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로 돌아가기 |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로마서 8:12-17)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養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현대에 사는 우리 인간을 세 유형으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유형은 생각 없이 행동하는 인간입니다. 이름하여 '비인간적 인간'입니다. 단순한 본능에 끌리어 사는 사람입니다. 학자들은 이를 가리켜 activism이라고 합니다. 행동만이 있다는 것이지요. 현대인들은 스스로 생각을 거부하고 기피하는 일이 많습니다. 맑은 정신으로 살아가도 모자라는 세상에, 잠시라도 잊어버리려 하고 망각해버리려 하고, 그래서 술취해 보려 합니다. 인간 되기를 포기하는 마음입니다. 깊이 생각하기를 싫어합니다. 생각하면 고통스럽고 괴로우니까요. 그저 잊어버리려고만 합니다. 차라리 생각하지 아니하겠다는 '기피적 인간'인 것입니다.
결국은 행동만이 남습니다. 이렇듯 단순한 본능과 육체적 욕망에 끌리어 사는 비인간화한 인간상을 처처에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유형은 행동 없이 생각만 하는 인간입니다. 단순한 지성인에 불과합니다. 이는 intellectualism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생각은 많으나 행동 의지가 없습니다.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많은 젊은이들이 해외에 나가서 공부를 합니다. 특별히 미국에 가서 공부를 마치고 박사학위를 얻은 청년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정작 미국의 큰 회사나 연구실에서는 공부 많이 한 한국사람 채용하기를 기피하고 꺼리는 성향이 있다고 합니다. 이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창의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공부는 많이 했고 알기는 많이 아는 것 같은데 새로운 것을 발견해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발명해내는 데 약하다는 것입니다. 창의력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요즘같은 세상에 새로운 것을 창안해내지 못하면 그 많은 공부도 소용없는 것이 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실천 의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알게 되었으면 이제는 추진해야 합니다. 밀고 나가면서 무엇인가 만들어나가야 하는데 그것이 약하다는 것입니다. 아는 것은 많은데 행함이 적습니다. 또한 돈 좀 벌고 출세했다 싶으면 연구생활을 중단해버린다는 것입니다. 연구라고 하는 것은 죽을 때까지 그대로 밀고 나가야 하는 것인데 꾸준한 의지가 없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개인주의 때문입니다. 팀워크(teamwork)의 결핍입니다. 개인으로 놓고 보면 한 사람 한 사람이 저마다 훌륭한데 협력해서 하는 일에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일리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지성인의 고민이 있습니다. 아는 것도 많고 생각도 많습니다. 그러나 말만 많고 실천하는 것이 없습니다. 말을 하라면 못하는 사람이 없는데 행동하는 것은 무식한 사람만도 못합니다.
행동만 보아서는 그렇게 몰상식할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지성은 어디로 간 것입니까? 그 많은 공부가 무슨 소용이 있다는 것입니까?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행동 없는 생각도 문제이지만 행동 없는 인간 자체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유형은 생각 있는 행동의 인간입니다. 인간적인 인간입니다. 나의 지식이 곧 행동의 동력으로 작용합니다. 모름지기 이러한 지성인, 이러한 행동인, 이러한 생활인이 필요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자기성찰입니다. '나는 누구냐, 나는 왜 존재하는가'----이것을 제때에 알아야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나이 쉰 예순이 넘고야 '이제는 내가 뭘 좀 알 것 같다'하며 철이 듭니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기차가 떠난 다음에 손 흔드는 격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좀더 일찌기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배워야 될 시간에 배우지 않고 순종해야 될 시간에 순종하지 아니하다가 어리석게 한평생을 그냥 다 보냅니다. 그러고 나서야 뒤늦게 깨닫고 한숨쉬는 지성인을 보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나의 나됨은 어디로서 비롯된 것입니까? 그 무엇을 위하여 나는 존재하는 것입니까? 무엇보다도 자기성찰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원초적 자기성찰, 나의 나됨을 아는 것이 모든 지식의 근본인 것입니다. 이 같은 자기정체감이 분명해질 때에야 행동의 사람이 될 수 있고 능력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 15:10)"--그실 강요된 것이었습니다만 자발적으로 수용하고 있습니다. 나의 나됨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시작이요 이것을 아는 것이 결론입니다.
정신세계를 제쳐놓는 물질세계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유물론(唯物論)이 그것입니다. 유물론에 기초한 공산주의가 지난 70년 동안 온 세계를 얼마나 어지럽게 했습니까? 또한 영적 세계를 모르는 정신세계도 문제가 있습니다. 신령한 능력을 부인하는 정신세계가 인간을 절망의 길로 이끕니다. 지성은 좋은 것이지만 지성만능은 아닙니다. 과학 만능도 아닙니다. 과학주의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 능력, 영적 세계의 의미를 알고 정신세계를 알아야 합니다. 은혜를 모르는 율법과 신령한 세계를 알지 못하는 정신세계에 깊은 병이 있고, 여기에 '허무주의'라고 하는 엄청난 함정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자기성찰은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알 수 있습니까? 내가 나됨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입니까? 어떤 면에서 보면, 일평생을 두고두고 깨닫고 경험하고 그 많은 시련 속에서 이것 한 가지 배우려고 세상을 사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냐?'---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지 않고,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로 깨닫게 해주시지 않는 한 절대로 깨달을 길이 없습니다. 은혜 가운데서만 나의 나됨을 압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은 약하다'라고 변명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실 마음의 원하는 바가 분명하면 육신은 약한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이 분명하면 행동은 반드시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깨달음이 시원치 않기에 그 행동도 여전히 허우적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깨달음도 은혜요, 그 깨달음이 온전하여 생명력을 발동케 하는 것도 또 다른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은혜 가운데 성찰이 있고 은혜 가운데 행위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인간의 본질적인 정체의식을 명확히 깨쳐주고 있습니다. 먼저, 그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반대로 말하면 '돈에 끌리어 사는 사람은 수전노이다. 육체의 욕망에 끌리어 사는 사람은 속물이다. 헛된 명예와 허영에 끌리어 사는 사람은 위선자다. 사단의 악한 마음에 끌리어 노예로 사는 사람은 사단의 자녀다. 악마의 자녀다'라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에 인도함을 받는 자---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요, 바른 인간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인간은 분명히 흙으로 빚어진 것입니다. 흙에서부터 비롯된 육체라고 하는 것에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어 주셔서 인간은 비로소 인간이 됩니다. 그런데 그 위에 플러스 알파(plus Alpha)가 더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에 인간인 것입니다. 숨을 쉬지 않는 인간은 죽어 있는 인간이듯이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지 않는 인간은 죽은 인간입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확증을 얻어야 합니다. 영은 영으로 식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건강한 영이 있고야 그 건강한 영의 지배를 받는 건강한 정신과 건강한 이성이 있습니다. 건강한 정신에 주도된 육체가 건강한 육체입니다. 잘못된 정신에 끌려 휘청거리는 인간은 그 육체도 병든 육체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건강한 영혼에 건강한 정신, 건강한 정신에 건강한 육체----이 바른 관계를 미루는 인간이 바로 하나님과 교통합니다. 그래서 본문말씀 16절에서는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확증하신다고 단단히 못박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이런 전설이 있습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을 등에 업고 광야로 나갔습니다. 좨 장성한 아들이지만 차마 광야의 거친 길을 걷게 할 수가 없다 해서 이 아버지는 다 큰아들을 업고 갑니다. 그렇게 한참을 가다가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친구와 마주칩니다. 서로 인사를 하고 나자 이 친구는 아버지가 등에 업은 다 큰아들을 보고는 이렇게 묻습니다. "여보게, 업고 가는 그 아이가 누구인가?" "내 아들일세." 친구는 짓궂게도 다시 등에 업힌 아들보고 묻습니다. "얘, 너를 업고 가는 사람이 누구냐? 네 아버지냐?" 그런데 이 아이가 업혀서 한다는 말이 이렇습니다. "아니요." 천연덕스럽게 그리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하도 기가 막혀서 아이를 땅에 내려놓고 "아니, 내가 네 아버지 아니더냐?"라고 묻습니다. 아이는 오히려 "당신이 어떻게 내 아버지입니까?"하고 대꾸합니다. 아버지는 이것을 어떻게 제대로 가르쳐주어야 할지, 그 증명할 방법이 없어서 막막했습니다. 답답한 아버지는 안타깝게 묻습니다. "내가 너를 이렇게 업고 가지 않느냐?" "나를 업었다고 아버지인가요?" "내가 너를 먹여 살리지 않느냐?" "나를 먹여 살린다고 아버지인가요?" 이런 답답한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급기야 아버지와 아들의 싸움으로 번지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오늘이라도 집에 가셔서 아버지를 쳐다보면서 한번 물어보십시오. "당신이 내 아버지입니까? 그것을 어떻게 증명하지요?"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대체 이것을 무엇으로 증명합니까? 이 전설에서 말하는 아들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큰 능력으로 구원하셔서 광야로 인도하십니다. 광야에 데려다 놓으시고 나는 너희의 아버지이고 너희는 나의 자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말씀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도무지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주 되시고, 친히 아버지가 되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됨을 알게 하는 데에 무려 40년이 걸렸습니다. 그 많은 고통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저들은 깨닫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덧붙여 한 말씀 더 드리고 싶습니다. 이 아버지와 아들의 싸움을 말릴 수 있고 바르게 해석해줄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그 옆에 어머니가 있었으면 됩니다. 어머니가 딱 한마디만 하면 됩니다. "천지개벽을 하더라도 이 어른이 네 아버지이다"--어머니만이 이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문제가 간단히 해결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는 이야기입니다만, 가정에서의 아버지의 권위, 아버지의 이미지는 그 가정의 어머니가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내로서 남편이 보기 싫더라도 자녀교육을 제대로 하시려거든 남편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하십시오. "용케 니 애비를 닮았구나. 제발 니 애비만은 닮지 말아라." 이런 소리만 하고 있다면 가정교육은 끝난 것입니다. 아내한테는 좀 부족한 남편이라 하더라도 자녀교육을 위해서는 "네 아버지는 훌륭하신 분이다. 지금 가난하게 사는 것은 진실하기 때문이다. 비록 돈은 못벌어 고생은 한다마는, 네 아버지는 참으로 훌륭하시단다"하고 말하십시오. 아버지의 이미지는 그 어머니가 만드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성령의 별명은 '어머니의 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자녀들과의 관계를 설명하시고 위로하시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아버지에게 매맞고 우는 아이를 어머니가 위로합니다. "네 아버지가 너를 때린 것은 너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란다." 바로 이 말씀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사건에서 너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이러한 어려움을 주시는 것이다"라고 말씀해주십니다.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증케 하여주십니다.
두 번째로 오늘의 본문에서 말씀하는 것은 '그런데 우리는 양자의 영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자녀는 자녀인데 양자(養子)입니다. 이미 진노의 자녀였고 이미 죄의 자녀였기 때문에, 이제 탕자처럼 회개하고 돌아와서 양자의 영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은혜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양자 삼을 때에 무슨 시험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양자를 들이고 싶은, 부모될 사람들이 어느 고아원에서든지 한 아이에게 '너는 내 아들이다'하면 그만입니다. 그 때부터 아들입니다. '양자'라는 것은 절대은혜입니다. 뿐만 아니라 완전은혜입니다. 조건이 없습니다. 특권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양자로 삼은 아이에게 '양자답게 살아달라'고 부탁합니다. 양자된 자격으로 가르쳐 가는 것입니다. 미리 가르쳐보고 양자를 삼는 것이 아니라 양자로 삼고 나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양자의 영이기 때문에 과거로부터 온전히 자유함을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빚진 자로되……"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빚을 졌다는 이 말씀이 바로 양자 교리의 아주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옛날에는 아버지가 빚을 많이 지고 죽으면 그 빛을 아들이 대신 갚아야만 했습니다. 갚을 길이 없으면 노예로 팔려 가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하여 일생동안 죽을 때까지 그 집의 노예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당시의 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라도 어떤 사람이 이를 긍휼히 여겨서, 빚을 잔뜩 걸머진 채로 그 무거운 의무를 감당해야만 하는 이 어린아이에게 "우리 집에 와서 내 양자가 되어다오. 이제부터 너는 내 아들이다"하고 양자로 삼아 자기 호적에 올리면 그 순간에 그는 옛 가정의 모든 의무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로부터 온전히 자유할 수 있는 바로 그 원리가 양자 교리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거로부터 얼마나 자유하고 있습니까? 요새 가만히 보니 '전과 말소'라는 말이 있습디다. 보아하니 전과자들이 아무리 바르게 살아보려고 애써도 과거가 자꾸 따라다니니까 견딜 수 없어서 나라에 호소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기록상으로는 모든 전과가 말소됩니다. 그렇더라도 양심에 있는 전과는 누가 말소합니까? 그 체질 속에 있는 전과는 누가 말소합니까? 누가 말소시킬 것입니까? 그 많은 인간관계 속에 있는 그것은 누가 말소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이 오늘날 고민하고 있는 많은 문제는 전부 과거의 것입니다. 과거에 잘못한 것, 과거에 지은 죄…… 이런 것들이 계속 우리를 묶어두고 괴롭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식으로는 이로부터 온전히 자유할 수 없습니다. 어느 누가 전과를 말소했다 하더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양자의 영으로 우리를 감화시키실 때에야 과거의 모든 관계로부터 온전히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 진리를 깨쳐주는 것입니다.
알란 레드파드(A. Redpath)라는 분의 저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생활」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과거의 죄를 잊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이미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실패를 잊으십시오. 사단은 늘 과거를 통해서 우리를 괴롭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축복을 잊으십시오. 옛날에 다시 매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성공을 잊으십시오. 안일에 빠지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과거, 그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야 합니다.
제가 아는 장로님 가운데 임종을 앞두신 분이 있었습니다. 죽음이 가까워옴을 느끼고, 그분은 하나님 앞에 참회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무릎을 꿇고 과거에 지은 죄 하나하나를 생각해가면서 회개하고 있는데, 때마침 제가 찾아갔던 것이지요. 저는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무슨 기도를 드리고 계십니까?" "목사님, 제가 이래저래 기도 드리고 있는데,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회개만 하려고 하면, 그 즉시 귀에 들리는 소리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았느냐? 바로 네가 죄를 짓고 있는 현장에서도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았느냐?'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회개하다 말고 지금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것도 감사하고 저것도 감사하고 그저 모든 것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렇습니다.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은 회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됨을 조금도 의심치 않습니다. 모든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나를 이처럼 사랑하신다는 것을 거듭거듭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양자의 영을 받았기에 새로운 관계 속에 들어갑니다.
이제 새 아버지, 새 어머니로부터 유산도 받고 신분도 이어받습니다. 비록 노예라 하더라도 귀족의 양자가 되면 귀족입니다. 왕의 양자가 되면 왕자입니다. 왕의 직위를 계승할 수가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여기서 새로운 출발이 이루어집니다. 동시에 새로운 가족관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네로 황제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양자입니다. 본래는 노예였습니다. 그러나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양자가 되었기에 당당히 대를 이어 왕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클라우디우스 황제에게는 아주 예쁜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네로는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왕자가 되고, 왕이 된 네로는 그녀와 결혼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국가에서 이를 반대했습니다. 피 한방울도 섞이지 않았지만 왕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녀와 네로는 엄연한 남매입니다. 남매간이 되었기 때문에 안되는 것입니다. 결국 두 사람은 결혼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말하면 우리가 새로운 관계에 들어감으로써 그 가족관계가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새로운 형제요, 새로운 가정이요, 새로운 세계관이요, 새로운 물질관이 생깁니다. 그것이 양자의 영을 가진 사람의 의식입니다.
좀더 나아가서 오늘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이제 우리는 새 가정의 식구가 되었습니다. 그 집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영광도 얻겠지만, 그 아버지가 고난을 당할 때에 나도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그런고로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은 고난에 대한 해석이 다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고난의 의미를 다시 해석합니다. 이것은 죄 때문이 아닙니다. 이것은 형벌도 아닙니다. 이것은 심판도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자녀에게 주는 고난입니다. 이 고난을 통하여 나를 가르치십니다. 이 고난을 통하여 참 자녀 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큰 선교의 역사를 가능케 합니다. 그런고로 고난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환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 : 3, 4)"----이것을 알기 때문에 저들은 기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성령 받은 사람들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들은 고난 속에서 결코 슬퍼하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인도함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됨을 시간시간, 사건 사건마다 확인하며 살아갑니다.
또한 양자된 자이기에 겸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온전한 자유를 누리면서 새로운 관계에 삽니다.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자녀된 특권을 누리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양자됨의 영광이 있습니다.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로마서 8:12-17)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養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현대에 사는 우리 인간을 세 유형으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유형은 생각 없이 행동하는 인간입니다. 이름하여 '비인간적 인간'입니다. 단순한 본능에 끌리어 사는 사람입니다. 학자들은 이를 가리켜 activism이라고 합니다. 행동만이 있다는 것이지요. 현대인들은 스스로 생각을 거부하고 기피하는 일이 많습니다. 맑은 정신으로 살아가도 모자라는 세상에, 잠시라도 잊어버리려 하고 망각해버리려 하고, 그래서 술취해 보려 합니다. 인간 되기를 포기하는 마음입니다. 깊이 생각하기를 싫어합니다. 생각하면 고통스럽고 괴로우니까요. 그저 잊어버리려고만 합니다. 차라리 생각하지 아니하겠다는 '기피적 인간'인 것입니다.
결국은 행동만이 남습니다. 이렇듯 단순한 본능과 육체적 욕망에 끌리어 사는 비인간화한 인간상을 처처에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유형은 행동 없이 생각만 하는 인간입니다. 단순한 지성인에 불과합니다. 이는 intellectualism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생각은 많으나 행동 의지가 없습니다.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많은 젊은이들이 해외에 나가서 공부를 합니다. 특별히 미국에 가서 공부를 마치고 박사학위를 얻은 청년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정작 미국의 큰 회사나 연구실에서는 공부 많이 한 한국사람 채용하기를 기피하고 꺼리는 성향이 있다고 합니다. 이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창의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공부는 많이 했고 알기는 많이 아는 것 같은데 새로운 것을 발견해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발명해내는 데 약하다는 것입니다. 창의력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요즘같은 세상에 새로운 것을 창안해내지 못하면 그 많은 공부도 소용없는 것이 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실천 의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알게 되었으면 이제는 추진해야 합니다. 밀고 나가면서 무엇인가 만들어나가야 하는데 그것이 약하다는 것입니다. 아는 것은 많은데 행함이 적습니다. 또한 돈 좀 벌고 출세했다 싶으면 연구생활을 중단해버린다는 것입니다. 연구라고 하는 것은 죽을 때까지 그대로 밀고 나가야 하는 것인데 꾸준한 의지가 없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개인주의 때문입니다. 팀워크(teamwork)의 결핍입니다. 개인으로 놓고 보면 한 사람 한 사람이 저마다 훌륭한데 협력해서 하는 일에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일리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지성인의 고민이 있습니다. 아는 것도 많고 생각도 많습니다. 그러나 말만 많고 실천하는 것이 없습니다. 말을 하라면 못하는 사람이 없는데 행동하는 것은 무식한 사람만도 못합니다.
행동만 보아서는 그렇게 몰상식할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지성은 어디로 간 것입니까? 그 많은 공부가 무슨 소용이 있다는 것입니까?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행동 없는 생각도 문제이지만 행동 없는 인간 자체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유형은 생각 있는 행동의 인간입니다. 인간적인 인간입니다. 나의 지식이 곧 행동의 동력으로 작용합니다. 모름지기 이러한 지성인, 이러한 행동인, 이러한 생활인이 필요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자기성찰입니다. '나는 누구냐, 나는 왜 존재하는가'----이것을 제때에 알아야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나이 쉰 예순이 넘고야 '이제는 내가 뭘 좀 알 것 같다'하며 철이 듭니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기차가 떠난 다음에 손 흔드는 격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좀더 일찌기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배워야 될 시간에 배우지 않고 순종해야 될 시간에 순종하지 아니하다가 어리석게 한평생을 그냥 다 보냅니다. 그러고 나서야 뒤늦게 깨닫고 한숨쉬는 지성인을 보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나의 나됨은 어디로서 비롯된 것입니까? 그 무엇을 위하여 나는 존재하는 것입니까? 무엇보다도 자기성찰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원초적 자기성찰, 나의 나됨을 아는 것이 모든 지식의 근본인 것입니다. 이 같은 자기정체감이 분명해질 때에야 행동의 사람이 될 수 있고 능력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 15:10)"--그실 강요된 것이었습니다만 자발적으로 수용하고 있습니다. 나의 나됨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시작이요 이것을 아는 것이 결론입니다.
정신세계를 제쳐놓는 물질세계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유물론(唯物論)이 그것입니다. 유물론에 기초한 공산주의가 지난 70년 동안 온 세계를 얼마나 어지럽게 했습니까? 또한 영적 세계를 모르는 정신세계도 문제가 있습니다. 신령한 능력을 부인하는 정신세계가 인간을 절망의 길로 이끕니다. 지성은 좋은 것이지만 지성만능은 아닙니다. 과학 만능도 아닙니다. 과학주의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 능력, 영적 세계의 의미를 알고 정신세계를 알아야 합니다. 은혜를 모르는 율법과 신령한 세계를 알지 못하는 정신세계에 깊은 병이 있고, 여기에 '허무주의'라고 하는 엄청난 함정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자기성찰은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알 수 있습니까? 내가 나됨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입니까? 어떤 면에서 보면, 일평생을 두고두고 깨닫고 경험하고 그 많은 시련 속에서 이것 한 가지 배우려고 세상을 사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냐?'---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지 않고,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로 깨닫게 해주시지 않는 한 절대로 깨달을 길이 없습니다. 은혜 가운데서만 나의 나됨을 압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은 약하다'라고 변명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실 마음의 원하는 바가 분명하면 육신은 약한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이 분명하면 행동은 반드시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깨달음이 시원치 않기에 그 행동도 여전히 허우적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깨달음도 은혜요, 그 깨달음이 온전하여 생명력을 발동케 하는 것도 또 다른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은혜 가운데 성찰이 있고 은혜 가운데 행위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인간의 본질적인 정체의식을 명확히 깨쳐주고 있습니다. 먼저, 그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반대로 말하면 '돈에 끌리어 사는 사람은 수전노이다. 육체의 욕망에 끌리어 사는 사람은 속물이다. 헛된 명예와 허영에 끌리어 사는 사람은 위선자다. 사단의 악한 마음에 끌리어 노예로 사는 사람은 사단의 자녀다. 악마의 자녀다'라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에 인도함을 받는 자---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요, 바른 인간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인간은 분명히 흙으로 빚어진 것입니다. 흙에서부터 비롯된 육체라고 하는 것에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어 주셔서 인간은 비로소 인간이 됩니다. 그런데 그 위에 플러스 알파(plus Alpha)가 더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에 인간인 것입니다. 숨을 쉬지 않는 인간은 죽어 있는 인간이듯이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지 않는 인간은 죽은 인간입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확증을 얻어야 합니다. 영은 영으로 식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건강한 영이 있고야 그 건강한 영의 지배를 받는 건강한 정신과 건강한 이성이 있습니다. 건강한 정신에 주도된 육체가 건강한 육체입니다. 잘못된 정신에 끌려 휘청거리는 인간은 그 육체도 병든 육체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건강한 영혼에 건강한 정신, 건강한 정신에 건강한 육체----이 바른 관계를 미루는 인간이 바로 하나님과 교통합니다. 그래서 본문말씀 16절에서는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확증하신다고 단단히 못박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이런 전설이 있습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을 등에 업고 광야로 나갔습니다. 좨 장성한 아들이지만 차마 광야의 거친 길을 걷게 할 수가 없다 해서 이 아버지는 다 큰아들을 업고 갑니다. 그렇게 한참을 가다가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친구와 마주칩니다. 서로 인사를 하고 나자 이 친구는 아버지가 등에 업은 다 큰아들을 보고는 이렇게 묻습니다. "여보게, 업고 가는 그 아이가 누구인가?" "내 아들일세." 친구는 짓궂게도 다시 등에 업힌 아들보고 묻습니다. "얘, 너를 업고 가는 사람이 누구냐? 네 아버지냐?" 그런데 이 아이가 업혀서 한다는 말이 이렇습니다. "아니요." 천연덕스럽게 그리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하도 기가 막혀서 아이를 땅에 내려놓고 "아니, 내가 네 아버지 아니더냐?"라고 묻습니다. 아이는 오히려 "당신이 어떻게 내 아버지입니까?"하고 대꾸합니다. 아버지는 이것을 어떻게 제대로 가르쳐주어야 할지, 그 증명할 방법이 없어서 막막했습니다. 답답한 아버지는 안타깝게 묻습니다. "내가 너를 이렇게 업고 가지 않느냐?" "나를 업었다고 아버지인가요?" "내가 너를 먹여 살리지 않느냐?" "나를 먹여 살린다고 아버지인가요?" 이런 답답한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급기야 아버지와 아들의 싸움으로 번지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오늘이라도 집에 가셔서 아버지를 쳐다보면서 한번 물어보십시오. "당신이 내 아버지입니까? 그것을 어떻게 증명하지요?"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대체 이것을 무엇으로 증명합니까? 이 전설에서 말하는 아들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큰 능력으로 구원하셔서 광야로 인도하십니다. 광야에 데려다 놓으시고 나는 너희의 아버지이고 너희는 나의 자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말씀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도무지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주 되시고, 친히 아버지가 되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됨을 알게 하는 데에 무려 40년이 걸렸습니다. 그 많은 고통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저들은 깨닫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덧붙여 한 말씀 더 드리고 싶습니다. 이 아버지와 아들의 싸움을 말릴 수 있고 바르게 해석해줄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그 옆에 어머니가 있었으면 됩니다. 어머니가 딱 한마디만 하면 됩니다. "천지개벽을 하더라도 이 어른이 네 아버지이다"--어머니만이 이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문제가 간단히 해결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는 이야기입니다만, 가정에서의 아버지의 권위, 아버지의 이미지는 그 가정의 어머니가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내로서 남편이 보기 싫더라도 자녀교육을 제대로 하시려거든 남편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하십시오. "용케 니 애비를 닮았구나. 제발 니 애비만은 닮지 말아라." 이런 소리만 하고 있다면 가정교육은 끝난 것입니다. 아내한테는 좀 부족한 남편이라 하더라도 자녀교육을 위해서는 "네 아버지는 훌륭하신 분이다. 지금 가난하게 사는 것은 진실하기 때문이다. 비록 돈은 못벌어 고생은 한다마는, 네 아버지는 참으로 훌륭하시단다"하고 말하십시오. 아버지의 이미지는 그 어머니가 만드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성령의 별명은 '어머니의 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자녀들과의 관계를 설명하시고 위로하시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아버지에게 매맞고 우는 아이를 어머니가 위로합니다. "네 아버지가 너를 때린 것은 너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란다." 바로 이 말씀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사건에서 너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이러한 어려움을 주시는 것이다"라고 말씀해주십니다.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증케 하여주십니다.
두 번째로 오늘의 본문에서 말씀하는 것은 '그런데 우리는 양자의 영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자녀는 자녀인데 양자(養子)입니다. 이미 진노의 자녀였고 이미 죄의 자녀였기 때문에, 이제 탕자처럼 회개하고 돌아와서 양자의 영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은혜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양자 삼을 때에 무슨 시험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양자를 들이고 싶은, 부모될 사람들이 어느 고아원에서든지 한 아이에게 '너는 내 아들이다'하면 그만입니다. 그 때부터 아들입니다. '양자'라는 것은 절대은혜입니다. 뿐만 아니라 완전은혜입니다. 조건이 없습니다. 특권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양자로 삼은 아이에게 '양자답게 살아달라'고 부탁합니다. 양자된 자격으로 가르쳐 가는 것입니다. 미리 가르쳐보고 양자를 삼는 것이 아니라 양자로 삼고 나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양자의 영이기 때문에 과거로부터 온전히 자유함을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빚진 자로되……"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빚을 졌다는 이 말씀이 바로 양자 교리의 아주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옛날에는 아버지가 빚을 많이 지고 죽으면 그 빛을 아들이 대신 갚아야만 했습니다. 갚을 길이 없으면 노예로 팔려 가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하여 일생동안 죽을 때까지 그 집의 노예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당시의 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라도 어떤 사람이 이를 긍휼히 여겨서, 빚을 잔뜩 걸머진 채로 그 무거운 의무를 감당해야만 하는 이 어린아이에게 "우리 집에 와서 내 양자가 되어다오. 이제부터 너는 내 아들이다"하고 양자로 삼아 자기 호적에 올리면 그 순간에 그는 옛 가정의 모든 의무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로부터 온전히 자유할 수 있는 바로 그 원리가 양자 교리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거로부터 얼마나 자유하고 있습니까? 요새 가만히 보니 '전과 말소'라는 말이 있습디다. 보아하니 전과자들이 아무리 바르게 살아보려고 애써도 과거가 자꾸 따라다니니까 견딜 수 없어서 나라에 호소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기록상으로는 모든 전과가 말소됩니다. 그렇더라도 양심에 있는 전과는 누가 말소합니까? 그 체질 속에 있는 전과는 누가 말소합니까? 누가 말소시킬 것입니까? 그 많은 인간관계 속에 있는 그것은 누가 말소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이 오늘날 고민하고 있는 많은 문제는 전부 과거의 것입니다. 과거에 잘못한 것, 과거에 지은 죄…… 이런 것들이 계속 우리를 묶어두고 괴롭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식으로는 이로부터 온전히 자유할 수 없습니다. 어느 누가 전과를 말소했다 하더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양자의 영으로 우리를 감화시키실 때에야 과거의 모든 관계로부터 온전히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 진리를 깨쳐주는 것입니다.
알란 레드파드(A. Redpath)라는 분의 저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생활」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과거의 죄를 잊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이미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실패를 잊으십시오. 사단은 늘 과거를 통해서 우리를 괴롭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축복을 잊으십시오. 옛날에 다시 매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성공을 잊으십시오. 안일에 빠지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과거, 그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야 합니다.
제가 아는 장로님 가운데 임종을 앞두신 분이 있었습니다. 죽음이 가까워옴을 느끼고, 그분은 하나님 앞에 참회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무릎을 꿇고 과거에 지은 죄 하나하나를 생각해가면서 회개하고 있는데, 때마침 제가 찾아갔던 것이지요. 저는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무슨 기도를 드리고 계십니까?" "목사님, 제가 이래저래 기도 드리고 있는데,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회개만 하려고 하면, 그 즉시 귀에 들리는 소리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았느냐? 바로 네가 죄를 짓고 있는 현장에서도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았느냐?'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회개하다 말고 지금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것도 감사하고 저것도 감사하고 그저 모든 것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렇습니다.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은 회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됨을 조금도 의심치 않습니다. 모든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나를 이처럼 사랑하신다는 것을 거듭거듭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양자의 영을 받았기에 새로운 관계 속에 들어갑니다.
이제 새 아버지, 새 어머니로부터 유산도 받고 신분도 이어받습니다. 비록 노예라 하더라도 귀족의 양자가 되면 귀족입니다. 왕의 양자가 되면 왕자입니다. 왕의 직위를 계승할 수가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여기서 새로운 출발이 이루어집니다. 동시에 새로운 가족관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네로 황제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양자입니다. 본래는 노예였습니다. 그러나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양자가 되었기에 당당히 대를 이어 왕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클라우디우스 황제에게는 아주 예쁜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네로는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왕자가 되고, 왕이 된 네로는 그녀와 결혼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국가에서 이를 반대했습니다. 피 한방울도 섞이지 않았지만 왕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녀와 네로는 엄연한 남매입니다. 남매간이 되었기 때문에 안되는 것입니다. 결국 두 사람은 결혼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말하면 우리가 새로운 관계에 들어감으로써 그 가족관계가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새로운 형제요, 새로운 가정이요, 새로운 세계관이요, 새로운 물질관이 생깁니다. 그것이 양자의 영을 가진 사람의 의식입니다.
좀더 나아가서 오늘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이제 우리는 새 가정의 식구가 되었습니다. 그 집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영광도 얻겠지만, 그 아버지가 고난을 당할 때에 나도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그런고로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은 고난에 대한 해석이 다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고난의 의미를 다시 해석합니다. 이것은 죄 때문이 아닙니다. 이것은 형벌도 아닙니다. 이것은 심판도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자녀에게 주는 고난입니다. 이 고난을 통하여 나를 가르치십니다. 이 고난을 통하여 참 자녀 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큰 선교의 역사를 가능케 합니다. 그런고로 고난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환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 : 3, 4)"----이것을 알기 때문에 저들은 기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성령 받은 사람들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들은 고난 속에서 결코 슬퍼하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인도함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됨을 시간시간, 사건 사건마다 확인하며 살아갑니다.
또한 양자된 자이기에 겸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온전한 자유를 누리면서 새로운 관계에 삽니다.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자녀된 특권을 누리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양자됨의 영광이 있습니다.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क्वाक पास्टर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스도의 영(靈)(로마서 8:1-11) (0) | 2023.02.26 |
---|---|
이러한 기쁨에 사는 자(요한복음 3장 22절~30절) (0) | 2023.02.26 |
가장 고상한 것 (빌립보서 3장 1절~9절) (0) | 2023.02.26 |
개혁자의 신앙 의식(행 4:13~22) (0) | 2023.02.26 |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요한복음 12장 20~30절) (0) | 2023.02.2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