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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스톤 신학의 특색

by 【고동엽】 2021. 11. 4.

프린스톤 신학의 특색

프린스톤 신학이라고 불리는 신학 체계는 19세기 초엽에서 20세기 초반까지 한 세기동안 유지됐다.

프린스톤 신학의 특색은 무엇보다 단일성이다. 이러한 단일성이 오랫동안 유지된 이유는 그들이 믿었던 객관적 교리관의 일치때문이라는게 신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프린스톤 신학은 신학의 단일성에서 학문적 발전을 이룰 수 없다는 일반적 오해를 깨뜨린 정석이다. 프린스톤은 처음부터 개혁주의 교리 체계를 신학의 기초로 삼았으나 개혁주의 신학보다 광범위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개혁주의 자체가 성경의 기본적 교리의 토대 위에서 항상 주어진 컨텍스트를 분석하고 텍스트를 적용함에 있어서 개혁과 발전이 있어야함을 주장하고 있다.

프린스톤 신학의 또 하나의 특색은 스코트랜드 상식 철학을 수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식 철학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들에 확고한 형이상학적 실체를 제공하기 위해 비이성적인 궤변이나 불합리를 떠난 입장에서 인식하려는 철학적 시도이다. 이러한 상식 철학의 과학적 방법이 종교적 진리를변호하는데에 특히 성경의 권위를 위한 교리에 적용되어 졌다.

그렇다면 프린스톤 신학에 큰 공적을 세운 대표적인 신학자에는 누가 있을까. 이들 학자로는 알렉산더와 찰스 핫지, 벤쟈민 워필드를 꼽을 수 있으며 이것은 미국 개혁주의 연구가들의 견해다.

알렉산더

알렉산더의 신학적 기초는 투레티니의 신학 강요와 위더스푼에 의하여 대중화되 스코틀랜드의 상식 철학과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이었다. 당시의 교회는 부흥회적 분위기로 가열돼 있었으나 신학적으로는 회의적이며 교리적 훈련이 전혀 결여돼 있었다. 이 시점에서 그는 종교적 열정을 가열된 신학생들에게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으로 신학적 방향을 제시하며 신학과 경건을 겸비한 영적 지도자를 양성하는데 힘썼다.

또 알렉산더에게는 단순한 이성 뿐만 아니라 경험을 통한 인식도 중시되는 인식론적 이원론이 소용되기도 했다.그러나 알렉산더 이후 시대에서는 인식론적 이원론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찰스 핫지

핫지는 오랫동안 프린스톤 신학의 대명사였다. 그가 이렇게 평가되는 것은 그의 영향면에서 뿐만 아니라 그의 <조직신학>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스승 알렉산더를 계승, 성경의 권위를 강조했고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의 토대 위에서 신학 교육을 강화했다. 핫지는 개혁주의 입장에서 합리주의와 주관주의를 비판하여 그의 신학을 전개했다. 그는 그의 조직신학 서론에서 신학의 방법론을 설명하고 귀납적 방법론을 제시했다.

벤쟈민 워필드

알렉산더가 프린스톤 신학을 이끌어 갈 때 그이 신학은 목회학적 경향으로 기울어 갔다. 핫지는 그 뒤를 이어서 조직신학으로 묶어 신학적 기초를 더욱 공고히 했다. 워필드에 이르러는 이미 확립된 신학을 변호하는 사명이 주어진 것이다. 워필드가 프린스톤에 가르치기 시작할 무렵 핫지의 신학은 사방에서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워필드가 직면한 과제는 유럽의 과격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건전한 비판을 가함으로써 미국 교계 속에 침투하는 자유주의 신학을 미연에 방지하는 일이었다.

 

김대원 기자 dwkim@chtod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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