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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구(국제신학대학원 부총장/교수)
한국교회의 모습을 바라볼 때(한국교회 전체를 살피든지 우리들이 속한 개 교회를 살피든지) 안타까운 모습이 아주 많이 있지만, 그래도 그 안에 교회의 참된 자태를 찾아 헤매는 모습이 또한 있기에 하나님께 감사드리게 된다. 참으로 귀한 운동이 한국교회 안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맞추어 교회의 참된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는 운동이다.
마치 종교개혁 시대에 교회를 사랑하는 이들이 자신들이 속한 교회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바른 교회를 향해 어떤 의견을 내기도 하고, 그것 때문에 쫓겨나기도 하고, 또 그들과 함께 고난에 동참하기도 하면서, 이 땅 위에 있는 교회는 항상 불완전하지만 그래도 나아가야 할 방향만은 성경이 가르치는 방향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운동이 일어난 것과 비슷하다.
문제는 주께서 이런 운동을 당신님의 섭리 가운데서 의미있게 사용하셔서 한국교회의 개혁과 부흥을 가져다주시도록 할 것인가, 아니면 교회의 교회다움에의 회복을 주장하는 이들이 후스(Huss)나 위클리프(Wycliffe)처럼 고난받고 급기야는 처형당하고, 우리는 다른 개혁자들을 기다려야 하는지는 우리로서는 아직 알 수 없는 문제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우리로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 각자와 각 교회와 모든 기독교 기관들이 각각 또 공동으로 힘써 노력해야만 한다.
먼저 교회와 관련해서도 우리의 지향하는 바, 우리의 꿈꾸는 바를 정당화 할 수 있는 근거는 과연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해야만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개혁자들의 후예들은 당연히 "성경", 그것도 "오직 성경"을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유명해진 이 말이 너무 많이 사용되어서 그런지, 그 말이 이제는 무색해져 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성경"의 의미를 분명히 하는 일에 해야 한다. 그것은 교회와 우리의 삶과 생각에 있어서 모든 논의점을 생각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특히 그 종국적 결론에서 우리가 다른 모든 것을 다 고려하되 우리의 최종적 판단 근거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해당하는 성경 구절들을 찾으려고 하거나, 자신이 성경의 전문가이므로 자신의 말만을 마땅히 따라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직 성경"은 성경의 영감과 권위와 명료성을 인정하는 터 위에서, 그러나 성경을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서 바르게 해석한 결과에 대해서만 할 수 있는 말이다. 성경을 잘못 해석하여 놓고 그것이 오직 성경의 유일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오늘날 우리들은 성경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의 전쟁 가운데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각각의 주장들은 그들이 "오직 성경"의 원리에 가장 부합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성경을 바르게 해석한 것인지를 살피기 위해서는 다음 몇 가지 시금석에 비추어 검토해야 할 것이다.
첫째로, 그 해석과 적용이 그 본문의 문맥과 인근 문맥에 맞는 해석에서 나온 것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주어진 문맥을 무시한 성경 인용과 해석은 결국 오직 성경의 원리를 파괴하는 것이다.
둘째로, 성경 전체의 사상과의 연관성과 조화를 지니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전에는 신앙의 유비(analogia fidei), 또는 성경의 유비(analogia scriptura)라는 말로 이해되던 이런 해석은 오늘날에는 주어진 부분(pericope)에 대한 성실성이라는 이름 하에 무시되는 일이 부지기수이다. 물론 우리는 각 성경의 각각의 부분에 충실한 해석을 하려고 노력해야 하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성경 전체의 사상을 찾아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마지막에는 조화와 체계화의 시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상의 두 가지 시금석이 근원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도울 수 있는 다른 두 가지 시금석을 그저 보조적인 것으로 언급해 보고자 한다. 그 하나는 전통적 해석과의 비교라는 시금석이다. 물론 전통적 해석이 성경의 본래적 의미를 해치고 오랫동안 전통의 이름으로 그 본문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 우리의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멀데 하는 일이 많이 있어 왔고(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대한 고대와 중세의 해석을 생각해 보라), 또 지금도 있을 것이다(예를 들어서,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는 말씀에 대한 우리들의 일반적인 이해를 생각해 보라).
그러나 우리는 항상 주어진 정황에서 해석적 작업에 참여하는 것이므로 일단은 나 자신의 해석이 전통적 해석들과 과연 어떤 관계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이런 작업을 끝없이 하려는 것은 그저 현학(玄學)적인 것이 되고, 우리를 전통과 역사의 노예로 만들어 끊임없이 과거 선배들의 견해들만을 언급하는 힘없는 해석자들이 되게 하기 쉽다(마 7:28-29의 "저희 서기관"들의 해석과 비교해 보라). 그러나 비교적 건전한 해석의 전통을 잘 살펴보는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헤매고 방황하지 않게 하는 큰 기둥 역할을 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그저 수구적인 전통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지금 여기서 내가 하는 해석 작업과 그에 근거한 교회에의 적용 작업의 의미를 무색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서 개혁신학적 해석 전통을 존중하면서 해석과 적용 노력을 하는 것은 우리의 방종과 낭비를 많이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보조적 시금석은 우리의 해석이 과연 그 시대의 건전한 상식에 비추어서 어떻게 이해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오늘날처럼 비상식적인 교회 정황 가운데서는 이것이 매우 중요한 시금석이 된다. 사람들은 흔히 교회가 상식 정도라도 통하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고들 말한다. 이는 교회를 그 정도로 만들자는 의도는 아닐 것이고, 이 시대 우리네 교회가 얼마나 비상식적(몰상식적?)인지를 고발하는 말이리라고 생각된다. (우리 시대 교회의 대부분의 문제가 상당히 이런 수준의 것이지 않은가?)
물론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세상의 상식 이상의 수준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네 교회가 세상의 상식으로 보았을 때 지탄의 대상이 되거나, 그들의 상식으로 보더라도 이상한 기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마다 다 성경에 근거해서 어떤 말과 행동을 하는데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이 도무지 견디지 못할 정도라고 한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심각하게 잘못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이 세상이 이 세상의 상식을 가지고 교회와 기독교회를 판단하게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님에 유의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해 가는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이 세상의 상식과 도덕의 수준 이상의 것을 드러내야 한다는 말일뿐이다.
요약하자면, 이제부터 우리는 건전한 전통(예를 들어서 정통주의적 전통)의 관점과 연계하면서 이 시대의 상식에 배치되지 않는 원리를 성경으로부터 (1) 그 문맥에 근거하고 (2) 성경 전체의 사상과 모순되지 않도록 찾아내어, 그것을 가지고 우리네 교회들을 살펴서 과연 주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나아가게 하는 방향이 어떤 방향인지를 같이 논의해 가야 한다.
우리 모두가 이런 점에 유의한다고 해도, 어떤 문제에 있어서는 우리들의 해석과 생각이 서로 다르게 표현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문제들에 충분히 유의하기만 한다면 우리들간에 차이는 우리들이 서로 재미있는 토론하며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는 차이가 될 것이고, 그런 것들로 여겨져야 한다. 이런 점에 유의하는 이들이 서로 의견이 다를 때 우리는 그 모두를 존중해야 하고, 그 각각의 의미를 깊이 따진 후에 우리들의 의견을 조정하고, 그래도 서로 다른 것에 대해서는 서로 존중하면서 다른 의견을 가지기로 동의해야 한다(agree to disagree).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나누는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도록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여기에 연합과 사랑의 원리가 작용해야 한다. 모두가 다 하나님 말씀에 동의하기로 한 상황에서 서로 다른 의견의 차이가 있을 때는 서로 존중하면서 사랑하는 연합과 사랑의 정신을 잘 발휘해야만 한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는 사랑의 심정과 태도를 가장 잘 나타내는 쪽이 더 옳은 것인지도 모른다.
조에신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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