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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당하는 신자(사도행전 9:23~31)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그리하여 온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본문 가운데는 불신 당하는 신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사람 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예수를 증거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예수 믿는 사람됨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그 같은 고충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바로 사울이라는 사람입니다. 사울은 헬라파 유대인입니다. 헬라 말을 할 줄 알고 또 헬라문화권의 길리기아 다소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종교에 능통한 사람입니다. 헬라문화와 헬라철학과 히브리종교와 그 규례에, 율법적 지식에, 그리고 그쪽의 경건한 행위에 능숙한 사람입니다. 게다가 이 사람은 특별히 극렬한 바리새인입니다. 그의 율법적 열심으로 같은 유에 속하는 헬라파 유대인 스데반을 돌로 쳐죽이는 일에 가담했습니다. 그는 스데반이 당연히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마음에 차지 않아서 다메섹으로 피난을 간 기독교인들 을 추적해서 모조리 체포해 다가 잔멸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런 악한 열심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노상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십니다. 마침내 사울은 예수님의 포로가 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그리고 다메섹에 들어가서는 예수를 증거 하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고 죽이던 사람이 돌변해서 이제는 예수를 증거 하는 사람이 됩니다. 180도로 확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지금, 문제는 만만치 않습니다. 믿지 않는 일반의 유대인들은 이 사람이 배신했다고 해서 핍박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저 사람이 간첩이 아닌가 해서 핍박합니다. 경계합니다. 양쪽으로부터 다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를 믿으면서, 자기체험과 성경적 지식에 큰 변화가 오면서 즉시로 복음을 증거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20절). 적극적이고 행동적인 제자가 됩니다.
특별히 핍박을 당하게 될 때에 더욱 더 힘을 얻고 용기 있게 담대하게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 했습니다.
본문에 보면 유대사람들이 이제 바울을 죽이려고 합니다. 사람 이 사람을 죽인다는 문제, 참 심각한 것입니다. 때때로 보면 사람들은 모든 문제를 죽어서 해결하고 죽여서 해결하려고 합니다. 이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거든요. 내가 죽는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요 그 사건에 관계된 사람을 죽여 없앰으로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특별히 불 신앙의 사람들은 때때로 그 격한 감정으로 인하여 앞뒤를 돌아보지 않고 죽음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듭니다. 참으로 어리석고 미련한 짓입니다. 아무튼 유대사람들은 이 사울이라는 청년을 아예 없애버리려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첫째는 그가 동료 헬라파 유대인이기 때문입니다. 다시말 하면 자기네로 볼 때에는 배신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제일 미워하는 것이 배신입니다. 아예 처음부터 원수였다면 원수거니 생각하고, 처음부터 대적하던 자라면 으레 그런 줄로 압니다마는 내 편에 있다가, 나와 같은 편에서 같은 뜻으로 있다가 생각을 바꾸어 이탈함으로 해서 오히려 대적 편에 설 때에 이것은 적에 대하여 엄청난 이득을 주는 짓이거든요. 그리고 자기에게는 엄청난 불이익이 돌아옵니다. 그래서 배신이라는 것을 누구나 다 싫어합니다. 더구나 대결되어서 하나의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힘의 대결 속에서는 배신은 결정적인 사건이 됩니다.
저들은 배신자 사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자기네의 사상과 함께 하다가,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일도 같이하고 율법을 주장하는 일도 같이하고 예루살렘 성전과 제사장들을 중심해서 저들의 종교생활을 수호하는 일에도 함께 하던 사람이, 더구나 바리새파가 배신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를 죽이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야 됩니다. 이래서 회심이 어려운 것입니다. 이래서 회개가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도 믿지 않는 사람들과 같이 있다가 예수 믿고 회개하고 돌아오는 시간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생각할 때나 교회에서 생각할 때에는 그 사람은 회개하고 돌아온 사람입니다.
그러나 전에 있던 공동체 쪽에서는 배신자입니다. 모름지기 세상을 배신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을 행해서는 일단 배신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배신자가 되었으니 핍박도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에 따른 불이익이 많습니다. 이것을 각오해야 됩니다.
일반적으로 옛날에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더불어 술도 마시고 눌러도 다니고, 좋은 일도 하고 나쁜 일도 하고 하다가 이제 예수 믿는다고 해서 교회로 들어오게 되면 옛날의 친구들에 대해서는 이전처럼 어울려주지 않음으로 해서 자연히 배신자로 취급됩니다. 너 이럴 수 있냐? 의리를 끊을 거냐?…… 옛친구들로서는 할말이 많지요. 핍박 많이 받아야 됩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다는 것입니다. 헬라파 유대인인 사람들은 어떻게든 이 배신자 사울을 없애고자 했습니다. 신앙적으로 볼 때에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온 것이지만 세상적으로 볼 때에는 배신자였던 것입니다. 이런 아픔, 이런 어려움을 감수하지 아니하고는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어요. 배신자 되기 싫어서 한번은 이 사람하고 만나고 한번은 저 사람하고 만나고…… 양다리 걸쳐 왔다 갔다 하다가 시원찮게 되는 사람 많아요. 양자를 다 좋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로 나오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세계를 향하여 부득이 배신자가 된다, 그런고로 핍박도 받는다-----이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두 번째로, 저들은 바울이 지성인이기 때문에 죽이려고 했습니다. 무식한 사람이라면 무식한 사람이니 그러려니 하고 돌려버릴 수가 있겠는데 바울은 그런 사람이 아니거든요. 체계 있는 확실한 사람이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율법을 알지요, 바리새주의를 알지요, 저들의 약점도 헛점도 다 아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돌아섰기 때문에 감당할 수가 없어요. 특별히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입니다. 같은 신앙이라고 하지만 역시 지성인의 회심은 중요한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 갈릴리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가지고 이적을 행한다 뭘한다 할 때에, 방언을 하고 할 때에, 그 사람들이 무슨 소리로 비웃었습니까? 이, 갈릴리 사람들이 아니냐, '아그람마타' ---글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냐, 불학무식한 사람들이 아니냐, 촌사람들이 서울에 와 가지고 퍼레이드하고 떠드는구먼…… 이렇게 일축 해버릴 수가 있었어요. 그러나 스데반은 경우가 달라요. 사도 바울은 더욱 다릅니다. 이 사울이라는 사람은 지성인입니다. 이런 사람 하나가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유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낭패입니다.
대단히 노여운 일이지요.
제가 지난날 프린스턴 가서 공부할 때에, 어떤 교회에서 협동목 사 격으로 한 일 년쯤 봉사한 일이 있습니다. 거기서 고등부학생들 가르치는 것을 보았어요. 선생님이 누군가 했더니, 신앙도 없는 것 같고, 그렇게 많이 아는 것도 같지 않아요. 근처에 공장과 연구소가 많습니다. 대학도 많고요. 그런데 그 교회에서는 특별히 자연과학 분야의 연구실에 있는 ph. D 박사들을 돈줘가면서 불러옵니다. 그리고 원고도 대략 써주면서 그렇게 가르치라고 합니다. 자연과학 분야의 박사들이니 뭐라고 가르치겠어요. 옆에서 들어보니까 자신 있게 이야기하는 것도 아닙디다. 이 사람들이 '하나님은 분명히 계시다'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니 분명한 가르침이 되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이 얘기하는 것은 일축해버릴 수가 있지만 자연과학자가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데야 어쩌겠습니까? 고등학생들은 전부 아멘 하더군요. 이것 은 중요한 일입니다. 누가 이야기하느냐가 중요하거든요. 무식한 사람이 전도해봐야 무식한 소리한다고 일축해버릴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가말리엘 문하의 지성인이 말하는 것이니 저들로서는 큰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 하나의 회심이라는 것은 엄청나게 중요한 것입니다.
전도일도 하고 선교사도 되고 목사도 되고 합니다마는 결국 많은 지식이 있고 전도를 해야 효과적인 것입니다. 각별히 자연과학 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효력이 있어요. 중고등부 반사들 가운데 보면 대학교수님들이 많은데, 대단히 유익합니다. 서울대학 교수들이 반 사 하니까 아이들이 "아, 우리야 서울대학 못 가봤지만 그 교수님이라도 만나러 가자"하고들 나온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유리한 것입니다.
지성적 신앙이기 때문에 당할 수가 없어요. 당할 수 없으니까 죽여야지요. 다른 길이 없거든요. 말로는 못 당해요. 사도 바울이 율법을 얼마나 잘 압니까? 누구보다도 율법을 잘 아는 사람이 확 돌아 가지고 예수를 증거 하는데 어떻게 당하겠어요? 말 모자라면 주먹이 나가는 법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돼요. 여러분, 부부싸움 할 때 손찌검하면, 손찌검한 쪽이 진 것입니다. 왜요? 말 모자라니까 손찌검한 것이 아닙니까? 폭력을 휘두른 사람이 진 것입니다. 이론이 모자랐어요. 저들이 꼭 사울을 죽여야 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저들은 바울이 아주 높은 지성인이기 때문에 죽여야 했고, 뿐만 아니라 체험적 신앙이기 때문에 죽여야 했습니다. 자기들이 생각하는 것은 전부 추상적이요, 지식적이요, 관례적이요 율법적입니다마 는 사울이라는 사람이 말하는 내용은 어디까지나 체험적인 것이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 이에는 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같은 체험적 신앙이 무서웠던 것입니다. 도저히 이길 수가 없으니 해결의 길은 하나밖에 없었어요. 죽이는 길 밖에요. 죽여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 보니 다메섹에 있던 먼저 믿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를 광주리에 담아 가지고 성밖으로 달아 내려서 살렸다고 합니다. 저들이 온 성문을 다 지키면서 꼭 죽이려고 덤비니까 이렇게 해서 사울을 피신시켰다고 하는 이야깁니다. 참으로 위험한 일이었지요. 그러나 위험을 무릅쓰고 사울을 살려서 다른 성으로 가게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건너뛰고 있습니다마는 상당한 시간이 흐릅니다. 3년이라는 시간이 여기서 빠졌습니다. 바이스라고 하는 신학자는 갈라디아 1장 18절을 인용해서 바울이 아라비아로 가서 3 년을 지냈다고 생각합니다. 광야에 나가서 명상하며 기도하며 성경 을 읽으며…… 그렇게 신학적으로 정리하는 3년 세월을 지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서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예루살렘으로 일단 가 서 예수님의 제자들과 이미 믿는 사람들과 사귀려고 하는데 모두가 두려워합니다. 곁에 두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 옛날에 예수님을 잡아죽이던 사람이요, 그래서 공문을 받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던 사람이니 3년이 지나긴 했지만, 그리고 예수를 만났다, 회개를 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꺼림칙한 것입니다. 모두가 두려워합니다. 그의 제자됨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현실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사울의 입장에서는 참 답답했을 것입니다. 속을 내보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증명을 한단 말입니까? 나는 회개했소, 나는 예수의 제자요, 내가 예수를 만났소, 아무리 얘기를 해도 믿지를 않았습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사람들을 모아놓고 또 누구를 잡아가려고 하나…… 사람이 꼭 과거에 의해서 현재를 보기 때문에 사울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을 사람들은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마음으로 사람을 믿어야 하는데 저들은 사람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당연하기도 합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에는 당연합니다. 신의의 구축이라는 것이 이렇듯 어렵습니다. 서로서로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어떻게 해야 믿게 될 수 있습니까? 믿어야만 되겠는데 믿음을 준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우리가 지금 북녘 땅과 우리 남한, 서로가 믿지를 않아요. 제가 북녘 땅에 갔을 때에 제일 어려웠던 일이 이것이었습니다. 얘기를 아무리 해도 믿지를 않아요. 6․25가 남침이지만 그쪽에서는 북침이라고 합니다. 사십 년 동안을 북침이라고 배워왔기 때문에 저들은 철석같이 북침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지금 저 북한에서는 남쪽에서 쳐들어올 줄로만 생각하고 있어요. 벌벌 떨어요. "안 쳐들어옵니다, 안 들어와요, 걱정하지 마세요"해도 안 믿어요. 안 믿는 것입니다. "쳐들어올 이유가 없습니다. 무엇이 이롭다고 쳐들어오겠어요?" 이렇게 말해 주지만 저들은 남쪽에서 안 쳐들어올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헤겔 의 변증법적 이론으로 보면 약육강식이니까 남쪽에서 쳐들어오게 돼 있다는 것입니다. 동독이 서독에 흡수통일 되지 않았느냐 합니다. 우리가 경제적으로 어렵고 정치적으로 어렵고, 온 세계가 다 우리를 버리고 있다, 중국도 소련도 다 우리를 버리고 형편없이 어려운데 안 쳐들어올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곽 목사가 아무리 제대로 말한들 통합니까? "안 쳐들어옵니다. 왜 안 쳐들어오느냐, 당신들은 둘 중에 하나가 망해야 산다고 합니다. 그것이 당신들의 이론입니다만 우리는 안 그렇소. 당신 네가 살아야 우리도 삽니다. 우리는 공존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고 당신네들은 변증법적으로 한쪽이 죽어야 한다고 믿고 있소. 이게 다른 거요. 우리는 북조선 당신들이 살아야 남한 우리도 산다고 생각합니다"했더니 저들은 "다 목사님 같았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서 아니라는 것입니다.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해도 믿어야 뭘 하지요. 지금도 전쟁준비 하면서 벌벌 떨어요. 야단났어요. 내일이라도 당장 터질 것처럼 아우성을 치고 있거든요.
보십시오. 믿음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하면 믿게 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사울의 입장에서는 아주 복장 터질 노릇이지요. 내가 이렇게 예수 믿고, 이렇게 증거하고, 이렇게 3년이나 기도했는데, 아무리 소리질러도 믿어주지를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결국은 시간이 걸려요. 온유하고 겸손하게 기다려야 돼요. 그리고 앞으로 이런 사건 저런 사건을 당하면서 그 사건들 속에서 정말 믿는 사람이 됐다는 것이 증거 되어야 합니다. 사건 속에서 증거 되어야지 말로는 소용없어요. 사건 속에서 정거되어야 믿음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런고로 인내가 필요합니다. 실망하지 말 것입니다. 정말 오래오래 기다려야 됩니다. 온유 겸손하게, 나를 믿어달라고 하는 것처럼 맹랑한 말은 없어요.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불신을 당했는데 어떻게 해서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 믿는 제자들이 바울을 같은 제자로 영접하고 믿게 되었느냐-----그 과정이 참 중요해요. 본문에 그것이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는, 사도행전 7장 60절에 나타난 스데반의 임종기도를 생각케 합니다. 스 데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합니다. 그 어려운 시각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나님 앞에 용서를 위하여 기도했어요.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용서한다는 말은 단순한 감상이 아닙니다. 이제 또다시 핍박을 당하고 또다시 돌에 맞아죽는 일이 있다해도 이 기도는 살아 있습니다. 누가 핍박을 해도, 설사 이 사울이라는 사람이 우리를 핍박하기 위해서 여기에 왔고, 이렇게 탈을 쓰고 간첩 같은 일을 한다 하더라도 상관없어요. 다시 돌을 던져도 상관없어요. 그리스도인은 저를 용서해야 되니까요. 그런 마음이 아니고는 안됩니다. 어떤 위험이 있다 하더라도 현재로 그리스도인은 저를 용서해야 합니다.
또 그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허물을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주세요." 기도해야 합니다. 적극적인 용서입니다. 이 같은 신앙적 용서가 사울을 형제로 영접하게 합니다.
둘째는, 사도행전 9장 17절에서 아나니아의 사건을 보십시오.
이미 우리가 공부한 내용입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을 영접합니다. 그는 사울을 가서 만나라 하시는 주님의 지시를 받았을 때, 일단 거부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내가 세운 사람이다, 앞으로 그가 핍박을 많이 받을 것이다, 주의 일을 많이 할 것이다, 하십니다. 그래서 아나니아는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지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사울을 영접한 것입니다. 사울을 믿어서 사울을 영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믿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시니까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사울을 믿은 것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사울을 믿었지, 사울을 보고 사울을 믿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에 대해서 의심이 갑니까? 의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믿음으로 저 를 믿으세요. 하나님의 손안에 내가 있고 저가 있어요. 하나님의 능력 안에 내가 있고 저가 있습니다. 그런고로 사람을 의심하지 말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저를 믿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경륜을 믿고 있습니다.
인간적 지식으로써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지만 하나님의 역사라 고 믿기 때문에 아나니아는 사울을 믿었던 것입니다. 좀더 깊이 말씀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사람이기에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셨다고 하시기에 아나니아도 용서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자를 누가 저주할 것입니까? 하나님께 서 영접하신 사람을 누가 마다할 것입니까? 잊지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한 사람에게 누가 돌을 던질 것입니까? 나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셨는데 내가 나를 용서하지 않으면 되겠어요? 어떤 사람들은 자기에게 너무 후해서 걱정이 지만 너무 자기를 심판하는 사람이 있어요. 나는 죽일 놈이요 구제불능이다----하나님께서 필요해서 살려두셨는데 왜 구제불능입니까?
하나님께서 용서한 자를 왜 당신은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미 사울을 용서하셨어요. 이것을 알았다면 아나니아도 사울을 용서해야지요. 당연히 그래야 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높은 경륜이 여기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내가 불러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쓰게 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아멘 해야지요. 이것이 아나니아가 사울을 영접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똑같은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도 이 이야기를 듣고, 이 사건에 대한 적간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아나니아와 같은 신앙으로 사울을 영접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 오늘의 본문을 보면, 세 번째로 더 중요한 일이 있습 니다. 바나바라고 하는 인물의 중재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중보적 역할이 있었습니다. 참 중요한 일입니다. 누군가가 중간에서 수고를 해야 됩니다. 누군가가 믿음을 줄 수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바나바는 참 귀한 인물입니다. 이런 말이 있지요? 사람이 예수를 믿는 데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훌륭한 기독교인을 만나야 된다고 하지요? 훌륭한 기독교인을 한 사람이라도 만나보고야 예수 믿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한 사람을 못 만났어요. 공교롭게도 '예수쟁이'마다 다 못된 사람들입니다. 이런 경우라면 그 사람, 예수 못 믿게 돼요. 그러나 아무리 뜯어보아도 참 좋은 사람을 만났어요. 아 저분이면 좋겠다 싶은 사람, 세상에는 저런 사람도 있구나 싶은 기독교인을 만났다면 그 사람은 예수 믿기 쉬워진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에도 보면 지금 팽팽히 맞섰어요.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 이 바울을 영접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 앞에 뭐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바나바라는 사람 하나가 바울을 믿어줍니다. 이 사람은 큰 인물이요, 관용의 인물이요, 도량이 넓은 인물입니다. 바나바는 바울이라는 사람을 끝까지 천거합니다. 심지어는 마지막에 고향에 가 있는 것을 안디옥까지 데려다가 선교사를 만드는 데까지, 또 1차 전도여행까지 동행합니다. 직접으로는 큰일 한 것이 없는 것 같은데 바울을 천거하고 내세운 점에서 훌륭한 사람입니다. 덕 있는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모든 사람이 못 믿겠다고 하는데 바나바는 '바울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오, 믿어야 됩니다'하고 설득합니다. 따지고 보면 자기도 들은 이야기일 뿐 직접 본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믿지 않는데도 바나바는 믿었어요. 자기 명예를 걸고 보증을 합니다. 믿어야 합니다, 믿읍시다, 믿을만합니다, 믿어야 됩니다-----세상에는 이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직접적으로는 큰일 한 것이 없는 것 같은데 사도 바울을 사도 바울 되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사람이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좋은 사람도 알려지지 않고 묻혀 있으면 그만 기회를 얻지 못하고 마는 수가 많아요. 훌륭한 사람을 적재적소에 기용함으로써 큰일을 이룰 수 있는 것이거든요. 아까운 사람 썩히는 수가 많은 세상입니다. 그런데 바나바라는 사람은 사울이라는 사람을 알아보고 추천을 합니다. 그렇게 되게 된 연유가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첫째는 바나바 자신의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체험한 그 체험적 신앙에 대하여 믿기 시작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나타나셨다는 이야기에 대해서 그는 의심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붙들었다고, 사울이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울을 만나주셨다는 데 대해 전적으로 믿습니다. 이것은 신앙적 신뢰입니다. 그 점이 중요합니다. 그가 남보다 더 그리스도를 잘 믿고 더 간절히 믿고 하나님의 경륜을 확실히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가 여기에 있구나 하는 마음에서 이 사건을 이해하니까 사울의 이야기가 다 믿어지더라는 말이예요.
두 번째로는, 이 사람은 과거에 매이지 않았어요. 다른 사람들은 전부 과거를 생각합니다. 이 사람이 옛날에 스데반을 죽였고 이 사람이 다메섹을 가던 사람이라고, 자꾸 그것을 보고 현재를 보는데, 바나바는 그렇지 않았어요. 하나님을 보고 저를 보고, 그리스도를 보고 저를 보고, 십자가를 보고 저를 보았어요. 그리고 저의 미래를 보았어요. 미래에 의해서 현재를 보는 사람과, 과거를 근거로 해서 현재를 보는 사람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과거 지향적 인식을 가진 사람은 선입관을 버릴 수가 없어요. 이것이 문제입니다. 요새도 보면 사람을 고를 때에 이 사람은 과거에 어땠다, 이력이 어땠다, 몇 년 전에 무엇을 했다, 전과자다, 해서 아무도 쓰지를 않아요. 사도 바울로 말하면 최고전과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그게 없어요. 과거를 묻지 않아요. 그리고 현재와 미래를 봅니다. 하나님을 보고 이 사람을 봐요. 그리스도를 보고 이 사람을 봐요. 그러기에 바나바는 하나님을 믿고, 성령을 믿고, 사울을 믿었어요. 믿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믿어야 된다고 강조합니다. 신앙적으로 독려합니다. 마침내 모든 사람이 인정을 하고 바나바를 봐서, 저런 분이 저렇게 얘기하니 사실이구나 합니다. 설득력이 있어요. 감동이 됐어요. 모두가 마음을 열고 사울을 영접합니다.
마침내 오늘의 본문에 보니 바울은 제자들과 함께 있고, 그리고 예루살렘에 출입하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특별히 헬라파 유대인들과 변론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헬라파 유대인들과 얘기할 수준이 못됩니다. 헬라파 유대인들과 대결해서 하나님 말씀 을 전하는 데는 바울만이 적격자입니다. 그가 지성인이기 때문에 복음이 저들에게 전해지게 되었다고 하는 말입니다. "함께 담대히 복음을 증거 하였다"-마지막 말씀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31절을 보십시오.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합니다. 교회가 점점 부흥하더라 합니다.
불신당하는 신자(사도행전 9:23~31)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그리하여 온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본문 가운데는 불신 당하는 신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사람 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예수를 증거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예수 믿는 사람됨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그 같은 고충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바로 사울이라는 사람입니다. 사울은 헬라파 유대인입니다. 헬라 말을 할 줄 알고 또 헬라문화권의 길리기아 다소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종교에 능통한 사람입니다. 헬라문화와 헬라철학과 히브리종교와 그 규례에, 율법적 지식에, 그리고 그쪽의 경건한 행위에 능숙한 사람입니다. 게다가 이 사람은 특별히 극렬한 바리새인입니다. 그의 율법적 열심으로 같은 유에 속하는 헬라파 유대인 스데반을 돌로 쳐죽이는 일에 가담했습니다. 그는 스데반이 당연히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마음에 차지 않아서 다메섹으로 피난을 간 기독교인들 을 추적해서 모조리 체포해 다가 잔멸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런 악한 열심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노상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십니다. 마침내 사울은 예수님의 포로가 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그리고 다메섹에 들어가서는 예수를 증거 하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고 죽이던 사람이 돌변해서 이제는 예수를 증거 하는 사람이 됩니다. 180도로 확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지금, 문제는 만만치 않습니다. 믿지 않는 일반의 유대인들은 이 사람이 배신했다고 해서 핍박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저 사람이 간첩이 아닌가 해서 핍박합니다. 경계합니다. 양쪽으로부터 다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를 믿으면서, 자기체험과 성경적 지식에 큰 변화가 오면서 즉시로 복음을 증거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20절). 적극적이고 행동적인 제자가 됩니다.
특별히 핍박을 당하게 될 때에 더욱 더 힘을 얻고 용기 있게 담대하게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 했습니다.
본문에 보면 유대사람들이 이제 바울을 죽이려고 합니다. 사람 이 사람을 죽인다는 문제, 참 심각한 것입니다. 때때로 보면 사람들은 모든 문제를 죽어서 해결하고 죽여서 해결하려고 합니다. 이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거든요. 내가 죽는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요 그 사건에 관계된 사람을 죽여 없앰으로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특별히 불 신앙의 사람들은 때때로 그 격한 감정으로 인하여 앞뒤를 돌아보지 않고 죽음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듭니다. 참으로 어리석고 미련한 짓입니다. 아무튼 유대사람들은 이 사울이라는 청년을 아예 없애버리려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첫째는 그가 동료 헬라파 유대인이기 때문입니다. 다시말 하면 자기네로 볼 때에는 배신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제일 미워하는 것이 배신입니다. 아예 처음부터 원수였다면 원수거니 생각하고, 처음부터 대적하던 자라면 으레 그런 줄로 압니다마는 내 편에 있다가, 나와 같은 편에서 같은 뜻으로 있다가 생각을 바꾸어 이탈함으로 해서 오히려 대적 편에 설 때에 이것은 적에 대하여 엄청난 이득을 주는 짓이거든요. 그리고 자기에게는 엄청난 불이익이 돌아옵니다. 그래서 배신이라는 것을 누구나 다 싫어합니다. 더구나 대결되어서 하나의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힘의 대결 속에서는 배신은 결정적인 사건이 됩니다.
저들은 배신자 사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자기네의 사상과 함께 하다가,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일도 같이하고 율법을 주장하는 일도 같이하고 예루살렘 성전과 제사장들을 중심해서 저들의 종교생활을 수호하는 일에도 함께 하던 사람이, 더구나 바리새파가 배신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를 죽이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야 됩니다. 이래서 회심이 어려운 것입니다. 이래서 회개가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도 믿지 않는 사람들과 같이 있다가 예수 믿고 회개하고 돌아오는 시간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생각할 때나 교회에서 생각할 때에는 그 사람은 회개하고 돌아온 사람입니다.
그러나 전에 있던 공동체 쪽에서는 배신자입니다. 모름지기 세상을 배신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을 행해서는 일단 배신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배신자가 되었으니 핍박도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에 따른 불이익이 많습니다. 이것을 각오해야 됩니다.
일반적으로 옛날에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더불어 술도 마시고 눌러도 다니고, 좋은 일도 하고 나쁜 일도 하고 하다가 이제 예수 믿는다고 해서 교회로 들어오게 되면 옛날의 친구들에 대해서는 이전처럼 어울려주지 않음으로 해서 자연히 배신자로 취급됩니다. 너 이럴 수 있냐? 의리를 끊을 거냐?…… 옛친구들로서는 할말이 많지요. 핍박 많이 받아야 됩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다는 것입니다. 헬라파 유대인인 사람들은 어떻게든 이 배신자 사울을 없애고자 했습니다. 신앙적으로 볼 때에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온 것이지만 세상적으로 볼 때에는 배신자였던 것입니다. 이런 아픔, 이런 어려움을 감수하지 아니하고는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어요. 배신자 되기 싫어서 한번은 이 사람하고 만나고 한번은 저 사람하고 만나고…… 양다리 걸쳐 왔다 갔다 하다가 시원찮게 되는 사람 많아요. 양자를 다 좋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로 나오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세계를 향하여 부득이 배신자가 된다, 그런고로 핍박도 받는다-----이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두 번째로, 저들은 바울이 지성인이기 때문에 죽이려고 했습니다. 무식한 사람이라면 무식한 사람이니 그러려니 하고 돌려버릴 수가 있겠는데 바울은 그런 사람이 아니거든요. 체계 있는 확실한 사람이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율법을 알지요, 바리새주의를 알지요, 저들의 약점도 헛점도 다 아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돌아섰기 때문에 감당할 수가 없어요. 특별히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입니다. 같은 신앙이라고 하지만 역시 지성인의 회심은 중요한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 갈릴리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가지고 이적을 행한다 뭘한다 할 때에, 방언을 하고 할 때에, 그 사람들이 무슨 소리로 비웃었습니까? 이, 갈릴리 사람들이 아니냐, '아그람마타' ---글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냐, 불학무식한 사람들이 아니냐, 촌사람들이 서울에 와 가지고 퍼레이드하고 떠드는구먼…… 이렇게 일축 해버릴 수가 있었어요. 그러나 스데반은 경우가 달라요. 사도 바울은 더욱 다릅니다. 이 사울이라는 사람은 지성인입니다. 이런 사람 하나가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유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낭패입니다.
대단히 노여운 일이지요.
제가 지난날 프린스턴 가서 공부할 때에, 어떤 교회에서 협동목 사 격으로 한 일 년쯤 봉사한 일이 있습니다. 거기서 고등부학생들 가르치는 것을 보았어요. 선생님이 누군가 했더니, 신앙도 없는 것 같고, 그렇게 많이 아는 것도 같지 않아요. 근처에 공장과 연구소가 많습니다. 대학도 많고요. 그런데 그 교회에서는 특별히 자연과학 분야의 연구실에 있는 ph. D 박사들을 돈줘가면서 불러옵니다. 그리고 원고도 대략 써주면서 그렇게 가르치라고 합니다. 자연과학 분야의 박사들이니 뭐라고 가르치겠어요. 옆에서 들어보니까 자신 있게 이야기하는 것도 아닙디다. 이 사람들이 '하나님은 분명히 계시다'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니 분명한 가르침이 되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이 얘기하는 것은 일축해버릴 수가 있지만 자연과학자가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데야 어쩌겠습니까? 고등학생들은 전부 아멘 하더군요. 이것 은 중요한 일입니다. 누가 이야기하느냐가 중요하거든요. 무식한 사람이 전도해봐야 무식한 소리한다고 일축해버릴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가말리엘 문하의 지성인이 말하는 것이니 저들로서는 큰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 하나의 회심이라는 것은 엄청나게 중요한 것입니다.
전도일도 하고 선교사도 되고 목사도 되고 합니다마는 결국 많은 지식이 있고 전도를 해야 효과적인 것입니다. 각별히 자연과학 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효력이 있어요. 중고등부 반사들 가운데 보면 대학교수님들이 많은데, 대단히 유익합니다. 서울대학 교수들이 반 사 하니까 아이들이 "아, 우리야 서울대학 못 가봤지만 그 교수님이라도 만나러 가자"하고들 나온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유리한 것입니다.
지성적 신앙이기 때문에 당할 수가 없어요. 당할 수 없으니까 죽여야지요. 다른 길이 없거든요. 말로는 못 당해요. 사도 바울이 율법을 얼마나 잘 압니까? 누구보다도 율법을 잘 아는 사람이 확 돌아 가지고 예수를 증거 하는데 어떻게 당하겠어요? 말 모자라면 주먹이 나가는 법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돼요. 여러분, 부부싸움 할 때 손찌검하면, 손찌검한 쪽이 진 것입니다. 왜요? 말 모자라니까 손찌검한 것이 아닙니까? 폭력을 휘두른 사람이 진 것입니다. 이론이 모자랐어요. 저들이 꼭 사울을 죽여야 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저들은 바울이 아주 높은 지성인이기 때문에 죽여야 했고, 뿐만 아니라 체험적 신앙이기 때문에 죽여야 했습니다. 자기들이 생각하는 것은 전부 추상적이요, 지식적이요, 관례적이요 율법적입니다마 는 사울이라는 사람이 말하는 내용은 어디까지나 체험적인 것이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 이에는 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같은 체험적 신앙이 무서웠던 것입니다. 도저히 이길 수가 없으니 해결의 길은 하나밖에 없었어요. 죽이는 길 밖에요. 죽여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 보니 다메섹에 있던 먼저 믿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를 광주리에 담아 가지고 성밖으로 달아 내려서 살렸다고 합니다. 저들이 온 성문을 다 지키면서 꼭 죽이려고 덤비니까 이렇게 해서 사울을 피신시켰다고 하는 이야깁니다. 참으로 위험한 일이었지요. 그러나 위험을 무릅쓰고 사울을 살려서 다른 성으로 가게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건너뛰고 있습니다마는 상당한 시간이 흐릅니다. 3년이라는 시간이 여기서 빠졌습니다. 바이스라고 하는 신학자는 갈라디아 1장 18절을 인용해서 바울이 아라비아로 가서 3 년을 지냈다고 생각합니다. 광야에 나가서 명상하며 기도하며 성경 을 읽으며…… 그렇게 신학적으로 정리하는 3년 세월을 지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서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예루살렘으로 일단 가 서 예수님의 제자들과 이미 믿는 사람들과 사귀려고 하는데 모두가 두려워합니다. 곁에 두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 옛날에 예수님을 잡아죽이던 사람이요, 그래서 공문을 받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던 사람이니 3년이 지나긴 했지만, 그리고 예수를 만났다, 회개를 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꺼림칙한 것입니다. 모두가 두려워합니다. 그의 제자됨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현실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사울의 입장에서는 참 답답했을 것입니다. 속을 내보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증명을 한단 말입니까? 나는 회개했소, 나는 예수의 제자요, 내가 예수를 만났소, 아무리 얘기를 해도 믿지를 않았습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사람들을 모아놓고 또 누구를 잡아가려고 하나…… 사람이 꼭 과거에 의해서 현재를 보기 때문에 사울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을 사람들은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마음으로 사람을 믿어야 하는데 저들은 사람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당연하기도 합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에는 당연합니다. 신의의 구축이라는 것이 이렇듯 어렵습니다. 서로서로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어떻게 해야 믿게 될 수 있습니까? 믿어야만 되겠는데 믿음을 준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우리가 지금 북녘 땅과 우리 남한, 서로가 믿지를 않아요. 제가 북녘 땅에 갔을 때에 제일 어려웠던 일이 이것이었습니다. 얘기를 아무리 해도 믿지를 않아요. 6․25가 남침이지만 그쪽에서는 북침이라고 합니다. 사십 년 동안을 북침이라고 배워왔기 때문에 저들은 철석같이 북침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지금 저 북한에서는 남쪽에서 쳐들어올 줄로만 생각하고 있어요. 벌벌 떨어요. "안 쳐들어옵니다, 안 들어와요, 걱정하지 마세요"해도 안 믿어요. 안 믿는 것입니다. "쳐들어올 이유가 없습니다. 무엇이 이롭다고 쳐들어오겠어요?" 이렇게 말해 주지만 저들은 남쪽에서 안 쳐들어올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헤겔 의 변증법적 이론으로 보면 약육강식이니까 남쪽에서 쳐들어오게 돼 있다는 것입니다. 동독이 서독에 흡수통일 되지 않았느냐 합니다. 우리가 경제적으로 어렵고 정치적으로 어렵고, 온 세계가 다 우리를 버리고 있다, 중국도 소련도 다 우리를 버리고 형편없이 어려운데 안 쳐들어올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곽 목사가 아무리 제대로 말한들 통합니까? "안 쳐들어옵니다. 왜 안 쳐들어오느냐, 당신들은 둘 중에 하나가 망해야 산다고 합니다. 그것이 당신들의 이론입니다만 우리는 안 그렇소. 당신 네가 살아야 우리도 삽니다. 우리는 공존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고 당신네들은 변증법적으로 한쪽이 죽어야 한다고 믿고 있소. 이게 다른 거요. 우리는 북조선 당신들이 살아야 남한 우리도 산다고 생각합니다"했더니 저들은 "다 목사님 같았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서 아니라는 것입니다.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해도 믿어야 뭘 하지요. 지금도 전쟁준비 하면서 벌벌 떨어요. 야단났어요. 내일이라도 당장 터질 것처럼 아우성을 치고 있거든요.
보십시오. 믿음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하면 믿게 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사울의 입장에서는 아주 복장 터질 노릇이지요. 내가 이렇게 예수 믿고, 이렇게 증거하고, 이렇게 3년이나 기도했는데, 아무리 소리질러도 믿어주지를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결국은 시간이 걸려요. 온유하고 겸손하게 기다려야 돼요. 그리고 앞으로 이런 사건 저런 사건을 당하면서 그 사건들 속에서 정말 믿는 사람이 됐다는 것이 증거 되어야 합니다. 사건 속에서 증거 되어야지 말로는 소용없어요. 사건 속에서 정거되어야 믿음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런고로 인내가 필요합니다. 실망하지 말 것입니다. 정말 오래오래 기다려야 됩니다. 온유 겸손하게, 나를 믿어달라고 하는 것처럼 맹랑한 말은 없어요.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불신을 당했는데 어떻게 해서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 믿는 제자들이 바울을 같은 제자로 영접하고 믿게 되었느냐-----그 과정이 참 중요해요. 본문에 그것이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는, 사도행전 7장 60절에 나타난 스데반의 임종기도를 생각케 합니다. 스 데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합니다. 그 어려운 시각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나님 앞에 용서를 위하여 기도했어요.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용서한다는 말은 단순한 감상이 아닙니다. 이제 또다시 핍박을 당하고 또다시 돌에 맞아죽는 일이 있다해도 이 기도는 살아 있습니다. 누가 핍박을 해도, 설사 이 사울이라는 사람이 우리를 핍박하기 위해서 여기에 왔고, 이렇게 탈을 쓰고 간첩 같은 일을 한다 하더라도 상관없어요. 다시 돌을 던져도 상관없어요. 그리스도인은 저를 용서해야 되니까요. 그런 마음이 아니고는 안됩니다. 어떤 위험이 있다 하더라도 현재로 그리스도인은 저를 용서해야 합니다.
또 그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허물을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주세요." 기도해야 합니다. 적극적인 용서입니다. 이 같은 신앙적 용서가 사울을 형제로 영접하게 합니다.
둘째는, 사도행전 9장 17절에서 아나니아의 사건을 보십시오.
이미 우리가 공부한 내용입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을 영접합니다. 그는 사울을 가서 만나라 하시는 주님의 지시를 받았을 때, 일단 거부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내가 세운 사람이다, 앞으로 그가 핍박을 많이 받을 것이다, 주의 일을 많이 할 것이다, 하십니다. 그래서 아나니아는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지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사울을 영접한 것입니다. 사울을 믿어서 사울을 영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믿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시니까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사울을 믿은 것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사울을 믿었지, 사울을 보고 사울을 믿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에 대해서 의심이 갑니까? 의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믿음으로 저 를 믿으세요. 하나님의 손안에 내가 있고 저가 있어요. 하나님의 능력 안에 내가 있고 저가 있습니다. 그런고로 사람을 의심하지 말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저를 믿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경륜을 믿고 있습니다.
인간적 지식으로써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지만 하나님의 역사라 고 믿기 때문에 아나니아는 사울을 믿었던 것입니다. 좀더 깊이 말씀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사람이기에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셨다고 하시기에 아나니아도 용서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자를 누가 저주할 것입니까? 하나님께 서 영접하신 사람을 누가 마다할 것입니까? 잊지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한 사람에게 누가 돌을 던질 것입니까? 나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셨는데 내가 나를 용서하지 않으면 되겠어요? 어떤 사람들은 자기에게 너무 후해서 걱정이 지만 너무 자기를 심판하는 사람이 있어요. 나는 죽일 놈이요 구제불능이다----하나님께서 필요해서 살려두셨는데 왜 구제불능입니까?
하나님께서 용서한 자를 왜 당신은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미 사울을 용서하셨어요. 이것을 알았다면 아나니아도 사울을 용서해야지요. 당연히 그래야 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높은 경륜이 여기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내가 불러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쓰게 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아멘 해야지요. 이것이 아나니아가 사울을 영접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똑같은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도 이 이야기를 듣고, 이 사건에 대한 적간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아나니아와 같은 신앙으로 사울을 영접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 오늘의 본문을 보면, 세 번째로 더 중요한 일이 있습 니다. 바나바라고 하는 인물의 중재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중보적 역할이 있었습니다. 참 중요한 일입니다. 누군가가 중간에서 수고를 해야 됩니다. 누군가가 믿음을 줄 수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바나바는 참 귀한 인물입니다. 이런 말이 있지요? 사람이 예수를 믿는 데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훌륭한 기독교인을 만나야 된다고 하지요? 훌륭한 기독교인을 한 사람이라도 만나보고야 예수 믿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한 사람을 못 만났어요. 공교롭게도 '예수쟁이'마다 다 못된 사람들입니다. 이런 경우라면 그 사람, 예수 못 믿게 돼요. 그러나 아무리 뜯어보아도 참 좋은 사람을 만났어요. 아 저분이면 좋겠다 싶은 사람, 세상에는 저런 사람도 있구나 싶은 기독교인을 만났다면 그 사람은 예수 믿기 쉬워진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에도 보면 지금 팽팽히 맞섰어요.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 이 바울을 영접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 앞에 뭐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바나바라는 사람 하나가 바울을 믿어줍니다. 이 사람은 큰 인물이요, 관용의 인물이요, 도량이 넓은 인물입니다. 바나바는 바울이라는 사람을 끝까지 천거합니다. 심지어는 마지막에 고향에 가 있는 것을 안디옥까지 데려다가 선교사를 만드는 데까지, 또 1차 전도여행까지 동행합니다. 직접으로는 큰일 한 것이 없는 것 같은데 바울을 천거하고 내세운 점에서 훌륭한 사람입니다. 덕 있는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모든 사람이 못 믿겠다고 하는데 바나바는 '바울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오, 믿어야 됩니다'하고 설득합니다. 따지고 보면 자기도 들은 이야기일 뿐 직접 본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믿지 않는데도 바나바는 믿었어요. 자기 명예를 걸고 보증을 합니다. 믿어야 합니다, 믿읍시다, 믿을만합니다, 믿어야 됩니다-----세상에는 이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직접적으로는 큰일 한 것이 없는 것 같은데 사도 바울을 사도 바울 되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사람이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좋은 사람도 알려지지 않고 묻혀 있으면 그만 기회를 얻지 못하고 마는 수가 많아요. 훌륭한 사람을 적재적소에 기용함으로써 큰일을 이룰 수 있는 것이거든요. 아까운 사람 썩히는 수가 많은 세상입니다. 그런데 바나바라는 사람은 사울이라는 사람을 알아보고 추천을 합니다. 그렇게 되게 된 연유가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첫째는 바나바 자신의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체험한 그 체험적 신앙에 대하여 믿기 시작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나타나셨다는 이야기에 대해서 그는 의심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붙들었다고, 사울이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울을 만나주셨다는 데 대해 전적으로 믿습니다. 이것은 신앙적 신뢰입니다. 그 점이 중요합니다. 그가 남보다 더 그리스도를 잘 믿고 더 간절히 믿고 하나님의 경륜을 확실히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가 여기에 있구나 하는 마음에서 이 사건을 이해하니까 사울의 이야기가 다 믿어지더라는 말이예요.
두 번째로는, 이 사람은 과거에 매이지 않았어요. 다른 사람들은 전부 과거를 생각합니다. 이 사람이 옛날에 스데반을 죽였고 이 사람이 다메섹을 가던 사람이라고, 자꾸 그것을 보고 현재를 보는데, 바나바는 그렇지 않았어요. 하나님을 보고 저를 보고, 그리스도를 보고 저를 보고, 십자가를 보고 저를 보았어요. 그리고 저의 미래를 보았어요. 미래에 의해서 현재를 보는 사람과, 과거를 근거로 해서 현재를 보는 사람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과거 지향적 인식을 가진 사람은 선입관을 버릴 수가 없어요. 이것이 문제입니다. 요새도 보면 사람을 고를 때에 이 사람은 과거에 어땠다, 이력이 어땠다, 몇 년 전에 무엇을 했다, 전과자다, 해서 아무도 쓰지를 않아요. 사도 바울로 말하면 최고전과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그게 없어요. 과거를 묻지 않아요. 그리고 현재와 미래를 봅니다. 하나님을 보고 이 사람을 봐요. 그리스도를 보고 이 사람을 봐요. 그러기에 바나바는 하나님을 믿고, 성령을 믿고, 사울을 믿었어요. 믿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믿어야 된다고 강조합니다. 신앙적으로 독려합니다. 마침내 모든 사람이 인정을 하고 바나바를 봐서, 저런 분이 저렇게 얘기하니 사실이구나 합니다. 설득력이 있어요. 감동이 됐어요. 모두가 마음을 열고 사울을 영접합니다.
마침내 오늘의 본문에 보니 바울은 제자들과 함께 있고, 그리고 예루살렘에 출입하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특별히 헬라파 유대인들과 변론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헬라파 유대인들과 얘기할 수준이 못됩니다. 헬라파 유대인들과 대결해서 하나님 말씀 을 전하는 데는 바울만이 적격자입니다. 그가 지성인이기 때문에 복음이 저들에게 전해지게 되었다고 하는 말입니다. "함께 담대히 복음을 증거 하였다"-마지막 말씀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31절을 보십시오.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합니다. 교회가 점점 부흥하더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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