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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료 18,185편 ◑/곽선희목사 설교 1,910편

흩어진 자의 사명(사도행전 8:1~4)

by 【고동엽】 2023.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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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진 자의 사명(사도행전 8:14)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이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오늘의 본문말씀은 스데반의 장렬한 순교에 뒤따르는 구속사적 말씀입니다. 선교의 무대가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옮겨지는 사건 을 보게 됩니다. 선교의 무대가 바뀌는 전환점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 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1 : 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연못에 돌을 던지면 파문이 일듯 복음이 그 중심부에서부터 지 정학적으로 그렇게 퍼져나가게 되는데, 본문에 나타난 내용은 예루살렘을 떠나서 사마리아로 가는 선교의 전환점을, 선교의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흔히들 이런 말을 합니다. '만일에 이 사건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기독교는 분명히 예루살렘에 안주하려고 했을 것이다.

예루살렘사람들끼리만 예수 믿느라 이방사람에게 복음 전하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렸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신 당부의 말씀도 저들은 실천하지 못했을 것이다.' 좀 전문적인 이야기입니다 마는 교회사를 연구해보면 기독교를 받아들인 유럽의 나라들 전부가 자기 사는 마을, 자기 사는 도시, 자기 사는 나라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곧 민족종교로서입니다. 유럽에는 기독교를 국교로 정한 나라가 많습니다. 국교로 정했다는 것은 저네의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를, 저네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바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테면 독일을 보십시오. 루터는 종교개혁을 단행한 뒤 독일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나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해서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는 데에 크게 공헌했습니다마는, 그 역시 선교를 대해서 는 별로 생각지 않았습니다. 전반적으로 루터의 신학에는 선교가 없습니다. 내 민족, 내 나라만을 생각했습니다. 칼벵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네바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영국은 영국대로, 로마는 로마대로,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저마다 자기네 나라에 하나 님의 나라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자기 민족과 자기 나라 안에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려 했습니다. '이 나라를 진정 주님께 서 기뻐하시는 이상 세계로 만들어보리라'하는 데에 집착하여 다른 나라 사람을 구하고, 이방세계에 복음을 전하고 하는 사명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일반적인 성향이었습니다. 누구나 그렇습니다. 누구나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더욱 그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곳이 바로 주님 계시던 곳이요, 주님 승천하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모습을 보고 천사들이 제자들을 향하여 "본 그대로 오시라(1:11)"라고 말씀했거든요. 따라서 저들은 '반드시 저 감람산에 주님 다시 오실 것이다' 전제하고 우리끼리만 열심히 믿고, 우리끼리만 전도하다가 주님의 재림을 맞아야 되겠다는 생각만 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 생각이 협소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뜨릴 방도가 없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선교적 동기가 참으로 새로운 차원에서 이루어집니다. 새삼 신앙적 지식이 높아지고 선교적 정열이 생 겨서 아, 사마리아로 가 복음을 전해야겠다, 로마로 가 복음을 전해야겠다, 서아시아로 가 복음을 전해야겠다, 라고 저들 스스로가 생각 을 바로 했던 것이 아닙니다.

저들이 어떻게 해서 사마리아로 가게 되었습니까? 본문은 이에 대하여 아주 오묘한 진리의 말씀을 합니다.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1)"-박해 때문에, 핍박 때문에 더는 예루살렘에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다가는 죽게 생겼습니다.

살기 위하여 하는 수없이 사마리아로 피해간 것입니다. 사마리아는 저들이 아주 더럽게 여기는 땅입니다. 생리적으로 가고 싶지 않은 곳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그리로 피난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피난을 가 거기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저들은 새로운 용기를 얻게 됩니다. '왜 우리가 여기에 와야 했던가,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로 보내셨는가'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매 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는 '하나님의 선교전략'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선교전략-우리의 생각과는 그 차원이 다릅니다.

어디로 어떻게 가서 복음을 전하고, 어떤 선교사업을 하고, 어떤 학교를 세우고 하는 우리의 선교전략과는 사뭇 다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보는바, 지금 저들은 박해에 쫓겨서, 핍박에 쫓겨서 사마리아로 숨어 들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국 이로써 선 교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입니다. 아무도 피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선교전략은 박해 와 고난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깊이 생각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나 국가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하나님께서는 고난과 핍박과 환난을 통하여 큰 역사를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신비로운 역사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역경은 우리가 원치 않는 현실이자 본래 받았던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엄연한 현실로 닥치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러한 사건을 통하여 주님은 선교적 역사를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본문은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1)"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누가가 사울을 들고 나오는 것은 의도적인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사울이 회개하고 바울이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울의 옛 모습을 구태여 여기에서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이렇게도 악하고 이렇게도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사도 바울이 되었다, 그리고 그 평생을 하나님 앞에 바쳤다----이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 생각하면 부끄럽고 숨기고 싶은 과거이지만 숨김없이 노출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에 나타난 사건입니다.

사울은 예수님의 사람을 죽였습니다.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죽이는 것을 마땅하게 여겼습니다. 당연히 죽여야 할 자를 죽였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스데반을 죽일 때에는 물론 죽여야 하겠다고 생각해서 죽였지만, 그가 죽은 다음에도 사울은 죽여야 할 사람을 죽인 것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전혀 후회가 없었습니다. 그렇듯 철저하게 종교화하고 교리화하고 신학화한 태도였다는 것입니다. 그 행위는 단순한 우연적 행위가 아닙니다. 어쩌다가 불끈해서 칼로 찔렀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부지불식간에 감정이 폭발해서 사건을 일으켰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의도적으로 일으킨 사건입니다. 꼭 죽여야 할 사람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합당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잘한 일이라 고 생각했습니다. 신앙적으로 율법적으로 당연히 그리해야 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또한 사울은 교회를 잔멸하려 했습니다.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3)"-여기서 '잔멸하다'라는 말을 헬라 원문대로 살펴보면 그 뜻이 재미있습니다. '멧돼지가 포도원을 짓밟는다'라는 뜻입니다. 멧돼지가 포도원에 들어가서 마구 닥치는 대로 짓밟는다고 생각 해보십시오. 포도원 망치고 마는 것이지요. 바로 사울이 미친 멧돼지처럼 교회를 핍박했다는 것입니다. 닥치는 대로 교인을 잡아들이고, 닥치는 대로 죽이려 했습니다. 아주 악랄했습니다. 뒤에 공부하겠습니다 마는, 그가 다메섹까지 가려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시로 보 면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는 상당히 먼 거리입니다. 그 먼 데까지 가서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오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예루살렘에서 그곳으로 피난 가 있는 사람들을 말입니다. 그 정도로 극악한 사람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사도 바울의 옛사람, 곧 사울의 모습입니다. 이렇듯 난폭하고, 이렇듯 철저하게 악한 사람이 뒤에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회적 만남으로 말미암아 180도로 확 변하고, 오직 예수님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는 사람 이 됩니다. 이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바울의 옛 모습을 그대로 숨김없이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큰 핍박이 있을 때에 스데반이 죽었습니다. 그 핍박은 뒤를 이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줄줄이 체포당합니다. 결국 그들은 이 핍박을 피하여 각지로 흩어집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사도들만 남고는 다 흩어졌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니 사도들만 용기가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여러분, 직접신앙과 간접신앙-여기에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나본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와 부활을 분명히 알고 있기에 당장에 죽는다 해도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에게 들어서 믿은 사람들의 신앙은 간접신앙입니다. 간접적으로 받은 신앙이기에 핍박이 따르자 두려움이 생긴 것입니다. 이렇듯 직접 체험한 신앙을 가진 자와 체험한 자로부터 들어서 믿는 자와는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직접신앙으로 말미암아 사도들은 용기가 있고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순교를 각오하고 예루살렘을 지키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은 것은, 비굴하게 도망가지 않은 것은 이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은 이유는 또 있습니다. 핍박으로 말미암아 재산과 가족을 다 잃어버린 교인들이 많았습니다. 핍박 때문에 도망간 사람들의 남은 가족들은 이제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그래서 이 남은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책임지고 사도들이 남아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이런 해석도 있습니다. 원래 스데반은 헬라파 유대인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먼저 순교 당하지 않고 스데반이 첫번으로 순교 당했습니까? 당시에 헬라파 유대인들은 지성인 축에 드는 교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저들의 공격 목표는 헬라 파 유대인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수적 유대인인 베드로, 요한, 야고보들은 핍박의 대상에서 제외된 것이다, 그래서 도망가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이 때에 헬라파 유대인인 스데반은 순교 당했습니다. 이로써 헬라파 유대인에 속한 사람들이 더 많이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계기가 되어 저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게 된 것입니다.

저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기 전에 먼저 스데반을 장사했습니다.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2)." 여 기에 '경건한 사람들'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참 아름다운 말입니다.

특별히 이 '경건'이라는 말을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아주 조심성 있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고넬료를 가리켜 경건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경건하다고 말씀합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일으켰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우러러보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12)"라고 말씀하는 대 목이 나옵니다. 원래 '경건'이라는 말은 유대사람에게만 쓰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에게 붙여지는 말입니다.

'두려워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의 신 앙 생활을 총괄한 하나의 용어가 바로 이 '경건'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슨 말로 칭찬을 들어야 합니까? 무슨 말로 칭찬을 해야 합니까? 누구에게 말할 때에, 특히나 믿는 사람들끼리 말할 때에 "아무개 집사님 참 똑똑하셔"한다면 이것은 욕이겠습니까, 칭찬이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에게 이 말은 별로 좋은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나쁘다는 말입니다. 똑똑하니까 자기 앞가림이나 한 다는 것입니다. 이기적이라는 것입니다. 덕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들어야 할 제일 좋은 말로 저는 두 가지를 생각 해봅니다. 하나는 "저 사람은 참 경건해"하는 것이요, 둘은 "저 사람 은 참 진실해"하는 것입니다.

'경건'은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사람을 대하면서도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가정 일이든, 직장 일이든…… 모든 일에서 언제나 하나님을 먼저 생각합니다. 수직적 관계를 크게 여 기고, 수평적 관계를 작게 여기는 이 같은 사람을 경건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보면 사람과의 관계만 너무 크게 생각해서 심지 어 교회에 나와서도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하는 것보다는 옆에 누가 앉았나 하고 주위를 자꾸 둘러보기나 합니다. 그리고 남들이 나를 예쁘게 보나 안 보나 신경을 쓰느라 예배를 보다말고는 거울을 보 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을 보느라면 '별로 볼만한 얼굴도 아닌데 무얼 저리도 거울을 보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듯 사람에게만 신경을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저 사람과 악수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악수를 할 때 꽉 잡고 해야 하나 어쩌나 하는 따위의 쓸데없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것이 전부 수평적 관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은 수직적 관계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까 하는 데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이것이 경건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뵙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경건한 사람입니다. 수직적 관계는 극대화하고, 수평적 관계는 극소화하는, 그런 관계를 경건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경건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본래 경건이라는 것은 지극히 유대주의적인 사람에게 붙여지는 말입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같은 사람에게 적용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누가는 이 '경건'을 그렇게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잘 믿는 사람이 경건한 사람이라고 말씀했다는 데에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의도적이었습니다. 매우 중요합니다. 오히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볼 때에는 예수믿는 사람들이 이단이었습니다. 아주 못된 생각이지요. 그런데 도 불구하고 누가는 예수 믿는 사람이야말로 정말 경건한 사람이다, 하나님 잘 믿는 사람이다, 라고 전제했습니다. 그래서 "경건한 사람들 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라고 말씀할 수 있었습니다. 크리스찬을 경건한 사람이라고 말씀한 데에 대단히 깊은 뜻이 있습니다.

스데반을 장사하고 그를 위하여 크게 울더라도 본문은 말씀합니다. '운다'라는 말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봅시다. 여기에 그리스도 인의 울음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을 보십시오. 뒤에 다시 살아나기는 했습니다마는, 어쨌든 나사로가 죽었다고 했을 때에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35). 물론 우리는 소망도 있고, 영생도 믿습니다. 부활도 믿습니다. 그러나 인간이기에 슬픔이 있습니다. 인간 적인 정이 끊어지고, 지금까지 볼 수 있었던 사람을 이제는 육적인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이 죽었을 때에 우리는 눈물을 흘립니다. 성경은 이것을 인정합니다. 믿음 없는 사람처럼 왜 우느냐, 예수 믿는 사람이 왜 눈물을 흘리느냐, 라고 책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셨으니까요. 우리가 그 깊은 뜻을 알건 모르건 간에 예수님께서도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울음에 대한 휴머니즘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이 죽었을 때에, 젊은 사람, 용기 있는 사람, 할일 많은 사람, 믿음 굳은 사람이 이렇듯 비참하게 돌에 맞아 죽었을 때에 경건한 사람들이 장례를 치르면서 울었던 것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이 울음은 길게 울어서는 안 되는 울음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스데반을 위하여 크게 울었다고 합니다. 글쎄요. 얼마나 울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어쨌든 이 울음 자체에 대 하여 한번 숙고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왜 울었을까?'하는 질문이 따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골고다 언덕으로 향할 때에 뒤를 따르던 여인들이 예수님을 위하여 울었습니다.

이를 보시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23 : 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제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스데반을 위하여 울고 있는 저들을 보신다면 뭐라고 말씀하실 것 같습니까?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이 사람들아 스데반을 위하여 울지 말라." 신학대학 다닐 때에 지금은 작고하신 박형용 박사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한국교회에 큰 발자취를 남긴 신학자입니다. 언젠가 한번 그분이 고난주간에 설교를 하셨는데 그 설교제목이 좀 길었어요. 오늘의 이 본문말씀을 놓고, '스데반을 위하여 울지 말라'하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셨습니다. 아주 시적인 설교였습니다. 단 한번도 얼굴을 드시지 않고 써 가지고 온 원고를 그대로 줄줄 읽는데, 듣고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누구 할 것 없이 크게 감동하고 많이 울었습니다. 제가 뒤에 그 원고를 얻어냈습니다. 그 때는 녹음도 못할 때니까요. 그 원고를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스데반을 위하여 울지 말라'-여기에는 정말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 시간에 그 말씀을 다 드릴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라 하시던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들아 스데반을 위하여 울지 말라. 스데반은 가장 귀한 인생을 살았고 가장 고귀한 죽음을 맞았느니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순교란 최고의 영광입니다. 여러 분이 아무리 순교하고 싶다 하더라도 이 순교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주시는 은사입니다. 순교도 기회가 와야 합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순교사를 자세히 보면 알 수 있듯이 정말 깨끗한 순교라는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정치적으로 그만 잘못 걸려들어서 죽었습니다. 그런 경우가 많았습니다. 스데반 같은, 그렇듯 깨끗한 순교는 하나의 지고하게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원수 들 앞에서 귀한 설교의 말씀을 길게 펴고, 천사의 얼굴로 돌에 맞아 죽는 장렬한 순교를 했습니다. 이런 죽음 앞에서 울어야 하겠습니까? 찬송을 드려야지요. 좀더 나아가 부끄러워해야지요. 저와 같이 죽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야지요. 스데반과 같이 못 죽었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살아 있다는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런 순간이라면 말입니다.

제가 잘 아는 목사님 가운데 특별히 저를 아껴준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두 살 된 저를 안고 찍은 사진을 제가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남쪽으로 내려온 뒤에 그 목사님을 뵐 수가 없었습니다. 분명히 남한에 계시다는 것은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뒤에 수소문해보니 문둥병환자들 속에 들어가서 목회활동을 하시고 있더군요. 언젠가 그 교회에 집회를 인도하러 간 적이 있습니다. 그 때에 "목사님, 아주 큰 일을 많이 하실 수 있는 분이 왜 서울 같은 곳에서 일하시지 않고 이런 벽지에 고생하고 있습니까?"하고 물어보았습니다. 그 목사님 아주 담담하게 그 이유를 들려주시더군요. "왜정 말년에 내가 신사참배를 했거든. 끌려가면 죽을 것이 뻔하기 때문에 죽지 않으려고 신사참배를 했어. 그래서 죽음을 면했지. 그리고 해방된 후 감옥에서 고생하던 사람들이 나와서 역사 하는데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있어야 지. 죽어야 할 시간에 죽지 못했으니 말이야. 죽지 못한 부끄러움을 가지고 내가 어찌 고개를 들고 다니겠나. 그래서 아무도 오고 싶어하지 않는 이곳에 와서 일생을 살기로 했네." 여러분, 어떻습니까? 스데반을 위하여 울어야 하겠습니까? 오히려 우리는 죽지 못한 나를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가장 중요한 주제는 흩어진 사람들입니다. 흩어진 사람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가서 복음을 전 파하게 됩니다. 박해나 없었으면 좋겠지만 박해는 있습니다. 왜 있느냐고 묻지는 말 것입니다. 박해는 있습니다. 의로운 일에는 핍박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의인의 핍박이 있고, 교회의 핍박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역사 하실 때에는 모티브가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요셉과 같은 선한 사람을 통하여 역사 하시는가 하 면 악한 사람을 통하여 역사 하시는 또 하나의 모티브가 있습니다. Secondary motive가 있습니다. 바로왕을 통하여, 느부갓네살왕을 통하여, 고레스를 통하여…… 이렇듯 좋지 못한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 하시는 때도 많습니다.

다시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핍박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 믿는 자 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졌다고 합니다. 흩어진다는 것은 타의요 자의가 아닙니다. 억지로 된 것이요, 원치 않은 것이요, 불가피한 것입니다. 살아남기 위하여 저들은 도망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한 것입니다. 일단 도망갔습니다. 도망가놓고는 이제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합니다. 이것은 자의입니다. 누가 하라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단 피난을 간 것은 억지로 간 것이지만, 피난 가서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한 것은 자의로 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흩어졌다는 것은 분명히 빼앗겼다는 뜻입니다. 자유를 빼앗겼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생각할 때에 흩어졌다는 것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 됩니다. 고난 속으로, 이방 속으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는 쫓겨났지만, 사마리아로 보냄 받은 것입니다. 이제 생각이 달라집니다. 생각을 완전히 고쳐버립니다. 이 흩어짐이라고 하는 고난에는 선한 일로 그 동기를 바꾸어버린다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실패한 일이 있습니까? 실패한 그 사건 속에는 하나님의 부름이 있었습니다. 한쪽 문이 닫힐 때에는 다른 한쪽 문이 열릴 것입니다. 그런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안되었습니다. 심지어는 내가 가고 싶은 학교도 못 갔습니다.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 속에 하나님의 부름이 있었습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가고 싶지 않은 길을 마지못해 갔고, 원치 않는 사마리아에 왔습니다. 사마리아에 와보니 이제는 농사할 것도 없고 장사할 것도 없고, 식구도 단출하고, 집에 두고 있어 도둑맞을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기왕에 고향을 떠나왔으나 이제는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사마리아 땅에 복음이 전파되고, 나아가 온 세계에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피동적이고 억압적인 사건 속에서 자의적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왜 여기에 왔느냐, 내가 왜 이 현실 속에 있어야 하느냐를 깨닫게 될 때에 그 사건은 엄청난 선교적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선교는 감옥에 들어가서도 가능한 일 이거든요.

제가 아는 분이 병원에 한 달씩이나 입원을 해 있기에 한번 병 문안을 갔습니다. 그 때에 그분이 제게 이런 이야기를 고백처럼 하더군요. "사실 저는 예수 믿은 지 오래고 명색이 집사인데 누구보고 예수 믿으라고는 못해봤습니다. 혹 친구보고 ', 교회 나가자'하는 정도는 해봤지만 예수 믿으라는 말은 못해봤어요. 그리고 더욱 못해본 것은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독실에 있다가 여러 사람 있는 방으로 옮겨달라고 했어요. 복잡한 줄 알지만 전도하고 싶어서요." 그 집사님, 여러 사람이 있는 병실에 한 달 있으면서 시간시간 식사할 때에 대표기도 하고, 잘 때에 목사처럼 서서 기도도 한답니다. 열심히 전도한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병원은 누가 가고 싶어서 갑니까? 할 수 없어서 가지요. 그런데 보십시오. 여기서 전도가 이루어집니다.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의미 창조요 가치창조입니다. 새로운 생의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현실이라고 하는 감옥 속에 던져졌습니다. 이 현실을 감옥이라고 생각하지는 맙시다. 이 현실 속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읍시다. 선교적 의미를 발견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 감옥은 이제 나의 선교지가 되는 것입니다. 내 생의 존재의미를 여기서 찾게 되는 것입니다. 엄청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주어 진 현실을 자원적으로 받아들이고, 주어진 고난이라고 하는 그 사건을 이제는 가슴을 열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경건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현실 안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 사명을 감당하게 되면 바로 그 사람이 가장 보람된 생을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언젠가 우리 교회에 와서 잠깐 파이프 오르간 독주를 한 적이 있는 장 피에르 에게라는 사람이 기억납니다. 그는 장님입니다. 세종문화회관에 연주하러 왔다가 교회에서 연주를 한번 해보고 싶다고 해 서 우리 교회에 와서 예배시간에 30분 동안 연주한 적이 있습니다.

연주하기 전에 두 번 정도 교회에 와서 연습을 했습니다. 그 때에 제가 그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는 장님임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스텝을 전부 써가면서 오르간 연주를 하는데 얼마나 훌륭한지 모릅니다. 눈뜬 사람보다 더 잘합니다. 그는 바하의 음악을 해석하는데 최고의 권위자라고 합니다. 노트르담 성당에서 20년 동안 오르간을 쳤다고 합니다. 어쨌든 제가 그 연주를 듣고 "어떻게 그 리도 잘하십니까?"라고 칭찬을 해드렸더니,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하더군요. "저는요, 이것밖에 못하거든요." 대답이 분명합니다. "나 는 이것밖에는 못해요." 만약 그가 눈이 밝고 다른 능력이 있었더라 면 다른 일을 하려고 했겠지요. 그는 정말 '그것밖에'라고 하는 감옥 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이 현실을 결코 저주하지 않습니다. 울부짖지 않습니다. '나는 이것만을 할 수 있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세계의 전부이다'라고 그 현실을 자신에게 주어진 세계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럼으로 그는 평생을 교회에 봉사하며 오르간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본문에서 보는바, 저들은 다 흩어졌습니다. 흩어졌다고 하는 사건은 분명 저들이 원치 않았던 사건입니다. 큰 손해입니다. 그러나 흩어진 그 현실 안에서 두로 다니며 복음을 전합니다. 그 사건을 통 하여 하나님의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흩어진 자의 사명(사도행전 8:14)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이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오늘의 본문말씀은 스데반의 장렬한 순교에 뒤따르는 구속사적 말씀입니다. 선교의 무대가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옮겨지는 사건 을 보게 됩니다. 선교의 무대가 바뀌는 전환점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 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1 : 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연못에 돌을 던지면 파문이 일듯 복음이 그 중심부에서부터 지 정학적으로 그렇게 퍼져나가게 되는데, 본문에 나타난 내용은 예루살렘을 떠나서 사마리아로 가는 선교의 전환점을, 선교의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흔히들 이런 말을 합니다. '만일에 이 사건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기독교는 분명히 예루살렘에 안주하려고 했을 것이다.

예루살렘사람들끼리만 예수 믿느라 이방사람에게 복음 전하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렸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신 당부의 말씀도 저들은 실천하지 못했을 것이다.' 좀 전문적인 이야기입니다 마는 교회사를 연구해보면 기독교를 받아들인 유럽의 나라들 전부가 자기 사는 마을, 자기 사는 도시, 자기 사는 나라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곧 민족종교로서입니다. 유럽에는 기독교를 국교로 정한 나라가 많습니다. 국교로 정했다는 것은 저네의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를, 저네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바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테면 독일을 보십시오. 루터는 종교개혁을 단행한 뒤 독일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나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해서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는 데에 크게 공헌했습니다마는, 그 역시 선교를 대해서 는 별로 생각지 않았습니다. 전반적으로 루터의 신학에는 선교가 없습니다. 내 민족, 내 나라만을 생각했습니다. 칼벵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네바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영국은 영국대로, 로마는 로마대로,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저마다 자기네 나라에 하나 님의 나라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자기 민족과 자기 나라 안에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려 했습니다. '이 나라를 진정 주님께 서 기뻐하시는 이상 세계로 만들어보리라'하는 데에 집착하여 다른 나라 사람을 구하고, 이방세계에 복음을 전하고 하는 사명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일반적인 성향이었습니다. 누구나 그렇습니다. 누구나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더욱 그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곳이 바로 주님 계시던 곳이요, 주님 승천하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모습을 보고 천사들이 제자들을 향하여 "본 그대로 오시라(1:11)"라고 말씀했거든요. 따라서 저들은 '반드시 저 감람산에 주님 다시 오실 것이다' 전제하고 우리끼리만 열심히 믿고, 우리끼리만 전도하다가 주님의 재림을 맞아야 되겠다는 생각만 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 생각이 협소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뜨릴 방도가 없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선교적 동기가 참으로 새로운 차원에서 이루어집니다. 새삼 신앙적 지식이 높아지고 선교적 정열이 생 겨서 아, 사마리아로 가 복음을 전해야겠다, 로마로 가 복음을 전해야겠다, 서아시아로 가 복음을 전해야겠다, 라고 저들 스스로가 생각 을 바로 했던 것이 아닙니다.

저들이 어떻게 해서 사마리아로 가게 되었습니까? 본문은 이에 대하여 아주 오묘한 진리의 말씀을 합니다.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1)"-박해 때문에, 핍박 때문에 더는 예루살렘에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다가는 죽게 생겼습니다.

살기 위하여 하는 수없이 사마리아로 피해간 것입니다. 사마리아는 저들이 아주 더럽게 여기는 땅입니다. 생리적으로 가고 싶지 않은 곳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그리로 피난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피난을 가 거기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저들은 새로운 용기를 얻게 됩니다. '왜 우리가 여기에 와야 했던가,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로 보내셨는가'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매 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는 '하나님의 선교전략'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선교전략-우리의 생각과는 그 차원이 다릅니다.

어디로 어떻게 가서 복음을 전하고, 어떤 선교사업을 하고, 어떤 학교를 세우고 하는 우리의 선교전략과는 사뭇 다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보는바, 지금 저들은 박해에 쫓겨서, 핍박에 쫓겨서 사마리아로 숨어 들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국 이로써 선 교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입니다. 아무도 피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선교전략은 박해 와 고난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깊이 생각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나 국가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하나님께서는 고난과 핍박과 환난을 통하여 큰 역사를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신비로운 역사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역경은 우리가 원치 않는 현실이자 본래 받았던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엄연한 현실로 닥치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러한 사건을 통하여 주님은 선교적 역사를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본문은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1)"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누가가 사울을 들고 나오는 것은 의도적인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사울이 회개하고 바울이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울의 옛 모습을 구태여 여기에서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이렇게도 악하고 이렇게도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사도 바울이 되었다, 그리고 그 평생을 하나님 앞에 바쳤다----이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 생각하면 부끄럽고 숨기고 싶은 과거이지만 숨김없이 노출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에 나타난 사건입니다.

사울은 예수님의 사람을 죽였습니다.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죽이는 것을 마땅하게 여겼습니다. 당연히 죽여야 할 자를 죽였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스데반을 죽일 때에는 물론 죽여야 하겠다고 생각해서 죽였지만, 그가 죽은 다음에도 사울은 죽여야 할 사람을 죽인 것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전혀 후회가 없었습니다. 그렇듯 철저하게 종교화하고 교리화하고 신학화한 태도였다는 것입니다. 그 행위는 단순한 우연적 행위가 아닙니다. 어쩌다가 불끈해서 칼로 찔렀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부지불식간에 감정이 폭발해서 사건을 일으켰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의도적으로 일으킨 사건입니다. 꼭 죽여야 할 사람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합당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잘한 일이라 고 생각했습니다. 신앙적으로 율법적으로 당연히 그리해야 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또한 사울은 교회를 잔멸하려 했습니다.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3)"-여기서 '잔멸하다'라는 말을 헬라 원문대로 살펴보면 그 뜻이 재미있습니다. '멧돼지가 포도원을 짓밟는다'라는 뜻입니다. 멧돼지가 포도원에 들어가서 마구 닥치는 대로 짓밟는다고 생각 해보십시오. 포도원 망치고 마는 것이지요. 바로 사울이 미친 멧돼지처럼 교회를 핍박했다는 것입니다. 닥치는 대로 교인을 잡아들이고, 닥치는 대로 죽이려 했습니다. 아주 악랄했습니다. 뒤에 공부하겠습니다 마는, 그가 다메섹까지 가려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시로 보 면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는 상당히 먼 거리입니다. 그 먼 데까지 가서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오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예루살렘에서 그곳으로 피난 가 있는 사람들을 말입니다. 그 정도로 극악한 사람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사도 바울의 옛사람, 곧 사울의 모습입니다. 이렇듯 난폭하고, 이렇듯 철저하게 악한 사람이 뒤에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회적 만남으로 말미암아 180도로 확 변하고, 오직 예수님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는 사람 이 됩니다. 이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바울의 옛 모습을 그대로 숨김없이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큰 핍박이 있을 때에 스데반이 죽었습니다. 그 핍박은 뒤를 이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줄줄이 체포당합니다. 결국 그들은 이 핍박을 피하여 각지로 흩어집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사도들만 남고는 다 흩어졌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니 사도들만 용기가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여러분, 직접신앙과 간접신앙-여기에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나본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와 부활을 분명히 알고 있기에 당장에 죽는다 해도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에게 들어서 믿은 사람들의 신앙은 간접신앙입니다. 간접적으로 받은 신앙이기에 핍박이 따르자 두려움이 생긴 것입니다. 이렇듯 직접 체험한 신앙을 가진 자와 체험한 자로부터 들어서 믿는 자와는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직접신앙으로 말미암아 사도들은 용기가 있고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순교를 각오하고 예루살렘을 지키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은 것은, 비굴하게 도망가지 않은 것은 이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은 이유는 또 있습니다. 핍박으로 말미암아 재산과 가족을 다 잃어버린 교인들이 많았습니다. 핍박 때문에 도망간 사람들의 남은 가족들은 이제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그래서 이 남은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책임지고 사도들이 남아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이런 해석도 있습니다. 원래 스데반은 헬라파 유대인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먼저 순교 당하지 않고 스데반이 첫번으로 순교 당했습니까? 당시에 헬라파 유대인들은 지성인 축에 드는 교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저들의 공격 목표는 헬라 파 유대인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수적 유대인인 베드로, 요한, 야고보들은 핍박의 대상에서 제외된 것이다, 그래서 도망가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이 때에 헬라파 유대인인 스데반은 순교 당했습니다. 이로써 헬라파 유대인에 속한 사람들이 더 많이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계기가 되어 저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게 된 것입니다.

저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기 전에 먼저 스데반을 장사했습니다.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2)." 여 기에 '경건한 사람들'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참 아름다운 말입니다.

특별히 이 '경건'이라는 말을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아주 조심성 있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고넬료를 가리켜 경건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경건하다고 말씀합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일으켰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우러러보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12)"라고 말씀하는 대 목이 나옵니다. 원래 '경건'이라는 말은 유대사람에게만 쓰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에게 붙여지는 말입니다.

'두려워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의 신 앙 생활을 총괄한 하나의 용어가 바로 이 '경건'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슨 말로 칭찬을 들어야 합니까? 무슨 말로 칭찬을 해야 합니까? 누구에게 말할 때에, 특히나 믿는 사람들끼리 말할 때에 "아무개 집사님 참 똑똑하셔"한다면 이것은 욕이겠습니까, 칭찬이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에게 이 말은 별로 좋은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나쁘다는 말입니다. 똑똑하니까 자기 앞가림이나 한 다는 것입니다. 이기적이라는 것입니다. 덕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들어야 할 제일 좋은 말로 저는 두 가지를 생각 해봅니다. 하나는 "저 사람은 참 경건해"하는 것이요, 둘은 "저 사람 은 참 진실해"하는 것입니다.

'경건'은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사람을 대하면서도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가정 일이든, 직장 일이든…… 모든 일에서 언제나 하나님을 먼저 생각합니다. 수직적 관계를 크게 여 기고, 수평적 관계를 작게 여기는 이 같은 사람을 경건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보면 사람과의 관계만 너무 크게 생각해서 심지 어 교회에 나와서도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하는 것보다는 옆에 누가 앉았나 하고 주위를 자꾸 둘러보기나 합니다. 그리고 남들이 나를 예쁘게 보나 안 보나 신경을 쓰느라 예배를 보다말고는 거울을 보 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을 보느라면 '별로 볼만한 얼굴도 아닌데 무얼 저리도 거울을 보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듯 사람에게만 신경을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저 사람과 악수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악수를 할 때 꽉 잡고 해야 하나 어쩌나 하는 따위의 쓸데없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것이 전부 수평적 관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은 수직적 관계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까 하는 데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이것이 경건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뵙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경건한 사람입니다. 수직적 관계는 극대화하고, 수평적 관계는 극소화하는, 그런 관계를 경건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경건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본래 경건이라는 것은 지극히 유대주의적인 사람에게 붙여지는 말입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같은 사람에게 적용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누가는 이 '경건'을 그렇게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잘 믿는 사람이 경건한 사람이라고 말씀했다는 데에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의도적이었습니다. 매우 중요합니다. 오히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볼 때에는 예수믿는 사람들이 이단이었습니다. 아주 못된 생각이지요. 그런데 도 불구하고 누가는 예수 믿는 사람이야말로 정말 경건한 사람이다, 하나님 잘 믿는 사람이다, 라고 전제했습니다. 그래서 "경건한 사람들 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라고 말씀할 수 있었습니다. 크리스찬을 경건한 사람이라고 말씀한 데에 대단히 깊은 뜻이 있습니다.

스데반을 장사하고 그를 위하여 크게 울더라도 본문은 말씀합니다. '운다'라는 말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봅시다. 여기에 그리스도 인의 울음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을 보십시오. 뒤에 다시 살아나기는 했습니다마는, 어쨌든 나사로가 죽었다고 했을 때에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35). 물론 우리는 소망도 있고, 영생도 믿습니다. 부활도 믿습니다. 그러나 인간이기에 슬픔이 있습니다. 인간 적인 정이 끊어지고, 지금까지 볼 수 있었던 사람을 이제는 육적인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이 죽었을 때에 우리는 눈물을 흘립니다. 성경은 이것을 인정합니다. 믿음 없는 사람처럼 왜 우느냐, 예수 믿는 사람이 왜 눈물을 흘리느냐, 라고 책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셨으니까요. 우리가 그 깊은 뜻을 알건 모르건 간에 예수님께서도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울음에 대한 휴머니즘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이 죽었을 때에, 젊은 사람, 용기 있는 사람, 할일 많은 사람, 믿음 굳은 사람이 이렇듯 비참하게 돌에 맞아 죽었을 때에 경건한 사람들이 장례를 치르면서 울었던 것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이 울음은 길게 울어서는 안 되는 울음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스데반을 위하여 크게 울었다고 합니다. 글쎄요. 얼마나 울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어쨌든 이 울음 자체에 대 하여 한번 숙고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왜 울었을까?'하는 질문이 따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골고다 언덕으로 향할 때에 뒤를 따르던 여인들이 예수님을 위하여 울었습니다.

이를 보시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23 : 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제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스데반을 위하여 울고 있는 저들을 보신다면 뭐라고 말씀하실 것 같습니까?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이 사람들아 스데반을 위하여 울지 말라." 신학대학 다닐 때에 지금은 작고하신 박형용 박사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한국교회에 큰 발자취를 남긴 신학자입니다. 언젠가 한번 그분이 고난주간에 설교를 하셨는데 그 설교제목이 좀 길었어요. 오늘의 이 본문말씀을 놓고, '스데반을 위하여 울지 말라'하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셨습니다. 아주 시적인 설교였습니다. 단 한번도 얼굴을 드시지 않고 써 가지고 온 원고를 그대로 줄줄 읽는데, 듣고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누구 할 것 없이 크게 감동하고 많이 울었습니다. 제가 뒤에 그 원고를 얻어냈습니다. 그 때는 녹음도 못할 때니까요. 그 원고를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스데반을 위하여 울지 말라'-여기에는 정말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 시간에 그 말씀을 다 드릴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라 하시던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들아 스데반을 위하여 울지 말라. 스데반은 가장 귀한 인생을 살았고 가장 고귀한 죽음을 맞았느니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순교란 최고의 영광입니다. 여러 분이 아무리 순교하고 싶다 하더라도 이 순교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주시는 은사입니다. 순교도 기회가 와야 합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순교사를 자세히 보면 알 수 있듯이 정말 깨끗한 순교라는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정치적으로 그만 잘못 걸려들어서 죽었습니다. 그런 경우가 많았습니다. 스데반 같은, 그렇듯 깨끗한 순교는 하나의 지고하게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원수 들 앞에서 귀한 설교의 말씀을 길게 펴고, 천사의 얼굴로 돌에 맞아 죽는 장렬한 순교를 했습니다. 이런 죽음 앞에서 울어야 하겠습니까? 찬송을 드려야지요. 좀더 나아가 부끄러워해야지요. 저와 같이 죽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야지요. 스데반과 같이 못 죽었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살아 있다는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런 순간이라면 말입니다.

제가 잘 아는 목사님 가운데 특별히 저를 아껴준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두 살 된 저를 안고 찍은 사진을 제가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남쪽으로 내려온 뒤에 그 목사님을 뵐 수가 없었습니다. 분명히 남한에 계시다는 것은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뒤에 수소문해보니 문둥병환자들 속에 들어가서 목회활동을 하시고 있더군요. 언젠가 그 교회에 집회를 인도하러 간 적이 있습니다. 그 때에 "목사님, 아주 큰 일을 많이 하실 수 있는 분이 왜 서울 같은 곳에서 일하시지 않고 이런 벽지에 고생하고 있습니까?"하고 물어보았습니다. 그 목사님 아주 담담하게 그 이유를 들려주시더군요. "왜정 말년에 내가 신사참배를 했거든. 끌려가면 죽을 것이 뻔하기 때문에 죽지 않으려고 신사참배를 했어. 그래서 죽음을 면했지. 그리고 해방된 후 감옥에서 고생하던 사람들이 나와서 역사 하는데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있어야 지. 죽어야 할 시간에 죽지 못했으니 말이야. 죽지 못한 부끄러움을 가지고 내가 어찌 고개를 들고 다니겠나. 그래서 아무도 오고 싶어하지 않는 이곳에 와서 일생을 살기로 했네." 여러분, 어떻습니까? 스데반을 위하여 울어야 하겠습니까? 오히려 우리는 죽지 못한 나를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가장 중요한 주제는 흩어진 사람들입니다. 흩어진 사람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가서 복음을 전 파하게 됩니다. 박해나 없었으면 좋겠지만 박해는 있습니다. 왜 있느냐고 묻지는 말 것입니다. 박해는 있습니다. 의로운 일에는 핍박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의인의 핍박이 있고, 교회의 핍박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역사 하실 때에는 모티브가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요셉과 같은 선한 사람을 통하여 역사 하시는가 하 면 악한 사람을 통하여 역사 하시는 또 하나의 모티브가 있습니다. Secondary motive가 있습니다. 바로왕을 통하여, 느부갓네살왕을 통하여, 고레스를 통하여…… 이렇듯 좋지 못한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 하시는 때도 많습니다.

다시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핍박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 믿는 자 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졌다고 합니다. 흩어진다는 것은 타의요 자의가 아닙니다. 억지로 된 것이요, 원치 않은 것이요, 불가피한 것입니다. 살아남기 위하여 저들은 도망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한 것입니다. 일단 도망갔습니다. 도망가놓고는 이제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합니다. 이것은 자의입니다. 누가 하라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단 피난을 간 것은 억지로 간 것이지만, 피난 가서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한 것은 자의로 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흩어졌다는 것은 분명히 빼앗겼다는 뜻입니다. 자유를 빼앗겼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생각할 때에 흩어졌다는 것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 됩니다. 고난 속으로, 이방 속으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는 쫓겨났지만, 사마리아로 보냄 받은 것입니다. 이제 생각이 달라집니다. 생각을 완전히 고쳐버립니다. 이 흩어짐이라고 하는 고난에는 선한 일로 그 동기를 바꾸어버린다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실패한 일이 있습니까? 실패한 그 사건 속에는 하나님의 부름이 있었습니다. 한쪽 문이 닫힐 때에는 다른 한쪽 문이 열릴 것입니다. 그런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안되었습니다. 심지어는 내가 가고 싶은 학교도 못 갔습니다.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 속에 하나님의 부름이 있었습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가고 싶지 않은 길을 마지못해 갔고, 원치 않는 사마리아에 왔습니다. 사마리아에 와보니 이제는 농사할 것도 없고 장사할 것도 없고, 식구도 단출하고, 집에 두고 있어 도둑맞을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기왕에 고향을 떠나왔으나 이제는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사마리아 땅에 복음이 전파되고, 나아가 온 세계에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피동적이고 억압적인 사건 속에서 자의적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왜 여기에 왔느냐, 내가 왜 이 현실 속에 있어야 하느냐를 깨닫게 될 때에 그 사건은 엄청난 선교적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선교는 감옥에 들어가서도 가능한 일 이거든요.

제가 아는 분이 병원에 한 달씩이나 입원을 해 있기에 한번 병 문안을 갔습니다. 그 때에 그분이 제게 이런 이야기를 고백처럼 하더군요. "사실 저는 예수 믿은 지 오래고 명색이 집사인데 누구보고 예수 믿으라고는 못해봤습니다. 혹 친구보고 ', 교회 나가자'하는 정도는 해봤지만 예수 믿으라는 말은 못해봤어요. 그리고 더욱 못해본 것은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독실에 있다가 여러 사람 있는 방으로 옮겨달라고 했어요. 복잡한 줄 알지만 전도하고 싶어서요." 그 집사님, 여러 사람이 있는 병실에 한 달 있으면서 시간시간 식사할 때에 대표기도 하고, 잘 때에 목사처럼 서서 기도도 한답니다. 열심히 전도한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병원은 누가 가고 싶어서 갑니까? 할 수 없어서 가지요. 그런데 보십시오. 여기서 전도가 이루어집니다.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의미 창조요 가치창조입니다. 새로운 생의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현실이라고 하는 감옥 속에 던져졌습니다. 이 현실을 감옥이라고 생각하지는 맙시다. 이 현실 속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읍시다. 선교적 의미를 발견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 감옥은 이제 나의 선교지가 되는 것입니다. 내 생의 존재의미를 여기서 찾게 되는 것입니다. 엄청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주어 진 현실을 자원적으로 받아들이고, 주어진 고난이라고 하는 그 사건을 이제는 가슴을 열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경건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현실 안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 사명을 감당하게 되면 바로 그 사람이 가장 보람된 생을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언젠가 우리 교회에 와서 잠깐 파이프 오르간 독주를 한 적이 있는 장 피에르 에게라는 사람이 기억납니다. 그는 장님입니다. 세종문화회관에 연주하러 왔다가 교회에서 연주를 한번 해보고 싶다고 해 서 우리 교회에 와서 예배시간에 30분 동안 연주한 적이 있습니다.

연주하기 전에 두 번 정도 교회에 와서 연습을 했습니다. 그 때에 제가 그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는 장님임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스텝을 전부 써가면서 오르간 연주를 하는데 얼마나 훌륭한지 모릅니다. 눈뜬 사람보다 더 잘합니다. 그는 바하의 음악을 해석하는데 최고의 권위자라고 합니다. 노트르담 성당에서 20년 동안 오르간을 쳤다고 합니다. 어쨌든 제가 그 연주를 듣고 "어떻게 그 리도 잘하십니까?"라고 칭찬을 해드렸더니,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하더군요. "저는요, 이것밖에 못하거든요." 대답이 분명합니다. "나 는 이것밖에는 못해요." 만약 그가 눈이 밝고 다른 능력이 있었더라 면 다른 일을 하려고 했겠지요. 그는 정말 '그것밖에'라고 하는 감옥 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이 현실을 결코 저주하지 않습니다. 울부짖지 않습니다. '나는 이것만을 할 수 있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세계의 전부이다'라고 그 현실을 자신에게 주어진 세계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럼으로 그는 평생을 교회에 봉사하며 오르간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본문에서 보는바, 저들은 다 흩어졌습니다. 흩어졌다고 하는 사건은 분명 저들이 원치 않았던 사건입니다. 큰 손해입니다. 그러나 흩어진 그 현실 안에서 두로 다니며 복음을 전합니다. 그 사건을 통 하여 하나님의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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