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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게할더스 보스의 "랍오니여"

by 【고동엽】 2014. 10. 14.

프란시스쉐퍼의 전기집과 전집을 읽으면서 많은 은혜를 받고 계속적으로 읽고 묵상해야함을 늘 느끼며

특별히 쉐퍼가 존경하는 게할더스 보스의 글을 읽다 그가 신학교에서 설교했던 설교문 중에

"랍오니여"라는 글을 읽고 큰 은혜를 받아 타이핑를 치게되었습니다. 함께 나누고자 주저함 없이 올립니다.

 

 

은혜의 영광 제4장 "랍오니여!"

요한복음20: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오늘 본문은 새 언약의 첫 안식일 아침에 다시 사신 주님의 무덤으로 우리를 데리고 갑니다. 이 부활 직후의 현장보다도 빛과 기쁨으로 찬란한 현장은 아마 상상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바로 전의 순간들로 다시 돌아가서 생각할 때에 우리의 육안으로는 죽음의 흑암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제 장차 일어날 것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일에 대한 우리의 예상이 초자연적인 광채가 가득한 황혼으로 장면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무덤 그 자체가 우리에게는 승리의 예언이 되었습니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와서 돌을 굴려 버리고 우리에게, "주께서 과연 다시 사셨도다!"라고 선언하게 될 천사들의 날개짓 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이 외에도, 우리는 우리 주님의 생애와 죽음의 이야기를 읽으으로써 결국 그의 죽음이 부활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이미 배워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일어난 그 사건의 깜짝 놀랄 만한 성격에 대해서 우리의 감각이 무뎌져버린 감이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을 속죄의 십자가를 통해서 해석하며, 그래서 당시의 제자들이 그 일을 그렇게 해석할 만한 준비가 거의 되어 있지 못했다는 것을 쉽게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편에서 바로 이 날 아침 그들의 마음의 상태가 과연 어떠했는가를 동정심을 가지고 이해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제자들에게 생겨난 그 신선한 놀라움과 반가움이 일부나마 우리에게도 들어와서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우게 하려면, 그들의 사고와 느낌 속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설명을 할 수 있든지 할 수 없든지 간에, 복음서는 말씀하기를, 주님께서 그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강하게 예언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주께서 죽음을 당하시자 그들은 그 말씀들을 거의 잊어버리고 그저 하염 없는 슬픔속에 잠겨서 그 말씀들을 통해서 실질적으로 위로를 받거나 지지를 받지를 못했다고 합니다. 물론 이렇게 된 부분적인 이유는 우리 주께서 그저 예언만 하셨고 그 엄청난 사건들에 대해서 충분히 설명을 하지 않으신데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여하튼 이 당시의 주변 상황을 보며, 삶과 죽음의 무서운 현실들이 우리를 공격할 때에는 진리에 대한 외형적인 진술들을 그저 머리로만 맏아들이고 거기에 동의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깊은 신앙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그 희미하게 기억나는 그 약속보다도 더한 것을 바라볼 수 있어서 우리의 소망을 조롱하는 그 모든 상황들에 대항할 수 있었다면, 우리는 그런 시험에서 우리가 더 강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들어갈 때에는 우리에게는 그저 우리의 마음을 기댈 약속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그 약속의 성취가, 부활의 사실이 있으며, 다시 사신 주님 자신이 지팡이와 막대기를 들고서 우리 곁에 계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기사에 다른 복음서의 기록을 보충시키면, 우리는 오늘의 본문이 전하는 그 이전의 사건들의 과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됩니다. 몇몇 여인들이 이른 새벽 예수님을 존귀케 하기 위한 마지막 헌물로 향품을 준비해가지고 동산으로 나아갔습니다. 이들 가운데 막달라 마리아가 그곳에까지 가려는 열심이 가득차서 앞장서서 달려갔고, 그리하여 돌이 굴려진 것을 맨 처음 목격했습니다. 다른 여인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그녀는 급히 베드로와 요한에게 가서 되어진 일을 이야기했습니다."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알지 못하겠다" 슬픔에 가득차서 무기력한 상태에 있던 사도들은 이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를 전해듣고서 곧장 그리로 달려가서 마리아의 이야기가 사실임을 확인했습니다. 요한이 먼저 갔으나 그는 그저 무덤 안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 뒤에 온 베드로는 무덤 속으로 들어가서 세마포 수의가 놓여 있는 것과 주님의 머리를 쌋던 수건이 접혀져서 따로 놓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에 요한도 들어가서 그것을 보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들은 성경에 주님이 반드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가르쳤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눈이 직접 그 광경을 보았으나 그들로서는 아직 그것을 올바로 해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혼란스러웠으나 아직 절망적인 마음의 상태는 그대로인 채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마리아도 사도들의 뒤를 따라서 그리로 가서 직접 상황을 다시 보고갖 한것이 분명합니다.우리는 마리아가 무덤 바깥에서 울며 서 있는 것을 봅니다. 요한과 베드로가 떠난 다음에도 마리아는 계속 남아 있었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마리아도 똑 같이 절망적인 결론으로 인해서 오히려 그녀가 그곳으로 온 그 목적이 천 배나 더 강화되었던 것입니다. 용서받은 것이 많은 자에게 풍성한 사랑이 있다는 주님의 말슴이 이를 얼마나 놀랍게 보여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말고 다른 무엇이 나타나고 있다고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을 향한 마리아의 태도는, 다른 제자들의 태도보다도 더 단순한 의존감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언제나 그분을 필요로 하는 의식입니다. 여기서 마리아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면을 보인 것은 사랑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도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동기들과 뒤섞일 새가 없이 예수님을 죄와 죽음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피난처로 인식하는 그런 마음이 마리아를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어느 정도는 예수님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생각들이 그 이외에도 많았지만, 마리아가 주님을 만났던 그 상황이 그녀의 심령의 구원의 믿음을 순수하고도 단순하게 만들어준 것입니다. 애정이나 슬픔으로는 할 수 없을 만큼 주님께로 가까이 가고 자 하는 열망이 이런 근본적인 영적인 자극을 통해서 생겨나서 마리아는 생기를 얻게 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녀로서는 주님의 텅 빈 무덤 가까이에서 우는 것 밖에 달리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주님을 찾는 일을 계속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갈보리가 주님이 죽었음을 헛되이 선포하며, 무덤이 그가 장사지낸 바 되었음을 헛되이 증거하며, 사라진 돌이 사람들이 주님을 취하여 갔다는 것을 헛되이 보여주었습니다. 마리아로서는 이 세 가지 증거만으로는 주님이 그녀의 삶에서 영원히 떠나셨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것은 결코 잠잠하지 않고, 주님을 다시 맞을 것이라고 계속해서 증거하는 훨씬 더 강한 증거가 마리아의 존재의 깊은 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과연 마리아의 구주이십니다. 그리스도와의 접촉과 교제야말로 마리아의 영적 삶의 숨결과도 같은것이 되었습니다. 그런 일이 불가능하게 되어버린 상황이 발생해서 그것을 인정한다 해도 구원 그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런 열망의  절대적인 성격과 잠시 동안이나마 그 열망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여 행한 외적인 공허한 표현은 서로 측은하게도 서로 모순된 것이 사실입니다.

 

  결국 마리아가 한 일은 생명이 없는 시체를 찾아서 그것을 보살피며 그것에 가까이 있다고 느낌으로써 살아 있는 믿음에 대한 갈망을 잠재우기를 구한 것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녀가 구하던 것을 얻었다고 가정한다 해도, 그 다음 순간 죽은 예수가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능력을 훨씬 초월하는 그보다 더 깊은 갈망이 일어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외적인 표현이 아무리 모순되는 것이라 하더라도,그것은 외형적인 모습으로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는 하나의 본능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주된 필요에서 나오는 것이요, 만일 구원이 과연 존재한다면 그것을 채워줄 것이 반드시 있습니다.

 

  비록 아직 부활을 하나의 사실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마리아는 부활이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되어 있는 그 지고한 원리를 꼭 붙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죄인과 구주 사이에 친밀한 믿음의 결속 관계가 주어지게 되면, 그런 관계에 있어서는 죽음이란 있을 수가 업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처럼 예수님을 단순하게 의지함으로써 그에게서 생명을, 그것도 전보다 더욱 풍성하게 찾는 그런 위치로 올라갔습니다. 마리아의 믿음에는 예수님은 그가 무덤에서 나오기 훨씬 전부터 죽음을 이기신 정복자이셨습니다. 그녀는 그 영적인 면, 예수님 자신의 살리시는 역사를 완전히 믿었으며, 그러므로 부활은 확실히 일어나고야 말 결과였습니다. 이 위대한 사실을 향하여 누구나가 가져야 할 자세의 결정적인 면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모두 우연적인 것들을 제거하고 궁극적인 것을 묻는다면, 바로 다음과 같은 질문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무엇을 위하여 우리가 그를 필요로 합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죄많은 죄인들로서 모든 소망도 생명도 없는 그런 상태에 있는 자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그리고 주님에세거 용서와 평강과 힘이 나온다는 것을 우리가 경험했다면, 예수께서 삼일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든지 살아나지 못하셨든지 전혀 상관이 없다는 어떤 이들의 말을 들을 때에 그것은 조롱처럼 들리지 않겠습니까?

 

  사실들을 문제삼는 것은 구원 얻는 믿음의 본질에 속한 것입니다. 하늘이 열린 것을 보여주는 사실들, 죄된 본성의 물결이 역전되었고, 죄가 속해졌으며, 죽음의 다스림이 파괴되었고 생명과 불멸이 빛을 보게 되었다는 사실, 이것들이야말로 믿음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도무지 억제할 수 없는 믿음의 외침이기 때문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텅 비게 만드는 의심과 불신앙을 보게 될 때에, 바깥에 서서 울면서 다음과 같이 울부짖는 것 이외에 달리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원칙적으로 마리아의 마음 속에 있었지만, 그녀는 그 순간 그것들 속에 소망의 보증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슬픔이 너무나도 깊어서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녀 주위에 있던 부활의 객관적인 증거도 그녀를 보지 못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녀는 그녀를 돕기 위하여 주어진 것을 오히려 불신앙의 근거로 바꾸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누구길래 그녀를 책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 자신들도 역시 우리의 믿음의 양식으로 주어진 그런 좋은 상황들을 가지고 오히려 불신앙을 키워가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습니까? 우리는 모두 우리의 소망의 무덤 바깥에 서서 울면서 그 때에 우리에게 뻗쳐지는 손길을 깨닫지 못하고, 더 높은 기쁨으로 이해하여야 할 상황이 주어지는데도 그것을 오히려 슬픔으로 해석할 경우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마리아의 경험에서 더 잘 행하기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생각도 없이 그냥 울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신뢰하고 슬픔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그 특질들을 살피고 도움과 소망거리를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과연 우리의 아버지이실진대, 그런 소망과 도우거리가 반드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시험을 당할 때에 우리가 바깥에서 울고 있는 한 우리에게 아무런 위로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용기를 내서 의도적으로 우리의 시선을 그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 우리의 굳어진 모습에 고정시키고,우리의 어려움의 깊고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반드시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그 곳에 계시며, 거기서 다시 나오시고, 그 곳을 변화시키시고 그의 부활의 은혜를 통해서 그 곳을 생명의 집으로 변화시키며, 그 곳을 하늘의 문으로 만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에게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마리아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잊어버리고 마냥 서서 울 수가 없었습니다.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요20:11-12).무기력한 상태에서 마음을 바로 잡아서 올바른 방향으로 한 걸음 나아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진술에거 가장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것으로서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것은, 천사들이 나타난 사실을 보고서도 마리아는 이 천상의 사자들이 무엇 때문에 나타났는지를 물어볼 만큼 이들에게 감동을 받지 못했다는 점을 이 진술이 암시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마리아가 그런 초자연적인 존재들과 직접적으로 대면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 장소는 천사들이 우리의 감관의 세계 속으로 들어올 때에 가지고 오는 신비와 경이의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런 동요를 보이지 않았고 아무런 신비감도 갖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텅 빈 무덤의 표적을 보지 못하고 지나친 것보다도 더한 몽매함이 이 때에 그녀를 감싸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체가 놓였던 그 자리에 두 천사가 임재하여 조용히 위엄스럽게 서 있다는 사실보다도 부활의 진실성을 더 확실하게 보여주는 증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속죄소 위의 그룹들처럼 이들은 주께서 누우셨던 그 곳을 감싸고 있었고, 그 곳을 하늘의 영광으로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사망이 삼키운 바 되어서 승리를 얻었다는 것을 구태여 그들의 음성으로 선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천사들이 무덤 속으로 내려온 다음부터 장례의 상징이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바로 이 순간부터 신자들의 시체들이 누워 있는 무덤은 모두가 그리스도의 그 위대한 추수가 이루어지는 밭의 한 고랑입니다. 바로 거기서 하늘의 빛이 그 고랑 속의 씨앗들 속에 비추어졌으며, 그리스도 자신이 바로 거기서 다시 살아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천사들을 무시한 사실에서 좋은 면이 아주 놀랍게 드러나기도 한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즉, 마리아는 오직 주님을 찾고자 하는 한 가지 생각으로 일관했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오직 주미을 찾으려고 무덤 속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천사의 영광이 그곳을 가득 채우고 있었지만 주님이 거기 계시지 않으므로, 마리아에게는 그 속이 텅빈 것으로 보였습니다. 아마도 천사들이 한 목소리로 마리아에게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라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말없이 돌아섰을 것입니다. 이 말은 동정심의 한 표현으로서 죄인들이 회개할 때에 기뻐하는 그런 천상의 존재들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질문 속에는 마리아가 울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의아해하는 표정이 담겨 있습니다.

 

  천사들의 입장에서는 부활이 너무도 분명하며 당연한 일이었으므로 마리아가 기뻐하지 않고 울고 있다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세계에서 즐겁게 부르는 기쁨의 노래 소리와 이 어두움과 절망의 세계에서 나오는 울음 소리 사이에 큰 모순이 있음을 느꼈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만일 무덤 속에 주께서 계셨더라면 눈물을 흘려야 마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이 함께 어울려 "오 생명의 왕, 주께서 영광 중에 다시 사셨도다"라고 선포하고 있는 이런 때에는 눈물이 있어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마리아가 천사들에게 한 대답은 그들의 동정심이나 그들의 놀라운 모습이 그녀의 슬픔을 속으로 찌르지 못했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는 마리아가 텅 빈 무덤을 발견하고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가서 한 말과 거의 똑같은 말입니다. 그러나 약간 다른 점이 나타나기는 합니다. 사도들에게는 "주를",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라고 했는데, 천사들에게는 "내 주를",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얼마나 강렬하게 자신의 개인의 주로 여기고 있는지를 다시 한번 볼 수 있습니다. 천사들로서도 그런 일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그들의 왕으로 높였겠지만, 마리아에게 있어서 주님은 그보다 훨씬 더한 존재였습니다. 그녀의 주요 구주였으며, 그녀가 죄 가운데 있을 때에 그를 찾아서 구원하시고 소유하신 그런 분이었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천사들에게 이런 대답을 하고나서 뒤로 물러서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분이 예수이신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붙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사는 마리아가 행한 일이 아니라 예수께서 행하신 일에 있습니다. 그는 마리아가 오는 것을 보셨었고, 다시 그녀가 울고 있는 것과 구푸려 무덤 속을 바라보는 것도 보셨고, 천사들에게 대답하는 말도 다 들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외형적인 행동만을 보신 것이 아니라 마리아의 쓰라린 마음의 내면적인 갈등까지도 보셨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임재가 반드시 필요한 바로 그 시점에 정화하게 마리아 앞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해줄 다른 모든 증거들이 그녀에게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마리아에게 생명과 소망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실 준비를 하고서 대기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우리에게 한없는 위로가 생겨납니다. 우리의 의식적인 믿음과 우리의 구원에 대한 감정이 아무리 희미하다 할지라도 주님의 편에서 나오는 은혜의 샘은 절대로 끊어지지 않으며, 그 은혜의 샘이 절대로 방해를 받지 않고 우리 심령과 그대로 연결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임재에 대한 피할 수 없는 요구가 있는 한, 그는 자신을 부인하지 않으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맨처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신 사람은 슬피 우는 여인이었습니다. 천사들 이외에 어느 누구도 아직 그의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 때는 과연 혼돈과 어둠 속에서 빛이 터져나오던 첫 창조의 때만큼이나 엄숙하고 위엄스러웠습니다. 하늘과 땅이 이 사건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온 시대의 전환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저 객관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새로 탄생한 우주의 중심 인물이심을 느끼셨으며, 그는 인간 본성이 전에는 새로 알지 못했던 그런 새로운 능력과 재능을 소유한 영원한 생명 속으로 지금 막 들어가신 분으로서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맛보셨습니다. 그런 주님께서 전혀 새로운 상태로 들어가신 그 첫 시간을 아버지와 함께 보내시기 위하여 조용한 곳을 찾으셨다면, 그것이 부자연스런 일이었겠습니까? 그런 주님의 마음에 과연 마리아의 상한 마음을 위로해주는 그 비천한 사역에 대해 생각이 자리잡을 여지가 있겠습니까? 주님은 스스로 이 질문에 대답하십니다. 주님의 승리를 찬양하는 다른 모든 음성들이 있었지만 동산에서 슬피 우는 마리아의 음성만큼 주님에게 호소하는 것은 없었던 것입니다.

 

  다시 사신 주님께서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신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녀가 주님을 가장 먼저 필요로 했었고, 주님을 가장 필요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일 말고 주님의 영광의 사역을 시작하는 첫번째 일로서 더 적절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께서 영광을 얻으신 상태에서도 계속해서 우리를 향하여 동일한 부드러운 연민을 가지시며, 주께서 육체에 계실 때에 보여주셨던 것과 동일한 사랑을 베풀어주신다는 사실보다도 우리에게 더 큰 확신을 주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이 점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를 알지 못하면 주님의 위엄에 가득한 모습에 대하여 무서운 인상을 받아서 주님께로 나아가지 못하게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마치 밧모섬의 요한을 사로잡았던 것과 같은 두려움에 압도되어, 주께서 우리에게 손을 얹으시고 "두려워 말라"라고 말씀하시기까지 기도를 하지 못하는 그런 일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우리 중에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때부터 하늘로 올라가실 때까지 사십일 동안의 간격을 가지시고 그 기간을 하나의 전환기로 삼으셔서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두려워 떠는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도우신 그 은혜에 대해서 정말 감사해야 합니다. 주께서는 어쩌면 그와 똑같은 이유로 부활의 생명을 입으신 바로 그 때에 의도적으로 마리아와 그렇게 만나셨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다른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이 사건은 그 당시의 상황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상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주님이 그 영광의 보좌에서 시행하신 그의 제사장적인 역사하심을 우리 눈 앞에 드러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단 주께서 마리아에게 자신을 보여주셨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가 어떻게 자신을 보여주셨느냐 하는 것이 우리의 주목을 끌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처음 주님을 바라볼 때에 그가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말씀을 하신 다으에도 그녀가 그가 동산지기인줄 알았습니다. 마리아가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주요 원인은 아마도 썩어질 것이 썩지 않을 것을 입으셨을 때에 주님께 변화가 일어난 데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마리아가 주님에 대해 갖고 있던 과거의 이미지와 이제 부활하신 주님이 취하시고 마리아 앞에서 걸으시고 그녀의 영혼과 대화를 나누시는 그 새로운 이미지 사이의 깨어진 결속을 아주 멋진 방법으로 회복시켜주십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라는 이 첫 말씀조차도, 물론 그 말 자체는 천사들의 질문과 거의 다를 바 없지만, 마리아의 마음에 다가가는 능력에 있어서 천사들의 말과는 비교가 되질 않았습니다. 주님은 마리아를 향하여 "여자여"라고 부르시는데, 우리는 이 한 마디 말 속에서 스스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능력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여기시는 그 분의 모든 위엄을 다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바로 그 뒤에 이어질 훨씬 더 위엄이 넘치는 "나를 만지지 말라"라는 말씀의 전주곡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라는 말씀을 통해서 주님은 미라아에게 그 마음 속 깊은 연민을 전하고 계십니다. 그녀의 슬픔의 비밀을 단번에 읽고 이해하는 그런 깊은 마음을 전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슬픔이 아버지나 어머지보다도 더한 분이 떠나가셨다는데 기인한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이런 주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얼마나 즉각적인 효과가 일어나는지를 보십시오! 마리아는 아직 그 분을 동산지기로 생각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가 주님의 시체를 악의를 가지고 취하여 갔을 수는 없으므로 다시 돌려달라고 하면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개가 가져 가리이다."

 

  주님의 연민의 표현에 대해 어떤 반응이 마리아에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이름을 이야기하지 않고 세 번이나 그저 "그분"이라고만 말씀합니다. 그 이름을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관계가 재개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이제 마리아에게 가장 친밀한 방식으로 자신의 정체를 알려두십니다. "예수께서 '미라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하니."바로 한 순간에, 한 마디 말로 이 모든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 마리아의 세계는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계시지 않기 때문에 생겨난 그 비통한 절망의 상태가 그 순간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에 일어나는 충만한 기쁨으로 변화된 것입니

다.

 

  "마리아야"와 "랍오니여"라는 이 두 마디 말의 의미는 아무리 정확하게 해석한다 해도 완전히 전달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오로지 느끼기밖에는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우리에게 그 비슷한 말씀으로 말씀하시고 우리에게서 그 비슷한 응답의 외침을 이끌어내신 그런 경험이 우리에게 있어서 그런 경험을 분명하게 떠올리는 그만큼 우리도 그것을 느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일어나는 놀라운 효과의 상당 부분은 그것을 말씀하시는 어조때문에 생긴 것이 분명합니다. 그 말씀의 어조로 인하여 마리아는 과거 친밀한 교제를 나눌 당시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주님만이 사용하실 수 있는 음성이요, 그녀에게서 귀신들을 명하게 나가게 하신 그 음성이요, 그 이후에 그녀에게 가르침과 위로를 주시던 그 음성이었습니다. 이 음성을 사용하심으로써 주님은 그의 몸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든지 간에 주님과 마리아 사이의 친밀하고도 각별한 교제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사실을 그녀에게 확신시켜 주신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 사실을 재빨리 간파했던 것입니다.

 

  복음서 기자는 마리아가 했던 말을 아람어 형태로 그대로 보존해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선생님"이라든가 "주인"등의 통상적인 번역어를 통하여 전달할 수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한 뜻이 있다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랍오니"라는 번역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아주 특별한 의미가 았습니다. 그것은 "마리아야"라는 개인적인 친밀한 언어에 대한 개인적이고도 친밀한 응답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개인적인 이름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마리아는 그렇게 말함으로써 주님이 "랍오니"로서 지닌 모든 의미를 다 소유한 그런 상태 속에 의식적으로 다시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오직 한 가지를 아직 배우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이 너무나도 기쁘고 거룩한 이 독특한 순간에 그것을 가르치시기를 뜻하지 않으셨습니다. 커다란 슬픔 속에 있던 마리아가 갑자기 감정이 급변하여 주님을 붙잡는 것으로 그 감정을 표현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심으로써 그녀를 막으셨습니다: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언뜻 보면, 이 말씀은 바로 직전의 말씀과 상대히 대조를 이루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유일한 목적이 또는 주요 목적이 미라아와 주님 자신 사이의 교제에 제한이 있다는 것을 마리아에게 알려주는 것이었다는 식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크나큰 잘못입니다. 주님의 의도는 오히려 진정한 생명의 교제를 위한 열망이 이제 곧 지상적인 친밀함의 조건에서 행해질 수 있는 것보다도 전혀 새롭고도 훨씬 고위한 방식으로 충족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나를 만지지 말라"고 한 것은 만지는 행위처럼 가까운 접촉은 이제부터 허용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가장 높은 이상적인 만짐의 행위를 위한 모든 여건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깆지 못하였노라". 주님의 말씀은 마리아가 원했던 그 특권 자체를 부인한 것이 아니라, 마리아가 열렬히 원했던 그런 형식과 그 순간적인 면에 대해서만 그 특권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더 큰 의미에서 그 특권들은 장차 마리아가 누릴 놀라운 특권에 대한 보증인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한 가지 위대한 사건의 그 첫 단계인데, 그 위대한 사건이 아직 성립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주님이 아버지께로 올라가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이 성취되면, 모든 제약 조건들이 사라질 것이며, 마리아가 손을 뻗어서 만지고자 했던 그 열망이 충만하게 만족을 얻을 것입니다. 이 말씀의 사상은 그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에서 나타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너희가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먼저는 예수께서 하늘로 가심으로, 그리고 또한 그 결과로 성령을 주심으로써 보는 것과 듣는 것과 만지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주님은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을 그의 형제들에게 다시 그대로 반복하심으로써 그들도 그 사건을 올바른 시각으로 바라보도록 하라고 명하십니다.

 

  주께서 마리아에게 이 말씀을 전달하라고 하신 그 제자들 가운데 우리들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상기하도록 합시다. 그렇게 함으로써 오늘 말씀의 결론을 삼는 것이 적절하지 않겠습니까? 이 일이 있기 전 주님은 제자들을 한 번도 형제라고 부르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때에 와서 주님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내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셔서 자신을 제자들과 동일시 하시는 것을 봅니다. 이 새로운 영광의 생명이 주님을 우리에게서 취하여 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깊은 의미에서 우리를 주님의 형제로 만들어주며, 그의 아버지를 우리의 아버지로 만들어준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신하여야 하겠습니다. 물론 마리아나 제자들과는 달리 우리는 주님의 육체를 직접 바라보는 특권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시대의 신자들과 함께 그보다 훨씬 더 감미롭고 더 고귀한 것을 동등하게 나누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후의 나타나심은 천상에 계신 주님의 모습의 하나의 예비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천상에 계신 주님을 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무덤에서 서성거리지 말고, 얼굴을 돌리고 우리의 손을 하늘을 향하여 지켜 올립시다. 우리의 생명이 바로 그 곳에서 주님과 함께 하나님 안에 숨겨져 있으며, 또한 그리로부터 주님이 다시 오셔서 마리아에게 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자신의 모습을 보이실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는 마지막으로 힘차게 "랍오니여"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구속함을 받은 백성들은 그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안식의 이른 새벽에 구주를 만날 때에 모두가 한 입술을 벌려서 "랍오니여"하며 그를 맞을 것입니다.

 

출처 : 문화와 설교연구원

글쓴이 : 요셉친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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