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해석학-성경의 자연스러운 의미의 논리
성경해석학 | [HEALER]
2. 칼빈이 말하는 성경의 자연스러운 의미의 논리
칼빈이 말하는 성경의 자연스러운 의미의 논리 빈 학자들의 대다수는 칼빈을 성경 신학자로 특성 지우고 있다. 예를 들면 벤자민 워필드는 칼빈은 독자적인 “성경 연구자”로 봤다.『 칼빈, 루터, 어거스틴』 , 벤자멘 워필드/저, 한국칼빈주의연구원/편역 (기독교 문화 협회, 1988), 39. John H. Leith는 칼빈을 성경 신학자(Theologian of the Bible)로, Paul Traugott Fuhrmann은 성경 해석자(the expositor of Scripture)로, T.H.L. Parker는 성경의 해석자(the Biblical Exposition)로 특성 지운다. Paul Traught Fuhrmann, Calvin, “The Expositor of Scripture”, Interpretation, Vol.6 (April, 1952).John H. Leith, “John Calvin-theologian of the Bible”, Interpretation, Vol. 25 (July 1971), 329-44. T.H.L. Parker,“Calvin the Biblical Expositor”, John Calvin, ed. G.E. Duffield (Michigan: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66), 176-86. Calvin and Hermeneutics, Vol.6, ed. Rhichard C. Gamble (Michigan: Garland Publishing, INC., 1992) 칼빈 신학은 그의 성경 해석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Richard A. Muller, "Foundation of Calvin's Theology:Scripture as Reveling God's Word," Duke Divinity School Review 44(1979), 14-24. Leith에 의하면 칼빈은 성경 신학자라고 했다. 그의 신학은 성경의 주석에서 왔다고 했다. “John Calvin-Theologian of the Bible,” Vol.25, Interpretation (July 1971), 329-344.
칼빈이 말하는 성경의 자연스러운 의미의 논리 칼빈은 제네바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자(Reader in Holy Scripture)로서 그의 일생을 시작했다. 그리고 “제네바 교인들이 믿어야 할 고백”(Confession of Faith which all the citizens and inhabitants of Geneva and the subjects of the country must promise to keep and hold 1536)에서 성경만이 “믿음과 종교의 규범”(Scripture alone as rule of faith and religion)이라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 죽기 전 고별사에서 칼빈은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의 종”이라고 고백했으며 자신은 평생 동안 성경을 의도적으로 왜곡되게 해석한 적이 없었다고 했으며 늘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성경의 단순성을 드러내는데 전념했다고 했다. 종교개혁에서 중요시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이라고 살도레도 추기경에게 말했다. 칼빈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교회의 개혁의 필요성(Necessity of Reforming the Church)은 하나님 말씀의 순수성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Calvin:Theological Treaties, Ed. J.S.K. (London:SCM Press LTD, MCMLIV), 186-87. Richard A. Muller는 칼빈의 신학은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으로서 성경”에 기초하고 있다고 했다. Calvin and Hermeneutics, Vol.6, Ed. Richard C. Gamble (New York&London:Garland Publishing, INC, 1992), 398. Cited as CH. 참으로 칼빈은 성경 해석을 통해서 장로교회 신학을 확립한 위대한 신학자이며 목회자이다.
교회사를 보더라도 성경에 기초하지 않은 신학자는 위대한 영향을 주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에 기초하지 않은 신앙은 그 시대를 타락케 했다. 이 점에서 본다면 성경 해석은 신앙과 삶의 룰을 규정하는 기초가 됨을 알 수 있다.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해석이라는 말은 첫째, 번역, 둘째, 설명, 셋째, 선포, 넷째, 들어내는 것(to ecpose)으로 요약할 수 있다. 따라서, 해석에서는, 글의 저자, 내용, 문체, 역사적 상황 등을 고려해야 한다. 칼빈은 성경 해석은 저자의 의도 혹은 마음 (mens Scriptoris or concillium autoirs/the mind of the writer)을 들어내는 것(lay open)이라고 자신의 최초의 주석(로마서 주석) 서문에서 말했다(CM, vol. XIX). 그렇다면 문제는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쓰여져 있지만 인간의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이 성경의 원저자이기 때문이다. 과연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가? 인문주의 학자들이 사용하는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가? 없다면, 과연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가? 성경의 저자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의 말씀인 성경에 해석 방법을 제시했을 것이 아닌가? 했다면, 어떻게 해석하도록 하셨는가? 어떻게 성경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는가? 해석이란 성경이라는 텍스트(text)와 그것을 해석하는 사람의 관계성 속에서 성립된다. 그렇다면 그 전자와 후자의 관계는 어떠한가? 이런 질문을 풀어 가는 가운데 가장 좋은 성경 해석 방법은 성경의 분명하고 자연스러운 의미를 드러내는 것임을 입증할 것이다. 이것이 칼빈의 성경해석 논리이다.
칼빈의 성경 해석 논리는 세상 학문에서 해석 방법을 도출해 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성경 관에 기초해 있으며 성경해석 원리는 성령의 조명에 의해서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natural and obvious meaning of Scripture)를 드러내고자 했다. 문제는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어떻게 찾아내는가 하는 방법의 문제이다. 성경의 진정한 의미가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라고 한다면 그 말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해석자는 어떤 자질을 가져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명료하게 밝히는 데 초점을 둔다.
알레고리칼 성경 해석의 가장 좋은 예는 어거스틴의 사마리아 사람 비유(눅 10:29-37)에서 볼 수 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여리고로 여행하던 사람은 아담이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하늘 도성이다. 아담은 그 축복으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여리고는 달을 의미하면서 인간의 도덕성을 상징한다. 왜냐하면 달은 만삭되었다가 반달이 되고 결국에는 기울고 마는 특징을 가졌기 때문이다. 아담을 공격한 도적들은 마귀와 그의 졸개들이다. 저들이 아담을 때리고 옷을 벗긴 것은 그의 도덕성을 갈취하고 죄를 짓게 만든 것이다. 그들은 그를 거의 죽은 상태로 내어버리고 떠났다. 그를 도와주지 아니하고 그냥 지나간 제사장과 레위인은 구원을 가져오지 못하는 구약의 제사장과 사역자들이다. 사마리아인이란 말은 보호자란 뜻이 있다. 따라서 사마리아인은 예수님 자신을 일컫는 것이다. 상처를 싸매는 것은 죄를 덮음을 의미하고, 기름은 소망의 위로를 의미한다. 그리고 포도주는 열심히 일할 것에 대한 권고이다. 인간을 태운 짐승은 인간 가운데 오신 그리스도의 성육과 믿음을 의미한다. 그 사람이 옮겨진 주막은 하늘 도성으로 돌아가는 순례자들의 발걸음을 잠시 쉬게 하는 교회를 상징한다. 그리고 선한 사마리아인이 여관 주인에게 준 동전 두 개는 이 생과 장차 오는 생에 대한 약속이거나 교회에 준 두 성례를 의미한다. 여관 주인은 사도 바울이다.”『성경주석학』, 헤이즈. 할러데이 공저, 김근수역(도서 출판 나단, 1993), 27-28.
오리겐에 의하면 성경의 저자는 성령님이다. 따라서 성경에는 문자적인 의미를 초월한 영적인 의미가 있다고 봤다. 세상에 있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그림자로 본 것이다. 환언하면, 세상의 모든 것은 영적인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여기에 알레고리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문자적인 의미는 성경의 깊은 의미가 될 수 없으며 감추어진 신령한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리겐은 주로 성경에서 문자적인 의미와 영적인 의미를 찾고자 했다. 예를 들면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셨다는 것을 해석하면서 인간의 몸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것이 아니며 인간의 내면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고 했다. FC, Vol.71, 63. 여기서도 오리겐은 문자적인 의미와 영적인 의미를 말하고 있으며 영적인 의미야말로 진정한 의미라고 한다. 그렇지만 오리겐은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의 중요성도 말했다.
오리겐은 기독교를 반박한 『셀수스에 반대』(Against Celsus)에서 문자적인 의미의 중요성을 세 가지로 말했다. 첫째, 성경은 사실적이고 중요한 역사적인 사실을 가지고 있다. 둘째, 단순한 문자적인 의미는 평신도의 신앙을 북돋운다. 셋째, 문자적인 의미는 변증적인 면이 있으며 성경을 공부하도록 돕는다. Dan G. McCartney, “Literal and Allegorical Interpretation in Origen's Contra Celsum,” W TJ, Vol.48 (1986), 281-301. Against Celsus, 3.43., 1.17; 18;27; 7.60), 288-89.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리겐에 의하면 성경은 풍유적으로 해석해야 하며, 성경의 텍스트에 숨겨있는 깊은 진리를 발견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함으로서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과 연합하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러나 알레고리칼 성경 해석은 성경의 역사성을 무시하며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은 것을 영해함으로써 성경의 본뜻을 곡해하게 만드는 것이 문제다.
Ⅰ. 안디옥학파(The Antiochene School)의
성경 해석 논리
안디옥학파는 역사적 그리고 모형론적 해석학(Literal-historical and typological hermeneutics)으로 특성 지워진다. 안디옥학파는 안디옥에서 기인된다. 안디옥은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최초로 이방인 신자를 크리스천이라고 불렸던 곳이며 동방 제국의 수도였다. 안디옥학파에 의하면 성경의 주된 의미는 역사적인 의미 즉 문자적인 의미라고 믿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성경의 깊은 의미를 알레고리칼 방법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면 안디옥학파는 성경의 깊은 의미는 역사적 문법적인 방법(theoria/θεωρια)에 의해서 얻어진다고 봤다. Theoria는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나 희랍어로 Theoria는 “보다” “관찰하다” “묵상하다(contemplate)”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로서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사고나 논리적인 추론이라기 보다는 이미 소유한 지혜나 지식을 관조하는 통찰력(insight)을 의미한다. 확정되지 아니하고 변화하는 것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사변이나 논리적인 추론이 필요하지만 이미 확정되고 확고 부동한 진리를 탐구하는 것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W.K.C. Guthrie, A history of Greek Philosophy, Vol.6 [Cambridge: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1],396). 다시 말하면 성경에서 theoria을 통해서 모형을 찾는 것이다. 성경은 구속사이다. 구속사이기 때문에 예언과 성취가 있고 그 가운데 모형이 있다.
안디옥학파의 선구자인 Diodore of Tarsus는 성경 해석에 있어서 성경은 theoria를 사용하는 것을 금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알레고리와 테오리아의 차이』 (On the Difference between Theoria and Allegory/τιs διαφορα θεωρια και αλληγοριαs)라는 책을 썼지만 아리안 주의자들에 의해 불타서 없어졌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그는 “우리는 영적인 해석이나 theoria을 금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역사적인 이야기(historia)는 theoria를 배제하지 않으며 오히려 theoria는 탁월한 통찰력의 기초요 하부 구조이다. 그러나 theoria를 역사적인 기초가 없이 사용한다면 결국은 그것은 theoria가 아니라 allegory가 되어 버린다”(We do not forbid the higher interpretation and theoria, for the historical narrative does not exclude it, but is on the contrary the basis and substructure of loftier insights.... We must , however, be on our guard against letting the theoria do away with the historical basis, for the result would then be, not theoria, but allegory)고 말했다. Cited by J.N.D. Kelly, Early Christian Doctrines, 4th Rev. ed(Sanfrancisco: Harper and Row, 1978), 76-78.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성경에서 문자적인 의미를 무시하게 하는 것은 결국 알레고리칼 해석이 된다는 것이며, theoria라는 말은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를 찾게하는 영적인 통찰력 혹은 관찰을 의미한다. Frederic W. Farra, History of Interpretation, Reprinted 1961 by Baker Book House from the 1886 edition published by E. P. Dutton, 213, 각주 3번. 디오도레에 의해서 배운 두 사람이 Theodore of Mopsuestia와 John Chrysostom이다. Mopsuestia는 성경의 문법적인 구조를 중요시했으며 성경을 역사적 상황에서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성과 문자적인 의미를 무시하고 theoria를 사용하는 것은 알레고리칼 해석의 결과를 가져온다. 안디옥학파는 성경에서 문자적인 의미가 불가능할 때 모형론적으로 해석했다.
모형(type)이라는 말은 희랍어로 τυπος라는 말에서 유래되었으며 닮음(resemblance). 유사성(likeness), 비슷함(similarity)의 의미가 있다. 따라서 모형론적인 해석은 구약을 해석하는데 사용된 해석으로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신약은 예언의 성취라는 상관관계에 기초하고 있다. 성경은 구속사로서 구약의 사건은 다소 불분명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다는데 기초하고 있다.
안디옥학파의 대표자는 John Chrysostom이다. 그는 성경의 문자적, 역사적, 문법적 의미를 중요시했으며 성경은 하나님이 저자이시며 동시에 인간의 언어로 쓰여 있음을 중요시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플라톤의 이데아와 그림자의 형이상학적 세계 이해에 중점을 둔다면,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궁극적인 실제는 세상의 사실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사상에 영향을 받고 있다.
크리소스톰에 의하면, 성경에서 인간의 연약성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을 크리소스톰은 synkatabasis(God's gracious acceptance of human limitations/astheneia)라고 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의 한계성을 고려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을 인간의 언어로 쓰신 것이다. 따라서, 성경 언어의 정확성과 단순성을 말한다. FC, Vol. 74, 17-18 . 그는 알레고리칼 성경 해석은 올바르지 아니하며 신자를 잘못되게 이끈다고 말했다. 그는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실례를 잠언 5:17-19, 이샤야 8:7-8, 그리고 에스겔 17장으로 든다. 이들은 알레고리이지만 크리소스톰은 은유적으로 해석한다. 갈라디아서 4:22-24에서 사도 바울의 알레고리를 은유적으로 해석한다. “바울은 언어를 잘못 사용하여 예형(豫型)을 비유라고 하였다. 바울의 진의는 이것이다. 즉 역사 자체는 명백한 의미를 소유할 뿐 아니라 다른 것도 일러준다. 그래서 비유라고 불린다. 그러나 무엇을 일러주는가? 현존하는 것 이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By a misue of language he[Paul] called the type allegory. What he means is this: the history itself not only has the apparent meaning but also proclaims other matters; therefore, it is called allegory. But what did it proclaim? Nothing other than everything that now is). John Chrysostom,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Galatians, 4.24. 그는 안디옥학파의 theoria를 예술과 비교해서 성경의 두 가지 의미(역사적.모형론적 의미)의 관계를 보여준다. “진리가 실현되기까지는 예형(豫型)에 진리라는 명칭을 준다. 그러나 진리가 성취되면 그 명칭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繪畵(회화)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예술가가 왕을 스케치하지만 그 위에 도색 되기 전에는 그 그림은 왕이 아니다. 그리고 그 위에 도색이 될 때 진리 때문에 그 型(형)이 감추어지며 다시는 보이지 않게 되며 그 때 비로소 우리들은 ‘이 왕을 보라’하게 된다”(The type is given the name of the truth until the truth is about to come, but when the truth has come, the name is no longer used.. Similarly in the painting: AN artist sketches a king, but until the colars are apllied he is not called a king; and when they are put on the type is hidden by the truth and is not visible; and then we say, 'Behold the King'). John Chrysostom, In Epist. ad Phil. Hom., 10. 왕에 대한 스케치와 왕의 초상화의 관계에서 스케치는 역사적 의미요, 초상화는 왕의 윤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상의 최종적인 의미는 스케치와 초상화와의 관계인 모형론적인 의미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 그는 성경은 분명하게 쓰여졌다고 봤다. 따라서 성경의 명료성을 강조했으며 성경의 콘텍스에 의한 문자적인 의미를 찾으려고 했다.
II. 칼빈의 성경 해석 논리
Paul L. Lehmann에 의하면 성경 해석에 있어서 칼빈은 루터보다 더 명료하고 단순하며, 성경 해석사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CH, Vol.6, ed. Richard C. Gamble, Garland Publishing, INC, (New York, 1992), 412. Kemper Fullerton은 칼빈은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최초로 성경을 학문적으로 해석한 사람(the first scientific interpreter in the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이라 했다. Kemper Fullerton, Prophecy and Authority: A Study in the History of the Doctrine and Interpretation of Scripture (New York: Macmillan, 1919), 133. Fullerton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칼빈과 루터는 모두 문법적-역사적 의미를 성경 해석의 원리(exegetical principle of the grammatic-historical sense)로 삼았다. 루터는 모든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성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역사적 콘텍스트를 무시하고 모든 성경의 텍스트에서 그리스도를 찾고자 하는 무리한 기독론 중심의 해석은 반대했다. David L. Puckett, John Calvin's Exegesis of Old Testament (Kentuc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5), 10. 칼빈의 성경 해석의 논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칼빈의 성경의 필요성, 성경관, 인문주의 영향, 말씀과 성령의 관계, 해석자의 자질을 아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의 성경 해석의 논리는 성경에서 도출했기 때문이다.
1. 성경의 필요성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에게 양심과 종교의 씨앗을 심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른다고 핑계할 수 없다. 때문에 예수를 안 믿는 사람도 그 나름대로의 종교성을 갖고 있다. 부적, 섬 지방에 있는 많은 미신, 고사 지내는 행위 등은 왜곡된 종교성의 표출이다. 사실 무신론이라는 언어 자체가 모순된 말이다. 이미 그 말속에는 신의 존재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는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보여준다(롬1:19).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고의적인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의 위엄은 인간의 이해력을 능가함으로 하나님을 탐구하기보다는 예배해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하나님은 창조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찾고 생각하도록 하셨다. 성경은 창조의 세계를 보이지 않는 것들의 표상(representation)이라고 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는 우리가 볼 수 없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세계를 우리에게 표상하기 때문이다(롬 1:20, 히 11:1).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있는 양심이나 종교의 씨앗을 통해서는 참다운 하나님의 지식을 알 수 없다. 우리가 전적으로 부패하였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타락을 우리의 책임으로 돌리게 할뿐이다. 구속주이시요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예정과 섭리 가운데서 성령님이 선지자와 사도를 감동시키셔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것이다.
성경은 안경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Ed. John T. McNeil, Vol.I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77), 1.6.1. Cited as ICR. 『기독교 강요 요약』, 이형기박사 옮김(크리스천다이제스트, 1986), 30-31. 이 말은 메타포(은유)이며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눈이 아프거나 시력이 약하면 실제로 잘 볼 수 없는 것처럼, 성경은 타락으로 인해서 참 하나님을 볼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하나님을 볼 수 있고 알 수 있게 한다. 성경이 안경이라는 은유는 카톨릭에서 말하는 것처럼 자연 이성을 보충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케 하여 교정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중생 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이성은 올바른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만이 우리에게 참 하나님을 알도록 인도하고 가르쳐 준다.
2. 칼빈의 성경관 (Calvin's View of Scripture)
1) 성경의 저자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성경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 (1.6-9), 성령과 구원에 관계(3.2), 성경의 권위와 영감(4.8)을 말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구약을 다 포함한다. 성경 66권은 표면상으로 보면 다 그 저자가 있다. 오경은 모세가 저자이다. 이사야 선지서는 이사야가 저자이다. 사도 바울 서신은 사도 바울이 저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들은 자기의 말이라고 하지 않았다.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했다. 사도 바울도 성경을 자기의 말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을 시사해 주는가? 성경의 원저자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반증해 주지 않은가? 만약 하나님이 저자가 아니라면 어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기록하고 있겠는가? 그렇다.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어떤 부분은 거칠고 잘 다듬어지지 아니한 문체(a rude and unrefined style)도 있다. ICR, I.VIII.2. 이것은 성경의 저자가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모순되지 않은가?
성경에 거칠고 잘 다듬어지지 아니한 문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모순된 것은 아니다. 칼빈은 이 모순을 조정 이론(accommodation theory)으로 설명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정과 능력을 잘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성경을 인간의 언어로 기록케 하시고 어머니가 어린애를 가르치는 것처럼 우리의 능력에 맞게 표현하게 하셨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은 쉬운 말로 알기 쉽게 기록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아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이다. Lewis Battles에 의하면 조정 이론(God's Accommodation to human capacity/caput)은 칼빈이 창안해 낸 것은 아니라고 했다. 교회사를 볼 때 Origen, Augustine, Chrysostom, Hilary of Poitiers가 사용했다. 그러나 칼빈의 경우는 이들과 달리 이 원리를 일관성 있게 성경을 해석하는 원리로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갭을 메우는 데 적용했다고 말했다. Readings in Calvin's Theology, Ed. Donald K. Mckim (Baker Book House, 1984), 22.
칼빈에 의하면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선지자와 사도들로 하여금 성령님의 감동으로 성경을 기록케 하신 것이다. 성경이 인간의 언어로 쓰여졌지만 성경은 인간의 사상과 감정이 들어 있는 책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의 사상과 감정이 들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ICR, I.VI. 2.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은 절대 무오하다. 성령님의 감동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성경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숨결이시며 하나님 자신이 인격적으로 성경 안에서 말씀하신다(딤후3:16).
성경은 우리에게 진정한 하나님을 보여준다. 성경은 우리에게 성경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지식을 가르쳐 주며 율법과 선지서, 복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구속주 하나님의 지식을 가르쳐 준다. 칼빈은 신정통주의에서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예수님과 증거로써 하나님의 말씀(Neo-orthodox conundrums in driving a wedge between Christi as the Word and Scripture as Word in the sense of witness)을 구분하지 않는다. 성경을 삼위일체적으로 설명한다. 성경은 성령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우리 마음에 성경의 권위와 진리를 증거하며, 동일한 성령님의 역사에 의해서 성경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주시며, 하나님의 지혜요 말씀으로 증거하며, 성령님의 역사에 의해서 성경에서 하나님의 본질적인 말씀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발견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배우며, 우리 마음에 부음 바 된 하나님의 사랑을 배운다. Richard A. Muller, “The Foundation of Calvin's Theology: Scripture as Revealing
God's Word,” Duke Divinity School Review 44(1979), 14-24. 삼위일체적으로 말하면 성경이란 성부 하나님이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성자 하나님에 대해서 인간의 언어로 기록케 하신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이다.
2) 성경의 권위
성경의 권위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권위가 있는 것이다. 칼빈이 성경의 권위를 들고 나온 이유는 성경이 신적인 권위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로마 카톨릭에서는 성경의 권위는 성경 자체의 권위가 아니라 믿음과 진리의 은행으로서 교회가 성경 권위를 인정하고 보호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베드로의 뒤를 이은 교황이 교회의 수장이요 성경 해석의 최후 재판관이 된다고 믿었다. Paul Lehmann에 의하면 우리 장로교에서는 성경은 믿음과 신앙의 궁극적인 규범이 성경이지만 카톨릭 교회에서는 성경의 권위는 교회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구원의 확실성도 성경 자체의 약속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부여한 것처럼 보여지므로 성경의 신적 권위를 약화시킨다.
성경이 절대 무오한 진리가 되는 것을 교회가 결정하게 된다면 절대적인 성경의 권위를 인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교회가 성경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는 성경의 기초 아래 세워진다고 칼빈은 말했다. ICR, I. VII. 2. 그렇다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성령님의 내적인 증거에 의해서 확신되어진다. 성령님은 성경에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고 계심을 증거한다. 성경을 기록하신 성령님이 우리의 지성에 계시하시고 마음에 인을 치셔서 성경을 하나님의 살아 계신 말씀으로 증거하며 확신케 한다. 이보다 더 완벽한 증거는 없는 것이다. ICR, I. VII. 4.
성령님의 증거나 조명을 통하여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신한 사람에게 성경의 권위는 교회가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객관적인 증거를 통해서 이루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성경의 자증에 기인하는 것이다. ICR, I.VII. 5. αυτοπιστον(self-authenticated) 성경의 자증성은 성경의 신적 권위를 가장 완벽하게 말해 준다. 성경이 스스로 그 권위와 진실성을 말한다. 자증성이란 성경에서 하나님이 스스로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스스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게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성경 해석이나 설교는 말씀 자체가 말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고자 하시는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이 스스로 말씀하시는 설교나 해석은 자연스럽고 분명한 것이다.
3) 성경의 내용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τα δυναμενα σε σοφιαι εις σωτεριαν δια πιστεως της εν Χριστω Ιησου, 딤후3:15). 칼빈은 분문 주석에서 “구원에 충족한 지혜를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다는 이야기는 성경에 대한 아주 귀한 찬사로 다음 구절은 그 의미를 더욱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그가 우리를 성경의 핵심이요, 알맹이가 되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이끄는 것은 당연하다.” Calvin's Commentary, Vol.21 (Michigan:Baker book House, 1986), 248-49. “For this reason he directs us to the faith of Christ as the design, and therefore as the sum, of the Scripture for on faith depends also what immediately follows.” Cited as CC.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성경은 자신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다고 증언하셨다. “Everything must be fulfilled about me in the law of Moses, the Prophets and the Psalms(Luke 24:44-47).” 여기서 모세의 율법은 모세 오경을 말하며 선지자는 선지서를 의미하며 시편은 성문서를 의미함으로서 구약 전체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구약은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
칼빈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핵심이요 설계다. 또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가르치는 책이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가 성경의 설계요 핵심이라는 말은 대단히 중요하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신구약을 볼 수 있도록 설계하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신구약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신구약의 통일성을 이루는 설계요, 신구약 통일성의 핵심이 되기 때문이다. 신구약의 통일성을 이루는 핵심이 없이는 신약과 구약을 연결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신구약을 하나로 묶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는 성경의 모형론적 해석이나 구속사적인 해석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Von Rad는 신구약을 두개의 찬양대로 비유하면서 두 개의 찬양대가 하나의 핵심인 예수를 지칭하면서 부르는 두 개의 찬양대라고 했다. Essays on Old Testament Hermeneutics, Ed. Claus Westermann Trans. James Luter Mays(Atlanta:John Knox Press, 1979), 14-24..
4) 성경의 명료성과 단순성
성경은 왜 단순하고 명료한가? 두 가지로 대답할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배려 혹은 조정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하고 제약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뜻과 감정을 이해하고 그에 따라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렵게 쓰여졌을 경우, 우리가 성경을 잘 이해할 수 없다고 보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에 맞게 언어를 선택하시고 쉬운 말로 기록토록 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은 당신의 섭리 가운데 구약을 일상 히브리말로 신약도 일상언어인 코이네 희랍어로 기록케 하신 것이다. 환언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명료하고 분명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에 맞추어서 어린 아이를 기르는 어머니처럼 우리의 능력에 맞추어서 인간의 언어로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이 칼빈의 조정 이론이며 바로 성경 자체가 하나님의 배려로 말미암아 단순하고 명료하게 쓰여져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 단순하고 명료한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 성경에서 가르치는 해석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칼빈의 십계명설교』, 벤자민 팔리 편역 (성광문화사, 1991), 427-29. 둘째는, 성경은 인간의 사상이나 논리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다. 따라서 성경의 어느 곳을 읽어도 성령님의 감동이 안된 것이 없다. 성령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통일성이 있고 각 성경의 개체성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배려와 성령님의 감동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단순하고 명료한 것이다. 성경은 구원의 메시지이다. 따라서 성경 해석에 있어서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는 칼빈의 성경관에 기초해 있고 성경으로부터 도출해 낸 성경적인 방법인 것이다. Donald Mckim은 “살아 있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기록된 말씀이 가장 잘 해석되는 말씀”(The living word, Jesus Christ, is the One through whom the written word of Scripture is best interpreted)라고 했다. 이 말은 성경 해석 방법이 아니라 성경 해석의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시금석이라고 볼 수 있다.
3. 인문주의 사상과 성경 해석
칼빈의 성경 해석 방법은 프랑스 인문주의 자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그 당시 최고의 학문을 배운 사람이다. 그는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의 스타일을 자쿠에스 레페브레의 서클(the circle of Jacques Lefevre)로부터 배웠다.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이 교부들의 경건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변적인 논리나 전문적인 변증법에 의해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자세를 지양하고 단순성과 명료성을 중요시하는 자세였다. “What the humanists.... admired in the piety of the Fathers .... was its simplicity and clarity[which avoided] emphasizing difficulties, nodi, openly opposing authorties sic et non, probing questiones in disputuations, and finally reconciling them by a subtle dialectic.....”( Eugene F. Rice., “the humanist idea of Christian anitquity:Lefevre d'Etables and His circle," in Werner L. Gundersheime, ed., French Humanism, 1400-1600(harper Torch books; New York, Harper& Row, Publishers, 1969),169. E. David Willis에 의하면 칼빈의 사상은 dialectical diastasis라기보다는 수사학적 상관관계(rhetorical correlation)라고 했다. 칼빈은 두 가지 수사학 전통에 영향을 입고 있다. 하나는 변호나 토론하는 자가 토론이나 변호하는 것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기술로써 수사학이며 다른 하나는 진리를 효과적으로 전달해서 듣는 자가 이해토록 설득하는 수사학이다. 후자의 수사학적인 전통이 칼빈의 사상 형성에 더욱 영향을 주었다. 더군다나 칼빈이 법률가로서 훈련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그가 얼마나 수사학에 능통한가를 시사해 준다. 칼빈의 사상에 후자의 수사학은 믿음을 설득으로, 지식을 효과적인 진리로, 계시를 하나님의 능력을 낮추어서 인간의 능력에 조정한 것을 통해서 보여진다고 윌리스는 말했다. The Context of Contemporary Theology, eds. Alexander J. McKelway and E. David Willis, John Knox Press, 1974, 43-63.
칼빈은 당대의 최고의 학문을 배웠고 인문주의 학문을 배웠다. 수사학적 방법이란 고전 문서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성경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는 세상적인 수사학은 rethorique frivole (worthless rethoric)이다. 그러나 세례 받은 수사적인 방법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이 된다. 세상적인 지식이 성경을 해석하는 데 직접적으로는 도움이 안되지만 성령 세례를 받은 좋은 방법은 간접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데 도움을 준다. 칼빈에 의하면 모든 학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방향에 목표를 두고 공부해야 한다고 본다.
Heinrich Bullinger는 “Of the sense and Right Exposition of Scripture”라는 설교에서 다섯 가지 성경 해석 방법을 제시했다. 첫째, 성경 해석은 우리의 믿음에 동의해야 한다. 둘째, 성경 해석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도록 해야 한다. 셋째, 성경 해석은 콘텍스트(context)를 고려해야 한다. 넷째, 성경은 성경에 의해서 해석해야 한다. 다섯째, 성경 해석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 의해서 행해져야 한다. he Decades of Herny Bullinger, ed. Thoimas Harding(Cambridge university Press, 1844), 70.
칼빈은 인문 사회과학을 공부했다. 이것은 알게 모르게 칼빈의 사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 사회학적인 방법을 통해서 성경을 해석했다는 말은 아니다. 인문 사회학을 통해서 인문 사회학의 장단점을 알게 되고 성경에서 도출되는 성경 해석 방법과 다르다는 것을 깊이 알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4. 성경 해석 목표(the goal of Biblical Interpretation)
칼빈은 1539년에 강요 2판을 발행한 후에 로마서 주석을 출판했다. 이 주석의 서문에서 주석자의 가장 좋은 목표를 두 가지로 말한다. 첫째, 성경 해석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성경의 단순성과 명료성(lucid brevity)에 기초해야 한다. 둘째, 해석자는 성경 저자가 의도하는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CC, Vol. 19, xxiii. Richard C. Gamble은 칼빈의 성경 해석 방법은 칼빈이 로마서 주석 서문에서 밝힌 대로 성경의 명료하고 단순한 의미를 찾는 것이라고 말하며 이것은 성경의 스타일과 연관을 갖고 있다고 했다(“Exposition and Method in Calvin,” WTJ, 49(1987) 153-165, WTJ 47(1985), 1-17). 그리고 칼빈은 갈라디아서(4:22) 주석에서 성경의 진정한 의미는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verum sensum scripurae, qui germanus est et simplex)라고 말하고 우리는 이 사실을 굳게 붙잡아야 한다고 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성경 해석자의 목표는 성경에서 저자가 말하는 단순하고 명료한 의미 혹은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는(to show) 것이 중요함을 말해 준다.
칼빈은 로마서 주석에서 당대의 석학들의 성경 해석 방법을 비판하면서 말하기를 멜랑톤의 로마서 주석은 성경의 주된 개념을 중심으로 성경을 주석 함으로써 로마서 전체를 보기가 힘들며, 부커의 주석은 너무 현학적으로 흘러서 평신도가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자신의 성경 해석은 성경에서 단순하고 명료한 의미를 드러냄으로써 그 의미에 기초하여 살기를 원했다.
Imbaart de la Tour도 말하기를 칼빈에게 있어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단순하게 그리고 자연스러운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라고 했다. P. Imbart de la Tour, Calvin et l'Institution Chretienne(Paris, 1935), 63. Hans-Joachim Kraus도 칼빈의 성경 해석의 목표는 하나님의 말씀의 통일성 가운데 나타난 성경의 살아 있는 의미를 드러내고자 했다고 하면서 여덟가지 성경 해석 방법을 제시했다. Calvin's Exegetical Principles, Interpretation, Vol.31(Jan., 77), 8-18.
칼빈은 성경 속에서 성경 해석의 원리를 찾았고 성경 스스로 말하도록 했다.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는 누구나 다 발견하는 것은 아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사람이 발견하는 것이다.
5. 성경 해석과 성령의 조명
성령과 성경 해석 관계는 아주 중요하다. 칼빈에 의하면 성령의 조명이 없이는 올바로 성경을 해석할 수 없다. 칼빈은 “문자 자체의 말씀은 성령의 조명이 없이는 아무런 효과도 유익도 줄 수 없다”(the bare word has no effect or profit without the illumination of the Holy Spirit). Instituion of 1541, Vol.II, 29. 성령에 의한 영감은 종교개혁에서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은 모든 것 위에 있다. 루터도 성경과 신자 관계를 설명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가? 그에 의하면 “말씀과 성령”이다. 이 말을 칼빈은 더 명료하게 설명했다. “성령 없이는 말씀은 죽은 문자이다. 말씀이 없이는 성령은 환상처럼 떠다닌다”(Without Spirit, the word is a dead letter; without the Word, the Spirit flutters as an illusion). Imbart de la Tour, Calvin et l'Institution Chretienne, p.61f; J. Chartrou-Charbonnel, La Reforme et les Guerres de Relgion (Paris, 1948), 85.
성령은 성경의 기자를 감동시켜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다. 동일한 성령님은 오늘 날에도 우리를 조명하사 하나님의 말씀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깨닫게 한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확신케 한다. CC, Vol.20, 141. 성령의 검으로서 말씀(μαχαιραν του πνευματος Ο εστιν ρεμα θεου)은 말씀과 성령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The sword of the Spirit, which is the word of God, 엡 6:17)에서 논리적으로 보면 ‘말씀은 검’이다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말씀이 검으로서 역할을 하려면 성령님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말씀은 검은 검이로되 쓸모가 없는 검이 되는 것이다. 말씀의 칼을 날쌔게 가는 작업을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이다. 그래서 말씀과 성령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세상의 해석학이 아무리 좋고 깊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데는 무용지물이 된다. 다만 세상 학문이 성령에 의해서 세례를 받는다면 성령을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된다. 칼빈은 에베소서 주석에서 성령과 말씀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에베소서 6:17말씀은 그것을 설명하는 말씀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만 이라고 주장하면 신비주의에 흐르며, 말씀만 이라고 하면 이성주의에 빠지며,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라야 진정으로 성경을 올바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칼빈은 히브리서 4장 10절 주석에서도 성령님의 역사를 중요시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나니” 칼빈은 본문을 주석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은 성령님의 역사에 의해서 선포된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했다. CC, Vol..22, 103.
성경해석에 있어서 성령의 내적인 조명은 필수적이다. 칼빈은 누가복음 24:44-45(“또 이르시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의 주석에서 성경을 깨닫게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 즉 성령의 내적인 조명 혹은 가르침을 받아야 성경을 깨달을 수 있다고 했다. 우리의 마음을 여는 것도 성령님의 역사요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하는 것도 성령님의 역사이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시며 그 성령님이 성경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주님께서 성경에서 가르치신 것을 생각나게 하신다(요14:26). 성령은 진리(το πνευμα εστιν η αληθεια)이시기 때문에 성경을 진리로 가르처 주신다(요일5:6).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내적 증거에 의하여 인처지기 전에는 인간들의 마음 속에 받아들여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령을 충실히 선포했다는 것을 우리가 납득할 수 있으려면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 같은 성령이 우리의 마음 속에 스며들어야 한다.” 존 칼빈, 「영한 기독교 강요」, 제 I 권(성문출판사, 1993), I.7.4.
6. 성경 해석과 해석자의 자질
성경을 해석하는 데는 두 지평이 있다. 성경과 해석자이다. 성경 해석은 이 두 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성경과 성경을 해석하는 자이다. 성경 해석에 있어서 이 두 관계는 아주 중요하다. 이 두 관계를 Anthony C. Thiselton은 두 지평이라고 했다. Anthony C. Thiselton, The Two Horizons New Testament hermeneutics and Philosophical Description(Michigan: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80), xix. 여기서 지평이라는 말은 은유로 해석자의 限界性(limits of thought dictated by a given viewpoint or perspective)을 의미한다. 다시말하면 해석자의 관점의 범위를 의미한다. 두 지평은 동일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로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서로의 상관관계에 의해서 서로의 지평을 새롭게 해야 한다고 했다. Anthony Thiselton, The Two Horizons, xix. 그러나 칼빈의 입장에서 보면 성경과 해석자의 관계는 상관관계라기 보다는 성경과 성령에 의존적인 관계라고 볼 수 있다. 해석자는 늘 성경에 의존하며 항상 성령의 조명을 받아서 해석자의 관점의 폭이 넓어지고, 깊어지고, 새로워져야 한다. 성경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하지 않지만 해석자의 관점은 항상 바꾸어져야 한다. 해석 자가 살고 있는 시대 상황은 변하기 때문이다. 해석자는 항상 성령님의 조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그 시대에 주시는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칼빈은 1451년 그의 강요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태양과 같아서 모든 것에 비추지만 소경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우리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성경을 이해하는 데 소경이며, 그래서 우리 내적인 선생님이신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된다(the Word of God cannot enter into our spirit unless the Spirit of God, who is the inner master, give us access to it by his illumination). Institution of 1451, Vol.II, Paris, 1937, 13. 중요한 것은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타락성에 의해서 소멸되지 않는 한 본질상 항상 명료하다(Still it remains a fixed principle, that the word of God is not obscure, except so far as the world darkens it by its own blindness). “The word of God dis always bright, but its light is choked by the darkness of men.” 〔CC, Vol 16, ii(2권), 102-03〕. 이 말은 아주 성경을 해석하는데 또한 칼빈에 의하면 이것은 변할 수 없는 원리라고 했다. 그렇지 않다면 자연스럽고 분명한 성경의 의미는 성경의 진정한 의미가 될 수 없다. 이 말은 칼빈의 성경 해석의 원리를 깊이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명료하고 분명하다. 그래서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잘 이해못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타락했기 때문이다. 성경을 잘 이해 못하는 것은 성경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해석하는 인간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우리가 회개하고 우리가 거듭나고 성령의 인도함을 따른 경건한 생활을 하면 우리는 성경에서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의미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본다는 말은 철학적인 이론이나 논리에 의해서 추론해 낸다는 말은 아니다. 성경의 언어가 본문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를 보는 것이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보는 눈을 가지는 것은 아무나 갖는 것은 아니다. 눈이 나쁜 사람은 볼 수 없는 것이다. 영적인 사람만이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석자의 관점이 늘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1) 성경의 제자(a disciple of Scripture)가 되어야 한다. ICR, 1.6.1-2.
성경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은유적인 표현으로써 어떤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해야 하는가를 배울 수 있다. 가령 우리가 어떤 유명한 사람의 제자라고 할 때 제자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선생이 누구인가를 속속들이 알며 선생의 삶의 스타일을 배우며 또 그렇게 가르치고 사는 사람을 가리켜 제자라고 할 것이다. 제자의 특성은 선생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칼빈은 자기를 소개할 때 하나님의 말씀의 종이라고 소개했다. 때문에 그는 일생 동안 말씀을 주석하고 가르치고 선포하며 일생을 살았다.
성경에는 두 가지 하나님의 지식이 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요,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성경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하나님의 지식을 알 수 있는가? 성경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다른 말로 말하면 성경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칼빈도 하나님의 올바른 지식은 순종에서 태어난다고 했다. ICR. I.VII.2. “완벽하고 모든면에서 완전한 신앙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모든 올바른 이해는 바로 이 순종에 의해 탄생된다.” 존 칼빈, 「영한 기독교 강요」, 제 I권(성문출판사, 1993), I. 6. 2.(But not only faith, perfect and in every way complete, but all right knowledge of God is born of obedience.) 다른 말로 말하면 성경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누구든지 성경의 제자가 되지 않고서는 바르고 건전한 교리를 조금도 맛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한 이해의 시작은 하나님이 자신에 관하여 증거하기를 기뻐하셨던 바로 그것을 우리가 경외심을 가지고 받아들이는 데 있다.” 윗책, I.6.2.(Hence, there also emerges the beginning of true understanding when we reverently embrace what it pleases God there to witness of himself.)
2) 성령의 학교 (School of Holy Spirit)에서 배워야 한다.
칼빈은 성경은 성령의 학교라 했다. ICR, III.21.3. 성경은 학교이다. 그러나 이 학교는 성령님이 운영하시고 주관하시는 학교이다. 학생은 성경을 배우는 자이다. 성령님께서 우리가 성경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충만하게 배우도록 도와 주시고 인도하시고 가르쳐 주시는 선생이다. 학교를 누가 운영하느냐에 따라서 학교의 발전과 학생들의 질이 달라지는 것처럼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고 이해한 그것에 의해서 신자의 생활을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는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충만하게 역사 하시도록 해야 한다.
성경이 성령의 학교라는 말은 인문 교육이나 신학 교육이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다. 선지자와 사도를 감동시켜 성경을 기록케 하신 분이 성령님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우리는 성령님의 가르침을 받아야만 되는 것이다. 성령님의 감동을 받지 않은 성경 해석, 설교, 가르침은 생명력을 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님이 충만하게 역사하시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문자적인 의미는 성령의 학교에서 배운 사람에 의해서 선포되어지고 가르쳐지고 해석되어진다고 할 수 있다.
3) 경건한 생활
칼빈은 경건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경건의 요점이란 하나님의 심판을 기꺼이 피하고 싶은 두려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수 없으므로 이 심판 앞에서 두렵고 떠는 마음과 태도에 있다. 오히려 참 경건이란 하나님을 주님으로 존경하며 그의 의를 수용하고 죽을 지언정 그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는, 순수하고 참된 열심에 있다. 이러한 열심을 소유한 사람들은 모두 자기들의 몰염치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을 날조하려는 시도를 그만두고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구하되 하나님이 자기를 저들에게 계시하고 선포하신 대로 이해한다.”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요약 』, 이형기박사 옮김 (크리스찬다이제스트, 1990), 29.
칼빈에게 있어서 경건이란 단순히 외적인 것을 의미하기 보다는 신앙 생활 전체를 의미한다. 참 경건한 생활이란 매사에 하나님을 주님으로 존경하며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그렇게 살도록 변증하고 험증하는 자이다. 특별히 성경 해석과 연관하여 마지막 절에 있는 말씀을 우리는 깊게 새겨야 할 것이다. 성경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계시하고,” “선포 한대로” 이해한다는 말은 아주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대로 혹은 성경대로 이해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한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경건한 삶은 성경 해석이요, 성경 해석은 곧 경건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7. 성경 해석 방법
1) 역사적-문법적 성경 해석
(historical-grammatical interpretation of the Bible)
Kemper Fullerton은 그의 저서 『예언과 권위』 (Prophecy and Authority)에서 칼빈의 성경 해석 방법은 문법적, 역사적인 방법이라고 했다. 여기서 문법적이라는 말은 성경의 문법적인 구조와 언어를 중요시하며, 역사적이라는 말은 성경 콘텍스트의 역사적인 상황을 중요시하며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를 말한다. 그러면서 칼빈은 신학적인 전제와 석의적인 방법의 조화가 아니라 석의적인 방법이 신학적인 전제를 컨트롤 한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는 전제가 성경 해석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문법적 역사적인 성경 해석 방법이 주도한다는 말이다. 이 점에 있어서 성경의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루터와 다르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신학적인 전제가 성경 해석의 방법을 인도하는 원리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성경을 문법적 역사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방법을 컨트롤하는 것은 신학적인 전제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인위적으로 루터처럼 모든 성경 구절에서 예수를 찾는 것은 아니다. 환언하면 칼빈은 구약을 해석할 때 모형론적으로 해석하지만 그 가운데 있는 루터처럼 문법적 역사적인 의미를 무시하고 해석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창세기 3:15에서 여자의 씨는 루터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칼뱅은 여자의 “씨”(ערז)는 삼인칭 여성 단수이지만 집단 명사로써 직접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볼 수 없다. 칼빈에 의하면 집단적 단수 명사가 한 사람만을 가르치지 않는다. 때문에 직접 여자의 씨를 예수님이라고 말하지 아니했다. 교회사를 보면 본문은 Protoevangelium(원시복음)이라고 해석한 것이 통례이다. 칼빈은 이들의 해석에 동의하면서도 본문의 진정한 의미는 사탄과 인간 사이의 계속적인 갈등이 있을 것이며 결국은 인류가 승리할 것이라는 것을 제시한다고 했다.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로서 오심을 말한 것이지 직접 여자의 씨를 예수님과 동일시하는 것은 본문의 문맥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CC, Vol. 1, 170. 여기서 우리가 칼빈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칼빈은 얼마나 성경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그의 문법적 역사적인 방법에 투철하였으며 동시에 성경의 핵심은 그리스도라는 신학적인 전제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를 배울 수 있다. 칼빈에 의하면 루터처럼 모든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찾으려는 지나친 예수님 중심의 성경 해석은 구약의 역사적인 의미를 약화시킨다. 구약의 메시지는 구약 시대의 언약 백성에게 약속과 희망을 주며 동시에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미리서 맛을 보게 하는 것이다. CC, Vo1. 이사야 45:1 주석.
칼빈은 성경에 알레고리가 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학파처럼 역사적인 콘텍스트를 무시하지 않았으며 그 알레고리에서 문자적인 의미, 즉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고자 했다. 칼빈은 고후 3:6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라”의 주석에서 알레고리의 부당성을 말한다. 알레고리칼 성경을 해석한 자에게 의문은 성경의 문법적 문자적인 의미를 말하며 영은 알레고리칼 의미를 말했다. 따라서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는 의문과 같으며 알레고리칼 의미는 영적인 의미로 봤다. 그러나 칼빈에 의하면 본문은 오리겐과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서 본문의 의미가 왜곡되었다. 그들은 성경을 풍유적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올바르게 해석할 수 없다고 하지만 그것은 성경의 자연스러운 의미를 불순하게 하며(germanum scripturae sensum adulterandi) 알레고리칼 해석을 성경 해석의 규범으로 만들게 했다고 말한다. CC, Vol. 20,172-75. 그리고 주석 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히 입으로만 전하면 그것은 죽게 하는 것이요,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마음에 받아들이므로 전하면 생명을 준다는 말이라고 주석했다. CC, Vol.20, 175. 따라서 칼빈은 고후 3:6은 성경의 해석 방법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결과를 말하며 사도 바울이 알레고리를 해석하는 키를 제시했다고 봤다(Paul here furnishes us with a key for expounding Scripture by allegories). 여기서도 볼 수 있듯이 칼빈은 알레고리칼 해석과 알레고리를 역사적 문법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구분하고 있다. James Barr는 알레고리칼 해석은 성경의 콘텍스트를 무시하는 해석이라고 했다.( “The literal context, the cultural background and the historical setting", Journal for the Study of the Old Testament 44(1989), 14.
칼빈은 비유(알레고리)해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비유에서 예수님이 가르치고자 하는 비유의 목표(finis, scopus)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러면 비유의 의미는 분명해진다고 했다. 크리소스톰도 마태복음 20:1절 주석에서 우리는 비유에서 사소한 것에 얽매이지 말고 비유의 목표(skopon)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We should not waste labour to explain all the details in a parable but having learned the aim[or mark :Greek skopon] for which the parable was constructed, to get hold of that and not to bother oneself with anything further). 칼빈에 의하면 비유는 비교와 같은 것이다. 마태복음 13:34-35 말씀을 잘 보면 비유의 특성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시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I will open my mouth in parables, I will utter things hidden since the creation of the world). 이 말씀에 의하면 우리 주님은 창세 때부터 감추어진 것을 비유로 진술한다는 말이다. 창세 때부터 감추어진 것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우리 주님의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도래했다. 비유란 이 말씀에서 보면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는(to show) 것이다. 이것이 비유의 중요한 특성이라고 본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천국은 “이다”(the kingdom of heaven is)가 아니라 “이와 같다”(the kingdom of heaven will like〔NIV;KJV;shall be compared to(RSV)〕이다. 천국은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비유로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유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진리를 보여준다. 나는 선한 목자에서 “나”는 비유(παραβολη)이다. 여기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목축 업자는 아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는 말은 확대된 은유(extended metaphor or metaphorical saying, παροιμια)이다. 진실된 은유는 알레고리가 아니라 실제에 기초하고 있다. 비유는 첫째, 비유를 듣는 자를 도전하며 책임감을 갖게 한다. 둘째, 비유는 자기 자신을 그 비유에 의해서 들여다보도록 한 거울과 같다. 셋째, 비유는 직접적이 아니라 간접적이다. 넷째, 비유는 적대감이 있는 사람에게 간접적으로 쓰는 경우가 있다. 다섯째, 비유는 들을 귀가 있어야 한다.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도 많은 메타포를 써서 거룩한 순례자가 천성을 향하여 순례 길을 감에 있어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를 통해서 묘사한다. 꿈속의 이야기지만 깨닫는 자에게는 금과 같이 중요하다. 그러나 깨닫지 못한 자에게는 하나의 꿈 이야기가 된다. 따라서 우리 주님도 비유를 말씀하시고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했다. 들을 귀가 없을 때 우리 주님의 말씀은 번연처럼 하나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비유의 중요성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영적인 깊은 진리를 보여준다는데 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메타포를 통하여 묘사하고 있다. “나는 양의 문이다.”( I am the door of the sheep; 요10:7) “나는 선한 목자이다”( I am the good shepherd; 요10:11)에서는 천국 비유와는 다르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선한 목자인 경우는 보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천국은 잘 설명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천국 비유는 “이와 같다”라는 말을 썼고, 선한 목자의 경우는 “이다”인 것이다. 언어의 사용에 따라서 그 언어의 의미가 결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해석할 때 언어의 사용을 주의 깊게 관찰하여야 한다. 칼빈은 은유적인 표현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은유적 해석은 알레고리칼 해석이 아님을 말한다. 알레고리는 믿음의 규칙을 벗어나지 아니하는 방향에서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야 한다.
칼빈은 요한복음 1:1-5에 대한 설교에서 성경 해석에 있어서 성경의 언어가 어떻게 문장에서 사용되는가를 아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것을 모르면 성경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For it is important to know how Holy Scripture uses words. Surely we need not stop simply at words, but we cannot understand the teaching of God unless we know what procedure, style and language he uses.). John Calvin, the Deity of Christ and Other Sermons, Trans. Leory Nixon,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Michigan, 1950), 13. 여기서 성경 언어의 사용은 문맥과 문법적인 구조를 살피는 것이며 언어의 스타일이라는 말은 성경의 장르를 말하는 것으로 본다. 성경의 장르와 언어의 사용을 보는 것은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는 데 있어서 필수적이다. 현대 성경 해석학에 있어서 이러한 사항은 아주 중요하다. 칼빈이야말로 현대 성경 해석학의 선구자라고 말할 수 있다.
2) 모형론적 성경 해석(typological interpretation of the Scripture)
Gerhard von Rad는 “구약의 모형론적 해석”(Typological Interpretation of the Old Testament)에서 모형론(typology)에서 중요한 것은 반복이 아니라 상관관계(correspondence)에 있으며 이 상관관계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라 했다. 여기서 일시적이라는 말은 예언의 성취라는 점에 있어서 일시적이라는 말이다. 환언하면, 원시적인 사건은 마지막에 이루어질 사건의 모형이라는 말이다(the primal event is a type of the final event). Essay on Old Testament Hermeneutics, ed. Claus Westermann(John Knox Press,
1979), 20. 알레고리(한국인 성경은 비유로 나와 있음)는 예표된 것과 이루어질 사건 사이에 인위적인 관계를 설정하지만 모형론에 있어서는 역사적인 관계이다. Rad에 의하면 칼빈은 구약을 모형론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을 유지했다고 했다. Rad는 모형론적인 해석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한 하나님이 구약의 언약 백성들의 역사 속에 그의 발자취를 남겼다는 상관관계에 있다고 했다.. 그래서 신구약은 한 하나님의 계시로써 구약에서는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서 믿음의 조상들에게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것이다. 그래서 신구약은 하나님의 구속사이다. 따라서, 모형론적인 해석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만 가능하다고 했다.
신구약의 통일성을 이루는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는 신구약이라는 두 개의 찬양대를 통해서 이해될 수 있다고 했다. 두개(신구약)의 찬양대는 양편에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며 찬양하는 것이다. Rad에 의하면 우리 구세주 그리스도의 지식은 구약 없이는 불완전한 것이라고 했다. Essay on Old Testament Hermeneutics, 37-38. 동시에 신약 없이는 구약의 이해는 의미가 없다.
칼빈에게 있어서 모형론은 진정한 에언이다. 모형론은 구약의 예언과 신약의 성취라는 역학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구약의 제사 제도를 주석하면서 칼빈은 모든 제사 제도는 모형론적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그 의미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The whole cultus of the law, taken literally and not as shadows and figure[umbras et figuras] corresponding to the truth, will be utterly ridiculous). ICR, II.VII.1.
칼빈은 “안식일에 너희 집에서 짐을 내지 말며 아무 일이든지 하지 말아서 내가 너희 열조에게 명함 같이 안식일을 거룩히 할지어다”(렘17:22)를 해석하면서 안식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찾도록 하기 위해서 명해졌으며 사도 바울이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6-17)에서 말함과 같이 안식일이나 절기나 월삭은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types) 혹은 그림자(umbras/shadow)이며 그리스도는 모형과 그림자의 본체라고 했다. 여기서 그림자라는 말과 본체라는 말은 서로 깊은 연관을 갖고 있다. 그림자란 본체substance)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본체가 있다는 것을 시사하며 그림자는 본체가 그대로 드러나면 없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구약의 제사 제도나 예식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폐하여 진 것이다.
칼빈은 로마서 5:14절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επι τω ομοιωματι της παραβασεως Αδαμ ος εστιν τυπος του μελλοντος)는 주석에서 알레고리칼 해석을 반대하면서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했다. 어떤 점에서 모형인가? 유사성의 모형이 아니라 대조적인 모형이라고 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온 세상에 들어오고, 사망이 죄로 말미암아 들어온 것처럼,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의가 회복되고, 그리고 생명이 의로 말미암아 회복되었다.”『칼빈성경주석』, 존 칼빈 성경주석 출판위원회역편(성서교재간행사, 1990), 로마서. 빌립보서, 173. 아담 한 사람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 한 사람으로 의가 회복되고 생명이 의로 말미암아 회복되었다. 이 점에서 아담과 그리스도는 다르지만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여기서 아담이 죄의 모형이라거나 그리스도가 의의 모형이라고 하지 않은 것이다. 칼빈은 복음은 율법이 모형 아래 감추어진 것을 손을 가지고 지적해 준다고 했다(the gospel points out with finger what the law foreshadowed under the types). ICR, 2.9.3. Bates는 칼빈의 모형론적 해석은 칼빈 신학에 중요하다고 했다( Ed. Richard Gamble, Camlvin and Hermeneutics,. 146-61). 칼빈은 강요에서 강요의 목표는 성경을 올바로 읽고 공부하는데 도움을 주는 안내서라고 했다. 1560 불어 판에는 강요는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는 길을 여는 키라고 했다(a key to open a way for all children of God into a good and right understanding of Holy Scripture). 강요는 성경 주석에서 다루는 토픽을 좀더 자세하게 다루지만 주석은 그렇지 않다. 이점에서 강요는 성경 주석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칼빈에 있어서 강요와 주석의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선포하는데 있다. 칼빈은 창세기 1:16을 주석 하면서 “모세는 철학자로서 혹은 과학자로서 쓴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과 언어로 썼다”고 했다. 칼빈의 모형론적인 해석을 안디옥학파의 Theoira라고 비교한다면 칼빈의 theoira의 의미는 성령의 내적인 조명을 통해서 성경의 텍스트를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의 진정한 의미란 성령의 내적인 조명에 의한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이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가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이며 동시에 영적인 의미이다.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는 여러 의미중의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하나의 의미이다.
III. 성경 해석 원리의 적용
칼빈은 성경의 진정한 의미는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라고 했다. 따라서 그의 성경 해석 논리는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자연스럽다는 말에는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성령님의 조명과 가르침이 필수적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성경 해석이란 복잡한 이론이나 세상의 방법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귀를 가지고 성령님의 조명을 받아야 한다. 이런 마음의 자세를 가진 후에 중요한 것은 성경 언어 사용을 그대로 보는 것이다. 칼빈 자신이 팔복 설교에서 “우는(πενθεω/애통) 자는 복이 있나니 마지막에 저희는 기뻐하고 위로를 받을 것이다”의 설교에서 애통하는 자를 우는 자로 번역했다. 칼빈은 “우는자는 복 있다”는 하나님 말씀의 자연스럽고도 분명한 의미를 다음과 같이 강해했다.
그런데 사실상 울려는 사람들은 많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눈물이 야수의 표호와 같거나 또는 황소가 울부짖을 때 두들겨 맞는 암소가 비명을 내지를 때, 등과 같은 여러 종류의 눈물이라면, 이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참다운 눈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불신자의 눈물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줄 뿐입니다. 그들은 실컷 울고는 ‘오호라!’하고 끝없이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 때문입니까? 내가 언급했던 바와 같이 그들은 표호할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눈물 흘리는 법을 배웁시다. 우리의 눈물이 상달되어야 할 곳이 바로 거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다윗이 말한 말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주여 당신은 당신의 병에다 나의 눈물을 담으셨나이다!’ 우리가 고귀한 향수 또는 대가를 치뤄 얻은 한방울과 같은 눈물을 흘릴 때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간직해 두신다고 다윗은 말하고 있습니다. 눈물은 땅에 떨어지거나 아니면 우리가 손으로 닦아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울 때 그것은 분명히 한방울도 상실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하나님은 전부다 조심스럽게 간직하실 것입니다.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 이 말씀은 우리에게 같은 위로를 받도록 인도하고 있습니다. 박건택 편저, 「칼빈과 설교」( 도서출판 나비, 1988), 204-5.
이 얼마나 감동적이고 단순한 설교인가? 성경의 자연스러운 의미를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성경의 문자적 해석이란 성령의 내적조명을 통해서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가르쳐 준 자연스럽고도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해석과 연결시켜 말한다면 성경의 언어의 사용을 봄으로써 하나님께서 성령의 내적 조명 혹은 가르침을 통해서 해석자에게 가르쳐 준 자연스럽고도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칼빈의 강해설교에서 살펴봤듯이 성경의 의미는 단순하고 분명하다. 따라서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란 성경 말씀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 들이는 것이다. 그 말씀을 오늘의 상황에 적용하는 것이 해석인 것이다. 해석이 없는 설교, 강의는 감동력이 없는 것이다.
요약하면 칼빈에게 있어서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는 성경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래서 성경의 핵심 메시지는 구속의 메시지이다. 구약과 신약은 구속사의 정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통일성을 갖는다. 이런 점에서 보면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란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구속사적인 맥락에서 성경의 언어의 사용을 보는 것이다.
Ⅳ. 정리
칼빈의 성경 해석 논리는 그가 세상 학문을 통해서 새롭게 발견한 이론이 아니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성경해석의 논리는 믿음의 선배들에 의해서 제시된 것이며, 그 나름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 시대에 맞게 올바로 이해하고 그대로 살기 위해서 몸부림쳤던 것을 읽을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성경을 풍유적으로, 안디옥학파는 모형론적으로 해석했다. 풍유적인 해석은 성경 언어 이면에 숨은 진정한 의미를 찾아내고자 했으며, 모형론적인 해석은 성경의 역사적 문법적인 의미를 찾고자 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칼빈의 성경 해석 논리는 안디옥학파의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
칼빈은 어느 한 사람에게만 배운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버리지 않고 배웠다. 그 일례가 프랑스 인문주의자들에게서 배운 것이다. 그는 모든 학문은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도록 도움을 주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했다. 가려서 좋은 것은 자기 것으로 소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성경 해석 논리는 그의 성경관에 기초하고 있다고 본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선지자와 사도를 성령님의 감동을 통하여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쉽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 인간의 언어로 기록케 하신 것이다. 이것은 연약하고 제한성을 가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이며 은혜이다. 성경이 성령님의 감동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성령님의 조명을 통해서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한대로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와 감동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그 의미는 단순하고 명료하다. 따라서 성경 해석 원리는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가르쳐 준 의미는 자연스럽고 분명하며 이 의미가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이며 동시에 영적인 의미이다.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는 여러 의미중의 하나가 아니고 유일한 하나의 의미이다. 여기서 한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는 하나지만 그 의미를 현 시점에 적용할 때 문자적인 의미(meaning)의 유 의미성(significance)은 상황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사실을 염두해두는 것은 중요하다. 칼빈은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를 찾기 위해서 역사적 문법적인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한다. 환언하면 성령의 조명을 통하여 성경의 언어의 사용을 보는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진정한 성경의 의미는 자연스럽고 분명하다. 이것이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이다. 성경의 문자적인 이해는 성경 언어의 이면에 있는 신비스러운 의미를 찾는데 있지 않고 성경을 전체로서 이해하려는 방법이다. Hans W. Frei, The Eclips of Biblical Narrative: A Study in Enghteenth and Nineteenth Century Hermeneutics(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74), pp. 18-19(“The literal or grammatical meaning, primary for Luther and Calvin, was for both men usually identical with the text's subject matter, i.e., its historical reference, its doctrinal content, and its meaningfulness as life description and prescription.”). 다시 말하면,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며, 신구약 성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성경의 핵심 메시지는 구속의 메시지이며, 성말씀과 성령님의 역사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성경의 진정한 이해는 성령님의 조명이 절대적이라는 사실에 기초를 두고 성경 언어의 사용을 보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성령님의 역사는 기계적이 아니라 해석자의 신앙과 학문을 쓰신다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깊은 이해가 있는 것이다. 칼빈은 구약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모형론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모형론은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언약의 구약의 약속과 신약의 성취라는 상관관계에 기초해 있다.
칼빈의 성경해석 논리는 오늘처럼 혼탁하고 자유주의 신학과 해석학이 인간 이해에 중점을 두고 성경을 해석하고자 하는 시대에 칼빈의 해석 논리는 성경을 계시한대로 보게 하는 성경에서 도출한 성경 해석 방법이요 나아가서 이렇게 성경을 해석하고 그렇게 살 때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우리에게 풍요로운 삶을 살게 하며 성경은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라는 장로교회의 대원칙을 새롭게 조명하며, 오늘날 우리 목회자들이 성경의 제자가 되고 성령의 학교에서 배워서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는 삶 속에서 보여주어야 할 목회자의 갱신이요 성경 해석 논리라고 생각한다.
성경해석학 | [HEALER]
2. 칼빈이 말하는 성경의 자연스러운 의미의 논리
칼빈이 말하는 성경의 자연스러운 의미의 논리 빈 학자들의 대다수는 칼빈을 성경 신학자로 특성 지우고 있다. 예를 들면 벤자민 워필드는 칼빈은 독자적인 “성경 연구자”로 봤다.『 칼빈, 루터, 어거스틴』 , 벤자멘 워필드/저, 한국칼빈주의연구원/편역 (기독교 문화 협회, 1988), 39. John H. Leith는 칼빈을 성경 신학자(Theologian of the Bible)로, Paul Traugott Fuhrmann은 성경 해석자(the expositor of Scripture)로, T.H.L. Parker는 성경의 해석자(the Biblical Exposition)로 특성 지운다. Paul Traught Fuhrmann, Calvin, “The Expositor of Scripture”, Interpretation, Vol.6 (April, 1952).John H. Leith, “John Calvin-theologian of the Bible”, Interpretation, Vol. 25 (July 1971), 329-44. T.H.L. Parker,“Calvin the Biblical Expositor”, John Calvin, ed. G.E. Duffield (Michigan: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66), 176-86. Calvin and Hermeneutics, Vol.6, ed. Rhichard C. Gamble (Michigan: Garland Publishing, INC., 1992) 칼빈 신학은 그의 성경 해석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Richard A. Muller, "Foundation of Calvin's Theology:Scripture as Reveling God's Word," Duke Divinity School Review 44(1979), 14-24. Leith에 의하면 칼빈은 성경 신학자라고 했다. 그의 신학은 성경의 주석에서 왔다고 했다. “John Calvin-Theologian of the Bible,” Vol.25, Interpretation (July 1971), 329-344.
칼빈이 말하는 성경의 자연스러운 의미의 논리 칼빈은 제네바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자(Reader in Holy Scripture)로서 그의 일생을 시작했다. 그리고 “제네바 교인들이 믿어야 할 고백”(Confession of Faith which all the citizens and inhabitants of Geneva and the subjects of the country must promise to keep and hold 1536)에서 성경만이 “믿음과 종교의 규범”(Scripture alone as rule of faith and religion)이라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 죽기 전 고별사에서 칼빈은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의 종”이라고 고백했으며 자신은 평생 동안 성경을 의도적으로 왜곡되게 해석한 적이 없었다고 했으며 늘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성경의 단순성을 드러내는데 전념했다고 했다. 종교개혁에서 중요시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이라고 살도레도 추기경에게 말했다. 칼빈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교회의 개혁의 필요성(Necessity of Reforming the Church)은 하나님 말씀의 순수성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Calvin:Theological Treaties, Ed. J.S.K. (London:SCM Press LTD, MCMLIV), 186-87. Richard A. Muller는 칼빈의 신학은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으로서 성경”에 기초하고 있다고 했다. Calvin and Hermeneutics, Vol.6, Ed. Richard C. Gamble (New York&London:Garland Publishing, INC, 1992), 398. Cited as CH. 참으로 칼빈은 성경 해석을 통해서 장로교회 신학을 확립한 위대한 신학자이며 목회자이다.
교회사를 보더라도 성경에 기초하지 않은 신학자는 위대한 영향을 주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에 기초하지 않은 신앙은 그 시대를 타락케 했다. 이 점에서 본다면 성경 해석은 신앙과 삶의 룰을 규정하는 기초가 됨을 알 수 있다.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해석이라는 말은 첫째, 번역, 둘째, 설명, 셋째, 선포, 넷째, 들어내는 것(to ecpose)으로 요약할 수 있다. 따라서, 해석에서는, 글의 저자, 내용, 문체, 역사적 상황 등을 고려해야 한다. 칼빈은 성경 해석은 저자의 의도 혹은 마음 (mens Scriptoris or concillium autoirs/the mind of the writer)을 들어내는 것(lay open)이라고 자신의 최초의 주석(로마서 주석) 서문에서 말했다(CM, vol. XIX). 그렇다면 문제는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쓰여져 있지만 인간의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이 성경의 원저자이기 때문이다. 과연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가? 인문주의 학자들이 사용하는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가? 없다면, 과연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가? 성경의 저자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의 말씀인 성경에 해석 방법을 제시했을 것이 아닌가? 했다면, 어떻게 해석하도록 하셨는가? 어떻게 성경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는가? 해석이란 성경이라는 텍스트(text)와 그것을 해석하는 사람의 관계성 속에서 성립된다. 그렇다면 그 전자와 후자의 관계는 어떠한가? 이런 질문을 풀어 가는 가운데 가장 좋은 성경 해석 방법은 성경의 분명하고 자연스러운 의미를 드러내는 것임을 입증할 것이다. 이것이 칼빈의 성경해석 논리이다.
칼빈의 성경 해석 논리는 세상 학문에서 해석 방법을 도출해 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성경 관에 기초해 있으며 성경해석 원리는 성령의 조명에 의해서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natural and obvious meaning of Scripture)를 드러내고자 했다. 문제는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어떻게 찾아내는가 하는 방법의 문제이다. 성경의 진정한 의미가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라고 한다면 그 말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해석자는 어떤 자질을 가져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명료하게 밝히는 데 초점을 둔다.
알레고리칼 성경 해석의 가장 좋은 예는 어거스틴의 사마리아 사람 비유(눅 10:29-37)에서 볼 수 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여리고로 여행하던 사람은 아담이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하늘 도성이다. 아담은 그 축복으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여리고는 달을 의미하면서 인간의 도덕성을 상징한다. 왜냐하면 달은 만삭되었다가 반달이 되고 결국에는 기울고 마는 특징을 가졌기 때문이다. 아담을 공격한 도적들은 마귀와 그의 졸개들이다. 저들이 아담을 때리고 옷을 벗긴 것은 그의 도덕성을 갈취하고 죄를 짓게 만든 것이다. 그들은 그를 거의 죽은 상태로 내어버리고 떠났다. 그를 도와주지 아니하고 그냥 지나간 제사장과 레위인은 구원을 가져오지 못하는 구약의 제사장과 사역자들이다. 사마리아인이란 말은 보호자란 뜻이 있다. 따라서 사마리아인은 예수님 자신을 일컫는 것이다. 상처를 싸매는 것은 죄를 덮음을 의미하고, 기름은 소망의 위로를 의미한다. 그리고 포도주는 열심히 일할 것에 대한 권고이다. 인간을 태운 짐승은 인간 가운데 오신 그리스도의 성육과 믿음을 의미한다. 그 사람이 옮겨진 주막은 하늘 도성으로 돌아가는 순례자들의 발걸음을 잠시 쉬게 하는 교회를 상징한다. 그리고 선한 사마리아인이 여관 주인에게 준 동전 두 개는 이 생과 장차 오는 생에 대한 약속이거나 교회에 준 두 성례를 의미한다. 여관 주인은 사도 바울이다.”『성경주석학』, 헤이즈. 할러데이 공저, 김근수역(도서 출판 나단, 1993), 27-28.
오리겐에 의하면 성경의 저자는 성령님이다. 따라서 성경에는 문자적인 의미를 초월한 영적인 의미가 있다고 봤다. 세상에 있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그림자로 본 것이다. 환언하면, 세상의 모든 것은 영적인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여기에 알레고리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문자적인 의미는 성경의 깊은 의미가 될 수 없으며 감추어진 신령한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리겐은 주로 성경에서 문자적인 의미와 영적인 의미를 찾고자 했다. 예를 들면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셨다는 것을 해석하면서 인간의 몸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것이 아니며 인간의 내면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고 했다. FC, Vol.71, 63. 여기서도 오리겐은 문자적인 의미와 영적인 의미를 말하고 있으며 영적인 의미야말로 진정한 의미라고 한다. 그렇지만 오리겐은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의 중요성도 말했다.
오리겐은 기독교를 반박한 『셀수스에 반대』(Against Celsus)에서 문자적인 의미의 중요성을 세 가지로 말했다. 첫째, 성경은 사실적이고 중요한 역사적인 사실을 가지고 있다. 둘째, 단순한 문자적인 의미는 평신도의 신앙을 북돋운다. 셋째, 문자적인 의미는 변증적인 면이 있으며 성경을 공부하도록 돕는다. Dan G. McCartney, “Literal and Allegorical Interpretation in Origen's Contra Celsum,” W TJ, Vol.48 (1986), 281-301. Against Celsus, 3.43., 1.17; 18;27; 7.60), 288-89.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리겐에 의하면 성경은 풍유적으로 해석해야 하며, 성경의 텍스트에 숨겨있는 깊은 진리를 발견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함으로서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과 연합하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러나 알레고리칼 성경 해석은 성경의 역사성을 무시하며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은 것을 영해함으로써 성경의 본뜻을 곡해하게 만드는 것이 문제다.
Ⅰ. 안디옥학파(The Antiochene School)의
성경 해석 논리
안디옥학파는 역사적 그리고 모형론적 해석학(Literal-historical and typological hermeneutics)으로 특성 지워진다. 안디옥학파는 안디옥에서 기인된다. 안디옥은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최초로 이방인 신자를 크리스천이라고 불렸던 곳이며 동방 제국의 수도였다. 안디옥학파에 의하면 성경의 주된 의미는 역사적인 의미 즉 문자적인 의미라고 믿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성경의 깊은 의미를 알레고리칼 방법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면 안디옥학파는 성경의 깊은 의미는 역사적 문법적인 방법(theoria/θεωρια)에 의해서 얻어진다고 봤다. Theoria는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나 희랍어로 Theoria는 “보다” “관찰하다” “묵상하다(contemplate)”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로서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사고나 논리적인 추론이라기 보다는 이미 소유한 지혜나 지식을 관조하는 통찰력(insight)을 의미한다. 확정되지 아니하고 변화하는 것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사변이나 논리적인 추론이 필요하지만 이미 확정되고 확고 부동한 진리를 탐구하는 것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W.K.C. Guthrie, A history of Greek Philosophy, Vol.6 [Cambridge: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1],396). 다시 말하면 성경에서 theoria을 통해서 모형을 찾는 것이다. 성경은 구속사이다. 구속사이기 때문에 예언과 성취가 있고 그 가운데 모형이 있다.
안디옥학파의 선구자인 Diodore of Tarsus는 성경 해석에 있어서 성경은 theoria를 사용하는 것을 금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알레고리와 테오리아의 차이』 (On the Difference between Theoria and Allegory/τιs διαφορα θεωρια και αλληγοριαs)라는 책을 썼지만 아리안 주의자들에 의해 불타서 없어졌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그는 “우리는 영적인 해석이나 theoria을 금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역사적인 이야기(historia)는 theoria를 배제하지 않으며 오히려 theoria는 탁월한 통찰력의 기초요 하부 구조이다. 그러나 theoria를 역사적인 기초가 없이 사용한다면 결국은 그것은 theoria가 아니라 allegory가 되어 버린다”(We do not forbid the higher interpretation and theoria, for the historical narrative does not exclude it, but is on the contrary the basis and substructure of loftier insights.... We must , however, be on our guard against letting the theoria do away with the historical basis, for the result would then be, not theoria, but allegory)고 말했다. Cited by J.N.D. Kelly, Early Christian Doctrines, 4th Rev. ed(Sanfrancisco: Harper and Row, 1978), 76-78.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성경에서 문자적인 의미를 무시하게 하는 것은 결국 알레고리칼 해석이 된다는 것이며, theoria라는 말은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를 찾게하는 영적인 통찰력 혹은 관찰을 의미한다. Frederic W. Farra, History of Interpretation, Reprinted 1961 by Baker Book House from the 1886 edition published by E. P. Dutton, 213, 각주 3번. 디오도레에 의해서 배운 두 사람이 Theodore of Mopsuestia와 John Chrysostom이다. Mopsuestia는 성경의 문법적인 구조를 중요시했으며 성경을 역사적 상황에서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성과 문자적인 의미를 무시하고 theoria를 사용하는 것은 알레고리칼 해석의 결과를 가져온다. 안디옥학파는 성경에서 문자적인 의미가 불가능할 때 모형론적으로 해석했다.
모형(type)이라는 말은 희랍어로 τυπος라는 말에서 유래되었으며 닮음(resemblance). 유사성(likeness), 비슷함(similarity)의 의미가 있다. 따라서 모형론적인 해석은 구약을 해석하는데 사용된 해석으로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신약은 예언의 성취라는 상관관계에 기초하고 있다. 성경은 구속사로서 구약의 사건은 다소 불분명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다는데 기초하고 있다.
안디옥학파의 대표자는 John Chrysostom이다. 그는 성경의 문자적, 역사적, 문법적 의미를 중요시했으며 성경은 하나님이 저자이시며 동시에 인간의 언어로 쓰여 있음을 중요시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플라톤의 이데아와 그림자의 형이상학적 세계 이해에 중점을 둔다면,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궁극적인 실제는 세상의 사실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사상에 영향을 받고 있다.
크리소스톰에 의하면, 성경에서 인간의 연약성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을 크리소스톰은 synkatabasis(God's gracious acceptance of human limitations/astheneia)라고 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의 한계성을 고려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을 인간의 언어로 쓰신 것이다. 따라서, 성경 언어의 정확성과 단순성을 말한다. FC, Vol. 74, 17-18 . 그는 알레고리칼 성경 해석은 올바르지 아니하며 신자를 잘못되게 이끈다고 말했다. 그는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실례를 잠언 5:17-19, 이샤야 8:7-8, 그리고 에스겔 17장으로 든다. 이들은 알레고리이지만 크리소스톰은 은유적으로 해석한다. 갈라디아서 4:22-24에서 사도 바울의 알레고리를 은유적으로 해석한다. “바울은 언어를 잘못 사용하여 예형(豫型)을 비유라고 하였다. 바울의 진의는 이것이다. 즉 역사 자체는 명백한 의미를 소유할 뿐 아니라 다른 것도 일러준다. 그래서 비유라고 불린다. 그러나 무엇을 일러주는가? 현존하는 것 이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By a misue of language he[Paul] called the type allegory. What he means is this: the history itself not only has the apparent meaning but also proclaims other matters; therefore, it is called allegory. But what did it proclaim? Nothing other than everything that now is). John Chrysostom,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Galatians, 4.24. 그는 안디옥학파의 theoria를 예술과 비교해서 성경의 두 가지 의미(역사적.모형론적 의미)의 관계를 보여준다. “진리가 실현되기까지는 예형(豫型)에 진리라는 명칭을 준다. 그러나 진리가 성취되면 그 명칭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繪畵(회화)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예술가가 왕을 스케치하지만 그 위에 도색 되기 전에는 그 그림은 왕이 아니다. 그리고 그 위에 도색이 될 때 진리 때문에 그 型(형)이 감추어지며 다시는 보이지 않게 되며 그 때 비로소 우리들은 ‘이 왕을 보라’하게 된다”(The type is given the name of the truth until the truth is about to come, but when the truth has come, the name is no longer used.. Similarly in the painting: AN artist sketches a king, but until the colars are apllied he is not called a king; and when they are put on the type is hidden by the truth and is not visible; and then we say, 'Behold the King'). John Chrysostom, In Epist. ad Phil. Hom., 10. 왕에 대한 스케치와 왕의 초상화의 관계에서 스케치는 역사적 의미요, 초상화는 왕의 윤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상의 최종적인 의미는 스케치와 초상화와의 관계인 모형론적인 의미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 그는 성경은 분명하게 쓰여졌다고 봤다. 따라서 성경의 명료성을 강조했으며 성경의 콘텍스에 의한 문자적인 의미를 찾으려고 했다.
II. 칼빈의 성경 해석 논리
Paul L. Lehmann에 의하면 성경 해석에 있어서 칼빈은 루터보다 더 명료하고 단순하며, 성경 해석사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CH, Vol.6, ed. Richard C. Gamble, Garland Publishing, INC, (New York, 1992), 412. Kemper Fullerton은 칼빈은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최초로 성경을 학문적으로 해석한 사람(the first scientific interpreter in the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이라 했다. Kemper Fullerton, Prophecy and Authority: A Study in the History of the Doctrine and Interpretation of Scripture (New York: Macmillan, 1919), 133. Fullerton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칼빈과 루터는 모두 문법적-역사적 의미를 성경 해석의 원리(exegetical principle of the grammatic-historical sense)로 삼았다. 루터는 모든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성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역사적 콘텍스트를 무시하고 모든 성경의 텍스트에서 그리스도를 찾고자 하는 무리한 기독론 중심의 해석은 반대했다. David L. Puckett, John Calvin's Exegesis of Old Testament (Kentuc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5), 10. 칼빈의 성경 해석의 논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칼빈의 성경의 필요성, 성경관, 인문주의 영향, 말씀과 성령의 관계, 해석자의 자질을 아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의 성경 해석의 논리는 성경에서 도출했기 때문이다.
1. 성경의 필요성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에게 양심과 종교의 씨앗을 심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른다고 핑계할 수 없다. 때문에 예수를 안 믿는 사람도 그 나름대로의 종교성을 갖고 있다. 부적, 섬 지방에 있는 많은 미신, 고사 지내는 행위 등은 왜곡된 종교성의 표출이다. 사실 무신론이라는 언어 자체가 모순된 말이다. 이미 그 말속에는 신의 존재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는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보여준다(롬1:19).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고의적인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의 위엄은 인간의 이해력을 능가함으로 하나님을 탐구하기보다는 예배해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하나님은 창조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찾고 생각하도록 하셨다. 성경은 창조의 세계를 보이지 않는 것들의 표상(representation)이라고 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는 우리가 볼 수 없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세계를 우리에게 표상하기 때문이다(롬 1:20, 히 11:1).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있는 양심이나 종교의 씨앗을 통해서는 참다운 하나님의 지식을 알 수 없다. 우리가 전적으로 부패하였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타락을 우리의 책임으로 돌리게 할뿐이다. 구속주이시요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예정과 섭리 가운데서 성령님이 선지자와 사도를 감동시키셔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것이다.
성경은 안경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Ed. John T. McNeil, Vol.I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77), 1.6.1. Cited as ICR. 『기독교 강요 요약』, 이형기박사 옮김(크리스천다이제스트, 1986), 30-31. 이 말은 메타포(은유)이며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눈이 아프거나 시력이 약하면 실제로 잘 볼 수 없는 것처럼, 성경은 타락으로 인해서 참 하나님을 볼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하나님을 볼 수 있고 알 수 있게 한다. 성경이 안경이라는 은유는 카톨릭에서 말하는 것처럼 자연 이성을 보충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케 하여 교정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중생 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이성은 올바른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만이 우리에게 참 하나님을 알도록 인도하고 가르쳐 준다.
2. 칼빈의 성경관 (Calvin's View of Scripture)
1) 성경의 저자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성경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 (1.6-9), 성령과 구원에 관계(3.2), 성경의 권위와 영감(4.8)을 말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구약을 다 포함한다. 성경 66권은 표면상으로 보면 다 그 저자가 있다. 오경은 모세가 저자이다. 이사야 선지서는 이사야가 저자이다. 사도 바울 서신은 사도 바울이 저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들은 자기의 말이라고 하지 않았다.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했다. 사도 바울도 성경을 자기의 말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을 시사해 주는가? 성경의 원저자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반증해 주지 않은가? 만약 하나님이 저자가 아니라면 어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기록하고 있겠는가? 그렇다.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어떤 부분은 거칠고 잘 다듬어지지 아니한 문체(a rude and unrefined style)도 있다. ICR, I.VIII.2. 이것은 성경의 저자가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모순되지 않은가?
성경에 거칠고 잘 다듬어지지 아니한 문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모순된 것은 아니다. 칼빈은 이 모순을 조정 이론(accommodation theory)으로 설명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정과 능력을 잘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성경을 인간의 언어로 기록케 하시고 어머니가 어린애를 가르치는 것처럼 우리의 능력에 맞게 표현하게 하셨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은 쉬운 말로 알기 쉽게 기록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아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이다. Lewis Battles에 의하면 조정 이론(God's Accommodation to human capacity/caput)은 칼빈이 창안해 낸 것은 아니라고 했다. 교회사를 볼 때 Origen, Augustine, Chrysostom, Hilary of Poitiers가 사용했다. 그러나 칼빈의 경우는 이들과 달리 이 원리를 일관성 있게 성경을 해석하는 원리로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갭을 메우는 데 적용했다고 말했다. Readings in Calvin's Theology, Ed. Donald K. Mckim (Baker Book House, 1984), 22.
칼빈에 의하면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선지자와 사도들로 하여금 성령님의 감동으로 성경을 기록케 하신 것이다. 성경이 인간의 언어로 쓰여졌지만 성경은 인간의 사상과 감정이 들어 있는 책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의 사상과 감정이 들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ICR, I.VI. 2.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은 절대 무오하다. 성령님의 감동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성경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숨결이시며 하나님 자신이 인격적으로 성경 안에서 말씀하신다(딤후3:16).
성경은 우리에게 진정한 하나님을 보여준다. 성경은 우리에게 성경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지식을 가르쳐 주며 율법과 선지서, 복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구속주 하나님의 지식을 가르쳐 준다. 칼빈은 신정통주의에서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예수님과 증거로써 하나님의 말씀(Neo-orthodox conundrums in driving a wedge between Christi as the Word and Scripture as Word in the sense of witness)을 구분하지 않는다. 성경을 삼위일체적으로 설명한다. 성경은 성령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우리 마음에 성경의 권위와 진리를 증거하며, 동일한 성령님의 역사에 의해서 성경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주시며, 하나님의 지혜요 말씀으로 증거하며, 성령님의 역사에 의해서 성경에서 하나님의 본질적인 말씀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발견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배우며, 우리 마음에 부음 바 된 하나님의 사랑을 배운다. Richard A. Muller, “The Foundation of Calvin's Theology: Scripture as Revealing
God's Word,” Duke Divinity School Review 44(1979), 14-24. 삼위일체적으로 말하면 성경이란 성부 하나님이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성자 하나님에 대해서 인간의 언어로 기록케 하신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이다.
2) 성경의 권위
성경의 권위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권위가 있는 것이다. 칼빈이 성경의 권위를 들고 나온 이유는 성경이 신적인 권위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로마 카톨릭에서는 성경의 권위는 성경 자체의 권위가 아니라 믿음과 진리의 은행으로서 교회가 성경 권위를 인정하고 보호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베드로의 뒤를 이은 교황이 교회의 수장이요 성경 해석의 최후 재판관이 된다고 믿었다. Paul Lehmann에 의하면 우리 장로교에서는 성경은 믿음과 신앙의 궁극적인 규범이 성경이지만 카톨릭 교회에서는 성경의 권위는 교회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구원의 확실성도 성경 자체의 약속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부여한 것처럼 보여지므로 성경의 신적 권위를 약화시킨다.
성경이 절대 무오한 진리가 되는 것을 교회가 결정하게 된다면 절대적인 성경의 권위를 인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교회가 성경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는 성경의 기초 아래 세워진다고 칼빈은 말했다. ICR, I. VII. 2. 그렇다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성령님의 내적인 증거에 의해서 확신되어진다. 성령님은 성경에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고 계심을 증거한다. 성경을 기록하신 성령님이 우리의 지성에 계시하시고 마음에 인을 치셔서 성경을 하나님의 살아 계신 말씀으로 증거하며 확신케 한다. 이보다 더 완벽한 증거는 없는 것이다. ICR, I. VII. 4.
성령님의 증거나 조명을 통하여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신한 사람에게 성경의 권위는 교회가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객관적인 증거를 통해서 이루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성경의 자증에 기인하는 것이다. ICR, I.VII. 5. αυτοπιστον(self-authenticated) 성경의 자증성은 성경의 신적 권위를 가장 완벽하게 말해 준다. 성경이 스스로 그 권위와 진실성을 말한다. 자증성이란 성경에서 하나님이 스스로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스스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게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성경 해석이나 설교는 말씀 자체가 말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고자 하시는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이 스스로 말씀하시는 설교나 해석은 자연스럽고 분명한 것이다.
3) 성경의 내용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τα δυναμενα σε σοφιαι εις σωτεριαν δια πιστεως της εν Χριστω Ιησου, 딤후3:15). 칼빈은 분문 주석에서 “구원에 충족한 지혜를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다는 이야기는 성경에 대한 아주 귀한 찬사로 다음 구절은 그 의미를 더욱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그가 우리를 성경의 핵심이요, 알맹이가 되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이끄는 것은 당연하다.” Calvin's Commentary, Vol.21 (Michigan:Baker book House, 1986), 248-49. “For this reason he directs us to the faith of Christ as the design, and therefore as the sum, of the Scripture for on faith depends also what immediately follows.” Cited as CC.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성경은 자신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다고 증언하셨다. “Everything must be fulfilled about me in the law of Moses, the Prophets and the Psalms(Luke 24:44-47).” 여기서 모세의 율법은 모세 오경을 말하며 선지자는 선지서를 의미하며 시편은 성문서를 의미함으로서 구약 전체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구약은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
칼빈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핵심이요 설계다. 또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가르치는 책이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가 성경의 설계요 핵심이라는 말은 대단히 중요하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신구약을 볼 수 있도록 설계하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신구약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신구약의 통일성을 이루는 설계요, 신구약 통일성의 핵심이 되기 때문이다. 신구약의 통일성을 이루는 핵심이 없이는 신약과 구약을 연결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신구약을 하나로 묶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는 성경의 모형론적 해석이나 구속사적인 해석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Von Rad는 신구약을 두개의 찬양대로 비유하면서 두 개의 찬양대가 하나의 핵심인 예수를 지칭하면서 부르는 두 개의 찬양대라고 했다. Essays on Old Testament Hermeneutics, Ed. Claus Westermann Trans. James Luter Mays(Atlanta:John Knox Press, 1979), 14-24..
4) 성경의 명료성과 단순성
성경은 왜 단순하고 명료한가? 두 가지로 대답할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배려 혹은 조정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하고 제약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뜻과 감정을 이해하고 그에 따라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렵게 쓰여졌을 경우, 우리가 성경을 잘 이해할 수 없다고 보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에 맞게 언어를 선택하시고 쉬운 말로 기록토록 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은 당신의 섭리 가운데 구약을 일상 히브리말로 신약도 일상언어인 코이네 희랍어로 기록케 하신 것이다. 환언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명료하고 분명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에 맞추어서 어린 아이를 기르는 어머니처럼 우리의 능력에 맞추어서 인간의 언어로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이 칼빈의 조정 이론이며 바로 성경 자체가 하나님의 배려로 말미암아 단순하고 명료하게 쓰여져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 단순하고 명료한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 성경에서 가르치는 해석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칼빈의 십계명설교』, 벤자민 팔리 편역 (성광문화사, 1991), 427-29. 둘째는, 성경은 인간의 사상이나 논리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다. 따라서 성경의 어느 곳을 읽어도 성령님의 감동이 안된 것이 없다. 성령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통일성이 있고 각 성경의 개체성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배려와 성령님의 감동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단순하고 명료한 것이다. 성경은 구원의 메시지이다. 따라서 성경 해석에 있어서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는 칼빈의 성경관에 기초해 있고 성경으로부터 도출해 낸 성경적인 방법인 것이다. Donald Mckim은 “살아 있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기록된 말씀이 가장 잘 해석되는 말씀”(The living word, Jesus Christ, is the One through whom the written word of Scripture is best interpreted)라고 했다. 이 말은 성경 해석 방법이 아니라 성경 해석의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시금석이라고 볼 수 있다.
3. 인문주의 사상과 성경 해석
칼빈의 성경 해석 방법은 프랑스 인문주의 자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그 당시 최고의 학문을 배운 사람이다. 그는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의 스타일을 자쿠에스 레페브레의 서클(the circle of Jacques Lefevre)로부터 배웠다.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이 교부들의 경건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변적인 논리나 전문적인 변증법에 의해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자세를 지양하고 단순성과 명료성을 중요시하는 자세였다. “What the humanists.... admired in the piety of the Fathers .... was its simplicity and clarity[which avoided] emphasizing difficulties, nodi, openly opposing authorties sic et non, probing questiones in disputuations, and finally reconciling them by a subtle dialectic.....”( Eugene F. Rice., “the humanist idea of Christian anitquity:Lefevre d'Etables and His circle," in Werner L. Gundersheime, ed., French Humanism, 1400-1600(harper Torch books; New York, Harper& Row, Publishers, 1969),169. E. David Willis에 의하면 칼빈의 사상은 dialectical diastasis라기보다는 수사학적 상관관계(rhetorical correlation)라고 했다. 칼빈은 두 가지 수사학 전통에 영향을 입고 있다. 하나는 변호나 토론하는 자가 토론이나 변호하는 것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기술로써 수사학이며 다른 하나는 진리를 효과적으로 전달해서 듣는 자가 이해토록 설득하는 수사학이다. 후자의 수사학적인 전통이 칼빈의 사상 형성에 더욱 영향을 주었다. 더군다나 칼빈이 법률가로서 훈련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그가 얼마나 수사학에 능통한가를 시사해 준다. 칼빈의 사상에 후자의 수사학은 믿음을 설득으로, 지식을 효과적인 진리로, 계시를 하나님의 능력을 낮추어서 인간의 능력에 조정한 것을 통해서 보여진다고 윌리스는 말했다. The Context of Contemporary Theology, eds. Alexander J. McKelway and E. David Willis, John Knox Press, 1974, 43-63.
칼빈은 당대의 최고의 학문을 배웠고 인문주의 학문을 배웠다. 수사학적 방법이란 고전 문서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성경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는 세상적인 수사학은 rethorique frivole (worthless rethoric)이다. 그러나 세례 받은 수사적인 방법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이 된다. 세상적인 지식이 성경을 해석하는 데 직접적으로는 도움이 안되지만 성령 세례를 받은 좋은 방법은 간접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데 도움을 준다. 칼빈에 의하면 모든 학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방향에 목표를 두고 공부해야 한다고 본다.
Heinrich Bullinger는 “Of the sense and Right Exposition of Scripture”라는 설교에서 다섯 가지 성경 해석 방법을 제시했다. 첫째, 성경 해석은 우리의 믿음에 동의해야 한다. 둘째, 성경 해석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도록 해야 한다. 셋째, 성경 해석은 콘텍스트(context)를 고려해야 한다. 넷째, 성경은 성경에 의해서 해석해야 한다. 다섯째, 성경 해석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 의해서 행해져야 한다. he Decades of Herny Bullinger, ed. Thoimas Harding(Cambridge university Press, 1844), 70.
칼빈은 인문 사회과학을 공부했다. 이것은 알게 모르게 칼빈의 사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 사회학적인 방법을 통해서 성경을 해석했다는 말은 아니다. 인문 사회학을 통해서 인문 사회학의 장단점을 알게 되고 성경에서 도출되는 성경 해석 방법과 다르다는 것을 깊이 알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4. 성경 해석 목표(the goal of Biblical Interpretation)
칼빈은 1539년에 강요 2판을 발행한 후에 로마서 주석을 출판했다. 이 주석의 서문에서 주석자의 가장 좋은 목표를 두 가지로 말한다. 첫째, 성경 해석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성경의 단순성과 명료성(lucid brevity)에 기초해야 한다. 둘째, 해석자는 성경 저자가 의도하는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CC, Vol. 19, xxiii. Richard C. Gamble은 칼빈의 성경 해석 방법은 칼빈이 로마서 주석 서문에서 밝힌 대로 성경의 명료하고 단순한 의미를 찾는 것이라고 말하며 이것은 성경의 스타일과 연관을 갖고 있다고 했다(“Exposition and Method in Calvin,” WTJ, 49(1987) 153-165, WTJ 47(1985), 1-17). 그리고 칼빈은 갈라디아서(4:22) 주석에서 성경의 진정한 의미는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verum sensum scripurae, qui germanus est et simplex)라고 말하고 우리는 이 사실을 굳게 붙잡아야 한다고 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성경 해석자의 목표는 성경에서 저자가 말하는 단순하고 명료한 의미 혹은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는(to show) 것이 중요함을 말해 준다.
칼빈은 로마서 주석에서 당대의 석학들의 성경 해석 방법을 비판하면서 말하기를 멜랑톤의 로마서 주석은 성경의 주된 개념을 중심으로 성경을 주석 함으로써 로마서 전체를 보기가 힘들며, 부커의 주석은 너무 현학적으로 흘러서 평신도가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자신의 성경 해석은 성경에서 단순하고 명료한 의미를 드러냄으로써 그 의미에 기초하여 살기를 원했다.
Imbaart de la Tour도 말하기를 칼빈에게 있어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단순하게 그리고 자연스러운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라고 했다. P. Imbart de la Tour, Calvin et l'Institution Chretienne(Paris, 1935), 63. Hans-Joachim Kraus도 칼빈의 성경 해석의 목표는 하나님의 말씀의 통일성 가운데 나타난 성경의 살아 있는 의미를 드러내고자 했다고 하면서 여덟가지 성경 해석 방법을 제시했다. Calvin's Exegetical Principles, Interpretation, Vol.31(Jan., 77), 8-18.
칼빈은 성경 속에서 성경 해석의 원리를 찾았고 성경 스스로 말하도록 했다.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는 누구나 다 발견하는 것은 아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사람이 발견하는 것이다.
5. 성경 해석과 성령의 조명
성령과 성경 해석 관계는 아주 중요하다. 칼빈에 의하면 성령의 조명이 없이는 올바로 성경을 해석할 수 없다. 칼빈은 “문자 자체의 말씀은 성령의 조명이 없이는 아무런 효과도 유익도 줄 수 없다”(the bare word has no effect or profit without the illumination of the Holy Spirit). Instituion of 1541, Vol.II, 29. 성령에 의한 영감은 종교개혁에서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은 모든 것 위에 있다. 루터도 성경과 신자 관계를 설명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가? 그에 의하면 “말씀과 성령”이다. 이 말을 칼빈은 더 명료하게 설명했다. “성령 없이는 말씀은 죽은 문자이다. 말씀이 없이는 성령은 환상처럼 떠다닌다”(Without Spirit, the word is a dead letter; without the Word, the Spirit flutters as an illusion). Imbart de la Tour, Calvin et l'Institution Chretienne, p.61f; J. Chartrou-Charbonnel, La Reforme et les Guerres de Relgion (Paris, 1948), 85.
성령은 성경의 기자를 감동시켜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다. 동일한 성령님은 오늘 날에도 우리를 조명하사 하나님의 말씀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깨닫게 한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확신케 한다. CC, Vol.20, 141. 성령의 검으로서 말씀(μαχαιραν του πνευματος Ο εστιν ρεμα θεου)은 말씀과 성령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The sword of the Spirit, which is the word of God, 엡 6:17)에서 논리적으로 보면 ‘말씀은 검’이다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말씀이 검으로서 역할을 하려면 성령님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말씀은 검은 검이로되 쓸모가 없는 검이 되는 것이다. 말씀의 칼을 날쌔게 가는 작업을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이다. 그래서 말씀과 성령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세상의 해석학이 아무리 좋고 깊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데는 무용지물이 된다. 다만 세상 학문이 성령에 의해서 세례를 받는다면 성령을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된다. 칼빈은 에베소서 주석에서 성령과 말씀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에베소서 6:17말씀은 그것을 설명하는 말씀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만 이라고 주장하면 신비주의에 흐르며, 말씀만 이라고 하면 이성주의에 빠지며,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라야 진정으로 성경을 올바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칼빈은 히브리서 4장 10절 주석에서도 성령님의 역사를 중요시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나니” 칼빈은 본문을 주석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은 성령님의 역사에 의해서 선포된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했다. CC, Vol..22, 103.
성경해석에 있어서 성령의 내적인 조명은 필수적이다. 칼빈은 누가복음 24:44-45(“또 이르시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의 주석에서 성경을 깨닫게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 즉 성령의 내적인 조명 혹은 가르침을 받아야 성경을 깨달을 수 있다고 했다. 우리의 마음을 여는 것도 성령님의 역사요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하는 것도 성령님의 역사이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시며 그 성령님이 성경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주님께서 성경에서 가르치신 것을 생각나게 하신다(요14:26). 성령은 진리(το πνευμα εστιν η αληθεια)이시기 때문에 성경을 진리로 가르처 주신다(요일5:6).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내적 증거에 의하여 인처지기 전에는 인간들의 마음 속에 받아들여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령을 충실히 선포했다는 것을 우리가 납득할 수 있으려면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 같은 성령이 우리의 마음 속에 스며들어야 한다.” 존 칼빈, 「영한 기독교 강요」, 제 I 권(성문출판사, 1993), I.7.4.
6. 성경 해석과 해석자의 자질
성경을 해석하는 데는 두 지평이 있다. 성경과 해석자이다. 성경 해석은 이 두 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성경과 성경을 해석하는 자이다. 성경 해석에 있어서 이 두 관계는 아주 중요하다. 이 두 관계를 Anthony C. Thiselton은 두 지평이라고 했다. Anthony C. Thiselton, The Two Horizons New Testament hermeneutics and Philosophical Description(Michigan: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80), xix. 여기서 지평이라는 말은 은유로 해석자의 限界性(limits of thought dictated by a given viewpoint or perspective)을 의미한다. 다시말하면 해석자의 관점의 범위를 의미한다. 두 지평은 동일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로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서로의 상관관계에 의해서 서로의 지평을 새롭게 해야 한다고 했다. Anthony Thiselton, The Two Horizons, xix. 그러나 칼빈의 입장에서 보면 성경과 해석자의 관계는 상관관계라기 보다는 성경과 성령에 의존적인 관계라고 볼 수 있다. 해석자는 늘 성경에 의존하며 항상 성령의 조명을 받아서 해석자의 관점의 폭이 넓어지고, 깊어지고, 새로워져야 한다. 성경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하지 않지만 해석자의 관점은 항상 바꾸어져야 한다. 해석 자가 살고 있는 시대 상황은 변하기 때문이다. 해석자는 항상 성령님의 조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그 시대에 주시는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칼빈은 1451년 그의 강요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태양과 같아서 모든 것에 비추지만 소경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우리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성경을 이해하는 데 소경이며, 그래서 우리 내적인 선생님이신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된다(the Word of God cannot enter into our spirit unless the Spirit of God, who is the inner master, give us access to it by his illumination). Institution of 1451, Vol.II, Paris, 1937, 13. 중요한 것은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타락성에 의해서 소멸되지 않는 한 본질상 항상 명료하다(Still it remains a fixed principle, that the word of God is not obscure, except so far as the world darkens it by its own blindness). “The word of God dis always bright, but its light is choked by the darkness of men.” 〔CC, Vol 16, ii(2권), 102-03〕. 이 말은 아주 성경을 해석하는데 또한 칼빈에 의하면 이것은 변할 수 없는 원리라고 했다. 그렇지 않다면 자연스럽고 분명한 성경의 의미는 성경의 진정한 의미가 될 수 없다. 이 말은 칼빈의 성경 해석의 원리를 깊이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명료하고 분명하다. 그래서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잘 이해못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타락했기 때문이다. 성경을 잘 이해 못하는 것은 성경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해석하는 인간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우리가 회개하고 우리가 거듭나고 성령의 인도함을 따른 경건한 생활을 하면 우리는 성경에서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의미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본다는 말은 철학적인 이론이나 논리에 의해서 추론해 낸다는 말은 아니다. 성경의 언어가 본문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를 보는 것이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보는 눈을 가지는 것은 아무나 갖는 것은 아니다. 눈이 나쁜 사람은 볼 수 없는 것이다. 영적인 사람만이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석자의 관점이 늘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1) 성경의 제자(a disciple of Scripture)가 되어야 한다. ICR, 1.6.1-2.
성경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은유적인 표현으로써 어떤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해야 하는가를 배울 수 있다. 가령 우리가 어떤 유명한 사람의 제자라고 할 때 제자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선생이 누구인가를 속속들이 알며 선생의 삶의 스타일을 배우며 또 그렇게 가르치고 사는 사람을 가리켜 제자라고 할 것이다. 제자의 특성은 선생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칼빈은 자기를 소개할 때 하나님의 말씀의 종이라고 소개했다. 때문에 그는 일생 동안 말씀을 주석하고 가르치고 선포하며 일생을 살았다.
성경에는 두 가지 하나님의 지식이 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요,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성경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하나님의 지식을 알 수 있는가? 성경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다른 말로 말하면 성경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칼빈도 하나님의 올바른 지식은 순종에서 태어난다고 했다. ICR. I.VII.2. “완벽하고 모든면에서 완전한 신앙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모든 올바른 이해는 바로 이 순종에 의해 탄생된다.” 존 칼빈, 「영한 기독교 강요」, 제 I권(성문출판사, 1993), I. 6. 2.(But not only faith, perfect and in every way complete, but all right knowledge of God is born of obedience.) 다른 말로 말하면 성경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누구든지 성경의 제자가 되지 않고서는 바르고 건전한 교리를 조금도 맛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한 이해의 시작은 하나님이 자신에 관하여 증거하기를 기뻐하셨던 바로 그것을 우리가 경외심을 가지고 받아들이는 데 있다.” 윗책, I.6.2.(Hence, there also emerges the beginning of true understanding when we reverently embrace what it pleases God there to witness of himself.)
2) 성령의 학교 (School of Holy Spirit)에서 배워야 한다.
칼빈은 성경은 성령의 학교라 했다. ICR, III.21.3. 성경은 학교이다. 그러나 이 학교는 성령님이 운영하시고 주관하시는 학교이다. 학생은 성경을 배우는 자이다. 성령님께서 우리가 성경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충만하게 배우도록 도와 주시고 인도하시고 가르쳐 주시는 선생이다. 학교를 누가 운영하느냐에 따라서 학교의 발전과 학생들의 질이 달라지는 것처럼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고 이해한 그것에 의해서 신자의 생활을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는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충만하게 역사 하시도록 해야 한다.
성경이 성령의 학교라는 말은 인문 교육이나 신학 교육이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다. 선지자와 사도를 감동시켜 성경을 기록케 하신 분이 성령님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우리는 성령님의 가르침을 받아야만 되는 것이다. 성령님의 감동을 받지 않은 성경 해석, 설교, 가르침은 생명력을 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님이 충만하게 역사하시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문자적인 의미는 성령의 학교에서 배운 사람에 의해서 선포되어지고 가르쳐지고 해석되어진다고 할 수 있다.
3) 경건한 생활
칼빈은 경건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경건의 요점이란 하나님의 심판을 기꺼이 피하고 싶은 두려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수 없으므로 이 심판 앞에서 두렵고 떠는 마음과 태도에 있다. 오히려 참 경건이란 하나님을 주님으로 존경하며 그의 의를 수용하고 죽을 지언정 그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는, 순수하고 참된 열심에 있다. 이러한 열심을 소유한 사람들은 모두 자기들의 몰염치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을 날조하려는 시도를 그만두고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구하되 하나님이 자기를 저들에게 계시하고 선포하신 대로 이해한다.”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요약 』, 이형기박사 옮김 (크리스찬다이제스트, 1990), 29.
칼빈에게 있어서 경건이란 단순히 외적인 것을 의미하기 보다는 신앙 생활 전체를 의미한다. 참 경건한 생활이란 매사에 하나님을 주님으로 존경하며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그렇게 살도록 변증하고 험증하는 자이다. 특별히 성경 해석과 연관하여 마지막 절에 있는 말씀을 우리는 깊게 새겨야 할 것이다. 성경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계시하고,” “선포 한대로” 이해한다는 말은 아주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대로 혹은 성경대로 이해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한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경건한 삶은 성경 해석이요, 성경 해석은 곧 경건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7. 성경 해석 방법
1) 역사적-문법적 성경 해석
(historical-grammatical interpretation of the Bible)
Kemper Fullerton은 그의 저서 『예언과 권위』 (Prophecy and Authority)에서 칼빈의 성경 해석 방법은 문법적, 역사적인 방법이라고 했다. 여기서 문법적이라는 말은 성경의 문법적인 구조와 언어를 중요시하며, 역사적이라는 말은 성경 콘텍스트의 역사적인 상황을 중요시하며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를 말한다. 그러면서 칼빈은 신학적인 전제와 석의적인 방법의 조화가 아니라 석의적인 방법이 신학적인 전제를 컨트롤 한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는 전제가 성경 해석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문법적 역사적인 성경 해석 방법이 주도한다는 말이다. 이 점에 있어서 성경의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루터와 다르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신학적인 전제가 성경 해석의 방법을 인도하는 원리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성경을 문법적 역사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방법을 컨트롤하는 것은 신학적인 전제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인위적으로 루터처럼 모든 성경 구절에서 예수를 찾는 것은 아니다. 환언하면 칼빈은 구약을 해석할 때 모형론적으로 해석하지만 그 가운데 있는 루터처럼 문법적 역사적인 의미를 무시하고 해석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창세기 3:15에서 여자의 씨는 루터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칼뱅은 여자의 “씨”(ערז)는 삼인칭 여성 단수이지만 집단 명사로써 직접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볼 수 없다. 칼빈에 의하면 집단적 단수 명사가 한 사람만을 가르치지 않는다. 때문에 직접 여자의 씨를 예수님이라고 말하지 아니했다. 교회사를 보면 본문은 Protoevangelium(원시복음)이라고 해석한 것이 통례이다. 칼빈은 이들의 해석에 동의하면서도 본문의 진정한 의미는 사탄과 인간 사이의 계속적인 갈등이 있을 것이며 결국은 인류가 승리할 것이라는 것을 제시한다고 했다.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로서 오심을 말한 것이지 직접 여자의 씨를 예수님과 동일시하는 것은 본문의 문맥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CC, Vol. 1, 170. 여기서 우리가 칼빈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칼빈은 얼마나 성경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그의 문법적 역사적인 방법에 투철하였으며 동시에 성경의 핵심은 그리스도라는 신학적인 전제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를 배울 수 있다. 칼빈에 의하면 루터처럼 모든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찾으려는 지나친 예수님 중심의 성경 해석은 구약의 역사적인 의미를 약화시킨다. 구약의 메시지는 구약 시대의 언약 백성에게 약속과 희망을 주며 동시에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미리서 맛을 보게 하는 것이다. CC, Vo1. 이사야 45:1 주석.
칼빈은 성경에 알레고리가 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학파처럼 역사적인 콘텍스트를 무시하지 않았으며 그 알레고리에서 문자적인 의미, 즉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고자 했다. 칼빈은 고후 3:6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라”의 주석에서 알레고리의 부당성을 말한다. 알레고리칼 성경을 해석한 자에게 의문은 성경의 문법적 문자적인 의미를 말하며 영은 알레고리칼 의미를 말했다. 따라서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는 의문과 같으며 알레고리칼 의미는 영적인 의미로 봤다. 그러나 칼빈에 의하면 본문은 오리겐과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서 본문의 의미가 왜곡되었다. 그들은 성경을 풍유적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올바르게 해석할 수 없다고 하지만 그것은 성경의 자연스러운 의미를 불순하게 하며(germanum scripturae sensum adulterandi) 알레고리칼 해석을 성경 해석의 규범으로 만들게 했다고 말한다. CC, Vol. 20,172-75. 그리고 주석 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히 입으로만 전하면 그것은 죽게 하는 것이요,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마음에 받아들이므로 전하면 생명을 준다는 말이라고 주석했다. CC, Vol.20, 175. 따라서 칼빈은 고후 3:6은 성경의 해석 방법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결과를 말하며 사도 바울이 알레고리를 해석하는 키를 제시했다고 봤다(Paul here furnishes us with a key for expounding Scripture by allegories). 여기서도 볼 수 있듯이 칼빈은 알레고리칼 해석과 알레고리를 역사적 문법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구분하고 있다. James Barr는 알레고리칼 해석은 성경의 콘텍스트를 무시하는 해석이라고 했다.( “The literal context, the cultural background and the historical setting", Journal for the Study of the Old Testament 44(1989), 14.
칼빈은 비유(알레고리)해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비유에서 예수님이 가르치고자 하는 비유의 목표(finis, scopus)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러면 비유의 의미는 분명해진다고 했다. 크리소스톰도 마태복음 20:1절 주석에서 우리는 비유에서 사소한 것에 얽매이지 말고 비유의 목표(skopon)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We should not waste labour to explain all the details in a parable but having learned the aim[or mark :Greek skopon] for which the parable was constructed, to get hold of that and not to bother oneself with anything further). 칼빈에 의하면 비유는 비교와 같은 것이다. 마태복음 13:34-35 말씀을 잘 보면 비유의 특성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시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I will open my mouth in parables, I will utter things hidden since the creation of the world). 이 말씀에 의하면 우리 주님은 창세 때부터 감추어진 것을 비유로 진술한다는 말이다. 창세 때부터 감추어진 것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우리 주님의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도래했다. 비유란 이 말씀에서 보면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는(to show) 것이다. 이것이 비유의 중요한 특성이라고 본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천국은 “이다”(the kingdom of heaven is)가 아니라 “이와 같다”(the kingdom of heaven will like〔NIV;KJV;shall be compared to(RSV)〕이다. 천국은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비유로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유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진리를 보여준다. 나는 선한 목자에서 “나”는 비유(παραβολη)이다. 여기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목축 업자는 아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는 말은 확대된 은유(extended metaphor or metaphorical saying, παροιμια)이다. 진실된 은유는 알레고리가 아니라 실제에 기초하고 있다. 비유는 첫째, 비유를 듣는 자를 도전하며 책임감을 갖게 한다. 둘째, 비유는 자기 자신을 그 비유에 의해서 들여다보도록 한 거울과 같다. 셋째, 비유는 직접적이 아니라 간접적이다. 넷째, 비유는 적대감이 있는 사람에게 간접적으로 쓰는 경우가 있다. 다섯째, 비유는 들을 귀가 있어야 한다.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도 많은 메타포를 써서 거룩한 순례자가 천성을 향하여 순례 길을 감에 있어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를 통해서 묘사한다. 꿈속의 이야기지만 깨닫는 자에게는 금과 같이 중요하다. 그러나 깨닫지 못한 자에게는 하나의 꿈 이야기가 된다. 따라서 우리 주님도 비유를 말씀하시고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했다. 들을 귀가 없을 때 우리 주님의 말씀은 번연처럼 하나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비유의 중요성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영적인 깊은 진리를 보여준다는데 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메타포를 통하여 묘사하고 있다. “나는 양의 문이다.”( I am the door of the sheep; 요10:7) “나는 선한 목자이다”( I am the good shepherd; 요10:11)에서는 천국 비유와는 다르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선한 목자인 경우는 보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천국은 잘 설명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천국 비유는 “이와 같다”라는 말을 썼고, 선한 목자의 경우는 “이다”인 것이다. 언어의 사용에 따라서 그 언어의 의미가 결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해석할 때 언어의 사용을 주의 깊게 관찰하여야 한다. 칼빈은 은유적인 표현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은유적 해석은 알레고리칼 해석이 아님을 말한다. 알레고리는 믿음의 규칙을 벗어나지 아니하는 방향에서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야 한다.
칼빈은 요한복음 1:1-5에 대한 설교에서 성경 해석에 있어서 성경의 언어가 어떻게 문장에서 사용되는가를 아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것을 모르면 성경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For it is important to know how Holy Scripture uses words. Surely we need not stop simply at words, but we cannot understand the teaching of God unless we know what procedure, style and language he uses.). John Calvin, the Deity of Christ and Other Sermons, Trans. Leory Nixon,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Michigan, 1950), 13. 여기서 성경 언어의 사용은 문맥과 문법적인 구조를 살피는 것이며 언어의 스타일이라는 말은 성경의 장르를 말하는 것으로 본다. 성경의 장르와 언어의 사용을 보는 것은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는 데 있어서 필수적이다. 현대 성경 해석학에 있어서 이러한 사항은 아주 중요하다. 칼빈이야말로 현대 성경 해석학의 선구자라고 말할 수 있다.
2) 모형론적 성경 해석(typological interpretation of the Scripture)
Gerhard von Rad는 “구약의 모형론적 해석”(Typological Interpretation of the Old Testament)에서 모형론(typology)에서 중요한 것은 반복이 아니라 상관관계(correspondence)에 있으며 이 상관관계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라 했다. 여기서 일시적이라는 말은 예언의 성취라는 점에 있어서 일시적이라는 말이다. 환언하면, 원시적인 사건은 마지막에 이루어질 사건의 모형이라는 말이다(the primal event is a type of the final event). Essay on Old Testament Hermeneutics, ed. Claus Westermann(John Knox Press,
1979), 20. 알레고리(한국인 성경은 비유로 나와 있음)는 예표된 것과 이루어질 사건 사이에 인위적인 관계를 설정하지만 모형론에 있어서는 역사적인 관계이다. Rad에 의하면 칼빈은 구약을 모형론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을 유지했다고 했다. Rad는 모형론적인 해석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한 하나님이 구약의 언약 백성들의 역사 속에 그의 발자취를 남겼다는 상관관계에 있다고 했다.. 그래서 신구약은 한 하나님의 계시로써 구약에서는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서 믿음의 조상들에게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것이다. 그래서 신구약은 하나님의 구속사이다. 따라서, 모형론적인 해석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만 가능하다고 했다.
신구약의 통일성을 이루는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는 신구약이라는 두 개의 찬양대를 통해서 이해될 수 있다고 했다. 두개(신구약)의 찬양대는 양편에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며 찬양하는 것이다. Rad에 의하면 우리 구세주 그리스도의 지식은 구약 없이는 불완전한 것이라고 했다. Essay on Old Testament Hermeneutics, 37-38. 동시에 신약 없이는 구약의 이해는 의미가 없다.
칼빈에게 있어서 모형론은 진정한 에언이다. 모형론은 구약의 예언과 신약의 성취라는 역학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구약의 제사 제도를 주석하면서 칼빈은 모든 제사 제도는 모형론적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그 의미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The whole cultus of the law, taken literally and not as shadows and figure[umbras et figuras] corresponding to the truth, will be utterly ridiculous). ICR, II.VII.1.
칼빈은 “안식일에 너희 집에서 짐을 내지 말며 아무 일이든지 하지 말아서 내가 너희 열조에게 명함 같이 안식일을 거룩히 할지어다”(렘17:22)를 해석하면서 안식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찾도록 하기 위해서 명해졌으며 사도 바울이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6-17)에서 말함과 같이 안식일이나 절기나 월삭은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types) 혹은 그림자(umbras/shadow)이며 그리스도는 모형과 그림자의 본체라고 했다. 여기서 그림자라는 말과 본체라는 말은 서로 깊은 연관을 갖고 있다. 그림자란 본체substance)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본체가 있다는 것을 시사하며 그림자는 본체가 그대로 드러나면 없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구약의 제사 제도나 예식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폐하여 진 것이다.
칼빈은 로마서 5:14절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επι τω ομοιωματι της παραβασεως Αδαμ ος εστιν τυπος του μελλοντος)는 주석에서 알레고리칼 해석을 반대하면서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했다. 어떤 점에서 모형인가? 유사성의 모형이 아니라 대조적인 모형이라고 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온 세상에 들어오고, 사망이 죄로 말미암아 들어온 것처럼,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의가 회복되고, 그리고 생명이 의로 말미암아 회복되었다.”『칼빈성경주석』, 존 칼빈 성경주석 출판위원회역편(성서교재간행사, 1990), 로마서. 빌립보서, 173. 아담 한 사람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 한 사람으로 의가 회복되고 생명이 의로 말미암아 회복되었다. 이 점에서 아담과 그리스도는 다르지만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여기서 아담이 죄의 모형이라거나 그리스도가 의의 모형이라고 하지 않은 것이다. 칼빈은 복음은 율법이 모형 아래 감추어진 것을 손을 가지고 지적해 준다고 했다(the gospel points out with finger what the law foreshadowed under the types). ICR, 2.9.3. Bates는 칼빈의 모형론적 해석은 칼빈 신학에 중요하다고 했다( Ed. Richard Gamble, Camlvin and Hermeneutics,. 146-61). 칼빈은 강요에서 강요의 목표는 성경을 올바로 읽고 공부하는데 도움을 주는 안내서라고 했다. 1560 불어 판에는 강요는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는 길을 여는 키라고 했다(a key to open a way for all children of God into a good and right understanding of Holy Scripture). 강요는 성경 주석에서 다루는 토픽을 좀더 자세하게 다루지만 주석은 그렇지 않다. 이점에서 강요는 성경 주석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칼빈에 있어서 강요와 주석의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선포하는데 있다. 칼빈은 창세기 1:16을 주석 하면서 “모세는 철학자로서 혹은 과학자로서 쓴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과 언어로 썼다”고 했다. 칼빈의 모형론적인 해석을 안디옥학파의 Theoira라고 비교한다면 칼빈의 theoira의 의미는 성령의 내적인 조명을 통해서 성경의 텍스트를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의 진정한 의미란 성령의 내적인 조명에 의한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이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가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이며 동시에 영적인 의미이다.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는 여러 의미중의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하나의 의미이다.
III. 성경 해석 원리의 적용
칼빈은 성경의 진정한 의미는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라고 했다. 따라서 그의 성경 해석 논리는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자연스럽다는 말에는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성령님의 조명과 가르침이 필수적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성경 해석이란 복잡한 이론이나 세상의 방법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귀를 가지고 성령님의 조명을 받아야 한다. 이런 마음의 자세를 가진 후에 중요한 것은 성경 언어 사용을 그대로 보는 것이다. 칼빈 자신이 팔복 설교에서 “우는(πενθεω/애통) 자는 복이 있나니 마지막에 저희는 기뻐하고 위로를 받을 것이다”의 설교에서 애통하는 자를 우는 자로 번역했다. 칼빈은 “우는자는 복 있다”는 하나님 말씀의 자연스럽고도 분명한 의미를 다음과 같이 강해했다.
그런데 사실상 울려는 사람들은 많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눈물이 야수의 표호와 같거나 또는 황소가 울부짖을 때 두들겨 맞는 암소가 비명을 내지를 때, 등과 같은 여러 종류의 눈물이라면, 이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참다운 눈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불신자의 눈물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줄 뿐입니다. 그들은 실컷 울고는 ‘오호라!’하고 끝없이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 때문입니까? 내가 언급했던 바와 같이 그들은 표호할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눈물 흘리는 법을 배웁시다. 우리의 눈물이 상달되어야 할 곳이 바로 거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다윗이 말한 말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주여 당신은 당신의 병에다 나의 눈물을 담으셨나이다!’ 우리가 고귀한 향수 또는 대가를 치뤄 얻은 한방울과 같은 눈물을 흘릴 때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간직해 두신다고 다윗은 말하고 있습니다. 눈물은 땅에 떨어지거나 아니면 우리가 손으로 닦아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울 때 그것은 분명히 한방울도 상실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하나님은 전부다 조심스럽게 간직하실 것입니다.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 이 말씀은 우리에게 같은 위로를 받도록 인도하고 있습니다. 박건택 편저, 「칼빈과 설교」( 도서출판 나비, 1988), 204-5.
이 얼마나 감동적이고 단순한 설교인가? 성경의 자연스러운 의미를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성경의 문자적 해석이란 성령의 내적조명을 통해서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가르쳐 준 자연스럽고도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해석과 연결시켜 말한다면 성경의 언어의 사용을 봄으로써 하나님께서 성령의 내적 조명 혹은 가르침을 통해서 해석자에게 가르쳐 준 자연스럽고도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칼빈의 강해설교에서 살펴봤듯이 성경의 의미는 단순하고 분명하다. 따라서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란 성경 말씀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 들이는 것이다. 그 말씀을 오늘의 상황에 적용하는 것이 해석인 것이다. 해석이 없는 설교, 강의는 감동력이 없는 것이다.
요약하면 칼빈에게 있어서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는 성경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래서 성경의 핵심 메시지는 구속의 메시지이다. 구약과 신약은 구속사의 정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통일성을 갖는다. 이런 점에서 보면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란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구속사적인 맥락에서 성경의 언어의 사용을 보는 것이다.
Ⅳ. 정리
칼빈의 성경 해석 논리는 그가 세상 학문을 통해서 새롭게 발견한 이론이 아니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성경해석의 논리는 믿음의 선배들에 의해서 제시된 것이며, 그 나름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 시대에 맞게 올바로 이해하고 그대로 살기 위해서 몸부림쳤던 것을 읽을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성경을 풍유적으로, 안디옥학파는 모형론적으로 해석했다. 풍유적인 해석은 성경 언어 이면에 숨은 진정한 의미를 찾아내고자 했으며, 모형론적인 해석은 성경의 역사적 문법적인 의미를 찾고자 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칼빈의 성경 해석 논리는 안디옥학파의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
칼빈은 어느 한 사람에게만 배운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버리지 않고 배웠다. 그 일례가 프랑스 인문주의자들에게서 배운 것이다. 그는 모든 학문은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도록 도움을 주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했다. 가려서 좋은 것은 자기 것으로 소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성경 해석 논리는 그의 성경관에 기초하고 있다고 본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선지자와 사도를 성령님의 감동을 통하여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쉽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 인간의 언어로 기록케 하신 것이다. 이것은 연약하고 제한성을 가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이며 은혜이다. 성경이 성령님의 감동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성령님의 조명을 통해서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한대로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와 감동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그 의미는 단순하고 명료하다. 따라서 성경 해석 원리는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가르쳐 준 의미는 자연스럽고 분명하며 이 의미가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이며 동시에 영적인 의미이다.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는 여러 의미중의 하나가 아니고 유일한 하나의 의미이다. 여기서 한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는 하나지만 그 의미를 현 시점에 적용할 때 문자적인 의미(meaning)의 유 의미성(significance)은 상황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사실을 염두해두는 것은 중요하다. 칼빈은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를 찾기 위해서 역사적 문법적인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한다. 환언하면 성령의 조명을 통하여 성경의 언어의 사용을 보는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진정한 성경의 의미는 자연스럽고 분명하다. 이것이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이다. 성경의 문자적인 이해는 성경 언어의 이면에 있는 신비스러운 의미를 찾는데 있지 않고 성경을 전체로서 이해하려는 방법이다. Hans W. Frei, The Eclips of Biblical Narrative: A Study in Enghteenth and Nineteenth Century Hermeneutics(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74), pp. 18-19(“The literal or grammatical meaning, primary for Luther and Calvin, was for both men usually identical with the text's subject matter, i.e., its historical reference, its doctrinal content, and its meaningfulness as life description and prescription.”). 다시 말하면,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며, 신구약 성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성경의 핵심 메시지는 구속의 메시지이며, 성말씀과 성령님의 역사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성경의 진정한 이해는 성령님의 조명이 절대적이라는 사실에 기초를 두고 성경 언어의 사용을 보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성령님의 역사는 기계적이 아니라 해석자의 신앙과 학문을 쓰신다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깊은 이해가 있는 것이다. 칼빈은 구약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모형론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모형론은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언약의 구약의 약속과 신약의 성취라는 상관관계에 기초해 있다.
칼빈의 성경해석 논리는 오늘처럼 혼탁하고 자유주의 신학과 해석학이 인간 이해에 중점을 두고 성경을 해석하고자 하는 시대에 칼빈의 해석 논리는 성경을 계시한대로 보게 하는 성경에서 도출한 성경 해석 방법이요 나아가서 이렇게 성경을 해석하고 그렇게 살 때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우리에게 풍요로운 삶을 살게 하며 성경은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라는 장로교회의 대원칙을 새롭게 조명하며, 오늘날 우리 목회자들이 성경의 제자가 되고 성령의 학교에서 배워서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는 삶 속에서 보여주어야 할 목회자의 갱신이요 성경 해석 논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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