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진들은
1970년 3월~1973년 2월 까지 21사단 66연대,
1군사령관 한신 장군의 '장병전원 신자화' 란 지시아래
또 휘하부대인 9252부대(66연대) 연대장의 적극 지원으로
각 중대까지 군종사병들을 추출된 군종사병들과 그 업무인 세례식 사진들이다.
51년전 광경이 감개 무량하다.
세월은 기다려주지 않기에
난 가끔 혼자 있는 시간이면
이 눈부신 과거 추억억들을 떠올려 음미하고,
또 찬란하게 비춰보기도 하고,
닦으며 녹이슬까 괞히 맘 조마하기도 한다.
단지 신비의 상자속에 잘 보관하여,
내 인생의 소중한 보배로,
또 가끔 원할 때 떨리는 손으로 뚜껑을 열어 꺼내어,
거기에 도취되기도 하곤한다.
나의 51년전 이 추억은 나만의 향기로운 예술이다.
이때 본인이 남긴 무엇보다 획기적인 업적가은데 하나는
제1대대 군종으로 전출가기전 3중대 소속이었을때
군종업무로서 매일 밤마다 하나님께 예배와 성경공부였다.
나는 예배 모임을 위해서 중대장님께 건의했고
중대장님은 주번사관에게 전달하고 주번사관은
다시 주번하사에게 하달했다.
"전달! 전달! 제1내무반 병사들은 제2내무반으로 5분내로 집합!"
집합 구령을 마치자마자 모든 병사들은 재빠르게 한자리에 모였다.
집합끝......! 함과 동시에 '내 주를 가까이 하게함은...! 찬송가를 힘차게 부른다.
그 다음 나는 거의 30여분쯤 설교를 했다.
이렇게 매일 밤마다 6개월동안 예배와 성경공부를 함으로서
군 사상 처음으로 198명 합동세례식도 거행하게 됐는데
이 계기로 후에 우리 연대장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부대가 동면에 있을때는
대대장님께 빈막사 요구해서 잘 개량해 작고 소박한 아름다운 교회를 세웠고,
6개월후에 TOC 전방으로 병력 이동했을때도
또 다시 대대장님께 부탁드려서 또 하나의 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또한 부대 곳곳 처처에 다니면서 병사들과 상담도 했다.
그래서 당시 장병들이 생각하는 교회의 희망은
장병들의 안식처였고,
장병들의 가슴은 뛰었고,
장병들의 교회사랑 열정은 폭발하듯해서
장병들의 가슴속에 비바람과 폭풍이 몰아칠때엔
교회는 언제나 우산이 되어주곤 했었다.
1중대 3중대 4중대 11중대 군종들 잠간 모여 휴식가지는 시간에 찰칵.
당시 3중대에서는 중대 전원이(150명정도) 밤마다 예배의 시간을 가졌다.
이 사진은 설교 준비하는 시간이다.
부대 가정통신을 쓰다가 잠시 휴식시간에 책을 들여다 본다.
TOC에서 펀치볼을 바라보면서..................!
그러나 과거 나의 아름다운 젊음은
우연한 자연의 현상이었지만,
오늘의 이 노년은 위대한 예술작품이다.
어제는 역사이고
내일은 희망이며
그리고 오늘은 선물이다.
과거 팽팽했던 젊은이가 요로콤 변해버렸네요 고동엽1970년 03월입대-66연대-03중대군종
그리움에도 나이가 있는가 봅니다.
내가 그리움의 나이를 먹은만큼 그 때의그리움이 자주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51년전(1970.3월~1973.2월 꼬박 36개월동안)
그 당시 사단장 박찬긍 준장님.66연대 유정목 연대장님.
그리고 198명의 세례받은 장병들.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그분들도 나를 이만큼 그리워하고 있을까요?
그사람들도 그리움의 나이테를 동글동글 끌어안고 있겠지요?
스쳐가는 바람의 소맷자락에 내소식을 전하고 싶습니다.
'저는 잘 있어요
지금75세 되도록 이렇게 그들을 그리워 합니다.
나는 추억의 시간을 그리며 불현듯이 보고픔에 말없이 찾아가고 싶어지는 곳이 있어 ,
동갑내기 친구 고00(66연대 의무중대 1168**** 즉 논산 아르바시 군번)씨를 불러
2005년도 지금으로부터 16년전 그러니가 제대후 32년만에
지금은 51년이지만 66연대를 방문하면서 찍어두었던 사진들이다.
걸어온 길에는 그립게 찍혀진 발자국들도 소중하고 영원한 추억이기에
살아갈 날 보다 살아온 날이 많아지면서부터 얼마나 소중한 것들을 잊고 살았는지
인생의 나이를 90으로 잡는다면 50년은 새로움 찾아 떠나는 탐험이고,
나머지 40년은 지금껏 경험한 것을 기리고 추억하는 여행
아직도 젊었던 꿈을 꾸는 우리 지나간 것들을 추억하며 사는
아직 희망하는 그 무엇이 있어
아름다운 추억은 녹쓸고 병들지 아니한 찬란한 감정의 순수를 보여주고 있는 탓에
그래서 우리의 지난 날들은 아름답고 아름다웠다라고 할수 있겠다.
아마 이길은 현리 가는길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마 이길은 대암산에 올라가는것 같다.
옛날에 부식수령하려고 대암산에서 본부부대까지 자갈밭 길을 걸어서 오려면 반나절이 걸렸다.
그러나 지금은 아스팔트 이 길을 차량을 이용하니 5분만에 도착한다.
펀치볼 동네 음식점 가까이 있는 동상이다
제 4 땅굴로 가는 길목이다.
펀치볼 동네이 있는 음식점이다.
2005년도 방문 했을때 비빔밥을 너무 맛있게 먹었기에 전화번호도 적어 왔는데
세월이 지나다보니 그것이 어데론가 사라졌다.
현 3리 가는 길이다.
펀치볼 동네를 한눈에 볼수 있다.
이 전망대에서 건너편 다른 동네가 가깝게 보인다. 그러나 갈수는 없다.
임당리 저수지인것 같다.
이 곳에서 장교나 중상사 들은 스케이트 타고 즐기던 곳이기도 하다.
원당리 헌병 초소이다. 저 초소를 지나가기가 제일 두려운 곳이다.
헌병 근무자 몰래 살살 피해 돌아가는데 느닷없이 야~!
너 이리와 하고 불러다가 괞이 열중 셔! 차렷! 이 복장봐라.
엎드려 일어서 몇십번 하고 나면 그후 훈시 하고 돌려보낸다.
제일 무서운 곳이다.
그런데 저 초소가 그때까지 있었다.
단지 헌병 근무자들은 없고 빈 건물만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있는 보쌈집 및 포장마차 집이 내가 알고 있는
00 중사가 운영하고 있는 다방이었다.
당시 후방에서 면회오면 꼭 거기서 만나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런데 포장마차 집으로 변해 있었다.
헌병대막사 건물에서 얼마 안떨어진 그곳인데
근무당시는 1개 대대가 머물고 있었고,
PX도 있었고,
내가 세웠던 교회도 저곳에 있었는데
그것들은 없어지고 장교 아파트로 변해 있었다.
시간이란 마술 지우개는 모든것을 다 지워도 추억만은 지우지 못하는가 보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사라져도 추억의 열매는 영원히 남는다.
이 사진은 우리 부대 옆 가까이 있던 원당 초등학교 군종 전우였던 한분이
이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의 큰 따님과 열애 중이었는데 그후 어찌 되었는지 알길이 없다.
나는 당시 63연대 군인교회에 다니시는 '신은희'(근처 초등학교 교사) 라는 분하고 매일 같이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 받는 동안 달콤함이 있었는데 그분께서도 지금 어디선가 건강하게 잘 계시겠지.
그 분 역시 지금 저와같은 연배이시니 그 분도 70대.........?
풀잎위 아침이슬처럼 나의 가슴속에 살며시 적셔오는 자연은 꽃이 피며,
생명의 신비가 있고, 숲의 새의 맑은 목소리, 우주의 문을 열고 있다.
2005년도 동면을 방문했을때 모습이다.
본인 근무 당시에는 민가 몇채에 불과했다.
이동네 정육점집 예쁜따님 김정자씨,
또 이장집 동생 귀여운 염남순씨가 그 당시 인기 있었다.
66연대 들어가는 입구이다.
70년도 내가 근무 당시엔 저 소나무들이 없었는데
지금은 아름다운 소나무로 심기워 있었다.
양구 시내이다.
내가 근무 당시엔 양구를 제대로 나와보지도 못했기 때문에
그 당시 상황은 알수가 없다. 지금은 깨긋이 정돈 되었음을 알수 있다.
21사단 전우회 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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