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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dolf Bultmann
Rudolf Bultmann(1884-1976)은 1950년대에 세계적으로 신학적인 영향을 가장 많이 끼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1886년 독일의 Oldenburg에서 태어나 Marbug 대학에서
1951년에 은퇴할 때까지 주로 신약 신학을 가르쳤다. 1941년에 그는 [Offenbarung und
Heilsgeschehen]이란 저서를 출판하여 그의 명성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그 책 속에는
"Die Frage der naturlichen Offenbarung"이란 논문과 Neues Testment und Mythologie"라는
논문이 포함되었다.
특히 후자의 논문이 신학계의 선풍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 논문은 Barth의 [로마서 주석]이
제1차 대전 후의 신학계에 충격을 주듯이 제2차 대전 후의 독일 신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불트만의 신학 이해에 있어서 먼저 그의 일반적인 신학 입장을 살피고 다음으로 비신화화의
신학적 프로그램을 검토하고 마지막으로 그의 실존주의적 해석법을 살피려 한다.
1. 양식사(樣式史) 학파의 입장
불트만은 H. Gunkel, K. L. Schmidt와 함께 양식사 학파의 대표적 인물이다. '양식사'란
Martin Dibelius(1883-1947)가 쓴 Die Form Ges-chichte des Evangeliums에서 영향을 받아
일어난 신약 신학의 한 운동인데 이 운동을 이어 받아 불트만이 더욱 그의 저서 Die Geschichte
der Synoptischen Tradition에서 이론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이 [공관복음 전승사]에서
복음서는 예수의 생애와 교훈에 관한 정확한 기록이 아니며 초기 크리스챤들의 종교적
작품에 불과한 사실을 지적한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신약성경이 저술되기 전에 여러 교회에 유포되고 있던 단편적인 구전
(口傳)들을 한데 모아서 편집하였기 때문에 복음서의 기록들은 그 역사적 신빙성이 아주
적다고 본다. 그는 역사적인 [예수전]을 복음서에서 그하려던 전기 신학자들의 신학적
불모성을 지적한다. 복음서 연구는 그러므로 역사적 기록 속에서 예수를 이해하려고 하기
보다는 예수에 관해서 초대교회가 어떻게 예배하고 선포하였는가를 규명하여야 한다고 했다.
예를 들면 예수가 자신이 메시야로 자인하였는가의 여부는 역사적 자료로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불트만 자신은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스스로 자인하심을 부인하였으나 그 누구도
자기의 입장의 잘못을 부정함에 있어서 절대적 확실성을 가지고 주장할 수 없다고 했다.
예수의 메시야 되심의 자의식과 상관없이 초대 교회 크리스챤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믿어
'메시야'로 부르고 그러기 위하여 그의 부활과 승천을 복음서에 첨가하였다고 한다. 그러면
무엇이 비평가들의 과제인가?
우리가 소유한 복음서들의 기록들 이전에 복음서를 구성한 단위들을 그들의 양식에 따라
구별하여야 하며 그 당시 권위 있었던 민족 자료와 복음서의 단위 사이에 유사성이 있음을
알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비평가들의 자료 구분 방법은 복음서에서 시공간에 관한 언급을
제거시키는 것이며 다음으로 각 단위를 찾아낸 후 수식 및 첨가된 이차적 요소들을 다시
제거함으로 그 단위의 원형을 찾아내야 한다고 한다. 그렇게 여과되고 확인된 단위들을
가지고 그것들이 형성되었다고 생각되는 역사적 환경을 찾아 그 단위들을 다시 연결시키는
작업을 하여야 한다.
이렇게 하여 공관 복음서 거의 전부가 제이차적인 자료들로 구성되었다고 단정하였다.
예수님의 처녀 탄생 기사를 위시하여 광야 시험, 변화산 사건, 이적, 부활 등 모든 기사가
모두 신화로 취급받게 되었다. 복음서의 신화적 성격을 인정한 후 불트만은 그 신화 처리를
위하여 비신화화 작업을 제창하였다.
2. 비신화화(非神話化)
불트만은, 신약은 신화로 가득 차 있으므로 그것을 현대인에게 선포하기 위하여
그 신화적 요소들을 재해석하여야 한다고 한다. 복음서는 그 당시에 통용됐던 신화적
사상체계를 사용하여 예수의 의미를 표현했으므로 그 신화적 셰계관을 현대인의 이해를
위하여 비신화화시켜야 된다는 것이다.
신약의 저자들은 코페르니쿠스 이전의 셰계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우주를 삼층적인
구조형태로 생각했다. 상층에는 하나님과 천사가 있는 초자연 세계요, 하층엔 사탄이 있는
지옥의 세계요, 그 사이에 인간 세계가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 삼중적인 세계 간에는
항상 상호 작용이 있는데 삼층부인 영계에서 지상계에 하나님이 간섭하실 때 이적 현상이
생긴다. 그러나 오늘날 같은 과학 만능 시대에는 이와 같은 신약 저자들의 신화적 신앙이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트만은 신약의 메시지는 독특하며 절대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본다.
그것은 신약의 복음 속에 케리그마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옛 자유주의 신학자들처럼
신화적 요소를 제거하여 버릴 것이 아니라 다만 새롭게 다시 해석하여 오늘의 상황에
맞도록 실존적으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했다.
신약의 신화들은 주로 유대인들의 종말론 사상이나 노스틱주의나 헬라 신비 종파에서
유래된 것이며, 사람을 하나님과 사탄 두 사이에 끼어 있는 존재로서 설명하고 있다.
인간 스스로는 이런 처지에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으므로 신적인 간섭, 곧 사탄과 싸워
이기는 신의 은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 구원을 이와 같은 이원론으로 설명할 때 신화적 설화 자체는 무용할 뿐이나 그 설화가
내포하고 있는 인간 실존의 의미는 오늘날 인간 실존의 참 뜻을 이해하는 데 아주 유효
적절한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신약을 다룰 때에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은 신화적인 설화에 매일 것이 아니라
그 설화 배후에 신약 저자들이 종교적인 경험과 구원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신약
저자들이 고백한 구원 사실과 경험이란 무엇인가?
여기에 실존주의적인 해석학의 문제가 따른다.
3. 실존주의적 해석
그러면 실존주의적 구원 해석은 어떠한 것인가?
그 해석을 위해 불트만은 실존주의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존재론적 해석을 따른다.
무엇보다도 존재의 실재론적 구조에 관하여 하이데거가 내린 실존적 분석은 신약성경이 보는
인간관을 세속적이며 철학적인 견지에서 본 것에 다를 바 없다. 역사 속에 인간 존재의 가장
중요한 특색을 그는 불안으로 보았다.
인간은 과거와 미래 사이에 끼어 영원한 긴장 속에서 존재하며, 항상 인간은 새로운 가능성에 직면한다.
인간의 구체적 자연 세계에 사로잡혀 그 자신의 개성을 상실하여 버리든지 아니면 모든 외적인
안전을 포기하고 미래를 향하여 용감히 투신함으로 "참 사람다운 존재"가 되든지 결단하여야 한다.
이러한 인간관은 신약성경의 인간관과 바로 상통하는 것이 아닌가.
불트만에 의하면 '참 인간다운 삶'이란 '자기 헌신의 삶'이다. 자기 자신의 욕심만을 위한 삶이란
참 인간다운 삶이 아닌 삶이다. 이것이 바로 죄의 본질이다. 이 authentic life가 없는 사람은
이 세상만을 위해 살며 그런 사람은 실상 이 세상에 매여 '육신'에 속해 산다. 이런 삶의 결과는
불안 뿐이다.
이 불안의 상황에서 사람은 스스로 해방될 수 없다. 그러나 인간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육신에 매여 사는 불안의 삶이 변하여 자유로운 삶, 곧 authentic life를 누릴 수 있다.
이것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에서만 얻어지는 '구원의 은혜'이다.
이 구원의 은혜는 구원의 메시지 곧 케리그마가 전파되고 믿어질 때만이 얻어질 수 있다.
이 점에서 불트만은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입장과 다르다. 평면주의적이고 역사주의적
입장을 취한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는 위로부터 내리는 구원의 은혜라는 것은 아예
찾아볼 수 없는 개념이었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서 기독교는 하나의 윤리 종교에 그치거나 더 좋은 종교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불트만은 적어도 은혜를 베푸는 계기가 되는 '십자가 사건'을 말하고 있다.
불트만이 당면한 과제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의 역사성까지도 비신화화시켜야 하느냐 아니면
예수의 사건을 역사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느냐이다.
하이데거는 예수의 역사적 사건까지 비신화화 내지 철학화시켜 버렸다. Kierkegaard는 비록
하이데거의 영향을 입긴 했으나 예수 그리스도만은 그대로 붙잡은 채 실존주의적 인간 이해를
시도했다.
불트만은 이 문제에 있어서 양자 사이에서 하이데거 편으로 기울어진 듯하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해석할 때 한 시점, 곧 역사적 사건으로 보다 실존적 '새 역사의
사건'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서 예수의 부활은 과거의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부활의 역사성이란 제자들이 십자가 사건을 하나의 종말론적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주관적
신앙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므로 이미 일어난 역사적 사건으로서 십자가가 제자들의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십자가를 실존적으로 이해한 제자들의 신앙이 십자가의 영원한 사건성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4. 불트만 신학의 문제점
불트만은 그의 신학 동기를 선교적 차원에서 표현하려 하였다. 현대인의 사고 방식에 상응하는
신약의 메시지 해석을 시도하여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19세기 역사주의 신학자들의 신학적 실패를 지적하고 비판적 신약연구의 결과와 실존주의
철학과의 건설적인 연결을 통하여 새로운 성경 해석의 길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기독교 신앙의 객관성을 외면한 채 주관적이고 순간적인 결단에만 의존하는 또 하나의 극히
불안스런 기독교 해석을 낳고야 말았다.
문제는 신약의 의미에 결정적 단서로서 인간 실존의 실존적 이해를 적용하는 것이 신약의
참 의미를 밝히기 보다는 오히려 신약성경의 원래의 의미를 완전히 이질화시켜 버린 데 있다.
5. 불트만 신학의 문제점 요약
1) 계시의 주체성 문제
신 지식이 인간의 자기 이해의 차원에서 다루어지고, 신의 존재가 인간 존재의 분석에서
이해되고, 역사가 실존적 차원에서만 이해될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 속에 찾아오셔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계시자로서의 하나님은 그 계시자로서의 주체성 상실의 도전을 받는다.
불트만의 문제점은 인간 실존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대하여 올바른
인식의 결여에서 출발한다. 그의 신학 체계에 의하면 계시의 주체는 하나님이 아니라 실존
이해를 통하여 계시를 가능케 할 수 있는 사람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 사역은 인간의 실존적 이해와 교회의 선포 이전에 이미 주어진
사실이다. 주어진 계시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단순한 해석 문제를 넘어서 계시 자체의
창출자로서 인간 이해는 인본주의의 극치요, 무신론 철학 일보 전의 철학적 곡예이다.
2) 예수와 그리스도와의 분리 문제
불트만은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를 분리함으로써 역사적 사건 속에 일어난
케리그마의 뿌리에 대하여 의심을 품게 한다.
역사적 예수의 행한 일 자체에 대하여 외면한 채 신앙의 그리스도만 어떻게 강조할 수
있을까? 신약성경은 이 양자를 분리하지 않고 함께 강조하고 있다. 십자가 사건 자체의
실존화 그것은 기독교의 뿌리를 흔드는 시도에 불과하다.
기독교가 십자가와 부활의 역사적 사실성을 중요시 아니하고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이런 불트만의 회의주의적 입장에 대하여 그의 제자들 사이에 많은 신학적 반발이 일어나고
있음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제8장 급진신학
(2) Rudolf Bultmann
불트만은 기독교를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처럼 한갖 윤리 종교에 국한되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단순한 도덕 종교가 아니라 평면적 차원을 훨씬 넘어 은혜를 내리시는 복음적 요소를 내포한 종교임을
주장하였다.
생명과 실존과 관계되는 십자가의 복음을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나름대로 이해한
비신화화된 복음을 현대인의 실존주의적 사고 방식 속에 넣어 주고 싶은 선교적 정열도 넘치는 학자였다.
그러나 그가 시도한 비신화화의 프로그램은 객관적 계시를 외면한 또 하나의 주관주의 소산이란
점에서 오늘의 급진 신학의 밑받침이 되고 만 것이다.
불트만에게 있어서 문제시된 것은 십자가 사건의 역사성까지 비신화화시켜야 하느냐,
아니면 그대로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 받아들이냐의 문제였다.
그것은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함께 신앙적으로 수용하느냐의 문제와 통한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불트만에 끼친 영향은 그로 하여금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한 역사적 시점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보지 않고 지평을 넘어 영원한 '참 역사'의 사건으로 보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부활 사건도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가 아니라 제자들이 십자가 사건을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불과하다고 본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십자가나 부활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들이 다만 실존적 사건이라는 그 신앙이 영원적 사건성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불트만은 이렇게 십자가와 부활의 역사성 자체를 비신화화 시킴으로써 복음의 변질화를 초래시켰다.
이같은 지나친 주관주의는 새로운 영지주의의 출현을 암시한다. 바로 이런 주관주의의 온상에서
인본주의적인 급진 신학이 싹트게 된 것이다.
(현대신학개설 53~61p에서 발췌 / 김의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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