 대해서 대책을 강구했다(작성 배경).…사탄이 흉계를 꾸밀 때마다 교회는 처음부터 이런 방법으로 단결을 유지하는 것이 통례였다." 칼빈의 평가를 통해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객관적 신앙고백과 일치하지 않는 내용을 제시하는 행위는 "사탄의 흉계"로 인정될 정도 정죄되어야 할 악한 죄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신앙고백의 역사를 보게 되면 사도들의 신앙적 정신을 이어온 정통교회에서는 교회에서 전체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객관적 신앙고백의 기준을 벗어나는 행위에 대해서 철저하게 근절하고 금했던 것을 보게 된다. 그런데 오늘날은 포용과 관용과 연합이라는 명목 하에 전통적으로 인정되지 않았던 분파와도 얼마나 가까이 하고 또한 정당한 교회로서 인정을 하고 있는지를 발견하게 된다.우리는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교회는 진리의 내용을 변질시키는 분파와도 연합과 일치를 이루도록 세워 주신 것이 아니라 시편의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와 주의 법도를 지키는 자의 동무라"(시119:63라는 말씀처럼 진리를 바르게 인정하는 분파와만 일치하고 연합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진리를 바르게 인정하지 않는 분파와는 어떤 면에서도 가까이 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다음과 같이 배격하고 멀리해야 하는 자세를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롬16:17)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살후3:6)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요이1:10)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우리는 성경에서 왜 이토록 철저하고 엄격하게 신앙이 다른 자들을 분리시켜야 한다고 하는지를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관용이나 자비가 없어서가 아닌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긍휼이나 자비심을 떠나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 이름의 거룩하심을 지키고 드러내는 신본주의적 정신에 입각한 행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진리에 대해서 결코 어떤 흠집과 불명예와 모독도 허용하시지 않고 가장 엄격하게 경고하시며, 말씀하고 계신데도 인간이 단지 자비를 내세워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행한다면 하나님 앞에 결코 용서될 수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니케아 신조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중요한 차이점을 살펴보자.첫째로, "성부의 본질에서"라는 문구가 생략되었다는 것이다. 이 표현에 대해서 세미아리안주의(아리안주의의 입장을 반(半)만 인정하는 분파)나 성령피조설과 조화를 이루려고 했다는 비평도 있으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고 뒤에 "성부와의 동일"이란 말이 생략되지 않고 있기에 이 표현으로 충분한 것으로 보여진다.둘째로는 "신에게서 나온 신"이란 말이 빠졌다. 이 표현도 피상적으로 보면 성자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 같으나 그렇지 않다. 그 다음에 "빛의 빛", "참 하나님에게서 나은 참 하나님"이란 말이 있기 때문에 생략되어도 성자의 신성을 표현하는데 있어서는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차적 신이거나, 혹은 일부분일 수도 있다라는 의혹을 없애버린 효과도 있다.셋째로는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서 성령론에 대한 부분이 많이 보완되었다는 것이다. 즉, 성령의 신성이 강조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주님" 혹은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이 의미가 확고히 되었다. 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란 표현을 통해서 성부와 성자와의 동일을 드러내 주고 있다. 다음으로는 "성부로부터 나오시고"라는 표현을 통해서 성령은 구별된 위격으로서의 존재로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성령의 독립적인 자리가 아니라 삼위일체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분으로 소개되었다는 것이 특기할 만하다. 마지막으로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예배와 영광을 받으시며"라는 표현을 통해서 위에서 말한 내용, 즉 삼위가 동질일 뿐만 아니라 동등하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2) 콘스탄티노플 신조의 특징 및 영향이 신조는 "초대교회의 예배의식에서 사용되어 세례예식 때에 고백되었고 또 성만찬 예식의 고백으로서도 6세기부터 사용되다가 칼케돈 공회 후에는 모든 신조들 가운데서 가장 널리 사용되었다"고 한다. 즉 신조는 교회 안에서 개인이 가지고 있는 신앙에 대하여 객관적인 확인을 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던 것이다. 즉 이와 같은 객관적 기준에 입각하여 신앙을 고백하고 드러내게 될 때에 그를 성도로서 인정하고 또한 교회의 정식회원으로서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처럼 신조는 개인에게 있어서나 교회에 있어서 가장 기초적인 주춧돌과 같은 역할을 초기교회부터 감당해 왔던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신조가 교회안에 얼마나 중요한 사용되고 인정되었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3) 콘스탄티노플 신조에 대한 평가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동방교회의 형식으로 된 초기의 신조이지만 니케아 회의 시대의 상황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신성이나 성령에 관한 언급에 있어서도 사도신경 보다도 더 명확하고 자세하게 밝혀놓고 있다. … 동질(coessential), 동등(coequal), 창조 이전의 발생, 참하나님의 참 하나님, 발생되고 피조되지 않으심 등과 같은 용어들은 동방교회가 반세기 이상 끌어오던 아리안 이단과의 피나는 싸움 끝에 얻어낸 트로피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더욱이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니케아 신조를 그대로 이어 받고 있으며 (단지 단지 첫 두 항목을 약간 수정했고) 가장 중요한 점은 니케아 신조에서 문제시되었던 성령에 대한 문제가 극복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신조의 발전 과정을 우리는 살펴보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즉 시대가 지날수록 이단들은 더욱 교묘하게 정통적인 신앙의 교리를 흐트러뜨리기 위해서 교회 가운데 도전함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분명한 신앙의 내용을 성경에 입각하여 드러내게 된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이런 역사를 통해서 객관적인 신앙고백의 작업들은 바울의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11:14-15) 라는 지적처럼 사탄의 거짓된 활동을 철저하게 봉쇄하고 무너뜨려서 교회를 지키려는 거룩한 싸움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한 가지 더 놀라운 사실은 "(고전11:19)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라는 말씀에서 성령께서 지적하고 있듯이 교회 안에서 이와 같은 신앙고백적 기준을 통하여 바른 진리를 드러내고 이단과 거짓교사를 분리시키는 일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되어 지는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즉 하나님의 진리와 영광이 더욱 드러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거짓된 자들을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이 거짓된 자들과 자신을 더욱 철저하게 구별하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해야 해야 하는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객관적 신앙고백의 표명은 하나님의 섭리적인 관점에 의해서 볼때도 이것은 게으르게, 또는 회피하거나, 또는 무관심하거나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부름심, 즉 소명임을 깨닫고 반드시 교회 안에서 목숨을 다하여 세워야 하고 또한 지켜야 하고, 또한 전해야 하는 것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4) 칼케돈(Chalcedon)신조- A. D.451 (1) 칼케돈 신조의 작성배경 및 논쟁 내용(성경의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고백하기 위해서, 이단을 대항하여 기독교의 본질과 원리를 잘 가르치기 위해서)콘스탄티노플 신조와 아다나시우스 신조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와 동일한 신성을 가지신 분임을 밝혔으나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면서 또한 완전한 사람임을 고백하는 문제를 가지고 신학자들 사이에 이론(異論)이 많았다. 즉 그의 한 존재 안에 신성과 인성이 어떤 모양으로 연합되어 있느냐의 어려운 문제였다. 신인양성을 믿으면서도 그의 신성을 더 우세한 것으로 강조한 사람들은 주로 알렉산드리아 학파(네스토리우스파, 몹수에스티아의 데오도레)에 속했었고, 그의 인성의 약화를 막으려는 막으려는 사람들은 주로 안디옥 학파(유티케스)였다. 이러한 기독론의 역사적인 논쟁들을 일괄하여 종식시키고 정통신조를 확립할 목적으로 로마의 감독 레오(Leo)가 449년 6월 13일에 플라비안(Flavian) 황제에게 보낸 편지 톰(The Tome)에서 논쟁의 해결을 위한 신학적 시론을 발표하였었다.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는 451년에 칼케돈에서 제4차 세계교회의 에큐메니칼 회의를 소집하였다. ① 그릇된 교리 {네스토리우스(Nestorius)와 유티케스(Eutyches)의 주장}벌코프(Louis Berkhof)는 당시 그릇된 교리를 주장하였던 네스토리우스와 유티케스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하여 설명해 주고 있다. 몹시수에스티아의 데오도레(Theodore of Mopsuestia)와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강조했고, 그 안의 로고스의 내재를 신자들도 정도 차이는 있지만 똑같이 누리는 단순한 도덕적 재주로만 이해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람을, 곧 하나님과 연합하고 하나님의 목적에 동참하지만 단일한 인격적 생명의 하나 됨에서는 그와 하나가 아닌 사람을 보았던 것이다. 즉, 두 인격으로 구성된 한 중보자를 보았다.이에 반대하여 알렉산드리아의 시릴(Cyril of Alexandria)은 그리스도의 인격의 단일성을 강조했고, 그의 반대자들은 씨릴이 양성을 부인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반대자들이 오해한 듯싶지만, 유티케스와 그 일파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성에 의해 흡수되었거나 양성이 융합하여 단일한 본성이 되었다는, 그리스도의 양성을 부인하는 입장을 취하면서 그 근거로 시릴을 인용하였다.② 바른 교리 (칼케돈회의의 결정 내용)Louis Berkhof는 칼케돈 신조의 진술에 관한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다음과 같이 4가지를 들고 있다. ① 양성의 특성은 일위(一位)에 속한다. 예를 들면, 전지(全知)와 제한된 지식과 같은 것이다. ② 신인의 수난은 참으로 무한한 것일 수 있으나, 그 신성은 감각할 수 없다. ③ 그리스도의 인격의 근거와 기초를 이루는 것은 인성이 아니고 신성이다. ④ 로고스(신성)는 어떤 독특한 인간 개체와 연합한 것이 아니라, 인성과 연합한 것이다. 처음부터 신격의 제2위와 연합된 개인이 있은 것이 아니라 동정녀의 복중(腹中)에서 인간의 본질과 연합한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의 핵심을 신조 본문을 통해서 확인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이 한 분의 유일하신 그리스도-성자, 주, 두 가지 본성(physesin)을 타고 나신 독생자를 인정하며, 이 두 가지 본성이 혼동(asunkutos)되거나, 한 본성이 다른 본성으로 변하거나(atrepotos), 두 다른 분리된 범주로 갈라지거나(adiaretos), 양성의 영역과 기능에 따라 각각 대립(achoristos)되지 않는 것을 인정한다. 각성의 특성은 연합으로 인하여 무효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각성의 고유성(idiotetos)이 보존되고 양성이 한 품성과 한 자질(hypostasis)로 일치를 이룬다. 양성은 갈라지거나 두 품성으로 분리될 수 없고 오직 합하여 하나님의 한 분이시며 유일하게 독생하신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가 되셨다(2) 칼케돈 신조의 특징 및 영향이러한 칼케돈 신조는 삼위일체에 대한 오해를 지나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오해를 명확히 정리한 것이다. 즉 신성과 인성의 자리를 성경적으로 바르게 정립하게 된 것이다. 결국 교회는 이 시기에 오면서 그리스도에 대한 정확한 교리적 내용을 고백하게 되었고 그 풍성함의 내용을 맛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이해는 교회에 중요한 교리적 기초가 되어서 후대의 신학적 기틀을 놓는 중요한 디딤돌이 되었던 것이다. 즉 위와 같이 고백한 객관적 신앙고백이 개혁교회의 즉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 보면 이러한 형상에 관한 그리스도에 대한 기준으로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증거로는 다음과 같다. "문97. 우리는 어떤 형상이라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인가? 답. 하나님은 어떠한 모양을 가진 분으로 그려질 수 없으며 그려져서도 안된다. 피조물은 그림으로 그려질 수 있으나, 하나님은 피조물을 섬기거나 하나님을 섬기는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피조물의 모양을 만들거나 그것과 비슷한 것을 만드는 것을 금하신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8장 2절은 칼케돈 신조를 요약해 놓은 듯 하다. "삼위일체의 제 2위이신 하나님의 아들은 참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셔서 성부와 한 본체이시며 동등이시나, 때가차매 인성을 취하여 사람이 되셨다. 사람에 속하는 모든 본질적 요소와 공통적 연약을 함께 취하셨으되 죄는 없으셨으니, 그는 성령의 권능에 의하여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어 그 여인의 몸에서 태어났다. 그러므로 온전하고, 완전하고 판이한 두 본성 즉 신성과 인성이 변질, 합성, 혼동 없이 한 위에 분리될 수 없이 결합되었다. 이 분은 참 하나님이시오, 참 사람이시며 한 그리스도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가 되신다"이처럼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바른 성경적인 고백은 모든 개혁교회 안에 인정되었고 이와 같은 정신에 서 있지 않는 모든 내용들은 철저하게 정죄되고 교회에서 제거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른 신앙의 정통성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면 매우 심각하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교회의 객관적 신앙고백 기준을 무시하고 등한시 해 왔기 때문에 정통적으로 사도 후에 그리스도에 신앙고백이 어떤 것이 참되고 바른 것인지 알 수 없는 혼돈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즉 초기 교회 당시에는 목숨을 걸고 드러내며 지켜왔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교리적 내용을 오늘날은 거의 대부분의 성도들이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즉 "두 본성에 한 인격"의 의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소개되지도 않고 또한 그것이 얼마나 우리의 신앙고백에 있어서 중요한 내용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 결과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과거 이단들이 행했던 모습들이 횡횡하게 된 것이다. 즉 신성을 무시하고 단지 그리스도의 인성만을 강조해서 예수님을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내고, 조각하고, 영상화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된 것이다. 어느 교회든지 주일학교의 공과를 보면 온통 예수님을 아저씨나 수염난 할아버지로 그려서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또한 주일학교 뿐만 아니라 교회 자체도 교회를 치장하고 장식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예수님을 그리거나 액자에 장식하는 것을 보게 된다. 요즘은 스테인드글라스로 교회에 장식하는 것도 보게 된다. 그리고는 더욱 심각한 것은 이렇게 해야 만 신앙적 교육이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은 신앙교육의 가장 중요한 효과가 "시청각 교육"이라고 모두들 목소리를 높여서 강조하고 있다. 결국 이런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정통적인 객관적 신앙고백의 기준에 입각하여 볼 때는 과거 이단들이 행했던 일들을 그대로 행하고 있는 것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교회가 이와 같은 비참함과 부패에 빠지게 된 것은 개혁교회의 객관적 신앙고백 기준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 기준만 최소한 알았다고 한다면 오늘날 이렇게 까지 성경의 참된 의미를 곡해하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더럽히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이런 교회의 혼탁과 부패는 오늘날 뿐만 아니라 교회 역사 속에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즉 칼케돈 신조는 동방, 특히 발칸반도의 저속화 된 기독교를 정화하기 위하여 753년 콘스탄티노플 노회에서 결의한 '성상 반대 결의'에 기본 정신이 되었었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이 표현되고 있다. 아무튼 그들이(성상옹호론자들) 묘사해서는 안되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묘사하려고 시도하는 것 때문에 비난을 받을 때에 그들은 다음과 같이 변명하는 말을 했다. "우리는 우리가 보았고 또 전승된 그리스도의 육신만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변명은 네스토리안들의 오류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육신은 말씀이신 하나님의 육신, 즉 신성과 분리되지 않으며 신성으로 완전하게 성육하여서 전적으로 거룩하게 된 육신으로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육신이 어떻게 이제 와서 신성과 인성으로 분리될 수 있겠는가?(즉 신성을 배제한 인성만을 그리스도로 표현할 수 있게는가 하는 문제이다. 과연 그런 인성만 표현된 예수님이 참된 예수님이겠는가?하는 것이다)마찬가지로 성자이신 하나님과 둔한 육신 사이에서 중보의 역할을 하는 그리스도의 인간 영혼도 또한 그러하다. (그리스도의) 인간 육신이 동시에 말씀이신 하나님의 육신이듯이 (그리스도의) 인간 영혼이 말씀이신 하나님의 영혼이어서 그의 영혼과 그 몸이 다같이 동시에 신화(神化)하였고, 따라서 그가 자발적으로 고난을 받았을 때도 그의 신격은 분열되지 않았다. 그 까닭은 그리스도의 영혼이 있는 곳에는 그의 신격이 있고 그리스도의 몸이 있는 곳에도 그의 신격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만일 그가 고난을 받았을 때 신성이 그의 영혼과 몸에서 불리될 수 없이 그대로 있었다면 어찌하여 어리석은 자들이 감히 그의 육신을 그의 신격에서 분리시키는 모험을 하여 그 육신을 마치 단순한 한 인간의 형상처럼 제시하려 드는가?그들은 그리스도의 육신을 그의 신격에서 분리시켜서 그것을 단순한 육신의 본질에, 또 그 육신 자체의 인격에 돌려서 그것을 형상으로 묘사함으로써 그들이 삼위일체에다가 제 4의 위격을 도입하게 되기 때문에 그들은 불경의 깊은 심연으로 빠져들어간다. 더구나 그들은 신격에 의하여 성육되어서 신화된 그 육신을 마치 신화되지 않은 것처럼 제시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을 만드는 사람은 누구든 간에 묘사될 수 없는 신격을 묘사하여 그리스도의 인간성과 혼동시키거나(단성론자들처럼) 혹은 그리스도의 몸이 신화되지 않고 분리되어 있는 듯이 네스토리안처럼 제시하는 사람이 된다.아무튼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합당하게 용납할 수 있는 유일한 형상은 성만찬 예식에서 나오는 떡과 포도주뿐이다. 이 형상만이, 또 이 형식만이 그의 성육신을 제시하기 위하여 그가 선택하신 것이다. 이처럼 칼케돈 신조의 바른 신앙고백의 내용을 교회가 바르게 이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곧 부패하여 다음과 같은 잘못된 결의를 하게 된 것이다. 즉 753년 콘스탄티노플 노회의 성상 금지 결의는 큰 충격을 서방교회에 주었고 성상을 안치하고 그 앞에서 경건생활을 실천하던 신자들을 자극하였다. 그리하여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제7차 에큐메니칼 공회를 787년 니케아에서 소집하여 753년의 콘스탄티노플 노회의 결의를 무효화하고 성상을 숭배 또는 예배할 수는 없지만 존경하며 절하며 입맟출 수 있음을 결의하였다. 동방 정교회와 로마 카톨릭교회가 다같이 이 결의를 받아들였으나 그것은 잠정적이었고 815년에 동사 양교회는 성상문제로 다시 분쟁에 들어갔다. 결국 서방 로마교회는 동방의 로마제국과 정치적으로 분열되었고 그 결과 서방 로마교회는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한 프랭크 제국과 유대를 맺게끔 되었다던 것이다.여기서도 보면 처음에는 절대적으로 반대하지 않고 753년의 회의를 약간만 수정해서 받아들였던 것이 후대로 가면 갈수록 완전히 거부하는 형태로 발전해 가는 것을 보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객관적 신앙고백을 엄밀하고 철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단지 느슨하고 타협적으로 받아들이는 정신이 결국에 가서는 신조 전체를 변질시키고 버리게 되는 길로 나가는 문의 역할을 하게 됨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신조의 채택에 있어서도 엄밀하고 철저하게 고백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내용인지를 알 수 있다. 특히 이런 채택에 대한 정신은 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더욱 자세하게 다루어 질 것이다. (3) 칼케돈 신조에 대한 평가Louis Berkhof는 칼케돈 신조는 "양극단의 견해를 전부 정죄하고, 위(인격)의 단일성(unity)과 양성을 함께 주장했다"는데 큰 의의를 두지만 아쉬운 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니케아 회의가 삼위일체 논쟁을 끝마치지 못한 것처럼 칼케돈 회의도 기독론 논쟁의 종결을 짓지 못하였다". 즉 앞에서도 보았지만 이단들은 매 시기 때 마다 더욱 자신들의 입장을 숨기면서 들어오기 때문에 교회는 더욱 철저하게 진리의 내용을 드러내고 밝힐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특히 우리는 여기서 칼케돈 신조가 가지고 있는 신앙고백의 공통적인 특징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즉 칼케돈 신조는 그 신조의 내용과 근거를 앞선 신조들의 정통성에 의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본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부들을 따라서 우리는 모든 사람이 한 분이신 유일한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도록 가르치는 일에 하나가 되었다. -- 옛 예언자들도 이렇게 증거하였고 주 예수 그리스도도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치셨고, 교부들의 신조도 이렇게 우리에게 전달되었다".이처럼 교회의 객관적인 신앙고백은 항상 교회의 역사를 살피고 그 역사 속에서 객관적인 기준으로 바르게 인정되었던 신앙의 기준인 앞선 신조에 영향을 받고 그 동일한 정신으로 신앙고백이 세워져 가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참된 진리는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결코 변함없는 동일한 내용임을 드러내려고 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신조는 오늘날과 상관이 없다고 말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오늘날 이렇게 말하면서 신조는 과거의 것이고 오늘날은 오늘날의 형편에 맞게 성경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면서 신조를 과거의 것으로 돌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옳지 못한 태도인 것이다. 교회의 객관적인 신앙고백인 신조는 성경의 참된 내용을 바르게 고백하고 드러낸 것이기 때문에 세월이 흘러도 그 참된 진리의 내용은 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도 여전히 과거의 신조들의 정신과 그 내용이 오늘날 개혁교회의 기초와 중심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오늘날도 여전히 그 내용이 소개되고 가르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의 신조들도 독립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과거에 이미 객관적으로 정립된 신앙고백의 내용에 기초해서 고백되어진 것이기에 동일한 힘이 있는 것이다. 이런 신조의 독특한 역사성과 특징은 종교개혁의 신조들을 살펴보면 더욱 깊이 알 수 있다. 즉 종교개혁시대의 많은 신조들이 이 고대 신조의 내용들과 그 권위에 기초하여 고백되어졌기 때문인 것이다. 이처럼 신조에는 역사를 초월하는 독특한 성격이 있는 것이다. 이런 신조의 성격을 잘 이해해야만 오늘날 과거의 신조를 소중히 여기고 또한 배우고 익히는 일에 열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 내용들은 참된 진리에 대한 영원한 교회의 객관적인 신앙고백이기 때문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5) 아다나시우스(Athanasios)신조- A. D.420-450 (1) 아다나시우스 신조의 작성배경5) 이 신조는 사도신경처럼 저자가 명확하지 않다. 9세기 이후에는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으로 그리스도의 신성과 정통적인 삼위일체 교리를 가장 두드러지게 옹호했던 아다나시우스(296-373)가 이 신조의 저자로 알려져 왔으나, 17세기 중엽 이후로는 이 견해가 배척을 당했다고 한다.6) 이 신조의 내용은 두 부분으로 되었는데, 제 1부는 삼위일체론으로 사도신조와 니케아 신조보다 더 분명하게 어거스틴적인 삼위일체를 고백하면서 삼위 사이에는 어떤 의미에서든지 종속은 없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신조에서는 특징적인 용어로서 삼위일체을 'trinitas'람 말로써, 품성(인격)을 'persona'로써, 그리고 본질을 'substantia'란 말로써 표현하고 있다. 제 2부는 기독론인데 아폴리나리우스와 네스토리우스와 유티케스 등의 이단설들을 반격하고 있다.(2) 아다나시우스 신조의 특징 및 영향 아다나시우스 신조는 제4차 에큐메니칼 회의 때까지(325-451)의 교리적 결정들과 삼위일체와 성육신에 대한 어거스틴의 사상을 매우 분명하고도 자세하게 요약하고 있으며, 간결한 문장들은 기술적으로 배열되었고 아름답게 표현되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아다나시우스 신조는 비논쟁적이고 평화로운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사도신경과는 매우 대조적으로 삼위일체와 성육신 등을 믿는 공교회의 신앙은 구원의 필요불가결한 요소이며, 이 신앙을 반대하는 자는 영원히 멸망을 받으리라고 하는 엄숙한 선언으로 시작하고 또 끝을 맺는 저주문이 있다. 그 저주문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누구든지 구원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것 이전에 먼저 이 신앙을 소유해야 한다. 또한 누구든지 이 신앙을, 완전하고 순결하게 지키지 않으면, 틀림없이 영원한 멸망을 받을 것이다. --- 이것이 교회의 참 신앙이며, 이를 신실하게 믿지 않는 자는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아멘.본 신조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것 같으면 바로 이 저주문의 특징을 들 수 있다. 즉 내용 자체는 이미 다른 신조들의 내용에 기초해서 더욱 명확하게 표현을 이어 받고 있기 때문에 반복해서 언급하지는 않겠다. 다만 여기서는 객관적인 신앙고백에서 "저주문"의 성격을 좀더 깊이 살펴보고자 한다. 왜 이 저주문의 성격을 잘 이해해야 하는가 하면 오늘날 초대 신조를 받아들이는 분파들 중에서 신조의 내용은 받아들이지만 신조를 통해서 다른 분파를 강력하게 분리시키고 정죄하는 이 저주문의 내용과 정신을 받아드려고 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 즉 신조는 받아들인다고 하면서 신조가 가지고 있는 엄밀한 정신과 역할은 받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오늘날 그나마 신조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대부분의 개신교의 입장이기도 하다. 이같은 모습은 어떻게 보면 오늘날처럼 신조를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는 풍토 속에서 그래도 신조를 받아들이니까 매우 긍정적이고 좋은 입장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신조의 역사를 통해서 배워야 하는 것은 신조의 내용과 그 정신을 함께 받지 않는 느슨한 성격의 신조 수용 형태는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신조의 내용까지도 버리는 곳으로 가게 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신조라는 것은 그 내용만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엄밀하게 신조의 정신과 그 역할까지 모두 받아들여야만 신조를 전체적으로 바르게 받고 신조의 내용까지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신조의 역할은 교회 안에서 바른 신앙을 드러내고 그 신앙적 내용이 초신자와 후손들에게 바르게 전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으며, 두 번째로는 교회의 객관적인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기준에 맞지 않는 형태를 분명히 구분해 내고 또한 제거하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었다. 즉 이단과 거짓교사들을 정죄하여 교회를 보호하고 지키는 역할을 당담하는 것이 신조의 가장 큰 정신이었던 것이다.그런데 신조의 내용은 받아들이면서 그 신조가 가지고 있는 정신과 역할, 즉 이단과 거짓교사들을 정죄하고 제거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모순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두 가지를 다 받든지 아니면 두 가지 다 버리든지 해야 할 것이다. 어느 한 쪽만을 부분적으로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본 신조에서 제시되고 있는 저주문의 성격과 그 내용이 너무 엄격하고 지나친 것이 아님을 앞선 신조들의 특징과 역할을 보면 알 수 있다. 즉 초기 교회에서부터 신조는 이단과 거짓교사들을 배격하고 구분해 내서 교회를 지키고 보호하는 역할이 가장 중심된 내용이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특징을 너무 엄격하다고 말한다면 신조 자체의 특징을 무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러면 한 걸음 더 들어가서 선조들이 이와 같은 엄격하고 분명한 입장을 표현하고 드러내게 된 것은 어떤 근거에 의해서 그렇게 한 것인지를 살펴보면 오늘날 신조의 정신이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지를 좀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것은 인간이 자신들의 분파를 자랑하고 편협적으로 강조하기 위해서 인간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교회에 세우신 거룩한 하나님의 정신임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의 내용과 같지 않는 모든 사상과 내용들이 절대로 교회 안에서 인정되거나 받아들여져서는 안됨을 경고하셨던 것이다. 오히려 그런 왜곡된 내용이 교회 안에 들어오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과 진노가 내리게 됨을 엄히 경고하심을 볼 수 있다. (사8: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갈1:8-9)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계2: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계2: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계2: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계2: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계2: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계2: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위의 말씀 중에 갈라디아서를 보면 이미 참된 진리와 같지 않았을 때 그 거짓된 가르침은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가 엄하게 선포됨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비(非)진리에 대한 정죄와 저주는 성경 스스로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즉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스스로 선언하시는 정신임을 알 수 있다. 바로 이런 정신을 교회에서는 다만 이어 받은 것이다. 그리고 계시록의 말씀들을 보게 되면 교회 안에서 이단과 거짓교사들을 드러내지 않으므로 하나님께 심한 책망을 받는 것을 보게 되며 반대로 그들을 드러내고 정죄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일을 기뻐하시고 칭찬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 특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계2:6)의 말씀은 큰 의미를 던져 주고 있다. 즉 교회의 그와 같은 엄격하고 분명한 진리에 대한 객관적인 고백과 그로 인한 거짓을 드러내고 정죄하는 행위는 하나님 스스로 내리신 심판과 정죄로 그대로 인정될 정도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행위임을 엿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단과 거짓교사들에 대한 정죄와 저주는 보다 엄격하고 엄밀하게 태도를 취해야 할 교회의 고유한 권한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정신은 도르트 신조에서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즉 도르트 신조도 이 신조를 고백하고 드러냄으로서 이단자였던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감리교의 선조)의 목사들이 교회에서 파문을 당하고 그 지도자들은 국가법에 의해서 처형을 당하며 정죄를 당했던 것이다. 특히 이 신조의 결의문에는 다음과 같은 엄격한 심판과 저주의 내용이 선언되고 있다. "더 나아가 본 종교 회의에서는 개혁교회의 참 신앙고백을 중상 모략하고 거짓 증거를 하는 이 모든 일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을 그들에게 경고하는 바이다".(3) 아다나시우스 신조에 대한 평가Philip Schaff의 글에 의하면 제 3차와 제 4차 세계 교회 회의는 니케아 신조 이외에 다른 신조를 작성하거나 출판하는 것을 엄격하게 규제하였음에도 아다나시우스 신조는 범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아 "정통 교리의 아버지"란 찬란한 이름을 얻었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본 신조는 역사적 장로교회에서 늘 정통적인 교회의 신조로서 인정을 받았고 현재도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6) 고대 신조 결론지금까지 앞에서 살펴 본 바를 도표로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신조채택지역다른이름주요 내용이 단사도신경서방신앙의 규범, 진리의 규범, 사도적 전통, 신앙의 상징삼위일체 기본유대주의, 이교주의니케아325년에 318명의 동방교회의 감독들이 니케아 회의에서 채택 (아다나시우스)동방-삼위일체(성부와 성자의 동일본질 문제)아리우스(아리안주의)콘스탄티노플381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모인 에큐메니칼 공회에서 150몀의 감독들이 채택동방나이신신조(Nicene Creed), 105교부의 신조,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삼위일체(성령에 관한 내용 추가)유노미우스와 마케도니우스칼케돈451년에 칼케돈에서 회집되었던 제4차 세계 종교 회의에서 채택동방-기독론(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연합 문제)네스토리우스, 유티케스아다나시우스-퀸쿤케 신조삼위일체+기독론이와 같이 각 신조가 작성 되게 된 배경에는 성경의 진리를 파괴하는 이단들이 있음을 우리는 배울 수 있다. 여기에 대항하여 초대 신조들은 교회를 하나로 묶어 주는 역할을 감당하였던 것이다. 반복하여 언급하지만 초대 신조들은 성경의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고백하기 위해서 작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단을 대항하여 기독교의 본질과 원리를 잘 가르치기 위해서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바빙크의 표현처럼 우리의 적들은 "대문 밖에 있는 적"들과 "기독교 원내에 있는 적"들이 있는 것이다. 초대 교회 이후 많은 학자들은 이러한 바른 견해를 갖지 못해서 잘못된 주장을 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귀한 유산들이 남겨진 오늘날에도 우리가 잘못된 주장을 펴는 일이 있어서야 되겠는가? 이와같은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개혁교회의 신조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고자 하는 노력들은 참으로 귀하다고 생각한다. 끝으로, 다음 칼빈의 글을 통해, 현실이 아무리 어둡고 진리를 찾기 어려워도, 우리는 진리가 승리할 것을 확실히 믿도록 하자. 우리는 아다나시우스와 바실이나 카릴루스 같은 진정한 교리의 옹호자들을 주께서 모든 시대와 모든 곳에서 일으키신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 그러나 진리는 교회 안에서 죽지 않는다고 나는 확신한다. 한 회의가 진리를 억압할지라도 주의 놀라운 보호를 받아, 때가 오면 진리는 다시 일어나 승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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