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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18,185편 ◑/곽선희목사 1,910편

은혜로 주어진 선물(에베소서 2:1-10)

by 【고동엽】 2023.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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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 주어진 선물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에베소서 2:1-10)


요즘 제일로 인기가 있는 이름이 삼순이와 삼식이라고 합니다.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바탕으로 그린 그림입니다. 누가 그러더라구요. 그렇게 이름이 괜찮은지는 몰랐는데 자꾸만 들으니 이름이 산뜻합디다. 아니 사실이 거 이름이 촌스럽기는 합니다. 메스메디아의 위력이 참으로 대단합니다. 저는 그래 요즘에 우울합니다. 교회의 영향력이나 목사들의 영향력이 거기에 미치지 못하니 말입니다.
요즘에 또 인기 방영물이 있습니다. 불멸의 이순신이라는 대하드라마입니다. 일본의 수군에 연전연승의 비밀을 말을 합니다. 우리는 이순신장군이 명량해전에서 겨우 열두척의 군함으로 333척의 왜선단을 물리친 장면은 최악의 상황에서 거둔 극적인 승리입니다. 이순신은 언제나 우세한 전력을 유지하면서 적을 기습하는 전략을 가지고 승리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내용을 자세하게 들여다 보면 승리를 하는 이순신과 원균의 차이는 얼마나 자기를 잘 아는 가 그것이 관건입니다. 원균은 자기를 과대평가를 합니다. 그런데 이순신은 우군의 모든 것을 제대로 파악을 합니다. 그래서 기초를 먼저 다집니다. 그런 연후에 배를 타게 합니다.
사람의 일생에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온갖 사건들이 전개됩니다. 근본적으로 생각해보면 사람마다의 그 일생은 별로 차이가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서로 크게 차이가 있는 것처럼, 아주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재산이 남보다 좀더 있다고 해서 행복하고 없다고 해서 불행하고, 혹은 지위가 높다고 해서 남달리 성공했다고, 지위가 낮다고 해서 실패했다고 생각합니다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특별히 행복에 관한 한 그렇습니다.
행복의 질량은 같습니다. 유복한 집에 태어나서 남이 보기에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도 알고 보면 평생 죽기로 고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많은 고생을 하면서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객관적으로 볼 때에 남이 측은하게 여기는 대상이 될 만큼 여러 모로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그렇게 생각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남달리 행복해하고, 성공감을 만끽하면서 생을 살아갑니다. 확실히 행복이란 소유의 많고 적음으로 따질 수 없습니다. 행복의 질량은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같은 것입니다.
행불행은 그의 세계관에 달려 있습니다.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 어떻게 생각하고 사느냐 하는 가치관, 세계관, 목적--여기에 행과 불행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계관은 크게 셋으로 나누어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요행과 운명을 믿는, 운명중심적인 세계관이 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특별히 농경시대에 그러했고, 봉건시대에도 그러했고, 피압박 민족이었던 시절에는 더욱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라는. 수고를 하려고 해도 비빌 언덕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어떤 기댈 구석이라도 있고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흔히들 성실하라, 부지런 하라고 하지만 그것도 직업이 있고야 부지런함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직장도 없는데 부지런하면 무엇합니까?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너무나 적습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는 큰 힘 앞에 우리의 무력함을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여나 잘되지 않을까 하는 요행만을 바랍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운명으로 돌립니다. 이렇게 모든 것에 기회만 바라고, 요행만 바라고, 사행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 마치 화툿장을 쥐고 있는 도박꾼처럼 삶을 운명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코메디 프로에서 본 겁니다. 깡통을 들고 다니면서 하루하루 구걸로 먹고사는 거지가 있었습니다. 그래도 행여나 내게도 좋은 날이 있을까 하여 복권을 하나 샀습니다. 그런데 복권을 주머니에 넣자니 옷은 갈가리 찢어진 넝마요, 집에 두자니 누워 잘 데도 없는 터이라 달리 둘 곳이 마땅치 않습니다. 그래서 복권을 척하니 깡통에 붙여서 달랑달랑 들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복권이 1등에 당첨된 것입니다. 거지는 너무너무 좋아서 어깨춤이 절로 나왔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강가에 나가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제 나도 깡통 신세 다 면했다." 그리고는 그 깡통을 강물에 획 내던져버렸습니다. 그 순간 깡통에 복권을 붙였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칩니다. 복권이고 당첨이고 간에 다 사라진 것입니다. 거지는 바닥에 침을 한번 찍 뱉고는 털래털래 다시 구걸하러 가면서 이렇게 투덜거립니다. "거지 팔자 어디 가겠어?" 이렇게 운명에 맡기고 사는 사람은 영원히 소망이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신학적으로 말하면 '율법주의'라고 하는 세계관이 있습니다. 이런 세계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을 율법주의자라고 합니다. 모든 것은 보상이요, 보수요, 노력의 댓가로 얻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모든 일은 노력대로 된다, 수고한대로 된다, 심은 대로 거둔다, 수고하라, 노력하라'라고들 합니다. 실제로 피나는 노력을 합니다. 아주 합리적이요 지성적이요 당연한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기에는 기쁨이 없고, 행복이 없습니다. 또한 자기가 조금 무엇을 이루었다고, 무엇이 되었다고 해서 교만하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합니다. 그렇게 안 될 때에는 절망합니다.
연구 조사를 전문으로 하는 어떤 리서치 센터(research- center)에서 '세계에서 스스로 제일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은 어느 나라 사람들이냐?'라는 주제를 가지고 연구해보았다고 합니다. 그 결과는 뜻밖에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방글라데시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세계에서 스스로 제일 불행하다고 느끼며 사는 사람들은 일본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보세요. 행복이란 GNP와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평균적으로 일본사람들은 유럽사람들에 비해서 한 달을 더 일한답니다. 일 년 중 노동시간이 한 달 더 많다는 것입니다. 출퇴근하는 시간도 그렇습니다. 유럽은 집에서부터 직장까지 평균 삼십 분 안팎인 것에 비해서 일본은 평균 한 시간 삼십 분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루 세 시간을 길에서 보내는 셈입니다. 그뿐인 줄 아십니까? 그들이 생활 속에서 얼마나 긴장감을 느끼며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세계에서는 일본이 경제적으로 선진국이라고 부러워하지만,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 속에 기쁨이 없습니다. 그래서 절망하고 자살하는 등 갖은 문제로 인해 심각한 것입니다. 자, 이것을 우리가 무슨 말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고로 노력의 댓가, 곧 노력해서 산다는 것만이 옳은 얘기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사람되게 만들지 못할 뿐더러 행복하게 만들지도 못합니다.
세 번째는 은혜를 알고, 모든 것을 은혜로 생각하는, 은혜중심적 세계관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애써 수고를 합니다. 그러나 그 자체도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선재적(先在的) 은혜를 믿습니다. 모든 것에 우선하여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은혜가 먼저요, 은혜 안에 내가 있다는 것입니다. 새가 높고 힘차게 하늘을 날아갑니다. 그러나 새가 날기 위해서는 먼저 공기가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배가 물위에서 힘차게 물살을 가르며 나아갑니다. 이것 역시 추진력이 강한 엔진과 또 이것을 운전해 나가는 능숙한 선장과 기관장이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배를 떠받쳐주는 물의 힘입니다. 이것을 부력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아무 일도 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수영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수영이라는 것은 부력에 대한 인간의 활동입니다. 그냥 무의식적으로 부력에 자신을 맡겨버리면 필경 빠져 죽을 것입니다. 수영은 부력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활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부력을 믿고 수용하면서 부력을 따라 자기의 활동을 능동적으로 전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영입니다. 그런고로 은혜가 먼저 있습니다.
모든 것보다 은혜가 먼저 있고, 은혜 안에 내 수고도 있습니다. 내 땀흘림도 거기에 있고, 내 모든 노력도 거기에서 비롯됩니다. 또한 은혜 안에서 결실을 하는 것입니다. 농부를 보십시오. 수고하고 땀을 흘려 결실을 맺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고, 은혜 안에서 수고했기에 은혜 안에서 결실을 맺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중심의 세계관입니다. 여러분, 먼저 은혜가 있습니다. 은혜로 살고, 은혜 안에 내가 존재합니다. 은혜가 은혜되기 위해서는 내가 은혜됨을 믿어야 합니다. 은혜는 믿음이라는 그릇에 담겨 있습니다. 믿음이 있고야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 15:10)"그는 많은 수고를 했습니다. 희생도 했습니다. 땀도 흘렸습니다. 평생 교회를 세우고 봉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나됨은 하나님의 은혜다'라고.
오늘의 본문은 가장 큰 은혜, 근본적인 은혜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옛날을 돌이켜보니 우리가 모두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3절)……" 여러분, 때때로 우리를 슬프게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요즈음은 새로이 참여정부시대를 맞이해서 사회 구석구석에서 개혁바람이 일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바로 잡으려고 하는 이 때에, 너무너무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법정에는 재판장이 있고, 피고가 있고, 검사가 있고, 변호사가 있고, 원고가 있습니다. 한 사람은 재판을 하는 사람이요 한 사람은 죄인입니다. 또 한 사람은 정죄하는 사람이요 한 사람은 변호하는 사람입니다. 원래는 이런 질서로 재판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뚜껑을 열고 보니 실상은 그놈이 그놈이요, 누가 누구를 재판했는지 모르겠더라는 말입니다. 도대체 누가 죄인이고 누가 벌 받을 사람입니까? 지도자와 백성 모두가, 위에서 아래까지 전부가 다 이 모양이니, 누가 누구를 벌하고 누구를 자른다는 것입니까? 모두를 다 잘라야 될 판국인데 이를 어떡하면 좋습니까? 또 고치려들면 몽땅 다 고쳐야 되겠으니,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써야 한다는 얘기입니까? 하나도 믿을 것이 못됩니다. 생각해보세요. 이러니까 우리의 마음이 아픈 것 아닙니까? 그래서 좀 덮어두려 해도 그렇게 하면 과거를 남겨두게 되는 셈이니, 그것이 될 말입니까? 어디 이래 가지고야 장차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답답한 현실입니다.
다시 한번 원점으로 돌아가 봅시다. 성경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혹 길을 가다가 만취되어 헤매거나 쓰러져 있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그를 볼 때에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그를 비난하겠습니까, 그를 저주하겠습니까? 생각해보세요. 그와 나와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여러분,「주홍글씨」라는 소설을 아십니까? 간음한 사람이라는 표시로 'A'라는 주홍글씨를 가슴에 단 이 여자를 재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를 그렇게 만든 사람이 바로 그 재판장이었습니다. 누가 누구를 재판할 것입니까? 본질상 다 진노의 자녀입니다.
혹 알코올중독자라든가 아편쟁이라든가 그밖에 여러 가지 불량한 사람을 본 일이 있습니까? 다시 한번 제자리에 서서 생각해보세요. 나와 그와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다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은혜가 있을 뿐입니다. 오직 은혜로 내가 있을 뿐이요, 사람마다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시시의 성자 프란체스코가 한창 그 명성을 떨칠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그 제자 한사람이 환상 중에 하늘나라에 가보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아주 화려하고 높은 보좌가 하나 있었는데, 가만히 보아하니 '성 프란체스코의 의 자'라고 새겨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보좌 옆에 서 있던 천사는 친히 "모든 사람 중에 가장 겸손한 자, 성 프란체스코가 이 보좌에 앉을 것이다"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이 말을 듣자 제자는, 성 프란체스코가 아무리 자기의 스승이라지만 공연스레 마음속에 질투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환상에서 깨어난 후, 제자는 보다 더 유심히 자기 스승을 요모조모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제자는 시험삼아 스승에게 이런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프란체스코는 선뜻 대답합니다. "나는 이 세상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제자는 '옳지, 이 때가 바로 기회다'라고 생각하고는 기회를 놓칠세라 반문을 합니다. "그것은 위선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세상도 다 알아주는 성자이십니다. 선생님이 살인을 했습니까, 간음을 했습니까? 얼마나 거룩하고 깨끗하게 살아가십니까? 여기 세상에는 살인자며 강도며 수많은 죄인들이 득시글거리는데, 어떻게 선생님에서 가장 악한 사람이라는 것입니까? 그것이 말이나 됩니까? 그것은 위선입니다." 그러자 프란체스코는 온유하게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건 자네가 나를 몰라서 그래. 나는 그 죄인들보다 더 나쁜 사람이야.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도 베풀어졌다면, 그 사람들은 분명히 나보다 훨씬 더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야." 이 때에야 비로소 제자는 눈물로 회개하면서 프란체스코 앞에 무릎을 꿇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은혜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나의 나됨은 '나는 본질상 이런 사람이다,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악한 사람이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고로 할말이 없는 것입니다. 나의 나됨은 오직 은혜에 있습니다. 은혜를 은혜로 알게 될 때에만 은혜가 은혜 됩니다. 은혜를 은혜로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 은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은혜 속에 살고 은혜 속에 죽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믿음으로라야 비로소 은혜를 은혜로 수용하게 되고 깨닫게 됩니다. 믿음으로만 겸손케 되고, 자기됨을 알게 되고, 은혜를 받아들이게 되고, 은혜의 그 깊고 넓은 뜻을 알게 됩니다.
브라질에 '아마존'이라고 하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강이 있습니다. 그 강 하구가 어찌나 넓은지 간혹 바다에서 항해하던 배가 가까이 지나갈 때면 어디까지가 바다이고 어디까지가 강인지 알 수 없을 때가 많다고 합니다. 이 아마존강에 얽힌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배가 바다에서 항해하다가 그만 물이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아마존강에 와서 식수를 얻어가려고 그 방향으로 키를 돌렸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가도가도 어디까지가 바다이고 어디까지가 강인지 도통 모르겠더랍니다. 그렇게 한참을 헤매다가 마침 옆을 지나가는 배를 발견하고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보세요, 우리가 물을 얻기 위하여 아마존강으로 가고 있는데, 얼마나 더 가야 아마존강에 도착합니까?" 그랬더니 그쪽 뱃사람이 대답하기를 "이봐요, 당신은 벌써 아마존강에 떠 있습니다"라고 하더랍니다.
이미 우리는 은혜 가운데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누리고 있는 은혜의 은혜됨을 모르기에 여전히 불행하고, 낙심하고,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믿어지지 않으면 제아무리 어떻게 해보려 해도 도리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은 자기 마음대로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어떤 분들은 이런 말을 하더군요. 어디서 무슨 상처를 입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무 것도 못 믿겠다. 세상도, 부모도, 자식도 다 못 믿겠다. 나 자신도 못 믿겠다"라고 탄식합니다. 이런 사람은 믿음을 버린 사람입니다.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자상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8절을 눈여겨보세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아주 귀한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그 큰 구원의 사건, 구원의 역사--그것이 은혜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어서 그 사건이 나에게 관계되고, 내게서 현실화하고, 내게 생명이 되는 것, 또한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도 은혜입니다. 아무리 많이 듣고, 아무리 많은 시간을 배웠어도 믿어지지 않는데는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믿어지는 그 순간부터 은혜의 현실성이 이루어집니다. 은사라고 하는 것은 은혜의 가시적 효과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모든 세계의 사건 하나하나에서 많은 은사를 경험합니다. 은사는 가시적 은혜입니다. 구체적 은혜입니다. 그런고로 믿음 또한 은혜입니다. 믿어지는 것, 깨달아지는 것, 감격하는 것, 이 자체가 은혜라는 말입니다.
선물이란 원래 거저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물이라는 것은 그 속에 깊은 사랑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선물을 물질로만 받으면 뇌물입니다. 문제는 그 선물에 담겨 있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받아들이게 될 때, 사랑을 깨닫고 수용하게 될 때에야 비로소 선물이 선물되는 것입니다. 냉수 한 그릇이라도 좋습니다. 그 속에 마음을 담는 자세가, 그리고 그 마음을 받는 자세가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선물성'이라는 것입니다. 주는 자도 감사하고 기쁜 마음으로 주고, 받는 자도 감격한 마음으로 받을 때에만 선물이 선물될 수 있습니다. 선물의 의미를 모르면 그것은 뇌물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선물을 받을 때에는 겸손하게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뜻을 모르고, 그 사랑을 수용하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사랑은 본래 어떤 보수나 보상이나 댓가가 아닙니다. 갚을 수 없는 은혜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언제나 우리는 무조건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바닥으로 기어야 합니다. 낮은 포복이 우리를 살리는 겁니다. 전쟁에서 살아나는 길은 언제나 낮은 포복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경험을 해야 합니다. 언제나 낮은 자리로 겸손을 가지고 내려 가는 겁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는 크고 작은 지류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다가 모든 시내의 왕이 된 이유를 압니까? 간단합니다. 위치가 제일로 낮아서 그럽니다. 모든 물은 제일로 낮은 곳으로 흘러갑니다. 그러니까 제일 큰 바다는 제일로 낮은 곳에 위치를 합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계 제 1의 강철왕이라 불리는 카네기는 스코틀랜드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벌인 사업이 너무나 어려워져서 급기야 파산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곤궁에 처한 카네기는 하던 일을 다 정리하고 어머니를 비롯한 온 식구들과 같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갈 여비가 없었습니다. 남은 돈을 긁어모아보았지만 역시나 부족하였습니다. 그런데 카네기의 어머니 친구 되는 핸더슨 부인이 선뜻 이십 파운드를 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언제 돌려받는다는 보장도 없이 멀리 낯선 땅으로 이민 가는 사람들을 믿고 빌려준 것입니다. 카네기 가족은 너무너무 고마워하고 감격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빌려간 돈은 다음에 꼭 갚겠습니다"하고 거듭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미국으로 떠나간 카네기 가족은 도착하자마자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 많은 고생을 참아가며 닥치는 대로 돈을 벌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꼭 하루에 오십 센트씩은 핸더슨 부인의 돈을 갚기 위하여 저축했습니다. 따로이 양말 속에 한 푼 두 푼 모아두었습니다. 어느덧 어렵게 모아둔 그 돈이 이십 파운드와 맞먹는 이백 불이 되었습니다. 이제 드디어 빛을 갚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카네기 가족은 이백 불을 송금수표로 바꾸고 나서 그 날 성대하게 축제를 벌였습니다. "이제 빚을 갚고 자유하게 되었다!"라고 서로 축하해주며 기뻐했습니다. 축제장에서 카네기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빚은 갚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은 은혜는 영원히 갚지 못합니다.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지 마십시오. 갚을 수 없는 것이 은혜입니다. 빚은 갚을 수 있으나 은혜는 갚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은혜에 대하여 평생 고마운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은혜를 보상으로 알고, 은혜를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있습니다. 빌린 돈은 갚을 수 있지만 그가 나에게 준 사랑은 결코 갚을 수 없습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은혜입니다. 믿음도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입니다.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음악가 하이든은 주옥과도 같은 귀한 성가를 많이 작곡했습니다. 어느 날인가 제자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그렇게 귀한 곡들을 작곡하실 수 있으셨습니까?" 하이든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네.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를 주셨기 때문이지. 귀한 곡을 작곡할 수 있도록 만드신 것이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하이든은 「천지창조」라고 하는 유명한 오라토리오를 작곡했습니다. 이것을 처음으로 청중들 앞에서 연주하게 되었을 때에, 그는 여느 때보다도 오랜 시간 심혈을 기울여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연주회를 바로 앞두고 하이든은 그만 병이 들고 말았습니다.
지휘를 못할 만큼 거동하기가 힘들었습니다.「천지창조」는 다른 지휘자에 의해서 초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이든은 그저 연주회장 한쪽에 쭈그리고 앉아서 지켜볼 따름이었습니다. 오케스트라의 그 장엄한 연주와 선율에 너무나도 감격한 청중들은 곡이 끝난 후 일제히 기립하여 박수를 쳤습니다. 이 때에 지휘자는 청중들을 진정시키면서 "다 앉으십시오. 이 귀한 곡을 작곡하신 분은 바로 하이든 선생님이십니다. 그분께서 지금 저기에 앉아계십니다"하고 하이든을 가리켰습니다. 청중들은 하이든을 향하여 다시 열렬한 갈채를 보내며 존경을 표했습니다. 그러자 하이든은 공손하게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여러분.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이 곡을 작곡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신 것일 뿐입니다. 우리 모두 그분께 영광을 돌립시다." 사람들은 더욱 감격했습니다.
여러분, 변변치도 않은 일을 가지고 스스로 자기 공로로 돌리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칭찬을 받으면서 이것이 자기 것인 양 착각하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많은 존경을 받으면서 짐짓 침묵하는 것 때문에 문제입니다.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그때에 비로소 은혜가 은혜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어디까지가 하나님의 은혜이고, 어디까지가 내 노력인 것입니까? 몇 퍼센트가 하나님의 은혜이고, 몇 퍼센트가 내 은혜입니까? 건방진 사람들은 99퍼센트가 내 노력이고 1퍼센트만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100퍼센트가 다 은혜요, 내가 수고한 그것도 은혜요, 내가 믿은 그것도 은혜요, 내게 주신 감격, 깨달음 그것도 전부 은혜입니다. 이것을 알 때에 비로소 은혜가 은혜될 수 있습니다. 은혜의 새로운 윤리가 전개될 수 있습니다. 은혜로 살고, 은혜를 전하고, 은혜를 증거하고, 은혜로 사람을 만나는 새 윤리가 전개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 오직 선물----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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