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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를 주목하느냐(사도행전 3:11~16)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의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오늘의 본문말씀은 하나의 사건을 주제로 행한 베드로의 귀한 설교말씀으로, 초대교회의 대표적 설교말씀의 하나입니다. 우리가 이미 공부한대로 예수님께서 부활승천 하신 다음, 초대교회 사람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다가 그 성전 미문에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을 만납니다. 그전 같았으면 그저 보고 지나치거나 얼마간 적선이나 해주거나 묵기도를 올려주거나 하는 정도이지, 그 이상의 무슨 특별한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모두가 그렇듯이 말입니다. 사실 그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입니다. 사십 년 동안 한번도 걸어본 역사가 없는 사람입니다. 배고픈 사람은 먹이면 되지만, 그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입니다. 그를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전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성령에 충만하고보니 베드로와 요한의 생각이 달라집니다. 앉은뱅이가 돈을 달라고 손을 내미는 순간, 베드로와 요한은 엄청난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작용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그대로 불붙듯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향하여 당당하게 명령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순간, 앉은뱅이는 벌떡 일어섭니다. 굉장한 사건입니다. 그 사건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집니다. 오늘의 본문이 바로 그 사건을 두고 펼치는 베드로의 설교말씀입니다. 이것은 바로 히브리식 설교입니다. 헬라식이 아니고 히브리식입니다. 베드로의 이 설교에는 세 가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사건을 중심으로 설교가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결코 추상적 진리나 유명한 사람의 이야기를 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생활경험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순수한 역사적 사건을 놓고 설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증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의견이 아닙니다. 내 생각은 이렇고 내 뜻은 이렇고 논리적으로는 어떻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건을 증거하고 있을 뿐입니다. 보십시오. 사십 년 된 앉은뱅이가 일어선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계시적 사건입니다. 그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건으로 계시된 말씀은 것입니다. 나아가 그 사건은 앉은뱅이 한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관계된 사건입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자가 믿음으로 벌떡 일어서는 이 사건은 단순히 옛날에 있었던 하나의 사건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관계된 사건인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그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특징은 그 사건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에 연계된다는 점입니다. 그 사건은 거저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그대로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오늘 이 자리에서 그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오늘 공부할 베드로의 설교는 그것을 증거 합니다.
우선, 그 사건과 베드로와 요한과의 관계를 살펴봅시다. 본문말씀을 보니 병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았다고 합니다. 놓지 않을 생각으로 단단히 붙잡았습니다. 어떻게 놓칠 수 있겠습니까? 사십 년이 지나도록 앉은뱅이로 지냈기에 평생을 그렇게 살다 죽을 줄 알았는데 베드로와 요한이 자신을 선한 사람으로, 건강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러니 저들을 따라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전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에 한번 놓치면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꼭 붙드는 것입니다. 이 사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병은 나았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벌떡 일어서기는 했지만, 베드로가 누군지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릅니다. 어떤 이유로 자신이 낫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 계시적 의미를, 그 말씀의 뜻을, 그 사건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몰라요. 다만 사건이 있을 뿐입니다. 여기에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도 보면 생활 속에서 시간시간 많은 사건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적 말씀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보면 감사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저를 찾아와서는 "아이고, 목사님. 저는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면 별거 아니더라구요. 전에도 늘 있던 일입니다.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평범한 일이요 보편적인 일입니다 마는, 그분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옛날에는 이런 일을 당하면 그냥 흘려버렸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해보면 이것이 다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하고 감격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말씀에 나오는 앉은뱅이는 이적을 통하여 병은 나았지만 아직 성령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아직 말씀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을 잔뜩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향하여 설명을 합니다. 설교가 필요한 순간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미 경험했고 앞으로도 경험할 것입니다. 평범하게 경험해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경험한 그 사건에 대한 신학적 성서적 해석은, 신령한 해석은 설교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설교말씀을 들으면서 내가 당한 현실의 의미를 하나하나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설교입니다.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11절)" -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럴 수 밖에요. 오늘날에도 이런 이적의 사건이 일어났다면 비행기 타고 기차 타고 다들 모여들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보통 사건입니까? 사십 년 된 앉은뱅이가 걷는 그 놀라운 사건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모인 사람들은 그 사건을 보고 호기심은 있었지만, 깜짝 놀라기는 했지만, 앉은뱅이와 마찬가지로 그것이 어떻게 해서 이루어졌는지 그 의미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설명이 필요합니다. 성서적 해석이, 영적 interpretation이 필요합니다. 지금, 베드로가 그 해석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설교입니다.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이 일은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라고 설교합니다.
설교하는 가운데 베드로가 두 가지 질문을 합니다. "왜 기이히 여기느냐"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 상당한 의미가 있는 질문입니다. 왜 이상하게 보느냐, 이상할 것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설명합니다. 그것은 내가 한 일이 아니기에 전혀 이상할 것 없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를 주목할 것 없다는 것입니다. 이상히 여길 것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하시고자 하는 일은 다 이루십니다. 전지전능하십니다. 죽은 사람도 살려내시는데 그까짓 앉은뱅이 하나 못 일으키시겠습니까? 그러니 이상할 것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면 이상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 편에서 보니 깜짝 놀랄 일이지, 하나님 편에서 보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평범한 사건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매일같이 있는 사건인 것입니다.
특별히 베드로가 "왜 기이히 여기느냐"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라고 질문을 하게 된 이유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많은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나면서부터 소경 된 사람을 눈뜨게 하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승천 하신 뒤, 오늘 성령으로 베드로와 함께 하십니다. 베드로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께서 그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이 오늘날 자신들을 통하여 연장되고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이 오늘날 교회를 통하여, 베드로를 통하여, 아무 것도 아닌 인간을 통하여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로 이해한다면 이상할 것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보이지 않게 역사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 많은 이적을 행하시는,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예수님이신데 앉은뱅이 하나 일으키시는 것쯤이야 문제없지요. 그래서 베드로가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상히 여길 것 전혀 없다고 말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베드로는 이적과 이적을 행하는 자와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12절)." 우리는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 그것을 개인의 능력으로, 개인의 경건으로 오해할 때가 많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이적이 나타났을 때에 그것이 그 사람의 능력인 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능력이 아닙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피아노 소리가 났다고 합시다. 그 소리는 피아노 스스로 낸 것이 아닙니다. 피아노를 치는 사람이 낸 것입니다. 그런데 피아노 치는 사람은 생각지도 않고 피아노만 보고 앉았단 말입니다. 이것이 그릇된 자세입니다. 언제든지 중요한 것은 그 뒤에 있는 인격입니다. 이적도 그렇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고용하시어 능력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개인에 대하여 존경을 보낼 것도, 이상하게 여길 것도 없습니다. 놀랄 것도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개인의 경건이 문제입니다. 이적을 나타내니까 '아, 이 사람은 보통사람이 아닌가봐, 깨끗한 사람인가 봐, 경건한 사람인가 봐, 경건의 수준이 남보다 높은 사람인가 봐'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적을 행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도덕적으로 남보다 깨끗한 사람은 아닙니다. 평범한 사람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는 일부러 보통사람을 들어 쓰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잘 아는 목사님이 책을 한 권 펴내고 출판기념회를 가졌습니다. 그 때에 이런 인사말을 하시더군요. "제 책이 그리 볼만한 것은 못됩니다. 제가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아니고요. 어떤 분들은 아마 저런 사람이 책을 다 쓰나 하고 비웃기도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책을 냈습니다.
저 같은 사람도 책을 낼 수 있구나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많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책을 쓸 수 있는 용기를 가지도록 하기 위하여 변변치 못한 이 사람이 변변치 못한 책을 냈습니다." 겸손한 말씀이요 참 잘한 말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변변치 못한 사람들만 들어 쓰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시기 위함이요, 나아가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이적이 일어나는 것은 개인의 경건으로가 아닙니다. 개인의 경건 때문에, 그 경건의 수준이 높기 때문에 이적이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올려보지 마십시오. 설령 내가 능력을 행하는 입장에 섰다 하더라도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남보다 더 나아서 하나님께 등용되어 쓰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내가 남보다 나아서 축복을 받았다는 망상에 사로잡히지 말 것입니다. 보십시오. 베드로가 대단히 중요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 이 사건과 우리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훌륭한 말씀입니다.
저는 직분상 많은 교인가정을 심방 해야 하고, 결혼 주례도 해야 합니다. 당연히 소망교회의 교인들 결혼 주례는 다 제가해야지요.
그러나 다 할 수가 있나요? 다는 못해드리고 있습니다. 시간이 되면 되도록 주례를 서는데, 그러고 나면 으레 그분들이 구태여 찾아와서 꼭 인사를 해야겠다고 들 합니다. 시간 없는데 찾아와 인사하겠다는 것 거절하기도 힘들지만, 그보다는 "목사님, 감사합니다"하는 말을 듣는 것이 더욱 난처합니다. 내가 인사 받을 처지가 되나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지요. 세례식, 장례식, 결혼식은 목사에게 있어서 필수입니다. 목사가 마땅히 하는 일입니다.
내게 맡겨진 본분을 다했을 뿐인데 무슨 인사를 받아요? 인사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사실 가만히 앉아 인사 받기 참으로 거북합니다.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고 하니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역사 하신 것일 뿐, 내가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킨 베드로와 요한을 성전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존경의 눈으로, 선망의 눈으로 쳐다봅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고 저들을 나무랍니다. 내가 한 일이 아니니 거북하게 나를 쳐다보지 말아달라고 소리지르는 베드로의 그 마음을 여러분은 이해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는 마땅히 이런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으면서도 결코 그 존경을 자기가 취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 존경을 자기가 취한다면 그는 도둑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 돌아갈 존경을 자기가 취하고,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자기가 취하는 사람은 도둑질을 한 사람이나 같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영광이 덜 돌아온다고 섭섭해하는데, 이처럼 유치한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 수고한 것에 대해서는 결코 보답을 바라는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섭섭하다느니, 안 알아준다느니 하는 인간적인 이야기가 오가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기대감을 가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 생각하고 한 일이기에 그것으로 그쳐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베드로의 훌륭함이 드러납니다. 그는 '어찌하여 우리를 주목하느냐'하고 전적으로 그 영광을, 그 존경을 사양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존경과 기대와 시선을, 영광을 그리스도께 돌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설교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말씀을 자세히 한번 보십시오. 먼저, 그는 이 사건을 십자가사건과 연계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사건 안에서 오늘의 이 사건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사십 년 된 앉은뱅이가 걷는 이적으로 마음 문이 열린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는 담대하게 십자가의 복음을 전합니다. 대단히 중요한 시간입니다. 십자가사건은 몇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당신들의 이야기라고 베드로는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에는 분명히 여러 사람이 관계되어 있습니다. 본문말씀에도 자세히 나타납니다. "빌라도가 놓아주기로 결안한 것을(13절)"하며 빌라도의 이름까지 거론합니다. 예수님을 가룟 유다가 팔았고, 가야바가 고소했고, 빌라도가 재판을 했으며, 로마군인이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 사건은 저들도 이미 다 아는 바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베드로가 하나 더 추가하여 꼬집어 말씀하는 것이 있습니다.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 너희가 직접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몇 사람의 충동에 의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지른 그 군중 역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설사 못박으라고 하지는 않았더라도 그 자리에 와서 가만히 구경만 한 것으로도 죄인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베드로는 바로 그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빌라도 만이 아니다, 바로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다, 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루터는 이 문제를 'once for all'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한번에 모든 사람을 위하여'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이 있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은 모든 사람을 위한 일일 뿐더러, 모든 사람이 한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이러한 연계성을, 관련성을 이해함으로부터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사건은 이천 년 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도 우리 앞에 있습니다. 오늘도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식을 바로 할 때에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것을 열심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 이것이 베드로 설교의 주제입니다.
두 번째로 베드로는 그 사건 안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하고자 합니다. 베드로는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15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죽였으나 하나님은 살리셨습니다. 보십시오. 이제 우리는 우리 죄로 말미암아 죽을 것이로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이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벌하고, 소망이 없기 때문에 멸하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살리셨습니다. 그렇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들도 살리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가 있습니다. 그로 인하여 두 가지 사건이 이루어집니다. 십자가에 못박은 일이 결정적인 죄로 인정되는 시간이요, 동시에 십자가에 못박은 죄를 용서하시는 시간입니다. 놀라운 이야기가 아닙니까? 십자가에 못박은 씻을 수 없는 그 죄를 용서하시는 놀라운 순간입니다. 베드로는 그 사건을 통하여 이렇듯 엄청난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베드로는 그 사건 안에서 예수님의 현존을 증거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주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바로 오늘 이 사건 속에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은 내가 한 일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의 신앙구조라고 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살아 계신 그리스도, 다시 오실 그리스도 - 이렇게 믿고 있습니다. 저들은 그리스도의 현존을, 그리스도께서 현재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사건이,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와 함께 하시는 사건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사건이 오늘 여기에 나타난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베드로 설교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우리가 신학적으로 좀 깊이 있게 살펴보아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이름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16절)." 그 이름이 낫게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앉은뱅이가 나았다고 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요, 그 이름이 오늘 이 자리에 나타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6절 말씀을 보면 '이름'이라는 말이 두 번에 걸쳐 강조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여기서 '이름'은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그 이름'을 부르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아무개야'하고 부르면 그 사람이 대답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결국, 이름은 그 존재와 나와의 만남의 관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름입니다. 이름은 존재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참으로 귀중한 것입니다. 십계명의 제 3계명을 보면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헛되이 함부로 부르지 말라 합니다.
비가 좀 안 온다고 해서 '하나님 맙소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함부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번 제가 이런 궤변을 편 일이 있습니다. 혈혈단신으로 월남하여 호적을 새로 만들 때입니다. 할아버지 이름을 묻기에 이름을 댔습니다. 다음으로 할머니 이름을 묻는데 도저히 기억이 안 납니다. 부끄럽지만 할머니 이름을 모르겠어요. 사실 광산 김씨라는 것만 알지 주위에서 할머니 이름 부르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한참을 고민하다 제가 호적기록 하는 사람에게 냅다 큰소리를 쳤지요. "어른의 이름은 함부로 부르는 것이 아니오"하고 말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이름을 어찌 함부로 부르겠습니까? 불경스럽게 말입니다. 아주 신중하게, 경건하게 옷깃을 여미고 불러야 합니다.
그 이름을 부름과 함께 그 이름의 존재와 능력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 그 사건이 예수님의 사건이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 그 집이 예수님의 집이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어지는 곳이 바로 성전 아닙니까?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름'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보듯이 예수님의 이름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사도행전의 곳곳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받고 병 고침 받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21)"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3:6)" "그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이 너희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3:16)"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4:10)"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4:30)" - '예수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존재가 드러납니다. '예수님 이름'이 곧 능력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은 절대로 주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당이 주문 외듯이 부르는 이름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보니 '예수님의 이름으로'에서 그치지 않고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하는 식으로 자꾸 앞에다 수식어를 가져다 붙이는데 별로 좋지 않은 현상입니다.
'거룩하신 예수의 이름으로'하면 낫고, '예수의 이름으로'하면 안 낫고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듯 수식이 많게, 길게 불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여러분,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그 이름' 앞에 서는 자세입니다. '그 이름'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경건입니다. 우리가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이름'을 불러도 믿음으로 불러야 합니다. 믿음으로 듣고 믿음으로 부를 때에 '예수의 이름'이 그 현장에 역사 하실 것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사도 베드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16절)." 헬라 원문에 '해피스티스 리아우토'라고 되어 있는 이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믿음의 대상이요 믿음의 주체라는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 - 이것은 우리의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계셔서 난 믿음입니다. 그냥 내 마음대로 '믿사옵니다' 해서 얻어지는 믿음이 아닙니다. 좀더 신학적으로 깊이 있게 해석하자면 '예수의 영이 역사 하여 난 믿음'이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아무나 병자를 보고 소리지른다고 낫는 것이 아닙니다.
환자를 보는 순간, 정말로 예수님의 영이 그 마음에 역사 하시어 감동함으로 엄청난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라'하는 소리를 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의지가 아닙니다. 자기 욕망도, 자기 희망도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난 믿음입니다. 성령께서 역사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이런 일을 많이 경험합니다.
환자를 위해서 기도해달라고 부탁해 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기는 하는데 그 마음은 싸늘할 때가 있습니다. 그 마음에 아무 감동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믿음이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때에는 환자를 대하는 순간에 벌써 그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믿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정말로 믿음이 생겨요. '반드시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어 낫게 하실 것이다'하는 믿음이 뜨겁게 솟아오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하나님, 이런 사람은 꼭 도와주셔야만 합니다'하는 간절한 마음이 생깁니다. 그런 마음으로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이 있습니다. 기적이 있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한다고 다 기도가 아닙니다. '믿사옵니다'하고 소리지른다 해서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속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믿음이 작동해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 앉은뱅이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하고 소리지를 자신 있는 분 있습니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렇게 했습니다.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체가 되시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의 주체가 되시어 오늘 이 자리에 역사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께 완전히 고용된 것입니다. 도구로, 그릇으로 쓰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베드로와 같은 믿음으로 '그 이름'을 의지할 때에 '그 이름'은 능력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건 상관없이 예수님께서는 같은 방법으로 역사 하십니다.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사도행전 3:11~16)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의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오늘의 본문말씀은 하나의 사건을 주제로 행한 베드로의 귀한 설교말씀으로, 초대교회의 대표적 설교말씀의 하나입니다. 우리가 이미 공부한대로 예수님께서 부활승천 하신 다음, 초대교회 사람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다가 그 성전 미문에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을 만납니다. 그전 같았으면 그저 보고 지나치거나 얼마간 적선이나 해주거나 묵기도를 올려주거나 하는 정도이지, 그 이상의 무슨 특별한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모두가 그렇듯이 말입니다. 사실 그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입니다. 사십 년 동안 한번도 걸어본 역사가 없는 사람입니다. 배고픈 사람은 먹이면 되지만, 그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입니다. 그를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전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성령에 충만하고보니 베드로와 요한의 생각이 달라집니다. 앉은뱅이가 돈을 달라고 손을 내미는 순간, 베드로와 요한은 엄청난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작용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그대로 불붙듯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향하여 당당하게 명령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순간, 앉은뱅이는 벌떡 일어섭니다. 굉장한 사건입니다. 그 사건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집니다. 오늘의 본문이 바로 그 사건을 두고 펼치는 베드로의 설교말씀입니다. 이것은 바로 히브리식 설교입니다. 헬라식이 아니고 히브리식입니다. 베드로의 이 설교에는 세 가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사건을 중심으로 설교가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결코 추상적 진리나 유명한 사람의 이야기를 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생활경험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순수한 역사적 사건을 놓고 설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증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의견이 아닙니다. 내 생각은 이렇고 내 뜻은 이렇고 논리적으로는 어떻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건을 증거하고 있을 뿐입니다. 보십시오. 사십 년 된 앉은뱅이가 일어선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계시적 사건입니다. 그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건으로 계시된 말씀은 것입니다. 나아가 그 사건은 앉은뱅이 한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관계된 사건입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자가 믿음으로 벌떡 일어서는 이 사건은 단순히 옛날에 있었던 하나의 사건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관계된 사건인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그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특징은 그 사건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에 연계된다는 점입니다. 그 사건은 거저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그대로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오늘 이 자리에서 그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오늘 공부할 베드로의 설교는 그것을 증거 합니다.
우선, 그 사건과 베드로와 요한과의 관계를 살펴봅시다. 본문말씀을 보니 병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았다고 합니다. 놓지 않을 생각으로 단단히 붙잡았습니다. 어떻게 놓칠 수 있겠습니까? 사십 년이 지나도록 앉은뱅이로 지냈기에 평생을 그렇게 살다 죽을 줄 알았는데 베드로와 요한이 자신을 선한 사람으로, 건강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러니 저들을 따라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전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에 한번 놓치면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꼭 붙드는 것입니다. 이 사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병은 나았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벌떡 일어서기는 했지만, 베드로가 누군지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릅니다. 어떤 이유로 자신이 낫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 계시적 의미를, 그 말씀의 뜻을, 그 사건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몰라요. 다만 사건이 있을 뿐입니다. 여기에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도 보면 생활 속에서 시간시간 많은 사건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적 말씀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보면 감사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저를 찾아와서는 "아이고, 목사님. 저는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면 별거 아니더라구요. 전에도 늘 있던 일입니다.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평범한 일이요 보편적인 일입니다 마는, 그분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옛날에는 이런 일을 당하면 그냥 흘려버렸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해보면 이것이 다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하고 감격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말씀에 나오는 앉은뱅이는 이적을 통하여 병은 나았지만 아직 성령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아직 말씀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을 잔뜩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향하여 설명을 합니다. 설교가 필요한 순간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미 경험했고 앞으로도 경험할 것입니다. 평범하게 경험해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경험한 그 사건에 대한 신학적 성서적 해석은, 신령한 해석은 설교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설교말씀을 들으면서 내가 당한 현실의 의미를 하나하나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설교입니다.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11절)" -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럴 수 밖에요. 오늘날에도 이런 이적의 사건이 일어났다면 비행기 타고 기차 타고 다들 모여들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보통 사건입니까? 사십 년 된 앉은뱅이가 걷는 그 놀라운 사건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모인 사람들은 그 사건을 보고 호기심은 있었지만, 깜짝 놀라기는 했지만, 앉은뱅이와 마찬가지로 그것이 어떻게 해서 이루어졌는지 그 의미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설명이 필요합니다. 성서적 해석이, 영적 interpretation이 필요합니다. 지금, 베드로가 그 해석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설교입니다.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이 일은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라고 설교합니다.
설교하는 가운데 베드로가 두 가지 질문을 합니다. "왜 기이히 여기느냐"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 상당한 의미가 있는 질문입니다. 왜 이상하게 보느냐, 이상할 것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설명합니다. 그것은 내가 한 일이 아니기에 전혀 이상할 것 없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를 주목할 것 없다는 것입니다. 이상히 여길 것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하시고자 하는 일은 다 이루십니다. 전지전능하십니다. 죽은 사람도 살려내시는데 그까짓 앉은뱅이 하나 못 일으키시겠습니까? 그러니 이상할 것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면 이상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 편에서 보니 깜짝 놀랄 일이지, 하나님 편에서 보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평범한 사건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매일같이 있는 사건인 것입니다.
특별히 베드로가 "왜 기이히 여기느냐"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라고 질문을 하게 된 이유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많은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나면서부터 소경 된 사람을 눈뜨게 하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승천 하신 뒤, 오늘 성령으로 베드로와 함께 하십니다. 베드로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께서 그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이 오늘날 자신들을 통하여 연장되고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이 오늘날 교회를 통하여, 베드로를 통하여, 아무 것도 아닌 인간을 통하여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로 이해한다면 이상할 것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보이지 않게 역사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 많은 이적을 행하시는,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예수님이신데 앉은뱅이 하나 일으키시는 것쯤이야 문제없지요. 그래서 베드로가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상히 여길 것 전혀 없다고 말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베드로는 이적과 이적을 행하는 자와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12절)." 우리는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 그것을 개인의 능력으로, 개인의 경건으로 오해할 때가 많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이적이 나타났을 때에 그것이 그 사람의 능력인 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능력이 아닙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피아노 소리가 났다고 합시다. 그 소리는 피아노 스스로 낸 것이 아닙니다. 피아노를 치는 사람이 낸 것입니다. 그런데 피아노 치는 사람은 생각지도 않고 피아노만 보고 앉았단 말입니다. 이것이 그릇된 자세입니다. 언제든지 중요한 것은 그 뒤에 있는 인격입니다. 이적도 그렇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고용하시어 능력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개인에 대하여 존경을 보낼 것도, 이상하게 여길 것도 없습니다. 놀랄 것도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개인의 경건이 문제입니다. 이적을 나타내니까 '아, 이 사람은 보통사람이 아닌가봐, 깨끗한 사람인가 봐, 경건한 사람인가 봐, 경건의 수준이 남보다 높은 사람인가 봐'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적을 행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도덕적으로 남보다 깨끗한 사람은 아닙니다. 평범한 사람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는 일부러 보통사람을 들어 쓰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잘 아는 목사님이 책을 한 권 펴내고 출판기념회를 가졌습니다. 그 때에 이런 인사말을 하시더군요. "제 책이 그리 볼만한 것은 못됩니다. 제가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아니고요. 어떤 분들은 아마 저런 사람이 책을 다 쓰나 하고 비웃기도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책을 냈습니다.
저 같은 사람도 책을 낼 수 있구나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많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책을 쓸 수 있는 용기를 가지도록 하기 위하여 변변치 못한 이 사람이 변변치 못한 책을 냈습니다." 겸손한 말씀이요 참 잘한 말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변변치 못한 사람들만 들어 쓰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시기 위함이요, 나아가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이적이 일어나는 것은 개인의 경건으로가 아닙니다. 개인의 경건 때문에, 그 경건의 수준이 높기 때문에 이적이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올려보지 마십시오. 설령 내가 능력을 행하는 입장에 섰다 하더라도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남보다 더 나아서 하나님께 등용되어 쓰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내가 남보다 나아서 축복을 받았다는 망상에 사로잡히지 말 것입니다. 보십시오. 베드로가 대단히 중요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 이 사건과 우리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훌륭한 말씀입니다.
저는 직분상 많은 교인가정을 심방 해야 하고, 결혼 주례도 해야 합니다. 당연히 소망교회의 교인들 결혼 주례는 다 제가해야지요.
그러나 다 할 수가 있나요? 다는 못해드리고 있습니다. 시간이 되면 되도록 주례를 서는데, 그러고 나면 으레 그분들이 구태여 찾아와서 꼭 인사를 해야겠다고 들 합니다. 시간 없는데 찾아와 인사하겠다는 것 거절하기도 힘들지만, 그보다는 "목사님, 감사합니다"하는 말을 듣는 것이 더욱 난처합니다. 내가 인사 받을 처지가 되나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지요. 세례식, 장례식, 결혼식은 목사에게 있어서 필수입니다. 목사가 마땅히 하는 일입니다.
내게 맡겨진 본분을 다했을 뿐인데 무슨 인사를 받아요? 인사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사실 가만히 앉아 인사 받기 참으로 거북합니다.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고 하니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역사 하신 것일 뿐, 내가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킨 베드로와 요한을 성전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존경의 눈으로, 선망의 눈으로 쳐다봅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고 저들을 나무랍니다. 내가 한 일이 아니니 거북하게 나를 쳐다보지 말아달라고 소리지르는 베드로의 그 마음을 여러분은 이해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는 마땅히 이런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으면서도 결코 그 존경을 자기가 취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 존경을 자기가 취한다면 그는 도둑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 돌아갈 존경을 자기가 취하고,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자기가 취하는 사람은 도둑질을 한 사람이나 같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영광이 덜 돌아온다고 섭섭해하는데, 이처럼 유치한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 수고한 것에 대해서는 결코 보답을 바라는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섭섭하다느니, 안 알아준다느니 하는 인간적인 이야기가 오가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기대감을 가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 생각하고 한 일이기에 그것으로 그쳐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베드로의 훌륭함이 드러납니다. 그는 '어찌하여 우리를 주목하느냐'하고 전적으로 그 영광을, 그 존경을 사양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존경과 기대와 시선을, 영광을 그리스도께 돌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설교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말씀을 자세히 한번 보십시오. 먼저, 그는 이 사건을 십자가사건과 연계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사건 안에서 오늘의 이 사건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사십 년 된 앉은뱅이가 걷는 이적으로 마음 문이 열린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는 담대하게 십자가의 복음을 전합니다. 대단히 중요한 시간입니다. 십자가사건은 몇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당신들의 이야기라고 베드로는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에는 분명히 여러 사람이 관계되어 있습니다. 본문말씀에도 자세히 나타납니다. "빌라도가 놓아주기로 결안한 것을(13절)"하며 빌라도의 이름까지 거론합니다. 예수님을 가룟 유다가 팔았고, 가야바가 고소했고, 빌라도가 재판을 했으며, 로마군인이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 사건은 저들도 이미 다 아는 바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베드로가 하나 더 추가하여 꼬집어 말씀하는 것이 있습니다.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 너희가 직접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몇 사람의 충동에 의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지른 그 군중 역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설사 못박으라고 하지는 않았더라도 그 자리에 와서 가만히 구경만 한 것으로도 죄인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베드로는 바로 그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빌라도 만이 아니다, 바로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다, 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루터는 이 문제를 'once for all'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한번에 모든 사람을 위하여'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이 있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은 모든 사람을 위한 일일 뿐더러, 모든 사람이 한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이러한 연계성을, 관련성을 이해함으로부터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사건은 이천 년 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도 우리 앞에 있습니다. 오늘도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식을 바로 할 때에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것을 열심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 이것이 베드로 설교의 주제입니다.
두 번째로 베드로는 그 사건 안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하고자 합니다. 베드로는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15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죽였으나 하나님은 살리셨습니다. 보십시오. 이제 우리는 우리 죄로 말미암아 죽을 것이로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이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벌하고, 소망이 없기 때문에 멸하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살리셨습니다. 그렇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들도 살리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가 있습니다. 그로 인하여 두 가지 사건이 이루어집니다. 십자가에 못박은 일이 결정적인 죄로 인정되는 시간이요, 동시에 십자가에 못박은 죄를 용서하시는 시간입니다. 놀라운 이야기가 아닙니까? 십자가에 못박은 씻을 수 없는 그 죄를 용서하시는 놀라운 순간입니다. 베드로는 그 사건을 통하여 이렇듯 엄청난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베드로는 그 사건 안에서 예수님의 현존을 증거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주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바로 오늘 이 사건 속에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은 내가 한 일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의 신앙구조라고 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살아 계신 그리스도, 다시 오실 그리스도 - 이렇게 믿고 있습니다. 저들은 그리스도의 현존을, 그리스도께서 현재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사건이,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와 함께 하시는 사건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사건이 오늘 여기에 나타난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베드로 설교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우리가 신학적으로 좀 깊이 있게 살펴보아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이름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16절)." 그 이름이 낫게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앉은뱅이가 나았다고 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요, 그 이름이 오늘 이 자리에 나타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6절 말씀을 보면 '이름'이라는 말이 두 번에 걸쳐 강조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여기서 '이름'은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그 이름'을 부르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아무개야'하고 부르면 그 사람이 대답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결국, 이름은 그 존재와 나와의 만남의 관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름입니다. 이름은 존재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참으로 귀중한 것입니다. 십계명의 제 3계명을 보면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헛되이 함부로 부르지 말라 합니다.
비가 좀 안 온다고 해서 '하나님 맙소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함부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번 제가 이런 궤변을 편 일이 있습니다. 혈혈단신으로 월남하여 호적을 새로 만들 때입니다. 할아버지 이름을 묻기에 이름을 댔습니다. 다음으로 할머니 이름을 묻는데 도저히 기억이 안 납니다. 부끄럽지만 할머니 이름을 모르겠어요. 사실 광산 김씨라는 것만 알지 주위에서 할머니 이름 부르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한참을 고민하다 제가 호적기록 하는 사람에게 냅다 큰소리를 쳤지요. "어른의 이름은 함부로 부르는 것이 아니오"하고 말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이름을 어찌 함부로 부르겠습니까? 불경스럽게 말입니다. 아주 신중하게, 경건하게 옷깃을 여미고 불러야 합니다.
그 이름을 부름과 함께 그 이름의 존재와 능력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 그 사건이 예수님의 사건이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 그 집이 예수님의 집이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어지는 곳이 바로 성전 아닙니까?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름'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보듯이 예수님의 이름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사도행전의 곳곳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받고 병 고침 받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21)"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3:6)" "그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이 너희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3:16)"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4:10)"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4:30)" - '예수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존재가 드러납니다. '예수님 이름'이 곧 능력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은 절대로 주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당이 주문 외듯이 부르는 이름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보니 '예수님의 이름으로'에서 그치지 않고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하는 식으로 자꾸 앞에다 수식어를 가져다 붙이는데 별로 좋지 않은 현상입니다.
'거룩하신 예수의 이름으로'하면 낫고, '예수의 이름으로'하면 안 낫고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듯 수식이 많게, 길게 불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여러분,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그 이름' 앞에 서는 자세입니다. '그 이름'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경건입니다. 우리가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이름'을 불러도 믿음으로 불러야 합니다. 믿음으로 듣고 믿음으로 부를 때에 '예수의 이름'이 그 현장에 역사 하실 것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사도 베드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16절)." 헬라 원문에 '해피스티스 리아우토'라고 되어 있는 이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믿음의 대상이요 믿음의 주체라는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 - 이것은 우리의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계셔서 난 믿음입니다. 그냥 내 마음대로 '믿사옵니다' 해서 얻어지는 믿음이 아닙니다. 좀더 신학적으로 깊이 있게 해석하자면 '예수의 영이 역사 하여 난 믿음'이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아무나 병자를 보고 소리지른다고 낫는 것이 아닙니다.
환자를 보는 순간, 정말로 예수님의 영이 그 마음에 역사 하시어 감동함으로 엄청난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라'하는 소리를 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의지가 아닙니다. 자기 욕망도, 자기 희망도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난 믿음입니다. 성령께서 역사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이런 일을 많이 경험합니다.
환자를 위해서 기도해달라고 부탁해 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기는 하는데 그 마음은 싸늘할 때가 있습니다. 그 마음에 아무 감동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믿음이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때에는 환자를 대하는 순간에 벌써 그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믿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정말로 믿음이 생겨요. '반드시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어 낫게 하실 것이다'하는 믿음이 뜨겁게 솟아오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하나님, 이런 사람은 꼭 도와주셔야만 합니다'하는 간절한 마음이 생깁니다. 그런 마음으로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이 있습니다. 기적이 있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한다고 다 기도가 아닙니다. '믿사옵니다'하고 소리지른다 해서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속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믿음이 작동해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 앉은뱅이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하고 소리지를 자신 있는 분 있습니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렇게 했습니다.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체가 되시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의 주체가 되시어 오늘 이 자리에 역사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께 완전히 고용된 것입니다. 도구로, 그릇으로 쓰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베드로와 같은 믿음으로 '그 이름'을 의지할 때에 '그 이름'은 능력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건 상관없이 예수님께서는 같은 방법으로 역사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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