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의 교리가 어느 곳에서부터 기원되어져 왔는가는 여러 주장들이 있다. 16세기말에는 이 교리가 몇몇의 신학자들에 의하여 이어졌지만 이러한 현상은 분명하게 모방되어졌고 참된 루터 신학의 틀 속에는 보이지 않는다.
먼저, 코케이누스와 그의 학파에서 이러한 개념이 주장되어져 나왔을 때 이에 대한 수긍이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화란에서 클로펜부르그와 켈리우스-스네카누스가 이미 언약 신학을 제안하였고 또한 독일에서 올레비아누스가 동일한 견해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코케이누스에게서 새로운 언약 신학이 창출된 것이 아니라 언약의 개념으로부터 이끌어낸 구속 경륜에 대한 역사적 결론이 나온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언약 신학의 시초가 어디부터인가는 확실치 않다.
우리는 독일이 언약 교리의 발전을 위하여 하이델베르그 신학자들 뿐 만 아니라, 다른 신학자들도 이것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언약 사상은 어떤 사람들이 개혁주의 학파로 부르기 좋아하는 본래적 경향의 현상들의 하나로 생각되어 졌다. 독일 개혁주의 전통은 타락된 루터교 신학의 손길로부터 옛 프로테스탄트 진리를 보존한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독일의 언약 교리는 스위스 제네바의 순수한 개혁신학 입장에서 찾지 말아야 하며 독일에서 찾아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헤패의 개념은 언약의 개념은 개혁주의 범위 속에 이상한 침입으로 의심 속에서 고려되어져야 한다면서 그의 책 “Geschichte des Pietismus und der Mystik in der Reformirten Kirche"에서 오히려 스위스에서 언약의 신학이 시작하였음을 인정한다. 그 이유는 하이델베르그의 유명한 신학자 올레비아누스와 우르시우스는 취리히 신학자들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렇게 독일, 스위스, 화란 등지에서 언약신학의 개념주장이 분분한 가운데 저자는 영국의 신학에 눈을 돌리게 된다. 일반적으로 영국 신학자들은 화란 신학을 따랐다고 주장되어져 왔다. 그러나 자세한 연구로 그것이 모방이 아닌 독립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이 가장 강하게 나타나는 것이 롤록, 하위 카트라이트, 프레스톤, 퍼킨스, 에임스, 그리고 볼에 의해 나타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이다.
이 고백서는 언약의 교리가 단순히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전경에 놓여 있으며 거의 모든 논점에 퍼져 있는 첫 개혁주의 신앙고백서이다. 따라서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은 외국의 영향 아래에 있지 않고 그들 자신의 나라에서 느리게 발전된 열매의 무르익은 것을 단순하게 요약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요약해 볼 때 분명한 것은 언약의 교리가 개혁신학의 특징적인 교리임을 확신한 것이다. 단지 그 기원이 어디서부터인가의 주장에 따라 설명이 달라지는 것뿐이다. 이 언약의 신학에 관해 중요한 것은 개혁주의 신학자들과 함께 나타난 것이고 개혁주의는 하나님과 출발했다는 것이다. 인간 때문에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인간이 존재한다는 개혁주의의 출발 원리에 바로 언약 신학이 중심으로 서 있는 것이다.
1. 행위언약
루터파에 따르면 인간은 하나님께서 의로운 상태에 그를 놓은 목적지에 도달하였기 때문에 인간의 창조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행하기 위하여 더 이상 첨가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펠라기우스주의자들처럼 인간은 자기의 도덕적 중립성으로부터 자신이 노력해야 하며 그리고 도덕적인 창조의 힘이 방법에 의하여 거룩함에 도달하여야 하는 자유로운 존재임을 주장한다.
그러나 개혁주의 견해는 완전히 다르다. 본래 인간은 선을 알았고 그리고 의식적으로 선을 행한 완전히 의로운 상태이라는 것은 루터파와는 일치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영원히 복된 위치에 놓인 존재로서 사람을 보지 않고 영원한 축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행위 언약이라고 보았다. 루터파의 견해는 완전히 인간적인 동기에서부터 진행된다. 그러나 개혁주의 표현은 모든 면에서 다르다. 즉, 인간은 스스로 선을 만들 수 없으며 그 속에 있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을 발전시켜야 한다. 개혁주의 견해에 의하면 행위언약은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존재하는 자연적 결속(bond)을 초월하는 그 무엇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존귀하신 삼위 인격의 자유로운 관계성 속에서 존재하는 것 같이, 인간도 하나님과 언약적 관계 속에서 그의 행복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2. 구속언약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세운 율법을 단순하게 무시하시지 아니하시며 오히려 인간의 죄와 배반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성취하심으로 그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이러한 조명 아래서 중보자의 사역이 보여지는 행위언약 교리의 다른 측면이다. 이는 구원의 약속, 평화의 협정, 구속의 언약으로 불리어 졌다.
구속언약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의하여 기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구속사역이 언약의 방법 속에 이루어진 자유행위의 실행을 발견한다는 사실의 증거이다. 인간의 타락이후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완전하게 구원의 사역을 이루시는 것 외에는 인간은 결코 다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방법이 없었다. 영생의 길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
그러므로 영생을 얻는 일은 하나님 홀로 하시는 일로 하나님 안에 있다. 그러나 루터파는 ‘이신칭의’를 강조하게 되어 인간론적인 주제가 있다. 반면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무게의 중심은 이러한 이신칭의에 놓여 있지 않고, 구원사역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임을 가르치는 모든 성경이 적용하는 원리 속에 있다고 본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주권적인 구원의 적용이 개혁주의 신학의 근본적인 원리이기 때문에 개혁주의 신학은 이 적용을 그리스도께서 중보자와 보증인이 되셔서 모든 것을 이루신 언약의 요구로써 올바르게 이해한다.
구속언약의 교리는 클로펜부르그에 의해 ①성부께서 언약적으로 보증인에게 제정하시는 것이며 ②성부의 보증인으로써 성자께서 생명의 약속과 하늘의 영광을 우리를 위하여 제정하시는 것이다. 언약은 상호간의 신뢰의 양편의 동의이다. 또한 언약은 유언한 자의 죽음으로써 우리를 위하여 확립된 유언으로 불리어 진다. 이 구속의 언약은 성경에서 완성된 상태에서 가져온 교리가 아니라, 성경으로부터 자라왔다.
이처럼 개혁주의 신학의 구속언약은 견고하게 놓여 있어 어떠한 공격과 어려움이 올지라도 성도들의 마음속에 영원한 장소를 보증하였다.
3. 은혜언약
구속의 언약은 은혜언약의 모형이다. 그러나 구속의 언약은 은혜언약의 그 이상이다. 은혜언약을 통하여 구속의 언약이 효과적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은혜언약의 범위는 좁게 혹은 넓게 , 외적으로나 혹은 내적으로, 모든 경우에 있어서 그리스도와의 관계성 속에서 구속의 언약과 연결되어 이루어진다. 이것의 결정적인 모범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나타난다. 신앙고백은 은혜언약을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과 성도사이에 맺은 언약으로 말하지만, 그러나 대요리문답은 그것을 둘째 아담으로써 그리스도와 맺은 언약으로 표현한다.
먼저, 하나님의 성취된 사역의 기초 위에서, 언약관계는 구원의 서정의 풍성함의 본질로서 나타낸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믿음과 양심과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성취가 언약의 개념이 설명되는 중요한 사상의 모든 점에서 나타난다. 언약의 개념이 은혜의 상태의 확실성을 표현하기 위하여 성도들의 의식 속에서 살아 있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것은 선택의 교리에 명확한 뿌리가 되는 성도의 견인에 대한 공식으로 사용되어졌다. 은혜의 언약은 오직 하나님 안에 고정되어져 있다. 하나님께서 두 당사자 모두에게 대답하시며 성령에 의하여 인간의 의지를 주장하시고 또한 역사 하신다. 그것의 정착은 도달될 수 있는 이상으로써가 아니라 시작부터 이미 하나님의 영원한 보증 안에 근거를 둔 중보자의 사역 안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영원토록 변경할 수 없는 언약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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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코케이누스와 그의 학파에서 이러한 개념이 주장되어져 나왔을 때 이에 대한 수긍이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화란에서 클로펜부르그와 켈리우스-스네카누스가 이미 언약 신학을 제안하였고 또한 독일에서 올레비아누스가 동일한 견해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코케이누스에게서 새로운 언약 신학이 창출된 것이 아니라 언약의 개념으로부터 이끌어낸 구속 경륜에 대한 역사적 결론이 나온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언약 신학의 시초가 어디부터인가는 확실치 않다.
우리는 독일이 언약 교리의 발전을 위하여 하이델베르그 신학자들 뿐 만 아니라, 다른 신학자들도 이것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언약 사상은 어떤 사람들이 개혁주의 학파로 부르기 좋아하는 본래적 경향의 현상들의 하나로 생각되어 졌다. 독일 개혁주의 전통은 타락된 루터교 신학의 손길로부터 옛 프로테스탄트 진리를 보존한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독일의 언약 교리는 스위스 제네바의 순수한 개혁신학 입장에서 찾지 말아야 하며 독일에서 찾아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헤패의 개념은 언약의 개념은 개혁주의 범위 속에 이상한 침입으로 의심 속에서 고려되어져야 한다면서 그의 책 “Geschichte des Pietismus und der Mystik in der Reformirten Kirche"에서 오히려 스위스에서 언약의 신학이 시작하였음을 인정한다. 그 이유는 하이델베르그의 유명한 신학자 올레비아누스와 우르시우스는 취리히 신학자들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렇게 독일, 스위스, 화란 등지에서 언약신학의 개념주장이 분분한 가운데 저자는 영국의 신학에 눈을 돌리게 된다. 일반적으로 영국 신학자들은 화란 신학을 따랐다고 주장되어져 왔다. 그러나 자세한 연구로 그것이 모방이 아닌 독립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이 가장 강하게 나타나는 것이 롤록, 하위 카트라이트, 프레스톤, 퍼킨스, 에임스, 그리고 볼에 의해 나타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이다.
이 고백서는 언약의 교리가 단순히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전경에 놓여 있으며 거의 모든 논점에 퍼져 있는 첫 개혁주의 신앙고백서이다. 따라서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은 외국의 영향 아래에 있지 않고 그들 자신의 나라에서 느리게 발전된 열매의 무르익은 것을 단순하게 요약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요약해 볼 때 분명한 것은 언약의 교리가 개혁신학의 특징적인 교리임을 확신한 것이다. 단지 그 기원이 어디서부터인가의 주장에 따라 설명이 달라지는 것뿐이다. 이 언약의 신학에 관해 중요한 것은 개혁주의 신학자들과 함께 나타난 것이고 개혁주의는 하나님과 출발했다는 것이다. 인간 때문에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인간이 존재한다는 개혁주의의 출발 원리에 바로 언약 신학이 중심으로 서 있는 것이다.
1. 행위언약
루터파에 따르면 인간은 하나님께서 의로운 상태에 그를 놓은 목적지에 도달하였기 때문에 인간의 창조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행하기 위하여 더 이상 첨가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펠라기우스주의자들처럼 인간은 자기의 도덕적 중립성으로부터 자신이 노력해야 하며 그리고 도덕적인 창조의 힘이 방법에 의하여 거룩함에 도달하여야 하는 자유로운 존재임을 주장한다.
그러나 개혁주의 견해는 완전히 다르다. 본래 인간은 선을 알았고 그리고 의식적으로 선을 행한 완전히 의로운 상태이라는 것은 루터파와는 일치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영원히 복된 위치에 놓인 존재로서 사람을 보지 않고 영원한 축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행위 언약이라고 보았다. 루터파의 견해는 완전히 인간적인 동기에서부터 진행된다. 그러나 개혁주의 표현은 모든 면에서 다르다. 즉, 인간은 스스로 선을 만들 수 없으며 그 속에 있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을 발전시켜야 한다. 개혁주의 견해에 의하면 행위언약은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존재하는 자연적 결속(bond)을 초월하는 그 무엇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존귀하신 삼위 인격의 자유로운 관계성 속에서 존재하는 것 같이, 인간도 하나님과 언약적 관계 속에서 그의 행복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2. 구속언약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세운 율법을 단순하게 무시하시지 아니하시며 오히려 인간의 죄와 배반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성취하심으로 그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이러한 조명 아래서 중보자의 사역이 보여지는 행위언약 교리의 다른 측면이다. 이는 구원의 약속, 평화의 협정, 구속의 언약으로 불리어 졌다.
구속언약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의하여 기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구속사역이 언약의 방법 속에 이루어진 자유행위의 실행을 발견한다는 사실의 증거이다. 인간의 타락이후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완전하게 구원의 사역을 이루시는 것 외에는 인간은 결코 다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방법이 없었다. 영생의 길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
그러므로 영생을 얻는 일은 하나님 홀로 하시는 일로 하나님 안에 있다. 그러나 루터파는 ‘이신칭의’를 강조하게 되어 인간론적인 주제가 있다. 반면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무게의 중심은 이러한 이신칭의에 놓여 있지 않고, 구원사역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임을 가르치는 모든 성경이 적용하는 원리 속에 있다고 본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주권적인 구원의 적용이 개혁주의 신학의 근본적인 원리이기 때문에 개혁주의 신학은 이 적용을 그리스도께서 중보자와 보증인이 되셔서 모든 것을 이루신 언약의 요구로써 올바르게 이해한다.
구속언약의 교리는 클로펜부르그에 의해 ①성부께서 언약적으로 보증인에게 제정하시는 것이며 ②성부의 보증인으로써 성자께서 생명의 약속과 하늘의 영광을 우리를 위하여 제정하시는 것이다. 언약은 상호간의 신뢰의 양편의 동의이다. 또한 언약은 유언한 자의 죽음으로써 우리를 위하여 확립된 유언으로 불리어 진다. 이 구속의 언약은 성경에서 완성된 상태에서 가져온 교리가 아니라, 성경으로부터 자라왔다.
이처럼 개혁주의 신학의 구속언약은 견고하게 놓여 있어 어떠한 공격과 어려움이 올지라도 성도들의 마음속에 영원한 장소를 보증하였다.
3. 은혜언약
구속의 언약은 은혜언약의 모형이다. 그러나 구속의 언약은 은혜언약의 그 이상이다. 은혜언약을 통하여 구속의 언약이 효과적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은혜언약의 범위는 좁게 혹은 넓게 , 외적으로나 혹은 내적으로, 모든 경우에 있어서 그리스도와의 관계성 속에서 구속의 언약과 연결되어 이루어진다. 이것의 결정적인 모범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나타난다. 신앙고백은 은혜언약을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과 성도사이에 맺은 언약으로 말하지만, 그러나 대요리문답은 그것을 둘째 아담으로써 그리스도와 맺은 언약으로 표현한다.
먼저, 하나님의 성취된 사역의 기초 위에서, 언약관계는 구원의 서정의 풍성함의 본질로서 나타낸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믿음과 양심과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성취가 언약의 개념이 설명되는 중요한 사상의 모든 점에서 나타난다. 언약의 개념이 은혜의 상태의 확실성을 표현하기 위하여 성도들의 의식 속에서 살아 있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것은 선택의 교리에 명확한 뿌리가 되는 성도의 견인에 대한 공식으로 사용되어졌다. 은혜의 언약은 오직 하나님 안에 고정되어져 있다. 하나님께서 두 당사자 모두에게 대답하시며 성령에 의하여 인간의 의지를 주장하시고 또한 역사 하신다. 그것의 정착은 도달될 수 있는 이상으로써가 아니라 시작부터 이미 하나님의 영원한 보증 안에 근거를 둔 중보자의 사역 안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영원토록 변경할 수 없는 언약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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