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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신학 제1부 서론(제1장 성경을 바로 아는 성경신학의 기본원리/박윤선 목사)

by 【고동엽】 2021. 11. 2.

성경신학 제1부 서론(제1장 성경을 바로 아는 성경신학의 기본원리/박윤선 목사)

글쓴이: 최정열  http://cafe.daum.net/selck/HJbE/219

성경신학 제1부 서 론
제 1장 : 성경을 바로 아는 성경신학의 기본 원리
1. 계시 의존 사색
인간이 자기의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만 알게 된다.[웨스트민스터 신학교 변증학 교수인 “벤틸” 박사]
마11:25~27은 예수님께서 중보자이심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중보자는 절대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대언자의 권세를 맡아가지고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에 불가능한 사람들을 초청하여 하나님과 연합시켜 주시는 분이다.
첫째 : 하나님을 “천지의 주제라고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유일하신 절대적 신이시라는 뜻이다.
둘째 :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신다고 하였으니 이는 인간이 자기의 지혜로는 절대로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어린아이처럼 겸손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를 받아야만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이 두 가지 절대적 사실은 인간으로 하여금 중보자의 필요성을 절실히 생각하게 한다.


1) 인간에게 계시 의존 사색이 절대로 필요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는데(고전1:20~21) 그것은 자율주의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다.
자율주의자는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를 하나님의 권위와 같은 권위에 앉히는 것으로 그들의 선봉에 하와가 있는데 그는 마귀가 시험할 때에 자율주의에 입각하여 마귀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는 재판관의 자리를 취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자기의 마음이 권위에 있어서 하나님의 마음과 같다는 것이며 또한 마귀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같다고 생각한 그릇된 태도이다.
이것이 그의 범죄사상이며 하나님을 떠나서 타락하는 출발점이었다.
비판적 신학자들은 창세기 3장에 있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사를 신화로 여기고 실제적 역사로 인정하지 않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절대적 창조자요 주권자요 구원자라고 주장하는 유신론 철학을 무시한 그릇된 생각이다.
플라톤은 사람이 자기의 지능으로 영원계에 대해서도 깨달을 수 있고 이 지능을 주요 속성으로 가지는 영혼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받을 필요 없이 자율적으로 이상 세계에 갈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유일신 하나님을 참으로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란 말을 사용한 대표적인 사람으로서 그는 하나님의 절대성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인격성도 유야무야로 돌린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지능이 높은 사람일 지라도 자율적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고 다만 계시 의존 사색으로만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을 확신케 한다.
하나님은 절대적 신이시니 인간은 그 첫걸음부터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아래 있으므로 하나님께 대한 그의 지식은 하나님을 제외하고 성립될 수 없으며 모든 올바른 지식은 하나님이 내신 것으로서 그것은 모두 다 하나님을 보여 주고 있다.


2) 계시 의존 사색으로만 구원을 받음
우리는 다시 마11:25~27로 돌아가서 예수님 말씀을 재인식해야 한다.
여기서 “계시”란 말의 헬라어 ( ajpekavluya")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인간에게 나타내어 보여 주시는 것을 의미하는데 신학적으로 성경이 가르치는 종교는 초자연적 종교로서 하나님께서만 절대적 주권자이심을 증거하며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 밑에서 존재를 가지고 있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초자연적으로 간섭하신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로 더불어 같아 계셨던 것처럼(창3:8) 인간이 범죄한 뒤에 이 교제는 깨졌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초자연적 간섭을 통하여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데 하나님의 구원 방법은 그가 인간에게 자기를 타나내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도록 하여 이루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나타나심으로 족장들에게 되어진 계시와 “예언”과 “이적” 같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최고의 정점을 이루었는데 이 모든 계시의 사실들은 마침내 온 인류를 위하여 기록된 말씀인 “성경”으로 전승된다.
첫째 계시의 내용은 역사적 사실인 그리스도께서 중심이 되어 있는데 그가 육신을 입으시고 수난과 죽으심, 그리고 다시 사심과 승천하심은 모두가 일정한 장소와 시간에 속하는 역사적 사실이니 그것을 전하는 데도 역시 역사적 전승을 경유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역사적 전승만이 계시 전달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계시의 사실들을 기록으로 전할 때에 그것이 더욱 정확하고 오래 보존되므로 전승을 통하여 계시를 전달하는 것이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다.(롬15:4, 딤후2:2, 요일1:3)
그러나 성경 말씀은 단지 옛날의 역사적 기사에 불과한 것이 아니고 언제나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이요 그의 피조물들에게 주시는 편지로서 성경은 과거에 기록될 때에 영감된 것뿐만 아니고 자체가 영감을 계속적으로 주는 책이다.(영감도 성경의 속성으로서 늘 역사하고 있다)


2. 성경의 만전적 영감에 대한 믿음
우리의 신앙은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것을 대상으로 하며 우리의 성경관 문제는 기본적인 것으로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 권위를 가진다고 믿는다.


1) 예수님의 성경관
예수님께서는 요10:34~36에서 성경에 관하여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성경”(hJ grafhv )은 “그 성경”이라고 번역해야 하며 이는 성경의 전체를 가리키는데 이를 볼 때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만전적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신 것이다.


2) 사도들의 성경관
(1) 사도들은 구약 성경을 인용할 때에 “주께서....... 말씀 하신 바”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하는 것을 기정사실로 간주하는 어법이다.
(2)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qeovpneusto" : 하나님의 기운 부으심의 산물이란 뜻)으로 된 것(딤후3:16)이라고 하였다.
(3)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벧후1:19~21)이라고 베드로가 말했다.


3) 정통 교회의 성경관
교회는 성경을 하나님께서 저작하신 하나님의 책이라고 믿어 왔고 성경에 있는 말씀은 어떤 종류의 말씀이든지 실수가 없는 진리요, 또한 실패 없는 권위의 말씀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저작하신 줄로 믿어왔다.


(1) 교부 시대의 성경관
교부들도 성경을 마디마디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 폴리갑 : 성경을 지극 높은 자의 음성으로 여기고 성경에 대하여 그릇된 견해를 가지는 자는 누구든지 사탄의 맏아들이라고 하였다.
* 오리겐 : 복음 기자들은 성령님과 동역하였으므로 그들의 문서에는 그릇된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였다.(마16:12, 요6:18에 대한 오리겐의 말)
* 어거스틴 : 성경은 탁월하고 천적(天的)인 최종점의 권위로 성립되었다고 하였고 성경을 읽는 자들은 그것의 진실성에 대하여 확신과 안전감을 가지고 읽어야만 한다고 하였으며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글들에 전혀 오착이 없는 사실을 의심하는 자는 악한 일을 행하는 자라고 하였다. 그는 성경 말씀의 마디마디를 다 절대적 권위가 있는 것으로 여겼으며 성경의 한 말씀이라도 권위 없는 것으로 보는 자는 성경 전부를 위태하게 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2) 개혁파 복음주의 교회들의 성경관
① 프랑스의 신앙고백에서는 “책들(신, 구약 성경)이 내표하는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니 우리가 그것들을 하나님에게서만 받았고 사람에게서는 받은 것이 아니다.
② 벨직 신앙고백(화란의 칼빈주의 교회의 신앙고백)에서는 “우리가 이 책들을(성경 66권) 받은 이유는 교회가 이것들을 인정한 까닭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증거하시기를 그것들이 하나님에게서 났다고 하시며 또한 그것들 자체 안에 그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증거를 가진 까닭이다.......”
③ 독일 복음적 자유교회의 고백 제 1조에서 말하기를 “부분에 있어서나 전체에 있어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영감된 것이 성경이다.
④ 개혁 감독교 신조 제 5조에 말하기를 “모든 성경은 하나님께서 영감으로 주신 것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대로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⑤ 장로교회의 성경 교리 대한 예수교 장로회 신조 제 1조에 말하기를 “신,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본분에 대하여 정확 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니라.”(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 1장 제 2조에 근거)


(3) 삼대 칼빈주의 학자들의 성경관
① 위필드는 딤후3:15~16의 말씀을 들어 성경의 신적기원을 강조하며 후에 벧후1:19~21에 근거하여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자는 전혀 자기의 마음대로 말할 수 없었고 하나님의 감동하심에 이끌려서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② 바빙크는 위필드와 같이 축자 영감을 인정했다.
③ 카이퍼는 “거룩한 신학의 원리”라는 저서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사진이다.”라고 하였다.




제 2장 : 성경을 오해하는 신학운동
1. 일반 자유주의 신학과 바르트 신학
이 신학운동은 성경을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지 않으며 예수님을 도덕 수준이 높은 인물로만 알고 하나님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성경을 오해한 잘못된 운동이다.


1) 자유주의 신학자 하르낙과 헤르만 등의 구 자유주의 운동
이들은 성경을 역사적으로 신임할 만한 책으로 여기지 않으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단지 인간의 작품으로 여기고 연구한다.


2) 디벨리우스와 불트만 등의 운동
(1) 초대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그 시대에 임박한 줄 알았으므로 예수님의 말씀이나 행적 같은 것을 후대에까지 전할 마음이 없었으며 그것들을 정확하게 보존할 노력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그런 이유로 공관복음은 서로 내용을 달리하게 되어 지금의 형태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복음서에 다른 자료들이 부가 되도록 허용치 않았을 것이며 당시의 성도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그 당시에 될 줄로 생각하지 않았고(살후2:1~12)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을 하나님의 계시(啓示)로 알고 엄격하고 정확하게 계승하였다.


(2) 성경의 초자연적인 행적과 초자연적인 말씀들을 모두 후대에 가입된 것으로 간주하고 그 기사들을 믿지 않는 불신앙적인 편견을 가지고 성경의 본질적 요소들을 성경에서 어떤 역사적인 불신임성이나 혹은 불순정성을 발견한 까닭에서가 아니라 단지 “초자연적 성격”이 있는 기록이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모순된 이론이다.


3) 중간주의
거듭되는 그릇된 신학 운동의 실패에 따라서 정통주의에 접근할 듯한 입장을 취하면서도 아직까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확언하는 분명한 입장은 취하지 않는다.
이 운동은 여전히 자유주의의 비판 기준을 유지하면서 초자연적 기사들도 믿을 만한 것은 믿어 보자고 하는 신학 입장이다.
세벤스터는 성경의 중요한 교리들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믿지 않는 이유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초두에만 있을 뿐 신약 성경의 다른 부분에는 없으니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신약 성경은 주로 예수님의 공적 성역(公的聖役)에 치중하여 기록 되었는데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사실이 사도들의 전하는 말씀에 많은 말로 나타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을 참되지 않다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하면 안 된다고 “바빙크”는 말한다.


4) 신 정통주의
이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 자체로 믿지 않는 학파인데 이 학파에 속하는 예일 대학 교수 바로우스의 저서 “성경신학 총론”에서 몇 가지 뽑아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개신교가 가경을 성경으로 인정치 않음에 대하여 유감스러운 뜻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가경들 가운데 종종 비윤리적인 사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이단(가현설)을 퍼뜨리기 위하여 저술된 것도 있기 때문에 인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2) 다윗이 인구 조사한 사건에서 삼하24:1은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라고 기록되어있고 대상21:1에서는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라고 하였으니 여기서는 다윗의 인구 조사가 사단으로 말미암은 듯하여 바로우스는 이 두 가지 기록이 서로 모순 된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을 감동시키셨다는 말씀은 그가 친히 명령하셨다는 것도 아니고 그의 성령으로 다윗을 감동시켜 그 행동을 하게 하셨다는 것도 아니며 단지 다윗의 인구 조사는 옳지 못한 일이지만 그가 심히 원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것뿐이라고 해석해야 하며 대상21:1의 말씀은 다윗을 인구 조사를 하도록 직접 충동한 자는 사탄이라는 것인데 우리는 하나님이 어떠하신 하나님이심을 알 때에 이런 난제를 쉽게 해석할 수 있다.
사실상 성경에 계시된 대로 하나님은 그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사탄의 행동을 허용하시는 일도 있음을 알게 되면 이러한 난제에 대하여 문제 삼을 것이 없다.


(3) 성경의 그 기록이 영감된 것이 아니고 계시를 받은 그 사람들이 영감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선지자들의 기록 그것도 영감 되었다고 한다.(딤후 3:16, 벧후 1:20~21)


(4) 요나서와 욥기의 역사성을 부인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요나에 관하여 말씀하실 때에 그를 역사적 인물로 전제하고 말씀하신 것이 분명하고(마12:39~40) 야고보 또한 역사적 인물로 소개하였다.(약5;11)


(5) 성경은 신화론적 세계관에 의해 계시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신화적 해석을 배척하며 기독교는 어디까지나 초자연주의를 그 특징으로 가지며 성경에 기록된 초자연적 사건들은 그대로 역사적 사실들이며 “영원”이란 것이 역사화된 것을 계시라고 한다.


(6) 성경에 이방 사상이 반영되었다고 주장한다.
창1:2의 “깊음”이란 말 테홈[!/hT]은 어원적으로 바벨론의 티아마트[Tiamat], 곧 태고적 괴물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리고 “리워야단”[@t;y:w_l]에 대한 사상은 현저히 이방신화 사상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였다.
① 창 1:2에 있는 “깊음”이란 말 !/hT] (테홈)이 바벨론의 “티아마트”와 부합하는가 하는 문제인데 엘데스는 말하기를 “바벨론의 ‘티아마트’는 ‘ㅌ’[t]자로 여성 명사로 되어 있으나 창세기1:2의 테홈[]은 남성 명사이고 테홈의 ‘ㅎ’[h]자는 티아마트에 없다. 그러면 어떻게 ‘ㅎ’[h]자가 테홈에 생겼을 까? 그것도 난제로서 테홈이 바벨론의 티아마트에서 왔다고 할 개연성은 없다”라고 하였다.
② 알데스는 하나님께서 리워야단[@t;y:w_l], 곧 “용”과 더불어 싸우셨다는 “시편 74:13~14의 말씀은 이스라엘의 구원사와 관련되어 있으니 곧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그 사건과 관련이 되었다.”고 한다.
리워야단도 이방 창조 신화의 용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바다에 있는 용”은 애굽을 상징하고 “리워야단”은 앗수르 혹은 바벨론을 상징한다고 하였다.
오늘날과 같이 우리가 어떤 적국을 가리켜서 “마귀”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은 표현이다.


(7) 출20:5에 있는 대로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신이라고 하였는데 그의 질투하시는 성품은 악마적 성품과 관련되었다고 주장하며 또 말하기를 이사야 6장 이하에 기록된 스랍들에 대한 사상은 원시적인 뱀 숭배로부터 유래 되었다고 하며 구약에 있는 천사에 대한 신앙은 원시적인 물활론과 다신론의 유물이라고 하였다.
① 종교 진화론자들의 말에 의하면 사람들이 그 육체적 필요에 의하여 종교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역사적 원리에 예속된 방법으로는 참 종교의 근원을 찾을 수는 없는데 그 이유는 참 종교의 기원이 역사적 원리가 아니고 역사를 초월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② 종교 진화론자들은 저급종교가 인류의 문화 발달에 따라서 고급종교로 진화했다고 한다.
그러나 저급종교와 고급종교가 동시에 존재하였던 현상을 설명할 길이 없으며 모든 원시 종족들이 모두 다 땅에 속한 것들을 신이라고 하는 그 어두운 시대에 같은 문화 수준에 살면서도 어떻게 이스라엘만은 독특하고 탁월한 유일신 종교를 가졌을까? 이와 같은 현상은 고상한 유일신 종교가 인간의 점진적인 발달로 생긴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임을 반증한다.


2. 고등비평
고등비평은 하등비평과 다르다.
하등 비평은 본문 비평인 반면에, 고등 비평은 본문을 본래의 것으로 가정하고 그 본문의 저작자와 저작 연대와 그 글의 내용이 믿을 만한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데 이 비평 운동이 지난 18~19세기에 왕성하였다.
이 비평 운동의 많은 주장들이 근년에 이르러 고고학의 발달로 말미암아 뒤집혀졌다.[예: 누지 지방과 마리 지방에서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자료에 의하여 성경에 기록된 족장들의 가족 풍습이 역사적 사실과 일치함이 증명되었다.]


1) 오경에 관하여
고등 비평가들은 구약의 어떤 책들의 저작자 및 그 책의 역사성에 대한 재래의 정통적 의견을 전복시키려고 하였는데 그들은 오경의 저작자는 모세가 아니라고 하면서 오경의 순정성을 부인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학설은 성립될 수 없다.
그들의 사고방식이 틀린 사실은 구약의 다른 책들에 대한 그들의 천단한 학설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2) 여호수아서에 관하여
고등 비평가들은 이 책의 저자를 여러 사람으로 보고 그들 나름대로 소위 “엘리힘 문서”, “여호와 문서”등으로 구분하였는데 그들이 이렇게 나눈 이유는 여호수아서의 자료들이 통일되어 있지 않고 서로 충돌된다는 것이다.
그러나그들의 구분은 이 책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


(1) 여호와 문서 기자에 의하면 이스라엘 지파들이 각기 단독으로 가나안 땅에서 전쟁을 하였고 엘로힘 문서 기자에 의하면(1장~12장)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들로 편성된 군대를 거느리고 가나안을 정복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듯한 기록은 여호수아의 지휘로 이루어진 대국적인 전쟁의 승리를 말해주며 13장부터 나오는 전쟁 기록은 각 지파가 분배로 받은 지경 안에서 남아 있는 가나안 족들과 더불어 사운 내용을 보여주는 것이다.


(2) 요단 강 가운데서 취한 돌 열둘을 기념으로 세운 장소가 4장 8절과 9절의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8절의 말씀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이 유숙하는 곳에 세웠다는 것이고 9절의 말씀은 여호수아가 또 다른 돌 열두 개를 강 가운데 세웠다는 것이니 기념석이 두 곳에 세워진 것이다.


(3) 여리고성 함락에 관한 6장 기사에 있어서 3, 7, 10절에는 이스라엘 군대가 그 성 주위를 일곱 번 돌았다고 하고, 4, 6절에는 제사장 일곱이 그 성을 돌았다고 하니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상 이 두 가지 기록은 서로 충돌되는 것이 아니며 제사장들은 군대와 함께 언약궤 앞에서 행하였으니 군대가 성을 돌았다는 기록도 옳고 제사장들이 성을 돌았다는 기록도 옳다.


(4) 아이 성 함락에 관한 8장 기사에 있어서 그 싸움에 동원된 인원수를 3절에서는 3만 명이라고 하였고 12절에서는 5천 명이라고 하였으니 서로 충돌된다고 한다.
그러나 ① 여호수아가 두 차례 복병시켰다면(한번은 3만 명, 또 한 번은 5천명) 문제될 것이 없고 ② 서사자들이 숫자를 베낄 때에 실수하는 일이 있었다면 이는 원본의 오착은 아닐 것이며 ③ 또 다른 학자들은 3절의 3만 명이 그 전투에 동원된 군인의 총 수이고, 그 가운데 5천 명은 복병의 임무를 수행할 자들이라고 한다.


3) 사사기에 관하여
고등 비평가들의 견해에 의하면 사사기가 다음과 같은 단계로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
① B.C. 12~10세기까지는 구전으로 내려오다가 ② B.C. 10~8세기에 이르러 기록, 문서의 형태를 이루었고 ③ B.C. 8~7세기에 걸쳐 편집 ④ B.C. 7세기 말엽에는 신명기 학파의 편집도 받고 ⑤ 다시 포로 후 시대에 최종적 편집을 거쳐서 현제의 형태를 갖추었다고 한다.
또 다른 고등 비평가들은 위의 연대보다 더 늦추어서 B.C. 630~200년 사이에 사사기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학설들은 근거 없는 문서설을 따른 것으로 헤리슨은 이와 같은 문서설을 가리켜 신화적이라고 하였다.
사사기는 이스라엘 왕정 시대 초기에 기록되었는데 그 확실한 증거는 1:21에 “여부스 사람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날까지 예루살렘에 거하더라”라는 말씀에서 보듯 여부스 사람들이 멸절되기 전에 이 책이 기록된 것을 알 수 있는데 여부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멸절된 때는 다윗 왕 제 7년이었다.(삼하5:6~8)


4) 사무엘서에 관하여
고등 비평가들은 사무엘서(상)에 같은 사건에 대한 기록이 서로 다르게 두 번 혹은 그 이상 나와 있다고 하면서 이 책의 저작자가 한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1) 엘리가정의 멸망에 대한 두 기록 : 2:31~36은 어떤 선지자가 엘리에게 직접 경고한 것이고 3:11~14은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엘리에게 주신 것


(2) 사울의 기름부음 받은 사건이 세 번 기록된 사실 : 9:26~10:1은 사울이 기름 부음을 받은 기사이고 10:17~24은 이스라엘 대중 앞에서 소개된 기사이며 11:15은 사울을 왕으로 추대한 기사이다.


(3) 다윗이 사울에게 소개된 두 번의 사건 : 16:14~23은 사울에게 악신이 들어갔을 때 다윗이 수금 연주로 사울을 도와준 기사이고 17:55~58은 다윗이 골리앗을 죽임으로 사람을 놀라게 했을 때에 사울 왕에게 재인식된 기사로서 같은 사건에 대한 기사가 아니다.


(4) 골리앗을 죽인 두 기사 : 삼상21:19에 언급된 가드 골리앗은 다윗이 죽인 골리앗이 아니라 그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이다.(대상20:5)
고등 비평가들은 정당하지 않은 근거를 가지고 사무엘서를 여러 저작자들의 글이라고 그릇된 주장을 하는데 그러나 사무엘서의 단일성과 단편 문서들을 되는대로 봉합 시킬 만한 정당한 명분이 없는 상태에서 이렇게 무모한 주장들은 정당하지 않다.


5) 열왕기에 관하여
열왕기는 요시야 왕 시대와 관계가 있다고 하며 신명기 학파가 두 차례에 걸쳐 편집한 것이라고 하는데 처음에는 요시야 왕이 죽은 직후(B.C. 600)에 편집되었고 그것이 50년 후에 다시 편집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것들은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첫 번째 편집에 속하고 어디서 어디까지가 두 번째 편집에 속하는 지에 대하여 통일된 의견을 보이지 못하고 열왕기는 예레미야나 혹은 그와 같은 시대의 선지자가 다른 선지자들의 기록들도 사용한 것으로 선지자의 권위를 가진 이들 외에는 유다 왕과 이스라엘 왕의 역사를 기록할 만한 자격이 없다.


6) 에스더서, 욥기, 호세아서, 요엘서, 아모스서, 오바댜서, 요나서, 미가서, 나훔서, 하박국서, 스바냐서, 학개서, 스가랴, 말라기서에 관하여는 더 이상 기록하고 싶지가 않다.(P47~55까지)
아무리 배우는 학문이라고 하지만 더 이상은 고등 비평가들의 비평과 그것에 대하여 올바르게 설명하는 말들조차도 더 이상 언급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오르고 억누를 수가 없이 치밀어 오르는 분노는 고등 비평가들이라는 사람들의 비평을 위한 비평에 대하여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라는 한심한 생각 때문이다.
이들은 아주 작은 점 한 개라도 할지라도 문제를 삼아서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연구하고 또 연구의 결과들을 내어 놓고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만한 위인들일 것이다.
나 같이 미련하고 아둔한 자도 이해 할만한 그런 문제들을 그들은 어떻게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칼을 들고 난도질을 하려고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 택함 받지 못한 저주 받은 영혼들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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