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할더스보스(Geerhardus Vos)
‘이 이름은 오늘날 과거 어느때보다도 잘 알려져 있는 것같다. 그러나 그는 워필드와 그레샴 메첸, 그리고 코넬리어스 반틸등 프린스톤 신학교의 다른 동료 교수들과 비교할 때에 여러 가지 점에서 그들보다 덜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나 사실상 보스는 방대한 지식과 통찰력을 지닌 신학적 사상가였다. 아마도 프린스턴 교수들 가운데서 가장 탁월한 인물로서 심지어 그의 동료요 달밤에 함께 산책을 다닌 친구였던 워필드보다도 뛰어난 신학자 중의 신학자였다.
보스는 1862년 네덜란드 프리슬란드의 헤벨렌에서 출생하여 1881년 그의 부친이 미시간주 그랜드 래피즈의 개혁교회의 청빙을 수락하자 부친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왔다. 집중적인 신학훈련을 받고 거기서 탁월한 성적을 받은 다음, 그는 암스테르담의 자유 대학교의 구약신학교수로 초빙되었다.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의 권유가 있었으나 그는 그 청을 거절하고 그 대신 그가 속한 교단의 신학교에서 봉사하다가 1893년 그 당시 프린스톤 신학교에 새로 생긴 성경 신학 담당 교수직을 수락하였다. 그는 1932년 은퇴할 때까지 거기서 봉직하였다.
그는 개혁주의 성경신학의 아버지로 불리운다..’ (각주1)
각주1) 게할더스보스, 하나님나라와 교회 은혜와 영광, 원광연 옮김 크리스찬다이제스트 p103 소개글 중
게할더스보스의 저서소개
1, Biblical Theoloy old and new Testaments
By Geerhardus Vos
THE BANNER OF TRUTH TRUST
Pennsylvania 17013, U.S.A
게할더스 보스, 성경신학, 이승구 역 CLC
2, THE SELF-DISCLOSURE Of JESUS(The Modern Debate About The Messianic Consciousness) By Geerhardus Vos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1978
게할더스 보스, 예수의 자기계시, 이승구 옮김 엠마오
3, The Pauline Eschatology
By Geerhardus Vos
게할더스 보스, 바울의 종말론, 이승구 오광만 옮김 엠마오
4, 게할더스 보스, 히브리서의 교훈, 김성수 옮김 엠마오
5, THE TEACHING OF JESUS CONCERNING THE KINGDOM OF GOD
AND THE CHURCH GRACE AND GLORY by GEERHARDUS VOS
게할더스 보스, 하나님나라와 교회 / 은혜와 영광, 원광연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6, 게할더스 보스, 하나님의 나라, 정정숙옮김 한국개혁주의 신행협회편
7. REDEMPTIVE HISTORY AND BIBLICAL INTERPRETATION
The Shorter Writings of Geerhardus Vos
Richard B. Gaffin, Jr., Editor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Phillipsburg, New Jersey 08865
게할더스 보스, 구속사와 성경해석 이길호 원광연 역 크리스찬다이제스트
8. Geerhardus vos, The Mosaic Origin of the Pentateuchal Codes (1886)
게할더스 보스의 이 책은 19세기의 문학비평에 대한 견해를 여지없이 비평한 책으로서 개혁주의 성경신학의 아버지로 알려지는 보스의 정수가 될 것으로 봅니다.
주 안에서 보스의 신학을 추천합니다.
롤란드 해리슨(Roland K. Harrison)은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문학 비평이 맹렬한 기세로 19세기 후반의 구약 학계를 점령하기는 했지만 이러한 공격에 대한 도전이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게할더스보스(Geerhardus vos)가 문학 분석의 기본적인 토대를 여지없이 공격했다. 그리고 비평학에서 주장했던 제사장 문서의 연대를 받아들이기 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경의실질적인모세 저작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각주1)
각주1) 롤란드 해리슨 구약서론 류호준 박철현 옮김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49p
게할더스보스의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실제의식
게할더스보스가 주장하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실제의식에 대한 설명과 그 의의해설
1. 게할더스보스, 성경신학, 이승구 기독교문서선교회 pp. 145~151
'구속에서 보이는 이 주권과 관련된 모세 시대의 특정한 하나님의이름은 여호와이다. 이 발음은 이 단어의 자음들에 '아도나이'(Adonai) 의 모음을 붙여서 얻어진 것이다. 이러한 모음 부가는 원래 이 가장 거룩한 이름을 도대체 발음 하는 것조차 신중하게 꺼렸던 유대인들의 습관에서 기인한다. 그 단어를 발음하는 대신 언제나 아도나이를 썼으므로 편의를 위해서 모음이 부기될 때에 아도나이에 있는 모음을 붙였던 것이다.
중략
그러나 다른 한 요소, 즉 신실성의 요소가 처음부터 똑같이 강조되어 있다. "너희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출 3:15),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출 6:5-6,8). 모세에 대한 자신의 주권을 보이신 출애굽기 33:19도 여호와라는 이름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후기 성경 가운데는 특히 둘째 요소, 즉 신실성의 요소가 여호와라는 이름과 연관되어 있다(신 7:9; 사 26:4; 호 2:20; 말 3:6).
해설: 게할더스 보스는 본 언급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그 이름 '여호와'에게서 찾을 수 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즉 자존의 절대자이심에 대한 것을 하나님의 이름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의 주권적 정당함을 말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게 된다
일반적으로 신학자들의 하나님의 이름을 말함에 있어서는 거의 그 이름의 특성에서 읽을 수 있는 정도의 유익성을 말하고 있고 그 가능성에서 비로소 말하고 있지만, G 보스는 그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존자의 자기 절대 자존적 정당함을 스스로 취하시는 분으로서의 주권을 말함으로써, '상식보편'에 따른 임의적 주권이라고 하는 개념에서 납득되어질 수 있는 것으로서의 개념과는 달리, 분명한 주권의식을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에서 비롯된 실제의 개념으로 말하고 있다.
2. 게할더스보스, 성경신학, 이승구 기독교문서선교회 p. 148 중..
'..이 모든 파생 설명은 완전히 추측들일 뿐이다. 구약성경의 용법 배후에 어떤 원인인가 숨어 있다 할지라도 이스라엘 종교에서 권위적인 것은 출애굽기 3장의 계시를 통해 고정된 의미이며 우리는 이것만을 다루려고 한다. .. 이 신비의 해답은 그 문장 전체에서 찾아야 한다. '
해설: 같은 본문 중에서 언급인데, G. 보스는 히브리 본문에 대한 해석에 대한 견해와 가능성에 대한 또는 방법에 대한 것을 언급하고 난 다음에 언급한 내용이 바로 '이 모든 파생 설명은 완전히 추측들일 뿐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해석 가능성이라고 하는 것과 그것에 따른 여러 정황적 당위성을 학자들이 상대적으로 옹호하고 있지만, 그 해석적 당위성은 자존의 절대자의 계시로서 이름적 계시로써의 스스로 해석적 정당함을 취한다는 것을 비로소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능한 해석들은 나름대로의 타당성이 있으나 용납당위성은 사람들이 비로소 임의적으로 강조하는 가운데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것과 달리 출 3:14절에 있는 여호와에 대한 해석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라는 해석은, 그 해석의 용납당위성이라는 존재를 스스로 취하는 스스로의 정당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비교할 때에 다른 해석적 타당성들은 임의적으로 강조할 수 있다는 측면만 고려되어졌기 때문에 G. 보스는 억측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3. 게할더스보스, 성경신학, 이승구 기독교문서선교회 p. 150 중
'..문맥에서의 강조가 은혜스러우시겠는 약속을 시행하셔서 은혜스러우시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 있다기 보다도, 자신의 은혜로우심을 보이심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주권성에 대한 강조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을 취하고 보면 여호와란 이름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백성에게 행하시는 모든 일에 있어서 외부에서 어떤 영향도 받으심이 없이 스스로 결정하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중약
그러나 다른 한 요소, 즉 신실성의 요소가 처음부터 똑같이 강조되어 있다. “너희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출 3:15)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출6:5-6,8). 모세에 대한 자신의 주권을 보이신 출애굽기 33:19절도 여호와라는 이름과 연관되어있다(신 7:9; 사 26:4; 호 2:20; 말 3:6)'
해설: 여호와에 대한 해석과 그것을 증거하는 것이 모세의 사역의 중심이었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행하라고 하신 것이 예수님의 가르쳐주신 주기도임을 기억할 때(마6:9)에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심을 받도록 하는 것 그 이름을 반포하는 것(반포라는 개념이 증거라는 뜻을 가지고 있음)일 때 그러한 하나님의 이름이 반포되어지는 것에 나타나는 주의 주권적 자존적 의지의 뜻하심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주목하는 것이 그 이름을 선포하는 것에 앞서는 주의 뜻을 해아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읽게 되는 것은 출애굽기 33:19절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구절보다도 먼저 주목하여야 하는 당위성이 이미 부여되어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출 33:19)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를 우리 앞에 반포하게 하심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은혜의 수여자로서의 주권적 뜻하심의 실제의식을 가진 가운데서 그 은혜의 긍휼의 사실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주권적 뜻하심의 실제의식이라는 개념은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에 따른 은혜와 긍휼 그리고 일반사실규정이라는 해석적 사실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존의 절대성의 재가와 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절대 보편성이 부여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현실적인 상대적 무한보편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면서도 상대적인 진리의 사실규정과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4. 게할더스 보스 구속사와 성경해석, 이길호 원광연 크리스찬다이제스트 p. 356
..이사야의 환상 사건 속에서 적어도 셋 번은 그는 이 사상을 충만하게 전달한다. 여호와의 임재는 성전을 충만케 하였고, 온 땅은 그의 영광을 가득찼으며, 성전에는 연기로 가득찼다. 3절의 단어들은 더욱 많은 암시를 준다. 만약 우리가 원어에 더욱 가깝게 표현한다면, “세상에 충만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 분이다.”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는 선지자는 여기에서 신앙적 의미에서 실제적 실현을 발견한다.
해설: 게할더스 보스의 이사야 사상은 마태복음 6장에 주께서 말씀하신 주기도에 대한 내용중 하나님의 뜻하심이 하늘에서 이루신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종의 모습을 보게 한다. 이것은 구교의 입장과 같은 어떤 은혜의 주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성의 계시로써의 영광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재가를 받는 가운데서 실존적 정당함과 그 만물의 미학적 사실과 그 실존을 주목하게 된다는 것이다. 보스가 언급하는 '신앙적 의미에서 실제적 실현을 발견한다'는 그 표현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는 것의 실제성을 이사야가 말하고 있음을 읽고 있는 것이다.
5. 게할더스 보스, '구속사와 성경해석', 이길호 원광연 크리스찬다이제스트, -제8장 이사야 초기 예언의 교리상 특징들 p. 357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을 통한 여호와의 자기계시에 대한 깊은 신앙적 관심의 결과로서 이사야의 개인적 삶은 매우 깊은 단계에까지 그의 공적 소명에 복종하게 되었다. 여호와의 개념이 그의 예언을 지배하기 때문에, 그의 예언이 그의 삶을 지배한다. 우리가 예레미야에서 본 것과 같이 객관적인 메시지와 그 메시지를 지니는 사람의 주관적인 감정 사이의 비극적인 갈등 때문에, 여기에서 있을 곳이 없다. 그 이유는 이사야의 예언이 덜 경고적이거나 혹독하지 아니해서가 아니라, 그의 관심이 다른 종류의 호의적 반응에 대한 여유가 거의 없이, 그의 환상 앞에서 지나가는 신적인 요소에 매우 집중하였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이사야보다 더욱 헌신의 제단에 삶을 바친 기록은 없다: 그러나 그 헌신은 모두 여호와께 바친 헌신이었다. 이사야 6장에서, “나를 보내소서”의 부르짖음은 하나님의 영광의 환상에 사로잡혀 부르짖는 외침이었다. 계시가 뒤따랐을 때에 후퇴는 없었고, 감당하여야 할 사역은 단련과 심판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떨리는 질문인, “주여 어느 때까지?”는 선지자의 애국적인 본능이 주장하는 유일한 형태이다. 그 이후에는 모든 것이 체념된 상태이다.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엄숙한 선포를 방해하는 어떠한 슬픈 말도 허락되지 아니한다. 하나님 중심과 하나님께 붙잡힌 양심에서, 순수한 인간적이며 한 민족적인 기준에서 판단되는 논점은 2차적인 문제이다. 이사야 6장의 정확도에 대한 심리적 비판은 주로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일반적인 선지자의 마음과 특별히 이사야의 마음은 일방적으로 예언의 윤리적 사명을 더욱 강조하는 현대 이론보다 더욱 기본적이며, 더욱 근본적으로 신앙적 힘에 의하여 지배되었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더욱 깊은 동기들의 영향을 허용하도록 강요한다면, 이러한 것들이 의로운 설교자로서 명백히 실패하는 관점에서 선지자를 지지하기에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을 연역적으로 주장할 권리를 갖지 못한다.'
해설:G.vos가 이사야를 해석함에 있어서 '여호와의 개념이 그의 예언을 지배하기 때문에, 그의 예언이 그의 삶을 지배한다'와'하나님 중심과 하나님께 붙잡힌 양심에서'의 언급에서 주목하는 것과 같이 여호와의 개념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성경신학에서의 언급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이름 특히 자존의 절대자로서 자기 절대 정당함을 가지고 선택하신 상대적 표현이라고 하는 것에서 그 사실성의 진리성을 말하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중심이라고 하는 것은, 임의적인 상식적인 개념에서의 동의적 차원에서의 겨우 우선적 개념으로 규정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존의 하나님이심에 대한 그 정당함에서 상대적인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면서도 절대적으로 선하신 분으로서의 합당한 절대의 권위를 인정하는 그리고 순종함을 말하는 개념임을 기억하여야 함이 마땅하다.
6. 게할더스보스의 증거.. 셈의 하나님
해설: 셈의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측면에서 사실규정을 하는 증인들에게 그들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으로써 오늘날 성도들의 모습이 그러하다는 것을 읽게 되는 것이며 언약을 이루심에 대한 전반적인 말씀을 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으로써의 보스의 글에 대한 설명이다.
신명(神名)에 대하여 - 자존의 하나님 야훼 하나님에 대한 성경해석
하나님의 이름(神名)에 대한 해석과 이해에 대하여
상당히 중요한 것을 어떤 분님이 언급하셔서 한번더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것으로 본다. 그것은 말씀중에 '흠...그러니깐 가장 중요한 것은 창조주 야웨하나님이 정말로 존재하시느냐의 문제이지요. 그 사실을 믿느냐 믿지 아니하느냐의 문제이지요. 그 분이 존재하심이 확실,100%확실하다면 게임은 끝나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한다. 그런데 이러한 언급함에 있어서 그 미묘한 차이라고 함을 나눔이 필요할 것같다는 중심에서 재고하고자 한다.
야웨하나님 자존의 하나님이 정말로 존재하느냐는 질문에 대하여서 그냥 믿는다는 개념에서 일관하며 합리성 자체가 전혀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견해를 달리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핑계치 못할 복음이라고 하심을 기억할 때에 합리성으로 합당하게 말할 수 있음의 당위성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이 자기계시와 그에 따른 합리적 사상적 입장이 절묘하게 합당하게 나타나는 구성을 나타내고 있다. 즉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계시와 이성적 판단의 선별되어진 좀더 정확히 특별영감되어진 이성적 산물로써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그 합리성에서도 핑계할 수 없는 합당한 합리성이 있음과 그것의 합당함과 선함도 같이 기억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물론 단순한 중세적 개념에서의 병행적 개념으로 언급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호와 또는 야웨하나님의 실재론적 기반에서 하나님 자신의 계시의 정당함을 읽어내고 있는 학자는 게할더스보스(Geerhardus Vos) 이다.(각주1) 그는 성경신학에서 출 3:14절을 읽는 방법의 여러가지가 있음을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그러한 가운데서 스스로 존재하신다는 그 히브리어 문구는 히브리어 '독도'법에 따라서 달리 해석할 수 있음을 시시하며 여러 해석방법이 있는 가운데 자존의 하나님에 대한 해석적 입장을 따르고 있다.
여기서 하나 더 생각하게 된 것은 여러가지 해석이라고 함 즉 독도법에 따른 해석이 있다고 하여도 그중에서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해석은 다른 해석과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만약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해석하는 방법은 그 해석에 대한 당위성을 스스로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해석들은 상대적 해석으로 동의적 차원을 말할 수 있는 경우라고 한다면 말이다(각주2).
이것이 과연 성경해석에서 마땅하게 취할 해석적 당위성을 의식하며 합당하게 선택한다고 할 때에는 자존의 하나님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체적 해석과 용납의 당위성을 자체적으로 가진다는 점에서 상대적인 여지라는 개념의 불확실성을 넘어 용납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즉 상식적으로도 어느것이 옳은 해석인가 하는 것에 대한 당위성을 생각할 때에는 자존의 하나님으로 해석함이, 해석적 당위성을 스스로 취하고 있는 점에서, 그 해석을 취함에 있어서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언급한 것과 같이 출 3:14절에 나타나는 신명(神名)은 해석하기 나름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기반을 말하는 것은 개연적인 사실을 말할뿐이라는 식의 언급은 기각되어진 것임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신명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비평학의 기본이며 또한 현대신학에서의 불가지론을 넘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음을 기억할 때에, 진정으로 정신을 차린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신명의 해석에서 하나님의 자존적 자기계시의 정당한 사실을 실제적으로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핑계치 못한다는 주의 말씀하심의 증거적인 것임을 밝히 말하고자 한다.
야웨하나님이 정말로 존재하시느냐는 이성적으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하여서 바른 해석을 하지 못하고 불가지론 속에서 개연적 당위성만 따르고 있는가운데서의 책망이 되어질 것이다.
결론적으로..
여호와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은 정말로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점을, 해석과 그 취사선택에 있어서도 그차제적 정당함을 취하는 해석을 선택함에 있어서, 건전한 정신이 있는 사람은 핑계치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증명이라고 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변론의 산물이 아니라 당연히 받아들임의 문제이고 그것이 너무나 합당함에 대한 변론일뿐이기 때문이다. 성부 하나님이신 자존의 하나님 야웨하나님,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합당히 영광을 받으실 믿음의 주이심을 성령께서 거룩하게 믿게 하심을 증거한다.
성경의 자증과 보편성(출 3:14 해석과 성경의 보편성이해글)
그리고 참고로 속칭 '여호와증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면서도 예수님을 부인하기 때문에 이단이다
각주1) 게할더스보스, 성경신학, 이승구 기독교문서선교회 pp. 145~151, 게할더스 보스, 구속사와 성경해석, 이길호 원광연 크리스찬다이제스트 356p. 게할더스 보스, '구속사와 성경해석', 이길호 원광연 크리스찬다이제스트, -제8장 이사야 초기 예언의 교리상 특징들 357p.
구체적 본문보기 (게할더스보스가 주장하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실제의식에 대한 설명과 그 의의해설)
각주2) 기억해야 할 것은 성경해석의 당위성이 자증에 따른 것임을 기억할 때에, 앞서 말한 어떤 특정 견해가 합리적인 측면의 백과사전적 동의적 당위성을 아무리 갖춘다고 하여도, 자증에 따른 해석 이것이 그 합리성의 자체적 정당함을 스스로 취함을 인하여 성경적이라고 하는 것은 기정사실인 것이다.
한가지 더 언급하면, 그 '스스로 존재하신다는 해석' 그 해석의 해석적 정당함을 스스로 취하는 실존적 그 성격으로 인해서, 다른 어떤 비판적 입장이라고 하는 합리적인 견해들도 전자의 해석과는 달리, 스스로 그 정당함을 주장할 수 없는 해석과 납득 당위성에 따라서 전자의 해석에 대한 비판적 사실로서의 증거를 말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즉 여기서 자존의 하나님으로 해석함의 인식이 상대적 고립적 배타성의 판단을 받지 않으면서도 메타적 성도의 인식의 정당함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원적 분석에서 히브리어 자음과 모음이 같이 쓰여지지 않던 시대와 맛소라 학파의 노력에 따라 '야훼'라는 성경전승에 따른 언어의 변천과 임의성을 가진 것이라고 말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상대적인 납득 당위성만을 가질 뿐 진정한 비판으로서의 정당함과 그것을 납득해야 할 당위성을 그 해석 자체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사람들의 인식적 동의라는 개념의 당위성을 비로소 따를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정당함이 상대적일 뿐이다. 절대의 재가를 받은 상대적인 측면을 상대적인 어원분석 주관적 어원분석이라는 개념으로 판단한다면 그 성격의 특성과 그에 따른 범주에 대하여서 전혀 재고가 없는 것으로 그 비판은 성립이 되지 않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존의 하나님께서 자기의 자존의 절대 정당함으로 나타나는 신실하심을 상대적으로도 온전히 나타내신다고 함의 정당함을 스스로 취함을 말할 수 있는데, 그 임의적으로 보이는 것을 통해서도 절대적 합당함을 부여하실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함이 정당한 인식으로 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말씀 스스로 자기 계시형식으로서 선택하신 것임을 또한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상대적 비판이라고 하는 것이 이와 같은 판단의 범주를 넘어설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정당성이 합리성 그 자체에서 본래성을 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며, 자존의 하나님으로 해석하는 출애굽기 3:14절 해석이라는 합리성 자체도 모순이라고 지적할 수 있지만 이미 그 모순이라고 까지 할 수 있는 판단까지도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정당함은 합리성 그 자체적 실존에 본래적으로 두지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비합리성을 구별하여서 합리성의 실존을 부여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의 메타인식이라고 하는 합리적으로 핑계할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해둔다.
도움말
도움말1 믿음이라고 함을 좀 제한애서 용납한다는 말로 받을 수 있다면, 용납할 수 있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은 이미 성립되어지지 않는다. 다만 개연적인 것이기 때문에 증명에서 파생되는 용납당위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은 증명이라는 개념으로 정의되어지지 않는다고 본다. [14:39]
도움말2 믿음은 본질적으로 증명의 사실과의 파생적 관계는 아니지만 그러면서도 변증하게 되어지는 것은 사실에 대한 증거자체를 변증하는 것이 아니라, 아니라고 함에 대한 부질없는 것에 대한 변명의 형태를 띤 증거로서의 사실이라는 형태를 취하게 된다고 하겠다. [14:44]
도움말3 자존의 하나님으로 출애굽기 본문의 신명(神名)을 이해하는 것이 그 해석적 자체적 정당함을 가지고 있도록 하심에서 자존의 하나님을 의지한 핑계할 수 없는 복음의 사실을 말한다는 것이 이 글의 핵심이다. [15:04]
도움말4 성경에서 셈의 장막에 야벳족속이 거한다는 말씀은 이처럼 이름을 기반으로 한 실제론적 입장의 사상적 방향성을 읽을 수 있는 예언의 말씀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신앙과 신학방향의 한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14:51]
도움말5 기독교의 하나님이 자존의 하나님이심에 따른 것은,니체의 메타인식의 증식과는 달리, 성도들의 메타인식의 사실이라는 표현을 사용할수 있다. 즉 비판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합당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자존의 절대자가 자신의 절대 정당함을 스스로 취하여서 상대적인 것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신다는 것은 비판의 영역의 실제적 판단을 받지 않는 가운데서의 상대적 신앙의 사실을 말함과 그것의 정당함과 절대의 보편성을 재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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