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경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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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신학의 근거는 성경이다. 그런데 로마교회에서 사용하는 성경은 개신교회에서 사용하는 성경과 차이가 있다. 공동번역 성경 가톨릭용에서 보는 것처럼, 로마교회에서는 구약에 15권의 책이 더 덧붙여 있는 성경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이 책들을 외경이라고 부른다. 외경은 권위가 있는 하나님의 말씀인가. 그렇다면 왜 개신교회의 성경에는 외경이 빠져 있는가.
외경의 유래
외경이란 '아포크리파'라고도 불려진다. 이는 숨겨진 책이라는 뜻으로, 그 저작자가 분명하지 못하거나 그 내용이 확실하지 못한 책, 즉 그 권위를 인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정경에 들지 못하는 책을 가리키는 말이다. 넓은 의미에서의 외경은 신구약 성경에 함께 적용되어진다. 그러나 구약 성경과 관련하여서 제한적으로 사용되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구약성경에는 본래 각각 낱권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구약은 주전 5세기에 이르러, 에스라와 대공회(大公會)의 회원들에 위해서 39권으로 확정되어 한 권의 책이 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는 상당한 논란이 있었다. 특히 아가서가 그러했다.
외국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이 늘어나고, 희랍문화가 세계를 지배하게 되자, 성경은 당시의 공통어인 희랍어로 번역을 할 필요가 생겨났다. 그래서 각 지파에서 뽑힌 70명의 대표들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모여서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던 구약성경을 희랍어로 번역을 해냈다. 우리는 이것을 70인역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70인역은 구약 39권의 책 이외에, 그때까지 전해 내려오던 책들 중에서 읽으면 도움이 되겠다고 여겨지는 15권의 책을, 뒷부분의 여백에다 덧붙여 놓았다. 이 책들이 바로 정경 이외의 경전인 외경(外經 또는 假經)이다. 그러므로 외경은 읽어서 참고가 되어질만한 책일 따름이고,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말씀에는 들지 못한다.
로마 문화가 왕성해지자, 성경은 제롬이라는 사람에 의해서 로마어(라틴어)로도 번역이 되었다. 제롬이 번역한 라틴어 성경은 불가타 역이라고 불려진다. 제롬은 구약성경과 함께 외경도 번역을 해놓았다. 그것은 외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겼기 때문이 아니었다. 단순히 70인역의 전통을 따르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 이 사실은 외경 속에 서둘러서 번역을 한 흔적들이 역력하게 나타나 있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가 있다. 로마교회는 제롬이 번역한 라틴어 성경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이 때문에 로마교회는 그 안에 포함되어 있던 외경을 마치 정경처럼 받아들이게 되었다. 1546년에 모였던 트렌트 회의는 공식적으로 외경이 제 2의 경전임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것은 제롬의 본래 의도와는 다른 것이었다.
신약 성경도 처음에는 각각 낱권의 책이었다. 그러다가 주후 4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27권이 한 권의 책으로 확정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히브리서, 요한 3, 3서, 베드로후서, 유다서, 요한계시록 등에 대한 상당한 논란이 있기도 했다. 한편 초대교회에서는 선지자나 사도들의 저작이라고 이름 붙여진 복음서나 예언서, 또는 서신서나 계시록 등 다양한 가짜 문서들이 무수하게 많이 나돌았다. 우리는 이것들을 외경과 구분하여 위경(僞經)이라고 부른다. 위경은 저작 의도부터가 매우 불순하기에, 참고의 여지조차도 없는 책에 불과하다.
외경의 종류
외경의 종류와 그 각각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에스드라 1서: 역대하 35, 36장과 에스라서, 느헤미야 8장의 배경과 동일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요시아 왕의 유월절에서부터 시작하여, 에스라의 율법 낭독으로 끝을 맺는다. 진정한 지혜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다리오 왕궁에서 있었던 세 시종의 대화와 이스라엘의 귀한 성전의 재건을 허락하는 고레스의 칙령 등의 기록은 스룹바벨 총독이 어떤 사람이었으며,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여 포로생활에서 귀환을 할 수 있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파사 왕들의 순서가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게 기록되어 있다.
2) 에스드라 2서: 유대적인 묵시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기록한 여러 가지의 묵시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살라디엘의 묵시, 독수리 환상, 메시야 환상, 전설 등이 나온다. 그 형태나 내용으로 볼 때,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이 기록한 책으로 여겨진다.
3) 토비트: 소경이 된 토비트의 아들 트비아스가 먼 곳에까지 가서 빚을 받아 오는 도중에, 하나님의 사자의 도움을 받아 큰 어려움을 물리치고, 아내 사라를 맞게 되는 과정을 통해서 의인의 자녀가 복을 받게 됨을 보여주는 책이다. 그러나 그 내용이 지나치게 허구적이고, 인간의 공로를 강조한다. 그 시대적인 배경도 실제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있다.
4) 유딧: 용감하고 슬기로운 여인 유딧이 아름다운 용모로 적장(敵將)을 유인하여 말뚝을 박아서 죽임으로써, 국가를 위기에서 구해내는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전형적인 희랍소설의 기법으로 씌여졌다. 그러나 느브갓네살이 실제와는 달리 바벨론이 아닌 니느웨를 다스렸다고 언급되어 있기도 하다.
5) 에스더 첨가서: 본래 히브리어로 된 에스더서에는 없었으나, 희랍어로 번역한 70인역에 나오는 내용들을 뽑아서, 후대 사람이 6장 105절로 모아 놓은 책이다. 아하수에로 왕을 구해낸 사건과 관련된 모르드게의 꿈과 해석, 모르드게와 에스더의 기도, 아하수에로 왕의 칙령과 포고문 등이 나온다.
6) 솔로몬의 지혜서: 잠언의 경우처럼, 지혜를 의인화시켜서 찬양하는 책이다. 지혜를 가진 의인을 악인과 대조하면서 지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이스라엘 역사 속에 나타난 지혜의 효능을 소개한다. 즉 악이 우세 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결국에는 의가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을 말함으로써, 고난 중에 있는 자에게는 위로와 격려들, 그리고 배교자에게는 깨우침을 주기 위한 글이다. 이 책은 히브리적인 사상과 희랍적인 사상을 훌륭하게 조화시켜 놓고 있다. 그러나 메시야에 관한 언급은 찾을 수가 없다.
7) 집회서, 또는 시락의 아들 예수의 지혜서: 외경 중에서는 유일하게 저자의 이름이 밝혀져 있다. 시락의 아들(벤 시락)은 주전 2세기 후반에 살았던 유대 현인이었다. 이 책은 마치 잠언처럼, 지혜를 일인칭화 하여 찬양하는 시로 되어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근원임을 강조하고, 온 땅에 퍼져 있는 지혜, 특히 예루살렘에 충만한 지혜를 찬양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과 사람의 책임, 염세주의와 낙관주의 등 서로 상반된 견해들에 대한 교훈에서 일관성이 부족하다. 오히려 서로 모순을 보이는 경우도 많다. 여자에 대해서는 악으로 유혹을 하는 자로 보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조부들의 찬미"라는 제목 부분에 분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이사야서의 여러 부분들이 인용되어 있다.
8) 바룩: 예레미야의 서기관 바룩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동족들에게 보내는 글이다. 그 내용은 예레미야, 다니엘, 욥기에서 뽑아낸 부분들을 종합한 것으로, 죄에 대한 고백, 용서와 자비를 구하는 기도, 지혜의 샘에 관한 설교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렘 43:6에는 바룩이 예레미야와 함께 바벨론이 아닌, 애굽으로 갔다고 되어 있다.
9) 예레미야의 편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형제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글이다. 포로의 기간에 대한 예언과 배교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다. 매우 산만함과 불필요한 반복, 그리고 비논리적인 부분들이 눈에 띤다.
10) 아자리아오 세 청년의 노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풀무불 속에서 불렀다고 하는 찬송시이다. 재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정의는 역사를 하고 있음을 찬양하여, 이스라엘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한 책이다. 그러나 우상숭배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11) 수산나: 경건하고 현숙한 여인 수산나를 통해서, 악을 벌하시고 선을 보상하시는 하나님을 설명하는 책이다. 다니엘은 지혜로운 재판관으로 등장한다. 다니엘은 모함을 받아서 위기에 처해 있던 수산나를 구하고, 음탕한 두 장로를 심판한다. 이 책은 극적인 요소가 많아서, 성경 중 최초로 희곡화되어 연극 무대에 올려졌었다. 정의와 공정한 재판을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의 전통적인 율법관과 비교해 보면,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12) 벨과 용: 이방의 신(神)인 벨과 용을 섬기는 제사장들의 음모와 악행을 밝혀내는 다니엘의 활약과 지혜를 기록한 책이다. 마치 탐정 소설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이방신의 이름이 용으로 불려진 것을 보아, 바벨론보다는 이집트를 배경으로 기록한 듯하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이집트 사람들이 뱀을 섬겼기 때문이다. 다니엘이 사자굴 속에 6일 동안 갇혀 있었으며, 그 동안 매일 하박국 선지자가 유대에서부터 날라다 주는 음식을 먹었다는 내용은 다니엘서와 상당한 거리가 있고, 현실성이 부족하다.
13) 므낫세의 기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므낫세 왕이 드렸다는 기도이다. 15절로 된 짧은 참회의 시 형식이다. 역대하 맨 마지막 부분에 덧붙여지는 경우도 있다.
14) 마카비 1서: 신구약 중간 시대인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박해 때에 있었던 이스라엘의 혁명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유다 마카비라는 인물과 그의 형제들을 중심으로 혁명의 배경, 발단, 진행 등을 소개한다. 그 배후에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는 희랍의 지배 아래서도 계속이 되었음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담겨져 있다. 그 내용이 비교적 자세하여, 신약과 구약 중간시대의 역사를 알아 볼 수 있는 자료가 된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이미 선지자들에게서 예언의 영이 떠났다고 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스스로 영감이 된 책의 범주에서 제외를 시키고 있다.
15) 마카비 2서: 예루살렘이 압제를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거룩한 뜻을 가지고 계시므로,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기록한 책이다. 유다에 있는 유대인들이 애굽에 있는 형제들에게 보내는 편지로 시작을 한다. 성전의 거룩함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시대의 배열 순서에서 역사적인 사실과 다른 내용들이 나온다. 그리고 죽은 자들을 위한 살아 있는 자들의 기도와 헌금, 그리고 그 효력으로 말미암는 속죄의 가능성을 말하는 내용도 담겨져 있다. 그래서 로마 교회에서는 연옥 교리의 근거로 이용을 한다.
외경이 정경에 들지 못하는 이유
외경이 정경에 들지 못하는 이유는, 성령께서 영감을 하셨다는 증거를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성령의 영감을 성경의 무오함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성경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각각의 성경들 속에 나타나는 직접 또는 간접적인 언급들을 통해서 확인되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매 성경들 속에 성령의 영감 사실이 문자적으로 언급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영감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발견할 수 없는 경우에는, 그 내용의 중심 주제가 그리스도 또는 죄인의 구원과 어떻게 연결이 되어 있는가, 그 도덕적인 수준이 어떠한가, 교회의 역사가 그 권위를 인정했는가 하는 것 등을 고려하여서 영감의 여부가 결정되어지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외경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이 있다.
첫째, 예수님과 사도들께서 인용을 하거나 언급을 한 사실이 없다. 신약에는 구약을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인용을 한 경우가 약 630회나 된다. 그러나 외경을 인용한 경우는 한 번도 없다. 예수님이나 사도들 당시에는 외경이 첨가되어 있는 70인역 성경이 널리 이용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나 사도들께서는 한번도 외경을 인용하거나 언급하신 일이 없었다. 우리는 이것을 단지 우연의 탓으로 돌릴 수 없다. 이 사실은 외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그들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둘째, 인명이나 지명 또는 그 연대가 역사적 사실에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성경은 오류가 없는 책이다. 이 사실은 지명이나 인명 같은 고유명사나 역사적인 순서에도 적용이 된다. 만일 외경 속에 실제 역사적인 사실이나 정경에 밝혀진 내용과 일치가 되지 않는 사례가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오류를 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외경은 오류가 없는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이 될 수가 없다.
셋째, 내용에서 현실성이 없고, 매우 허황된 경우가 발견된다. 성경에 밝혀져 있지 않아서 궁금하게 여겨지는 내용을 추리를 빌려 보충한 것이나, 바벨론에 갇혀있는 사람들을 위해 예루살렘에 있는 선지자에게 매일 음식을 나르게 하여서 음식을 먹도록 한 것, 큰 물고기의 간이나 내장으로 귀신을 이기고 소경의 눈을 뜨게 했다는 것 등은 매우 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 성경은 비록 환상이나 예언이라 하더라도, 항상 현실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그리고 그 목표는 그리스도와 죄인의 구원에 맞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외경은 그 내용을 볼 때, 정경에 들지 못한다.
넷째, 도덕적 기준이 정경에 비해서 매우 저급하다. 성경은 매우 고상한 윤리를 제시하고 있다. 율법에 대해서는 완전한 순종을 요구한다. 그리고 은혜를 통해서, 그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을 가능하게 해준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비록 선한 목적을 위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불의한 수단의 사용은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우상숭배는 하나님의 질투의 대상으로까지 여겨서, 어떠한 경우에도 용납을 하지 않는다. 외경은 이러한 성경의 도덕 기준에서 볼 때, 그 수준이 매우 뒤떨어진다. 그래서 때로는 왜 기록을 했는지가 분간조차 안 되기에, 저작 의도마저 불순하게 여겨지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외경은 정경에 들어가지 못한다.
다섯째, 70인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다른 사본들이나 번역본들에는 외경이 없었다. 70인역은 히브리어를 희랍어로 번역한 성경이다. 그런데 70인역보다 먼저부터 있었던 대부분의 히브리어의 사본들에는 외경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맛소라 사본에도 외경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외경은 보편적인 권위를 지닌 성경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여섯째, 초대교회와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이 외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외경이 기록될 당시의 사람들, 또는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이나 교회 회의들이 성경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외경을, 후대의 사람들이 임의대로 성경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매우 잘못된 판단이라 보아야 한다. 초대교회 지도자들의 판단이나 회의들의 결정을 무조건 옳다고 수용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일찍이 역사에 없었던 일을 후대 사람들이 임의대로 바꾸어 놓는 것은 잘못이다. 이 때문에 개신교회는 외경을 성경에 포함시키는 것을 단호하게 반대한다. 심지어는 로마교회 안에도 개신교회와 입장을 같이 하는 솔직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외경을 가치
외경은 성경으로서의 권위를 갖지 못한다. 그러나 한번쯤 읽어서 참고를 삼는 것이 좋은 일이다. 우리는 설교집이나 간증서 같은 경건 서적들을 통해서 많은 유익을 얻는다. 심지어는 종교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소설이나 잡지들을 통해서도 유익을 얻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그렇다면 외경을 한번쯤 읽어보지 못할 이유가 없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외경이 등장하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외경을 읽을 때는, 그것이 오류가 없고 권위가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님을 명심하고 읽어야 한다. 만일 이 사실을 잊은 채, 외경이 마치 성경이나 되는 것처럼 높이고 신뢰를 하게 되는 일이 생겨난다면, 차라리 읽지 않는 것만도 못하게 된다. 거짓 신을 참 하나님처럼 여기는 것은 우상숭배에 해당된다. 외경을 성경으로 여기는 것도 역시 우상숭배와 같은 너무나도 엄청난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적당한 영양은 건강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지나친 영양 섭취는 오히려 독이 된다. 사람의 본성은 항상 이러한 지나침에 이르게 될 위험성이 매우 높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외경에 대한 경각심을 늦추어서는 안 된다.
오늘날 우리의 주변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외경들을 만들어 놓고, 이것들을 성경처럼 여기는 사람들의 활동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몰몬경, 내가 본 천국, 새로운 계시록, 교회의 규칙과 법령, 교리서, 설교집, 간증서 등 새로운 형태의 외경이라고 여겨질 만한 책들이 매우 많다. 또 그 종류도 다양하다. 우리는 이러한 책들이 가지는 위치와 역할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독에 몰리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 이단이나 사이비 집단일수록 이러한 의미의 책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런 책들을 성경보다도 더 권위 있는 책으로 여긴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성경중 일점이나 일획을 더하거나 빼는 자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저주를 면하지 못한다(계 22:18, 19). 그러므로 우리는 어디까지나 성경인지를 바로 알아야 한다. 그래서 거기에다 무엇을 더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또 빼는 일도 없어야 한다. 외경은 성경이 아니다. 우리는 외경을 성경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제 2의 경전으로 여겨서도 안 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들이 또 다른 어떤 것들을 새로운 외경처럼 여기기 쉬운 처지에 노출되어 있음을 알아서, 스스로 자신 살피기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월간 <교회와신앙> 1999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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