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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편◑/정통 교리사

고대교회사

by 【고동엽】 2021. 11. 4.

고대교회사

- 헬레니즘과 로마문명에서의 교회역사 -
V. 1.1

 

독일에서는 교회사를 5 시대로 구분한다:
고대 교회사 – 중세사 – 종교 개혁사 – 근대사 – 현대사 (혹은 근대사와 현대사를 하나로 묶이도 한다)


참고문헌:

독일어 문화권의 대학에서는 일반적으로 교회사에 교리사와 기독교 사상사를 포함한다. 따라서 교회사 책을 읽으려면 철학적 기본지식이 요구된다. 교리와 철학을 많이 다루므로 책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별도로 집필된 교리사 교과서도 있다. 독일의 교회사가들은 대체로 철학이나 문화사에 정통한 사람들이다.

Armin Sierszyn(아민 저진): 2000 Jahre Kirchengeschichte. 1권 고대 교회사가 1995년에 나옴으로서 독일어권 복음주의권에서는 처음으로 대학 교과서로 사용될 수 있는 교회사 책이 등장했다. 이후에 계속해서 4권(근,현대교회사)까지 출판되고 그의 책은 계속해서 출판 횟수가 높아짐. 그는 스위스 STH의 교회사 교수이며, STH는 2007 까지는 독일어 문화권에서 유일하게 국가에서 인정하는 복음주의 신학대학이었다. (2008에 독일의 FTA가 국가의 인정을 받음으로 승격되어 FTH로 명칭을 바꿈)
필자가 정리한 본 „고대 교회사“는 아민 저진의 책을 기본으로 한 것이다.


그 외에 복음주의권 신대에서 사용하는 책으로는 대체로 이른바 중도파 신학자들이 저술한 것이다. 중도파란 자유주의에 속하지만 성서비평을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그룹을 말한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성서의 권위를 어느 정도 인정을 하며, 그 중에는 예수님의 신성과 부활을 믿는 학자들도 있기 때문에 그들의 견해는 복음주의자들이 공유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다.
독일에서 출판된 교회사 책들과 자료들은 셀 수도 없이 많지만 간단하게 다음의 두 권만 소개한다.

중도파들의 저서:
K. D. Schmidt: Grundriss der Kirchengeschichte. 1960에 초판 이래로 현재까지 10판이 넘었다. 사상을 많이 다루었으므로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저자의 매우 뛰어난 통찰력이 보인다. 대단히 유익한 책.
K. Aland: „Die Geschichte der Christenheit“ 읽기가 비교적 쉬운 좋은 책.

 

목차

제1부: 사도 시대

I. 초대교회

II. 초대교회의 도전
1. 율법주의
2. 당시의 세계관 a) 그리스 로마 신 b) 동방종교(밀의종교) c) 철학.


제2부: 속사도 이후 300년까지

III. 3세기까지의 선교
* 초기의 복음전파자들 * 신자들의 사회적 지위 * 여성의 지위 * 로마제국이 선교사가 되다 * 폴리갑의 죽음 * 눈에 띄는 기독교인 * 켈수스의 기독교 비방 – 원시적인 기독교 * 기독교가 쉽게 전파될 수 있었던 외적 이유 * 3세기까지의 기독교 전파.

IV. 국가와 교회 (260년까지) - 기독교 박해
* 네로의 박해 * 도미시안의 박해 (81-96) * 플리니우스의 보고 (111년 제국의 결정) * 박해받는 기독교인 (하나님과 다원주의) * 177년 리용에서의 박해 * 세베루스 황제 박해(202) * 데키우스와 발레리안의 박해 (250-258) * 기독교 박해를 하나님편에서 어떻게 봐야만 할까?

V. 속사도 교부
1. 클레멘스 서신 2. 이그나티우스 서신 3. 폴리캅의 편지 4. 바나바 서신 5. 헤르메스 목자 6. 파피아스 단편 7. 디다케: 12사도 교훈.

* 속사도 교부들의 특징
1. 이신칭의의 교리의 후퇴 2. 성찬의 이해 3. 비숍의 지위

VI. 변증가
* 순교자 저스틴 * 변증가들의 특징과 문제점들 * 생각해볼 점.

VII. 이단 종파의 공격
A. 영지주의
1. 로마 제국의 종교 2. 영지주의와 기독교 3. 영지주의 기원과과 이론 4. 기독교적 영지주의의 대표자들.

B. 기독교 영지주의 교리
1. 인간론 2. 구원론 3. 신론과 창조론 4. 그리스도 5. 영지주의적 교만 6. 신약과 영지주의

C. 그 밖의 이단 종파
1. 마르키온 (Marcion) 2. 마니교 (Mani) 3. 몬타너스 주의

VIII. 영지주의에 대한 대항
1. 신약정경 형성
* 교회와 성경 * 사도들의 글들이 신속하게 퍼짐 * 저스틴의 증거 * 이레네우스 * 무라토리 단편 * 오리겐과 성서 * 아타나시우스의 부활절 서신(목회서신) 367 * 문제가 된 서신들

2. 신앙고백문 – Regula fidei
* 교회가 성경 외에 신앙고백이 필요했던 이유 * 신앙고백문의 형성

3. 독재 비숍제의 탄생
* 초대교회부터 이그나티우스 전까지 (약70-110) * 이그나티우스부터 가톨릭의 비숍교회 * 저성직과 고성직 * 독신제

IX. 로마 교황제도의 형성사
* 베드로와 로마교회 * 로마의 수위(首位)권 주장의 시초 * 교황제도 확립

X. 고대교부: 이레네우스, 터툴리안, 키프리안
1. 이레네우스
* 2세기의 성서주의자 * 하나님이 로고스를 통해 구원을 완성하심 * 사변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2. 터툴리안
* 교회의 변호사 * 느슨해진 기독교를 질책함 * 국가와 이방인에 대항하는 문서 * 거짓 교사들과의 싸움 * 언어의 창조자 * 신학자

3. 키프리안
* 생애 * 삯군 목자? * 순교자, 고백자, 배교자 * 하나님은 아버지며, 교회는 어머니이다 * 순교자 키프리안 * 고대 교부들에 대한 평가

XI. 과학(철학)과 믿음
1. 클레멘스와 교리문답 학교
* 클레멘스의 저작 * 기독교 영지주의자

2. 오리게네스
* 생애 * 오리겐의 저작 * 오리겐의 해석학 * 기독교 신비주의의 아버지
* 기독교 교의학자 * 오리겐의 평가


제3부: 콘스탄틴 부터 서로마 제국 멸망까지

XII. 콘스탄틴의 전환
1. 디오클레시안의 제국 분할
* 250년 이후 제국의 기독교 상황 * 당시의 제국상황

2. 기독교 박해
* 발단 * 6단계 박해 계획 * 진행과 결과 * 정치판도 * 갈레리우스의 박해

3. 콘스탄틴의 승리
* 막센티우스와의 결전

4. 콘스탄틴과 기독교
* 콘스탄틴의 신앙생활 * Pontifex maximus(대사제) * 교회를 위한 공헌

5. 콘스탄틴과 도나투스파
* 루실라와 불만자들 * 대죄자가 안수를 줄 수 있는가? * 콘스탄틴의 중재 * 도나투스파들의 반발 * 도나투스파들의 기본 입장 * 326 분노의 대이단 법령 * 순교자 교회에서 국가 교회로

6. 십자가와 문화혁명
1. 교회의 세속화 2. 교회가 제도적 교회로서 발전 3. 국가와 교회와의 종속관계 4. 콘스탄틴의 비판?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XIII. 국가교회로의 발전과정 (311 - 380)
* 콘스탄틴의 세 아들
* 줄리안의 반동 (Julian, 361-363)
* 기독교의 국교화 (380)
* 사회변화 1. 결혼과 가족 2. 사회 변혁 3 교육과 문화

XIV. 수도원 제도
* 미혼녀와 고행자(금욕자)
* 은둔자들(사막의 아버지들)

1. 안토니우스
* 생애 * 영적투쟁 * 은둔자 모임 * 평가

2. 파코미우스
* 생애 * 수도원의 특징 * 수도원 규칙 * 수도원의 삶

3. 수도원 제도의 보급
* 서방의 수도원 제도 시작

4. 베네딕트 수도원
* 생애 * 베네딕트의 의의 * 베네딕트 규칙 * 가족, 학교, 군대 * 승려들의 맹세 * 하루 일과 * 수도원의 음식 * 선구자: 문화 전달자.

XV. 교부 시대
* 교부란? * 교부의 특징 * 그들의 활동의 특징

1. 대 바실리우스 (바실)
* 수도원 건립 * 가이사랴의 비숍 * 자선과 니케아 신조
2. 니사의 그레고리

3.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4.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모스
* 특징 * 고행자와 목자 * 안디옥의 설교자 * 콘스탄티노플 비숍 – 개혁자 * 추방당함

5. 암브로시우스
* 총독에서 비숍으로 * 아리우스 주의 격파 * 설교가 * 교회 군주 * 교회 권력의 남용 * 서양의 교회 음악의 아버지

6. 히에로니무스(제롬)
* 사막의 은둔자 * 베들레헴 수도원 건립 * 34년간의 삶 (386 - 420) * 학자로서의 히에로니무스

7. 어거스틴 (354 - 430)
* 고백록의 특징 * 소년기 * 그의 발전 단계 * 교회를 위한 봉사 * 도나투스파에 대한 승리 * 펠라기우스와 은혜 * 신국론 (De Civitate Dei) * 그의 죽음

XVI. 기독론 논쟁 (4,5세기)

I. 아리우스 논쟁 전까지
* 두 가지 기본적 질문
* 전 역사
* 예수님은 누구신가? - 독재론의 제거
1) 양자론 2) 양식론 3) 사모사타 바울
* 동방의 두 학파
1) 안디옥의 신학교 – 안디옥 학파 2) 알렉산드리아 학파
* 서방의 공헌

II. 아리우스 논쟁 (318 - 381)
* 발단 * 아리우스는 319에 정죄 됨 * 싸움이 동방교회를 분리함 * 콘스탄틴의 중재 – 니케아 범(에큐메니칼) 종교회의 (325) * 니케아 고백 * 니케아 고백으로부터 콘스탄틴 황제의 임종까지 (337) * 콘스탄틴의 두 아들 * 줄리안 (361 – 363) * 381 니케아 – 콘스탄티노플 신경

III. 그리스도의 두 성질과 한 인격 교리 논쟁 (381-451)
* 서론적 개관 * 오리겐을 둘러싼 논쟁 *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적 대립 * 네스토리우스 논쟁(431/ 433) * 에베소 공의회(431) * 에베소 강도 공의회(449) * 칼케돈 공의회

XVII. 아랍 침공 때까지의 교리적 혼란
*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553 (5차 범 공의회)
*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681 (6차 범 공의회)

 

 


제1부: 사도 시대

중요한 연도
30: 예수님 처형과 부활, 승천
48/49: 예루살렘 공의회 (행15)
49: 클라우디우스 칙령 (유대인 추방)
64: 네로 박해
66-73: 유대 전쟁. 예루살렘 멸망 (70)


I. 초대교회 – 사도교회

# 초대교회의 교회의 다양한 모습을 살핀다. 구약의 율법을 지키는 유대교와 율법에서 자유로운 이방기독교와의 차이를 간단하게 살핀다.

- 교회사의 자료: 당시 교회의 모습을 보려면 사도 행전, 주로 바울 서신을 연구해야 한다.
- 교회의 탄생: 오순절 (30). (예루살렘) 교회가 탄생함. 각국에서 온 순례자들이 성령체험 이후에 자국으로 돌아가서 선교를 했겠지만 그 구체적인 자료는 없음.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를 집필할 당시 벌써 로마에 신자들이 많이 있었다.
- 예루살렘 교회의 구성인원: 유대파 기독인과 헬라파 기독인.
- 스테판 순교의 의의: 주로 율법을 유대인처럼 엄밀하게 지키지 않는 헬라파 유대인이 박해당하여 추방됨 (행7). 이것이 직접적 선교의 계기가 됨 빌립집사의 사마리아 전도. 첫 이방인 선교!
- 사도 바울의 부르심.
- 안디옥 교회 설립 (헬라파 교회 – 율법으로 자유하는 경향).
- 사도 바울과 바나바의 이방인 전도. 소아시아, 그리스, 마게도냐의 각 도시에 교회와 지도자들(한 교회에 다수의 장로들)을 세움.

* 유대교회: 율법을 철저히 지킴. 겉으로 보면 유대인과 차이가 거의 없다. 주의 형제 야고보는 예루살렘 유대인들로부터 „의의 선생“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사도들이 사울을 고향으로 보낸 후에 교회가 유대, 갈릴리, 사마리아에 평화를 갖고 성장하였다고 함(행9:31). 이 구절을 사도 바울과 연관을 시킬 필요는 없지만, 초대 교회는 몇 가지 사건 외에는 유대인과 큰 충돌이 없이 지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을 성경은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초대교회가 전도를 aggressiv하게 한 것이 아님.

* 배울 점:
1.교회 형태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도 절대적인 교회 형태를 제시하지 않았음(사도 바울의 교회는 각기 조직이 조금씩 다름). 유대인들(12사도 포함)은 율법을 그대로 지키면서도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구약의 율법을 준수하던 예루살렘 교회는 35년 동안 잘 성장하여 초대교회의 모체가 되어 그들이 세계선교의 기초를 놓음. 특정한 교회형태, 신앙생활 형태를 절대화하는 것은 위험하다.
2.성령께서 사도들의 지평을 넓혀주심. 예를 들어 고넬료 사건을 통하여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을 가르치심 선교는 성령님이 주체시다.
3.고넬료 사건이 사도 공의회에서 매우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데에 큰 공헌을 함: 이방 교회를 인정하여 이방인을 유대교 율법으로부터 해방을 시킴(그러나 구약의 모든 율법이 무효화 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4.오늘날의 다양한 교회의 형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사도적 교회라고 해서 모든 것을 칼로 재단하듯 하지 않았다. 사도 바울의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가 성장함에 따라, 교회의 상황에 따라 변화가 있음. 그러나 항상 기본적인 골격은 가지고 있다.
이러한 원칙들이 차차로 어떻게 변해가는 지를 살필 것.

- 초대교회 시대에는 기독교가 외부인들에게 일반적으로 유대교의 한 분파로 보임.
1.그들은 율법을 잘 지켰다.
2.클라우디우스 황제 칙령: 행18:2.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함. 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에게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전파하므로 서로간에 싸움이 일어남. 황제는 이것을 유대종교 내부의 문제로 봄.
3.유대인 알렉산더의 변호: 에베소 교회 (행19: 331))
4.사도 바울: 전도시 유대인들에게 진정한 유대인은 구약에 약속된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고 가르침.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갈3:29)
5.당시 유대교는 로마에서 공인된 종교: religio licita. 황제숭배를 하지 않아도 핍박을 받지 않았음. 이러한 이유로 기독교는 초기에 대규모적인 핍박을 받지 않았음. 즉 유대교의 덕택을 입음. 이러한 이유로 유대교가 기독교를 더욱 핍박함(유대교의 이단).

- 예루살렘의 멸망(70): 예루살렘 교회도 소멸함2). 이러한 교회의 형태는 과도기적이다. 이러한 형태가 장기적으로 지속하면 복음이 율법 속에 감금을 당한다. 신자 중에서는 바리새인들도 있었음(행15:5.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계속 바리새인으로 삶). 따라서 교회가 지역과 문화와 특정한 전통을 벗어나서 보편적(가톨릭) 교회로 발전하려면 예루살렘교회(유대 기독교)의 소멸은 필연적이다. 그 후에 사도들 자신도 이방으로 나가서 보편적 교회를 섬김.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의 공헌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 초대교회의 특징: 사도의 증언과 성경
- 사도들의 권위:
1.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그의 삶을 가장 가까운 데서 체험한 자. 제 일차 증인.
2.또한, 그들은 듣고 본대로 전하라는 명령을 받음. 따라서 그들의 가르침이 하나님 말씀이 됨. 이것의 기록이 성경이 되었다.
- 그들의 가르침의 깊이와 진리성은 인간의 지혜와는 전혀 다르다. 이것이 그들이 기술한 성경과 속사도들의 가르침이 하늘과 땅의 질적인 차이가 있는 이유이다. 태양과 등불의 차이. 벌써 기독교 타락의 조짐이 보인다3).
- 다양한 사람들(9명4))이 성경을 저술했지만 27권이 모두 통일성이 있다. 성령의 영감이 없었다면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 인류의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시절.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그들에게 직접 나타나지 않으셨다면 이러한 현상은 불가능하다.
- 아무도 사도들의 권위를 흉내를 내서는 안 된다. 이들의 권위는 역사상 일회적이다.
- 목사가 자신을 주님의 종으로 칭하고 사도들의 권위를 가질 수 있는가? 더구나 하나님의 권위를?


II. 초대교회의 도전

복음은 아무 저항 없이 전파되지 않았다. 강력한 내부, 외부의 적들과 싸워서 이겨야만 했다. 초대교회의 투쟁은 2000년이 지난 우리에게도 귀감이 된다. 우리에게 무엇에 대항하여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다. 초대교회가 직면했던 문제는 오늘날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교회에 대한 도전을 그치지 않는다. 복음이 2000년이 지난 오늘에 까지 순수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은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1. 유대 율법주의 – 내부의 도전

- 많은 유대인은 예수님을 믿게 되어도 율법적인 성향을 떠나지 못했다. 바리새인들이 신자가 되어 교회에 들어오게 되면서 이러한 경향이 더 힘을 얻음5).
- 초기의 사도들까지도, 예수님을 믿어도 율법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함6). 그리고 그들은 초기에는 이방인 전도를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을 성령님께서 이것을 교정시켜주심(고넬료 사건: 행107)).
- 그러나 헬라파 유대인들은 율법에서 자유함(스테판의 성전 논쟁8), 바나바를 비롯한 안디옥 교인).
- 사도 바울이 가장 격렬하게 싸운 대상은 율법주의(갈2:12ff). 빌3:1: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3:18: 십자가의 원수.
- 율법을 고수하는 사도들도 이들(십자가의 원수)에 속하는가? 아니다. 그들이 율법을 사수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성령님에 의해 설복을 당함. 예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은 다르다. 베드로는 개종한 사마리아인들에게 율법을 강요하지 않았다(행8). 그들은 초기에 복음은 유대인들만의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율법준수가 문제가 되지 않았음. 이방인 전도 이후부터 문제가 됨.
- 예루살렘 공의회 결정(행15:20): 이방인의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인정함.
- 율법주의는 반율법주의와 더불어 교회사 2000년간 줄곧 도전이 되어 왔다. 자유주의: 반율법주의. 한국교회: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가 섞임. 그 결과 지켜야할 것은 안 지키고 안 지켜도 좋은 것을 지킨다. 이것은 복음이 잘 이해되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다. 율법주의 문제는 항상 교회의 내부의 문제이다.
-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잘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관건이다. 율법을 지켜야하는가, 지키지 않아도 좋은가? 각자 잘 연구해 볼 것.
2. 로마제국인의 세계관 – 외부의 도전

# 기독교가 어떠한 문화권에 전파되었으며, 어떠한 도전을 받았는가?

- 당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 로마 신을 믿는 다신교였다.
- 소수의 엘리트는 그 외에도 철학을 신봉했다. 당시의 철학은 종교와 별다름이 없었다. 그들은 구원의 문제를 다룸(바울의 아레오파고 연설: 에피쿠레오, 스토아). 이것이 교회에도 침투함. 따라서 사도 바울이 철학을 강력하게 비판함 그는 기독교가 혼합종교가 될 우려를 하였다.
- 밀교: 로마의 영토가 동방으로 확장되면서 동방의 밀교가 서서히 침투. 초기에는 비록 소수였지만 영향력이 있어 황실에까지 침투함.

- 당시의 종교: 당시의 종교의 특징은 다신교, 혼합종교였다. 종교끼리 서로 영향을 받아 새로운 종교로 변하기도 하고, 한 사람이 다수의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종교끼리 서로 똘레랑스를 가지고 있었다 (포스트모더니즘, 다원주의). 그러나 기독교는 100% 배타적인 종교이다. 외형적으로나 수적으로 볼 때 매우 약한 기독교가 거대한 로마 제국의 수없이 많은 종교와 철학사상을 무너뜨릴 수 있었던 원인은 어디에 있었을까? 오늘날 우리는 이와 똑같은 도전에 직면해 있다.

a) 그리스 로마 신
사회 전반에 퍼진 종교.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식자층에서는 신들을 의심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남. 그러나 아직도 힘을 잃지 않았고 서민들에게는 이 종교가 하나의 삶이었다. 아직은 그들이 서민들에게는 최고의 현실이었다(행14: 리스드라. 바나바와 바울을 제우스와 헤르메스로 여김. 행17: 아테네에 우상으로 가득 참. 행19:35: 에베소 도시 전체가 아르테미스를 숭배함)

- 큰 도시마다 신전이 있었다. 정기적인 축제와 제식 행사가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가 박해를 받을 조건이 되어 있었음.
- 이들을 믿지 않으면 불신자로 낙인이 찍히고 불이익을 당함. 기독인이 불신자가 됨.
- 그동안 식자들의 비판으로 호머가 노래하던 그러한 신들은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음(부도덕, 간음, 질투, 싸움). 신들의 상이 약간 바뀜.
- 식자층에서 과거의 신을 새로운 신으로 대치함(그리스 신이 로마 신으로 됨). 과거의 신들의 이름이 바뀌거나 새로운 신들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내용과 개념을 부여함. 혼합종교. 고대 바빌론의 신에서 그리스 신으로, 이것이 다시 로마 신으로 바뀜 (길가메쉬 에포스 읽어볼 것)
- 특징: Anthropomorphism(신인동형론). 신이 인간의 형상을 하고 나타남.

- 4세기 기독교가 공인된 후에 줄리안 황제가 재래의 신(태양신 = 아폴로, 미트라스) 복귀 시도를 함. (콘스탄틴 황제도 개종 전에 태양신 숭배자 였음)
- 4세기 말 심마쿠스가 로마 원로원의 집회 실에 빅토리아신 재단 복원 운동을 펼침. 밀라노 비숍 암브로시우스가 이것을 막고자 대단히 고생함. 그리스, 로마 신 숭배가 모양을 변형해 가며 상당히 오랫동안 계속된 것을 알 수 있음.

b) 동방종교(밀의종교)
동방에서 새로 들어온 신. 새로운 믿음 형태.
주전 1세기와 주 후 1세기 사이에서 로마가 제일 많이 팽창함. 이때 점령국인 동방 문화와 종교의 교류가 활발하게 일어남. 주전 2세기에 벌써 밀의 종교가 들어 왔으나 박해를 받음. 차차로 허용됨.

- 아우구스투스(30-14): 동방종교 금지칙령.
- 19: 이시스(Isis) 교인 박해.
- 38: 칼리굴라(37-41) 원정 중에 이시스 신전 설립. 당시에 이미 로마에 퍼져 있었음.
- 클라우디우스(41-54): Attis 숭배 허용.
- 도미시안(86-96): 로마에 있는 이시스 신전을 화려하게 증축함. 또한, 아도니스 신을 경배함.
- 대표적인 밀의종교: Isis, Mithras, Attis, Orpheus, Demeter, Kybele.
- 오늘날의 밀의 종교의 흔적은 어디에서 볼 수 있는가?

- 특징:
·제식 목욕이나 식사를 통한 신과의 교류 반신반인, 신이 된 인간, 인간이 된 신이 등장함. (제식 목욕=세례, 식사=성찬, 반신반인=예수님. 기독교와 닮은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교류를 통해 신적인 생명에 참여함. 신이 그 안에서 인간이 되고, 인간이 신이 됨.
·입교자끼리는 매우 깊은 관계를 갖게 되며, 밖으로는 절대 비밀.
·한 사람이 여러 신에게 가서 제식을 행할 수가 있음. 돈을 지불해야하기 때문에 부자만 여러 번 할 수 있다. 많이 할수록 soteria(구속)에 참여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 종교사학파: 19세기 말 독일의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학파.
바울이 안디옥 교회에서 밀의 종교를 받아들여 기독교 신학을 정립했다9). 따라서 바울은 기독교의 창시자이다. 그는 예수님과 전혀 다른 종교를 만듦. 이들은 바울 서신을 밀의종교의 눈으로 읽는다 (롬6. 신이 된 인간 = 예수님. 신적인 생명에 참여하는 목욕 예식은 세례). 한국에 이러한 종류의 책들이 많이 돌아다님.
현대신학의 컨센스: 기독교는 유대교와 밀의 종교의 합이다(synthesis) 기독교는 혼합종교라고 주장함.


c) 철학
- 당시의 대학에서는 주로 레토릭(변론술)을 배움. 교과과정에서 철학이 기본.
- 철학은 단순한 생각의 유희가 아니라 세계관과 연결이 되고 성경적 세계관과는 반대되는 세계관을 제공한다. 이러한 면에서 철학은 종교와도 같다. 철학은 기독교와 공존하지 않는다.
- 당시의 철학은 밀의종교 영향을 받아서 중심이 인식론에서 종교로 바뀌어감. 구원론을 제시함
- 철학과 밀의종교가 융합이 되어 원래의 철학과는 정반대인 엑스터시가 철학의 왕관이 되기도 함(특히 3세기에 유행될 신플라톤 주의: 어거스틴도 엑스터시 체험)
- 사도 바울이 매우 엄중하게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철학이 속사도 시대 이후부터 기독교에 영향을 미침. 순교자 저스틴은 기독교가 최고의 철학이라고 생각함.
- „사도 바울과 세네카의 편지교환“이라는 가경(假經)에서 세네카를 숨겨진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함. 그만큼 기독교와 철학이 밀접해짐.
- 교부들은 특히 신플라톤주의에 영향을 받았다.
- 고전15: 몸의 부활을 믿지 않는 교인들은 당시의 철학10)(혹은 철학 영향을 받은 초기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요한은 요1에서 로고스(스토아의 세계 이성)가 육신이 되었다고 함으로써 당시의 철학을 전면부정함. 그럼에도 사도들이 죽자마자 철학이 교회에 들어오게 되어 종교개혁 전까지 교회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교회사에 있어서 하나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

사도들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 우리의 영원한 과제.
행20:29-30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건강한 교회가 이단으로 변하고, 건강한 교회에도 이단적인 사람들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각자 근신하여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매일 연구하고 굳건히 붙드는 길밖에 없다. 완전한 기독교, 완전한 교회는 없다11). 교회는 자신과 함께 항상 개혁되어 나가야 한다.

# 초대교회의 도전 4가지: 율법주의, 그리스 로마 신, 밀교, 철학.


제2부: 속사도 이후 300년까지

III. 3세기까지의 선교


내부의 도전: 유대교의 율법적 성향, 혹은 인간 본연의 율법적 경향, 밀교, 철학, 이방 문화들이 교회를 파고들어옴. 신자가 되었다고 해서, 이방 종교에서 배운 신관, 과거의 잘못된 생각들을 쉽게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것들이 철저하게 변화되지 않으면, 오히려 교회를 변질시킨다. 그래서 신자들은 물론, 교회지도자, 심지어는 교부들까지도 잘못된 생각, 이단적인 생각을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볼 때 교회가 이러한 잘못을 이겨내고 복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성경이라는 경전이 있고, 성령께서 말씀과 인간의 양심을 통해서 역사하기 때문이다. .

외부의 도전: 가장 큰 외부의 도전은 황제숭배 거부로 인한 박해이다. 교회는 수많은 순교자를 내었다. 그러나 그 박해로 말미암아 교회는 더욱 정화되었고, 생명력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세상이 기독교에 무릎을 꿇고 기독교를 섬겼을 때, 기독교는 세속화되고 서서히 생명력을 잃어갔다.


* 초기의 복음전파자들

- 12사도와 주의 형제 야고보, 사도 바울 이외에 매우 능력 있는 다수의 복음전파자들이 있었다: 스테판, 빌립, 바나바, 마가, 실라, 디모데, 디도, 아굴라와 브리스카…
- 30-66년(교회 탄생으로부터 유대전쟁 시작)까지 예루살렘이 복음의 중심지였다. 스테판 순교 이후 쫒겨난 헬라 파 유대인들에 의해 복음이 사마리아, 다메섹 등 유대 인근지역으로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무엇보다도 안디옥에 전파. 안디옥을 중심으로 해서 소아시아와 유럽(로마를 기준으로 해서 동방)에 바울과 바나바를 중심으로 복음이 전파됨.
- 유대인: 유대인들이 복음 전파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유대인들의 극렬한 반대로 복음전파가 방해를 받았으나 그 방해를 견디어 내고 전파한 자들도 유대인들이다. 오순절에서 성령강림을 체험한 유대인들이 자국에 돌아가서 자신의 회당에 다니는 유대인들을 전도함12). 매년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는 유대인들이 복음을 접하고 계속 전파를 했을 것. 이렇게 해서 당시 많은 지역에 복음이 전파됨. 이들도 유대인이고 사도들도 유대인들이다. 결국, 초기의 세계 복음화는 유대인의 역할이 결정적이다.
- 경건한 자들이 기독교로 개종함(바울 서신). 이들이 초대 교회에서 큰 역할을 함. 바울이 회당에서 설교하고 쫒겨 나올 때 늘 몇 명의 유대인과 경건한 이방인들이 그를 따라나옴. 이들이 교회를 설립함. 경건한 자들이란 이방인으로서 회당에는 다니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정결 예식등은 지키지 않는 자. 그들은 이등 유대인의 신분이었음. (특히 자매들이 환영함: 성차별이 없다.)


* 신자들의 사회적 지위

- 교인의 구성요소: 대부분이 하층계급, 소수 중산층과 상류층13). 노예들도 많이 있었다
- 사도 시대에는 기독교가 유대교의 분파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유롭게 복음을 전파할 수가 있었다. 2세기에 들어와서는 변증가들이 변증하기에 바빴다.
- 유대교는 공인된 종교. 그들이 공식적인 제식에 참여하지 않고 황제를 숭배하지 않아도 처벌받지 않음. 그 대신에 2등 국민이라는 불명예를 감수해야만 했다. 최고관직에 올라간 유대인들도 있었다. 이들은 유대교를 포기함.
- 약 100년부터 로마 관청이 기독교가 유대교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챔 (안디옥교회: 신자들에게 christianoi라는 이름이 붙여짐.)
- 기독교인이 유대교인과 다름 점: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것은 같은데,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그리스도라는 사람을 경배한다. 신이 죄인을 조건 없이 받아준다. 로마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인들이 흉악한 사람들이다. 그 이후로는 신자는 사형에 처할 수 있게 되었음. 이것은 로마인들에게 당연한 처사였다. 황제숭배 거부만 하더라도 사형받기에 충분했다.
- 이렇게 되어 기독교인들은 2등 국민도 아니고 유대인들보다 못한 3등 국민으로 취급되었다.


* 여성의 지위

- 여성은 하와의 위치를 다시 찾음(창1:27).
- 인류 역사상 최초로 여성이 남성과 인격이 동등함14)이 보장됨.
- 그러나 이것은 당시에 혁명적인 것이었다. 당시 여성은 남편의 소유물로서 공적인 권리가 없었다.
- 여성의 증거는 법적인 가치가 없었다. 그러나 부활의 첫 증인이 여성들이었다. 예수님은 여성을 독립적인 개인으로 대우해 주심.
- 이러한 가르침을 이어받아 사도들도 여성을 우대함.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안부를 전하는 데 그중에서 8명이 여성, 18명이 형제. 편지에서 브리스가를 아굴라보다 앞세움.
- 순교자 수가 여성과 남성이 비등함(여성의 강한 정신력이 입증됨).
- 그러나 3세기부터 여성이 열등하다는 고대의 여성관이 교회에 들어옴. 여기에는 신플라톤주의 영향도 있다(플라톤은 여성을 비하함).
·사제가 성찬식 전에 동침하면 사제의 제식적 능력이 감소된다.
·이것이 독신주의와 수도원제도를 촉진시킴.
·여성의 부정적인 이미지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를 하와의 반대표상으로 간주하여 마리아에게 인간으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지위가 부여됨.
·5세기경 시리아에서 마리아 승천 전설이 시작됨.
- 그러나 기독교 승인 이후 기독교로 말미암아 여권이 사회적으로는 신장됨.


* 로마제국이 선교사가 되다


- 핍박으로 말미암아 교인들이 위축되자 국가가 선교를 도와줌 기독교인들이 제국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게 됨.
- 재판은 공개 재판: 당국에서 기독교인들이 미친 사람들이며 어리석을 사람이라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주고자. 그러나 이것은 정반대 효과를 가져옴:
·그들의 법정에서의 진술은 복음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매우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리스도를 부인하면 석방이 되지만 그들은 죽음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용기 있게 자신의 믿음을 붙들었다.
- 당시의 모든 처형은 모두 공개처형이었다. 이것이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반향을 일으켰다.
·기독인이 죽음을 초연하게 맞아들이는 것.
·참수자를 축복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죽음.
- 터툴리안(200): „우리는 핍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증가한다. 신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 순교자가 가장 훌륭한 선교사가 됨. 심판관과 모든 사람들 앞에서, 곧 죽음 앞에서 선한 증거를 하고 그의 증거를 피로써 도장을 찍음. 그럴수록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예수님을 믿게 됨.
- 요셉의 증거(창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배울 점: 가장 좋은 선교는 우리의 삶(죽음)이다.


* 폴리갑의 죽음

- 소아시아의 서머나 비숍. 155에 사형당함(90세)
- 당시에 신자가 어떻게 순교를 했는지 하나의 예를 들어본다. 총독과 폴리갑의 대화. 많은 관중이 구경하러 왔음. 큰 구경거리.

·총독: 맹세해라. 그러면 살려 주겠다. 너의 그리스도를 비방하라.
·폴리갑: 86년 동안 나는 그를 섬기고 있으며, 그분은 한 번도 나를 해한 적이 없습니다. 나를 구속하신 구세주를 어찌 내가 비방하겠습니까?
·총독: 황제의 행운을 두고 맹세하라.
·폴리갑: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총독: 네가 굴복하지 않으면 맹수에게 던져버리겠다.
·폴리갑: 그들을 오게 하십시오.
·총독: 네가 사나운 맹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너를 불에 태워 죽이겠다.
·폴리갑: 당신은 나를 불로 위협하지만 그 불은 잠시 탈 뿐이고 곧 꺼질 것입니다. 당신은 불신자에게 앞으로 올 심판과 영원한 형벌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가져오시오. 왜 망설입니까?
·모든 관중: (격분하여) 그를 사자에게 던져라! 그를 사자에게!

- 사자 경기는 시간이 늦어 이미 종료가 되었으므로 그를 화형에 처함. 그는 태연하게 죽음. 다니엘과 세 친구처럼 그가 불에 타지 않자 집행자가 죽임(그의 순교 즉시 서머나 교회에서 보고서를 작성하여 여러 교회에 보냄. 이 내용은 후세기에 각색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순교자 숭배사상 등장).
- 그는 서머나에서 12번째 순교자.


* 눈에 띄는 기독교인

기독교인들은 핍박이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숨어 살지 않았고, 변화된 삶으로 인하여 그들의 신자 됨이 분명히 드러나게 되었다. 즉 그들은 신자 됨을 감추지 않고 적극적으로적으로 변화된 삶을 살아감.

- 여자들은 화장을 안 함. 그 이유는 매일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기 때문. 화려한 옷과 장신구를 피함.
- 부자들은 낭비적인 식사를 하지 않음. 식사 시에 연주가를 초청하지 않음.
- 극장방문 삼가(보통 간음이 소재가 됨). 서커스 방문 안 함. 소설을 읽지 않음 오늘날까지 독일의 많은 신자가 실천하는 것. TV 없는 신자가 꽤 된다.
- 황제의 생일에 대문을 장식하지 않음 우상숭배. 즉 황제를 신으로 경배하는 행위로 봄.
- 옥에 갇힌 신자 방문(일벌백계로 잡힌 자).
- 교회가 가난한 자와 과부들(주로 교인)을 도와줌.
- 알렉산드리아(200)에 페스트가 창궐하자 도시에 단지 기독교인들만 남아서 병자들을 치료하고 장례를 치러줌. 그러다가 죽은 사람들도 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
- 낙태를 하지 않고, 속이지 않고, 약속을 지킨다. 당시에 성행하던, 원치 않는 아이를 죽게 내버려 두는 일이 없고, 동성연애를 거부했다.
- 사람들이 궁금해서 스스로 교회를 찾아옴. 그들은 왜 우리와 이렇게 다른가? 악이 왜 그들 앞에서 힘을 잃는가?
- 조직적인 선교15)는 없었지만, 그들은 그들의 삶을 통하여 세상을 가르침.


* 켈수스의 기독교 비방 – 원시적인 종교

180년경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켈수스(Celsus)의 기독교 비방책자 „진리의 책“이 출판됨. 이 책은 남아 있지 않지만 오리겐의 „켈수스에 대항하여“라는 책에서 그의 주장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켈수스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여 반박하고 있다. 내용을 보면 그 당시 기독교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것을 볼 수 있다.

1. 교회는 무식한 자들의 모임.
- „기독교 신앙은 철학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무식한 사람들을 위한 종교이다. 이성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과 어울릴 수가 없다. 그들은 지성적인 요소를 악으로 간주한다“ (당시까지만 해도 신자들은 대부분이 단순한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교회의 대응:
- 초대 교인은 철학을 통해 복음을 왜곡하는 것을 엄금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따름 복음은 원래 단순한 것이다. 신학화 되면서 성경이 복잡한 책으로 변함.
- 2세기까지는 일반적으로 단순한 복음의 내용이 입에서 입으로 전파됨. 직업 선교사나 큰 전도 집회, 전도를 위한 책자들은 없었다. 그 대신 핍박받는 자들에 대한 오해를 풀고자 기독교를 변증하기 위한 변증가들이 나타남. 순수한 변증, 즉 신자들이 범법자가 아니라는 것을 변증한다면 변증은 환영할 만한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지나치게 되어 단지 변호에 그치지 않았다.
- 당시에 대학에서는 레토릭(변증학, 철학)을 배우는데, 신자가 된 지성인들이 그들의 학문을 기독교의 가르침과 비교하였다. 한 걸음을 더 나가서 기독교를 변증하고 지성인들을 설득하기 위해 기독교의 진리를 철학의 힘을 빌려서 설명을 하려고 노력했다. 성경의 우월성을 주장하기 위해 성경을 철학과 비교하는 과정에서 성경내용을 철학화시켜서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일들이 일어났다. 그러나 성경은 철학과 비교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혀 다른 것이다. 성경은 계시이며, 철학은 인간의 사변적 체계이다.
- 불행히도 변증가들이 성경에 철학의 옷을 입힘으로 성경이 철학화되고 신학화 됨. 그들이 개종 전에 철학자들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자연적으로 발생함.

2. 교회는 범법자들의 모임.
- 켈수스가 비방하는 초점은, 다른 종교에서는 죄가 없는 자들을 제단으로 초대하지만, 교회는 모든 사람들을 초대한다. 그들은 죄인과 무지한 자들을 초대한다. 그래서 그는 교회를 강도, 절도, 살인자들의 모임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 예수님도 또한 강도들의 두목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동정녀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속였다. 실상은 로마 군인 판테라와 간음녀의 아들이다16).

* 대부분의 신자는 단순히 그들이 죽음에 던져진 죄인이므로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붙잡음. 바울의 권고대로 철학을 거부함. 당시의 기독교는 말씀에 대한 개인적 결단에 근거함. 죄 사함을 받고 부활을 기다림. 핍박이 믿음을 더 순수하고 강하게 만들어 줌.
총독 플리니우스(111)가 트라얀 황제에게 쓴 편지: „도시와 농촌의 많은 사람이 기독인이 될 위험에 처해있다“


* 기독교가 쉽게 전파될 수 있었던 외적 이유

- 로마제국: 로마가 당시의 세계를 통일함. 언어통일. 통행의 자유. 안전한 교통수단을 최대한 활용.
- 기독교를 밀교와 유대교로 착각함: 도처에 밀교 단체들이 있었다. 당국은 그들이 정치적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한 허용함. 로마 황실까지 밀교가 들어옴. 밀교는 입교자만 단체에 들어올 수 있음. 기독교도 세례교인들만 들어올 수 있으므로 밀교와 비슷하다. 처음에는 유대교, 밀교로 착각해서 눈을 감아줌.
- 사회의 평준화: 사회가 귀족과 평민의 구분이 서서히 약해짐. 로마 시민권 얻기가 날로 수월해짐. 신분이 다른 사람들이 한곳에 모일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됨. 물론 실천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 3세기까지의 기독교 전파.

50년에 기독교의 중심은 예루살렘이고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하면서 중심이 로마, 안디옥, 에베소가 되었다.

1세기

# 로마를 제외하고는 주로 동방에서 전파.

1. 로마
- 100년경에는 이미 로마 교회가 가장 큰 교회로 부상함. 수도교회가 가장 크게 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베드로와 사도 바울이 순교한 곳.
- 빌립보서에서 보면 지위가 있는 로마인들도 신자가 됨. 95년에 도미시안 황제가 사촌인 집정관을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죽이고, 그 아내를 귀양보냄. 황제의 측근에까지 복음이 들어갔다는 것은 선교의 큰 진척을 나타냄.
- 추측된 신도 수는 1000-5000명.
- 로마 교인들은 타도시의 가난한 성도들을 잘 도와주는 것으로 유명함.
- 제국의 각 도시의 성도들끼리 교제가 있었다.
- 로마인들은 성격이 냉철하기 때문에 신비주의나 열광주의에 잘 빠지지 않음.

2. 안디옥
- 동방에서 제일 큰 도시. 예루살렘 멸망 후에 지도적인 교회가 됨.
- 110년경에 이그나티우스가 활약함. 그가 순교차 로마에 가면서 각 도시에 서신을 보냄.
- 이그나티우스는 동방교회에 영향을 미침.
- 3세기에 유명한 신학 학파가 형성됨 안디옥 학파.

3. 에베소
- 사도 바울이 2년 이상 활동한 곳.
- 그 후에 요한이 트라얀 황제에 의해 귀양을 갈 때까지 활동한 곳.

그 외 지역
- 이렇게 3개의 중심지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인근 지역까지 영향을 미침.
- 100년경에는 소아시아를 비롯한 지중해의 거의 모든 동쪽 해안 도시에는 교회가 있었다. 그곳은 사도 바울이 집중적으로 선교한 곳. 그가 교회를 세우지 않은 인근 도시들에도 교회가 세워지게 됨.
- 플리니우스의 보고에 따르면 111년에 벌써 흑해 남쪽 해안(터키의 위쪽)에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 이집트에서 파피루스 52(P52) 발견됨. 125년 이전에 쓰인 것으로서 이것은 1세기에 아프리카에 교회가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줌.

* 사도 바울(혹은 바나바)이 전도한 곳을 중심으로 복음이 활발하게 전파됨. 아프리카와 서방에는 비록 미약하지만 교회가 있었음을 나타내는 증거들이 많다. 단지 뚜렷한 기록은 없다.


2세기

- 먼저 강을 따라서 유럽 대륙 안으로 전파됨.
- 지중해 도시 마르세이유를 기점으로 해서 론 강을 따라 감. 비엔과 리용에 큰 교회. 190년 이레네우스가 공의회를 개최했을 때 갈리아(프랑스) 지방에서 몇 명의 비숍들이 참가함.
- 라인강을 따라서 감. 마인츠, 쾰른에 교회가 있었음.
- 180/200 북아프리카(수도 카르타고)에 여러 교회들이 있었음.
-197 터툴리안: „사람들이 외치기를, 도시의 도처에 많은 기독인이 있다. 작은 도시에도, 섬에도. 남녀노소 신분도 구분없이 심지어 저명한 사람들까지도 기독교로 넘어간다“ (그만큼 기독교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카르타고 뿐만 아니라 그 외 몇 개의 도시를 언급한다.
-180년 작은 도시 스킬리에서 6명의 신자들이 총독들에 의해 사형당한 기록이 있었다.
- 190 이전에 시리아의 에데사(Edessa)에 전파됨. 시리아 선교사 타티안이 시리아어로 번역된 복음서 선사함(Diatessaron). 3세기 초에 왕가가 기독교로 개종. 메소포타미아까지 교회가 세워짐.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교회는 약간 영지주의 색채를 띠고 있었다.
- 특징: 이미 로마제국 이외에도 복음이 전파됨.


3세기

- 제3단계에 접어들어 작은 마을까지도 복음이 전파됨 (소아시아와 카르타고 이 두 곳에서 교회가 가장 활발함)
- 게르만족 선교는 민족이동 이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그 이전에 이루어짐.
- 로마에는 파비안 비숍이 250년경 7개 교구로 나눔. 40개 교회, 46사제와 7집사(고성직자). 1500명의 과부와 빈자를 먹여 살림.
- 갈리아: 리용과 비엔(Vienne)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전파됨. 200년경에는 몇 개의 주교 교구가 세워짐. 250년 이후에 트리어에 비숍 교구가 세워짐. 아를(Arles) 공의회에 여러 명의 대표들이 참석. 본격적인 선교는 4세기 마틴(성 Martin de Tours)에 의해 이루어짐.
- 게르만: 180년경 퀠른, 마인츠를 중심으로 해서 남쪽의 아욱스브르크, 레겐스부르크와 오늘의 스위스의 여러 도시에 복음이 전파됨. 300년경에는 Wallis, Solothurn, Zuerich, Zurzach에서 순교자가 나왔다. 4세기에는 스위스 중부가 모두 기독교화됨.
- 브리타니엔: 314 아를(Arles) 공의회에 런던과 요크(York), 링컨의 주교들이 참석함.
- 스페인: 60년대에 사도 바울에 의해 복음 전파 (롬15:34, : 95년경에 쓰인 클레멘스 전서17)에 기록됨). 200년경에 스페인의 교회가 언급되고 250년경에 여러 주교들이 언급됨. 300년경에 Elvira공의회에 19주교, 24장로 참가함. 이미 세속화되어 신자 중에 살인자들, 여종들을 구타해서 죽인 여 주인들, 잦은 음란죄, 장사하는 성직자 등등. 콘스탄틴 전까지는 이름있는 신자(작가)는 없었음.

# 3세기에 큰 구실을 한 북아프리카, 이집트, 소아시아 교회를 좀 더 자세히 다룬다.
- 북아프리카: 수도 카르타고를 중심으로한 변두리 누미드에 많은 교구들이 있었음. 윤리적으로 엄격함. 북아프리카 교회는 빨리 성장함. 220년에 70-90개의 주교구. 250년에 200, 어거스틴 시대에는 500-700개.
(카르타고: 한니발. 튀니지엔-튀니스. 주위의 누미드인)
- 이집트: 교회가 200년경부터 문서에 등장. 수도 알렉산드리아는 로마제국의 교육도시.
·1세기 (사도 바울과 비슷한 시기)에 유대 철학자 필로가 활동한 곳(그는 구약의 알레고리적 해석으로 유대교와 헬레니즘의 조화를 시도함). 125년 이전에 쓰인 P52(요한복음 조각)가 이집트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일찍이 교회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2세기경 기독교적 영지주의가 활발함(Valentinian).
·클레멘스, 오리겐의 교리문답학교에 의해 성서학(정확한 주석) 발달할 뿐만 아니라 그들은 당시의 철학인 신플라톤주의 사상을 기독교 신학에 도입함.
·이집트는 285년부터 은둔자와 수도승의 본거지가 된다.

* 소아시아
- 아직은 소아시아가 기독교의 중심지였다. 이미 교회가 번창함. 안디옥과 에베소가 두 개의 큰 중심지. 도시마다 교회가 있고 작은 도시에까지 교회가 있었음. 이곳으로부터 선교사들이 파송됨.
- 이단 몬타누스, 마르키온들도 소아시아 출신.
- 300년에는 이미 기독교가 이방 종교를 능가함. 300년경의 박해에는 전 도시 주민이 위해 죽을 각오하는 도시들도 있었다.
- 200년 이후 갑바도기아의 수도 가이사랴에 신학교가 설립되고 여기에서 4세기에 3명의 갑바도기아 교부들이 활약함.

*그 외 지역
- 아르메니아: 3세기 말에 벌써 기독교 국가가 됨. 왕과 귀족들의 합의 아래 12 주교구가 세워짐.
- 동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타티안(175)과 바 다이산(154-222)이 선교함. 두 사람 모두 약간 영지주의적 요소가 있었음. 바 다이산의 영향으로 에데사의 왕가가 회심함. 아그발9세(Agbal)때 국교가 됨. 부정확한 역사서에 의하면 22년경 메소포타미아/ 아시리아 지역에 20개 이상의 주교구가 있었다고 함. 페르시아왕 사포르1세(Schapor I)의 호의로 페르시아에 교회가 설립됨(콘스탄틴황제가 편지로 그를 칭찬함).


313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교회가 공인될 즈음에는 이미 제국 전역에 교회가 퍼져 있었다. 그뿐 아니라 페르시아, 메소포타미아 까지도 교회가 세워짐.
기독교는 황제의 공인이 없이도 전파될 수가 있었다. 황제 공인의 의의는 기독교가 학자들뿐만이 아니라 최고의 권력가인 황제까지도 변화를 시켰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박해를 통해서는 박멸을 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기독교가 공인된 까닭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신자의 수가 얼마나 늘어났는지, 아니면 줄었는지 우리는 모른다. 단지 세속적인 사람들을 위해 교회 문이 넓어진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공인 이후에 기관으로서의 교회가 타락했을 뿐이지 예수님의 지체인 교회가 타락한 것은 아니다.
선교는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IV. 국가와 교회 (260년까지)
- 기독교 박해 -

주요사건 연대:
네로 박해: 64
도미시안 박해: 81-96
플리니우스 보고: 111
세베루스 박해: 202
데키우스 박해: 250

제국 전체적으로의 박해는 3세기에 들어서 시작된다. 2세기 전(202년)까지는 국지적이다. 베드로 전서에서 소아시아에 흩어진 신자들이 박해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110년경 안디옥의 비숍 이그나티우스가 로마로 불려와서 순교 당함. 이곳에서는 중요한 박해 사건만 다룬다. 그 외 많은 박해, 순교 기사가 있다.

제국은 왜 기독교를 박해했을까? 먼저, 신자는 이교국가에 살면서도 황제와 국가에 충성을 다했다18). 그들은 늘 황제를 위해 기도했고, 황제에 의해 잔인한 핍박이 있을 때에도 그를 위해 기도했다. 순교자 저스틴은 기독교인들이 세금을 국가에서 요구하는 것보다도 더 많이 내는 애국자임을 정부에 자신 있게 밝혔다. 또한 로마의 종교는 다신교, 혼합종교이기 때문에 유독 기독교를 탄압 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다.

기독교 박해의 주요한 이유를 정리를 먼저 하면:
1. 황제숭배 거부이다. 즉 로마를 지켜주는 수호신에게 마땅히 드려야 할 예우를 하지 않는 것이다.
2. 혐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로 혐오스러운 종교적 관습“을 가지고 있다고 오해를 받았다. 어린애를 잡아먹고 근친상간을 한다(모두에게 형제, 자매라고 부름). 이러한 것을 듣는 사람은 신자들에게 격분하게 되어 있다.
3. 식자들이 격분함: 무식한 사람들이 구원에 대해 이야기 함.
4. 신자들이 신들의 분노를 일으켜서 자연재해가 왔다(터툴리안 참조)
5. 로마가 십자가에 처형한 범죄자를 경배한다.
6.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기 때문에 무신론자로 오해받음(범죄자 취급을 받는다).


* 네로의 박해


당시의 로마 상황 (1세기)
- 백만 인구, 집들이 밀집해서 길이 좁다 (큰 화재의 위험성)
- 극심한 빈부의 차이: 각국으로부터 세금을 많이 받아 엄청난 부자 도시가 됨. 거대한 건물, 사원, 고급 돌로 지어진 건물, 화려한 개인 주택, 목욕탕. 반대로 빈자와 노예들의 오두막 집.
- 가정의 수호신들에게 매일 제사를 드림: 간단하게 제물을 드리는 형식.
- 국가 수호신들에게 매일 제사를 드림. Jupiter, Juno, Mars, Apollo 신전들.
- 사제들은 짐승들의 내장을 통해서 미래를 점친다.
- 신으로 추대된 황제 초상(아우구스투스 이후로)이 공공장소에 세워져 있음 – 이것이 나중 기독교인들에게 화근이 됨.
- 원형극장:
1.강한 짐승들끼리 싸움: 사자, 곰, 호랑이, 코끼리, 코뿔소, 하마.
2.검투사: 보통 상대방이 죽을 때까지 싸움.

- 문제: 식민지 수탈을 통해 부를 축적하여 낭비가 심하고 시민들의 성격이 잔인함 데카당스(롬1장의 고발: 당시의 로마 상황을 알 수 있다). 네로 황제가 낭비와 잔인함의 대표자.

박해
- 네로가 64년에 대도시(Neropolis/ Neronia)를 건설하고자 로마를 불태우고자 몰래 방화함. 도시의 2/3 가 불에 탐.
- 네로가 방화자로 지목되어 곤경에 처하게 되자 기독교도를 방화자로 몰아서 위기를 모면함.
- Tacitus의 기록: „네로가 방화를 한 뒤에 죄를 부끄러운 행위로 말미암아 증오의 대상이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렸다„. „그 그리스도라고 하는 자는 티베리우스 황제 때 폰티우스 필라투스에 의해 처형을 당했다…“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로 혐오스러운 종교적 관습들이 들어와서 행하여지고 있는(밀교) 로마에“ 그 종교가 „들어와서 추종자들을 얻었다“(기독교가 밀교로 오인됨) … „그러므로 먼저 공개적으로 기독교도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잡고“ (빌립보서 1장에 나오는 사람들). „그 후에는 신고를 받고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잡아들였다. 사람들은 그들이 방화범이라는 확신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인간을 증오하는 자들이라는 확신 때문인 것이다“… „그들에게 짐승의 가죽을 씌워서 개들에 의해 찟어 죽이게 하거나 십자가에 매달리어 어두워질 때 횃불로 사용되었다“

- 이 사건을 통해 기독교가 전 제국에 악성 종교로 알려짐.
- 기독교인이 오해로 말미암아 핍박받고, 로마시민의 증오의 분출구로 사용됨.
- 로마 신자들이 왜 거의 다 비참하고 고통스럽게 죽었어야 하는가? 박해의 의의는 무엇인가? 당시에 로마인으로서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 자체만 해도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믿음의 큰 결단을 하여 믿고 또한 믿음으로 살고 있는데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 도미시안의 박해 (81-96)

- 도미시안이 다수의 기독교인들을 무신론자라는 죄목으로 처형함.
- 그 차에 그의 사촌 Flavius Clemens(집정관)도 처형함. 그의 아내는 귀양보냄.


* 플리니우스의 보고 (111년 제국의 결정)

- 111년 앞으로 200년간 신자의 운명을 결정할 이정표가 세워짐.
- 플리니우스는 흑해 남부 연안의 비두니아(Bithynien), 본도(Pontus)의 총독으로 임명됨.
- 그는 기독교를 고발하는 무기명 고발장을 받음. 기독교 세력이 커지자 주민들이 불안을 느낌.
- 그는 기독교를 악성 종교(범죄단체)라고 판단하고 엄중히 처단하려고 함. 심문과 체벌을 가해서 자백을 받아냄.
- 그 결과 기독교가 범죄 단체가 아니라 미신 단체라는 확신을 함 중요한 인식의 발전.
- 단순한 미신 단체이므로 중벌을 가할 수는 없고(당시 밀교를 음성적으로 허용하는 상황), 그러나 유행병처럼 번져나가기 때문에 허용할 수도 없어서 마땅한 형벌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아 황제에게 문의를 함. 그는 황제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징벌의 합당한 이유로서 4가지 이유를 들었다:

1.그들은 황제숭배를 거부한다.
2.그들이 저질렀다고 고소된 범죄내용(그는 기독인의 범죄 사실에는 확신이 없었음). 증거 불충분.
3.비밀 결사 금지법을 저촉함(밀교)
4.국가 권력에 끝까지 불순종.

트라얀 황제(오현재)의 대답은:

1.기독교인들을 색출하지는 말 것.
2.익명의 투고는 무시할 것(악용우려).
3.회유를 시도하고 끝끝내 돌이키지 않는 자는 사형시킬 것.
4.돌이키는 자는 황제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고 바로 석방할 것(과거를 묻지 말 것).

전체적으로 볼 때 현명한 처사라고 볼 수 있다.

- 이 교환된 서신들이 곧 전국에 공표되어 법령이 됨.
- 결과: 기독교인을 법적으로 고발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됨으로써 고발이 증가함. 총독에게는 고발접수시에는 재판의 의무가 부과됨(전에는 재량으로 묵인할 수가 있었음)


* 박해받는 기독교인 (하나님과 다원주의)

- 의의: 기독교 신자에 대한 증오만으로는 박해로 이어지기 어렵다.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야 한다. 트라얀 황제가 박해를 위한 법적 근거를 마련해 줌 신자는 무조건 죄인이다는 인식이 심겨짐.

- 트라얀의 정책으로 말미암아 그 이후로 박해가 증가함.
- 배교가 매우 쉽게 가능해짐: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매우 간단한 제사를 드리면 끝난다.
- 아버지가 가족 대표로 하면 전 가족이 사함을 받는다.
- 배교자와 순교자가 급증함. 그러나 믿음을 지키는 사람이 더 많았다.
- 당시에 자주 인용되던 성구: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마10:32-33
- 처형방법:
·시민권자만 참수형. 대부분은 화형(기둥에 세워서 손을 뒤로 한 다음 손에 못을 박거나, 무릎까지 땅에 묻은 다음에 주위에 장작을 쌓고 불을 지름.)
·아레나에서 맨손으로 맹수와 싸우게 하여 죽이는 방법.
·필요에 따라 남자들은 납 광산에서 중노동을 시켜 납 중독에 걸려서 죽음. 경우에 따라 여자들은 술집에 팔림.

- 처형방법이 가혹하고 잔인했던 이유: 그들은 사형을 시키기 전에 살점이 떨어질 정도로 채찍으로 치고, 짐승의 발톱으로 상처를 냄. 그렇게 잔인하게 처형했던 이유는 그들은 신자가 국가 권력에 끝끝내 반항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자들이 그들의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으로 말미암아 고통과 죽음을 감수한다는 데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였다. 이들은 신자들이 그리스도 외에 다른 신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 이러한 박해는 제국 전역에 늘 있었던 것이 아니고, 간헐적으로 있었다. 지방에 따라, 총독에 따라, 신자들의 활동 상황에 따라서 다르다.


* 177년 리용에서의 박해

유세비우스(Eusebius)의 교회사(324)에서 발췌함. 이 책에서 박해한 내용이 많이 나온다. 그중에서 리용에서의 박해를 예로 당시의 박해가 어떠했는지 살펴본다.

- 교회 인원은 약 50십 명19).
- 못된 사람들이 신자를 괴롭힘: 목욕탕, 시장, 집에 들어가는 길을 막음. 길거리에서 욕을 하고 물건을 뺏고, 돌을 던지고 감금함.
- 사람들이 신자들을 모두 잡아다가 연대장 앞에서 심문을 받게 함.
- 10명 정도가 배교함. 그리스도를 끝까지 부인하지 않은 사람은 총독이 올 때까지 옥에 가두어 놓음.
- 신자들의 집에서 고용되어 일하는 사람들이 교회에서는 사람을 먹고(성찬식), 근친상간(서로 형제, 자매라고 부름)을 한다는 소문을 퍼트림. 이러한 것들이 사람들의 증오를 사게 함.
- 비숍을 비롯한 모든 신자들이 순교를 당함. 고문을 당하기도 하고 대부분은 경기장의 짐승들에게 죽음. - 그리스도를 부인한 사람들 10명도 나중에 다시 시인하고 순교자의 대열에 들어감 (다른 도시에서 신도들이 와서 그들을 그리스도를 시인하도록 도와줌).
- 고문은 신자들에 대한 증오가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그들을 살리고자 인도적인 차원에서(가증스러운 종교를 벗어나서 올바른 삶을 살도록) 한 경우도 많았다.
- 모두 48명 순교.

질문: 붙잡힌 신도를 찾아가서 „그리스도를 사람들 앞에서 말로만 부인하고(마음으로 부인하지 않고), 황제에게 분향을 하여 일단 위기를 넘기라“고 권고하면 되지 않겠는가? 나중에 회개를 하면 되지 않겠는가?

문제점: 순교자, 고백자들이 서서히 특별대우를 받게 됨으로써 교회 타락의 원인이 되었다. 순교자 숭배사상이 싹틈. 3세기 이후에는 그들의 매장지에서 기념예배를 드림. 그들의 무덤 위에 순교자 예배당이 세워짐. 차차로 그들이 기도할 때에 중보자로 추대됨.

질문: 우리가 여기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교회의 타락은 하나님도 어쩔 수가 없는가?


* 세베루스 황제 박해(202)
- 정치적 의도로 한 박해 -
오현재 시대(네르바 96-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180)

- 세베루스 황제가 정치가로서 기독교의 위협을 알아냄: 제국에서 기독교 정신의 승리를 두려워함. 지금까지 기독교에 무관심한 황제들은 기독교를 적극적으로적으로 박해하지 않았음.
- 그는 사람들이 유대교와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을 금지함.
- 황제의 칙령은 기독교인 전면박해가 아니라 단지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을 금지한 것이다.
- 이것이 비신자들이 트라얀의 편지를 근거로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도록 고무시킨 결과가 되었다.
- 특히 이집트와 북아프리카에서 박해가 심했음.
- 핍박의 주된 대상은 교리문답학교(세례 예비학교) 학생, 교사, 그리고 새 신자들.
-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의 보고: „우리는 매일 많은 순교자가 우리 눈앞에서 화형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참수형에 처하는 것을 본다“ 이때 오리겐의 아버지도 순교함.

- 질문: 위정자는 왜 기독교가 국가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로마와 오늘날의 중국의 경우를 들어서 생각해 볼 것.

- 카르타고의 유명한 순교 보고 – 귀족 페르페투아
터툴리안이 이 보고서를 쓴 것으로 알려짐. 이것은 오랫동안 교회에서 읽힘.
·그의 여종과 묶여서 감옥에 감금됨. 아버지가 방문하여 그녀에게 가족을 위해 그리스도를 부인하라고 애원함.
·좁고 숨 막히는 지하 감방에서 여러 번 입신함: „한번은 하늘에까지 이르는 사다리를 봄. 너무 좁아서 한 명 씩만 올라갈 수가 있다. 각 디딤판 마디에는 칼, 창, 날카로운 고리들이 밀집되어 붙어 있었다. 사티루스(먼저 순교한 교리문답학교의 교사)가 먼저 올라가서 그녀에게 소리쳤다: 페르페투아! 올라 오너라. 사닥다리 밑에 있는 용이 너를 물지 않도록 조심하고“. 그녀는 그 부정한 짐승의 머리를 밟고 끝까지 올라왔다. 빛이 가득한 정원에서 목자가 그녀를 맞아주었다. 수많은 양들이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에 한 조각의 신선한 치즈가 물렸다.
·그녀의 여종이 아이를 분만하자 그들은 곧 아레나로 끌려감. 남자들은 짐승과 싸우다 죽고 그들 자매는 옷을 벗긴 후에 몸에 망사를 씌우고 사나운 소에게 내어 줌. 가슴에서는 젖이 흐르고 있었다. 관중이 그 광경이 너무 비참하다고 소리쳐서(양심을 찌름) 그들은 칼로 죽임을 당함.

 

* 데키우스와 발레리안의 박해 (250-258) – 일반 박해(전면 박해)

- 당시까지는 기독교를 전면 금지시키는 법은 없었다. 주로 기독교인들은 개별적으로 황제숭배의 거부로 인한 국가 반역죄로 고발되었다. 그리고 핍박도 국지적이고 간헐적이었다. 따라서 순교란 보편적인 경우는 아니고 특별한 것이었다. 단지 신자란 장래의 불확실성(핍박)과 제국민의 멸시로 말미암아 편치않은 삶을 살아야만 했다.
데키우스 황제에 이르러서 기독교 전면 박해가 시작됨.

1. 데키우스 박해(249-251)
- 220-250년의 30년간은 어느 정도 평온한 기간이었다. 황제의 어머니가 안티옥에서 오리겐의 가르침을 들었다. 이 기간에 처음으로 작은 교회 건물들이 지어짐.
- 이 기간에 국소적이기는 하지만 대중이 교회로 들어옴. 기독교의 위치가 사회적으로 약간씩 강화되면서 윤리적으로 해의하게 됨(지도자들까지도)
- 248은 로마의 건국 1000년 기념의 해. 사람들의 의식 속에 다시 전통을 따르고자 하는 생각이 싹트기 시작함.

- 250 데키우스 황제: 다뉴브강 군단장으로 249에 황제가 되어 로마에 돌아옴. 그는 몰락해가는 로마를 보고 몰락의 이유를 로마인이 신들을 제대로 경배하지 않은 것이라고 봄. 당시 왕권의 다툼, 종교 간의 경합이 문제가 됨. 따라서 모든 사람이 국가신(황제 포함)에게 나와서 경배를 하도록 함. 기독교가 유별나게 미워서 박해한 것이 아니다. 모든 제국민이 경배를 하도록 함. 그는 기독교 신자만 문제가 될 것을 알았다. 그러나 교회를 국가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국가로 간주함으로 기독교를 예외로 하지 않았다.

- 실제로 교인들의 수가 많이 불어났고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 어린애부터 노인까지 모두 황제 숭배를 지시함. 여러 대도시의 주교들이 순교함.
- 카르타고의 키프리안(아프리카의 교회 비숍)를 비롯하여 여러 주교들이 피신함. 주교들이 피신하자 남은 자들 중에서 배교하는 사람들이 늘어남.
- 황제는 제사 위원회를 구성하게 하여 모든 사람들이 그들 앞에서 국가 신들에게 경배를 하게 시킴. 불순종 시 재산을 몰수하고 사형. 자매와 아이들까지도 시킴. 이것을 수행한 사람은 증서(Libellus)를 받음.
- 그러나 1년 후인 251에 그는 게르만과의 전투에서 사망하여 박해가 중단됨.

# 제사:
1.향(작은 덩어리)을 불 속에 던진다.
2.잔에 든 포도주를 쏟아 붇는다(신에게 바치는 행위).
3.제사를 드린 고기를 먹는다(신과 하나가 되는 것).
4.국가와 황제를 위한 기도.

 

2. 발레리안 박해(253-260)
- 257에 발레리안은 모든 기독교의 집회를 금지함. 사제들에게는 국가의 제사에 참가할 것을 요구함.
- 지금까지의 박해 중에 가장 심한 박해. 카타콤의 시대가 도래함.
- 키프리안을 비롯해 많은 사제들이 순교함.
- 다른 사제들은 관리를 매수해서 증서를 구매함.
- 260년 발레리안의 사망으로 박해가 그치고 교회는 42년간 평화를 누림. 이 시기에 기독교인의 숫자가 대폭 증가함. 새로운 교회 건물이 건축이 됨. 주교들의 사회적 지위가 격상함. 이미 동방에서는 기독교도가 이교도의 숫자를 능가함.

# 전면박해의 실패 원인
기독교인 숫자가 상대적으로 매우 적었기 때문에 데키우스 황제는 성공을 확신하였다. 그러나 250년경에는 사람들의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많은 사람이 신자를 고발하지 않았기 때문에 핍박은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물론 많은 사람이 순교도 하고 변절을 하였지만 이것이 교회의 생존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다.


* 기독교 박해를 하나님편에서 어떻게 봐야만 할까?
1. 교회가 항상 겪었던 문제는 세상(죄)이 교회로 들어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예수님 제자 가운데에도 있었고, 사도 바울의 교회에도 있었다. 작은 누룩이라고 할지라도 전체를 망하게 한다. 교회는 박해를 통해 항상 정화가 되어 왔다. 박해시에 예수 그리스도에게 생명을 바치지 않는 사람은 대부분 교회를 떠났다. 남은 사람들은 그들의 믿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확고히 했다.
2. 구약의 메시아 왕국 실현 예언과 핍박은 어떻게 조화가 되는가?
특히 이사야서에 메시아가 이루실 아름다운 메시아 왕국이 예언되어 있다. 예수님에 의해 메시아 왕국이 실현되었다. 그런데 신자들은 왜 그렇게 혹독한 핍박을 당했을까? 이사야 11장의 예언은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1-2: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4.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6 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9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V. 속사도 교부

구분: 속사도 교부 – 변증가 – 구 가톨릭 교부 – 가톨릭 교부.

- 속(續)사도란 사도들과 직, 간접적으로 관계가 있었던 학자를 말한다. 이들은 교회의 지도자들 이었지만 신학자들은 아니었다.
- 11개 중에서 중요한 것 7개만 다룬다.

1.클레멘스 1서
2.이그나티우스 서신
3.폴리캅의 편지
4.바나바 서신
5.헤르메스 목자
6.파피아스 단편
7.디다케: 12사도 교훈

과제: 이들의 글과 성경과의 차이점을 발견할 것.


1. 클레멘스 1서

- 클레멘스 1서는 95년경 로마 비숍 클레멘스가 저술한 것이다20).
- 도미시안(81-96)의 박해가 끝난 직후에 쓰임.
-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난 젊은 세대와 늙은 세대의 싸움을 중재하고자 로마 비숍이 편지를 보낸 것. 장로들의 임기가 문제가 됨.
- 젊은 세대는 자신들의 높은 영적 자질을 들어 장로들의 그룹(늙은 세대)에 대항하여 몇 명의 장로들을 퇴임시킴.
- 편지의 서두: „로마로 순례하는 하나님의 교회가 고린도에서, 이방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게“ 표현을 애매모호하게 하면서 로마교회의 우월성을 나타냄.
- 로마 교회는 스스로 자신에게 권위를 부여하여, 자신이 감독을 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고(무슨 근거로?), 젊은이들에게 순종을 요구함. 장로들이 잘못이 없을뿐더러 훌륭하게 일을 했음에도 퇴임시킨 것을 책망함 처음으로 로마의 권위를 실은 목소리. 박해 이후에 목소리가 더 커짐.
„이 편지는 성령에 의해 쓰였으므로 고린도 교인들이 순종한다면 로마에서는 큰 기쁨이 있을 것이다“ 사도들의 권위를 모방하여 자신의 의견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타냄.
- 클레멘스는 늙은 세대의 편을 들어 젊은이들에게 장로들을 다시 세울 것을 촉구함: 장로는 종신적이다.
- 고린도의 비숍들과 집사들은 사도들에게 임명되었으며, 사도들은 그 권한을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았다 직분에 대한 가톨릭 적 이해가 들어감 (승계)

문제시되는 구절:
[40.5] „대제사장에게는 제사 시에 그의 고유한 의무가 있고, 제사장에게는 각자 특별한 직분이 있으며, 레위인에게도 그들의 직분이 있다. 평신도는 그들의 제 규정을 지켜야 한다21)“
[41.1] „그러므로 우리 각자가,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자리에 정해진 규칙을 벗어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께 기뻐함이 되기를 원하며“
[41.3]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반대하여 행하는 자는 징벌로서 죽음을 당할 것이다“

평가: 이 서신은 대부분의 사도들이 순교한 지 약 30년 후에 쓰인 것이다. 이 서신을 단지 훈계를 위한 사신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지? 여기에서 이미 교회 타락의 씨를 볼 수 있는지?


2. 이그나티우스 서신

- 안디옥의 비숍으로서 110년경에 트라얀 황제 치하에서 로마에서 순교22).
- 소아시아를 거쳐서 가는 동안에 10명의 로마 군인들에 의해 호송됨. 그는 이미 사형 언도를 받고, 로마 원형 경기장에서 짐승들과 싸우다 죽어야 한다.
- 그는 도중에 여러 교회에 7개의 서신을 씀23).
- 그의 서신에서 이단적 교리에 의해 위협을 당하고 있는 교회를 걱정함24).
- 그는 신자들에게 순교를 당할 것을 격려함.
- 그는 교회가 비숍과 결속할 것을 당부함.


3. 폴리캅의 편지

- 폴리갑은 서머나(Izmir)의 비숍이다.
- 155년에 순교(). 60년 정도에 출생함. 젊어서 사도 요한의 가르침을 들음.
- 그는 이그나티우스의 서신들을 빌립보에 보내면서 자신이 쓴 편지를 동봉함.
- 올바른 믿음을 갖고 올바른 믿음생활을 할 것을 권고함.
- 그는 클레멘스 1서를 인용함.
- 바울 서신의 많은 부분을 인용하며 바울 서신을 권위가 있는 글로 인정함. 바울 서신이 교회에서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음.

* 교회에서는 당시 사도들의 글을 권위가 있는 글로 인정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속사도 교부들의 글도 상당히 권위를 가지고 있었음.


4. 바나바 서신

- 서신이라기보다 가르침이다.
- 130년경 이집트에서. 반 유대적.
- 구약은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안 되며 알레고리 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 유대인은 옛 언약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었으며, 악한 천사의 유혹에 넘어갔다.
- 그들은 율법을 문자적으로 이해했다. 희생, 할례, 음식 등에 대한 계명은 더 높은, 영적인 의미로 해석을 해야 한다. 따라서 기독교는 유대교와 단절해야 한다.
- 사도 바울 시대에 유대학자 필로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율법을 풍유적으로 해석함. 이러한 전통에 서 있는 것 같다.

- 저자는 구약의 여러 가지 율법(제식, 정결 의식 등)이 효력을 잃었음을 알았지만 이것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하지 못하고 알레고리적 해석으로 빠짐. 이것은 앞으로 등장할 알렉산드리아 학파들의 문제이다. 이것은 당시 구약 이해에 어려움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5. 헤르메스 목자

- 140년경, 로마. 5개 환상과 12계명, 10 비유로 구성된 계시록.
- 헤르마스에게 천사가 목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두 번째 회개에 대해 가르쳐 줌. 첫 번째 회개는 세례이다. 회개를 하고 세례를 받아 죄를 씻었는데 그다음에 또 죄를 지으면 어떻게 되는가? 회개의 기회가 있는지?
- 그는 초대교회의 전통에 서 있는 교회의 예언자25)로 분류된다.

[환상2.2.2] „너희 아이들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고 그분을 훼방하였고, 부모들을 배반하였다“
[환상2.2.4] „주께서 나를 통하여 너에게 계시하도록 명하신 말씀을 네가 그들에게 전하면, 그들이 범한 이전의 죄는 사함을 받을 것이다…“
[환상2.2.5] „…이 정해진 회개의 기간 이후에 죄를 지으면, 다시는 구원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의인을 위한 이 회개의 기간은 끝이 나기 때문이다“
[계명4.3.3] „…지금부터 앞으로 믿게 되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기회가 없다. 그들에게는 세례를 받을 때의 회개 기회밖에는 없다“

- 헤르마스 목자 서신은 2세기에서 정경으로 여기는 교회도 있었다.
- 저자는 로마의 피우스 감독(140-150)의 형제로 추정됨.
- 140년경 3세대 신자들의 믿음이 느슨해지자 이에 대한 경고를 한 것이다.
- 당시의 회개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보여줌26).


6. 파피아스 단편

- 히에라폴리스의 비숍.
- 사도 요한의 제자, 폴리갑의 친구. 폴리갑과 마찬가지로 사도 요한의 가르침을 직접 들음. 이 두 사람을 통해 초대교회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음. 이레네우스는 어릴 때 (젊었을 때) 폴리갑의 가르침을 들었다고 함. 정보의 흐름: 사도들(요한, ???) – 폴리캅, 파피아스 – 이레네우스.
- 125 „Logion kyriakon exegeseis“ (주의 말씀 해석). „주의 말씀“으로 통용됨.
- 교회사가 유세비우스가 파피아스의 „주의 말씀“을 인용함. 두 가지 중요한 인용:

„마가는 자신이 베드로의 통역으로 있을 때 그에게 들은 주님의 말씀과 행하신 일을 정확하게, 그러나 순서대로 기록하지 않았다. … 베드로는 필요에 따라서 가르쳤으며, 주님의 말씀을 체계적으로 연결해서 가르치지 않았다27).“

파피아스의 마태에 대한 언급은:

„마태는 주의 말씀을 히브리어로 정리를 했다.“


7. 디다케: 12사도 교훈.

- 12사도 교훈은 1세기 말경에 시리아 혹은 팔레스티나에서 작성된 것. 당시 그 지역의 교회 규정을 엿볼 수 있다.
- 교리문답 학생에게 가르치기 위한 것. 16장으로 구성.
- 세례를 받을 사람들에게 주는 윤리적 가르침.
- 세례에 관하여:
„흐르는 물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 흐르는 물이 없으면 다른 물로 세례를 주어라. 찬물이 없으면 더운물도 좋다. 이것도 없으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머리 위에 물을 세 번 부어라. 세례 전에 세례자와 피세례자, 가능하면 몇 사람 더해서 금식을 하라. 피세례자는 하루, 혹은 이틀 전부터 금식할 것을 명하라.“

- 주일(일요일)에 교회는 예배를 드림.
- 주일마다 성찬식을 함. 세례를 받은 자만이 성찬식에 참여.

그 외에도 많은 외경, 가경들이 있다(대략 40개). 이단들의 저작이 많다(도마 복음서: 영지주의 다빈치 코드)


* 속사도 교부들의 특징
(매우 중요한 부분이므로 각자가 깊이 생각을 해 볼 것)

속사도 교부들은 신약과 구 가톨릭 교부(180년경 이레네우스와 터툴리안)들의 다리를 잇는 중요한 정보의 중개자이다. 그들의 글을 통하여 우리는 100-140사이의 교회의 신앙생활을 엿볼 수 있다. 그들은 초대교회의 영적 유산을 유지하고 보존하고자 애를 썼다. 그러나 영적 유산이 다음의 세 가지 면에서 퇴보되었음을 볼 수 있다.

1. 이신칭의의 교리의 후퇴

오늘날 한국에서 평신도 사이에서도 이신칭의 교리에 많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이신칭의 교리가 한국교회의 타락에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진단이다. 한국교회의 타락은 사람들이 이신칭의를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이신칭의 교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진리가 아니다.

- 대부분의 신자들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세상을 결별한 삶을 살았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핍박에 의해 교회는 변절하여 기독교는 혼합종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세상이 율법의 형태로 교회에 들어왔다.
- 율법적이 되었다는 말은 예수님의 은혜와 자비가 신자의 전체 삶을 지배하지 못하였다는 의미이다.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일생 거룩한 삶을 산다.
- 은혜는 세례 시에 받는 일회적인 사건으로 이해 됨(헤르마스 목자). 따라서 그들은 세례 후에는 죄 사함이 없어서 죄를 짓지 않고자 율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 세례란 무엇인가? 세례란 죄를 씻은 거듭남의 목욕이다. 신자란 거듭남과 동시에 성령을 받는다. 따라서 세례 후부터는 신자는 예수님의 계명에 따라 살아야 한다.
- 예수님의 새로운 계명은 구약의 계명이나 일반 도덕보다도 훨씬 높은 것이다. 율법성이 교회에 들어왔다는 의미는 율법이 예수님의 계명을 대신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계명이 원래의 힘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 신자들은 예수님의 계명이 주는 긴장을 이기지 못해 이것을 율법화시킴으로서 그 속에 안주하게 됨. 그 결과는 자기 정죄 혹은 자만심이 생긴다.
- 이러한 현상을 Rationalisierung(합리화)라고 한다. 예수님 계명을 쉽게 지킬 수 있도록 가시적이고 합리적으로 축소해서 말씀의 무한성과 풍요로움을 손상시켰다 교회의 도덕주의. 축소주의.
- 제3세대의 신자들은 사도들이 가르친 대로 완전한 성화의 삶을 유지하지 못했다. 헤르마스의 목자는 그들에게 두 번째 회개의 기회를 줌(두 번째가 마지막이다). 이것은 가톨릭의 회개교리와 면죄부의 시초가 된다(본인이 회개를 한다고 해서 모든 죄가 사해지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부여하는 면죄부를 받아야 한다) 죄와 회개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한 것.

·회개란, 성서의 가르침에 따르자면, 하나님이 그분의 자비함으로 우리에게 회개의 영을 주셔서 우리가 마음으로 죄를 고백하고 돌이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회개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도달하는 수단이 되었다. 즉 회개를 해야지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푼다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의 근본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변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항상 은혜로우시고, 인간은 항상 회개를 해야 한다. 회개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죄 사함의 은혜를 거부하는 것이다.

- 클레멘스 후서에서는 „죄의 회개로서 자선은 좋은 것이다“(16,7)라고 한다. 영광을 더 얻으려면 기본 의무보다 더 많이 해야 한다고 한다(5,3).
- 특별히 거룩하고 순종적인 삶을 산 사람은 자신의 공적 계좌가 넘쳐서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는 가톨릭의 사상이 벌써 시작됨. 면죄부는 여기에 기초함(성인의 공적을 죄인에게 나누어 줌)
- 신자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희생은 순교다(9,28)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성경의 가르침의 기본을 벗어남.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려야 한다는 생각(공적사상)이 나타남.

- „공적으로 인한 의“는 이그나티우스 비숍에게도 은밀하게 침투된 것을 볼 수 있음.
-순교를 통해서 비로소 완전한 제자도와 최종적인 칭의에 도달했다고 믿음 칭의가 믿음의 근거요 중심이 아니라 믿음의 목적이 됨.
-죄인의 구원은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완전한 행위를 통해 일어남.
-필라델피아 교회 서신: „나의 증서는 예수 그리스도요, 그의 십자가요, 그의 죽음이요, 그의 부활이며 그를 통해 역사 된 믿음이다. 내가 이것들 안에서 여러분의 기도를 바탕으로 칭의가 되기를 원하느라“ 칭의의 미래형!
- 그러나 그의 예수님께 대한 불붙는 사랑은 본받을 만한 것이다.

평가: 도덕주의, 공적주의, 율법주의의 생각들이 등장함. 이것들을 대항하여 특히 사도 바울이 맹렬하게 싸웠으나, 그의 사후 50년이 채 되지 않아 이것들이 교회에 침투함. 그렇다고 해서 교부들의 생각이 필연적으로 당시 교회 전체를 대표했다고 볼 수는 없다. 지도자들에게 공적주의 사상이 나타났다고 해서 기독교가 공적주의로 전락했다고 볼 수는 없다.
초대교인들이 붙들고 있었던 믿음은 „예수님은 나의 주이시다“라는 단순한 고백이다. „예수께서 나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그분이 다시 오실 때에 내가 부활을 하리라는 신앙“은 지도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의해서 쉽게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타락된 본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죄인을 아무 공로 없이 단지 은혜로 받아주신다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Sola gratia는 인간의 본성과 위배된다. 공적사상과 인과응보 사상은 인간의 본성에 뿌리박힌 것이기 때문에, 위대한 시대(사도 시대)가 지나면서 다시 머리를 들고 일어난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이해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매일 새롭게 체험해 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사도들이 저술한 성경에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가 없다. 성경은 인간이 저술한 책이 아니다. 사도들로부터 직접 배운 사람들이 저술한 문서라 할지라도 이것들은 성서와 비교가 될 수 없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영감 된 책이기 때문이다.
누가 사도들의 문서를 비판할 수가 있겠는가?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행위이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귀중한 교훈을 얻는다: 기독교는 끊임없이 개혁이 되어야 한다. 개혁이 가능한 것은 우리가 성서를 믿음의 근본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성서를 중심으로 우리의 생각은 끊임없이 바뀌어야 한다.


2. 성찬의 이해

이신칭의가 흔들리면 성경의 다른 진리들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모든 문제는 이신칭의를 깊이 이해하지 못한 결과물에 불과하다.

- 성찬이 죽음에 대항한 항생제, 혹은 마술적인 힘이 있는 것으로 이해됨. 이그나티우스는 이러한 „은혜수단“을 자주 시행할 것을 권고함. 이것을 통해 사단의 능력이 꺾인다고 생각함 밀교의 영향28). 이것이 후에 가톨릭의 성찬교리로 바뀜.
- 이그나티우스는 교회를 „제사를 지내는 장소“로 이해함. 디다케도 성찬을 영적인 제사로 생각함.
- 이그나티우스에 의하면 먹는 떡이 „실제로 영향을 미치는 신비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함.
- 기독교가 물화되는 경향(Verdinglichung)이 시작됨. 이것이 발전하여 은혜도 물화 된다. 감사와 은혜가 물건으로 바뀐다29).
- oblatio(하나님께 바치는 봉헌/봉납물, 헌금)가 하나님께 영향을 미치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됨(이레네우스, 터툴리안, 클레멘스)


3. 비숍의 지위

- 사제주의의 시작30).
- 초대교회에서는 성찬이 이집저집에서(행2:42) 행하여지고 있었다. 주로 가장이 주체가 됨.
- 이그나티우스에게는 성찬이 제식31)이며 항상 비숍이 성찬을 주재해야 한다. 이것은 세례에도 적용되며, 더 나아가서는 „비숍이 없는 교회는 없다“로 변해간다.
- 그의 행20의 이해: 비숍과 장로는 다른 직책이다32).

- 서머나 교회에 보내는 편지(8장):
„모두 비숍을 따를지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를 따르신 것 같이. 그리고 사도를 따르는 것 같이 장로들을 따를 지어다. 집사들을 하나님의 계명처럼 존경하라! 비숍이 없이는 어떠한 교회의 일도 하지 말지니라! 비숍이 주재한 성찬식과 비숍이 건네주는 떡만이 유효하다! 비숍이 나타나는 곳에 교회가 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이 공교회가 있는 것과 같다. 비숍이 없이 세례를 거행하거나 애찬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

- 비숍은 교회를 군주와 같이 다스리는 자가 되었다 군주적 비숍제도.
- „비숍을 높이는 자는 하나님이 그를 높인다“ 이 주장은 교회가(형제들이) 가르침을 검사하는 기능을 빼앗아가는 것이다.

- 그가 비숍에게 전권을 부여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영지주의와 같은 이단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더 깊은 곳에 있다. 만약 이단에 대한 문제라면 장로회(여러 사람의 교사, 지도자 모임)에서 해결을 할 수가 있다.
- 사제는 구원의 중재자라는 밀교(한국은 샤머니즘)의 영향 때문이다. 그는 구원의 수단을 관리하는 신의 대리자이다.
- 제식이나 성사(가톨릭의 7성사)를 통해 구원이 물화 된 것이 가톨릭의 사제 제도이다. 사제는 성사를 통해서 구원을 관리하기 때문에 사제 없는 구원, 교회는 없다.

- 그러나 비숍제도는 쉽사리 정착되지 않았다. 230전까지는 주로 큰 도시에만 비숍이 있었고, 비숍이 없는(비숍교구에 해당되지 않는 곳) 소규모의 교회들이 많이 있었다. 150경에 쓰인 저스틴의 글에도 교회의 예배 때에 비숍이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는다.

* 속사도 교부들의 문제가 한국교회에서 훨씬 증폭된 모습으로 재현되고 있다33)!

 


VI. 변증가


- 기독교 학자 중에서 한편으로는 많은 기독교적 문서 중에서 영감 된 것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었고(정경형성: 파피아스, 이레네우스), 또 한편으로는 기독교를 변증하는 학자들이 있었다.
- 2세기에 기독교가 좀 더 전파되자 기독교에 대해 갖은 비방과 훼방이 나돌아다니고 있었다. 그중 켈수스34)라는 학자가 기독교를 비판하는 책을 저술했다. 기독교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 내용으로는:

1.기독교는 학문적이 이니므로 무식한 사람들의 종교이다.
2.기독교인들은 성찬식에 사람들을 먹는다.
3.그들은 근친 상간자들이다. 친형제와 친자매끼리 결혼한다.
4.그들은 무신론자들이다. 그들은 신의 형상을 만들지 않으므로 무신론자들이다.
5.그들은 황제 숭배를 하지 않으므로 국가를 위태롭게 한다.

- 이러한 비방에 대항하여 기독교의 여러 학자들이 기독교와 교인을 변증, 변호하는 글들을 집필함: Quadratus, Aristides, Justin, Tatian, Athenagoras, Theophilus(안디옥의 비숍). 그들은 대부분 기독교로 개종한 철학자들이었다. 그들의 변증서에는 그들이 성서의 많은 부분을 철학적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들은 기독교에 대한 오해를 푸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기독교 교리가 희랍철학 영향을 받게 되는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저스틴외에 타티안만 다룬다.

- 특징
·신론, 그중에서 주로 창조론을 다룸.
·disciplina arcani35) 원칙에 의해 기독교에 대해 별로 다루지 않음. 저스틴은 예외.
·„신자들이 더 좋은 윤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함.
·기독교가 더 좋은 철학이다.


* 타티안

- Diatessaron으로 유명: 4복음서를 조화시켜서 다시 기술한 것36). 선교사로 활약.
- 철학자들은 그들의 모든 지혜를 모세로부터 배웠다. 히브리 철학은 그리스 철학보다 훨씬 오래된 것이다. (옛날 사람들의 생각: 오래된 것일수록 좋다)
- 그러나 이레네우스는 그를 영지주의자라고 비판함.


* 순교자 저스틴

- 100년경 탄생. 젊어서부터 진리에 대한 갈망이 있었으나 스토아, 소요학파, 플라톤 학파에게서도 만족을 얻지 못함.
- 130년경 에베소 근교의 해안에서 한 노인을 만났는데 그가 저스틴에게 유대 선지자의 그리스도에게서 진리를 찾으라고 일러 줌. „내 영혼에 갑자기 불이 붙어서 선지자와 그리스도의 친구들인 신자들에 대한 사랑이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그 노인의 가르침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그곳에서 유일하게 신뢰할 만하고 유익한 철학을 발견하였다“(트리폰8).
- 그는 신자가 된 이후에도 지중해 연안을 돌아다니며 철학을 가르침.
- 에베소와 로마에 철학학교를 설립함.

- 남아 있는 그의 변증서: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에게 바치는 변증서
-로마 원로원에 바치는 변증서.
-유대인 트리폰과의 대화.
(원로원에는 당대의 지성인, 철학가들이 있는 곳이므로 그의 변증서의 질과 내용의 방향을 짐작할 수가 있다)

변증서 내용 요약:

- 국가는 통치자와 피통치자 양자가 지혜를 사랑할 때만이(플라톤!) 번영할 수가 있다.
- 그리스도인은 무신론자가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을 숭배한다.
- 그리스도인은 진정으로 평화를 사랑하므로 그들을 향한 근거 없는 증오는 중지되어야 한다.
- 플라톤과 스토아 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준비자이며, 그들은 그리스도의 진리에 참여한다(부분적으로 그리스도의 진리를 가지고 있다).
- 모든 사람은 세계 이성인 로고스에 참여한다는(인간의 이성은 로고스의 한 부분) 스토아의 이론에 따라, 모든 사람은 이성의 능력으로 예수님에 참여한다37).
- Logos spermatikos: 종자의 로고스. 모든 사람에게 씨앗처럼 로고스가 (잠자고, 쉬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노력을 하면 진리를 알 수가 있다 sola scriptura(계시)가 무색해짐.
- 모세뿐만이 아니라 소크라테스도 그리스도의 예비자이다.
- 그리스도 이전에는 아무도 완전한 진리의 인식에 도달할 수 없지만, 오늘에는 모든 이성적인 사람은 자신의 내적인 음성을 들으면 기독교인이 될 수가 있다. 생각이 있는 사람은 기독교를 믿게끔 되어 있다 지식인들에게 도전이 되는 말.
- 클레멘스와 오리겐이 이러한 생각을 발전시킴.
- 165 로마에서 다른 형제들과 함께 순교.

그의 변증서는 140-160 사이의 (소아시아의) 예배에 대한 정보를 준다(변증I,67). 당시의 예배는:
- 주일날 모임. 당시에 일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새벽(해가 돋기 전에)이나 저녁에 모임. 대부분 유대인 기독교 교회나 이집트의 이방 기독교에서는 4세기까지 토요일에 안식일을 지킴. 콘스탄틴 황제 때 일요일이 공식적인 공휴일이 됨(321).
주일 성수라는 의미를 잘 생각해 볼 것. 오늘날 한국교회의 주일 성수 개념은 신약과 초대교회의 이해와는 많이 다르다. 주일 성수의 근거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 사도들의 책(4복음서)과 구약의 선지서를 읽음38).
- 교회 대표의 설교. 읽은 말씀대로 살기를 권고함.
- 모두 일어나서 기도.
- 빵, 포도주, 물이 들어옴. (성찬39)과 아마도 세족식을 위한 것)
- 교회 대표자의 감사기도 – 힘찬 아멘으로 화답.
- 성찬식 거행. 집사는 불참자들을 위해 남겨두었다가. 그들에게 가져다줌.
- 성찬식의 참가자는 „죄 사함과 거듭남의 세례를 받은 후에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그대로 사는 자들
- 고아, 과부, 병든 자, 궁핍한 자, 수감자, 교회에 있는 외국인, 빈자들을 위한 헌금
- 기도 후에 거룩한 입맞춤으로 폐회.

오늘날의 교회 예배와 비교해 볼 것. 물론 당시의 예배나 교회 형태가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예배의 형태가 시대마다 장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음을 감안할 것.


* 변증가들의 특징과 문제점들

- 그들은 독창적인 사상가들은 아니다. 대체로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웅변술을 그대로 사용함(필로, 키케로, 세네카). 따라서 이들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주로 켈수스의 비난 „기독교는 비 철학적이고 과학적이 아니다“에 대한 대답에 초점을 맞춤.
- 모든 변증가들은 „기독교의 믿음이 가장 뛰어난 철학이요, 누구나 조금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면 기독교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다.
- 이러한 변증 방법의 문제는 „믿음이 지적인 문제“로 전락하는 것이다.
-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분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화평을 가지고 왔다는 것“인데 이것은 세상에서는 어리석은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가장 좋은 철학이 되고 과학적 시스템이 되었다.
- 인간의 지식체계를 넘어서는 계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변증가들은 계시를 받아들이면서도, 계시가 희랍정신의 법칙을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 하였다.
-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러나 십자가상의 고난이 하나님 아들의 삶의 중심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이 인류에게 올바른 신 개념과 훌륭한 윤리를 가져다준 위대한 선생이 되었다.
- 그러므로 유대인에게는 거친 것이요, 희랍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인 신앙의 중심 메시지는 뒷전에 밀려났다. 그들은 공격자들의 논쟁 법칙에 따라서 논쟁을 했기 때문이다.
- 변증서는 원래 의도한 대로 이방인 식자들이 읽지 않고, 주로 신자들이 읽었다. 그 결과로 교회에 그리스 철학의 바람이 일기 시작하였다. 변증가들에게는 기독교가 지성적인 종교로 됨. 바울의 철학에 대한 경고가 무색해졌다(골2:3-9).
- 칼 호이시(Karl Heussi)는 변증가들이, 비록 초보적이기는 하지만, 처음으로 기독교 신학을 세운 사람들로 칭찬함 그들은 기독교 신학을 세웠지만 잘못된 신학을 세움. 이것이 클레멘스와 오리겐에서 뚜렷이 나타남.


* 생각해볼 점.

- 철학이란 성경의 계시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하나님이나 우주 그리고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적이고 과학적인 체계이다. 이 체계 속에서는 하나님을 논할 수는 있지만 야훼 하나님을 논할 수가 없다. 아무리 지적이고 체계적이라고 할지라도 실재(Wirklichkeit)에 근거하지 않으므로 허망한 체계이다.
- 믿음이란 나의 죄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에 대한 인격적 결단이다. 이것은 체계적인 시식과 지성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본연의 양심과 순종의 영역이다. 이러한 것은 철학적인 체계가 불가능하며, 체계를 세운다고 해서 사람을 설득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설득이란, 인간의 본연의 양심에 말을 거는 것이다.
- 성령에 의해 설복을 당하면 말씀의 진리 빛 아래서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생각을 지적으로 정리를 할 수는 있다. 여기에 지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인간과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체계를 성경으로부터 배워나간다. 자신의 생각을 수정해 나간다. 끊임없는 연구와 대화가 필요하다 세상의 지적인 체계와도 논쟁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생각을 변화시킬 수가 없다.
- 인간의 모든 생각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다시 출발해야 한다. 인간의 생각(철학)으로부터 믿음의 진리(계시)로 들어오는 길은 없다. 철학과 계시 사이에는 깊은 단절이 있다 계시의존 사색.
- 대부분의 변증가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 이후에 자신이 이교도 시절에 가지고 있었던 생각의 체계를 완전히 벋어 버리지 못했음(사도 바울: 그리스도만 알기를 원함). 그들의 사상체계는 후대의 기독교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줌.
- 그렇다면 신학은 불필요한 것인가? 계시에 의존하는 한도 내에서는 필요하다. 변증을 하되 계시(성경)가 세상의 사상체계에 속박되어서는 안 된다.

 

VII. 이단 종파의 공격


A. 영지주의
- 고급 기독교 -

왜 이단의 교리를 자세히 다루는가? 누구나 예수님을 믿게 되면 교회 생활이 시작된다. 교회 생활을 오래 한다고 해서 자신의 인생관이나 과거에 가지고 있던 생각이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다. 많은 신자가 복음적인 생각과 이단적인 생각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스스로는 잘 구분을 하지 못한다. 이단을 잘 공부함으로써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발견할 좋은 기회가 된다. 이러한 생각들이 체계를 갖추기 전에 발견해서 정정해나가야 한다.

예수님의 죄 사함의 은혜만으로는 부족한가? 무엇을 더 해야 구원에 이르는가? 칭의로 얻는 구원을 바탕으로 다른 무엇을 더 요구한다면 그 사람은 고급 기독교를 믿는 것이다.

- 2세기에 초대교회의 가르침의 중심이 칭의론을 벋어나기 시작할 때에 교회에 새로운 도전이 들어왔다. 영지주의가 교회 내부로 파고들어 온 것이었다. 이 영지주의 교리에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거의 모든 이단의 교리가 다 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1. 로마 제국의 종교.

- 제국의 종교는 복수주의. 오늘날 전형적인 종교 다원주의. 누구나 자기가 선택한 종교를 통해 행복을 누릴 수가 있다40). 제국의 영토 확장을 통해 동방의 종교들이 들어옴. 특히 밀교. 그들은 서로 혼합하면서 발전하기도 함.
- 이러한 상황에서 밀교 신자들이 기독교에 입교하는 경우가 많고, 입교 후에 그들의 생각과 기독교와 조화를 시키려고 함. 이것은 그들로 볼 때는 매우 당연하다. 종교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경전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혼합종교. 한국과 남미의 일반적인 상황. 이러한 현상은 모든 민족과 문화에 나타난다.

2. 영지주의와 기독교

- 이러한 종교 중에서 영지주의가 기독교의 가장 큰 적으로 부상함.
- 영지: Gnosis41). 인식, 특별한 깨달음(道가 튼다). 신비한 깨달음을 의미함. 이러한 깨달음이 있을 때만이 신을 인식할 수 있음.
- 기독교에의 도전: 너희의 깨달음 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에게 진짜 깨달음이 있다. 우리가 높은 경지의, 참된 깨달음을 알게 해 주겠다 더 높은 기독교를 선전. 사람들이 미혹됨.
- 구원이 영지에 의해 체험되고, 누릴 수 있게 되고 볼 수도 있게 된다. 영지주의 기독교만이 참된 교회이며 진정한 영적인 교회다.

3. 영지주의 기원과 이론.

- 고대의 혼합종교: 그리스의 철학과 종교(중 플라톤주의, 피타고라스학파의 윤회사상),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 바빌론과 이집트 등의 종교들이 혼합되어 형성됨. 여러 종류의 영지주의가 있음. 이론이 대표자마다 차이가 난다 단순한 하급종교가 아니라 고급종교이다!
- 그들은 „악의 근원은 무엇인가? 인간은 어디에서 왔는가? 하나님은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질문에 대답을 줌 분명하고 이해가 쉽게 될만한 체계를 만들어 제시함으로써 사람들을 현혹함.
- 극단적 이원론: 빛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 빛과 어둠이 대조를 이루는 완전한 이원론.
- 기독교에는 하나님과 사단이 대적한다기보다도 하나님이 사단을 창조하셨고 그를 지배하시기 때문에 이원론이 아니다.
- 태초에 빛의 왕국과 어둠의 왕국이 존재함.
- 어둠의 공격으로 빛이 패배하여 빛과 어둠이 섞여서 세상과 인간이 만들어짐.
- 빛 조각(영)이 어둠(육)에 갇혀서 괴로워함.
- 구속이란 빛 조각이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것. 하늘로부터 구원자가 와서 빛 조각에게 자신의 기원을 기억시킨다.
- 빛 조각이 자신의 기원을 깨닫고 육으로부터 해방을 해야 한다.
- 영지를 통해 자신을 해방시켜서 이미 지상에서 자유를 누림. 완전한 자유는 신체가 죽은 후에 누린다.
- 기독교와 유사점이 있지만 핵심은 전혀 다르다.
- 기독교에서는 정신과 육신을 나누지 않는다. 육이라는 것은 육체가 아니라 악한 의지, 혹은 자연인으로서의 인간의 정신을 말한다 .
- 영지주의는 플라톤의 이원론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

4. 기독교적 영지주의의 대표자들.
- 2세기에 제국에 편만하게 됨.
- 기독교적 영지주의는 영지주의와 기독교를 혼합하여 자신들이 더 좋은 기독교를 만들었다고 생각함.
- 문제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등과 같은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여 기독교와 유사종교 내지는 진전한 기독교를 표방하여 기독교를 매우 혼란시킴.

- 시몬 마구스
·영지주의의 창시라로 알려졌음. 행8에 등장하는 마술사 시몬을 말함. 그에 의해 영지주의가 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것 같다. 그는 기독교 영지주의자는 아니다.
·40년에 사마리아에서 활동함.
·50년에 로마에서 활동. 큰 명성을 얻음.
·메난더(자신을 구원자라고 생각함), 사토르닐과 같은 제자가 활약을 함.

- 케린트 (Cerinth)
·이레네우스에 의하면 그는 90년대에 목욕탕에서 사도 요한과 마주치자 목욕탕을 급히 떠났다고 함.
·그는 또한 사도 요한이 케린트와 니골라당(계2:6. 초대교회의 집사 니콜라우스를 중심으로한 영지주의 파)에 대항하여 요한복음을 집필했다고 함.
·창조주는 최고의 신이 아니라 데미우르그(신들 중에서 가장 낮은 신, 혹은 악한 신: )이다: 구약을 비판함.
·예수님은 동정녀의 아들이 아니라, 보통 인간으로서 단지 지혜로운 의인일 뿐이다. 세례 때 성령이 그 안으로 들어옴. 이미 그 당시에 자유주의 신학이 있었다.

- 바실리데스(Basilides)
·예수님이 승천 전에 마태에게 전해준 비밀교리가 있다고 주장하여 그 비밀교리를 가르침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이 아닌 구레뇨 시몬이 죽었다.
·빛의 세계는 하나님과 365개의 영적 왕국으로 구성되었다.
·암흑이 빛과 접촉하려는 시도에 의해 세상이 생겼고, 이 세상은 고난과 윤회를 통해 정화되어야 한다.

- 발렌틴(Valentin)
·그는 가장 강력한 교회의 적이 되었다. 이집트 사람. 그의 가르침이 가장 널리 유포됨.
·135경 부터 20년간 이집트에서 가르침. 그 후에 로마에서 활동.
·„진리의 복음“을 집필. 낙 함마디(Nag Hammadi)에서 같은 제목의 문서가 발견됨.
·유출설: 하나님으로부터 aion(에온, 아이온)이 유출됨. 신적 근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질수록 신적 능력이 감소하여 세계의 인간이 창조됨. 따라서 구원은 신적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결국 자신이 하나님처럼 된다.
·인간의 3종류: 영적 계급 (영지주의자 = 참된 기독교인, 매우 적은 숫자), 물질적 계급(유대인, 기독교인), 육욕적 계급(이방인). 둘째 계급의 사람들은 경건한 삶을 통하여 낮은 등급의 구원을 받을 수 있으나 셋째 계급은 영원히 멸망함 기독교인을 두 계급으로 나누는 단체가 어디에 또 있는지?

- 그 외 여러 군소파들이 있음.


B. 기독교 영지주의 교리

여러 명의 영지주의자들의 교리를 종합하여 서술한다.
영지주의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기독교 영지주의로 변하는지 살펴볼 것. 이것을 잘 연구하면 각국에서 나타나는 기독교의 문제를 잘 이해할 수가 있다. 기독교가 하나의 문화권에 들어가면 그 문화, 또는 재래종교와 혼합, 절충되어 변질할 수가 있으며 이단이 발생할 수가 있다.

1. 인간론
- 인간의 영은(빛의 일부분) 육신의 감옥에서 괴로워하며 구속을 기원함.

2. 구원론
- 구원을 위해서는 영이 육신의 감옥을 빠져나와서 빛의 세계로 들어와야 한다.
- 그 방법은 비밀의식에 참여함으로 이루어진다. 그노시스(영적지식, 깨달음)는 비밀의식을 하는 동안에 스스로 깨닽기도 하고 말로서 전달되기도 한다. 이 지식은 완전 비밀(미스테리온)이며 귀의자 외에는 알려주지 않음.
- 그노시스도 단계가 있어서 비밀제식을 통하여 계속 깊어감 (전형적 현대판 영지주의는 Scientology: )
- 가끔 집회가 황홀경을 자아내는 경우가 있다: 짐승의 피에 목욕함, 피를 뿌리는 것, 마술, 음주, 성적인 오르기 (Orgie: 망아적 비밀제)
- 구속의 최고 단계는 엑스터시이다 (영이 몸으로부터 빠져나옴 – 입신). 이것이 완전한 구속이며 이미 부활한 것과 같다. 물론 육체의 구속(부활)은 없다(육은 악한 것)
- 완전한 영지주의자는 엑스터시때에 이미 부활을 체험한다. 지상에 있을 때에는 이것을 가끔 체험하지만 부활 이후에는 항상 엑스터시 상태에 있는 것이다 .
- 신약에서는 이미 이러한 초기 형태의 영지주의에 대항한다(특히 고린도 전서).

3. 신론과 창조론
- 원래의 영지주의 이론을 변형시켜서 기독론으로 만든 것.
- 두 명의 신을 구분한다.
- 진정한 신인 빛의 신, 구원자 신인 플레로마는 영의 세계만에 거하며, 물질의 세계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 혹은 선한 하나님에 의해 지배되는 정신-플레로마와 악의 원리에 의해 지배되는 물질-휠레의 세계가 대립한다 이원론42).
- 이 빛의 신으로부터 빛의 나라, 영의 세계가 유출되었다. 이것들이 능력들, 천사들, 인간의 영혼들이다. 이 신은 끊임없이 유출하고 있다 (흘러 넘쳐서 밖으로 나가는 것)
- 첫 번째로 유출된 것이 로고스(그리스도)이다.
- 한 천사43)(영)가 하나님을 대항해서 싸우다가 패배하여 다른 영혼들과 함께 심연으로 떨어짐.
- 그 타락한 천사는 빛의 세계와 사단이 지배하는 물질 세계의 사이에 위치하게 됨.
- 그가 물질을 이용하여 세상을 창조함. 그를 창조주라고 부른다(빛의 신은 물질을 창조할 수가 없다).
- 이 신은 구약의 야훼신과 같다. 그를 데미우르그라고도 함.
- 참 신, 빛의 신은 우리의 세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라는 말은 이러한 영지주의 가르침에 일격을 가함)
- 데미우르그는 원래 빛의 나라에서 왔기 때문에 그가 만든 사람들에게도 빛 조각이 존재한다.
- 소수 사람만이 충분한 빛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구원을 받을 수 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
- 발렌틴은 두 그룹 사이에 또 하나의 그룹을 만들어 그들을 일반 교인이라고 함. 이들은 경건한 삶을 통하여 낮은 등급의 구원을 받는다.
- 영적인 사람은 스스로 구원받을 만한 자질이 있다.
- 일반적으로 영지주의자들은 금욕주의자들이다. 육을 죽여야 하기 때문이다.
- 자유주의적 영지주의자들도 있다: „진정한 영지주의자는 영은 영에게, 육은 육에게 주어도 된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그들은 마음대로 육욕을 즐길 수 있다.

4. 그리스도.
- 그리스도는 첫째 유출자로서 빛의 신의 형상이다. 그는 영적 인간에게만 그노시스(올바른 영적 지식)을 가르친다. 육적인간들은 어차피 멸망한다.
- 가현설 주장: 그리스도가 다른 인간의 몸을 입고 있다가44) 수난 전에 하늘로 올라감.
- 그리스도는 영적 인간이 지니고 있는 빛 조각을 일깨운다. 세례와 성찬식을 통해 그들은 정화된다.
- 그리스도는 승천 이후에 그들에게 비밀 코드를 알려주어, 그들이 영적 세계와 싸우면서 빛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 따라서 십자가는 의미가 없다(그리스도가 돌아가시지 않음). 그는 육신이 되지 않았음. 단지 그가 알려주는 영지만이 중요함.


5. 영지주의적 교만

- 그들만이 진정한 기독교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여 일반 교회에 침투해 들어옴
- 교회 예배 이후에 그들 나름대로 또 다른 예배를 드림.
- 교회가 사용하는 말을 그대로 사용하기 때문에 일반 교인들은 영지주의자를 구분할 능력이 적다: 그리스도, 부활, 영, 육…(자유주의자들, 많은 이단). 특히 그리스도를 매우 높임.
- 그래도 일반 교인들의 교인은 인정함(낮은 구원). 그들이 자신을 부러워하게 함.
- 베드로, 바울, 요한, 바나바, 도마, 빌립보, 모세, 에녹, 아담 등의 이름을 사용하여 자신들의 교리를 퍼트림: 자신이 저술한 책을 베드로 복음, 도마 복음…라는 이름을 붙임. 자신이 그들과 동급이라고 생각.

성경의 가르침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 구원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그분의 권능으로 그의 삶을 변화시키시며 이끌어 가신다. 그들이 할 일은 늘 성경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말씀대로 살 뿐이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는 사람에게는 성경이 잘 이해가 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말씀대로 살 수도 없다. 비록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할 때 예수님을 구주로 만날 것이다.


6. 신약과 영지주의

- 마술사 시몬: 행8:9-24.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이 사람은 크다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그는 일단 개종했다가 다시 과거로 돌아감. 1세기 후반에 시몬과 그 제자들의 활동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음.
- 딤전 6:20: „디모데야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45)의 반론을 피함으로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
- 딤후 2:17-18: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부활이 이미 일어났다고 가르침: 그들이 엑스터시의 경험을 통해 부활을 체험했다고 주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 계시록: 니골라당. 그들은 자유주의적 영지주의자.
- 사도 바울이 여러 군데에서 영지주의적 위험과 싸움(특히 고린도서46))
·„육신은 성령의 전이다“: 그들은 육신을 무시(음란 허용)
·„부활은 하나의 사실이다“: 예수님은 부활하지 않았다고 주장(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지도 않았다).
·„나는 삼층천에 다녀왔다“: 그들의 엑스터시에 대항해서. 그들은 천국에 다녀온 것을 자랑함. 그러나 그는 차라리 지신의 연약함을 자랑함(고후12:1-10)
·자신의 죽을 육신에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도록 하고자(고후4:1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고전8:147).
·영적은사: 영지주의자들은 특히 방언을 중시한 것 같다 – 바울은 사랑을 중시함.
·고린도인들의 교만, 자기 자랑: 바울은 이러한 열광주의자들에 대항하여 성령은 사람을 겸손하게 한다고 가르침. 또한 바울은 십자가를 가르침.
- 사도 요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요1:14.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했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요1서 4:1.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계2:6

요약: 영지주의는 영과 육의 이원론. 구원(영지)에 이르는 지식을 얻고자 함. 이미 부활이 일어났다(엑스타시를 통해 부활을 체험). 방언과 예언, 혹은 행위(열심)는 구원의 보증서인가? (마7:22-23)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는 없다. 이것은 필요충분조건이다. 신자의 삶에 십자가의 은혜가 아니라 다른 것을 중심이 된다면 문제가 있다.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의 잘못된 생각을 끊임없이 변화시켜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원동력이 되어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


C. 그 밖의 이단 종파
그 외 이단 종파로서 큰 것은 마르키온, 마니교, 몬타너스주의가 있다 영지주의를 자세히 다루었으므로 이것은 간단히 다룬다.

1. 마르키온 (Marcion)

„은혜밖에 없다!“ – 그는 바울서신에 (너무?) 심취해서 그에게는 은혜가 알파와 오메가이다.

- 85년 소아시아 출생.
- 그는 초기에는 구약을 인정했으나 후에 모두 거부함.
-그가 인정하는 신약의 일부분 가운데서도 그의 견해에 맞지 않는 부분을 잘라냄.

- 구약의 하나님(창조주)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될 수가 없다. 그는 „눈에는 눈, 이빨에는 이빨“의 신이다.
- 그리스도에 의해 계시된 신은 구약의 신과는 다른 선한 신이다: 조건없는 사랑, 한없는 자비, 벌을 주지 않으심.
- 그 신은 무한한 자비로 다미(dummy)육신을 입으시고 인간에게 조건없는 사랑의 복음을 전달하셨다.
- 구약의 신 데미우르그, 즉 창조의 신이며 복수의 신(영지주의의 영향)이 그의 부하들과 함께 그를 십자가에 못박음(물론 진짜 하나님은 죽지 않았다).
- 데미우르그는 하나님을 죽인 책임을 지고 자기 자리를 물러났다. 그가 물러 났으므로 율법도 무효가 되었다
- 복음서 기자들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해서 복음서에 분노와 복수의 신(율법)이 등장함. 즉 그들은 이미 무효가 된 구약을 그대로 사용함.
- 사도 바울만이 그리스도의 이러한 의도를 제대로 이해함(그도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 여호수아는 폭력과 잔인함으로 땅을 정복했으나(!) 그리스도는 모든 폭력을 금지시키고 자비와 평화를 선포하였다 설득력 있는 주장.

- 교회(사도)가 완전히 잘못된 길을 가고 있으므로 선한 하나님이 그를 개혁자로 부르셨다: 대부분의 이단자들의 생각.
- 그의 성서비평: 예수님의 탄생과 어린이 시절을 제외한 누가복음(그는 인간이 되지 않았으므로). 13개의 바울 서신중에 10개만 인정함. 그나마 자신의 이론에 맞지 않는 것은 수정함 오늘날의 고등비평.

- 그는 (아마도 자신의 아버지가 비숍인) 교회에서 출교당하여, 다른 도시에서 교회를 전전하다가 또 추방당하여 자신이 새로운 교회를 설립함. 그의 교회는 2세기 중엽부터 어느 정도 세력을 갖추어 교회를 위협할 정도로 커짐.
- 150년경 저스틴은 마르키온의 가르침이 온 세상에 퍼졌다고 함. 2세기 말경에 터툴리안이 마르키온에 본격적으로 대항함.
- 그의 교회의 특징:
·보편교회보다 예배 형태가 훨씬 단순함.
·성직자 주의 반대.
·세속화 반대: 그들은 금욕주의자들이다. 결혼을 반대함.


비판: 그의 비판은 놀랄 정도로 매우 현대적이다. 그의 비판이 현대에 꽃을 피우고 있음. 선각자적인 안목이 있음.
·성서를 비판하여 나름대로의 카논을 만듦(Canon in Canon: 오늘날 유행되는 말)
·구약의 하나님은 신약의 하나님과 다르다.
·뉴에지와 같은 범기독교 주장. 심판도 없고 지옥은 없다.
·판 아가페: 사랑밖에 없다.
·마르키온은 초대교회의 율법화(헤르마스의 목자)에 대한 반발, 즉 개혁운동으로 이해된다.
·그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잘못 이해하여 이 두 가지를 반대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율법을 폐기함 반율법주의(Antinomian)

- 4세기까지는 동방교회에 위협적인 요소가 됨.
- 5세기에 황제의 칙령으로 금지됨.
- 가장 큰 문제: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분리함. 이것은 구약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읽지 못한 것에 원인이 있다.
- 그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정경 형성이 촉진되고 교회에서 하나님(구약)과 예수님(신약)과의 관계의 연구가 촉진됨.


2. 마니교 (Mani)

- 영지주의가 차차로 매력을 잃게 되자 3세기에 바빌론에서 나온 영지주의의 개량종.
- 마니. 216 출생. 242에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로 등장하여 페르시아와 인도에서 전파함.
자신은 예수님이 요14:26에서 약속하신 새로운 가르침을 가지고 온 보혜사라고 주장함.
- 277에 잡혀서 감옥에서 죽음.

교리:
·영지주의의 개량종: 이원론(빛의 나라와 어둠의 나라)
·구약은 별 쓸모가 없다(마르키온)
·마니교 유일론: 기독교에는 구원이 없다.
·기독교에 들어와서는 자신이 개혁자라고 주장. 많은 신자가 현혹되어 그를 추종함.
·이러한 식으로 각 문화권에 파고들어가 그 문화권의 종교의 옷을 입고 그 종교를 마니교로 바꿈 환경에 따라 색깔을 바꾸는 뱀에 이유됨.
·불교권(인도)에 들어가서도 불교의 색채를 띰.
·영지주의와 다른 점: 밀교의 의식이 없음(밀교가 인기를 잃어 영지주의가 퇴락함). 주로 가르침이 많음.
·엘리트와 '청자'(聽者)로 나누어짐. 청자는 엘리트를 경제적으로 원조함. 어거스틴은 오랫동안 청자로 있었음.
·청자는 죽어서 환생함. 엘리트는 살아서 이미 구원을 받음. 그들은 항상 흰옷을 입고 있음.

마니교의 분파: 교회사에서 문제가 되었던 분파들.
Paulicianer: 아르메니아 7-11세기
Bogomilen: 소아시아와 발칸지역. 14-15세기 보스니아에서 절정을 이룸. 터키 점령(1463) 이후 없어짐.
Katharer: 남부 프랑스, 북이탈리아.


3. 몬타너스 주의
예언자, 은사주의, 열광주의, 금욕주의. (좋아 보이는 것은 다 갖춤)

- 몬타너스 주의에 의해 당시의 교회가 분리됨으로써 큰 타격을 받음. 오늘날까지도 계속해서 일어나는 위협적인 요소.
- 156에 프리지아(소아시아)에서 자신이 약속된 보혜사(요14:26)로 주장하며 등장함.
- 그가 엑스터시에 빠져서 선포 함: „나는 인간이 된 전능한 하나님이다. 나는 천사로서가 아니라 주(Kyrios)로서 왔다“
- 여자 막시밀라와 프리스킬라를 선지자로 세움.
- 그들은 새 예루살렘이 페푸자(Pepuza)에 곧 세워진다고 예언함.
- 자신이 성령으로 왔으므로 계시의 마지막 단계가 이루어졌다. 말세가 곧 올 것이다.
- 신자들에게 결혼하지 말고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라고 함.
- 이 소식을 온 세상에 전할 선교사를 위해 금과 돈을 모음.
- 이 가르침이 속히 로마에 퍼지고, 특히 북아프리카에 번성함. 소아시아에서는 교회 자체가 몬타너스 교회로 바뀌는 교회가 있었다.
- 사람들은 Pepuza로 가서 종말을 기다림.
- 179에 막시밀라의 죽음으로 3명의 창시자가 모두 죽음. 성령인 몬타너스는 그전에 죽음. 그들의 가르침이 거짓임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계속 번창함. (이단의 성장, 교회의 성장까지도 진리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교회가 성장하고 신도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그들이 복음과 이웃사랑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아도 예수님이 없는 교회가 많다)
- 일반교회의 이름으로 몬터나스 교회가 세워짐. 사람들이 정통교회와 이단을 구분 못함.
- 기존교회에 침투하여 교회 내의 교회가 됨(경건주의도 교회 내의 교회이다. 그러나 차이점은 경건주의자들은 다른 교리를 주장하지 않았다. 영지주의, 마니교, 몬타너스는 자신의 교리를 감추고 교회에 들어옴. 


- 교회생활 중심에는 엑스터시 상태에서 설교하는 것48).
- 횃불을 들고 흰옷을 입은 자매들이 교회의 상징이 됨.

- 금욕주의: 처음에는 기혼자에게 전부 이혼할 것을 요구. 이것이 차차로 완화됨. 재혼은 금지함(배후자 사후에도). 금식 강화. 특정한 음식 금지(고기, 포도주, 수분이 많은 과일) 임박한 재림기대에서 온 것.
- 교회 징계의 강화: 200년경 코모두스 황제가 기독교를 핍박하지 않자 기독교인들이 해의해짐. 이러한 이유로 몬타너스 주의에 빠진 사람들이 있었다.
- 몬타너스 신자는 당국의 수배를 받으면 도망가지 않고 붙잡힘.
- 207에 터툴리안이 몬타너스로 넘어가서 죽기 얼마 전에(220) 다시 돌아옴. 그가 몬타너스로 넘어간 가장 큰 이유는 교회가 해이하게 된 것(당시의 가장 훌륭한 기독교 학자가 이단에 들어갔다는 것은 이단은 정말로 매혹적이고, 인간의 힘으로 제어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말한다.)
- 4세기에 국가가 몬타너스 주의를 법적으로 금지함.

* 평가와 의의:
- 몬타너스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엄격하고 열광적이고 임박한 재림을 기다리는 은사주의.
- 교회의 태도: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나중에는 적극적으로적으로 항거함. 새로운 형태의 이단이라서 사람들이 빨리 눈치를 채지 못함.
- 그들을 대항하기가 어려웠던 점:
·성경(구약)을 부정하지 않음. 그리스도의 성육신 인정, 영지주의 반대.
·그들은 적지 않은 순교자를 냄.
·그들의 금욕적인 삶은 귀감이 되는 것처럼 보임. 화장과 장신구 금지.
·그들은 예언을 많이 하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교회에서도 예언이 있었음.
·한마디로 교회보다 훨씬 큰 매력이 있었다: 금욕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음, 엘리트의식, 엄격한 규율, 열성, 입신, 예언
- 칼 호이시(Karl Heussi): 몬타너스 주의는 열광주의적이고 금욕주의적인 초대 기독교로 다시 돌아가는 것과 이것을 더 강화시키는 운동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재림 기대가 사그라졌고 교회가 세속화 되어가고 있는 것에 대한 반발이다 예수님이 곧 재림하신다!

- 당시 교회의 예언자 직분에 관하여:
·이레네우스(2세기 말): „우리가 듣는 바와 같이, 교회의 여러 형제들이 예언 은사를 갖고 있고, 여러 가지 언어로 방언을 말한다. 그리고 형제들의 유익을 위해 감추어진 것을 밝혀내고 하나님의 비밀을 말한다“(adv. Haereses. V,6)
·그 외에도 신비한 환상, 예언에 대한 기록이 여러 곳에 있음.
·고린도의 디오니시우스(170), 사데의 멜리토(180), 키프리안(250)등도 환상을 보고 예언을 함.
·200년까지만 해도 교회에 예언자의 직분이 있었음.

- 하르낙: 몬타너스주의는 초대교회의 예언자 관례를 강화시키고 그것의 종말을 가져왔다: 몬타너스에 의해 예언이 교회에 넘쳐나게 되자 교회가 경각심을 갖게 되어 예언이 결국 교회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 무라토리(Muratori)정경(약200): 예언자의 시대는 지나갔음을 선포함. 무질서한 예언의 관례로 말미암아 정경형성이 촉진되었음을 보여줌.

# 그들은 성령을 말하지만 실상은 율법의 노예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나름대로 수많은 율법을 갖고 있었다. 예수님이 해방시킨 율법이 교회에 다른 모습으로 들어옴. 그들은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것을 깨닽지 못함.


* 왜 예언의 시대는 지나갔는가?
1.예언이란 교회에 유익이 되는 것이다. 또한 예언은 오늘날에도 교회에 유익이 되는(교회를 세우는) 범위에서 사용될 수 있다. 특히 신약이 성경으로 명확하게 확정되지 않았던 시대에서는 예언이 분명히 가치가 있다.
2.그러나 사도 바울이 예언을 권장하면서도 그 위험성을 고려하여 사용의 한계를 정함. 예언은 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는 데에 사용되기 때문에,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제삼자가 그의 진위를 판단할 수가 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예언을 항상 판단할 것을 가르침. 즉 예언은 말씀의 판단을 받는다.
3.문제는 영지주의와 같은 이단에서 예언, 입신과 같은 것이 공교회 보다 훨씬 많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들이 교회에 들어오면 교회는 성령이 아닌 다른 영에 의해 지배를 받게되는 위험에 처할 수 있다. 예언을 판단하라는 성경의 경고가 지켜지지 않는다. 따라서 예언의 실습 문제가 몬타너스에 의해 확연히 드러나게 됨.
4.교회에서 경각심을 갖게 되어 성경 말씀에 더 치중하게 됨. 당시에 신약 성경이 있었지만, 범위(27권)가 확정이 되지 않음. 후에 정경이 확정되면서 예언자가 필요없게 되어 교회로부터 예언이 사라짐.

* 은사주의
- 은사(charisma)란 말의 오해.
- 은사란 성령께서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각 교인들에게 나누어주는 선물(고전14). 은사가 없는 교인은 문제가 있고, 은사가 없는 교회는 성령이 안 계시다.
- 은사란 무엇인가: 섬김, 사랑, 가르침… 그 외에 방언, 예언.
- 올바른 방언과 예언 자체는 잘만 사용하면 좋은 것이다.
- 은사주의란 방언과 예언을 특별히 강조하고 우대하여 다른 은사가 퇴색되거나 무시되는 것.
- 이단: 죄 사함을 통한 구원의 충분함을 무시하고, 구원의 표징으로서 방언을 받아야 한다는 것 기독교의 근본교리인 이신칭의론을 거부하는 것.
- 은사주의는 방언과 예언을 성경에 규정한 대로 사용하지 않음: 방언을 해석자 없이 공개적으로 사용하는 것. 비신자가 있는 곳에서는 사용 금지. 방언을 하면 반드시 두 명의 해석자에게 검증을 받을 것(해석자가 방언을 동시에 듣고 격리된 곳에서 해석을 할 것)

* 은사주의의 문제점:
1.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의 중심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초점이다. 우리의 모든 관심사가 여기에 집중되어야 한다.
2.예언을 하나님 말씀 위에 둔다. 주의 종의 예언은 판단을 받으려하지 않음. 여과 없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람. 예언은 항상 하나님 말씀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 교회에서는 실제로 많은 더러운 영들이 역사하고 있다. 교회에 말씀의 지배를 받지 않는 무엇이 있고 이것이 제도적으로 보장이 되어 있다면, 그곳은 이미 주님의 교회가 아니다 주님 종의 말씀, 방향…
3.오직 예수가 거부됨. 그들에게는 예수님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4.교회의 토착화: 교회가 문화와 재래종교를 이기지 못하고 그것들과 혼합됨. 서양에도 occultism, esoterism의 전통이 상당히 강함. 이것은 한국의 문제만이 아님.

* 생각해 볼 점
·몬타너스 주의는 제도화되고, 도덕적으로 느슨해지고 열심이 식은 당시 교회에 대한 개혁운동이다.
·이러한 개혁운동의 선구자격인 몬타너스는 자신이 보혜사로 선언함으로써 개혁운동으로 간주되지 않고 이단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당시에 개혁을 지향한 많은 교회들이 몬타너스 주의로 분류되어 가톨릭 교회와 분리가 된 것은 애석한 일이다.
·이들은 제도화되어가는 교회에 성령의 역할을 강조한 것은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그 운동이 지나치게 되어 환상과, 예언, 입신을 강조함으로써 이러한 현상이 이방종교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구분을 할 수 없게되어 정죄를 받게 되었다 은사가 올바로 사용되지 못했다.
·다행히도 많은 사람이 후에 교회로 다시 들어왔다. 이단에 대해서는 끊임없는 경계와 계몽이 필요하고 이단을 회개시켜 교회로 데려오도록 힘써야 한다.

VIII. 영지주의에 대한 대항

교회는 영지주의와 마르키온주의와의 싸우는 과정에서 교회의 장래를 결정짓는 세 가지 중요한 일들이 촉진되었다. 이로써 교회는 확고한 형태를 갖추어 발전하게 되었다. 이 세 가지는: 정경의 형성, regula fidei 형성, 독재비숍제도의 탄생이다.

 

1. 신약정경 형성
(교회가 신약성경이 어떻게 해서 결정을 하게 되었는지를 아는 것을 중요한 일이다)

* 교회와 성경

- 가톨릭 주장: 교회(교회를 대표하는 공의회)가 성경을 결정하였다. 교회는 성경보다 앞선다. 교회는 성경의 내용을 해석하고 결정할 최종적인 권위가 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이러한 권능을 주셨다. 역사적으로는 이것이 사실이다. 교회가 신약을 27권으로 결정함.
- 문제: 하나님의 말씀이 죄인의 생각에 따라 결정됨.
- 신교: 성경이 교회를 결정하였다: 엡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움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돌이 되셨느니라“ 성경의 말씀에 따라서 교회가 세워지게 됨.
- 칼빈: „성경이 없었더라면 교회는 세워질 수가 없었다“
- 그렇다면 성경은 교회가 결정하기 이전에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것이다. 교회는 많은 어려움과 여러 경로를 통해 이것을 확정한 것. 따라서 교회가 성경을 확정했다고 해서 그 이전에는 성경이 없었다고 해서는 안 된다.
- 교회가 정경을 확인한 것은 비록 4세기지만 초대교회때부터 신약이 있었다.
- 이미 복음서들과 바울 서신은 교회 예배시에 읽히고 하나님 말씀으로 존중되었다.
- 속사도 교부들의 글들도 권위가 있는 것으로 인정을 받았지만 이것은 국지적이었고(주로 그 문서가 발생한 지역), 그것은 사도들의 글과 동등한 권위를 갖지 않았다.
- 수많은 이단문서, 사도 이름으로 쓰인 모조품들도 국지적으로 사용된 곳이 있었으나, 주축이 되는 교회에서는 사도들의 전통(사도들의 가르침, 글)이 고수되었다.


* 사도들의 글들이 신속하게 퍼짐

- 살전2;13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사도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전하는 증인이다. 그들의 증언은 하나님의 말씀이다49)
- 살전5:27: „내가 주를 힘입어 너희를 명하노니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들리라“. 사도들이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권위적으로 말함.
- 벧후3:15-16: 베드로는 바울 서신의 권위를 인정함.
- 요한복음은 95년경에 쓰여서 매우 신속하게 보급됨. 125년 이전에 쓰인 P52가 이집트에서 우연히 발견됨. 이것은 복음서가 쓰인 즉시 필사되어 다른 교회로 전파된 것을 알 수 있음.
- 속사도 교부들이 사도들의 서신을 성경으로 인정하고 그것이 „graphae50)“란 용어를 사용함. 이것은 구약성경을 일컬을 때 사용하는 말.
- 교회에서는 바울 서신을 모음.


* 저스틴의 증거

- 150년경 소아시아에서 교회 예배 때 복음서가 읽히고 있었다고 함(I,67)
- 마17:13을 인용할 때(대화 49) „기록된 바“라는 표현을 사용(원래는 단지 구약을 인용할 때만 사용하는 말)


* 이레네우스

-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 주인과 같으니라“(마13:52). 이 말을 인용하면서 옛것은 구약, 새것은 신약이라고 해석을 함. 이로써 신약(new testament)라는 말이 탄생됨. 신약이 구약과 동일한 성경이라는 말이 확실하게 표현됨.
- 폴리갑의 제자. 모든 교회에서 4복음서가 읽히고 있다고 기술함: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마르키온은 단지 축소된 누가복음만을 인정한다(교회에서 다른 복음서들이 읽히고 있음을 전제함). 발렌티안의 무리는 자신들이 집필한 글들을 사용하여 더 많은 복음서를 가지고 있다고 자랑한다“ (adv. Haer. III,11)
- 그는 폴리갑, 파피아스로부터 직접 전해 들은 것을 기술함.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설립할 때, 마태는 히브리어로 히브리 사람들을 위해 복음서를 기술하였다. 이들이 간 뒤에(죽은 뒤에) 베드로의 제자며 통역을 맡았던 마가가 우리를 위해 그의 설교를 기록했다. 이와 비슷하게 바울의 동행자였던 누가도 그에 의해 전파되었던 복음서를 기술하였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제자이며 그의 가슴에 기대었던 요한은 그가 에베소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에 복음서를 기술했다(III.1)“
복음서 집필 순서와 시기를 알려줌: 마태, 마가, 누가, 요한51).

-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사도들에 의해 전 세계로 전파된 전승은 진리를 보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가 교회에서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사도들에 의해 각 교회에 임명된 비숍의 이름과 오늘날까지도 그들 후계자들의 이름을 열거할 수가 있다“(III.3).
- 180년경에 이레네우스가 성경으로 알고 있었던 것: 4복음서, 13 바울 서신, 사도행전, 베드로전서, 요한1,2서, 계시록 등 총 22개(누락된 것: 히브리서, 유다서, 벧후, 요3서, 야고보서)
- 터툴리안도 이레네우스와 같이 22개를 인정함.
- 이전부터 교회에서는 이러한 사도들의 글들이 수집, 보관되고 있었음.
- 속사도의 글들(클레멘스1서, 디다케, 폴리갑, 이그나티우스 서신, 헤르마스 목자)도 수집, 보관되었으나, 사도들의 서신과는 달리 취급됨(폴리갑, 이그나티우스도 자신들의 서신에서 사도들의 권위를 인정함).

- 2세기 많은 영지주의 문서(여러 복음서, 사도행전, 묵시록)가 교회로 들어옴. 사도의 이름으로 저술된 책들도 많이 있었다(도마 복음, 베드로 계시록).
- 영지주의자들이 보편교회에서 사용하는 문서 이외에 자신들이 집필한 여러 문서들을 합쳐서 정경(canon)을 만듦. 특히 마르키온은 나름대로 정경을 확정함. 따라서 교회는 신자들에게 어떤 것이 정경인지를 확실하게 알려주어야 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 그렇다고 해서 이단들 때문에 정경이 형성된 것은 아니다. 원래 있었던 것(하나님으로 부터 주어진 것)을 분명히 밝히고 아닌 것을 교회에서 솎아내는 작업을 한 것이다.
- 정경형성이 촉진되면서 예언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당시 예언은 하나님 말씀으로 간주되어, 성경과 대등한 계시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러한 잘못된 관행이 정경형성 촉진으로 말미암아 줄어들었으며 하나님 말씀을 성경에 국한시키게 되었다.


* 무라토리 단편

- 18세기에 무라토리라는 사람이 약 200년경 라틴어로 쓰인 문서를 발견. 이레네우스와 터툴리안이 정경으로 생각한 리스트와 일치하나 Odem Salomos(영지주의 문서)가 추가됨.
- 교회는 발렌틴(영지주의), 마르키온의 책들은 거부한다고 함. 그러나 Odem Salomos를 영지주의 문서로 판별하지 못한 것으로 보아서 영지주의가 얼마나 교묘하게 교회로 파고들어 왔는지를 알 수 있음.
- 헤르마스 목자는 로마의 비숍 피우스의 형제가 저술한 것이므로 읽어도 좋지만 성경으로는 간주할 수가 없다고 함. 왜냐하면
- 선지자와 사도들의 수는 이미 확정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훌륭한 문서가 있을지라도 성서로는 인정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 180/ 200년 당시의 로마교회 상황을 엿볼 수 있음.

 

* 오리겐과 성서

- 오리겐은 3세기의 대학자이다. 신약을 그리스어로 완전히 외움. 그는 당시 제국에 있는 교회들을 다니면서 교사의 역할을 함. 따라서 당시 여러교회들의 사정을 잘 알고 있음. 그가 당시의 교회에서 사용되는 문서들을 세 가지로 분류함.
·Homologumena: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문서.
·부분적으로 의심받는 문서
·Pseude: 가짜들. 애굽복음, 비실리데스복음, 마티아스복음, 도마복음…


* 아타나시우스의 부활절 서신(목회서신) 367

- 그는 27권을 정경으로 명칭함.
- 동방에서는 이것으로 정경 확정.
- 서방에서는 382에 로마의 공의회에서 다마수스 비숍이 이것을 인정함.
- 그러나 정경 결정이 공의회에서 완결된 것은 아니었다. 몇 개의 서신들에는 시비가 있었음.


* 문제가 된 서신들

- 야고보서, 히브리서, 요한서신(1,2,3서), 유다서, 베드로후서, 계시록 모두 8개는 완전히 빛을 보지 못함. 비숍에 따라서 인정을 받음.
- 처음부터 분명했던 것: 4복음서, 13개 바울 서신, 사도행전, 베드로전서. 모두 19개.
- 27권 모두 정경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교부와 비숍들이 그 글들의 내적인 증거와 권위를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 신앙고백문- Regula fidei

* 교회가 성경 외에 신앙고백이 필요했던 이유.

1. 제2세기에 각종 이단이 같은 성서를 사용하며 같은 하나님, 예수님, 구원, 부활의 명칭을 사용함(오늘날과 같은 상황). 여기에서 해석학의 문제가 등장.
- 따라서 매우 짧은 문장들로, 이단과 구별되며 성서의 가장 기본 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고백서를 작성함.
- „로마의 세례 고백“에서 출발함.
- 이 고백은 후에 Kanon tes Pisteos(믿음의 자, 척도), 라틴어로는 Regula fidei(신앙규범)로 불림.
- 니케아 공회 이후에 이단과 구분하고자 부정적 표현도 들어옴 (우리는 …을 믿지 않는다)
- 이것이 „교리“의 시작이다.

2. 신앙고백이 형성된 또 하나의 이유는 기독교 신앙이 항상 (사람들 앞에서) 고백하는 신앙이기 때문이다.
- 가장 짧은 신앙고백: „Kyrios Jesous“ „예수님은 주시다“. 당시 이 말 한마디로 죽음(순교)과 삶이 결정됨.
- 롬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 마10: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 딤전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선한 증언이란 특정한 형식으로 형성된 문구가 아니라, 말과 행동을 포함한 삶에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였다는 의미이다.
- 신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예수님 당시에도 이 고백은 성전의 아침, 저녁 제사 때 반복됨.


* 신앙고백문의 형성

- 신앙고백은 주로 세례를 받을 때 사용함. 먼저 충분하게 교육을 시키고 최종적으로 신앙고백을 시키고 세례를 줌.
- 약 140년경에 Romanum(고대 로마 신조)이 형성됨. 이것은 로마교회의 세례 시에 하는 고백이다.
- 이것이 다른 교회에서는 구속력 있는 신앙고백문으로서의 의미를 갖게 됨.
- 이것이 사도신경의 전신이 됨. 이곳에 오늘날 사도신경(Apostolicum)의 내용이 거의 다 들어가 있음.
- 4,5세기에 사도신경으로 확립됨.

Romanum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
또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으며,
본디오 빌라도에게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장사되었으며,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일어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입니다.
또 성령을 믿사오며,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을 믿으며,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


3. 독재 비숍제의 탄생

* 초대교회부터 이그나티우스 전까지 (약70-110)

- 초대교회에서는 모든 신자가 형제요, 자매요, 사제이다(벧전2:9; 엡4:12이하) 모든 신자가 사제라는 말은 사제가 필요가 없다는 말, 즉 사제라는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 그럼에도 지도자는 있었다: 사도, 예언자, 장로, 집사…
- 에베소 교회(행20:28), 빌립보 교회(1;1)에 지도자로서 몇 명의 비숍들이 있었다. 성도 서로의 서열은 없다 복수지도 체제.
- 비숍(그리스적 표현) 혹은 장로(유대기독교)들은 말씀과 건전한 가르침을 잘 지키라고 부탁받음(디도서). 이 가르침 위에서 교회가 성장을 해야 함.
- 이 말씀과 가르침은 사도와 예언자들에 의하여 주어짐(엡2:20, 마16:18).
- 예언이란 주로 주어진 말씀을 상황에 맞게 적용시키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언은 없다(계22:18) 누구나 말씀의 지도를 받음.
- 성경 전체에서 주어진 말씀을 잘 붙들고 사는 것이 매우 강조됨(딤전5:17).
- 클레멘스 전서(95년경), 디다케(14장)에서도 여러 명의 비숍들이 계급의 차이 없이 인도하는 것을 전제로 함.

- 이그나티우스(110): 비숍, 장로, 집사직의 구분을 분명히 밝힘. 비숍은 교회의 최고 지도자이며, 더 이상 형제에 속하지 않는다. „비숍이 있는 곳에 … 교회가 있다. … 비숍에게 알리지 않고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은 사단에 속한 자다“ 이는 그가 처음으로 구분한 것이 아니고, 소아시아에서는 이미 이러한 구분이 되어 있었다.
- 이러한 독재 비숍체제의 위험성은?
·지도자는 자신을 말씀 위에 둔다.
·신자들이 말씀의 지도를 받는 것을 막는다. 모든 신자는 스스로 판단을 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 장점은 신자를 이단의 침입으로부터 보호.


* 이그나티우스부터 가톨릭의 비숍교회로 발전하는 과정

비숍의 기념이 바뀜: 비숍은 누구인가?

1. 구원의 물품을 관리하는 사제: 성찬식은 밀교의 영향을 받아 제식이 됨(성찬 자체가 능력이 있는 것으로52)). 디다케에서는 아직 성찬이 „영적인 제사“임. 이그나티우스에 와서는 성찬식이 죽음에 대한 치료제로 이해됨. 성찬이 물화가 되었으므로 이 구원의 물품을 올바로 관리하는 사람이 필요함 사제제도가 요청됨. 이것이 후에 성사(聖事)주의 교리53)로 발전함.

2. 진리의 수호자 - 사도적 계승: 사도나 사도의 제자들(디모데, 디도)이 안수를 통해 임명된 비숍들이, 이단들과의 대항에서 교리의 순수성을 보증하는 직책이 되었다54). 이러한 „사도적 계승“은 역사적으로 또한 영적으로 „진리를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렇게 임명된 비숍은 진리의 은사(charisma)를 가지고 있다고 간주됨. 이레네우스에 의하면:

„사도들에 의해 전 세계로 전파된 전승은 진리를 보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가 각 교회에서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사도들에 의해 각 교회에 임명된 비숍과 오늘날까지도 그들 후계자들의 명단을 제시할 수가 있다. 그들은 그들(영지주의자)의 망상과 미신을 가르친 적이 없고 들어본 적도 없다“(III.3).

그는 베드로부터 시작해 12 비숍들의 리스트를 예로 들고 자신의 계보도 들었다: 예수 그리스도 – 사도 요한 – 폴리갑 – 이레네우스.
이러한 승계사상은 독재(one man system)를 낳는 방편으로 악용이 될 수가 있다. 비숍은 진정한 가르침과 전승의 보증자이기 때문에 자신의 직위를 남용할 수가 있는 것이다.
진리는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는가? 즉 누구의 해석이 올바른 것인가? 이단과의 싸움에서 진리가 사도적 계승에 의해 승계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당시의 상황으로는, 특히 정경이 확립되지 않았던 시기에서는 충분히 납득할 만 하다.
그러나 진리를 승계한 사람들은 사도들 밖에 없다. 그리고 그 진리는 성경에 있다.
이 문제는 루터에 의해 해결이 되었다: „성서는 스스로 해석한다“. 즉 아무도 성서의 해석을 최종적으로 결정할 권위가 없다.

3. 인간의 본성:
·인간은 일반적으로 독립적이기를 원한다. 의존적이기를 싫어한다. 이 경향은 계몽주의 이후로 더 심화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서는 (거듭나지 않은) 인간은 늘 간접적이기를 원한다. 하나님 앞에 서서 그분과 대화하고 혼자서 책임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마리아 숭배. 주님 종의 지시에 따름). 항상 대리자를 찾는다. 중요한 결정에서 하나님의 대리자에게 맡긴다. 제사장이 모든 것을 책임지며, 신도는 제사장에게 순종하는 것으로 발전한다. 이것이 기독교의 종교화이다. 즉 기독교는 종교를 부인하나 잘못된 신자들에 의해 기독교가 종교로 전락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식과 성소, 제사장이 등장하게 되었다 (한국의 순복음 교회는 교회를 성전, 교회 본당을 지성소라고 한다)

4. 인간의 지배욕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 성경이 가장 금지하는 일인 독재를 하고자 하는 욕망이 독재 비숍제도를 강화시킴.


* 비숍교회와 대도시의 주교집단

- 비숍교회의 등장으로 교회 개념이 바뀌고 신앙생활도 바뀜: 몇 명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이 교회가 아니라(마18:20) 비숍이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
- 키프리안: 비숍은 교회 안에 있고 교회는 비숍안에 있다. 비숍과 함께 있지 않은 자는, 교회에만 있는 자가 아니다(서신66,8)
- 교회는 비숍의 지배 영역이 되고, 비숍은 교회의 심판자와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되었다. 교회의 문제, 질문에 있어서 최고의 권위자요, 대외적으로 책임자가 됨.
- 250년경에는 전 지역에 주교회의라는 공식 모임이 있었다. 주교 교구가 이미 조직됨. 한 명의 주교 아래에 다수의 교회와 사제가 있었음.
- 대도시(카르타고, 로마, 에베소, 안디옥, 알렉산드리아)를 둘러싸고 주교집단이 형성됨. 지역 비숍들이 대도시의 비숍을 수장으로 모심. 시간이 지남에 따라 대도시의 비숍은 대주교가 됨.
- 300년 이후에는 대도시들끼리 합쳐서 상대주교(Patriarch)가 생김: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 콘스탄티노플.


* 저성직과 고성직

- 교회의 직분에도 계급이 생김.
- 큰 교회의 비숍은 몇 개의 작은 교회를 관할한다55). 작은 교회에서는 장로가 성찬식을 거행한다56). 집사는 교회의 가난한 자에게 헌금을 나누어주고, 손님 접대함. 감옥이나 강제 노역소를 방문(생명을 무릅쓰고), 그들을 석방시켜 오기도 한다.
- 차차로 비숍, 장로(사제), 집사가 성직자가 됨. 그들은 정식 성직 수여식을 통하여 성직을 갖게 됨. 신약에서는 안수를 하게끔 되어 있으나, 지금은 예식을 거행함(예식이란 식 자체만으로 신비적인 효능이 있는 것을 말함) 교회의 타락!
- 250년경에 로마에서는 저성직자, 고성직자로 나눔.
- 저성직자: 5종류. 문지기(예배시 소란이 없도록 함), 강독자(에배시에 성경을 낭독하는 사람), 엑소시스트, 수종자(비숍이 입장할 때 양초를 들고 따라가는 사람), 보조집사.
- 고성직자:
·집사: 처음에는 봉사직만 하다가 차차로 신분이 상승되어 비숍의 측근이 됨(비숍의 귀와 입, 그리고 마음), 외진 교회에서는 설교도 하고 성찬식도 집행할 수 있음.
·사제: 장로라고도 함. 비숍의 동역자. 비숍과 함께 성사를 관리함.
·비숍: 사제장, 교회 대표. 사제를 서품함.
- 교회의 법과 권력 구조는 로마의 관직 제도를 그대로 모방함. 교회가 제도화 됨, 교회의 일꾼들도 관리가 됨.
- 신약의 교회에서는 머리는 단 한 분 예수님이다. 나머지는 모두 지체이다. 교회의 지도자는 복수로 구성된 지도자 그룹이다.

# 참교회의 상징: 원래는 하나님의 말씀(성경과 성령의 역사)과 성사가 있는 곳이 참 교회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외에도 특별한 형태의 조직이 참 교회의 상징이 됨.
# 공의회 등장: 주로 이단 문제로 비숍들이 모여서 결정하는 공의회가 등장함으로 교회위에 존재하는 기구가 등장. 개교회위에는 복종의 의무가 있는 어떠한 권위기관도 없어야 한다57) 교회의 중앙집권의 시초.


* 독신제

- 3세기 때부터는 미사(제사)가 거행되면서 고성직자들에게는 독신이 요구되기 시작함. 미사에서는 항상 성례식이 거행됨.
- 성경적 근거:
·고전7:1이하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마태19:12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 제사적 근거: 성관계를 한 사람은 제식을 거행할지라도 제식적 능력이 없다.
- 처음에는 성찬식을 거행하는 날(주일) 저녁에만 성관계 금지. 그러다가 3세기 부터 매일 성찬식이 거행되기 시작함. 따라서 성찬식을 거행하는 비숍과 사제에게는 요셉의 결혼58)(성관계 없는 결혼)이 요구됨. 4세기부터 결혼금지 이야기가 대두함.
- 그들이 초대교황이라고 주장하는 베드로부터 4세기 전까지의 교황들은 전부 결혼을 했는데, 그들의 독신의 주장으로 자신들의 신앙의 뿌리를 잘라내는 어리석음을 범함. 따라서 마리아도 성관계를 하지 않았다는 억지 주장이 나옴.


정리

교회는 이단과의 싸움에서 교회의 장래를 결정하는 세 가지가 촉진되었음을 살펴보았다. 이중에 특히 독재비숍제의 탄생은 교회의 후퇴를 가져왔다. 비숍제도는 늘 비숍이 하나님과 신자 사이의 중개자로 이해되고, 권력이 남용되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예배의 순서까지도 비숍에 의해 결정되어 예배 때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를 막아 예배의 경직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제도를 통해 교회는 비숍을 중심으로 효과적으로 이단에 대처하고, 교회의 생존을 위협하는 핍박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잇점도 있었다.
Regula fidei는 성경의 이단적 해석에 대항하여 작성된 최소의 간결한 신앙고백문이다. 그러나 단순한 고백문이 성경의 의미를 결정하는 열쇠가 됨으로서 성경위에 서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것은 앞으로 등장할 신조, 교리들이 성경위에 위치하게 되는, 즉 공의회의 결정이 실제로 성경의 해석을 결정하는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 시작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발전이 문제가 되는 것이며 고백문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교리를 절대시 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IX. 로마 교황제도의 형성사

* 베드로와 로마교회

- 로마 교황제도는 베드로가 로마의 초대 교황이었다는 주장에 하나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
- 베드로가 로마에서 네로에 의해 순교했다는 것은 교부들의 문서를 통해 어느 정도 증명이 됨.
- 그의 활동 영역은 먼저 예루살렘. 예루살렘 멸망 후에는 시리아 – 바빌론에 흩어진 유대인을 위해 주로 활동. 바빌론에 유대인의 포로가 많이 남아 있었음. (사도회의에서 바울은 이방인, 베드로는 유대인의 사도로 결정)
- 그가 왜 로마에 왔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로마에서 상주하면서 비숍이 되었다는 추측은 근거가 없다. 만약 그가 비숍이 되었더라면 먼저 예루살렘에서, 그리고 바빌론의 여러 교회에서 비숍이 되었을 것이다.


* 로마의 수위(首位)권 주장의 시초

- 교황의 수위권이란, 로마 비숍이 모든 다른 비숍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59).
- 시초부터 로마 교회는 명망이 높았다(제국의 수도, 황제와 고관 대작이 있는 곳, 돈과 권력…. 자연스러운 현상). 타도시의 가난한 교회에 재정적 지원을 많이 함.
- 이레네우스가 올바른 가르침을 결정하는 데에 있어서 로마의 우선권을 인정함. 로마 교회는 바울과 베드로에 의해 설립되었으므로60) 안전하고 신빙성 있는 전승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함. „모든 교회, 즉 모든 신자는 로마 비숍의 특별한 지위로 말미암아 로마 교회와 (가르침의 문제에도) 일치해야 한다. 왜냐하면 로마 교회에서는 사도들로부터 나온 전승이 보존되고 있기 때문이다“(adv. haer. III,3) - - 이레네우스는 로마의 비숍의 우위를 주장하지 않았다. 이것은 이단과의 싸움에서 올바른 전승, 정경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전승의 합법성을 말함이지 수위권의 문제는 아니었다.
- 70년에 예루살렘이 함락하자 로마가 기독교의 상징이 됨. 로마 교회는 두 명의 기둥 사도의 순교지로서 자랑을 삼음. 로마 비숍들은 그들의 의견을 다른 비숍들에 대해서 관철하는 경향이 있었음.
- 그러나 200년 까지는 로마 비숍이 큰 명망은 있었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음.

- 빅토르 로마 비숍: 190년경 소아시아 교회가 부활절 날짜61)를 자기들과 같이 할 것을 명령함.
- 부활절:
·소아시아 교회는 유대력으로 니산월 14일을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로 그대로 지킴. 그리고 돌아가신 날을 구속의 날로 정하여 부활절도 같은 날에 지킴. 따라서 부활절은 요일과 상관이 없음
·로마 교회와 다른 지역의 교회는 돌아가신 후 처음 돌아오는 일요일에 부활절을 경축함
- 소아시아에서 그의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자 빅토르가 소아시아 교회와 관계를 단절함. 그는 그 후에 여러 다른 비숍들로부터 꾸중을 들음. 이레네우스도 그의 권력 남용을 꾸중함.

- 칼리스투스(217-222, 칼릭스트)
·당시의 교회 관습: 교회에서는 대죄를 지은 자들, 즉 간음자, 살인자, 박해 때 예수님을 부인한 자들은 교회 내에서는 회색 옷을 입고 별도의 자리에 앉아 있었음. 성찬에서도 제외. 순교만이 유일하게 속죄하는 길.
·3세기에 대죄자들이 많아지자 새로운 제도를 도입: 오랜 기간동안 기도할 때만 무릎을 꿇고 있으면 되었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안수받은 후에 정식 교인으로 회복됨. 그 근거로는 모든 비숍들에게 베드로의 끊고 맺는 권능이 주어졌다고 주장. 로마의 수위권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음.
·터툴리안이 그의 주장을 맹 공격함: 마16:18은 베드로 개인에게만 적용된다고 함.
·히폴리투스62)도 그를 공격함.

- 스테판I(254-259)
·로마에서는 분파주의자들63)이 돌아올 경우에는 재 세례를 주지 않고 안수로 복권을 시킴.
·스테판이 키프리안(카르타고 비숍)에게 로마의 예를 따르라고 명령함. 키프리안이 비숍회의를 열어서 의논함. 여기서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자64) 스테판은 북아프리카 교회와 단교함.
·그의 주장: 로마는 더 좋은 전통을 가지고 있다. 마16:18의 말씀은 베드로에게 적용되며 그의 모든 후계자(로마 비숍)에게 적용된다.
·키프리안의 주된 생각: 교회의 일치는 비숍의 일치에서 주어진다. 교회는 비숍의 교회이다. 마16:18의 말씀65)은 교회의 일치를 강조하고자 베드로를 강조한 것이다. 베드로는 typus unitatis(일치의 유형)이다. 로마의 교회(로마의 비숍이 아닌)는 명예 수위권66)을 가진다. 자신도 로마의 비숍에 대등함을 강조.

* 교황제도 확립

- 342의 사르디카(소피아) 공회: (니케아 공의회에서 정죄 당해) 파면된 비숍은 „사도 베드로를 기념하고자“ 로마의 비숍에게 항소를 할 수가 있다.
- 400년 이후 이노센트I: 로마 교회의 항소법원의 권능은 사르디카 공의회의 결정에 의한 것이 아니고, 거룩한 베드로의 신비한(mystisch) 결합에 의해 항상 가져왔던 것이다.
- 레오I (Leo the Great. 440-461): 레오는 남프랑스 아를의 대주교 힐라리우스와의 논쟁에서 로마 비숍만이 갈리아 지방에 비숍을 세울 수 있다고 주장. 힐라리우스가 반발하자 황제의 칙령을 통해 관철함. 445년의 발렌티니안3세의 이 칙령은 로마 비숍이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교황이 됨을 선언한 것이었다. 따라서 레오는 황제의 힘을 빌려서 교황이 된 것이었다.
- 이것은 주교단 수위권(공의회 수위권)이 교황 수위권으로 넘어가는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 이로써 교황이 공의회보다 우위에 서게 되었다
- 교황 수위설은 1차 바티칸 공위회(1870)에서 교리로 승격됨. 이것은 교황무류설을 포함한다(교황이 ex cathedra – 권좌로부터 믿음과 윤리의 문제에 관하여 선포하는 것은 오류가 없다)
- 당시의 정치상황: 스페인쪽에서 아프리카로 넘어온 반달족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그간 막강했던 서방측 교회는 황폐화 되었으므로 갈리아 지방에서만 로마에 저항했기 때문에 로마 교회는 이 저항을 쉽게 꺾을 수 있었다

- 마16:18 해석: 종교개혁자들도 키프리안 처럼 예수님은 베드로를 대표로 해서 모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고 해석함.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베드로에게만 말씀하셨다. 베드로에게 특별한 위치를 주신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후계자로 삼은 것은 아니다. 이 베드로의 특별 역할은 오순절에 그의 설교로 말미암아 교회가 탄생한 것으로 이루어 졌다고 본다. 성경에는 그 이후에 베드로가 특별한 권한을 가졌다는 기록은 없다.

# 겔라시우스 교황: 492-496. 혼란한 정국을 틈타 주장함: 교황은 황제와 같은 위치에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교황이 황제 위에 있음을 주장. 황제는 교회앞에서 머리를 숙여야 한다. „내가 당신(황제)를 고발하는 것이 하나님이 당신을 고발하는 것보다 낫다“ („하나님에게 맞기 전에 차라리 목자에게 맞아라“) 동고트족을 등에 업고 그런 주장을 할 수가 있었다.

 


X. 고대교부: 이레네우스, 터툴리안, 키프리안

1. 이레네우스

* 2세기의 성서주의자

- 소아시아 출신. 젊었을 때 서머나 비숍 폴리갑의 제자.
- 일생 영지주의자들과 싸움.

- 변증가들과는 달리 성서를 가지고 변증함(성서를 해석하고 성서를 인용). 사변적이지 않고, 변증에 있어서 철학을 사용하지 않음. 오히려 철학적 사변을 혐오함. „플라톤이 …말했다“가 아니라 „성서에 …라고 쓰여져 있다“라는 방식으로 변론함. 오리겐의 저서에는 플라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 그는 성서해석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말을 함. 성경의 명확성과 충분성에 대해: „모든 성경은, 예언서들과 복음서들은, 완전히 명확하며 애매모호하지 않다. 그러므로 비록 모든 사람들이 성경을 믿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모든 사람에게 같은 방식으로 이해가 될 수가 있다“. 이미 루터 이전이 이 말을 함.

- 영지주의자들과의 싸움을 통해 기독교 교의학의 아버지가 됨.
- 영지주의자들의 사변적 체계에 대항하여 성서에 나타난 구속사의 사실들을 가지고 대답함. 그는 성서를 들어 모든 사변적 체계에 대항함.
- 그는 직접 사도들의 지도를 받은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들로부터 신약성서가 어떻게 탄생되었는지를 전해 들었다.


* 하나님이 로고스를 통해 구원을 완성하심

- 그의 글을 통해 그가 영지주의에 대항하여 어떻게 성서의 교의를 정리했는지 알 수 있다67).
- 구약을 그대로 인정함.
-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하나님은 한 분이다.
- 로고스와 성령은 하나님의 양손이다. 이들을 통해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다.
- 하나님은 그분들께 말씀하셨다: „우리의 형상에 따라 사람을 만들자68)“(창1:26)
- 죄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훼손되었다.
- 로고스가 육신이 되었다. 그리스도가 두 번째 아담이 되었다. 그는 새로운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
- 영지주의자는 예수님(진짜 인간)과 그리스도(천상의 존재)를 분리시킨다: 영은 육에 의해 더러워질 수가 없다.
- 따라서 이레네우스는 성육신을 강조함: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는 인간이 되셨다. - 그리스도는 두 번째 아담으로 완전한 인간이 되심으로 인간에게 다시 잃어버린 형상을 찾아 주셨다.

* 폴리갑과 이레네우스

- 그의 나이 추정은 그의 진술의 신빙성을 증명하기 위해 중요함. 그가 성경형성에 대한 매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 그는 젊어서 순교자 폴리갑이 비숍으로 있었던 서머나 근처에서 살았다.
- 그는 젊은 나이69)에 그를 보았다(그의 가르침을 들었다)고 한다.
- 177년에 리용의 장로 자격으로 몬타너스의 일로 로마에 가서 비숍에게 문서를 전해 줌.
- 리용에 돌아와서 순교한 비숍 포티누스의 후계자가 됨.
- 190에 로마의 비숍 빅토르에게 편지를 씀70).
- 그는 영지주의자 플로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드리안 황제가 소아시아를 방문했을때71) 플로린이 폴리갑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한 것을 보았으며 이것을 자신이 분명히 기억을 한다고 함.
- 그는 그의 저작에서 자주 그가 직접들은 사도의 제자들과 노인들에 대해 언급함. 그들중에 폴리갑과 파피아스는 이름을 들어 언급함.
- 그는 스스로 속사도 이후의 첫 세대에 속한다고 함.
- 따라서 그는 „115-190이후“의 사람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 그의 저작의 중요성

- 그는 4복음서, 특히 요한의 저작물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함. 그리고 초대교회의 중요한 정보를 제공함.
- 성서비평가들은 이레네우스가 폴리갑을 잘 알지 못했다는 하르낙의 주장72)을 근거로 이레네우스의 진술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이레네우스가 자신이 확인할 수 없는 여러사람들의 저술과 구전을 모아서 그것을 파피아스나 폴리갑으로부터 전해들은 것으로 꾸며서 편집을 했다고 함.
- 이레네우스는 4복음서와 요한계시록의 기원에 대해 사도들의 직제자들로 부터 직접들은 것을 진술함.

- 그는 사도 요한이 에베소에서 요한복음을 기록했고 파피아스와 폴리갑이 그의 가르침을 들었다고 함.
- 그렇다면 그가 젊은 나이에 폴리갑과 파피아스를 잘 알았으며, 이레네우스가 복음서의 기원에 대한 파피아스의 진술을 그대로 전승했다는 것이 신빙성이 있으므로, 복음서가 이레네우스가 주장하는 것보다 훨씬 이후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 기술되었다고 주장하는 성서비평은 기반을 잃는다 매우 중요한 사항이니 기억을 하고 있을 것. 성서비평가들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마가복음의 저작 시기는 70년 전후, 누가, 마태는 80년 이후로 본다. 요한복음의 경우는 2세기 중반으로 측정되었으나, P52의 발견(자료집 참조)으로 90년대의 저작시기가 신빙성이 생겼다.


* 사도적 진리를 강조

„사도들에 의해 전 세계로 전파된 전승은 진리를 보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가 각 교회에서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사도들에 의해 각 교회에 임명된 비숍과 오늘날까지도 그들 후계자들의 명단을 제시할 수가 있다. 그들은 그들(영지주의자)의 망상과 미신을 가르친 적이 없고 들어본 적도 없다“(III.3).

- 그는 베드로 후에 세워진 12명의 비숍의 이름과 연대를 들었다:
1. Linus(약64-76)
…………………...
…………………...
12. Eleutherus(약174-189)

- 폴리갑도 사도들로 부터 배운 것과 교회로부터 전승된 것을 그대로 가르쳤다.
- 폴리갑은 사도들에게만 배운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본 많은 사람과 교제를 가졌다. 그리고 그는 사도들에 의해 서머나의 비숍으로 직임 받았다.
- 우리는 젊은 나이에 폴리갑을 보았다. 그의 가르침은 아시아에 있는 모든 교회의 가르침과 그의 제자들의 가르침과도 일치한다.
- 그의 명성은 발렌틴, 마르키온과 그 외의 바보들의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고, 그의 증거는 그들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믿을 만 하다.

- 그가 로마 비숍의 이름을 열거한 것은 이단에 대해 복음의 진리가 올바로 승계되어 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다. 즉 이단은 이러한 승계가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다73).

* 사변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 천년왕국설74) 지지: 요한계시록을 꼭 붙듦(요한이 소아시에에서 활동함). 당시 소아시아에 몬타너스주의지들의 활동이 거세게 일어나자 일부에서 요한계시록을 교회에서 추방하고자 하자 그는 이에 적극적으로 반대함.
- 그는 성서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교회의 전통을 중요시함. 영지주의자들에게 교회가 그의 전승과 함께 통일성과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함. 이로써 고대 가톨릭(각 교회는 동일한 전승을 가지고 있으며, 특별한 분파 교회를 허용하지 않는 보편적 교회)의 기초를 놓음.
- 이것을 통해 그는 전승되어오는 계시된 가르침이 사변적 학문과 영지주의와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함.
- 이렇게 성경의 계시를 통한 성경의 구속사와 사변적 학문 사이를 확고하게 구분을 짓는 것은 교회의 생존을 위해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기독교는 혼합종교로 변하여 몰락했을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와 오리겐은 그들의 사변적 경향으로 말미암아 비 복음적인 경향이 많았다).
- 이레네우스는 소아시아와 로마교회의 교회전승을 대표함. 당시에 정경이 공식적으로 확립되지 않았을 때이므로 사도적 전승이 매우 중요했음. 이것이 나중 정경확증의 기초가 되었다.
- 그러나 이레네우스가 전승을 강조한 것은 가톨릭이 전승과 성경을 같은 위치에 놓는 것과는 다르다. 그는 성경이 확정되지 않았을 때에 교회가 사변에 의존하지 않고 전해 내려오는 확실한 가르침에 의존하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 그는 선교에도 관심이 많았다. 리용근처에 거주하는 켈트족에게 복음을 전파하고자 켈트 언어를 배움.


2. 터툴리안

- 그는 혜성처럼 등장한 당대까지로는 가장 큰 신학자이다. 그는 이레네우스만큼 성서적이지는 못하지만 조직신학에 큰 공헌을 한 천재적 신학자이다.
- 카르타고는 제국의 3,4위로 큰 도시. 인구 30만.
- 로마(이탈리아)사람들이 인구의 절반을 차지한 로마화 된 도시이다.
- 페르페투아가 순교한 곳. 교회가 상당히 활성화 된 곳. 곧 키프리안이 이곳에 등장한다.

* 교회의 변호사

- 매우 중요한 신학자. 카르타고(북아프리카) 출신. 그의 글을 통해 당시의 교회 상황을 알 수가 있다.
- 로마에서 변호사로서 활동. 185/190 개종 후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교회를 위해 활약함.
- 다혈질로서 열심이 충만함. 슬픈 얼굴. 논쟁을 좋아함. 그의 글들은 매우 확고함. 엄격, 양보가 없음. 적에 대한 고려가 없음.
- 207경에 몬타너스 주의에 빠짐75). 220년경 죽기 바로 전에 교회로 돌아옴.
- 3가지에 대항하여 싸움.
1.느슨해진 기독교
1.신자들을 옹호하고자 로마에 대항하여
2.이단, 특히 마르키온 주의


* 느슨해진 기독교를 질책함76)

- 극장에 반대하여: 기독교인이 극장을 방문하는 것 비판. 극장이란 연극공연장, 아레나, 서커스 등을 말한다. 여기에서는 이방정신과 부도덕이 지배하는 곳이다. 간음이 자주 소재로 등장. 나체춤. 수호신을 위한 행렬로 시작됨. 신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세77)를 잃지 말 것을 경고함.
- 자매들의 지나친 화장에 반대하여: 이교도와 같이 신자가 자신을 꾸미는 것을 비판. 당시 화장과 금발 염색이 유행함. 2세기 말에 박해가 완화되자 귀족 부인들이 교회에 들어오게 됨. 교회가 그들의 영향을 받아서 사치와 안락에 빠짐으로 기독교 윤리가 저하됨.
- 아내에게: 남편을 사별한 후에 재혼을 하지 말 것을 강권함. 불가피할 경우는 꼭 신자와 결혼할 것.
- 우상숭배에 대해서: 우상숭배와 관련된 직업을 버릴 것. 조각가, 은 세공자, 화가, 배우, 선생, 군인.
- 감옥에 갇혀 있는 순교자들에게:세베루스 박해 때 감옥에 갇힌 신자들을 위로함. 기쁜 마음으로 참고 견디라고 권면 함. „여러분은 위험한 감옥(세상)을 빠져 나와서 기도를 할 수 있는 조용한 장소에 있습니다“
- 회개에 대하여: 세례 후에는 단 한 번 죄 사함의 기회가 있을 수 있다. 터툴리안은 엄격한 윤리를 주장함. 카르타고에서 세베루스의 핍박 때에 적지않은 신자가 예수님을 부인함. 그러나 몬타너스주의자들이 오히려 잘 견딤. 그래서 자신도 207에 몬타너스주의자가 됨.
- 핍박시의 도주에 대해서: 몬타너스주의자가 된 후에 쓴 것. 그는 더 엄격해짐. 박해시에 도주하지 말 것을 권고. 박해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 그의 엄격한 태도는 당시의 많은 비숍들의 타협적인 태도에 반대하는 것이다. 로마의 비숍인 칼리스투스는 두 명의 아내를 가진 자를 성직에 임명했다고 함. 이러한 태도는 터툴리안에게는 가증한 일이었다.


* 국가와 이방인에 대항하는 문서

- Apologeticum (변증서)
·197. 매우 독창적인 기독 변증서. 로마의 위정자와 총독들에게 쓴 것.
·변증 내용: „기독인은 식인자다. 인간을 증오한다. 가족끼리 결혼한다“ 등의 오해에 대한 변증.
·다른 변증서와 다른 점은 가장된 겸손이나 아첨의 투는 찾을 수 없고 오히려 위정자들의 불법을 증명함.
·박해는 로마법에 반하는 것이다. 그의 어조는 요구를 넘어서서 위협의 수준에 이른다.
·신자가 당나귀를 숭배한다는 비난에 대해서: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이 말이 옳다고 간주하자.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 기독인들은 무수한 우상과 짐승을 숭배하는 이방인들 보다는 훨씬 낫다.
·그는 당당하게 반기독교적인 국가 정책이 실패할 것임을 위정자들에게 확신시킴:

„테베르강이 범람하여 재해를 당하거나, 나일강이 범람하지 않아서 농토가 비옥해지지 않거나, 가뭄이 들거나 지진이 일어나거나 기근이 들거나 전염병이 들게 되면 바로 사람들은 소리친다: 기독교도들을 사자 앞에 던져라!... 너희 잘난 총독들아! 너희는 기독교도들을 희생시킴으로써 계속해서 백성으로부터 인기를 끌라! 우리를 십자가에 달아 죽이고, 살육하고, 사형을 언도하고 갈아 죽여라 – 너희의 불의는 우리 무죄의 최상의 증거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러한 고통을 당하는 것을 허락하신다… 그러나 너희의 기발한 잔인함이 너희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너희는 그것을 통해 우리의 모임을 선전해주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너희로부터 능욕을 당할 때마다 우리의 숫자는 늘어난다: 그리스도인의 피는 씨앗과 같다“


* 거짓 교사들과의 싸움.

- 영혼에 대하여: 인간의 영혼은 플라톤 학파나 영지주의자들이 믿는 것처럼 선재78)하지 않다. 영혼은 피조물이며 육과 함께 피조된 것이다… 원죄도 유전되는 것이다.
- 거짓 교사에게 대항하는 항변: 기독교의 가르침은 사도들에게 – 단지 사도들에게만 위탁되었다. 그 이후로 이 보화는 교회의 소유로 되어 있다. 거짓 교사는 그들의 기독교의 전승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을 할 수가 없다… 성경은 보편 교회의 소유물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성경을 사용할 권리가 없다.
* 터툴리안은 그보다 바로 전에 이레네우스가 언급하였던 바와 같이 성경 외에 구전, 특히 신앙규범(regula fidei)을 언급한다. 이러한 생각을 본받아 가톨릭은 구전을 성서의 전통과 같은 위치에 둔다. 그러나 전통은 정경이 확립되면서 반드시 사라져야 할 것이다.
- 마르키온에 대항하여: 5권이나 되는 방대한 저작. 마르키온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가 있다. 이 책은 마르키온에 대한 정보를 가장 많이 제공한다.

* 언어의 창조자

- 라틴어로 많은 교회(신학)용어를 창조함: 교회 신학 체계를 세우는 데 크게 공헌 함.
disciplina: 권징
ius ecclesiae: 교회법
sacramentum: (세례 시의) 맹세
meritum: 공적
substantia(희hypostasis): 본질
persona(희prosopon): person
trinitas: 삼위일체

* 신학자

- 삼위일체론
·Adversus praxeam (프락세아에 대항하여): 프락세아의 양식론에 대항하는 논증을 통해 삼위일체 교리의 기초를 놓게 됨.
·양식론: 성부, 성자, 성령은 한 하나님의 3 modus(표현 양식)이다. 하나님은 얼굴이 3개이다. 구약에서는 아버지도, 신약에서는 아들로, 성령강림절 이후로는 성령의 얼굴로 나타나신다. 따라서 가현설이라고도 함.
·양식론의 문제는 삼위의 구분을 없앤 것이다. 결국 성부수난설로 귀착된다(십자가 상에서 하나님이 고난을 받으심) 그는 양식론을 효과적으로 비판함.
·그의 삼위일체론: tres personae, una substantia: 3 persons, 1 본질. 이것은 381년콘스탄티노플에서 받아들인 것과 같다
·경륜적 삼위일체를 주장함: 본질이 셋이 아니라 양식이 셋, 능력이 셋이 아니라 표현이 셋이다. 구속사의 과정에서 3위가 현시됨.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있으라! 하실때 아들은 수원지에서 시냇물이 나오듯이 아들이 나타나셨다. 교회가 형성되면서 성령이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통하여 나타나셨다. 종말이 오면 시냇물이 다시 수원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스도가 왕국을 아버지께로 되돌려 드림. 하나님은 다시 만유 안에 계신다 (고전15:26이하).

서방교회에서 죄와 은혜론이 발달한 이유는 터툴리안의 공헌이 크다. 그는 원죄론과 유사한 가르침을 펴고, 죄, 자유의지, 은혜에 대해 가르침.
- 죄론
·인간은 선과 악의 혼합체이다. 영혼은 원래 선한 것이다. 문제는 육적인 육체에 있다.
·유아들은 죄가 없다. 그들은 세례를 줄 필요가 없다.
·문제점: 그는 영과 육을 분리해서 생각함. 영과 육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구분만 되는 것이다.

- 자유의지론
- 죄인에게도 자유의지가 있다. 세례 시에 이전의 죄가 모두 사해진다.
- 세례 후에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며, 하나님께서도 희생(merita 공적)을 기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 희생을 보상하신다.
- 가장 큰 희생은 순교이며 순교는 즉각적으로 낙원에 들어가는 것을 보장한다.

- 495에 젤라시오(겔라시우스) 칙령에 의해 그의 저작은 이단으로 정죄 됨 그의 신학은 문제는 있지만 이단은 아니다. 교회에 큰 공헌을 함.
- 그의 신학은 문제가 있는 부분도 많이 있지만, 기독교적인 교리를 절묘한 언어로 표현하여 신학을 과학으로서의 기초를 놓았다. 키프리안, 어거스틴이 그의 저서를 읽음.


3. 키프리안 (사이프리안)
-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 – „Salus extra ecclesiam non est“

* 생애

- 200년 초에 북아프리카에서 좋은 가정에서 탄생.
- 법률가, 웅변가.
- 245에 세례.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터툴리안의 서적을 연구함.
- 248에 비숍이 됨.

* 그는 왜 신자가 되었는가?
(„ad donatum“: 도나투스에게)

1.외적인 국가 위기 (전쟁)
2.내적인 국가 위기: 공공생활에서나 개인생활에서의 도덕적 퇴폐 (예를 들어 검투사 싸움, 관중들의 부도덕…). 터툴리안도 이것을 공격함.
3.자신의 개인적 위기: 명망을 쌓았지만 영생이 없음을 깨달음.
4.그러나 기독교는 새로운 가치관, 윤리적인 값진 삶, 영생을 제공함.
이것은 당시 지성인들의 고민을 보여준다: 데카당스를 느끼고 불안해함.

* 그의 관심사

1. 교인들의 실제적인 신자로서의 삶.
·적선을 할 것. 목표는 무소유.
·인내와 관용.
·시기와 질투를 멀리할 것.
·이생의 것을 포기할 것.
2. 교회조직 강화
·교회법 제정.
·교인들 유대 강화


* 그는 삯군 목자인가?

- 250년 데키우스 박해 때 로마 비숍 파비안79)이 교수형 당함.
- 카르타고 시민들이 „키프리안을 교수형 시켜라!“라고 외치자 그는 피신함. 15개월동안 은신처에서 교회를 인도함.
- 비숍 파비안을 잃은 로마 장로들은 노바시안이 주동이 되어 키프리안을 삯군 목자라고 비난함.
- 그러나 그는 위기의 순간에 자신이 살아서 지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함. 실제로 교회가 갑작스러운 핍박에 준비가 안 됨.
- 그는 투옥된 신자들을 말씀으로 위로함.
- 그를 비난하는 로마교인들에게는 마10:23을 인용하여 대항함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그는 몸안 교회에 없을 뿐이지 영으로는 교회에 있다고 함.
- 그는 비겁자로서가 아니고 양심에 따라 이러한 어려운 결정을 한 것이다.
- 로마 교회에서 온 그를 비난하는 편지가 그에게 충격을 주어서 두 번째 핍박에는 기꺼이 순교함.

* 순교자, 고백자, 배교자 문제

- 250년의 카르타고 상황:
·당시에 교인들 수가 많아서 고백자와 배교자들의 수도 매우 많았다.
·배교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배교식의 거행을 기다려야할 정도. 성직자들과 인근 교회의 비숍들까지도 이들의 명단에 있었음.
- 251초 황제가 고트족과 전투하러 전장에 나갔을 때에 키프리안이 위험을 무릅쓰고 교회의 혼란을 해결하고자 교회로 돌아옴.

- 큰 위기에 처한 교회: 이미 다음 박해의 기미가 보이는 상황에서 그가 해결해야할 과제는 3 그룹의 문제성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해결책을 마련해 주어야 했다.
1.황제의 상에 제사를 지낸 후에 순교자나 고백자들로부터 추천서를 받아온 사람.
2.뇌물을 주고 제사 증명서(Libellus)를 구매한 사람들(그중 반대 비숍 포르투나투스도 있었음)
3.제사는 지내지 않았지만 지낼까 말까 고민을 한 사람들.
-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두 개의 문서를 집필함. „넘어진 자들에 대하여“, „보편 교회의 일치에 대해서“. 한 부를 로마교회에 보냄.
- 비숍회의에서 키프리안은 카르타고 비숍으로 재신임을 받음.

- 비숍회의 결정:
1.libellus를 구매한 사람은 사면.
2.추천서를 받아온 사람들은 회개의 의자에 앉혀서 예배를 보게 함.
3.libellus 구매 성직자는 용서는 하지만 성직을 잃음.
(- 253 두 번째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회개를 한 모든 사람들에게 사면을 함)
- 순교자나 고백자에게 추천서를 쓸 권리를 인정하지 않음.
- 고민을 한 사람들은 모범으로 인정함.
- 키프리안이 교회를 위해 잠시 핍박을 피한 것은 이해해 줄 만하다. 그러나 그에 대한 비판도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 하나님은 아버지며, 교회는 어머니이다

- 여기에서 교회란 비숍의 밑에 들어가 있는 공식적인 교회를 말한다. 즉 몇 명의 형제들이 모여서 독립교회를 구성했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는 의미이다(마18:20). 물론 키프리안의 생각은 성서적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의 중요성에 대해 긍정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 이 말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는 당시의 상황이다.
- 키프리안은 그의 대적자들이 마18:20을 근거로 항의를 했을 때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만약 그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과 분리되어 있다면80), 그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일 수가 있겠는가?“ „노아 방주 외의 사람들은 모두 멸망했다“.

- 키프리안이 염려한대로 당시의 가장 큰 문제는, 기꺼이 황제숭배를 한 사람들이 아무 제제없이 다시 교회로 들어오는 것을 막았을 때에 그들이 나름대로 독립적인 교회를 구성하려고 했던 것. „교회를 어머니로 갖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질 수 없다“(„교회외에서는 구원이 없다“)라는 말은 여기에 대한 대답이다. 이들의 영입문제를 둘러싸고 교회분열의 조짐을 보임.
- 따라서 키프리안은 „교회는 비숍교회“라는 것을 주장하였고, 신자는 비숍과 비숍회의의 주장을 따라야 함을 역설했다. 이로써 그는 초기 기톨릭적인 교회의 개념을 확립했다. 그러나 그는 교황을 인정하지 않고 주교주의를 주장했다.

- 그는 또한 변절자없는 순수한 교회를 지향하여 분파를 만든 노바시안81)(파)을 정죄함: 노바시안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그의 어머니(공교회)를 떠나는 불경을 저지르면서, 교회의 몸을 자르고 찟어버리려고 하기 때문에 교회와는 더 이상 관계를 가질 수 없다. … 그들은 굥교회(가톨릭)의 일치에 반해서… 밀(곡식) 사이에는 잡초가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교회에서 분리할 것이 아니라, 교회 내에서 밀이 되기를 힘써야 하며, 큰 집에서 금, 은으로 만든 그릇이 되기를 애써야 한다. … 교회 안에 없는 이 사람(노바시안)은 신자가 아니다… 교회는 하나밖에 없다…. 그리고 한 명의 비숍밖에 없다(노바시안이 로마에서 교회를 세워 비숍이 됨)

- 그의 주장은 신약의 가르침을 볼 때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처한 상황에서만 본다면 충분히 이해할 만 하다. 우리는 교회사에서 우리 선배들의 행동과 주장을 판단할 때에 늘 „삶의 자리“를 고려해야 하며 그들의 주장을 시대착오적으로 비판(현대의 상황에서 과거를 비판)해서는 안 된다. 또한 그의 말대로 마태복음의 말씀에 따라 2-3명이 모여서 교회를 구성한다고 해서 무조건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여러 측면에서 그 정당성이 인정되어야 한다.
-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교부들과 종교개혁자들이 한 많은 실수를 정당하게 평가해야 한다.

- 숙제: 이그나티우스와 키프리안의 교회관(„주교가 있는 것에 교회가 있다“)은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는가?


* 순교자 키프리안

- 258년, 즉 7년 이상 교회의 화합을 위해 수고한 뒤 순교함.
- 그가 교회에 돌아와서 한 일, 서신교환을 통해 볼 때, 그는 결코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자 피신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때가 되어 기꺼이 순교함.
- 그가 사형장으로 갈 때 수많은 신자와 그를 존경하는 이방인까지도 그를 따라옴.


# 고대 교부들에 대한 평가

이레네우스, 터툴리안, 키프리안은 체계적인 교의학을 저술하지 않았다. 그들은 특히 영지주의와 이교와의 투쟁에서 최초로 기본적인 신학적 질문과 교회법에 대해 깊이 골몰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것으로 말미암아 공교회의 기초를 놓은 사람이다.

1. 그들의 큰 업적
1.하나님은 한 분, 창조주와 구속주는 같은 분이다 큰 수확. 성령의 문제, 그리스도의 두 성질의 문제는 나중에 등장함.
2.구약도 성경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구약을 성경에서 제거하고자 했음: 마르키온)
3.하나님은 세상을 무로부터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신 플라톤주의, 영지주의의 유출설 반대. 스토아의 범신론 반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를 분명히 구분함)
4.로고스인 그리스도는 육신이 되었다 (영지주의의 가현설)
5.영혼뿐 아니라 몸도 부활한다 (영지주의, 밀교).
이렇게 해서 그들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문제를 해결하였다.

2. 문제점
1. 구원은 보이는 기관으로서의 보편교회 내에서만 있다. 이 교회는 비숍의 초석 위에 서 있다.
이레네우스: 비숍은 사도의 계승자82)로서 진리를 전수받은 자들이다.
키프리안: 교회 내에서만 믿음의 진리가 있다: 성서, 고백, 구전.
이것이 이후에 교리화 된 것은 비극적인 일이다83). 그렇다면 분파주의자들을 강제로 교회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이론이 성립할 수 있다(후에 어거스틴).

2. 세례는 거듭남과 죄 사함을 위한 목욕이며, 세례를 통해 성령84)을 선물로 받는다 문제는 세례라는 의식 자체에 신비한 능력이 있다고 하는 것. 가톨릭의 세례관. 원래 성령은 세례와 관계없이 받는다.
3. 공적사상: 금식, 독신, 순교는 공적이다(이그나티우스때부터)

 


XI. 과학(철학)과 믿음

1. 클레멘스와 교리문답 학교

- 당시(1,2세기)의 대학은 변론술학교였다(레토릭). 논리적이고 우아하게 말하는 사람이 이상적인 인격자라는 생각. 변론술은 학문의 여왕. 웅변학교를 졸업해야 교사, 변호사, 장교, 관리가 될 수 있었음.
- 변론술학교에 필적하는 학교가 교리문답 학교였다. 즉 오늘날의 신학대학. 로마, 가이사랴, 알렉산드리아. 그중에 알렉산드리아의 교리문답 학교가 가장 유명함.
- 알렉산드리아는 상업의 중심지일 뿐 아니라 제국의 학문의 중심지였다. 희랍철학, 고대 이집트 사상, 동방종교, 유대교(필로가 활동했던 곳)등이 서로 영향을 준 곳. 이곳에서 70인역이 발생하였다.
- 180에 세워짐. 190-202 사이에 클레멘스가 교장을 함(세베루스 황제 핍박시 피난).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교의 철학자 출신인 그가 절충주의자가 된 것은 납득할 만한 일이다.


* 클레멘스의 저작

1. 이교도들에 대한 경고
- 여러 가지의 철학과 종교가 서로 경쟁하는 분위기에서 클레멘트는 „우리것이 최고다!“라는 것을 주장함. 그는 실제로 기독교가 최고의 종교요 철학임을 확신하고 있었음.
-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을 장려하는 선전문: „너희의 신화와 밀교로부터 떠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되신 진정한 로고스에게로 돌아오라„그리스도에 귀를 기울여보라! 하나님의 새로운 노래에 귀를 기울이라!“
- 그리스도-로고스만이 모든 이방신들 보다 우월하다. 철학자들은 알고 보면 모두 이 로고스를 향하여 움직이고 있다. 그리스도는 모든 철학의 목표이다. (그는 변증가들처럼 끊임없이 기독교와 철학의 연결점을 찾는다. 양자는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계시와 사변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

2. 양탄자(잡총): 기독교와 철학과의 관계. 신앙과 지식과의 관계를 묘사함.
- 하나님은 모든 선의 근원자이므로 그분은 모든 선한 철학의 근원자이다(사도 바울: 철학은 허튼소리). 주님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철학이 희랍인들에게는 하나님 앞에 의를 의하여 필요한 것이었다. 철학은 사고와 증명을 통하여 하나님께 오려고 하는 사람들을 위한 입문과 같다.
- 히브리인에게 율법이 필요한 것처럼, 희랍인들에게는 철학이 필요했던 것이다. 철학은 로고스가 인간에게 나누어 준 이성의 빛이다 이성진리는 복음에 나타나는 더 높은 빛을 깨닽는 준비가 되게 하는 것이다. (율법과 철학을 동일선상에 놓음)
- 아들 – Logos는 지혜요, 지식이요, 진리이다. 기독교는 완성된 철학이요 진리이다. 이것을 믿는 것은 은혜로 선사된다. 믿음없는 깨달음(지식)은 없고, 깨달음(지식) 없는 믿음은 없다.
- 클레멘스는 발렌티안주의자와 같은 여러 영지주의자들을 열거한 후에 자신이야말로 참다운 기독교의 영지를 개발했다고 했다.


* 기독교 영지주의자

- 그의 저서 양탄자에서 그는 단순한 신자와 기독교 영지주의자와 구분했다.
- „어떤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씨이며 여전히 하나님의 노예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보통 신자.
- 그러나 기독교 영지주의자들은 단지 신체의 유지에 필요한 욕망, 즉 배고픔과 목마름의 본능에만 의존한다. 그들은 다른 정욕 즉 분노, 고통, 불안, 욕망에 대해서는 더는 모른다. 영지의 완성은 감정85) 없는 사랑이다 기독교 영지주의자(현대적 표현으로 A급 신자)
- 클레멘트는 자신을 기독교 영지주의자라고 생각함. 당시 알렉산드리아에 영지주의자들이 많았으며 그는 영지주의 지도자들을 교회로 끌어들이려고 했음.
- 그에게는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과 영지는 서로 배척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서로 다른 발전단계일 뿐이다. 믿음은 영지의 전 단계이다.
- 그리스도는 그의 피로 타락한 피조물을 구원하시고자 오신 것이 아니다. 그는 희랍 철학을 완성시켰으며 인간이 더 고상한 방법으로 살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시고, 이 무상한 세상에서 영원한 신적인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쳤다.
- 일반 신자들은 세례 시에 구원을 받았다. 믿음에는 영지의 요소가 이미 포함되어 있으므로 신앙은 구원을 위해 충분하다고 본다(이 점이 영지주의와 다른 점)
- 그러나 신앙은 더 높은 차원으로, 즉 하나님의 신비를 통찰할 수 있는 단계로 승화되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철학이 필요하다: 신앙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높은 차원의 그노시스를 받아야 한다는 점이 모순됨 .
- 미계발된 신자들과 자신과 같이 영지를 가지고 하나님과 사귀는 신자는 구별됨.
- 그에게서 복음이 헬라화되는 경향이 뚜렷이 나타남.

# 이러한 사람이 신학교 교장으로서 많은 지성인들을 길러냈다는 것을 상상해보라! 신학이 나중에 어거스틴에 의해 정리가 되었다는 것은 정말로 다행이다.


2. 오리게네스

오리게네스는 후세까지 매우 영향력이 켰던 인물이므로 자세하게 다룬다. 그의 신학을 잘 알아둘 것.

* 생애

- 185년 출생. 신약을 그리스어로 완전히 외움.
- 클레멘스의 교리문답학교 수학.
- 그리스도를 향한 불타는 사랑. 202 세베루스 박해 때 교리문답학교 교사인 아버지가 수감되자, 자신도 같이 죽겠다고 하자 어머니가 옷을 숨겨서 밖에 못 나가게 함. 아버지를 순교하도록 격려함.
- 아버지 레오니데스 순교 후에 재산을 몰수당하자 17세의 나이로 교리문답학교에서 기초학문을 가르치는 교사가 됨. 어머니와 6명 형제의 가장이 되어 돈을 벌어야 했다.
- 18세 때 데메트리우스 감독이 천재적인 그를 클레멘트의 후계자로 임명함.
- 사형 언도를 받은 사람들을 계속적으로 방문하여 그들이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순교하도록 도와줌. 그 자신은 기적적으로 기소되지 않았음.
- 학생들이 문전 쇄도함.
- 극심한 금욕생활. 자신의 몸을 제어하고자 잠을 잘 자지 않고, 맨 땅 위에서 잠. 나중에 스스로 고자가 됨.
- 그의 많은 제자가 순교 당함.

- 황제에 대항하는 내란을 피해 팔레스타인의 가이사랴에 가서 교리문답학교에서 가르치며 교회를 인도함.
- 부자가 돈을 대어 7명의 속기사가 그의 가르침을 적고 7명의 서기가 정서한 것을 필사자들이 그것을 복사함.
- 당시의 모든 학문을 기독교적으로 표현하고자 함.
- 그는 매우 유명해져서 도처에서 그를 방문하러 옴.
- 군인의 보호를 받으며 황제의 어머니 앞에서 연설을 하고자 안티옥으로 감.
- 데키우스 박해 때 고문의 결과로 죽음(고백자).
- 그의 가르침에는 잘못된 것들도 매우 많아서 553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지는 않고 그의 몇 가지 가르침만을 정죄함. 그래서 교부의 반열에 들어가지 못함.


* 오리겐의 저작

- 방대한 양의 성서주석. 스스로를 성서 주석가로 이해함.
- Septuaginta(LXX, 70인역)이 영감 된 책임을 확신하고 또한 성서의 영감을 믿음. 교회의 권위는 정경속에 다른 책이 들어오지 않도록 보증한다. 교회는 성경의 감독이다.
- Hexapla를 저작. 구약 원본에 가장 가까운 것을 찾기 위해 6개의 성경 번역을 옆으로 나란히 베껴 놓음. 1개는 히브리 번역. 1개는 LXX, 다른 4개는 다른 희랍어 성경. 30년 동안 이 일에 종사함.
- 성경에 깊은 경외심을 가지고 성경을 연구함. 성경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남. 개인 신앙을 위해 매일 성경을 읽음.
- „성경 이해는 기술중의 기술이요, 학문중의 학문이다“
- 알레고리적 해석 (alla legein: 분문은 다른 것도 말한다): 문자적 이해 외에 문자뒤에 숨은 더 깊은 의미를 이해하고자 함.

- 그의 주경학적 저서로는:
1.Scholien: 텍스트 바로 옆 빈칸에 간단히 주를 다는 것.
2.주석: 모든 성경에 대해 주석을 씀. 현재 남아있는 것은 마태복음, 요한복음, 로마서, 애가, 창세기. 이것들이 모두 단편으로만 남아 있다.
3.설교: 자신이 설교한 것. 그는 구구절절이 주석을 하면서 알레고리적인 깊은 의미를 찾아서 설교함. 약 600편이 남음.

여기까지만 본다면 (알레고리적 해석 외에) 그는 훌륭한 신자요 고백자요 성자요 신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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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리겐의 해석학86)

- 모든 성경 말씀은 다음과 같은 3중의 의미가 있다:
1.육적인 의미 (문자적 – 역사적)
2.혼적 의미 (도덕적 – 철학적)
3.영적 의미 (신비적 – 영적)

„우리가 문자적인 이해라고 부르는 성서의 육은 단순한 사람들을 교화시킨다. 그러나 좀 더 진보가 된 사람은 자신의 정신에 은혜를 받아야 하고, 완전한 사람들은 사도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들과 같다: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고전2:6). 사람은 육, 혼, 영으로 구성된 것과 같이 성경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육적인 의미가 전혀 없는 곳에서는 성경의 혼과 영만을 탐구해도 좋다“ (de principiis: 기본 가르침에 대해)

- 첫 단계의 믿음은 재래적으로 내려오는 교회의 믿음이다. 그는 이 믿음을 신화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멸시하는 의미에서 말하지 않음. 이것이 교회의 믿음의 기본을 이루고 있음.
- 두 번째 단계의 믿음은 다소 철학적이다. 저스틴과 클레멘스와 같이 철학은 사고하는 믿음을 위해 필요하다고 한다. 그는 그리스의 지식인들을 위해 믿음을 철학적으로, 조직적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속에 진리를 새겨 놓으셨다. 복음만 주신 것이 아니라 철학적인 설명으로 이 진리를 일깨워야 한다. 이렇게 해서 예루살렘과 아테네 사이에 다리가 놓이게 되고 오리겐을 통해 그리스의 학문적 정신이 교회에 들어오게 되었다(이레네우스, 터툴리안이 강경하게 반대하던 것). 그는 기독교적 휴머니즘의 창시자가 됨.
- 세 번째 단계는 영적인 신자만이 도달한다 영지주의자를 연상케 하는 것. 그는 클레멘스와 함께 영지주의가 무르익은 이집트에서 기독적 영지주의의 기초를 놓았다.
그리스도의 태양이 그의 계시의 빛을 통해 신자를 비추어서 그를 영적인 신자로 만든다.


* 기독교 신비주의의 아버지

- 신자는 하나님의 로고스인 그리스도가 인간의 영혼 속에서 탄생될 때에 절정에 이르게 된다. 그리스도는 신랑이며, 인간의 영은 신부이다. 그의 로고스 신비주의의 절정은 그리스도와 영의 결혼이다. 이러한 것을 체험하는 사람은 대부분의 인간이 알지 못하는 영적인 권능들의 세계와 그들의 전쟁을 감지한다.
- 오리겐은 „그리스도 – 신부 신비가“이다. 그가 말하는 경건성이란 예수님께 깊이 침잠하는 것이다. 중세의 베르나르 끌레보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였다. 중세에 신비주의가 꽃을 피운다. 그러나 신비주의는 이방철학, 종교에서 온 것. 기독교의 진정한 방언, 예언은 신비주의와는 다르다.

 

* 기독교 교의학자

- 그의 교의학 저서는 „기본 원리에 관해서“이다. 이것은 최초로 기독교 신앙을 전반적으로 다룬 것.
- 그는 성경의 가르침을 신플라톤 주의의 사상과 연관시킴(클레멘스가 한 것 같이). 그의 저서에 플라톤 이야기가 많이 등장함.
- 하나님은 „이성과 존재의 피안87)“에 계시다. 그는 근원이며, 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될 수도, 이야기되어 질 수도 없다. 그는 완전한 선이므로 자신을 나누어 준다: 그는 발광체가 빛을 내듯이 로고스를 자신으로부터 나가게 하신다88). 로고스는 하나님과 같은 본질이면서도 낮은 존재이다. 아버지만 그 하나님(ho theos, hen kai pan: 하나요 전체)이다. 아버지를 놓고 볼 때 아들은 단지 두 번째 하나님이다. 아들은 영원토록 낳아지는 분이다89): 영원부터 영원까지. 로고스는 중재자이다90). 하나님은 로고스를 통해 영원토록 모든 영의 세계를 창조하신다.

- 세 번째 지위를 가진 분은 성령이다. 그는 아들로부터 피조된 가장 고상한 존재이다.
- 이것은 삼위일체가 아닌 밑으로 열린 체계이다. 즉 신플라톤 주의의 유출설의 영향으로 성령 밑으로 천사, 인간의 영, 마귀와 사단이 따른다. 이들은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창조되었다 영혼의 선재설.
- 원타락설: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최고의 천사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함. 하나님께서 그를 지옥에 보냄. 그가 반란에 참가한 다른 천사들과 인간의 영들과 함께 지옥으로 끌고 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살 곳을 지정하심. 이렇게 해서 하늘과 땅과 하계(下界)가 탄생되었다

-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는 하나님의 자비의 첫 걸음이다. 즉 구속의 첫 단계이다91).
- 그리스도는 그의 성육신을 통해 인간에게 구속을 가져왔다.
- 그는 설교와 모범이 된 삶을 통하여 그를 자유로운 의지의 결정대로 따르는 사람들을 모은다.

- 그리스도 십자가 대속죽음의 의미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이 없다: 그는 데몬들과 싸워서 승리하며, 자신의 영혼을 사단에게 대속물로서 준다.
- 죽음 후에는 심판이 온다. 선한자는 천국에 가고 악한자는 지옥에 간다.
- 영혼은 천국에서도 배우고 계속 노력을 해서 여러 세계를 통과하여 완성의 단계로 나아간다.
- 지옥은 각자의 죄를 불사르는 정화를 시키는 불이다 지옥의 불은 벌이 주된 목적이 아니라 정화시키기 위한 수단이다. 종국에는 모든 죄가 불살라져서 모두가 정화됨.
- 결국은 사단까지도 정화되어 하나님께 나아온다. 이것이 만유구원론이다.
- 그러나 물론 또 다시 타락이 시작되어 새로운 세대의 역사가 진행될 수 있다. 지금의 세대는 첫 세대가 아니다.

- De principiis 3.6.1: „모든 이성을 가진 피조물(인간, 천사, 악령, 시단)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최고선은 모든 사물의 목표요 종국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하는 데, 대부분의 철학자들에 의해서도 이러한 방식으로 정의되었다: 그들은 가능한 한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 최고선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이것을 스스로가 생각해낸 것이 아니라 신적인 문서로 부터 차용한 것이다“
- 이것은 그가 당시의 철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상승운동(에로스)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문제는 오리겐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보는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과는 정 반대이다. 복음은 인간이 죽는 것이다(십자가에 못박힘). 성령께서 그를 살리시고 정화시키신다. 그리고 하나님을 닮게 하신다. 하나님과 닮는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욕망과 근원이 다른 것이며, 성화라는 것도 인간이 점진적으로 개량이 된다는 의미도 아니다. 신자에게는 거듭나는 동시에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 오리겐의 평가

1. 그의 신학의 중심에는 그리스도와 성경이 있다. 그는 그리스도를 사랑했고 그리스도 신비가였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영혼의 신랑이다.

·곧 이집트에서 시작될 수도원 운동은 그를 정신적 아버지로 한다.
·수없이 많은 수녀와 처녀들이 예수님을 그들의 영혼의 신랑으로 모신다. 이것을 영적인 그리스도 에로틱이라고 한다.
·테어스테겐과 같은 경건주의자들도 이러한 경향이 있다. 찐쩬도르프도 같은 경향. 야콥 쉬펜너는 아니다
·오리겐은 성경과 당시의 정신(신플라톤주의)을 융합하여 synthesis를 만들었다. 이것을 위해 그는 그리스도 신앙을 학문적인 시스템으로 만들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각종 철학과 종교가 모여서 사람들에게 가장 높은 gnosis의 비밀을 터득시켜주고자 서로 경합을 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오리겐은 기독교를 최고의 종교로 만드는 데 나름대로 성공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기독교는 그리스 사람들에게 친근해지고 실제로 많은 지성인들이 성경에 마음을 열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로고스 기독론에 가장 큰 무게를 둠.
·이후 많은 훌륭한 비숍, 교부들이 그로부터 배움(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 – 교회사 저자)

2. 그러나 그것을 위해 기독교는 상당히 많은 것을 잃게 되었다.

·그는 당시의 사고 시스템을 사용하여 복음을 설명하려고 헸으나 복음을 신플라톤주의 시스템 속으로 억지로 구겨놓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가 뜨겁게 사랑하던 그리스도가 성경에 계시된 그리스도인지?
·그의 이론은 오늘날의 에조테릭과 뉴 에이지의 이론과 비슷한 점이 많다(영혼의 선재설, 만유규원론, Reincarnation).
·그의 사후에 비숍중에 열렬한 추종자와 반대자들이 등장한다.
·그의 열렬한 지지자들이 많은 것을 볼 때에 여러 곳에서 복음이 이미 희랍화 되고 기독교가 혼합종교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다음과 같은 공로로 말미암아 교회는 그를 완전히 정죄하지 않았다:
·성경 전체를 완전히 영감 된 책으로 인정.
·교회의 신조를 인정.
·이단에 대항하여 투쟁하여 많은 사람을 다시 교회로 데려옴.
·주경신학자로서 대활약(hexapla).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모범적인 삶.
·그리스도로 인하여 죽음(고백자)

- 따라서 오리겐의 평가는 매우 어렵다. 당시의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


범교회 공의회

1. 325 니케아 공의회: 예수님과 아버지는 동질이다.
2. 381 콘스탄티노플: 삼위일체.
3. 431 에베소: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이다(theotokos).
4. 451 칼케돈: 그리스도의 두 성질.
5. 553 콘스탄티노플: 오리겐의 3가지 항목 정죄.
6. 680 콘스탄티노플: 예수 그리스도는 두 가지 의지가 있다. 인간적 의지가 신적인 의지에 순종함.
7. 692 콘스탄티노플: 사제와 집사에게는 독신의 의무가 없다. 그리스도를 양으로 그리지 말 것.
8. 787 니케아: 성상숭배 허용. 칼 대제하에 프랑크푸르트에서 개최된 주교회의에서는 다시 금지함.

 


제3부: 콘스탄틴 부터 서로마 제국 멸망까지


XII. 콘스탄틴의 전환
(콘스탄틴에 의해 야기된 기독교의 전환)

1. 디오클레시안의 제국 분할

* 250년 이후 제국의 기독교 상황

- 250년경 로마시에 적어도 30000명 기독교인 (당시 인구 150만 명). 수치로는 2% 밖에 안되지만 내적인 힘이 강하다.
- 이교도들이 기독교에 대해 위협을 느낄 정도가 됨.
- 제국의 동편에는 기독교도가 훨씬 많다.
- 오리겐의 영향: 식자층이 오리겐을 무시하지 못함. 기독교와 당시 학문이 결합하여 한층 더 높은 단계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
- 신자의 고결한 삶과 순교신앙이 인정받음(과거에는 신자들이 범죄자로 간주됨).
- 신자들이 신뢰도가 높다는 평이 있어서 높은 관직에 올라가는 사람들이 많아짐.
- 긴 평화기(260 - 300)에 상류층들이 교회에 많이 들어옴.
- 국가의 배려: 국가가 기독교인 관리들을 제식에서 제외시켜 주기도 함.
- 비숍들의 위치가 계속 상승함: 총독들이 우대함.
- 궁정에서도 신자들이 늘어남 (디오클레시안의 아내 프리스카와 딸 발레리아)
- 기독교도의 자만심이 높아짐: 니코메디아(콘스탄티노플 건너편)에 있는 황제궁 앞에 높고 큰 교회를 세움. 황제가 크게 불만을 품었지만 묵인함 기독교가 도전적이 됨. 기독교는 사회적으로 힘이 커질 때 문제가 생긴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대세가 기독교의 공인 쪽으로 흐르고 있음.


* 당시의 제국상황
(293에 서로마의 수도를 밀라노로 천거. 402에 서고트족에게 포위당하자 다시 라벤나로 옮김)

- 제국이 문화, 도덕의 피폐로 멸망의 길을 가고 있었음 데카당스.
- 3세기에 왕위 찬탈자가 많았음.
- 이교도들이 위협을 느끼고 있었음.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모든 종교의 마지막 종착역이라고 주장.
- 정부는 약해져 가고 쇠퇴해가는 제국에 기독교인들이 한 몫을 더 한다고 생각.


* 디오클레시안(284-305)

- 그는 군인 출신인 강력한 황제였다.
- 그의 개혁정책: 약해져가는 제국을 강화시키기 위해 제국을 4등분함92). 그는 변방을 수습할 수가 없었음. 본인은 니코메디아로 이전. 그 외 여러 가지 제도 혁신.
- 2황제: 디오클레시안 자신과 막시미안(충실한 친구).
- 2 부황제: 콘스탄티우스, 갈레리우스.
- 그는 이미 계승자도 정해 놓고 찬탈하는 일이 없도록 서로 가족들을 교환하여 결혼시킴.
- 그의 신자에 대한 태도: 처음에는 신자를 방관함. 제식이나 축제에 참석을 하지 않아도 처벌을 하지 않음. 그의 집정기 말에 부황제 갈레리우스(기독교의 적)에게 기독교를 박해하도록 설득당함.


2. 기독교 박해

* 발단
- 황제가 오라클 제사에서 응답을 받지 못하자, 제사장이 기독교 신자의 핑계를 댐 (직원 중에 기독교 신자가 있어서 그렇다고)
- 내장 점술사도 기독교도 때문에 점을 볼 수 없다고 함.
- 302 겨울에 부황제 갈레리우스가 황제를 방문 시 기독교도 박멸을 종용함.
- 황제는 폭력사용을 원치 않았으나 디디마의 신탁에서 기독교의 박해를 허용하자 전면 박해를 시작함.

* 6단계 박해 계획

1.신자를 군대에서 퇴역시킴(군대를 기독교 박해 시에 사용하고자).
2.모든 교회 건물을 파괴.
3.모든 성경을 소각.
4.상류층 신자를 회유. 불응 시에는 지위와 신분 박탈. 재산을 몰수 (신자들이 그의 집에서 모임을 하지 못하게 하고자).
5.모든 사제를 투옥. 제사를 강요하여 불복종자는 감금.
6.평신도에게도 제사를 강요함.

특징: 매우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박해. 사람을 죽이지 않음(기독교의 엄청난 발전). D-Day는 303.2.23. 이날은 경계(境界)신의 축제일. 황제는 승리를 확신했으나 계획을 세운대로 진행이 되지 않고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흐름.


* 진행과 결과

- 니코메디아에서 첫날 새벽에 군대가 교회로 들어와서 약탈하고 건물을 완전히 파괴함.
- 그다음 날 황제 칙령: 교회 파괴령, 성경 소각령, 제사 반대 시 노예의 신분이 됨.
- 그 칙령을 궁정관리(신자)가 바로 뜯어내어 찟어 버림: 그는 상상할 수도 없는 고문을 이겨냄93)(살점이 떨어져 뼈가 보일 때까지 채찍으로 때린 후에 소금에 식초를 탄 후에 그곳에 부었다. 마지막으로 불에 태워 죽임).
- 니코메디아 비숍은 참수형 당하고, 황후와 딸은 강제로 제사를 지내게 함.
- 그러나 기대보다 변절자가 훨씬 적었고 고백자의 수가 많아서 감옥이 넘쳐나고 순교자가 늘어남.
- 황제의 칙령이 전역에서 시행되지 못함. 콘스탄티우스는 박해를 원하지 않았으나, 황제의 엄중한 부탁을 무시할 수 없어서 그 지역에는 (브리타니아, 갈리아, 스페인) 약한 박해가 있었을 뿐이다.
- 305에 황제가 스스로 퇴위하면서 황제 막시미안에게도 권유하여 퇴위시킴94).


* 정치판도

- 결과로 부황제들이 황제로 승진.
- 서방황제는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동방황제는 갈레리우스, 부황제로는 서방에 세베루스, 동방에 막시미누스 다야(갈레리우스 조카)
- 콘스탄틴이 아버지 콘스탄티우스의 지위를 승계하여 부황제가 됨. 원래는 세베루스가 내정되어 있었다. 그는 규칙을 어김.
- 막센티우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로마, 이탈리아, 스페인, 북아프리카의 황제가 됨. 그의 누이(Fausta)가 콘스탄틴의 아내가 됨.


* 갈레리우스의 박해

- 갈레리우스가 동방에서 박해를 계속함. 가장 강력한 박해자, 제국의 최후의 박해자.
·소아시아에서는 전 도시민이(관리들까지도) 기독교 신자인 곳도 있었다: 아이들을 포함하여 전 도시민이 순교 당함. 도시는 군인들에 의해 포위당해 재로 변함.
·황제군과 대항해서 싸운 곳도 있었다.
·갈레리우스가 불치의 중병을 얻어 갑작스럽게 자살함.
·311년 죽기 5일 전에 콘스탄틴, 리키니우스와 협약하여 기독교 인정 칙령을 내림: 3황제 칙령95).

- 기독교인들의 반응
미리암의 승리의 노래: 출15:1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 감옥과 강제 노역소가 열림: 불구자, 허약자들이 거리를 채움. 엄청난 감격으로 예배를 드림 기독교를 박해를 당하면서 승리한다96).

* 밀라노 칙령 313

- 311의 세 황제 칙령이 발효된 2년 후인 313에 콘스탄틴은 동방의 왕 리키니우스와 두 황제 칙령을 내림.
- 주요 내용:
·국가가 신자로부터 몰수한 재산은 환원한다.
·교회는 합법적인 단체로 인정됨.


3. 콘스탄틴의 승리

* 막센티우스와의 결전

- 312 콘스탄틴이 40,000의 병력으로 막센티우스를 공격하고자 알프스를 넘음. 승승장구하여 로마에 이름.
- 막센티우스는 3배의 병력으로 로마에서 진을 치고 있었음.
- 그는 성 밖으로 나가면 죽는다는 신탁의 결과로 말미암아 성안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 콘스탄틴의 상황 – 십자가 비전부분은 유세비우스의 „콘스탄틴의 생애“에서 발췌한 것. 콘스탄틴이 이 사건이 있은 후 한참 후에 유세비우스에게 진술한 것을 근거로 기록함. 기록의 진위를 100% 신뢰할 수는 없다. 락탄티우스의 기록과는 약간 다르지만 기본적 골격은 같다.
·군사력이 수적으로는 절대적으로 약함. 그러나 그의 군사들은 전투의 경험이 있는 군사들. 콘스탄틴이 막무가내로 출병한 것이 아니다.
·그는 도시 북쪽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막센티우스가 막대한 점쟁이와 마술사들의 지원을 받고 있음을 그는 알고 있었음.
·그는 상당히 큰 심리적 부담을 안고 있었다. 정오에 하늘을 바라보며 어떤 신을 섬겨야 하는지를 놓고 고심함. 디오클레시안 이후에 다른 신들을 신뢰한 황제들은 전부 몰락하고 태양신을 믿은 자기 아버지만이 제 명에 죽음.
·정오가 막 지날 무렵 태양 위에 승리의 표시를 보았다: 빛으로 된 십자가와 그 위에 새겨진 글자: „이 표시로 승리하라!“ 이것을 보고 황제가 두려워함.
·황제는 꿈에 하나님의 이 표시를 군사들의 방패에 붙이고 싸움을 시작하라는 지시를 받음(락탄티우스). 그래서 X 표시를 방패에 붙이게 함.
·십자가 비전과 꿈이 사실인지 판단해 볼 것. 쉽게 부인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사병들도 이 표시를 보았다고 함.
·황제가 승리의 확신을 하고 도시로 공격해감.
·황제가 티베르를 도강하려고 할 때에 막센티우스가 밖에서 격전을 하고자 배로 강을 건너다가 다리가 무너지는 사고로 익사함.
·콘스탄틴이 큰 희생 없이 승리하고 원로원과 백성이 그를 환영함(막센티우스는 폭군이었음). 이들이 315에 그의 승리를 축하하고자 개선문97)을 세움.
·324에 동방황제 리키니우스(Licinius)를 제압하고 전 제국의 황제가 됨.


4. 콘스탄틴과 기독교

* 콘스탄틴의 신앙생활
- 원래의 그의 신은 태양신: sol invictus. 다른 이름은 아폴로, 미드라스. 제국 전역에 전파된 신앙.
- 그는 태양신교와 기독교를 유사한 종교로 간주하고 그들의 박해는 의미 없는 일로 인식함.
- 십자가 환상은 그를 즉시로 기독교도로 만들지는 못하였지만 그는 기독교의 신인 예수 그리스도가 그를 승리로 이끌었다고 확신하였다고 유세비우스가 기록함.
- 승리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함. 자신의 상을 이교신전에 세우지 못하게 함.
- 황궁에 교회를 세우고 열심히 성경을 읽고 예배 때 성경강독을 함. 병사들을 위해서 기도문을 작성함.
- 337 바로 죽기 전에 세례를 받음98).

* Pontifex maximus99)(대사제)
- 이교의 대사제의 칭호를 계속해서 사용함.
- 그는 선교사는 아니었고 정치가, 전략가였다.
- 이교도를 허용함 – 종교자유 허용. 이교를 국가 종교로 인정함.
- 대사제 칭호를 계속 유지함. 그러나 황제 숭배는 폐지함.
- 따라서 그가 대제사장의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고 해서 위선적으로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 교회를 위한 공헌100)

- 그는 외형적으로는 중립을 지킴.
- 성직자(비숍, 사제, 집사)는 공적인 직무와 세금을 면제함 – 이교 성직자들에게 적용해 오던 것을 기독교에도 적용함 균등의 원칙.
- 민법의 경우 비숍의 판결이 법적 구속력을 갖게 된다(거룩한 사람은 판단을 더 잘 내린다는 생각)
- 교회가 상속권을 가짐. 헌물(대지)을 계속 상속하게 되어 중세에는 대지의 절반이 교회에 속하게 되었다!
- 321 일요일을 휴일로 선언: dies solis101)(태양의 날)로 명명함.
·관리와 군인은 쉬는 날
·이교도들도 이날은 들에 나가서 미리 외운 긴 찬양기도를 암송해야 했다102).
- 웅장하고 화려한 교회 건축을 장려: 교회 건축 문화 시작.
- 330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천거함: (1453에 터어키의 손에 넘어감)
·지정학적 잇점: 3면이 바다이기 때문에 도시 방어에 유리.
·정치적 이유: 음모와 배신의 도시.
·종교적 이유: 이교의 영향을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 도처에 신전이 있고 이교의 뿌리 깊은 전통이 있다. 원로원, 귀족들의 신앙을 강제로 바꾸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도시를 처음부터 기독교의 바탕 위에 세우고자 했음.

- 336에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제정103). 그 날은 원래 제국의 수호신인 sol invictus의 탄생 기념일 이였다. 제국에서 태양신을 몰아내려고 한 의도가 보임.
- 황제가 교회와 신학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짐. 학자들과 토론을 즐김. 니케아 회의에서 명예 회장을 맡음. 그의 압력(황제의 권한)으로 정통교리의 수호에 공헌함.
- 교회의 일치를 위해 노력함104). 도나투스파를 오랫동안 용인함.

요약: 종교의 자유 허용. 기독교에 좀 더 특권을 줌. 국가의 평화를 중시함. 당시까지는 기독교인이 절대적으로 소수였음.


5. 콘스탄틴과 도나투스파

* 루실라와 불만자들
- 카르타고105)는 로마령의 북아프리카주의 수도.
- 제국인과 누미디아 사람들 사이에 알력이 있었음.
- 카르타고의 부자 루실라집이 불만자들의 집합소 역할.
- 루실라는 경건하지만 자신의 경건성을 요령있게 시위를 할 줄 아는 사람.
- 성찬전에 늘 자기가 가지고 오는 순교자의 뼈(성물)에 겸손하게 키스를 했다.
- 집사장 세실리안이 참다못해 그녀를 훈계함. 더욱이 그 순교자는 교회에서 인정하지 않는 순교자였음.
- 루실라가 상처를 받고 앙심을 품음.
- 312에 세실리안이 비숍이 됨 (4명의 인근도시 비숍이 그를 안수함)

* 대죄자가 안수를 줄 수 있는가?
- 세실리안을 안수한 비숍중에서 한 사람이 디오클레시안 박해 때 성서를 핍박자에게 넘겨준 일이 있어서 당시로는 대죄106)를 범하였다.
- 즉시 루실라를 둘러싼 누미디아파가 이에 반발함.
- 누미디아파 비숍 도나투스가 70명 비숍과 함께 공의회 개최. 세실리안의 안수를 무효로 공포함.
- 세실리안이 그들에 의해 다시 안수 받을 의사를 표하자 그를 비웃고 루실라의 개인사제 마이오리누스를 비숍으로 세움(예식에 루실라가 천문학적 숫자의 금액을 희사함) 교회분열의 이유가 인간적인 데에 있었음이 확연히 드러남.
- 아프리카의 전 교회가 둘로 나누어짐.
- 마이오리누스가 곧 사망하자 313에 도나투스(인솔자)가 그의 후계자가 됨.

* 콘스탄틴의 중재
- 콘스탄틴이 비숍들을 초청해서 313에 공의회를 개최.
- 도나투스가 박해시 타락한 비숍들을 재임용한 것107)과 재세례의 죄목으로 출교당함.
- 공의회는 먼저 선발된 비숍들을 인정할 것을 권함.
- 314 황제가 더 많은 비숍을 Arles에 초대함. 도나투스파를 정죄함.
- Traditor108)가 안수할지라도 비숍의 성직수여는 유효하다고 결정. 재 세례도 금지함.

* 도나투스파들의 반발
- 도나투스파들이 이 결정에 불복하고 또 다시 황제에게 호소함
- 두나투스파들이 소요를 일으키자 황제가 군대로 무력진압을 시도함: 교회를 뺏고 비숍을 귀양 보냄.
- 일부는 한 비숍을 중심으로 뭉쳐서 무기를 들고 항쟁함(Circumcellion: 그들을 순회 사제라고 함)
- 그들은 순교를 불사하고 공교회와 이교도들과 투쟁. 이러한 종교적 문제는 사회에 대한 불만의 표출의 요소가 있다. 로마의 지주와 착취당하는 백성들 사이에 갈등, 지역감정.
- 북아프리카에서는 도나투스파가 더 성장하여 기톨릭을 앞지름: 교회성장에 복음이 아닌 다른 요소가 있음을 뚜렷이 볼 수 있다.

* 도나투스파들의 기본 입장
- 성사(세례, 성직수여)는 수여하는 자가 대죄자일 경우에는 효력이 없다.
- 도나투스 교회는 성직자 중에서는 대죄자가 없는 교회로서 스스로 진정한 교회로 인식함.
- 공교회에서는 그들을 이단으로 보지 않고 분리자로 인정(몸만 분리, 영혼은 분리가 안 됨)
- 오랫동안의 싸움으로 북아프리카 교회는 힘을 잃음. 회교도 침투 이후 교회는 몰락함.


* 326 분노의 대이단 법령
- 황제는 이교도에게 관용을 베풂.
- 분리주의자에게도 오랫동안 관용함.
- 그러나 이단자들에게는 매우 강력한 조치를 취함.
- 대이단 법령에 포함된 이단 명단: 노바시안파, 발렌티니안파(영지주의), 마르키온파, 바울파(사모사타 바울의 추종자 – 양자 기독론). 그들의 교회를 몰수함.
- „그대들의 가르침의 살인적인 독소가 건강한 자를 병들게 하고 산자를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한다“
- 기독교의 이단법의 시초가 됨.


* 순교자 교회에서 국가 교회로

- 4세기 제국의 상황: 멸망 증세.
·국가가 가난해지고 인구 감소.
·대규모의 국가 기관으로 말미암아 높은 세금.
·게르만의 침입: 약탈, 살인, 포로로 잡아감.

-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사람이 교회로 유입됨. 교인이 되면 유익도 있음.
- 그러나 교회는 많은 사람을 받아들일 만한 준비가 되지 않았다.
- 사람과 재산이 교회로 유입됨 – 교회의 세속적인 권력이 커짐.
- 핍박받던 교회가 차차로 핍박하는 교회(국가 교회)로 변함109).
- 콘스탄틴의 아들들은 이교도를 박해함 – 교회가 묵인.
- 세례가 시민권 획득의 조건이 되자 대규모 개종이 일어남 세속화.
- 380 데오도시우스 대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정함: 의무적으로 믿어야 한다. 이교도는 불법자가 된다.
·교회법을 어기는 저는 국가법을 어기는 자가 됨: 비숍은 절대적인 지도자로 부상.
·성직자와 평신도간의 거리는 더 넓어짐(비숍이 법관, 고급 공무원이 됨).
·비숍은 관용 마차를 타고 화려한 옷을 입음.
·이러한 이유로 부유층들은 성직자가 되려고 함: 지원자 급증.
·교회가 국가에 종속이 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교회가 국가의 하수인이 됨. 중세에는 국가와 교회간의 싸움이 일어남.
- 교회가 외적으로 화려해지고 예배도 화려하게 되면서 신앙생활과 더불어 예배가 내용을 잃어감. 구원의 물화.
·성물숭배
·성지순례
·제식적인 미사
이것들의 뿌리는 2세기 때부터 있었으나(이그나티우스) 4세기에 와서는 꽃을 피움.

- 부자 교인은 화려한 낭비적인 삶을 삶(3세기까지는 부자들도 검소하게 살았음)
- 가난한 자도 (과거에 그리스도인이 짐승에게 찢겨서 죽던) 아레나와 극장을 방문함.
- 이러한 세속화에 대한 반발로 수도원이 발생함110).

- 교회는 순교자 교회에서 국가 교회로 변했다. 극단에서 극단으로 바뀐 것이다. 순교자가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분과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잃어야 목숨을 얻는다고 하셨다(막8:35). 핍박에 의해 목숨을 잃는 것보다, 스스로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잃는 것은 훨씬 어렵다. 국가 교회로의 변천은 신자가 영생으로 가는 길을 더 좁혀 놓은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장점은 복음이 더 넓은 지역으로 뻗어나갈 수가 있고, 사회의 각계 각층의 사람들에게 전파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 유스티니안 황제(527 - 565): 교회의 국가교회로의 발전은 유스티니안 황제에 이르러 완결된다. 사제는 공무원이 되고, 황제가 국법으로 교회의 가르침과 교회법, 예배에 이르기까지 규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국가 기관이 되어버린 공의회에서 결정되었다. 교회가 국가에 완전히 종속된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 소련, 동유럽에서 20세기까지 지속되었다. 왕의 지위는 원칙적으로 교회 위에 있기 때문에 교회는 왕을 비판할 수가 없게 되었다.
서방에서는 로마제국의 멸망으로 비잔틴 제국과 같은 교회의 운명을 걷지 않았다.


6. 십자가와 문화혁명

기독교의 승리는 콘스탄틴 황제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수적으로는 적었지만 기독교도들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의 이러한 위대한 점이 사회를 변화시켜 소위 문화혁명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 박해자를 미워하지 않았다. 복수를 하지 않음. 원수에게 선을 베풂.
- 사랑과 자애가 비신자들의 그것보다 현격하게 뛰어남.
- 도덕심이 비신자들보다 뛰어남.
- 노예와 주인이 하나가 됨. 사회계급이 무의미해짐. 사람차별 철폐.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으니“: 하나님이 인간이 되고 낮아지신 것이 그리스도인 믿음의 승리의 비밀이다. 기독교가 공인을 받기 전까지는 이 원칙이 지켜졌다.
- 350년부터 병원과 고아원이 설립되고 교회가 버려진 아이들, 창녀, 수감자들을 도와줌.


* 평가

문화혁명: 로마 사회에 전혀 다른 문화, 정신이 들어오게 되었다. 교회가 국가의 정신적, 사회적, 문화적 생활을 변화시킴: 사회를 기독교적 가치관으로 변화시킴. 이것은 사회가 크게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이 2000년간 서양문화의 하나의 축을 이룸. 그러나 이것은 필연적으로 다음의 결과를 가져온다:

1. 교회의 세속화: 교회에 속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당한다. 교회에 속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 따라서 이교도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이들이 변화되지 않고 오히려 교회를 변질시킴. 신앙생활에서의 긴장이 감소됨으로서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이 어려워 짐. 세속화된 비숍들이 대거 등장 수도원은 이러한 현상에 대한 저항운동이다.
신앙생활에는 항상 긴장이 따른다. 평안함, 기쁨과 동시에 긴장감이 따른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이중성이다.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감. 교회가 핍박을 받았을 때에는 외부에서 긴장감을 조성해 주었으나, 이제부터는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신앙적인 긴장을 해야 한다.

2. 교회가 제도적 교회로서 발전: 교회란 무엇인가? 신자들 몇 명이 그리스도 이름으로 모인 곳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곳이다. 교인 각자는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해서 구원에 이른다. 그러나 제도적 교회(Institution)에서는 구원이 물화(物化)111)되고 가시화된다. 교회는 구원을 규정하고 결정하고 관리하는 기관이 되어 버린다. 교회에서 요구하는 것만 완수하면 구원을 얻는다 (성사…). 물론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계속해서 선포가 되겠지만 그것은 베일에 싸여 신비한 영역이 되어버린다. 그 결과로 사제는 구원을 관리하고 중재하는 이방인 사제가 되어 버리고 일반성도는 구원의 문제를 그들에게 맞기게 된다. 4세기부터 급격하게 증가하는 성물숭배(신자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3. 국가와 교회와의 종속관계: 황제교황주의. 정교합일주의등 여러 가지 말로 표현된다. 콘스탄틴은 pontifex maximus로서 교회의 수장112)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 국가법으로 그는 모든 종교(이방 종교)의 수장이 된다. 물론 교회는 그에게 많은 덕을 입었다. 종교회의때 그는 모든 비용(비숍의 여행비…)을 지불했다. 그리고 다수의 비숍의 의견을 꺾고 정통교리(니케아 종교회의)를 보호했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는 교회를 이용하게 되고, 교회도 국가를 이용하게 되는 불행한 제도의 출발점이 되었다.

4. 콘스탄틴의 비판?: 이러한 불행한 결과를 두고 콘스탄틴을 비판할 수 있는가? 이것은 시대착오이다. 기독교를 인정한 밀라노 칙령(313)은 당연히 후속결과를 가져온다. 고대는 국가와 종교의 분리113)를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근대의 산물이다. 바로 위에서 언급한 대로 콘스탄틴은 종교의 수장으로서, 또한 기독교 신자로서 할 일을 다한 것 뿐이다. 모든 신자는 기독교가 인정을 받기를 열렬히 고대하였고 기도하였을 것이다. 유세비우스의 보도에 따르면 밀라노 칙령과 더불어 옥에 갇힌 신자가 옥에서 나오고, 죽을 고생하며 노역을 하던 신자들이 풀려 나왔을 때 신자들은 감격하여 환호를 질렀다: „새로운 다윗, 콘스탄틴! 복음의 자유를 지켜주는 자!“

5. 교회의 책임
이전까지만 해도 기독교는„사회적 게토“ 같았다. 이제 기독교는 게토로부터 나왔다. 더욱이 기독교는 „사회의 필연적인 요소“가 되었다. 이것은 엄청난 „도전과 책임“을 수반하는 것이다. 여기에 기독교는 „기회와 위험“에 동시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가 이 도전을 어떻게 극복했는가? 교회는 이러한 변화가 교회를 크게 저해시킬 수 있다는 것을 깨닽지도 못했다. 교회에 이교사상이 유입되어 교회는 큰 혼란을 겪게 되었다. 전에는 입교 전에 일정기간의 교리문답 과정을 이수해야 했지만, 교회의 문은 넓어지게 되었다.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는 교회이다).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개혁의 모델은 신약에 나타난 초대교회이다. 교회가 늘 개혁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변질된 기독교를 보여주는 속사도 교부들의 저작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질문: 기독교에 가장 적합한 정치적 사회적 시스템은?
고려해야 할 요소: 시대에 따라 다르다. 기독교는 어떠한 시스템하에서도 살아갈 수가 있다.

 


XIII. 국가교회로의 발전과정 (311 - 380)

* 콘스탄틴의 세 아들

- 337 콘스탄틴 사망.
- 그 이후 세 아들이(콘스탄틴II, 콘스탄스, 콘스탄티우스) 제국을 분할 승계함. 그들은 기독교적으로 양육됨.
- 기독교를 국교로 하고 싶었지만 여건상 보류함. 그들은 이교도들을 핍박함.
- 콘스탄티우스(동로마 통치)는 346에 모든 이교 사원을 폐쇄함.
- 콘스탄티우스(350부터 전 제국 통치)는 니케아의 적들을 우대함. 아타나시우스를 핍박함.

* 줄리안의 반동 (Julianus, 361-363)

- 과거의 종교를 다시 부활시키고자 함.
- 그는 신플라톤주의자, 태양신 숭배(그 당시 태양신 종교가 다시 부상하기 시작함). 그는 기독교 교육을 받으며 자라났고, 기독교도로 가장하다가 황제가 되어 본색을 드러냄.
- 곧 황궁에서 기독교 신자를 제거하고 폐쇄된 이교사원을 다시 열고, 파괴된 곳을 복구함.
- 페르시아와의 전투에서 전사함으로 그의 반기독교 정책이 무산됨.

* 기독교의 국교화 (380)

- 380 데오도시우스 대제(379-395)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함.
- 381 콘스탄티노플 제2차 범교회 공의회 소집. 삼위일체 완결.
- 383 이단 법령: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 결정된 이단 리스트에 따라 모든 이단들의 활동을 금지 시킴.
- 391 이방인의 모든 제사를 금지함. 유대교만 예외.
- 395 로마가 완전히 둘로 나누어짐. 그전에는 행정구역으로만 갈라져 있었다. 데오도시우스의 두 아들이 황제가 됨.
·Honorius(서방)
·Arcadius(동방): 게르만 민족 이동 후에 큰 타격을 받지 않고 성장함. 경제적 기반이 더 든든하고 인구밀도가 높다.


* 사회변화

1. 결혼과 가족.
기독교는 당시의 결혼 제도를 그대로 인정함(혼인법, 가부장적 제도, 상속법). 그러나 결혼은 과거처럼 파기할 수 있는 사회적인 계약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끊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이 전제됨114).
1.남자의 간음도 처벌을 받음. 로마법으로는 남자가 남의 부인과 관계를 했을 때에만 간음죄 성립.
2.노예의 결혼을 인정한다. 재산을 나눌 때에도 노예의 가족은 분리할 수 없다.
3.자녀의 결혼은 어머니의 허락도 받아야 한다. 자녀는 부모가 정해준 배우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거절할 권리가 있다.
4.아이를 돈을 받고 팔 수 없다.
5.산모의 생명이 위협을 받지 않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낙태금지.
6.가장은 가족의 믿음을 고양시키기 위해 가르치고 모범이 되어야 한다.

인권 개선: 노예의 권리 신장, 유아 인신매매 금지, 낙태금지. 남자 간음죄 도입.

2. 사회 변혁
- 디오클레시안 황제가 중앙집권제도를 강화시키고부터 수많은 관리를 부양하고 사치스러운 궁중생활을 부양하고자 많은 세금이 부과됨. 노동자들은 노예처럼 혹사당하고 반면에 적은 상류층 사람들만 부를 향유함.
- 교회에서 노예를 보호함. 주인의 허락이 있으면 노예도 교회에서 직무를 가질 수 있음. 교회에서 노예를 돈을 주고 해방시키기도 함.
- 극빈자들을 지원하고 고아원, 병원을 운영함115).

3 교육과 문화
- 써커스, 잔인한 검투사 싸움, 극장들이 교회와 경쟁했음에도 사회는 325 – 450 사이에 기독교의 가치관에 위해 변화되어 감. 교회의 설교와 높은 도덕이 무지한 백성을 계몽시킴.

질문: 당시의 철학과 종교는 왜 사회를 변혁시키지 못했을까? 왜 기독교가 사회를 변화시켰을까?

 


XIV. 수도원 제도

미혼녀 – 고행자 – 은둔자 – 수도승
수도원제도는 처음부터 생긴 것이 아니고, 은둔자주위에 사람이 모임으로써 시작이 되었다.

* 미혼녀와 고행자(금욕자)

- 이미 1세기 때부터 (초대교회) 혼인하지 않고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빌립 집사의 4명의 딸)
- 마19:2 천국을 위해 고자가 된 자들. 사도 바울의 권고.
- 이들은 교회를 떠나서 사는 사람들(은둔자)이 아니라 교회 생활을 같이하면서 금욕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 신약은 세상을 부인하고 세상에서 세상을 이길 것을 가르쳤지 세상으로의 도피를 가르치지 않았다.


* 은둔자들(사막의 아버지들)

- 3세기에는 신플라톤주의 사상이 교회에 영향을 미침(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오리게네스가 주도적 역할). 많은 신자가 마을을 떠났지만 마을 근처에 살면서 교회 생활을 하였음. 3세기 말, 특히 4세기에 이러한 경향이 심화됨.
- 수도승116)이란 교회를 떠나 은둔하는 자들을 말한다.
- 3세기 말에 수도원 운동이 시작된 이유는 교회 평화의 시기(260 - 300), 특히 콘스탄틴의 전환 이후에 많은 사람이 교회에 들어오게 됨. 그러나 그들이 이교의 사상과 생활을 완전히 떠나지 않고 오히려 교회를 변화시켜 교회가 세속화됨. - 교회가 영적이고 윤리적인 면에서 부패하게 됨(교회가 국가의 윤리를 부패시킨 것이 아니라 국가의 윤리를 세움. 그러나 기독교의 높은 윤리는 점차로 약화됨). 교회가 국가의 지원도 받게 되고, 기부금도 늘어나서 교회가 부유하게 됨.
-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117)의 로마 역사(27,3): 이교도인 그가 366년 10월 로마에서의 신임 비숍의 선발 시의 모습을 보도함(물론 과장이 있을 수 있음을 전제해야 한다)

„다마수스와 우르시누스는 어찌하든지 비숍이 되고자 하였다. 서로 음모를 꾸미고 싸움을 하는 데 그들의 추종자 사이에는 싸움으로 말미암아 상해자는 물론 사망자들까지도 있었다. 비벤티우스는 이러한 무력동원을 감당할 수 없어 (출마를 포기하고) 영문 밖의 그의 땅으로 은신했다… 기독교의 모임 장소인 시키니우스의 바실리카에서 어느 날 137구의 시체가 발생됬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로마에서 비숍이 누리는 화려함을 고려한다면, 이 지위를 갖고자 모든 힘을 기울인다는 것은 납득할 수 있는 일이다. 이 목적을 달성한 사람은 그의 미래가 보장되어 있다: 귀부인들의 선물들을 통해 부자가 되고, 마차만 타고 다니고, 화려한 옷을 입으며, 향연을 열며, 그의 식탁은 왕의 식탁을 능가한다“

- 비숍으로 당선된 다마수스의 동시대 인물로서는 암브로시우스, 히에로니무스(제롬)등이 있었는데 이 훌륭한 사람들은 수도원의 전통에 서 있는 사람들이었다.
- 권력과 화려함의 상징이 되어가는 교회의 외형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믿음의 내면화를 위해 수도원 제도가 발생한 것으로 본다.
- 수도원의 아버지는 애굽의 안토니우스이다(251-356). 아타나시우스가 그의 사후에 vita Antonii를 집필함.

- 은둔자의 두 가지 목표:
·하나님께만 집중: 세상과 결별하고 육신을 제어함.
·회개: 소욕을 없앤다. 최후 심판에 대한 두려움.


1. 안토니우스

처음으로 혼자 산 사람. 매우 겸손하고 영향력이 컸던 은둔자.

* 생애

- 251 부잣집에서 탄생.
- 20세 때 교회에서 예배시 마19:21 말씀118)이 임함. 이 말씀을 영접하고 실행에 옮김.
- 그가 상속받은 것 중 누이의 몫을 주고 모든 것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준 후에, 마을 밖으로 나가서 혼자 삶. 광주리를 만들어 팔아서 겨우 연명하며 삶. 가끔 교회와 그의 멘토를 방문.
- 285에 기도에만 전념하고자 멘토를 떠남.
- 20년간은 사막 주변에 있는(나일강 근처) 폐허가 된 요새에서 생활.
- 그의 주위에 차차로 은둔자들이 모여들자 사막으로 다시 들어감. 오아시스를 발견하고 거기에서 일생을 마침.


* 영적투쟁

- 은둔 생활의 시초에는 많은 시험을 받음. 과거의 재산이 생각나고 혼자 남은 누이의 걱정이 됨. 명예욕, 식욕 등이 엄청난 능력으로 그에게 다가옴.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이 그를 그리스도 안으로 더 뿌리를 내리게 함. 그리스도가 그에게 힘을 줌. 하루는 밤사이에 사단의 시험으로 거의 죽게 됨. 그의 제자들이 그를 장례하고자 그를 교회로 싣고 감. 사자, 곰, 뱀 등이 그에게 나타남. 밤에 몇 시간 동안 계속되는 소음이 그를 괴롭힘…. 마지막에 그에게 그리스도가 나타나셔서 이제 싸움은 끝났다고 하시며 그를 위로하심.
- 그는 이러한 것을 체험한 후에 큰 능력을 갖추게 됨: 병을 고치고 미래를 예시함.
- 안토니우스는 그 시대에 자석과 같은 영향을 줌: 많은 사람이 그에게 영적인 조언을 받고자 방문하고 그의 제자가 되기 위해 몰려듦.
- 히에로니무스는 그가 사도 후에 가장 큰 자라고 칭찬함.
- 그는 교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침.


* 은둔자 모임

- 3,4세기에 로마의 고 세금정책으로 말미암아 생활이 어려워지자 은둔 생활이 유행됨.
- 사막(당시 4개의 사막)의 오아시스에 은둔자들이 몰려옴.
- 부르심이 없는 자들(세상을 도피하는 사람)도 고행을 하게 되어 고행 중에 미친 사람들도 등장함.
- 그들은 공동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각자 생활을 함(수도원과 다른 점). 단지 수도승 한 명을 아버지처럼 모시고 그에게 순종하는 삶을 삶(정신적, 영적인 지주). 안토니우스는 혼자 살았음.
- 실제로 고행을 함: 이집트의 은둔자들은 일주일에 단 한 번 물에 불린 콩만 먹음. 밀집 광주리를 팔아서 음식을 샀다. 무거운 쇠뭉치를 몸에 두르고 사는 고행자도 있었다. 그들의 목적은 정적과 기도.


* 평가

- 은둔자의 삶은 당시 타락 일로에 있던 정신적, 영적 삶에 대한 하나의 대안이었다. 약 100년간 계속되는 현상.
- 단순한 세상 도피가 아니라 거룩한 삶에 대한 열정이 동기가 되었다고 본다.
- 마카리우스(회개자): 내가 이 모든 경건의 연습을 마치자 나의 영혼으로부터 5일 동안 나의 모든 생각을 하나님에게만 향하고자 하는 소원이 일어났다.
- 루피누스: 은둔자들은 보통사람들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기쁨과 쾌활함을 늘 잃지 않았다.
- 그들은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찾는 사람들로 여겨지므로 화려한 교회에서 영적인 지주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은 은둔자들을 통해 위안을 얻음.
- 이러한 은둔자의 형태가 곧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에 전파됨.
- 순례행진이 시작됨. 유명한 은둔자들과 은둔 설교자들을 방문.
- 시므온(기둥 성자)은 5세기에 30년을 15미터가 넘는 기둥에서 삶. 하루에 두 번씩 기둥 위에서 순례자들에게 설교함.
- 종교개혁자들은 수도원을 비판함. 그러나 종교개혁 당시의 수도원은 초기의 수도원과는 달랐다.

질문: 우리는 이러한 형태의 믿음 생활을 어떻게 볼 것인가?
오늘날 한국에서 은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기독교도가 아닌 사람들이 많다.
기독교인의 은둔의 목표는 육을 제어해서 영이 자유롭게 되어 하나님만 섬기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육은 육신이 아니라 성령을 거스리는 소욕을 말한다. 육신을 극단적으로 제어하면 육의 소욕이 감소하는 것은 당연하다. 육신은 길들이기 나름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육이 완전히 제어되는 것이 아니다. 육을 제어하는 방법은 말씀순종을 위한 자기부인과 자발적인 말씀의 실천(거룩함, 이웃사랑)이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길이다. 우리가 이렇게 살 때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우리를 자유케하신다. (잘못된 단체에서 가르치는 자기부인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과 전혀 다르다. 그들은 말씀 앞에서 자기 부인이 아니라 시스템, 혹은 윗사람 앞에서 자기부인한다. 자기를 부인하기 위해서는 완전한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하나님 말씀이 우리에게 스스로 임하고, 개인이 판단해서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자기부인할 길이 이미 정해져 있어서 강제로 하는 순종과 같다).
은둔자들이 육을 제어하기 위해 육신을 다스리려고 했는데 그 방법으로는:
1. 음식과 잠을 최대한 줄이고 안락을 버림.
2. 소유, 명예포기(나중에 소유와 명예가 뒷문으로 들어옴)
3. 사회와 격리함.

이러한 제도로 말미암아 신자가 1등 신자와 2등신자로 나뉘어지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했으며, 몇몇 교회로 들어온 수도승이 카리스마를 갖게되는 매우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 결국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려고 했으나, 현세에서 더 좋은 보상을 받았다. (카리스마는 죄악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그들이 타락함으로서 발생한 예외적인 경우이다.
그러나 교회가 타락한 시대에서 수도승이 되는 것은 자신들이 선택한 최선의 믿음의 길이었으며, 그들이 교회와 사회에 많은 좋은 영향력을 끼쳤음을 인정해야 한다.


2. 파코미우스

수도원의 창시자.

* 생애
- 280 – 346 이집트 사람.
- 아타나시우스가 그의 전기 발행.
- 처음에는 안토니우스 곁에 감.
- 323에 타벤니시(Tabennisi)에서 수도원 건립. 얼마 가지 않아서 1300명 입주하여 수도원을 증축함.
- 그의 임종시 9개의 수도원과 2개의 수녀원에 7000의 수도승과 400 수녀가 있었음.

* 수도원의 특징
- 규칙: 단체의 질서와 자신의 영적 질서를 위해 파코미우스가 제정.
- 수도원장: 모든 것을 감독하고 규칙 이탈자들을 징계함.

* 수도원 규칙
- 매일 점심과 저녁식사를 위해 식당에 모임. 채식.
- 음주 금지(당시 이집트에서는 음주 문제가 심각함)
- 수요일과 금요일은 금식 (저녁에는 물과 빵만 먹음) – 반 금식.
- 수도원에 들어올 때는 모든 재산을 가지고 와서 헌납함. 개인은 재산이 없고 수도원의 재산은 공동소유.
- 잉여재산은 빈자에게 나누어 줌.

* 수도원의 삶
- 자급자족의 원칙.
- 고행은 다소 완화됨.
- 육을 극복하고자 편하게 자지 않음: 의자에 앉아서 수면. 연약한 자들만 벽에 기대어 잔다.
- 가운을 입음 (바지는 게르만족의 의상)
- 서로 방문을 못하게 함 (각자의 방이 있었음 – 동성연애 방지. 당시의 동성연애는 어느 정도 보편성을 가지고 있었다. 단지 유대인과 기독인이 동성연애 금지함. 550년경에 유스티니안 황제가 동성애 금지법을 제정).
- 매일 두 번씩 기도 모임.
- 수도원의 근본 목적은 초대교회를 모상으로 하는 거룩한 공동체이다.
- 나머지 시간은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일을 함.
- 계속해서 수도원이 건립됨. 모든 수도원은 모 수도원의 지시를 따름.
- 파코미우스 사후에 얼마가지 않아 수도승이 50,000명으로 증가함.
- 그의 누이 마리아가 처음으로 수녀원을 건립함.
- 340년 이후로 수도원 제도는 크게 번성하여 모든 유명한 교회의 지도자들이 수도원의 정신을 이어 받음. 여러 교부들이 수도원을 예찬함.


3. 수도원 제도의 보급

- 이집트 외의 동방에서는(시리아, 소아시아) 바실리우스 수도원들만이 있었다.
- 대 바실리우스(330-379)가 제정한 규칙대로 사는 수도원을 말한다.
- 바실리우스 규칙은 파코미우스 규칙과는 달리 수도승에게 공부를 시키고 간호사 교육을 시킴. 따라서 도시 부근에 수도원이 건립됨.

- 개별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탈선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금욕생활을 잘못하여 광기가 들고, 환각을 보는 사람들. 그러다가 비참하게 죽은 사람들. 광신자들. 유대인 회당을 파괴하는 사람들.
- Hypathia 라는 여 철학자가 415 알렉산드리아에서 승려에 의해 불에 타서 죽음.


* 서방의 수도원 제도 시작

- 수도원은 동방교회의 열매였으나 아타나시우스(알렉산드리아 비숍)가 삼위일체 논란으로 트리어에 귀양갔다가 로마에 들러서 수도원을 선전함.
- 암브로시우스와 히에로니무스가 영향을 받음.
- 로마에서는 귀족 자매들 사이에서 금욕생활 바람이 불었다. 한 여성이 과도한 금식으로 사망하자 금욕생활이 공격을 당함.
- 그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성직자들이 많았다. 그 자매들이 성직자들보다 더 거룩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
- 이탈리아에서는 교회 내에서 상류층사이에 수도원과 비슷한 모임이 있었다.
- 이러한 영향으로 로마 비숍 다마수스가 성직자들에게 의무적인 독신을 요구함(갈리아, 스페인은 반대함)119)
- 안토니우스 생애가 라틴어로 번역되어 큰 영향을 받음.
- 이렇게 해서 서방에 여러 군데 수도원, 수녀원, 은둔자 집단들이 설립되기 시작함.
- 열심히 지나쳐서 거룩성의 경쟁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 어거스틴은 성직자들이 수도승처럼 살도록 하였다.


4. 베네딕트 수도원

- 서방에 여러 수도원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수도원.
- 교황 그레고리(590-604)가 베네딕트의 전기를 저술함 (과장이 있을 수 있음).
- 당시에는 서방에는 동방과 같이 수도원의 획일적인 규칙이 없었다.
- 베네딕트(Benedikt von Nursia)에 와서 서방에 일률적인 규칙이 적용됨.


* 생애

- 480 누르시아(Norica, 이탈리아 중부) 탄생.
- 로마에 유학을 갔으나 급우들의 부도덕한 행태를 보고 도시를 떠나서 피신함.
- 한 수도승의 소개로 협소하고 낮은, 출입이 어려운 동굴에서 3년 반을 보냄. 수도승이 긴 끈으로 가끔 빵을 보내줌.
- 목자들이 그를 발견한 후에 (당시 20세) 소문을 내어 많은 사람이 그에게 와서 가르침을 들음.
- 510에 작은 수도원의 원장으로 추대됨. 그가 요구하는 순종의 강도가 지나쳐서 몇 수도승들이 독살을 시도했으나, 그가 습관대로 독이 든 잔을 십자가 위에서 성호를 긋자 잔이 깨어짐. 다시 굴로 들어감.
- 또 다시 은둔자들이 그의 주위에 모임. 귀족 가문에서 자녀들을 교육차 보냄. 고트족들도 그를 방문.
- 사람들이 많아지자 12명씩 짝을 지어 여러 무리를 만듦.
- 수도승을 막대기로 한 대를 쳐서 귀신을 쫓아내고, 산 꼭대기에서 기도를 통해 샘물이 솟아나오게 함.
- 그가 사는 지방의 성직자들의 질투를 받아 그곳을 떠남.
- 나폴리 근처 카지누스 산(몬테 카지노)꼭데기에서 아폴로 신전 폐허에 예배당을 짓고 남아있던 신전지기들을 개종시킴.
- 529에 수도원을 짓고 규칙을 만듦.
- 교황 대 그레고리가 600년 부터 그 규칙을 서방교회의 수도원 규칙으로 만듦120).


* 베네딕트의 의의
- 안토니우스나 파코미우스 시대와는 다르다.
- 베네딕트의 시대는 게르만족의 침략으로 제국이 황폐화되어가는 시기였다. 서방의 기독교 문화가 파괴됨.
- 병과 기아로 말미암아 인구가 급격히 감소.
- 베네딕트 수도원은 이러한 혼란 시대에 산 꼭대기에서 빛을 발함.
- 베네딕트 수도원들은 퍼져 나감. 그들은 성서와 책을 복사해서 모든 것이 파괴되는 시기에 문화를 보존함.

* 베네딕트 규칙
- 베네딕트 규칙이 다른 규칙을 몰아내고 8-12세기에는 모든 수도원을 지배함.
- 그는 매우 훌륭한 조직가로서 경험을 통해 검증된 것 만을 규칙으로 수용함.
- 수도원은 가족과 같아야 한다. 수도원장은 자애스러운 아버지와 같다.
- 수도승의 삶은 회개자의 삶이 아니라 가족적인 삶을 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능력의 한도 내에서만 한다.

* 가족, 학교, 군대
- 수도원은 가족이며 학교며 군대이다.
- 군대에서는 완전한 순종이 요구되며, 자신의 의지를 죽이는 곳이다121).
- 규칙은 그리스도 중심이며 수도승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섬김이다.
- 원장은 수도원 내에서의 그리스도 대리이다.
- 원장의 직무는 훈육과 징벌이다.
- 원장은 아버지며 동시에 심판관이다.
- 4가지 기본죄: 고집, 자만, 불복종, 불평.
- 4가지 형벌단계: 개별적 훈계 – 공개적 꾸지람 – 회초리로 체벌 – 합창 금지
- 중벌: 식사모임에서 제외 – 합창기도에서 제외 – 형제와 교제 금지 – 그래도 회개를 하지 않으면 모든 형제가 그를 위해 기도함.
- 최후의 방법으로서 추방.

* 승려들의 맹세
- 청빈, 순결, 무소유, 침묵, 순종(원장과 규율에 대해)

* 하루 일과
- 20시에 취침해서 02시 전에 기상함.
- 12시 점심식사 (주요 식사), 저녁식사 (당시의 사람들은 대체로 두끼만 식사)
- 하루에 8번 기도: 모두 3,5시간. 기도는 서서한다.
- 하루 전체가 예배이다.
- 하루 일과는 기도와 노동 기독교의 노동 윤리의 근본이 됨. 기도를 통해 노동도 의미를 갖게 된다.
- 아침 2시에 하는 아침 기도의 예(Vigil): (모든 기도와 성서 낭독은 운율이 있다. 모두 같은 운율 마지막에만 내린다)
1. 시51:17 3번 6. 6개의 시편 11. 글로리아
2. 시4 7. 시편중의 기도시 12. 6개의 할렐루야 시편
3. 글로리아 8. 성경 낭독 13. 사도서신 낭독
4. 시 95 9. 성경의 3 부분 발췌 낭독 14. 임의의 시편중 1 구절
5. 찬송가 10. 그 사이에 대창(對昌) 15. kyrie eleison(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 이런 식으로 해서 시편 150편을 모두 낭독함(이집트의 은둔자들은 매일 150편 전체를 낭독했다고 함)

* 수도원의 음식
- 육식 금지.
- 생선과 조류는 허락됨(새는 땅에 사는 짐승보다 낫다).
- 빵, 밀가루 음식, 채소와 과일.
- 당시 알프스의 북쪽에는 과일로서 사과 밖에 없었다. 베네딕트 승려들이 과일과 채소를 전래함.
- 1/3 리터의 포도주(물에 희석한 것).
- 큰 홀에서 함께 잠.
- 14세기부터 독방이 허용(공부가 강조됨).

* 선구자: 문화 전달자.
- 그들의 구호: ora et labora! (기도하고 일하라!).
- 베네딕트 수도원은 막대한 문화적인 업적을 남겼다.
- 그들은 기독교적 정신의 선구자요 서방문화의 선구자가 되었다.
- 숲을 개간하여 밭을 만들고, 포도밭을 만듦, 수공업 발전.
- 6세기 부터 도서관을 운영함. 성서뿐만이 아니라 교부들의 저서, 고전을 필사함.
- 게르만 민족 이동의 혼란기에 승려들은 계속 교육을 받아 후세에 전수함.
- 많은 지역에서는 민족 이동 후에 읽고 쓸 수 있는 사람들은 승려들 밖에 없었다.
- 중세의 초기의 문화는 수도원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성직자가 되려면 수도원 학교에서 교육을 받아야 했고 귀족의 자녀들은 수도원에서 길러짐.
- 유럽은 베네딕트의 „ora et labora“에 의해 축복을 받음. 칼 대제의 무력에 의한 기독교화 뒤에는 수많은 수도사, 수녀들의 사랑의 봉사가 있었다.

수도원의 평가: 각자가 해볼 것.

 

XV. 교부 시대

* 교부란?

- 현재 가톨릭의 교리에 의하면 교부는 다음의 4가지 조건에 부합해야 한다.
1.뛰어난 학문성
2.거룩한 삶
3.고대 교회에 속한 자
4.교회의 인정을 받은 자

- 터툴리안은 말년에 몬타너스에 가입했다가 다시 교회로 돌아왔고, 오리겐은 여러 가지 이단적 교리로 의해 교부로 인정을 받지 못함. 가톨릭 교회에서 그들은 교사로 분류됨(scriptores ecclesiae: 교회의 저술가). 그러나 학문의 세계에서는 그들은 교부로 인정한다.
- 교부의 시대는 3세기 부터 7세기까지 (이레네우스, 혹은 터툴리안부터)
- 교부의 전성기는 4세기. 기독교의 승리로 말미암아 신학적 연구가 활발해짐. 마지막 교부는 세빌라의 이시도르이다(636에 사망)

* 교부의 특징

- 신학을 정립함. 그들은 예수님 제자들과도 관계가 없을 뿐 아니라, 제자의 제자들과도 관계가 없는 새로운 세대의 사람들. 속사도 시대의 사람들이 아니다.
- 편지를 써서 증거한 사람들(속사도 교부)이 아니라 성서에 주석을 달거나 성서를 해석함. 시대의 도전에 변증함.

* 그들의 활동의 특징

1. 그들의 신학은 독창적이다. 단순히 철학 시스템에 성경을 끼워 맞춘 것이 아니라, 믿음의 내용에 대해 깊이 생각을 해 봄. 시대의 도전에 대응하여 믿음의 내용을 변증함. 그러나 그들은 완전한 체계를 세운 것은 아니다. 체계화는 중세에 이루어짐(토마스 아퀴나스). 어거스틴의 생각도 어떠한 시스템 속으로 구속된 것이 아니다. 그의 신학의 특징은 사고의 여러 가지 출발점들을 보여주지만 틀에 짜여 있는 시스템은 아니다.
2. 교부학은 순수한 교회 신학이다. 중세와 현대는 철학과 혼합됨. 교부들은 당시의 높은 문화의 시대에 살았지만, 다루는 소재에 있어서 세속적인 것과 신학적인 것의 구분이 명확하게 있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빼어난 7명만 다룬다.

 

1. 대 바실리우스 (바실)

대 바실리우스, 닛사의 그레고리,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이 3명은 갑바도기아의 교부라고 한다. 그들은 삼위일체 정립에 큰 공헌을 함.
- 330년경 갑바도기아의 가이사랴에서 출생. 가이사랴는 오리겐의 영향을 받은 곳.
- 아버지는 기독교인 변론가.
- 그리스 교육을 긍정하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변론가가 되고자 아테네로 유학.
- 고향에 와서 변론가가 되었으나 허무함을 느끼고 은둔자가 됨.
- 당시의 기독교의 세속화에 실망함: 비숍들의 명망이 높아지고 부와 권력이 증진됨. 기독교가 문화 기독교로 발전하는 추세.
- 당시 대부분의 소아시아의 비숍들은 황제의 비위를 맞추고 사회의 분위기를 따르는 추세.
- 그는 금욕주의자가 됨. 그러나 성서적이며 신학적인 사고를 함.
-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에 동의하여 아타나시우스를 지지함.


* 수도원 건립

- 부모로부터 큰 대지를 상속받아 그 곳에 수도원을 몇 개 건립함.
- 새로운 것은 수도승이 육신을 죽이는 일 외에, 성서 연구와 신학적 문서를 연구(오리겐 저서)하는 것이다.
- 수도승들이 이웃사랑을 실천하도록 함.


* 가이사랴의 비숍.

- 364에 유세비우스 비숍이 그를 사제로 초청함. 강청에 못이겨 응답하였으나, 가이사랴에 가서는 수도승과 같은 생활을 함.
- 유명한 설교자가 됨. 설교학을 창시함. 그리스의 변론술을 설교에 도입함122).
- 370에 비숍이 됨.


* 자선과 니케아 신조.

- 자선에 눈부시게 활약함: 병원, 양로원, 급식소, 빈자 수용소등을 건립. 모두 교회가 지원함.
- 비숍이 되어 가이사랴를 니케아 신조의 요새로 만들려고 함.
- 황제 발렌스가 아리우스파 이므로 황제는 제국을 돌아다니면서 아리우스를 선전함.
- 황제의 대표관리가 그를 재산을 몰수, 고문, 추방, 사형으로 위협함.
- 바실의 대답:
„그것이 전부입니까? 나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는 빼앗길 것이 없습니다… 추방도 나는 모르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넓은 대지는 모두 나의 집입니다. 고문도 나를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나의 몸은 어차피 쇠약하니까요. 나는 죽음을 환영합니다. 나는 더 빨리 하나님께 갈 수가 있습니다.“
- 관리의 대답: „아직은 아무도 나에게 그렇게 대담하게 말한 적이 없다“
- 바실리우스의 대답: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도 비숍을 만나본 일이 없습니다“ 이말로 생명이 왔다 갔다하는 논쟁을 종식함.
- 이일 이후로 갑바도기아 교회는 바실의 영향 아래서 니케아 신조에 충실함.
- 49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 동시대 사람들이 그를 „The Great“라는 별칭을 붙여 줌


2. 니사의 그레고리

- 바실리우스의 동생. 335출생
- 변론가.
- 결혼을 했지만 승려처럼 삶.
- 플라톤, 플로틴, 오리겐의 책을 읽음.
- „성적 순결에 관하여“: 독신을 교리적으로 찬양함. 결혼은 모든 악의 근본이다. 독신자의 영혼은 하늘의 신랑과 결속되어 있다.
- 영혼과 하나님의 신비주의적 결혼을 찬양하는 15개의 설교(종교적으로 치장한 이기주의적인 생각의 영향을 받지 않았는지? 그의 독신주의와 사도 바울의 독신 장려는 다른 것이다)
- 371에 바실의 강권적인 요청으로 가이사랴 근처의 작은 도시 닛사의 비숍으로 임명됨.
- 381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그의 활약으로 성령이 세 번째 위로 승인됨.
- 오리게네스와 같이 만인구원설123)을 주장(은밀하게): 교회는 영혼이 상승운동을 하는 것을 도와주는 기관이다(오리겐의 주장). 영혼은 그리스도와 같이 세상에 대해 죽어야 한다. 영혼은 죽지 않으면 생명을 얻을 수가 없다. 성령이 영혼을 하나님께 들어 올리신다. 결국 하나님은 모든 것을 승리하실 것이다.

평가: 니사의 그레고리는 많은 신학자들과 더불어 절대적인 순결을 추구했다. 이것은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교철학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철학자들은 인간이 상승운동을 통해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한다. 신학자들은 정욕, 욕심을 죽이기 위한 많은 방법을 연구해내고 실천하였다.
성경은 영과 육의 구분을 달리한다. 성령에 의한 것이면 육적으로 보이는 것도 거룩한 것이고 영적인 것이다.
또한 신자는 성령의 은혜로 죽음을 체험한다. 이는 우리의 정욕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이다. 이것은 육신의 소욕이 죽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령에 거스리는 인간의 의지, 정욕이 죽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것도 계속 살아난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계속해서 십자가에 못밖는다. 이것이 신자의 생애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은 일생 자기 부인을 통해 성령에 순종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은혜로 사는 법이다.
승려들의 문제는 이러한 소욕이 원초적으로 일어나지 않도록 고행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목표는 달성되지 않는다.


3.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 가이사랴 서남쪽의 도시 나지안주스에서 비숍의 아들로 탄생.
- 변론가 교육을 받음.
- 바실의 친구.
- 수도승이 됨.
- 아버지 교회에 한번 방문했다가 아버지가 그를 사제로 안수함. 도주한 후 나중에 돌아와서 직무를 담당함.
- 친구 바실이 그를 이름없는 작은 도시의 비숍으로 임명하자 자존심이 상해서 거절함.
- 나중에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장로가 되어 훌륭한 변론술과 설교로 아리우스주의를 곤경에 빠트림.
-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380년에 콘스탄티노플에 와서 아리우스주의 비숍을 쫓아내고 그레고리를 비숍으로 책봉.
- 매우 특이한 인품을 가짐: 세상을 급진적으로 멀리 하면서도 명망욕이 매우 강함. 콘스탄티노플의 비숍이 된 후에 자신의 예민한 성격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겪자 다시 은둔자가 됨. 매우 예민한 성격. 웅변가, 시인. 시로 자신의 인생을 출생부터 콘스탄티노플을 떠날 때 까지 묘사함.


4.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모스
황금의 입. 크리소스토무스, 존 크리소스톰. 매우 훌륭한 교부.

* 특징

- 347 안디옥 출생. 안디옥은 동방제국의 두 번째 수도.
- 이교 변론가들로부터 철학 교육을 받고 다소의 디오도르(후기 안디옥 학파의 거장)로부터 신학을 배움.
- 교의학 보다는 성서 해석에 치중함 – exegesis. 교리적인 표현을 피함124).
- 성서해석자. 그리스 교회 최대의 설교자.
- 90개 마태복음 설교, 33개 로마서 설교가 남아있음125).
- 교회를 교육시키고 병자와 빈자를 잘 돌보아 줌.

* 고행자와 목자

- 372에 세례.
- 은둔자가 되려고 했으나 어머니의 만류로 도시에 살면서 일생 동안 고행함. 고행이 너무 철저해서 항상 연약한 상태로 삶.
- 당시 안디옥의 교회 상황은 매우 쇠퇴함. 3개의 교회로 분립됨: 아리우스파, 니케아 신조파, 중도파.
- 381에 강독자로 임명(사제가 아님). 두렵고 떨림으로 일하다가 자신이 아직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여 동굴로 도주하여 „사제의 직무에 관하여“라는 책을 저술.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과제와 인간의 무능력에 관해서 저술.
·사제는 목자이다. 그는 모든 양을 감독해서 한 명이라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제는 거의 없다. 그래서 동굴로 도망을 함
·몇 년 후에 다시 사제직에 도전을 함.

* 안디옥의 설교자

- 386에 사제가 됨.
- „설교가 나를 건강하게 만든다. 내가 입을 열자마자 모든 피곤증이 사라진다“: 그는 왜소한 체격에 목소리도 작았다. 고행을 통해 매우 약질이 됨.
- 그가 설교하는 날에는 교회가 터져 나갔다. 속기사들이 속기를 함.
- 그의 설교는 사회봉사도 강조함. 교회 앞에 수많은 거지, 환자들이 몰려 듦. 신도들에게 나가서 그들을 돌보아줄 것을 격려함.
- 그러나 경마를 하는 날이나 축제의 날에는 교회가 텅텅 비었다.
- 387에 세금의 대폭 인상으로 도시에 폭동이 일어남. 군중이 관청으로 몰려가 시의원의 집을 방화하고 황제의 상과 황후의 상을 넘어트림.
- 황제의 무서운 보복이 오기 전에 그는 황제를 진정시키고 백성을 훈계함. 황제가 용서함: 21개의 황제상 설교.

* 콘스탄티노플 비숍 – 개혁자

- 397 콘스탄티노플의 비숍이 죽자 그 자리를 놓고 세력다툼이 일어나자 황제가(데오도시우스의 아들) 크리소스토모스를 마차로 납치하다시피 하여 콘스탄티노플로 데려와서 비숍으로 세움.
- 비숍궁을 치장하고자 주문한 거대한 대리석을 팔아서 병원을 건립함.
- 간음자, 비도덕적인 성직자들을 해고시킴.
- 도시로 이주한 고트족들을 돌보아 주고 전도를 함.
- 궁전의 사치와 귀부인들의 지나친 사치를 공격함.

* 추방당함

- 그의 개혁정책에 불만을 품은 자들(그의 용감한 설교에 상처를 받은 자들), 적수들과 황후까지 합세하여 403에 그를 귀양보냄.
- 귀양을 떠난 지 하루가 못되어 황후(유독시아)가 유산을 하자 하나님의 벌로 생각하고 황후가 그를 다시 불러들임.
- 두 달 후에 황후가 그를 다시 추방함. 그날 교회가 전부 불타버림.
- 계속 귀양을 다니다가 지쳐서 절명함. 그의 마지막 말: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이 찬양 받으시리로다!“


5. 암브로시우스

- 트리어에서 갈리아 총독의 아들로 태어남.
- 로마에서 변론술 공부. 빠른 출세.
- 30세에 북 이탈리아(밀라노 수도) 총독으로 임명.

* 총독에서 비숍으로

- 374 아리안파 비숍 아욱센티우스(Auxentius)가 죽자, 비숍 선거 시 큰 소동이 일어나서 암브로시우스가 총독으로서 진압하러 왔다.
- 갑자기 군중 가운데서 어린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Ambrosius episcopus!“. 고대에서는 무질서한 상황에서 아이의 목소리를 신의 음성으로 여기는 전통이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암브로시우스를 비숍으로!“를 외쳐서 만장일치로 비숍으로 임명됨.
- 그는 한사코 반대함: 그는 신학자도 아니며, 아직 세례도 받지 못한 교리문답자 였기 때문에 자격이 없다고 생각함. 8일만에 세례와 비숍 안수식이 거행됨.
- 당시 로마가 쇠락하고 있던 터라 지도층의 자녀들이 교회의 직분에 관심을 가지는 추세였다. 암브로시우스가 비숍이 된 사건은 당시의 경향을 잘 보여줌. 총독과 비숍의 직분은 바꿀 수 있는 것으로 여김.
- 암브로시우스는 모든 재산과 땅을 팔아서 교회의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본인은 고행자의 삶을 삶. 일생 거의 반 금식(저녁 한 끼만 식사)을 함.

* 아리우스 주의 격파

- 그는 신학 공부를 시작함.
- 그리스어에 능통하므로 클레멘스, 오리겐, 바실, 필로의 서적을 읽고 그들에게 경탄을 함. 따라서 서방신학자들이 경계하던 그리스의 과학적 신학을 수용하게 되었다..
- 아리우스 주의를 격파함. 아리우스 주의가 서방에서 물러난 것은 그의 공로가 크다.

* 설교가

- 그는 훌륭한 설교가요 웅변가이다. 빼어난 설교가.
-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영향을 받아서 알레고리적 해석을 함. 그는 서방에 알레고리적 해석을 도입함.
- 미혼 여성을 찬양함. 그러나 미혼은 의무가 아니라 좋은 일이라고 함.

* 교회 군주
(그는 비숍의 지위를 공적이고 정치적인 지위로 부상시킴. 그는 원래 정치가 출신이었다)

- 국가의 횡포를 비난함.
- 390에 황제의 친구인 데살로니카 사령관이 인기 있는 전차경주자를 부도덕죄로 감금함. 시민의 폭동으로 그가 잡혀서 린치를 당함(비교: 행17. 데살로니카 사람들은 매우 감정적).
-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시민을 아레나로 유인하여 7000명을 죽임.
- 암브로시우스는 황제를 자신의 구역(황제가 당시 밀라노에 살고 있었음)의 신자로 생각하고 회개를 시킴.
- 참회의 눈물과 회개의 자세를 보이라고 촉구함: „다윗왕도 그가 죄를 범한 후에는 회개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최고의 명예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황제는 교회에서 공식적인 회개를 해야 한다“
- 황제가 회개의 옷을 입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함.

# 이 사건을 어떻게 봐야 할지 각자 생각해 볼 것.


* 교회 권력의 남용

- 한 작은 도시(칼리니쿰)에서 신자들이 유대인 회당을 불사름.
- 가해자들이 변상할 것을 판결받음. 황제가 승인함.
- 암브로시우스는 황제의 판결에 이의를 제기함: 교회에 공개적으로 죄를 돌리면 안 된다. 종교의 관심사는 세속 권력의 관심사 위에 있다고 함. 그는 황제에게 그 판결을 취소하지 않으면 성찬식에서 제외시킬 것을 위협함.
- 황제가 양보함.
- 이러한 교회권력의 남용은 교회사에서 나쁜 전례가 된다.

# 그는 한편으로는 세속적 권력과 영적 권력을 구분함: 황제는 주(kyrios)가 아니라 교회의 아들이다(filius eccesiae). 그러나 그는 황제의 이교도들에 대한 강제 정책을 지원함. 그런데 그는 정치적인 사람은 아니었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 서양의 교회 음악의 아버지

- 386 황제(발렌티니안 2세)가 암브로시우스에게 10개의 교회 중에 1개를 아리우스파에게 줄 것을 명령함.
- 그가 불복종하자 황후가 그에게 출시를 명령함.
- 그는 교인들을 교회로 소집함. 군인들이 교회를 둘러싸고 한 명도 밖에 나오지 못하게 함. 며칠 동안 전부 갇혀 있었음.
- 암브로시우스의 견해: 궁전은 황제에게 속하지만 교회는 사제에게 속한다! 나봇이 자신의 포도밭을 내어주지 않는 것처럼 암브로시우스도 그리스도의 유산을 내어줄 수가 없다. 황제는 교회 위에 서 있지 않다 (Pontifex maximus?126))
- 어거스틴의 보고(고백록9,7): „그 경건한 교회(교인들)는 그들의 비숍과 함께 순교할 각오로 교회 안에서 거룩한 포로로서 밤에 깨어서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때 사람들이 불평과 분노로 멸망하지 않게 하고자 동방에서 하는 것처럼 찬송가의 시편 노래가 도입되었습니다“ 그의 어머니 모니카가 교회에 있었음.
- 암브로시우스는 사람들이 깨어있게 하고자 대창을 도입했다.
- 노랫소리를 들은 군인들이 따라부르기 시작하자 결국 황후가 항복함.
- 386의 충돌은 아리안주의였던 황제편의 마지막 항거였다127).
- 더 큰 의의는 교회가 자주권을 갖게 된 것이다: 국가가 교회의 일에 간섭을 할 수가 없다.
- 동방의 황제 교황주의, 즉 황제가 교회와 종교적인 영역에서도 대권(大權)을 가지고 있다는 이해는 서방에서 패하고 말았다.

* 그 외 업적

- 콘스탄틴이후로 교회에 많은 사람이 몰려옴. 교회가 사회문제를 위임받아서 포로, 고아, 가난한 자를 돌보고, 그들을 교육시키고, 노예들을 보호하고, 어려운 사람들의 결혼까지도 주선함. 익서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힘써야 할 일이다.
- 재판업무: 국가의 재판업무를 위임받아 공정한 재판에 힘씀.
- 제국교회로서의 기반을 닦음(부정적인 측면).
- 교회를 단단히 하고 세우는데 상당히 큰 공헌을 했다. 이것이 또한 그의 약점이기도 하다.


6. 히에로니무스(제롬)

- 342 달마티아(구 유고슬라비아) 출생.
- 로마에서 유학.
- 공부를 마치고 세례를 받음.
- 승려가 되기로 결심. 즉 동방의 사막으로 가서 은둔자가 되려고 함.
- 뜻을 같이하는 자들을 모아서 동방으로 감.

* 사막의 은둔자.
- 375에 안디옥 동편에 있는 칼키스 사막에 자리를 잡음.
- 안토니우스와 같은 투쟁을 하였음.
- 투쟁을 이기기 위해 여러 가지 수공업 일을 하고 책을 필사하고, 기독교로 전향한 유대인으로부터 히브리어를 배움.
- 그는 히브리어를 잘할 수 있는 유일한 교부였다.

* 베들레헴 수도원 건립
- 여러 비숍들을 사귐.
- 로마에서 다마수스 비숍의 조언자로서 활동.
- 다마수스는 군주와 같이 군림을 하는 첫 교황이었다. 로마의 세력자들과 교제를 함.
- 다마수스의 총애와 세력자들과의 친분으로 자신도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됨.
- 다마수스가 죽자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아서 385에 베들레헴으로 떠남.
- 돈 많은 과부128) 귀족 파울라와 그녀의 딸 유스토키움129)과 그의 금욕적 생활에 심취한 여러 명의 귀족 자매들이 그를 따라감.
- 파울라130)의 돈으로 베들레헴에서 두 개의 수도원을 건립함. 파울라를 위한 수녀원과 자신을 위한 수도원. 충분한 숙소와 학교를 갖춘 큰 수도원이었다.
- 파울라의 돈과 그를 존경하는 수녀들의 섬김으로 그는 일에 착수할 모든 것을 갖추었다: 책과 낭독자, 속기자, 필사자, 조수, 학생들.

* 34년간의 삶 (386 - 420)
- 34년간 학자로서 매우 열심히 일함.
- 알라리히가 410년 서로마를 정복하자 많은 로마 유민이 수도원으로 피신 옴. 파울라의 돈이 떨어지자 자신이 상속받은 땅을 매각함.
- 훈족과 아랍인들의 약탈로 말미암아 수도원의 사람들이 도주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음.
- 416 펠라기우스 주의자들(광신적인 승려, 유랑하는 깡패)이 복수로 그의 수도원을 불태움.
- 420년에 사망.

* 학자로서의 히에로니무스
- 그는 어거스틴 다음으로 학식이 높은 교부이다.
- 그는 동방과 서방의 지식을 연결하여 서방에 그리스 교부들의 작품을 소개함. 특히 오리겐의 작품(그리스어)을 라틴어로 번역함.
- 많은 주석서와 설교를 저술.
- 대단한 다혈질로 논쟁을 좋아하고 욕설도 아끼지 않음. 크리소스토모스와도 사이가 나빴다.
- 예수님의 동생들이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 난 아들이라는 주장에 대해 반대하여 쓴 책: „마리아의 지속적인 동정녀 상태에 대하여“
·마리아는 승려들에게는 처녀성의 모상이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요셉의 전처의 아들들이다.
·요셉은 마리아와 단지 명목상의 결혼을 한 것이다 (요셉의 결혼)131)
- 문제는 로마 비숍이 400년경에 이 의견을 받아들인 것이다!
- 20년에 걸쳐서 다마수스의 부탁으로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함. 당시의 번역을 참조함. 이것은 큰 업적이다 13세기에 불가타(Vulgata, Vulgate)라는 이름이 지어짐. 이것은 가톨릭의 정경이다.
- 매우 박식하지만 성격이 균형잡히지 않고 다혈질임. 열심히 대단하고 명예심이 많고, 상대방을 가차없이 공격함.


7. 어거스틴 (354 - 430)
Aurelius Augustinus.

그는 고대 교회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다. 인품, 학식, 신앙의 모든 면에서. 그의 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경외심으로 차 있어서 읽으면서 감동을 받는다. 1507에 루터가 그를 재발견함(1517에 토론을 위한 95명제서를 비텐베르크 교회에 붙이기 10년 전). 중세에 그의 신학이 중요하게 취급되었지만, 그는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다.

* 고백록의 특징

- 성숙한 어거스틴이(49세) 과거의 35세까지의 자신의 삶을 돌아본 것.
- 과거에 자신이 지은 죄를 그대로 묘사함. 고백록은 하나님과의 대화이며, 죄 사함의 은혜와 자신을 인도하심에 대한 감사기도이다.
- 그가 묘사한 죄는 사실은 특별한 죄가 아니다. 당시의 젊은이들이 흔히 지을 수 있는 죄.
- 왜 자신의 죄를 그렇게 비통하게 여겼는가? 집필한 당시에 그는 이미 성인(聖人)이 되어 있었음. 그는 고행하는 승려의 삶을 살고 있었다.

* 소년기

- 354 작은 도시 타가스테에서 출생(오늘날의 알제리)
- 아버지는 비신자(혹은 개인 믿음이 없는 신자)이며 시의 관리. 어머니는 모니카, 독실한 신자. 강한 인품의 소유자.
- 어머니의 배려로 어려서 교회에서 교리문답 과정을 마침132).
- 변증가가 되고자 카르타고에서 변론술, 철학, 법학을 공부.
- 16세 때 부친이 돈이 떨어져서 1년간을 다시 고향에서 시간을 보냄. 그때 여러 가지 죄를 지음. 특히 정욕 죄로 몹시 고생함.
- 바로 그 후에 카르타고에서 한 소녀를 알게 되어 내연의 처133)로 맞아들였으나 원치않게 아들을 낳음: 아데오다투스(371-387)
- 그 여자를 사랑했지만 신분이 낮은 여자라서 결혼을 할 수가 없었음.


* 그의 발전 단계

- 373(19세)까지 교회에 속함.
- 373에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134)를 읽고 진리를 위해 살 것을 결심. 키케로는 사람들에게 지혜(철학)에 귀의할 것을 권고함. 그는 키케로에게 부족한 것은 단지 예수님을 몰랐다는 것 한가지 뿐이라고 생각. 그는 아직 철학과 성경을 구분하지 못함.
- 그 이후에 성경을 읽기 시작. 그러나 잘 이해할 수가 없어서 실망함. 성경 언어가 철학적이지 못한 것도 큰 원인.

- 375(21세)에 마니교에 입교135). 그는 당시에 카르타고에서 변론술을 가르치는 교사로 있었음. 마니교는 기독교를 철학으로 정리, 정돈하여 가르친다는 선전에 넘어감. 그러나 그는 얼마 가지 않아서 그들에게 대단한 철학 지식도, 진리도 없음을 간파하고 출교함.
- 그가 한동안(8년) 마니교에 심취했던 이유(375-383):
·자력구원. 신화적 우주론으로 세상의 구조를 잘 설명함. 자신의 노력으로 빛의 세계에 돌아감.
·혼합종교: 기독교의 좋은 것을 추려서 타종교와 합쳐서 철학적, 이성적으로 재구성 통일교.
·이원론: 세상을 더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이성적, 논리적. 선악의 구별도 뚜렷하다.
·악은 스스로 근원을 가진다(빛의 나라, 어둠의 나라가 별도로 존재한다): 악에 대해 하나님이 책임이 없다. 그의 큰 질문은 „창조주 하나님이 선이시면 악은 어디에서 나왔는가?“이다.
·구약으로보터의 해방(구약은 기독교적이 아니다)

- 384(30세)에 로마에서 잠시 믿음에 대해 회의에 빠져서 향락을 즐김. 그러다가 중병에 걸림. 믿음으로 병이 낫는다는 생각을 조롱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하지 않음. 그러나 자신이 죽으면 어머니가 슬퍼할 것을 생각하여 어머니의 기도를 생각함: „그녀의 눈물은 금과 은을 위한 것이 아니요, 그녀 아들의 영혼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여 당신은 그녀의 기도를 들으셨나이다(5,9)“ 모니카의 기도.
- 병이 낫고 어머니의 도움으로 죄 인식과 성경에 대한 신뢰가 생기기 시작함.

- 384(30세)에 밀라노로 변론술 교수로 초청됨(당시의 대학교수). 1년 후에 모니카, 내연의 처, 이들이 따라옴.
- 처음에는 암브로시우스의 변론술을 듣기 위해 교회에 감.
- 교수로서 명망이 높아지고 새 친구들과 사귐.
- 모니카의 노력으로 10살의 소녀와 약혼하게 됨136).
- 내연의 처는 정절을 지키겠다고 맹세하고 눈물을 흘리며 고향에 돌아감(로마법으로는 신분이 다른 사람들과는 결혼 금지). 어거스틴이 몹시 괴로워함.
- 약혼자의 결혼 적령이 안 되어 2년을 기다리는 동안에 다시 내연의 처를 구함(합법적).

- „악의 근원137)“ 문제를 해결하고자 밀라노에서 신플라톤 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됨.
·플로틴의 가르침을 따라 실습을 통해 영혼과 육신이 분리되어 여행을 떠나 변치 않은 빛을 보는 경험을 하게 됨138).그는 나중에 멀리에서 한 음성을 들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나는 마음으로 듣는 것과 같이 그 음성을 들었다“ 그는 나중 이것을 자력구원이라고 생각하고 이것을 떠남. 이것은 자신의 노력을 통해 „하나님을 보는“ (Gottesschau)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Occultism!
·신 플라톤 주의를 통해 하나님은 영이라고 확신을 갖게 됨(요4:24에 있는 말씀을 진작 보지 못함)
- 바울 서신을 읽기 시작함. 그러나 여러 가지를 신플라톤 주의로 읽음. “육“이라는 말을 인간의 악한 의지로 이해하지 않고, 감성적인 것으로 이해. 따라서 결혼이라는 것이 크게 바람직하지 않으며 기독교의 이상은 금욕주의라고 결론을 내림. 세속적으로 돈을 버는 변론술 교수직도 그리스도인이 완전을 이르는 데에 합당지 않다고 생각함. 그러나 이것을 쉽게 포기할 수가 없어서 격렬한 정신적 싸움으로 고통을 받음.

- 이러한 생각에 잠겨 그는 큰 고통 속에서 정원으로 달려나갔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큰 마음의 고통 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크게 탄성을 질렀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나의 수치(불결함)가 종말을 고하게 하소서! 그때 갑자기 아이들이 놀이를 하면서 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Tolle lege, tolle lege!: 집어라 읽어라!“ 그는 이것을 하나님이 주시는 음성으로 받아들이고 방에 들어가서 성경을 탁 펼치고 읽은 구절은 롬13:13이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 이 말씀을 자신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회개를 할 힘을 얻었다. 그리고 직업과 결혼을 포기(파혼)함.
- 387(33세) 부활절 토요일에 아들과 함께 세례를 받음. „그 시간부터 우리는 불안했던 과거의 삶으로부터 해방이 되었다“

- 이러한 삶의 변화에 어머니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 모니카의 최후의 말. 북 아프리카로 돌아가고자 로마의 항구 오스티아로 가서 있을 때 숨을 거둠.
„아들아, 이승에서는 나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은 하나도 없다. 내가 이 땅에서 더는 할 일이 무엇이며, 내가 왜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를 모르겠다. 모든 시간적인 것은 사라지기 때문이다. 내가 살고자 원했던 한가지 이유는, 내가 죽기 전에 네가 믿음이 있는 신자가 되는 것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네가 이제 세상의 것을 멸시하고 하나님의 종이 된 것을 보았으니, 하나님께서 이제 이것을 나에게 충만하게 선사하신 것을 알겠다. 내가 세상에서 할 일이 더 무엇이 있겠는가? (9,10)“

이 말의 깊이를 생각해 보자: 일반적으로 자식에게 대한 어머니의 가장 큰 소원은 자식의 출세와 결혼을 잘하는 것이다. 이제 어거스틴은 모든 것을 버렸다. 명망있는 교수직을 버렸다. 귀족집의 딸과의 혼인도 버렸다. 그는 단지 하나의 평범한 신자가 된 것이다. 이것이 아들이 진정한 신자가 된 증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모니카는 죽기 전에 이 기쁨을 고백함. 여기에 모니카의 위대함이 있다.


* 교회를 위한 봉사

- 타가스테에 돌아와서 상속받은 집을 수도원 비슷하게 개조하여 친구들과 함께 거주함. 말씀과 기도에 집중.
- 391(37세) 항구도시 히포에 여행. 히포의 신자 과반수가 도나투스파였다. 신자들이 거의 강제로 그를 사제로 만듦. 그는 그 당시까지만 해도 성경지식이 부족하고 확고한 믿음이 없었음. 사제가 되는 것이 자신을 성경적인 사람으로 변화시키려는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이것을 승낙함.
- 점차로 신플라톤 주의의 사상을 버리고 성서적이 되어감. 바울 서신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고대 교회의 바울 서신의 대가가 됨.
- 395에 히포의 감독139)(Hippo Regius)이 됨.
- 그의 큰 두 가지 임무: 도나투스파와 펠라기우스파와의 싸움. 이 싸움에서 그의 „교회론“과 „죄와 은혜론“이 발전된다. 그의 교회론과 은혜론을 연구할 때 이러한 배경을 고려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약점이 크게 보인다.
- 그는 교회 옆에 수도원 비슷한 것을 지어서 신학교육을 시킴. 성직자는 금욕적 삶을 살도록 함 (그 시대에 적합한 듯하다).


* 그의 교회론 - 도나투스파에 대한 승리

- 도나투스파 주장의 근본: 대죄를 지은 사제의 성사는 효력이 없다(노바시안 파도 대죄자를 교회에서 제거시킴).
- 가톨릭 교회: 간음죄를 범하거나 핍박시 성경을 넘겨준 사제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준 교회들이 있었으므로 그 효력을 인정하는 분위기.
- 콘스탄틴이 가톨릭 교회편에 서자 그들은 황제를 거역함.
- 신학적 문제에 지역적(영남파, 호남파), 정치적 문제가 가미됨 폭력사태
- 성사에 관해서는 어거스틴이 요15:3을 근거로 도나투스파에 대항함: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그리스도는 신자가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정결하다고 하시지 않았다. 정결하게 하는 것은 물이 아니고 말씀이다. „여기에서 말씀을 제외하면 물은 단순한 물일 뿐이다140)“.
- 411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도나투스파를 최종적으로 정죄함. 그들은 교회로 들어오거나 지하 투쟁을 함.

- 그의 교회론 (그의 신학의 약점)
·교회는 유형의 구원 기관이라는 키프리안의 주장을 받아들임(오늘날 가톨릭). 구원은 교회의 성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사랑은 모든 은사를 능가한다. 사랑은 단지 일치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교회일치). 사랑이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국가가 불순종하는 도나투스파를 가톨릭 교회로 끌고 올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름141). „ 유형교회의 일치를 강력하게 주장142). 그러나 폭력을 신학적으로 정당화 시킨 것이 문제이다.
·교회는 사제 가운데에서도 악한 사람들이 있다. 성도의 모임(communio sanctorum)은 선택받은 자의 모임이다. 하나님께서 초청하시고 믿음을 선사하신다. 하나님만이 누가 구원을 받았는지 알 수 있을 뿐이다. 택한 자들의 수는 한정되어 있다. 끝까지 견딜 수 있는 것도 선물이다(donum perseverantiae: 견인의 은혜!). 유기(dammatio)도 있다(이중예정). 유기는 하나님의 비밀이다.


*** 펠라기우스와 은혜143)
(매우 중요한 테마이므로 주의를 잘 기울일 것. 어거스틴의 예정론, 속박의지론은 어떠한 환경에서 나왔는지를 살필 것)

- 펠라기우스 주의: 인간의 완전타락 거부 복음의 핵심을 거부하는 이단. 어거스틴의 예정론은 펠라기우스와의 싸움에서 완성됨.
- 예정론은 여러 가지 면에서 비판을 받을 수가 있지만, 예정론 비판을 하기 전에 먼저 펠라기우스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할 할 수 있어야 한다.
- 그는 어거스틴의 가르침을(„인간이 선행을 하는 데에 있어서, 혹은 자유롭게 되는 데에 있어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체계적으로, 큰 소리로 반발을 한 사람 중의 대표자.

펠라기우스: 370 브리타니아 출생. 로마에서 법학공부. 출세하는 것을 포기하고 수도승이 되어 금욕생활을 함. 유능하고 박식한 인물. 많은 책을 저술함. 설교가로서 당시 로마의 도덕적 타락을 공격함. 또한 설교에 어거스틴의 은혜론을 공격함. 그의 은혜론은 당시의 교회로서는 새로운 가르침이었다. 어그스틴이 이교도의 운명주의를 가르친다고 비판.
그는 로마인에게 산상수훈을 지향하는 진지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성공적으로 전파함. 그는 진지한 사람이었다. 신자는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지켜서 죄 없는 삶을 살 수 있다고 가르침

* 펠라기우스의 주장
(포인트마다 반박해볼 것)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다. 인간은 선과 악을 택하고 실행할 능력이 있으며(죄를 짓지않고 선을 행할 능력), 자신의 타고난 능력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완수할 수 있다.
·이러한 타고난 선(Bonum naturae)을 그는 찬양하기까지 함. 이교도도 본성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최고의 덕을 발전시킬 수 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율법을 주셨으면 이는 인간이 성취할 능력이 있음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앞에서 선행으로 공적144)을 쌓을 수가 있다.
·그렇다면 죄란 무엇인가? 죄는 인간 본성의 상태나 의지의 경향(죄를 짓고자 하는 마음)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인간에게 범죄로 강요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원죄의 교리를 배격.
·아담은 단지 인간에게 좋지 않은 모범이(나쁜 예) 되었다. 그의 죄가 우리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다. 단지 악한 선례의 매력이 모든 개개인을 범죄케하는 기회가 된다.
·아담은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어차피 죽었을 것이다.
·„우리 죄를 용서하옵시고“라는 기도문을 거부함. 우리가 죄를 짓는다면 우리의 의지가 죄를 범하는 것이다. 우리가 죄를 지을 의무는 없다. 따라서 이러한 기도는 가장된 겸손이다.
·세례를 통해 인간은 원 상태로 회복된다. 즉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 범죄하기 전의 아담이 된다.
·세례 교인은 죄 없는 삶을 위해 노력해야 하며 또한 죄 없는 삶을 누릴 수가 있다.
·성령은 무흠한 삶을 위한 지도자이다.
·은혜란 단지 인간이 더 선한 사람이 되고자 할 때에 필요한 것이다.
·예수님은 누구인가? 아담의 나쁜 예에 반하여 좋은 모범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은 완벽한 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가끔 흔들림. 즉 때로는 인간의 범죄의 필연성을 인정하기도 하고, 세례 시에는 아무런 공적없이 그리스도의 죄 사함으로 칭의가 이루어진다고 함.

- 그의 가르침은 415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인정을 받음.
- 문제는 펠라기우스가 당시의 일군의 신학자들의 의견을 대변하고 있다는 것이다(주요 신학자: 켈레스티우스, 줄리안). 그는 그 의견을 솔직하고 체계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주로 동방교회에서 많은 사람이 도덕적인 관심사로 말미암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며, 서방에서도 많은 동조자들이 있었다.
이것은 당시의 비숍들의 수준을 보여준다. 속사도들(클레멘스, 이그나타우스)로 부터 기독교에 들어온 공적주의가 꽃을 피운 것을 볼 수가 있다. 이제 꽃이 떨어질 때가 되었다. 이것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자가 어거스틴이다.


* 어거스틴의 주장

-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와 논쟁 이전에 하나님께로 귀의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신앙을 갖는 데에 있어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존함을 확신함: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의지를 변화시킬 수가 없고 순전하게 하나님의 은총에 의지한다.
- 그는 펠라기우스와의 싸움에서 원죄론과 은혜론을 발전시킴.
·인간에게는 낙원에서는 자유의지가 있었으나 타락 후에는 완전한 죄의 노예가 되었다.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수가 없다(롬5:12145)근거)
·사람이 구원의 음성을 듣고 화해의 말씀에 마음을 여는 것은 자기의 공로가 아니다. 죄인은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이것은 순전히 선택의 은혜에 기인한다 거역할 수 없는 은혜
·인간의 의지도 하나님이 변화를 시켜주셔야 선행을 할 수가 있다.
·세례받은 사람도 자신의 노력을 통해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성도의 견인).
·예정론을 가르침: „믿음은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선물이다!“
·예정론은 비밀로서 토론으로 결말지을 수 없는 가르침이라고 말함.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작이며 마지막이라고 함.
·그는 이중예정을 가르침: 구원받을 자와 멸망받을 자는 이미 예정되었다.
·이것을 칼빈이 수용함. 루터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가르치면서도 더 이상은 나가지 않았다(deus absconditus: 숨겨진 하나님.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 우리도 침묵해야 한다)

- 그의 은혜론은 인류의 문명을 뒤집어 놓았다. 당시의 지성인들을 혼란스럽게 하였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선하고 질서있는 분이 아니라 자의로 행하시는 분으로 여겨졌다. 인간이 태생부터 악해서 선한 행위를 할 수 없고 하나님만이 선하시고 하나님만이 인간을 선하게 하실 수가 있다는 어거스틴의 주장은 인간이 이룩한 모든 것을 부인하는 행위이다. 이것을 발견한 것에 그의 위대함이 있다.

- 415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펠라기우스를 인정함.
- 418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펠라기우스 주의는 정죄 됨. 교황이 공인함.
- 431 에베소 범 종교회의에서도 그는 정죄당함.
- 동방에서는 이 문제가 완결되지 않음.
- 그러나 어거스틴의 예정론은 펠라기우스의 논쟁에서 그를 지지한 사람들에게도 반감을 삼. 서방에서도 어거스틴의 가르침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음.


* 펠라기우스 정죄의 의의

- 펠라기우스의 주장은 새로운 가르침이 아니라 당시 일부 교회들의 생각을 솔직하게 체계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는 합리주의자와 도덕주의자 였으며 죄와 은총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즉 그의 도덕주의는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은총을 이해하지 못하게 하였다(Loofs)
- 그의 생각은 „죄인을 믿음으로 의롭게 하시는“ 칭의 교리에 가장 큰 집단적 도전이었다.
- 따라서 어거스틴의 승리는 도덕주의 경향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일군의 교회 지도자들에게 경각심을 주고, 교리를 복음의 핵심으로 돌리는 데에 큰 공헌을 했다고 볼 수가 있다.
- 펠라기우스 주의는 기독교가 국교가 됨으로써 교인의 도덕심이 해이되어 있을 때 이에 대한 반항으로 일어난 도덕주의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실제로 로마에 살면서 로마 교인들의 해이한 삶에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 반펠라기우스 주의

- 남부갈리아 지방에서는 승려들이 어거스틴의 가르침에 반발함. 실제적으로 많은 사람이 혼동을 일으킴. 그 해결책으로 파우스투스 감독이 반(Semi)펠라기우스 주의를 주장.
- 신인협력설: cooperatio hominis cum deo.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이 협력함.
- 인간은 타락을 했지만 완전히 타락한 것은 아니다. 자유의지는 소멸되지 않고 약화됨. 하나님이 약화된 인간의 의지를 도와준다. 은혜는 인간의 믿음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동행하며 인간의 의지를 계발시켜준다 펠라기우스주의와 크게 다를 바 없지만 논리의 합리성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음.
- 예정도 예지예정으로 바꿈. 하나님은 누가 구원을 받으실지를 알고 계시다.
- 529 오렌지 공의회에서 세미 펠라기우스 주의가 정죄 됨. 어거스틴의 이중예정과 거절할 수 없는 은혜도 채택되지 않았지만 어거스틴의 기본노선을 따름.
- 그러나 중세기에 세미 펠라기우스 주의가 부활함146).

- 어거스틴에 의해 칭의론이 서방신학의 중심이 됨.
·어거스틴의 공로는 은혜론을 확립한 것 종교개혁의 sola gratia.
·그러나 그의 가르침은 서방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다.
·종교개혁자들이 그의 칭의론을 발굴함147). 인본주의, 계몽주의, 현대신학은 칭의론에 문제 제기.


* 신국론 (De Civitate Dei)
„세상에서 가장 큰 국가가 멸망하였으나, 하나님의 국가는 영원히 서 있다“

- 로마(영원한 도시)가 410년 알라리히(서고트족)에 의해 약탈을 당한 후에 쓰임148)(당시의 수도는 Ravenna). 이방인들의 주장: 로마는 이방신들에 의해 대국으로 성장했으나, 기독교신이 들어와서 망하게 되었다 설득력 있는 주장. 신국론을 통해 이 주장에 대한 답을 함.

- 그의 대답: 로마가 과연 대국이었는가? 영토확장은 단지 전쟁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의“ 개념에 반하는 것이다. 의가 없는 왕국은 강도의 집단과 같다149). 어거스틴은 로마제국을 전체 역사에 있어서 정의가 없는 국가로 보았다. 그는 미래에 올 기독교 국가는 인접국가를 침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 그의 국가론은 가족에서 출발함. 아담의 가족이 너무 커져서 나누어진 후, 그들이 모여서 국가로 형성됨.
- 당연히 군주국을 국가의 모델로 간주함. 가장이 가족의 머리가 되는 것과 같이, 왕은 국가가족의 머리가 된다.
- 왕의 가장 큰 위험은 자신을 숭배하게 하는 데에 있고, 지금까지의 거의 모든 왕들이 이러한 만용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 기독교적 왕들은 자신을 잘 다스려서 올바른 정치를 할 것이다. 그의 이상은 소국. 많은 소국들이 세계 평화를 가져올 것이다150).

- 국가는 정의를 실천하는 것 외에 더 높은 목표를 가지고 있다. 국가는 신자가 천국에 이르기까지 훈육을 하는 데에 이바지해야 한다. 다음의 3가지 방편을 사용한다:
1.평화를 보장한다.
2.믿음의 적들로부터 보호(게르만족).
3.이단 법령을 만들어서 이단들을 교회로 데려올 것.
- 국가는 인간의 원죄때문에 이상적인 기구가 될 수는 없지만, 평화와 질서를 위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구이다. 교회를 섬기는 국가는 더 높은 가치를 가지게 된다. 신자는 국가를 위해 일해야 한다.

- 교회는 보이는 구원의 기관이며 의인과 죄인이 함께 있다(corpus mixtum). 그러나 그 중심은 진정한 신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 신국,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진정한 신자의 왕국은 역사의 긴 과정에 있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에 대해 승리를 쟁취할 것이다.
- 신국의 시민은 살아있는 신자만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영으로 있는 죽은자들과 천사들도 포함한다.


* 그의 죽음

- 반달족이 북아프리카로 침입함.
- 430년 도시가 포위된 후 공격을 당하기 전에 죽음.

 


XVI. 기독론 논쟁 (4,5세기)

I. 아리우스 논쟁 전까지

* 두 가지 기본적 질문

- 교회가 외부적으로 평화를 누리게 되자 내적으로 큰 싸움이 시작되었다. 수십년 동안 교회를 손상시켜 교회가 힘을 많이 소진함. 교회가 해결할 능력이 없게되자 황제가 개입함. 이교도들이 교회를 조롱함.
- 반면에 이러한 문제로 말미암아 대학자들이 등장함. 따라서 4세기는 교부들의 세기이다.
- 이 시기에 두 가지의 큰 결론을 맺은 두 개의 범 공의회:
1.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 문제: 니케아(325)와 콘스탄티노플(381) 범 공의회.
2.그리스도의 두 성질의 상호 관계: 칼케돈(451) 범 공의회.

- 즉 두분 모두 하나님이라면 두분과의 관계는? „예수님도 피조물이 아닌 하나님이다“와 일신론을 동시에 붙들어야 하는 과제 앞에 있었다.


* 전 역사

- 신약은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정밀하게 체계적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물론 예수님이 자신이 누구신가를 분명하게 가르치셨지만 교의학적으로 하시지 않았다. 본인은 목수였고 제자들도 학자들이 아니였다. 사도 바울은 당시의 교육을 받았지만 철학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도록 엄중히 경계했다.
- 초대 교회의 고백: „예수님은 우리의 주시다(Kyrios)“ Kyrios란 말은 70인역에서 하나님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말.

- 켈수스의 도전: 철학자 켈수스가 180년경에 기독교는 철학적이지 못하고 (당시의 지성인에는 모독), 대부분의 기독인은 단순한 사람들이다.
- 저스틴은 이미 켈수스보타 앞서서(150경 활약) 믿음이 최고의 철학임을 나타내려고 애를 썼다.
- 클레멘스와 오리겐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경을 신 플라톤 철학과 접목을 시킴(계시와 사변은 상극이다)
- 오리겐은 학문적 신학의 기초를 놓음.
- 희랍 철학의 성격은 사변적이다. 신의 본질과 세계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에 대한 대답은 항상 논리적으로 명증되어야 한다. 따라서 대답을 하고자 충분한 근거를 대어야 한다.

- 복음으로, 제자로의 부르심은 일차적으로는 인격적인 것이다(예수님과의 인격적 관계).
- 그러나 복음은 인격적인 것에만 그치지 않고 교리적(고백적)인 차원이 있다. 특히 사도 바울과 요한에게서 이러한 가르침이 나타남.
-기독교는 단순한 헌신, 사랑과 열심만이 아니라 분명한 객관적인 가르침이 있는 것이다.
- 영지주의와의 싸움에서 초대교회는 신앙고백문을 작성했다. 이것이 regula fidei로 발전하였다.

- 이러한 고백문을 시대의 요구(주로 이단들의 공격)에 따라 성서에서 추려내는 과정에서 많은 논란과 다툼이 있었다. 시대의 요구에 따라 시대의 언어를 사용하여 고백문을 작성해야 한다. 그렇다면 성경에 없는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 언어선택의 문제에 있어서도 많은 논란이 있었다.

- 사랑과 진리는 하나이며 하나가 되어야 한다. 사랑이 있는 곳에 진리가 없을 수가 없고 진리가 있는 곳에 사랑이 없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원리가 교리 결정에 있어서 항상 적용된 것은 아니었다.
- 그러나 불순한 교리도 공의회에 의해서 채택되었다.
- 4세기 이후의 비숍들 중에서 타락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 삼위일체의 교리가 확립된 것은 하나의 기적이라고 볼 수가 있다(하나님의 개입). 하나님은 결정적인 순간에 역사의 방향을 돌리신다.
-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삼위일체교리 형성의 역사를 살핀다. 상당히 다양한 이론이 제시되고 복잡한 과정을 통해 삼위일체의 교리가 형성됨.


* 예수님은 누구신가? - 독재론의 제거
독재론이란 „하나님은 한분이시다“를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1) 양자론
- 예수님은 순수한 인간(보통사람)으로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에 성령이 그를 하나님의 능력(dynamis)으로 채우셨다. 하나님이 단순한 인간 예수라는 사람을 양자로 삼으심.
- 2신론을 회피하고자 이 설이 등장함(190년): 하나님은 한 분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을 받은 인간이라고 생각. 동적 독재론이라고 한다(dynamistic monarchianism).
- 양자설의 문제: 눅1, 요1에 모순됨.
- 설득과 추방으로 간단히 해결됨.

2) 양식론
- 같은 시기 로마의 프락세아스(Praxeas)의 주장: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양식(modus)이라고 봄. 양식적 독재론(Modalistic monarchianism)라고도 함. 따라서 인간으로 태어나시고 고난을 받고 돌아가신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이 예수님 모습으로 나타난 것뿐이다 성부수난설. 터툴리안이 맹 공격함.

- 로마에서 3명의 비숍들이 처음에는 그럴듯하다고 생각함.
- 로마에서 사벨리우스가 이 운동의 대표자로 활약함: 한 분 하나님께서 역사의 진행 가운데서 세분의 모습으로 계시하심. 아버지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세상에게 율법을 주시고, 아들로서 인간이 되신 후에 다시 하늘로 돌아가시고, 성령으로서 오늘날 교회를 거룩하게 하신다.
- 처음에 동조한 비숍들이 정신을 차려서 그를 출교시킴. 칼리스투스 비숍의 생각은: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셨는가? 아니다. 그분은 아들 안에서 단지 함께 고난을 당하셨다“

3) 사모사타 바울
- 양자론이 정죄를 받은 뒤 한참 후에 사모사타 바울에 의해 더 진전된 모습으로 나타남.
- 안디옥의 비숍이며 세속적인 영향력이 있었음. 팔미라151)의 부왕(副王) 겸임함.
- 인간 예수가 천상의 그리스도인 로고스의 세력152)을 충만히 받아서 의지적으로는 신격화가 되었으나 본질적으로는 인간이었다. 즉 예수는 인간이면서도 그의 의지는 완전히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
- 안디옥 공의회가 그를 3번째(264-269까지 3번의 회의가 있었음) 회의에서 드디어 정죄할 수 있었음. 그는 매우 교묘해서 1,2차 회의를 잘 모면함.
- 그가 정죄 받음으로써 구속자의 인격적 선재를 부정하는 기독론(예수님이 단순한 인간이라는 생각)은 더는 들어올 수가 없게 되었다(하르낙). 즉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이단은 사라졌다.


* 동방의 두 학파
이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은 믿었으나 강조점이 달랐다.

1) 안디옥의 신학교 – 안디옥 학파
- 사모사타 바울이 사라진 후 얼마 가지 않아서 루시안(312에 순교)이 안디옥에 해석학교(신학교)를 설립함.
- 아리우스를 비롯한 거의 모든 아리우스 학자는 그의 제자이다.
- 안티옥 신학교의 특징은 역사적 인물로서의 예수님을 강조함: 위대한 선생, 인류의 모범, 가르치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사람들을 도와주신 분.
-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사는 사람은 소크라테스나 바알을 따르는 사람보다 더 훌륭하고 자비로운 삶을 살 수가 있다.
- 학풍은 이성적, 역사적, 문법적이다(해석학이 발달함.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반대로 신비적, 알레고리적 해석)
- 예수님은 신적인 능력으로 기적을 행하셨고, 부활하셨고, 하나님께 돌아가셨지만, 그분은 땅에 계시는 동안 하나님으로 사시지 않고 먹고, 마시고 우리처럼 고난을 당하신 인간으로 사셨다. 예수님의 신성은 부정하지 않음.
- 안티옥 학파 출신: 몹수에스티아의 데오도르, 크리소스토모스, 데오도렛, 디오도르…

2) 알렉산드리아 학파
- 애굽의 수도로서 문화는 애굽 종교의 요소와 희랍철학의 혼합이다.
-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음.
- 필로가 1세기에 구약을 풍유적으로 해석함으로서 유대교와 희랍철학을 혼합하여 조화로운 체계를 만듦. 그의 주요 사상은 로고스이다. 예수님은 신적인 로고스이다(요1).
- 클레멘스와 오리겐이 이 영향을 받음. 신약을 풍유적, 상징적, 사변적으로 해석함.
- 그들은 예수님의 신성과 구속의 행위를 강조하여 예수님의 비천함과 역사성을 잘 다루지 않음.
-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의 죄성과 구속의 필요성을 강조.

두 학파의 비교:
안디옥 학파는 복음이 단순한 윤리적 가르침이 되는 위험과,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현실을 초월하고자 하는 영화(spiritualization)와 현실도피의 경향이 있다. 이집트에서 수도원이 시작됨.
즉 안디옥학파에서는 예수님이 인간으로 고난을 받으신 것을 강조함으로서 „하나님의 어린 양“(대속죽음)의 고난이라는 중요한 가르침이 소홀이 되었다.

* 서방의 공헌
- 동방의 두 학파가 그리스도의 수난(passion), 우리의 죄를 위한 대리적 고난의 대해 별로 가르치지 않았지만, 이것은 서방(로마, 카르타고)에서는 중심적 테마가 되었다.
- 이 점에서 터툴리안, 특히 어거스틴이 법률가적인 감각으로 탁월한 업적을 남김.


II. 아리우스 논쟁 (318 - 381)
고대 교회에서 가장 치열하고 중요했던 논쟁.


* 발단
- 아리우스는 안디옥 학파의 루시안(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으면서도 인성을 강조함)의 제자로서 장로로서 310경에 알렉산드리아로 이주함.
- 그는 금욕적인, 수척한 사람이였으나 사교적인 사람이였다.
- 그의 교회가 급속히 커짐. 후원자 중에 귀부인(고위관리 부인)들이 여러 명 있었음.
- 그의 그리스도론: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피조물이다. 모든 피조물중에서 가장 우수한 첫 번째 피조물이다153).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경배해서는 안 된다154).
·그는 두 가지 문장으로 자기 주장을 간결히 요약함: „예수님이 존재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는 무에서 창조되었다“
·그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질과는 다르다 (anomoios)
·예수님은 하나님이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이 아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사이에는 분명한 질적 차이가 있다. 그 근거로는:
o„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막13:32
o„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17:3
o„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골1:15

·그는 그리스도는 반신 반인과 같은 존재로 생각함(영지주의의 창조신 – 낮은 등급의 신)

- 아타나시우스(295-373)가 반기를 듦. 그는 알렉산드리아 비숍의 젊은 집사였다.
- 그는 철학적 사변에서 출발하지 않고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옹호하고자 싸움:
·예수님이 세상의 구원자라면, 그는 스스로 구원이 필요한 피조물이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로고스이다. 로고스는 하나님이다(요1장). 로고스는 하나님과 같이 영원하신 분이다.
·아버지는 로고스가 없이 계신적이 없다.
·그가 나중에 사용한 공식: 아버지와 아들은 동일본질이다(homoousios). 아들은 낳아지셨고 창조되지 않으셨다“


* 아리우스는 319에 정죄 됨

- 319에 알렉산더 비숍이 리비아와 이집트의 모든 비숍을 초청하여 공의회 개최.
- 알렉산드리아는 아버지와 아들의 본질이 하나라는 로고스 기독론의 본부이기 때문에 만장일치로 아리우스를 정죄하고 추방함.
- 아리우스 교회에서 그의 추종자들이 아리우스를 지원함.
- 알렉산드리아 뿐만 아니라 동방교회 전체에서 친 아리우스, 반 아리우스파들이 형성되어 논쟁을 하게 됨.
- 아리우스의 동창들(루시안의 제자들), 특히 니코메디아의 비숍 유세비우스(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가 아님)가 아리우스를 지원함.
- 아리우스는 니코메디아에서 유행가에(벳노래, 방앗간 노래, 여행자 노래등)에 자신의 주장을 섞어 지어서 세속에 선전함.
- 아타나시우스는 거룩한 것을 춤곡, 주(酒)가를 위해 오용한다고 비판함.


* 싸움이 동방교회를 분리함

- 동방의 교회가 둘로 분리가 됨.
- 아리우스파는 주로 안디옥의 신학교, 아타나시우스파는 주로 알렉산드리아를 거점으로 함.
- 많은 사람은 중간입장.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가 대표. 문제점을 잘 모르고 교회의 화평을 원함. 그들은 과거의 오리겐의 가르침을 따름. 오리겐은 로고스론을 가르쳤으므로 아타나시우스에게 가깝지만, 그는 로고스는 아버지보다 못하다고 가르쳤으므로 아리우스를 동정함.


* 콘스탄틴의 중재 – 니케아 범(에큐메니칼) 종교회의 (325)
역사상 처음 소집되는 범 종교회의. 이전에는 모두 지역적인 종교회의가 있었다.

- 황제는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더 비숍과 아리우스에게 중개를 촉구하는 서신을 보냄.
- 그의 사신이 효과가 없자 325에 니케아에서 공의회를 소집함.
- 황제가 모든 비용을 부담하는 조건(비숍, 장로 2인, 수행자 3인)으로 제국의 모든 비숍들을 초청.
- 서방에서는 매우 적게, 거의 동방에서 참석. 모두 약 300 비숍과 장로와 집사.
- 최초의 범 교회 공의회. 이전에는 지역적으로만 공의회를 가졌음.
- 황제는 명예 의장으로 참관. 비숍이 의장이 되어 인도.
- 아리우스 주의 대표는 니코메디아 비숍 유세비우스, 아타나시우스 주의 대표는 알렉산더 비숍으로서 논리를 폄.
-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도 연설을 함.

아타나시우스의 연설: 그리스도가 단지 피조물이라고? 그렇다면 그는 자기를 구원하기에도 바쁘다. 우리 타락한 인간들이 필요한 그리스도는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이어야 하고, 하나님과 영원부터 하나이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피조물로 만드는 자는 그로부터 영광을 앗아가며 인간으로부터 구속의 가능성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아리우스는 우리로부터 완전한 하나님의 구속과, 우리를 사단의 속박으로부터 하나님 자녀의 자유로 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앗아갔다. 하나님만이 구속을 할 수 있고, 피조물은 할 수 없다… 그는 교회의 뜨거운 심장으로 토로했다.

아리우스파들의 학문적인 논리들은 아타나시우스의 연설에 비해 마른 풀들과 같았다.

- 따라서 대다수를 차지하던 중간층들이 아타나시우스를 지지하게 됨.
- 채택된 공식: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낳으신“ 그리고 „피조되지 않고 낳아진, 아버지와 한 본질인 (homoousios)“
- 많은 사람이 이 공식을 진심으로 지지하지는 않았음. 문제: 하나님과 같다는 것은 인정하겠는데,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양식론에 빠질 것을 우려함155).
- 이러한 정황에서 황제는 아타나시우스를 지지하는 비숍의 도움을 받아 호모우시오스로 결정을 내림. 공의회는 의문점을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황제의 결정을 따름.
- 이러한 정황에서 황제는 호모우시오스로 결정을 내림. 공의회는 의문점을 남기고 황제의 결정을 따름.

- 아리우스는 귀양. 그의 책들은 소각됨.
-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는 저주 조항 때문에 고백서에 사인을 하지 않음. 다른 비숍과 함께 직분을 박탈당함(2명의 비숍이 반대). 황제는 다른 처벌과 함께 그들을 그들이 사는 도시에서 축출함. 황제는 제국의 통일된 종교정책을 원함.


* 니케아 고백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본질(ousia)로부터 출생되셨고(낳으셨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하나님이시며, 빛으로부터 나오신 빛이시며… 피조된 것이 아니라 출생되셨고 아버지와 동일본질(homoousios) 이시며…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은 공교회로부터 저주를 당한다: 그분이 계시지 않았을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분이 낳으시기 전에는 계시지 않았다. 그리고 그분은 무로부터 되셨다“

- 이 고백문은 381에 약간 보완하여 유명한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신조)이 됨.
- 이 고백문은 팔레스티나 교회에서 사용되던 세례 고백문을 원문으로 아리안 주의를 정죄하는 문장을 덧붙여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 이 고백은 앞으로 계속되는 아리우스 주의와 합리주의적인 반신반인 종교에 대항하는 보루와 같다.
- 앞으로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본질이라는 결정에 끊임없는 도전이 따른다. 역사의 결정적인 순간에 개입하셔서 역사를 바꾸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본다.
- 이 결정이 이후에 무너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유효하게 된 것은 아타나시우스의 불굴의 의지가 작용했다.

- 니케아 고백이 주는 교훈: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예수님을 피조된 신으로 간주하는 주장은 앞으로 더 이상 교회에 들어올 수가 없게 되었다. 이것은 정경확정 외에 초대교회의 가장 큰 업적이다.
·그러나 교리가 형이상학적-사변적 요소를 띠게 됨. 즉 성경이 말하는 것 이상으로 정밀하게 말을 하게 되었다. 성경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이라는 것 외에 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이 싸움은 헬레니즘의 환경(신플라톤 주의의 유출설, 스토이즘의 로고스)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헬레니즘의 사고방식이 반영됨(„본질“이라는 용어). 그렇다고 이 교리가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의 교리 결정에 있어서 그 시대의 사고 체계의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고, 성경의 기반을 완전히 떠나는 결정이 있을 수 있으리라는 것이라는 짐작을 할 수가 있다(마리아, 성인, 연옥, 회개, 성사…). 이것은 신학의 부작용에 대한 경고가 된다.
·성경교사의 위험성이 나타남. 말씀을 해석하고 의미를 결정해야 하는 교사(목사, 교수)들이 얼마나 위험한 위치에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들은 자칫하면 거짓교사가 된다. 그들은 보통사람들 보다 몇 배나 더 많은 회개를 해야 한다.


* 니케아 고백으로부터 콘스탄틴 황제의 임종까지 (337)

- 328에 아타나시우스가 알렉산드리아의 비숍이 됨(373 사망)
-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를 중심으로 해서 아리안파들이 고개를 듦.
- 그는 아리안 파들이 오해를 사서 부당하게 정죄받았음을 황제의 측근을 이용하여 황제를 설득시킴. 아리우스파들이 아타나시우스를 모함함: 그가 황제의 명령을 무시하고 시행하지 않는다
- 황제가 서서히 아리우스파에 기울어짐.
- 330에 아리우스가 알렉산드리아에 복귀(아리우스주의가 복귀된 것은 아님. 니케아 고백은 그대로 유효).
- 아리우스가 교회의 비숍자리를 달라고 요청하자 아타나시우스가 거부함. 335에 콘스탄틴이 그를 트리어(최변방)에 귀양 보냄.
- 336에 아리우스는 니케아 고백에 서명(맹세)하고 완전히 교회에 복귀됨: 서명을 하고 „만약 자신이 거짓 맹세를 했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벌주시기를 원한다“라고 덧붙임.
- 그런데 서명을 한 그 주의 토요일에, 그의 환영 예배를 보기로 한 하루 전날 산책을 가다가 콘스탄티노플의 공중 화장실에서 사망함.
- 황제는 아리우스가 거짓맹세를 했다고 확신함. 이후로 아리우스파를 경계함.
- 아타나시우스는 황제가 사망 후에 귀환함.


* 콘스탄틴의 두 아들
(그들은 니케아 신조자들을 핍박함)

- 두 아들은 아리우스 주의자를 우대하며 아타나시우스를 귀양보냄.
- 아리우스 주의 비숍의 숫자가 니케아 비숍 숫자를 훨씬 능가하게 됨.
- 아타나시우스는 모두 5번 귀양을 감. 46년 비숍생활을 20년간 귀양생활을 함. 사막에 가서 수도원들을 방문, 은둔자로서 생활하기도 함. 안토니우스가 죽은 다음해인 357에 그의 전기를 집필.
- 동방교회의 대부분의 오리겐 주의자들은 동일한 본질(homoousios)이라는 말이 가현설(사벨리우스)적인 요소가 있다고 생각하여 이 표현을 거부하고 본질(ousia156))대신 히포스타시스(格體, persona)라는 표현을 사용할 것을 주장.
- 342 사르디카(소피아) 종교회의에서 양측의 상반된 주장으로 말미암아 교회분열의 위기까지 옴. 주로 서방은 니케아 고백을 붙잡고 동방은 히포스타시스만을 고집.
- 콘스탄티우스의 니케아파 박해: 그가 서방도 통치를 하게 되자, 서방교회에서도 아리우스 주의를 관철하고자 함. 355 밀라노 공의회에서 로마 비숍 리베리우스에게 homoousia를 포기하기를 강요함. 그가 불응하자 다른 비숍들과 함께 귀양을 보냄.
- 그는 군대를 동원하여 아타나시우스의 교회를 습격함. 이는 사막으로 피신함.
- 몇 명의 오리겐파 비숍들이 교회의 평화를 위해 homoousios대신에 homoiousios157)라는 말을 사용하기를 제안 함.


* 율리아누스 (361 – 363)

- 이교신자인 줄리안이 황제가 되어 교회분열을 가중시키려는 목적으로158) 귀양간 니케아 고백파들을 전부 복귀시킴. 그러나 결과는 반대가 되어 교회가 평화를 찾음.
- 아타나시우스가 362 알렉산드리아 공의회159)에서 호모우시오스를 „한 본질 대신에 같은 본질“의 의미로 사용될 것을 수락함(한 본질은 성부와 성자가 같은 분이라고 해석되는 위험성을 앉고 있지만 같은 본질은 같지만 격체가 다르다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호모이우시오스의 표현의 사용을 수락함.160)
- 이렇게 해서 니케아 신조 주의자들과 호모이우시오스파들이 결집하게 됨. 즉 호모우시오스와 호모이우시오스가 본질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같다. „본질은 같지만 아이덴티티는 다르다“라는 의미로 의견이 모아짐. 즉 한 우시아에 세 히포스타시스.
- 3명의 갑바도기아 교부들(바실리우스, 닛사의 그레고리,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의 노력으로 니케아 신조가 더 힘을 얻고 성령도 논의에 들어옴.

- 이상으로 간단히 설명을 했지만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합의가 도출됨.


* 381 니케아 – 콘스탄티노플 신경

- 379에 데오도시우스가 동방의 황제가 되자 381에 개최됨.
- 이 회의는 니케아 신조를 변형시킨 것이 아니라 더 정확하게 함으로서 완성을 시킴.
- 갑바도기아 3 교부들의 제안으로 삼위일체의 교리 확립: 하나님은 세 가지 경륜적 모습을 가지신 한 존재이다161).
- 니케아 신조에 결핍된 것, 즉 아버지와 아들의 아이덴티티가 새롭게 들어옴. 당시에는 우시아만 논의가 되었고 히포스타시스는 논의가 되지 않았다.
- 새롭게 첨가된 것 중에 중요한 것: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시고162),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경배를 받으시고 찬양을 받으실 분이시며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을 하신, 주시요 생명을 공급하시는 성령님을 (믿습니다)“

- 이단들의 정죄부분은 신조 자체에는 들어 있지 않고 신조에 따른 교회법에 들어 있다.163) 당시에 여러 종류의 이단들이 있었다. 이 신조를 통해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삼위일체 교리가 확립되었고, 쉽게 이단이 식별될 수 있었다.


III. 그리스도의 두 성질과 한 인격 교리 논쟁 (381-451)

- 내용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으므로 먼저 „서론적 개관“을 본 다음에 바로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적 대립“ 그리고 „칼케돈 4차 범공의회“로 넘어가서 일단 중심되는 내용을 파악한다.
- 초점: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지고 계시다 (창조주와 피조물이 동시에 한 사람에게).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인격은 둘인가? 하나라면 두 성질이 어떻게 관계하는가?

* 서론적 개관

- 라오디게아의 아폴리나리스 비숍: 니케아 고백의 옹호자. 그러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당함.
- 그의 주장: 예수님이 하나님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완전한 인간의 성격을 가질 수가 없다. 즉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 몸만 인간이다.
- 그리스도의 두 성질에 대해서는 5세기에 활발하게 토론될 문제인데 그는 이미 4세기에 문제를 제기함.
-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일단 그를 정죄하고 칼케돈 공의회(451)에서 이 안건에 대해 대답을 함.
- 기독론을 둘러싼 논쟁에는 정치적인 문제가 가미되어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됨. 즉 알렉산드리아가 동로마 교회의 중심지였으나 381 이후 콘스탄티노플 교회가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함 자리다툼


* 오리겐을 둘러싼 논쟁

- 니케아 신조가 승리한 이후에 학자들이 오리겐의 신학에 의문을 품게 됨(니케가 고백에 비추어 볼 때 오리겐의 가르침은 문제가 있다). 갑바도기아 교부는 그를 존경함. 호모우시오스는 오리겐의 로고스 신학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는 로고스가 하나님보다 열등한 존재라고 가르침.
- 에피파니우스164)(살라미스 비숍)가 오리겐 비판의 주축이 됨.
- 알렉산드리아 공의회(399)에서 알렉산드리아 비숍 데오빌로가 승려들의 강압에 못 이겨 오리겐을 정죄함165).

- 그러나 니트리쉬 사막의 은둔자들은 오리겐을 영적 스승으로 경배.
- 이들이 박해를 피해 콘스탄티노플로 피신. 크리소스톰 비숍이 그들에게 피신처를 제공함으로서 싸움의 실마리를 제공.
- 데오빌로가 황제의 분부로 콘스탄티노플을 방문. 공의회에서 그의 경쟁자 크리소스톰을 아르메니아로 귀양보내는 데에 성공함. 그는 궁중의 귀족 부인들의 사치를 비난하는 설교로 말미암아 미움을 사고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알렉산드리아(비숍)가 콘스탄티노플을 누르고 승리함. .


*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적 대립

- 신 안디옥 학파: 그리스도의 두 성질의 분리166)
- 알렉산드리아 학파: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함(Logos강조). 신성과 인성이 결합하여 신성이 인성을 삼켰다. 그리스도는 한 성질만 가지고 있었다 단성론. 그리스도의 역사적이고 인격적인 면에 관심을 두지 않음. 대표자는 알렉산드리아의 시릴. 데오빌로의 조카이며 그의 후임자.

- 서방에서는 터툴리안과 노바시안의 기독론을 따름. 그리스도는 deus임과 동시에 homo이다. 이 둘이 어떻게 결합이 되는지는 비밀이다. 암브로시우스와 어거스틴도 두 성질론을 따른다. 그러나 로고스가 본질적으로 역사를 한다고 함 .즉 서방에서는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의 중간 위치를 차지함.


* 네스토리우스 논쟁(431/ 433)

- 네스토리우스가 콘스탄티노플 비숍(428)으로 승진하자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167)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결정을 내림. (그의 교회에서는 마리아가 하나님을 낳았는지 인간을 낳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음).
- 이 결정에 승려들과 교인들이 데모를 일으킴. 비숍의 교회 문짝에 대자보를 붙이고 비숍을 이단이라고 비난함.
- 일렉산드리아의 시릴168)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콘스탄티노플 비숍을 누르는데 악용을 하려고 함. 429 그의 부활절 편지에 그는 마리아를 theotokos169) 라고 명명함.
- 그는 로마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임. 로마는 아리우스 주의와의 싸움에서 알렉산드리아의 편을 든 것 같이 지금도 알렉산드리아의 편을 들음. 게다가 네스토리우스는 로마에서 쫒겨난 펠라기우스파 피난민을 받아줌으로써 로마의 미움을 산 적이 있음.
- 시릴이 로마의 힘을 입어서 네스토리우스를 파문함. 이에 네스토리우스도 시릴을 파문함. 안디옥 학파는 네스토리우스를 지지.


* 에베소 3차 범공의회(431)

-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가 공의회 개최.
- 시릴이 먼저 도착하여 150 주교와 함께 공의회 개최하여 theotokos를 관철함. 네스토리우스를 출교시킴.
- 며칠 후에 안디옥의 비숍 요한이 도착하여 자신이 데리고 온 비숍들과 공의회 개최하여 시릴을 정죄함.
- 황제는 시릴에게 기울어져서 네스토리우스를 귀양보냄. 그는 451에 귀양가서 죽음.


* 에베소 강도 공의회(449)

- 안디옥 학파가 그 사이에 힘을 얻어 비숍의 자리를 많이 확보하게 됨.
-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디오스쿠르(444-451)가 시릴의 뒤를 이음.
- 콘스탄티노플에서 알렉산드리아 출신 신학자 유티케스를 정죄(그리스도의 몸은 인간의 모습으로 보일 지라도 신적인 성질로 말미암아 완전히 신화(神化)되었다: 발렌티니안 주의)
- 디오스쿠르가 이것을 기화로 콘스탄티노플의 플라비안 주교를 제거함으로써 알렉산드리아의 우위를 차지하려고 함.
- 황제에게 공의회를 열 것을 요구하여 에베소에서 공의회를 개최함.
- 그가 데려온 승려를 중심으로 군인들, 폭도들을 공의회가 열리는 교회로 데려와서 참석한 비숍들을 위협하여 목적을 달성함: 유티케스를 복권시킴. 플라비안과 안디옥의 주요 주교들을 정죄함.
- 이로써 알렉산드리아의 디오스투르는 모든 정적을 제거함.
- 로마의 비숍 레오 1세가 이 회의를 강도 공의회라고 정죄함.


* 칼케돈 4차 범공의회(451)

- 레오 비숍이 황제의 힘을 입어 칼케돈 공의회를 개최함. 이 공의회에서 황제의 압력으로 디오스쿠르를 면직시킴.
-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으로서 두 성질을 가진다. 섞이지 않고(유티케스 반대) 분리되지 않았다(네스토리우스 반대)
- 이 고백의 특징은 양쪽 주장(극단적 주장)을 피한 것이다. 그래서 부정적 표현을 사용함.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오늘날까지 유효한 교리이다.
-먼저 부정의 표현을 사용하여, 오류를 정정하고
-긍정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인격의 비밀을 나타내려고 하는 시도는 잘못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그들이 깨달음.
-그리스도는 인간의 지적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경배의 대상이라는 것. 이것은 알 수 없는 비밀에는 머리를 숙이고 경배를 해야 하는 성서연구의 법칙이기도 하다.
-문제는 고백이 강제의 성격을 띤 것.

- 황제는 지나친 권력을 가졌던 디오스쿠르 비숍을 축출한 뒤에 로마 비숍의 부상을 경계하고자 Canon 28에 로마 비숍과 콘스탄티노플 비숍이 동등한 지위가 있다는 항목을 만듦
- 이집트는 단성론을 고집. 오늘날 까지 이집트와 에티오피아의 콥트 교회는 단성론을 믿는다.
- 동시리아- 페르시아 교회에서는 칼케돈의 타협 문구를 거절함 네스토리안 교회(두 성질의 분리)의 이름으로 5세기에는 공교회로부터 분리가 됨. theotokos도 거부. 그곳에 오늘날까지도 네스토리안 교회가 남아 있음.
- 네스토리안 교회가 페르시아의 국교가 됨.
- 그 이후의 동로마 황제들은 신앙의 문제로 분열된 제국을 다스리는 데에 어려움을 겪어, 단성론자들인 이집트를 회유하고자 칼케돈 결정을 관철시키지 않았음.
- 그 결과 484-519의 35년간 로마와 동방교회가 분열됨.

 


XVII. 아랍 침공 때까지의 교리적 혼란

*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553 (5차 범 공의회)

- 칼케돈 신조를 인정하면서 시릴의 방식으로 신조를 해석함.
- 3명의 주요 안디옥 학파 신학자를 정죄.
- 황제 유스티니안은 칼케돈 신조를 건드릴 수가 없고 정죄 당한 단성론자(이집트, 시리아)를 회유해야 할 어려운 입장에서 네스토리안파(양성론자)를 제국에서 완전히 추방하는 결정을 내림.
- 그럼에도 단성론자들은 성장을 하지 못하였고 이들은 7세기에 제국을 침공한 페르시아와 아랍을 해방자로 맞았다.
- 황제와 학자들이 단성론, 양성론 사이의 간결을 좁히고자 (제국의 연합) 여러 가지 표현 방법을 연구함.
- 이에 638 단의론이 나오고 이를 호노리우스 교황이 승인함 (그리스도는 하나의 의지만 가지고 있다. 즉 로고스의 인격은 하나이다)
- 고백자 막시무스가 이것을 반대하여 마26:39170)를 근거로 양의론을 내세움 (인간적인 의지가 신적인 의지에 항상 복종하고 있었다.)
- 교황 마틴 1세는 양의론을 승인.


*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681 (6차 범 공의회)

- 6차 공의회에서는 양의론을 택하고 호노리우스 교황을 파문하고 거짓교사로 선포함171).
- 교리적 싸움이 끝났을 때 이집트, 시리아, 북아프리카는 이미 (7세기경에) 모슬렘의 손에 들어갔다.

 

 

 


생각해볼 점:

- 오늘날 당시의 종교회의에서 결정된 여러 가지 항목들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이러한 논쟁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분열되고 서로 세력다툼을 하게 되었다. 많은 지역이 모슬렘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 교회가 번창했던 지역들이 모슬렘 점령 이후 급격히 쇠퇴하고 서서히 자취를 잃게 되었다. 여기에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왜 신도들이 살육을 당하고 교회는 사라져야만 했는가?
- 왜 하나님께서는 교황제도를 허용하셨을까? 이것은 많은 개혁 세력과 영적 각성을 억압하는 기구가 되었다.

- 종교개혁에 의해 잘못된 교리가 정리되면서 신교가 탄생하였다. 칭의가 다시 신학의 중심이 됨. 모든 것이 성경에 의해 다시 검사되었다. 성경위에는 어떠한 기관이나 사람도 없다.


1) 유대인들이 무리 가운데서 알렉산더를 권하여 앞으로 밀어내니 알렉산더가 손짓하며 백성에게 변명하려 하나 2) 예루살렘 교회는 주의 형제 야고보의 순교후에 약해짐. 대부분은 예루살렘 멸망 전에 피신함. 3)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교회생활을 하기 때문에 기독교는 항상 타락의 위협에 열려 있다. 4)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바울, 베드로, 야고보, 유다, 히브리서 저자. 5)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6) 그러나 율법을 지키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7) 행10:28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8) 행7: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9) 종교사학파에 반대하는 학파는 튀빙엔의 성서신학자들(Biblische Theologie. 이들에 의하면 신약은 유대주의(Judaism, Judentum의 영향을 받았다고 함. 10) 육신은 부정한 것이므로 부활할 수가 없다. 11) 4세기부터는 기독교가 국교가 되어 교회가 국가권력을 힘입어 (무력으로 국교회와 의견이 다른 형제들까지도 이단으로 장죄하게 되었다(특히 네스토리우스 교회. 교회는 대상이 이단이라 할지라도 국가권력을 사용해서는 안된다. 무력(폭력사용은 그리스도의 정신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이것이 허용되면 반대로 기관으로서의 교회가 참 교회를 핍박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교회는 내부적으로 끊입없이 정화되는 곳이다. 12) 사도 바울은 유대인 선교에 큰 비중을 두었다. „성경에 계시된 약속이 드디어 성취되었다! 메시아가 오셨다!“ 13) 로마에서는 비교적 초기에 상류층들이 있었음. 14) 여성은 가치에 있어서 남성과 동등하고 하나님앞에서 자립적인 인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역할과 사회적 지위의 동등함을 말한 것은 아님. 15) 초기에는 교회에 전문(또는 직업 전도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2세기부터 박해로 인해 교회에서 전도자라는 직책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비록 전문적인 전도는 없었지만 그들은 각자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전도를 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믿음과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주로 안면 전도를 함, 당시에는 제국에 호텔이 없었으므로 신자들이 여행자들을 재워주면서 전도를 했다고 한다. 그 결과 지방에는 복음이 거의 미치지 못했다. 16) 그는 기독교를 비판하기 위해 유대인들의 반기독교 변증서를 참조함. 17) 사도 바울이 18) 이것은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다. 공산국가나 모슬렘 국가에 살면서 국가에 충성하는 것과 비슷하다. 19) 신도수가 모두 50명이면 도시 규모에 비해 매우 적은 숫자이다. 20)클레멘스 2서는 저자 미상이다. 2세기 전반에 쓰인 남은 것 중에 제일 오래된 설교집이다. 21) 구약의 직분제도를 근거로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를 구분함. 22) 안디옥에서 국지적인 핍박이 있었다. 23) 5개 소아시아 교회, 1개 서머나의 폴리갑, 1개는 로마교회. 그가 이렇게 큰 교회들에게 격려서신을 보낼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큰 영향력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의 편지의 내용이 단순한 그 개인 생각이 아니라, 어느 정도 당시 교회의 생각을 반영한다고 볼 수있다. 24) 가현설(Doketism을 신랄하게 비판함. 가현설은 영지주의의 교리로, 영은 선하고 물질은 악하므로 예수님은 진정한 인간이 될 수가 없다. „마리아로부터 태어나고, 먹고 마시고 십자가에서 실제로 고난을 받으셨다“ 라는 말들로 예수님이 인간임을 강조함. 25) 당시에는 교회에 예언자 직분이 별도로 있었다. 26) 본인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달하는 예언자 직분의 남용을 볼 수가 있다. 이러한 문제가 몬타너스에 이르러 대거 등장함. 27)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 기록을 믿지 않는다. 마가복음은 예루살렘 원시 공동체에서 나왔다고 함. 28) 밀의 제식은 하면 할수록 좋다. 29) 헌금과 봉사, 전도를 많이 하면 믿음이 좋은 것으로 판정되는 것과 같다. 30) 사제주의는 이방종교의 영향으로서 매우 비복음적인 것이다. 한국의 사제주의는 순복음 교회에서, 혹은 주님의 종에게 100% 순종을 요구하는 이단적인 학생선교회들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샤머니즘과 유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주님의 종들로 부터 일반신도에게 전달된다는 사상이다. 31) 제사란 사람이 신과 교통하기 위해 제식을 드리는 것이다. 여기에는 사제라는 중계자가 필요한 것이다. 32) 사도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에 사람을 보내어 에베소 교회(단수의 장로들(복수을 소집함(17. 28절에서 그는 그들을 성령에 의해 비숍들로 세웠다고 함. 여기서 그는 장로와 비숍이라는 말을 번갈아가면서 사용함. 또한 한 교회에 여러명의 비숍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그나티우스는 바울이 비숍과 장로, 즉 두 그룹의 사람들을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에베소 뿐만이 아니라 에베소 인근의 여러 도시들의 비숍들(이구절에서 사용된 비숍이라는 말이 복수이므로과 장로들를 불렀다고 한다. 33)목사에게 불순종하면 하나님께 벌을 받는다는 생각은 밀교나 샤머니즘적 생각이다. 34) 플라톤 철학자. 저스틴의 변증서가 나온지 약 25년 후에 „진정한 가르침(alethos logos을 저술. 아마도 저스틴의 변증서에 대한 대답일 것이다. “ 35) „비밀원칙“이라는 의미로서, 자신의 교리를 외부의 오해나 핍박을 염려하여 외부인에게 들어내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예를 들어 „돼지앞에 진주를 던지지 말라!“ 이것이 악용이 되어 오늘날 여러 이단이 이러한 방식을 사용한다. 확고한 신자에게만 비밀교리 (###는 메시아이다 혹은 그 단체의 특수교리(„우리 단체를 떠나면 구원이 없다“를 가르친다. 36) 5세기까지는 교회에서 사용되었다. 그 후에 칼빈이 다시 조화된 복음서를 작성함. 37) 그는 이성을 통해 예수님을 알 수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경의 계시를 통해서만 알 수가 있다. 38) 바울 서신이 왜 생략되었을까? 바울 서신은 일찍이 전 교회에서 읽혀졌었다. 아마도 마르키온이 바울 서신을 인용하기 때문에 저스틴은 의도적으로 생략했을 것이다. 마르키온은 바울 서신을 인용함으로써 자신이 올바른 교회라고 선전한다. 39) 초기에는 성찬과 식사를 동시에 함. 교회가 커지면서 분리해서 시행함(약 200년경부터. 형제교회에는 아직도 매주, 혹은 격주로 성찬식을 거행함. 40) 프리드리히 대왕(18세기의 계몽준주: Jeder soll nach seiner Fasson selig werden: 각자 자신의 취향(철학, 종교…대로 행복을 누리면 된다 종교다원주의. 41) 희랍어로서 원래의 의미는 „지식“이라는 평범한 말. 42) 기독교는 이원론을 배제한다. 한국사람들의 이분법은 이원론적인 사고에서 나왔다. 예를 들어 잘못돤 것, 나쁜 것은 사단의 역사요, 무엇이든 잘되면 하나님 역사라는 생각이다. 이것은 때로는 하나님을 사단이라고 말하는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예를 들어 히스기아왕의 병과 욥의 고난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데, 질병을 사단의 역사라고 한다면 큰 문제이다. 43) 기독교에서는 이 천사를 사단이라고 한다. 기독교 영지주의자들에게는 그가 창조주가 됨. 44) 예수라고 하는 어느 탁월한 인간이 태어날 때, 혹은 그가 성령을 받을 때 그에게 들어왔다. 그러나 십자가 수난 직전에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 45) Gnosis는 지식, 인식이라는 일반적인 용어이지만 영지주의자들이 이 말의 의미를 변형시켜 사용함. 사도 바울도 Gnosis라는 말을 일반적인 의미로 많이 사용함. 그러나 영지주의자들이 의미하는 „영지“의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46) 영지주의의 초기단계 현상이 고린도 교회에 나타남. 영지주의라는 이단으로 성숙되기 전의 단계.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후에 그러한 이단들이 교회에 큰 타격을 줄 것을 알고 있었다(행20:29-30: 사나운 이리 47)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고린도 교인들이 지식을 자랑으로 삼음. 일반적으로 사도 바울은 지식(예수님을 아는 지식을 중요하게 여김(„예수님을 알기를 원하노라“ 48) 설교는 맑은 정신으로 하는 것이다. 신구약에서 입신 상태에서 설교를 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구약의 선지자중에 어떤 이는 혹은 사도 요한이 예외적으로 입신과 비슷한 상태에서 예언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상태에서 말씀을 기록하지 않았다. 또한 그들이 받은 말씀은 단순한 설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계시이다. 49) „목사의 말 = 하나님의 말 = 절대순종“이 아님 목사가 성경(말씀위에 서기 때문에 이것은 성경을 폐기하는 행위이다. 사도와 목사는 절대적인 차이가 있다. 목사가 전하는 설교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말씀을 나름대로 이해하고 해석하여 전하는 것이다. 50) 예수님의 삶과 부활의 증인들인 사도들의 진술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본다는 것이 새로운 발상이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그들에게 그러한 권능을 주셨다. 그들이 성경에 증언한 것 외에 어떠한 것도, 어떤 사람의 진술도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가 없다. 51) 성서비평가들은 이 말을 믿지 않고 복음서가 훨씬 후기에 사도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 의해 편집, 집필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52) 밀교에서는 제식에 많이 참석할 수록 좋다. 제식시에 신의 능력을 받는다. 성찬도 이와같이 이해가 됨. 후에 성찬이 집행되는 가톨릭의 미사(메세가 매일 집행됨. 53) Sacramentalism. 구원은 교회에서 관리하는 성사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가톨릭의 7성사: 영세견진성체고해종부신품혼배 54) 당시에 특히 기독교 영지주의자들은 그들만이 진정한 기독교라고 주장하였으나 교회는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구체적인 지침이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이그나티우스는 신자는 비숍의 보호(지시를 받아야 함을 역설함. 그러나 그의 지나친 주장은 이러한 사실 하나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55) 교구제의 출현으로 인해 2-3명 그리스도 이름으로 모여 교회를 세울 수가 없게 되었다. 56) 이전에는 형제들이 집에 모여서 주로 집 주인의 인도로 성찬을 거행할 수가 있었다. 이러한 성찬식 집행권이 빼앗김. 57) 개교회가 상부기관에 복종하는 것은 단지 조직적인 측면(한국의 노회, 총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즉 총회와 같은 상부기관은 개교회가 그들의 헌법에 따라 운영이 되는지를 감시할 뿐이다. 교회에서는 회중이 설교를 검사하고 예언도 검사한다. 모든 것은 회중들이 최종적으로 아멘으로 화답해야 한다. 58)성관계 없는 결혼. 마리아의 자녀들은 친자가 아니라 요셉의 전처의 자녀들이다. 마리아는 요셉과의 결혼 후에도 성관계를 하지 않았다는 주장에 근거함. 가톨릭에서는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이며 야고보서의 저자인 주의 형제 야고보는 예수님의 사촌이라고 주장한다. 59) 근거로 제시하는 구절: 마16:16-19; 눅22:31-32; 요21:15-19. 60) 이레네우스의 오류. 61) 당시 기독교에서는 가장 큰 명절. 성탄절은 336에 콘스탄틴에 의해 제정됨. 62) 이레네우스의 제자로서 스승과 같이 이단에 대적함. 특히 영지주의자와 양식주의자와 싸움. 그는 또한 당시 로마 교회의 관대한 징계 방침(변절자들, 간음자들에 대한에 반대하는 소수파에 속함. 소수파에 의해 칼리스투스의 라이벌 비숍으로 세움받았으나 큰 세력을 얻지 못함. 235에 박해때 로마 비숍과 함께 귀향을 가서 서로 화해를 하고 순교를 당함. 그는 가톨릭교회로부터 순교자로 인정을 받았음. 63) 몸만 교회로부터 떨어져있고, 영혼은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이단은 영혼이 교회에서 떨어진다. 64) 사도들의 계승을 가진 진정한 비숍만이 세례를 줄 수 있다는 전래의 교리를 다시 확정함. 65) „너는 베드로다. 이 바위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우겠다“ 66) 당시의 논쟁은 교황제도에 관한 것이 아니라 단지 로마 교회의 우위(수위권에 관한 논쟁이다. 대부분의 비숍은 이것도 인정하지 않음. 67) 그의 대표작은 adversus haereses. 그가 영지주의자들과 격렬하게 싸운 가장 큰 이유는 영지주의가 교회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많은 교인들이 현혹당함. 영지주의자들중 대표격인 발렌틴은 저스틴 당시 로마 교회에서 빼어난 선생이었다. 그는 매우 교묘하게 가르쳤으므로 오랫동안 그의 이단적 가르침이 발각이 되지 않았음. 68) 어거스틴부터 루터, 칼 바르트에 이르기까지 전통적으로 이것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됨. 그러나 현대 유대 주석가들은 이것을 „군주적 복수“로 본다. Pluralis maiestatis, Royal „We“. 예를 들어 „우리가 어린 백성을 위해 나랏말을 만들어야 겠다“ 69) 젊은 나이(핼레키아는 당시 소년부터 40세까지를 말한다. 70) 부활절 날짜 사건으로 그를 꾸중하는 편지. 71) 하드리안은 123과 129 두차례에 소아시아를 방문함. 당시 이레네우스의 나이는 12-15세로 추정됨. 그렇다면 그의 출생년은 약 115년이다. 72) 하르낙은 이레네우스가 폴리갑을 어린 소년기에 잠깐 알았을 것이다라고 함. 그의 충생을 140/142로 잡음. 73) 이러한 이유로 이단들은 자신들의 올바른 승계를 나타내기 위해 그들의 설교, 선전문에 교부들, 어거스틴, 마틴 루터, 경건주의자들을 자주 인용한다. 구원파가 마틴 루터를 인용한다는 것은 아이러니칼한 이야기다(구원파는 한번 회개를 하면 더 이상 죄가 없다고 한다. 따라서 회개를 두번이상 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고 가르침. 그러나 마틴 루터는 신자는 일생 회개를 해야 한다고 가르침 74) 계20:1-10의 근거로 예수님이 재림후에 천년을 지상에서 다스리신다는 이론. 이레네우스가 천년왕국설을 지지한 것은 요한계시록을 교회에서 몰아내자는 당시의 일부 교인들에 대항하여 계시록의 정경성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19세기 다비(Darby는 이 설을 발전시켜 세대주의설을 창시함. 스코필드(미국가 스코필드관주 성경(1909에 의해 체계를 갖추게 되었고, 이 설이 한국에 들어와서 많은 피해를 줌(조용기를 비롯한 친 이스라엘 근본주의: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예루살렘에 성전이 설 것이다. 신자들이 하나님의 이 마지막 역사에 참여해야 한다. 그들은 친 이스라엘, 반 아랍정책을 지지함. 교회가 정치와 결탁을 함 75) 그는 특히 느슨해진 기독교에 대해 격분함. 교인들의 해이해졌기 때문에 더 엄격한 몬타너스 교회에 들어감. 76) 그는 훈련된 삶, 높은 윤리를 요구했다. 기독교와 로마 문화는 상충한다고 생각함. 그의 생각은 옳은 것이다. 77) 재림에 대한 소망은 그의 글 전체에 흐르는 배경과 같다. 초대교회의 윤리로 돌아가고자 함. 78) 영혼선재설: 사람의 영혼은 사람이 육을 입고 지구상에 태어나기 전에부터 존재한 것이다. 윤회설도 여기에 포함된다. 79) 그는 품위있고 강력한 비숍으로서 로마를 7구역으로 나누고 7집사를 임명함. 비숍교회외에 약 18개의 지역교회가 있었다고 함. 이 교회들은 오래된 개인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이는 장소였다. 파비안이 손교후에 교회는 얼마가 장로들의 집단으로 운영하였다. 80) 그들은 우상숭배를 한 뒤에 교회에서 그들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스스로 교회를 세우려고 했음. 81) 비숍의 공석시 장로들의 대표격(대변인으로 활동한 높은 학식을 가진 노바시안이 로마 비숍으로 당선되기를 희망하였으나 그보다 역량이 부족한 코르넬리우스가 비숍이 되었다. 그 이유는 바로 한달 전(251년 2월 재차의 박해로 배교한 신자들의 영입 문제를 놓고 노바시안과 코르넬리우스가 대립을 하였는데, 변절자들을 짧은 시기의 회개 기간 후에 받아들이자는 온건파였던 코르넬리우스가 다수파의 지지를 얻은 것이었다. 그 결과 노바시안은 자신의 의견을 더 강화시켜서 변절자들을 교회에서 추방하자는 주장을 하게 되었다: „변절자와 간음자는 단지 하나님만이 용서를 해 주실 수 있다“ 코르넬리우스는 그를 출교시킴. 그는 그를 지지하는 5명의 이탈리아 비숍들로부터 로마 비숍으로 추대되어 로마에는 두명의 비숍이 서게 되었다. 처음에는 키프리안이 노바시안을 지지함. 그러나 전자는 점점 관대해지고 후자는 엄격해져서 노바시안을 정죄하게 됨. 그는 나중에 순교당함. 엄격성이 몬터너스파와 유사하여 북아프리카에서 많은 몬타너스를 흡수함. 배교자와 간음자가 없는 노바시안 교회는 유럽과 시리아까지 퍼져나갔다.부분적으로는 7세기까지 존속. 노바시안파는 니케아고백을 지킴. 82) 사도 베드로는 약 64년에, 사도 바울은 그 후에 순교하였다. 그들은 어떠한 사람도 후계자로 세우지 않았다. 그리고 66년 이후 예루살렘교회 마져도 흩어져 눈에 보이는 권위는 없어진 것이다. 그들은 또한 생존했을 때에도 교회의 머리가 아니었다. 이것은 하나님은 사람이나 혹은 어느 특정 교회를 머리, 혹은 중심으로 삼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람이나 교회는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만 그 사명을 감당한다. 83) 그들의 교회관은 아직 정경이 확정되지 않은 시기에, 그리고 많은 이단들에 의해 교회가 혼란을 거듭하고 있는 시기에 나온 하나의 해결책이라고 볼 수있다. 그러나 그들은 비숍이 타락하여 전 교회를 멸망의 길로 인도할 수 있다는 위험성을 간파하지 못했다. 교회는 사람이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이다. 84) 성령의 활동은 시간, 장소, 인간에 구애받지 않는다. 성령은 그분의 때에 사람을 거듭나게 하신다. 인간이 세례라는 싯점에 거듭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오이다. 85) stoa의 apatheia. 모든 감정을 제어함. 86) 해석학이란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 규칙을 말한다. 매우 중요한 과목이지만 한국의 대부분 신학대학에서 독립된 과목으로서 전문적으로 가르쳐지지 않는다. 유럽대학에서는 해석학으로서 주로 역사비평학을 사용한다. 복음주의 신학대학에서는 그에 대응하는 해석학을 자세히 가르치는 것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87) 피안이란 이성으로서 도달할 수 없는 곳을 말한다. 인간 존재와 단절된 곳. 88) 신플라톤의 유출설. 그러나 로고스는 계시지 않은 적이 없었다(성경적. 그러나 아리우스는 로고스가 계시지 않은 적이 잇다고 해서 오리겐과는 다른 입장이다. 89)성경의 낳다는 말을 신플라톤주의적으로 해석함. 즉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 부터 유출됨. 90) 하나님은 존재의 피안에 계시기 때문에 인간과 관계를 할 수가 없고, 이것을 로고스를 통해 하신다. 이것은 신플라톤적인 신관이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직접 지으셨고 대화를 하셨다.오리겐은 이것을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한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은 인간, 세상과 완전히 분리된 분이시다. 91) 성경에 따르면 창조는 구속이 아니다. 창조와 구속 사이에 타락이 있다. 그러나 그는 원타락설을 가르친다. 92)그러나 이것은 그의 사후에 실력자들의 세력다툼의 원인이 되었다. 93) 그 사람의 용기도 가상하지만, 이것은 기독교인의 의식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것을 말한다. 황제의 칙령을 찟는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상상을 할 수도 없는 것이다. 94) 그가 퇴위한 이유는 알 수가 없다. 95) 311년이면 콘스탄틴이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이다. 이는 그가 기독교를 인정한 것은 정치적 계산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는 농민들의 지지를 얻은 디오클레시안과는 반대로 도시에 거주하는 상인들의 지지 기반을 얻고자 했다. 일반적으로 도시의 상인들은 신자가 많았음으로 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계산으로 기독교를 인정한 것 같다. 313의 십자가 비젼은 그를 회심시키고 친 기독교 정책을 편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있다. 96) 한국교회의 신사참배와 비교해 볼 것. 97) 로마에 가면 이 개선문을 지금도 볼 수 있다. 98)당시의 가르침으로 회개와 함께 모든 죄가 사해진다고 했음. 그러나 세례 이후에 지은 죄는 사함을 받지 못한다는 잘못된 가르침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되도록 늦게 세례를 받았다. 99) pons(다리 + facere(하다 = 다리를 놓다.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다리를 놓는 자. 제사장. 로마의 황제는 pontifex maximus의 직위를 가지고 있으므로 국가 종교(이교의 제단과 제사장, 직원들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할 의무가 있다. 100) 황제가 기독교에 특권을 준 것은 그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면 안된다. 그는 기독교를 후원하고 육성시켜 교회가 국가를 섬기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고 본다: 강한 교회 강한 국가. 물론 그의 개인적인 신앙의 동기가 있었음을 부인할 필요는 없다. 101) 386부터는 dies dominicus로 불려짐. 태양의 날로 명명했다고 해서 태양신을 위한 날이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앞뒤가 전혀 맞지 않다. 지금까지도 Sunday, Sonntag, 일요일로 불려짐. 우리가 이 용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우리가 태양신 숭배자가 아닌 것과 같다. 102) 다신교의 사회에서 왕이 이교도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도문을 외우게 하는 것은 오늘날과 같은 종교의 자유의 침해로 볼 수는 없다. 왕은 pontifex maximus이다. 103) 이 사건을 두고 황제가 태양신을 숭배하는 이교도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104) 황제의 관심은 교회로 인해 제국이 분열되지 않도록 교회가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는 교회간의 중개를 위해 특별재판소를 설치함. 이것이 공의회로 바뀌었다. 따라서 황제는 공의회도 자신이 관할하는 재판소로 보고 스스로325에 제국의 모든 비숍들을 자신의 비용으로 초청하여, 회의의 진행 방법까지 결정함. 자신이 명예회장이 됨. 그는 공의회에서 결정된 것을 제국에서 실행되도록 노력함. 그 이후로는 황제들이 공의회를 소집하여 명예의장이 되었다 . 105) 오늘날 튀니지 공화국의 수도 튀니스 가까운 곳에 있는 고급 별장도시. 당시 카르타고 본토 사람들과 내륙의 누미디아(오늘날 알제리로부터 와서 정착한 사람들과 갈등이 있었음. 106) 영원히 사함을 받을 수 없는 죄: 살인, 간음, 배교죄. 107) 도나투스파가 더 잘못했다는 것이 입증됨. 그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마땅히 파면해야 할 비숍을 인정함. 108) 박해시 성경을 관리에게 넘겨준 성직자 109) 이것으로 인해 기독교는 오늘날까지 비판을 받는다. 이것은 국가교회의 큰 병폐이기도 하다. 이 병폐의 폭발은 1789의 프랑스 혁명. 많은 사제들이 살해당했다. 영국과 독일에서는 교회가 약화됨. 교회(기관으로서의 교회가 참된 교회를 지향하는 개혁자(후스, 루터들을 핍박함. 110) 수도원 제도는 많은 문제가 있지만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할 것도 많다. 111) 하나의 좋은 예로는 연옥의 기간을 줄이기 위해 성물을 모으는 것. 112) 1534 영국은 바티칸과 분리되면서 헨리8세가 교회의 수장이 됨. 113) 국가와 종교의 분리문제는 재세례파에 의해 본격적으로 대두되었으나 그들은 박해를 받았다. 독일에서는 개혁파 침례교 목사인 옹켄(Oncken에 의해 1834에 침례교가 세워짐으로 처음으로 독립교회가 탄생했다. FEG는 1828에 베른에서 시작되어 1854에 독일에서도 교회가 처음으로 세워짐. 114) 하나님의 법이 국법에 반영됨(구약. 이러한 현상의 득실에 대해 생각해 볼 것. 현대사회에서 기독교 국가라 해서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법은 말할 것도 없이 좋은 법이지만, 복음은 원래 강제성을 띠지 않는다. 복음은 끊임없이 인간의 양심에 호소해서 사람이 자발적으로 무릎을 꿇게한다. 그러나 복음이 법이 되면, 율법의 성격을 갖게 되어 복음이 손상될 수가 있다. 115) 고아원과 병원이 사회적 시설로 등장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116) 그리스말의 monachos(외로운 자에서 온 말. Monk, Moench. 117) Ammianus Marcellinus. 중요한 로마의 역사가. 이교도로서 기독교를 비판함. 콘스탄티우스II를 비판하고 율리안 황제를 칭송함. 1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119)금욕주의 반대자들 등장: 바르셀로나 장로 비길란티우스(Vigilantius는 수도원 제도를 비사회적이라 비판하고, 순교자 숭배로부터 오는 피해를 비판함. 120) 당시 이탈리아에는 몬테 카지노외에 다른 곳에서도 많은 수도원들이 있었고 그들은 나름대로의 규칙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중에서 베네딕트 규율이 점차로 표준이 됨. 121) 시체순종이라고도 한다. 수도원이 원장에 의해 악용이 된다면? 수도원이 권력을 탐내는 교황의 손에 들어간다면? 실제로 예수회는 교황의 오른팔의 구실을 하여 무수한 범죄를 저질렀으며, 도미닉 수도원은 교황의 지시를 받아 종교재판을 담당하였다. 122) 변론술의 기교를 도입하였지 내용을 도입한 것은 아니다. 123) 오리겐은 만유구원설(마귀와 사단까지도 구원을 주장하였고 오늘날에는 희망의 신학으로 유명한 몰트만이 주장하고 있다. 교회사에서도 만인구원설은 심심찮게 등장한다. 그러나 각 시대마다 만인구원설을 주장하는 근거는 다르다. 오리겐의 만유구원설은 신플라톤주의의 영혼의 윤회사상에서 나온 것이고, 뷔르템베르크의 일부 경건주의자들 중에 벵엘(1687-1752은 하나님의 은혜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심판을 약화시킨 것이고(지옥은 영원치 않다, 자유주의자들(칼 바르트포함의 만유구원론은 인본주의에서 나온 것이다. 벵엘은 독일 복음주의자들로 부터 존경받는 학자이다. 124) 그는 주로 성서해석에 치중하였고, 가르치고 실천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다른 교부들과 같은 실수가 없었음. 그러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만 하였다. 125) 그의 설교는 인터넷에서 다운받을 수 있다. 126) 국가교회에서는 집권자가 공식적으로는 신자가 되어야 한다. 그의 영적 생명이 비숍의 손에 달렸으므로(왕은 비숍의 양 이것은 왕과 교황사이의 세력다툼의 씨가 된다. 데오도시우스는 이 칭호를 포기함. 그러나 이것이 후에 교회로 돌아옴. 지금도 교황을 폰티펙스 막시무스라고 하기도 한다. Summus pontifex가 공식명칭. 127) 이미 381 제 2차 콘스탄티노플 범공의회에서 니케아 결정을 확인했음에도 아리우스주의는 물러가지 않았다. 여기에 암브로시우스의 투쟁의 의의가 있다. 128) 터툴리안 이후로 과부가 재혼을 하지 않는 것은 불문률로 되어 있다. 129) 그가 동정녀 맹세를 한 유스토키움을 격려하기위해 쓴 편지: „하와는 낙원에서 동정녀였다. 가죽치마를 입은 후부터 결혼생활이 시작되었다. 네가 타고난 그 상태(처녀를 보존하여라… 동정녀가 자연스러운 것이고, 결혼은 타락후에 왔다는 것을 알고 있어라“ 130) 그는 파울라를 주안에서 몹시 사랑함. 그녀가 404에 죽자 타격을 받아 그 이후에는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음. 그의 성격은 매우 인간적이고 감정적이다. 이러한 사람도 제롬과 같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131) 이것은 그가 공정하게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132) 그는 교리문답과정을 마쳤지만 세례는 받지 않았다. 죄를 짓지 않고자 하는 확고한 결단이 섰을 때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많았다. 133) 당시 법적으로 허용된 남녀관계. 당시 로마법으로 결혼을 할 수 없는 사람들끼리 부부처럼 사는 경우(특히 신분이 다른 경우. 오늘날의 동거생활과는 다르다. 134) 어거스틴은 상당한 감동을 받는다. 키케로는 „진리“ 자체를 위해 살라고 격려함. 그는 진리를 제공한 것이 아니다. 각자가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위해 몰두하는 것 자체가 귀한 삶이라는 것. 그는 이것을 그대로 실천한다. 135) 마니교는 영지주의의 개량종. 그가 의식적으로 단순히 이단에 넘어갔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마니교도들은 스스로를 더 좋은 기독교라고 선전함. 136) 정식 결혼을 하지 않으면 사회에서 인정을 받을 수가 없다. 137) 하나님은 선하시고 전지전능하신데 악은 도데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는 이원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함. 138) 오늘날의 occultism. 소위 입신, 성령체험이라고 부르는 것과 유사한 현상. 한국에서는 많은 경우에 이러한 것이 별 비판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짐. 139) 어거스틴의 명성에 비해 매우 작은 도시. 140) 여기에서 어거스틴의 깊은 통찰력이 드러난다. 초기 이그나티우스에게 나타났던 구원의 물화, 사제주의(구원의 물건이 사제를 통해 전수되는 것가 어거스틴에 의해 완전히 극복된 것을 볼 수가 있다. 이것은 성찬식에도 적용이 될 수 있다. 이것으로 기독교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데에 공헌을 하였다. 141) „그러므로 교회가 그의 잃어버린 아들들을(도나투스 분파 회개로 강제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해야 하지 않겠는가? … 주님께서도 말씀하셨다: 밖으로 나가서 사람들을 내 집으로 들어오라고 강권하라(눅14:23. 그러므로 무력이…길에 있는 사람들에게 – 그들은 이단이고 불복종하는 자들이다 – 들어오라고 강권을 하는 수단이 될 수가 있다면, 이들은 강제를 당하는 일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것이 없어야 한다“ 142) 물론 어거스틴의 의도는 선한 것이다. 분파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이단들까지도 강제로 교회로 끌고와서 구원을 얻게하자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그러나 비신자의 강제 개종은 아님. 단지 잘못 믿고 있는 자들만 해당됨. 그러나 이것은 무력사용을 금하는 예수님의 기본 원칙을 넘어서는 것이고, 그의 가르침은 후에 교황이 가톨릭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을 무력으로 개종시키고 나아가서는 박해를 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더욱 큰 문제는 박해가 정치적인 도구로 사용되어 가톨릭에 불응하는 진정한 신자들 까지도 박해하게 되었다. 143)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은 매우 중요한 테마이다. 즉 인간의 자유의지와 속박의지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어거스틴의 승리로 끝났지만 오늘날까지 교회에서 완전히 해결된 문제가 아니다. 종교개혁때에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논쟁으로 다시 불이 붙음. 17세기에 아르미니우스의 논쟁으로 이어져 오늘날 교회는 알미니안주의와 칼빈주의 영대진영으로 갈림.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극단적으로 표현함으로서 알미니안주의와는 차이가 나지만, 알미니안주의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가르친다. 144)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인정되면 공적사상이 나온다. 145)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처럼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46) 종교개혁자들은 가톨릭을 세미 펠라기우스주의라고 비판함. 신교에서는 Charles Finney(1792-1875와 같은 부흥설교자들에 의해 세미 펠라기우스주의가 도입됨. 147) 신약의 기본 가르침인 칭의론이 성경이 쓰인 후 약350년에 발견이 되고, 이것이 다시 뭍혀있다가 약 1000년 후에 발견이 되었다는 사실은 헤겔의 역사발전단계의 공식(thesis-antithesis-synthesis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역사비평학의 아버지 바우어(Baur는 교회사 발전의 법칙을 헤겔의 변증법에서 찾았다. 이것을 초대교부터 전교회사에 적용하였다: 초대교회는 베드로의 율법주의(정와 바울의 헬라주의(반이 부딪혀 초대가톨릭(합으로 발전되었다. 148) 인류문명의 상징인 영원한 로마가 야만인에게 짓밟혔다. 문명인들이 약탈과 살인을 당하였다. 로마는 그들에게는 분명히 신들이 세운 도시였다. 또한 로마는 기독교인들에게는 베드로와 바울이 도시를 수호하는 사도였다. 149) 그의 엄청난 주장: 로마는 대국이 아니었다. 콘스탄틴, 데오도시우스 이래로 크게 나아진 것도 없었다. 그는 인간의 역사관을 바꾸어 버림. 그럼에도 몇년 후에 로마의 비숍 레오가 혼란한 틈을 타서 황제의 힘을 빌려서 로마 비숍의 우위권을 관철시켜 교황제도를 확립시킨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볼 수 있다. 150) 로마라는 대국은 소수를 위해 다수를 착취하고 억압하는 제도였다. 151) Palmyra. 시리아 사막의 오아시스 왕국. 유적이 남아있음. 152) 로고스, 혹은 아들이나 성령은 비 인격적인 세력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함. 153) 오늘날의 여호와 증인. 154) Kyrios Jesous가 초대교회의 가장 짧은 고백이였다. 신약성서, 초대교회의 가장 중요한 고백을 무시함. 155) 두분이 차이가 없다면 결국 한 하나님이며 두분이 모습만 다르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것은 양식론이다. 156) ousia(희는 본질이라는 명사형이고 ousios는 형용사형이다. persona는 희랍어 히포스타시스의 라틴어 번역이다. 157) 호모이우시오스라는 말은 „비슷한 본질“이라는 의미이지만 본질이 다르다는 의미에서 비슷하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격체가 다르다(서로 구분이 된다는 의미에서 사용된 말이다. 158) 당시의 논란이 얼마나 격렬했는가를 말해준다. 159) 분열공의회가 되지 않고 „평화공의회“라는 별칭을 얻었다. 160) 이 경우 호모이우시오스라는 말을 „비슷한 본질“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단지 양식론을 피하고 성부,성자의 격체를 옹호하기 위한 것. 161)이것은 200년전에 터툴리안이 이미 말한 것: una substantia, tres personae = mia ousia en tresin hypostasesin 162) 서방교회는 나중 톨레도 공의회에서 여기에다가 „그리고 아들로부터“(filioque라는 말을 삽입함. 그 이유는 성령이 아들로부터 피조된 분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이다. 문맥상으로는 filioque가 당연함. 나중에 동방교회가 문제를 제기함. 163) 정죄된 이단: 유노미우스파: 급진적 아리우스 주의. 로고스는 아버지와 비슷하지 않다(다르다. 유독시우스파: 아리우스파. 그리스도는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높임을 받은 인물. 콘스탄티노플 비숍 역임. 세미 아리우스파: 성령은 하나님이 아니다. 마르셀파: 로고스는 영원히 계신 분이 아니라 비인격적인 능력이다. 포티우스파: 마르셀의 제자. 로고스는 비인격적인 능력으로서 인간 예수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아폴리나리스파: 예수님은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성격만 가지고 있다(인간의 성격은 없다. 인간의 육신은 로고스와 섞임으로서 그리스도의 성격이 신적이 되었다. 164)그는 파나리온이라는 책자에서 80종류의 이단을 지목함. 이레네우스와 히폴리투스의 작품을 인용하고 자신이 직접 연구 조사한 것을 기초로 함. 165) 스케티쉬 사막에 있는 은둔자들과 파코미우스 승려들이 오리겐의 영지주의 경향으로 인해 오리겐을 싫어함. 그를 아리우스 주의의 근원이라고 생각(그의 유출설 참고. 166) 다소의 디오도르, 몹수에스티아의 데오도르, 키로스의 데오도렛이 주축이 됨. 크리소스톰, 네스토리우스, 에데사의 이바스도 이 학파 출신이다. 167) 그는 안디옥 학파 출신으로서 그 전통에 의해 결정함. theotokos(하나님을 낳은 자, 하나님의 어머니, christotokos(그리스도의 어머니. 네스토리우스는 마리아는 인간 예수를 낳았지 하나님의 아들을 낳지 않았다고 함. 168) 그의 전임자 데오빌로가 네스토리우스의 선배 크리소스토모스를 몰아낸적이 있음. 169)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으로부터 낳아지겠는가? 마리아 숭배의 극치를 이룬다. 170)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171) 1870 제 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황 무오설을 결정할 때 호노리우스 교황 건 때문에 골치를 앓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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