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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영(靈)(로마서 8:1-1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채근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고요한 중에 고요한 것은 고요한 것이 아니다. 진실한 사람들 틈에서 진실한 것은 진실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칭찬하는 것은 칭찬이 아니다. 본인이 없을 때 그를 칭찬하는 것이 진짜 칭찬이다." 이것이 곧 동양인의 철학이라 하겠습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이 날은 본래 유대인들의 해방일인 유월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기 때문에 오순절이라고도 하는 그들의 명절날입니다. 오순절이라는 말은 단순히 50이라는 뜻으로 원어인 펜테코스트(pentecost)란 단어의 "펜테"의 5라는 숫자와 "코스트"의 10이라는 숫자가 합하여 50이란 뜻의 말이 된 것뿐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이 날을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로부터 50일이 되는 날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역사가 있었다 하여 성령강림주일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보통 부활절에서 7주 되는 다음 주일날을 성령 강림주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제자들과 같이 지내신 예수님은 승천하실 때에 제자들에게 "약속한 성령이 임할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릴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예수가 승천하신 후 제자들과 그를 따르던 우리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승천하신 지 열흘 후인 오순절날 갑자기 폭탄처럼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마치 불의 혀같이 나타난 성령은 그 때까지 고요하던 사람들의 마음을 격동하게 하였으며 동시에 벌벌 떨고 두려워하던 사람들에게 확신과 강한 힘을 주셨습니다. 이런 사건이 있은 후 그들은 용감하게 마가의 다락방에서 거리로 나와 만나는 사람들에게 확신에 찬 목소리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는 철두철미하게 선교적인 역사요 교회론적인 역사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성령의 역사를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성령의 역사의 사건이 약간씩 다른 각도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이것을 복음서에 나타난 것과, 사도행전에 나타난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의 서신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로 구분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분은 성령에 대한 편벽된 이해를 지양(止揚)하고 좀더 종합적인 이해를 도모하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령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음을 우리는 종종 보게 됩니다. 그 까닭은 사람들이 주로 사도 바울의 서신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만을 기준 하여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성령의 역사를 방언과 예언 등으로 많이 설명하였고 심지어 방언이나 예언을 힘써 구하라(고전 14장)고까지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는 증거(witness)의 역사였습니다. 사람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힘을 얻고 거리로 나아가서 힘차게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도 오순절 성령의 역사 하심으로 담대하게 예수님을 증거하기 시작했으며, 후에는 법정에서까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 아니면 하나님의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 너희가 판단하라"고까지 담대히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매를 맞고 나오면서도 울거나 한탄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16장에서는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행 16:14)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성령의 역사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나게 하고 깨닫게 하고 감당하게 하리라고 설명되었습니다(요 16:12-15).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연장이기에 그 말씀이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 열매를 맺게 하는 역사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언급한 것이 성경에 나타난 성령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간혹 어느 한쪽 면만 생각하고 성령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을 잘못 이해하는 실수를 범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아는 바와 같이 예수님의 부활은 유월절 아침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historical Event)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이 내 마음속에 들어와 생명의 힘이 되고 확신과 능력이 되는 역사가 일어날 때 이것은 신앙 사건(Faith Event)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으로 유월절 아침, 부활절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지만 제자들의 마음에 신앙적 사건으로 나타난 것은 바로 오순절에 나타난 성령에 의해서였습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 바로 영의 역사라고 하며 또한 성령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역사적 사건과 신앙 사건을 서로 다른 사건으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인은 이 둘을 합쳐서 생각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 말은 예수의 부활을 보고 믿고 또 그와 악수까지 했다 하더라도 온전한 기독교인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고, 나를 위하여 부활하셨다는 이 엄청난 사건을 믿으면서 마음속에 그리스도와 나의 생명을 연합하는 신비로운 경험이 이루어질 때에야 비로소 온전한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분명히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사도 바울의 매우 중요한 명제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8장을 흔히 "예정장"이라고도 합니다. 이 장은 온전한 "성령의 장"입니다.
가톨릭에서는 예수의 부활 사건에 역점을 두었습니다만, 오순절 파나 아나밥티스, 재세례파 등의 사람들은 크리스마스나 부활절보다도 오직 오순절, 성령강림절 하나만을 열심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둘다 일리가 있는 것들이지만 우리는 역사적 사건과 동시에 마음속에 체험되는 주관적인 체험도 중요하게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 합니다. 이 세계 어느 민족이든지 간에 그 민족 특유의 의식 구조(Frame of Reference)가 있습니다. 이 말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말로서, 사람들은 어떠한 사물이나 현상을 대할 때 이 의식 구조에 의해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인다"는 말이 바로 이 의식 구조와 관련이 있는 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나라는 수천년 동안 샤머니즘이라는 무속 종교의 배경 속에서 성장하여 왔기 때문에 우리 민족의 의식 구조 속에는 이러한 샤머니즘적 요소가 다분히 들어 있습니다. 이 샤머니즘적인 세계관과 종교관이 우리 기독교인들의 '성령의 역사'를 왜곡되게 이해시키는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무속 종교에서는 강신(降神),즉 신이 내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일단 신(神)이 내려 신접하게 되면 정신이 몽롱해지고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몰입하게 되는 황홀 상태, 소위 엑스터시(Ecstasy)라고 하는 상태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나라 기독교신자들 중에서 성령의 역사를 이러한 신접(神接)의 상태, 즉 엑스터시를 의미하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잘못된 생각입니다. 오히려 성령이 임하게 되면 우리의 자아 의식은 더욱 분명해져서 하나님과 자기 자신의 관계를 명확하게 알게 되며, 이웃과 성경 말씀을 좀더 잘 받아들이게 됩니다.
성령은 절대로 몽롱한 상태가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도록 하는 지혜의 영입니다.
다음에 우리로 하여금 '성령의 역사'를 잘못 이해하게 하는 것이 바로 불교적인 세계관입니다. 성령의 충만한 은총을 받으면 정욕이 없어지고,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지며, 우리 자신은 점점 신이 되어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불교적인 입장에서는 생불(生佛)이 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성령을 충만히 받아도 나는 나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지은 죄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죄된 나의 인간성이 금방 변하는 것도 또한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충만히 받았다는 것을 불교식으로 생불이 되었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였다가는 큰 잘못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진실한 의미에서의 성령이란 무엇입니까? 성령은 곧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영, 이것이 곧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는 그 순간 내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내 성품은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살아가는 순간 순간마다 그리스도를 의식하며, 잘못된 길로 갈 때나 슬퍼 울 때에 보혜사 성령이 나를 책망하시고 위로하심을 의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율법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가끔 오해하기 쉬운 성경 구절이 있는데, 그 중에서 "사랑하라"는 말씀은 요한복음을 자세히 읽어보면 "사랑하리라"는 말로써 더 많이 표현됨을 알 수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네 이웃을 사랑하리라" 혹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 곧 사랑을 지키리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8에서도 "너희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권능을 받으면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되라"와 "되리라"는 상당히 의미가 다른 말이 아닙니까? 성령을 받으면 내 증인이 되리라는 이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억지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으면 나도 모르게 변화하여 그렇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바람이 곧 성령이며, 성령이 내게 들어와서 역사할 때에는 나도 잘 모른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 될 의무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열심히 교회에 출석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이며, 또한 열심히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해야 될 의무이며, 우리의 인격이 변화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의 인격의 변화란 의지의 결단이라기보다는 신비로운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세 번 오십니다. 첫 번째는 역사적으로 육신의 몸을 빌어 베들레헴으로 오신 성육신의 역사이며, 두 번째는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오순절의 역사이며, 세 번째는 영과 육을 합친 완전한 인격으로 다시 오시는 흔히 '재림'이라고 부르는 역사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종말적인 그리스도의 임재를 믿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성령을 '해방의 영'이라 하며,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켰다고 합니다. 성령은 '자유의 영'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율법이나 인습에 얽매이지 않고, 두려움과 공포에 속박되어 살지 않는 가장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기독교의 참 생명은 자유입니다. 그러기에 공산주의자들은 기독교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자유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양심의 자유, 인격의 자유, 진리의 자유, 생명의 자유를 뜻합니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인들의 생명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또 다시 율법에 얽매여야 합니까? 성경 말씀에 분명히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유,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죄 안에 사는 사람은 죄의 종이기 때문에 자유가 없습니다. 이 자유라고 하는 것은 의인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의롭다 하심을 이루어 주십니다. 즉 의인이 아닌데도 의인으로 인정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 칭의, 득의(Justification)라 하는 의로워지는 역사가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비로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고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전에는 죄인에 속했던 우리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서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 생각할 것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는 양자(Adoption)의 칭호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롬 8:15)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이질화된 존재들이었지만 그리스도의 중보적인 역할로 말미암아 다시 아들의 자리로 복귀된 것입니다. 아들이 되었다 함은 육체로 태어나는 역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음을 뜻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된 의식이며, 이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어떤 아이의 일입니다. 그 아이가 어느날 약간의 실수를 하였는데 아버지로부터 심한 꾸중을 들었답니다. 그래서 상심해 있는 이 아이를 어머니가 위로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어머니조차도 이 아이에게 회초리를 들었습니다. 매맞은 어린이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며칠 전에 할머니가 너는 이 집 아들이 아니라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와 그날 야단맞은 것이 자꾸 엇갈리면서 그 아이는 공포와 고민 끝에 그만 병이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일주일을 꼬박 자리에 누워 학교에도 못가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은 걱정이 되어서 어디가 아픈지 아무리 물어 보아도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앓기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어린이가 일주일이 지나도록 출석을 하지 않자 담임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오셨습니다. 반가운 선생님과 얘기하는 가운데 이 아이가 자기는 이 집 아들이 아니라고 하면서 전에 있었던 일들을 낱낱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선생님은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우선적으로 신체검사를 하여 등에 커다란 점을 발견하고는 "너의 어머니 등에도 이런 점이 있다는데, 너도 점이 있는 것을 보니 엄마 닮았구나"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부모님들의 어릴적 사진을 보고 이 아이와 비교해 보면서 부모님 모습과 어디가 어떻게 닮았는지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 집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을 납득시키는 일이 선생님은 무척 힘들었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는 어떻게 현재의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친부모인 줄 믿겠습니까? 산부인과에 가서 확인해 보겠습니까? 그러나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럼 동사무소에 가서 호적 등본을 떼어 보겠습니까? 친아들이 아니라도 호적에 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현재의 아버지, 어머니가 나의 아버지, 나의 어머니라고 믿어지는 사실 그 자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렇게 믿게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난 예수님을 믿습니다. 물론 나는 가끔 실수도 하고 죄를 짓기도 하지만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 자녀를 미워하지는 않겠죠?" 바람직한 말은 아니지만 이 사람의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 됨을 확고하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잘났어도 못났어도 자기 자식인데 사랑하지 않고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렇게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됨을 철저히 믿는 확실한 증거만 가지고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요, 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어떠한 역경과 시련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를 내 아버지로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이 있다면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고린도전서 12:3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단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주로 고백하게 한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러한 역사 이후에 생기는 것이 바로 주안에서 여러 형제 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이웃의 관계였지만 지금은 형제의 관계가 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눈에는 하나님 아버지가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 세상은 참으로 아름다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로 생각한 것은 중생과 함께 성화(Sanctification)의 역사가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사람이 전혀 몰라볼 만큼 달라지는 마술적인 역사는 절대로 아닙니다. 그렇다고 기계론적인 역사도 물론 아닙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겨자씨에 대한 것이 나옵니다. 매우 작은 씨앗이지만 그 속에서 생명이 매일매일 조금씩 자라다가 마침내 온 나무를 지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성령의 역사 역시 이와 같습니다. 절대로 하루아침에 모든 인격이 변화되기를 바라지 않기 바랍니다. 비록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더라도 이미 그 중심에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생활 습성을 갑자기 탈피하지는 못하지만 천천히 자신도 모르게 하나 둘씩 변화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성령의 역사가 충만히 나타나기 위하여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에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말대로 회개하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그리하여 성령을 선물로 받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로마서 8장에 기록된 대로 성령의 역사를 소멸하거나 거부하지 말고 이미 내 마음속에 이루어지는 성령의 역사에 순종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성령과 나와의 관계는 인격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말씀에 감동주시는 대로 순종해 나갈 때에 우리는 더 큰 성령의 역사하심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내게 주시는 말씀의 은혜를 따라 지적(知的)으로나 정적(情的)으로나 성령의 충만한 역사에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온전히 그리스도의 영에 이끌린 삶을 한 번 살아봅시다.
현대는 무척 어려운 시기입니다. 그러기에 더욱 온전히 우리의 삶과 인격 모두를 그리스도의 영에 맡기고 위탁하여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충만하였던 성령 의 역사를 생각합니다. 그와 같은 역사가 오늘 이 시간 이 자리에도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동안 우리가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살려고 했던 모든 삶을 지양하고 오직 주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주의 영에 이끌리어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미워하던 자를 사랑하고, 슬퍼하던 자에게는 기뻐하게 하시고, 두려움에 떨던 자들에게는 새 술에 취함과 같이 담대하게 하시고, 절망에 빠졌던 자들에게는 소망 가운데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우리를 죄에서 풀어 자유롭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구합니다. 아멘.
그리스도의 영(靈)(로마서 8:1-1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채근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고요한 중에 고요한 것은 고요한 것이 아니다. 진실한 사람들 틈에서 진실한 것은 진실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칭찬하는 것은 칭찬이 아니다. 본인이 없을 때 그를 칭찬하는 것이 진짜 칭찬이다." 이것이 곧 동양인의 철학이라 하겠습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이 날은 본래 유대인들의 해방일인 유월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기 때문에 오순절이라고도 하는 그들의 명절날입니다. 오순절이라는 말은 단순히 50이라는 뜻으로 원어인 펜테코스트(pentecost)란 단어의 "펜테"의 5라는 숫자와 "코스트"의 10이라는 숫자가 합하여 50이란 뜻의 말이 된 것뿐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이 날을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로부터 50일이 되는 날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역사가 있었다 하여 성령강림주일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보통 부활절에서 7주 되는 다음 주일날을 성령 강림주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제자들과 같이 지내신 예수님은 승천하실 때에 제자들에게 "약속한 성령이 임할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릴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예수가 승천하신 후 제자들과 그를 따르던 우리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승천하신 지 열흘 후인 오순절날 갑자기 폭탄처럼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마치 불의 혀같이 나타난 성령은 그 때까지 고요하던 사람들의 마음을 격동하게 하였으며 동시에 벌벌 떨고 두려워하던 사람들에게 확신과 강한 힘을 주셨습니다. 이런 사건이 있은 후 그들은 용감하게 마가의 다락방에서 거리로 나와 만나는 사람들에게 확신에 찬 목소리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는 철두철미하게 선교적인 역사요 교회론적인 역사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성령의 역사를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성령의 역사의 사건이 약간씩 다른 각도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이것을 복음서에 나타난 것과, 사도행전에 나타난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의 서신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로 구분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분은 성령에 대한 편벽된 이해를 지양(止揚)하고 좀더 종합적인 이해를 도모하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령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음을 우리는 종종 보게 됩니다. 그 까닭은 사람들이 주로 사도 바울의 서신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만을 기준 하여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성령의 역사를 방언과 예언 등으로 많이 설명하였고 심지어 방언이나 예언을 힘써 구하라(고전 14장)고까지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는 증거(witness)의 역사였습니다. 사람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힘을 얻고 거리로 나아가서 힘차게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도 오순절 성령의 역사 하심으로 담대하게 예수님을 증거하기 시작했으며, 후에는 법정에서까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 아니면 하나님의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 너희가 판단하라"고까지 담대히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매를 맞고 나오면서도 울거나 한탄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16장에서는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행 16:14)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성령의 역사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나게 하고 깨닫게 하고 감당하게 하리라고 설명되었습니다(요 16:12-15).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연장이기에 그 말씀이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 열매를 맺게 하는 역사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언급한 것이 성경에 나타난 성령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간혹 어느 한쪽 면만 생각하고 성령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을 잘못 이해하는 실수를 범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아는 바와 같이 예수님의 부활은 유월절 아침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historical Event)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이 내 마음속에 들어와 생명의 힘이 되고 확신과 능력이 되는 역사가 일어날 때 이것은 신앙 사건(Faith Event)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으로 유월절 아침, 부활절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지만 제자들의 마음에 신앙적 사건으로 나타난 것은 바로 오순절에 나타난 성령에 의해서였습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 바로 영의 역사라고 하며 또한 성령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역사적 사건과 신앙 사건을 서로 다른 사건으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인은 이 둘을 합쳐서 생각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 말은 예수의 부활을 보고 믿고 또 그와 악수까지 했다 하더라도 온전한 기독교인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고, 나를 위하여 부활하셨다는 이 엄청난 사건을 믿으면서 마음속에 그리스도와 나의 생명을 연합하는 신비로운 경험이 이루어질 때에야 비로소 온전한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분명히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사도 바울의 매우 중요한 명제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8장을 흔히 "예정장"이라고도 합니다. 이 장은 온전한 "성령의 장"입니다.
가톨릭에서는 예수의 부활 사건에 역점을 두었습니다만, 오순절 파나 아나밥티스, 재세례파 등의 사람들은 크리스마스나 부활절보다도 오직 오순절, 성령강림절 하나만을 열심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둘다 일리가 있는 것들이지만 우리는 역사적 사건과 동시에 마음속에 체험되는 주관적인 체험도 중요하게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 합니다. 이 세계 어느 민족이든지 간에 그 민족 특유의 의식 구조(Frame of Reference)가 있습니다. 이 말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말로서, 사람들은 어떠한 사물이나 현상을 대할 때 이 의식 구조에 의해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인다"는 말이 바로 이 의식 구조와 관련이 있는 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나라는 수천년 동안 샤머니즘이라는 무속 종교의 배경 속에서 성장하여 왔기 때문에 우리 민족의 의식 구조 속에는 이러한 샤머니즘적 요소가 다분히 들어 있습니다. 이 샤머니즘적인 세계관과 종교관이 우리 기독교인들의 '성령의 역사'를 왜곡되게 이해시키는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무속 종교에서는 강신(降神),즉 신이 내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일단 신(神)이 내려 신접하게 되면 정신이 몽롱해지고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몰입하게 되는 황홀 상태, 소위 엑스터시(Ecstasy)라고 하는 상태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나라 기독교신자들 중에서 성령의 역사를 이러한 신접(神接)의 상태, 즉 엑스터시를 의미하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잘못된 생각입니다. 오히려 성령이 임하게 되면 우리의 자아 의식은 더욱 분명해져서 하나님과 자기 자신의 관계를 명확하게 알게 되며, 이웃과 성경 말씀을 좀더 잘 받아들이게 됩니다.
성령은 절대로 몽롱한 상태가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도록 하는 지혜의 영입니다.
다음에 우리로 하여금 '성령의 역사'를 잘못 이해하게 하는 것이 바로 불교적인 세계관입니다. 성령의 충만한 은총을 받으면 정욕이 없어지고,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지며, 우리 자신은 점점 신이 되어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불교적인 입장에서는 생불(生佛)이 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성령을 충만히 받아도 나는 나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지은 죄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죄된 나의 인간성이 금방 변하는 것도 또한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충만히 받았다는 것을 불교식으로 생불이 되었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였다가는 큰 잘못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진실한 의미에서의 성령이란 무엇입니까? 성령은 곧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영, 이것이 곧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는 그 순간 내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내 성품은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살아가는 순간 순간마다 그리스도를 의식하며, 잘못된 길로 갈 때나 슬퍼 울 때에 보혜사 성령이 나를 책망하시고 위로하심을 의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율법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가끔 오해하기 쉬운 성경 구절이 있는데, 그 중에서 "사랑하라"는 말씀은 요한복음을 자세히 읽어보면 "사랑하리라"는 말로써 더 많이 표현됨을 알 수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네 이웃을 사랑하리라" 혹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 곧 사랑을 지키리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8에서도 "너희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권능을 받으면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되라"와 "되리라"는 상당히 의미가 다른 말이 아닙니까? 성령을 받으면 내 증인이 되리라는 이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억지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으면 나도 모르게 변화하여 그렇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바람이 곧 성령이며, 성령이 내게 들어와서 역사할 때에는 나도 잘 모른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 될 의무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열심히 교회에 출석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이며, 또한 열심히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해야 될 의무이며, 우리의 인격이 변화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의 인격의 변화란 의지의 결단이라기보다는 신비로운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세 번 오십니다. 첫 번째는 역사적으로 육신의 몸을 빌어 베들레헴으로 오신 성육신의 역사이며, 두 번째는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오순절의 역사이며, 세 번째는 영과 육을 합친 완전한 인격으로 다시 오시는 흔히 '재림'이라고 부르는 역사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종말적인 그리스도의 임재를 믿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성령을 '해방의 영'이라 하며,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켰다고 합니다. 성령은 '자유의 영'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율법이나 인습에 얽매이지 않고, 두려움과 공포에 속박되어 살지 않는 가장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기독교의 참 생명은 자유입니다. 그러기에 공산주의자들은 기독교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자유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양심의 자유, 인격의 자유, 진리의 자유, 생명의 자유를 뜻합니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인들의 생명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또 다시 율법에 얽매여야 합니까? 성경 말씀에 분명히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유,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죄 안에 사는 사람은 죄의 종이기 때문에 자유가 없습니다. 이 자유라고 하는 것은 의인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의롭다 하심을 이루어 주십니다. 즉 의인이 아닌데도 의인으로 인정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 칭의, 득의(Justification)라 하는 의로워지는 역사가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비로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고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전에는 죄인에 속했던 우리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서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 생각할 것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는 양자(Adoption)의 칭호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롬 8:15)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이질화된 존재들이었지만 그리스도의 중보적인 역할로 말미암아 다시 아들의 자리로 복귀된 것입니다. 아들이 되었다 함은 육체로 태어나는 역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음을 뜻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된 의식이며, 이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어떤 아이의 일입니다. 그 아이가 어느날 약간의 실수를 하였는데 아버지로부터 심한 꾸중을 들었답니다. 그래서 상심해 있는 이 아이를 어머니가 위로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어머니조차도 이 아이에게 회초리를 들었습니다. 매맞은 어린이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며칠 전에 할머니가 너는 이 집 아들이 아니라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와 그날 야단맞은 것이 자꾸 엇갈리면서 그 아이는 공포와 고민 끝에 그만 병이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일주일을 꼬박 자리에 누워 학교에도 못가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은 걱정이 되어서 어디가 아픈지 아무리 물어 보아도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앓기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어린이가 일주일이 지나도록 출석을 하지 않자 담임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오셨습니다. 반가운 선생님과 얘기하는 가운데 이 아이가 자기는 이 집 아들이 아니라고 하면서 전에 있었던 일들을 낱낱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선생님은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우선적으로 신체검사를 하여 등에 커다란 점을 발견하고는 "너의 어머니 등에도 이런 점이 있다는데, 너도 점이 있는 것을 보니 엄마 닮았구나"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부모님들의 어릴적 사진을 보고 이 아이와 비교해 보면서 부모님 모습과 어디가 어떻게 닮았는지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 집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을 납득시키는 일이 선생님은 무척 힘들었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는 어떻게 현재의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친부모인 줄 믿겠습니까? 산부인과에 가서 확인해 보겠습니까? 그러나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럼 동사무소에 가서 호적 등본을 떼어 보겠습니까? 친아들이 아니라도 호적에 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현재의 아버지, 어머니가 나의 아버지, 나의 어머니라고 믿어지는 사실 그 자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렇게 믿게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난 예수님을 믿습니다. 물론 나는 가끔 실수도 하고 죄를 짓기도 하지만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 자녀를 미워하지는 않겠죠?" 바람직한 말은 아니지만 이 사람의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 됨을 확고하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잘났어도 못났어도 자기 자식인데 사랑하지 않고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렇게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됨을 철저히 믿는 확실한 증거만 가지고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요, 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어떠한 역경과 시련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를 내 아버지로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이 있다면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고린도전서 12:3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단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주로 고백하게 한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러한 역사 이후에 생기는 것이 바로 주안에서 여러 형제 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이웃의 관계였지만 지금은 형제의 관계가 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눈에는 하나님 아버지가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 세상은 참으로 아름다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로 생각한 것은 중생과 함께 성화(Sanctification)의 역사가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사람이 전혀 몰라볼 만큼 달라지는 마술적인 역사는 절대로 아닙니다. 그렇다고 기계론적인 역사도 물론 아닙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겨자씨에 대한 것이 나옵니다. 매우 작은 씨앗이지만 그 속에서 생명이 매일매일 조금씩 자라다가 마침내 온 나무를 지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성령의 역사 역시 이와 같습니다. 절대로 하루아침에 모든 인격이 변화되기를 바라지 않기 바랍니다. 비록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더라도 이미 그 중심에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생활 습성을 갑자기 탈피하지는 못하지만 천천히 자신도 모르게 하나 둘씩 변화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성령의 역사가 충만히 나타나기 위하여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에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말대로 회개하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그리하여 성령을 선물로 받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로마서 8장에 기록된 대로 성령의 역사를 소멸하거나 거부하지 말고 이미 내 마음속에 이루어지는 성령의 역사에 순종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성령과 나와의 관계는 인격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말씀에 감동주시는 대로 순종해 나갈 때에 우리는 더 큰 성령의 역사하심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내게 주시는 말씀의 은혜를 따라 지적(知的)으로나 정적(情的)으로나 성령의 충만한 역사에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온전히 그리스도의 영에 이끌린 삶을 한 번 살아봅시다.
현대는 무척 어려운 시기입니다. 그러기에 더욱 온전히 우리의 삶과 인격 모두를 그리스도의 영에 맡기고 위탁하여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충만하였던 성령 의 역사를 생각합니다. 그와 같은 역사가 오늘 이 시간 이 자리에도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동안 우리가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살려고 했던 모든 삶을 지양하고 오직 주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주의 영에 이끌리어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미워하던 자를 사랑하고, 슬퍼하던 자에게는 기뻐하게 하시고, 두려움에 떨던 자들에게는 새 술에 취함과 같이 담대하게 하시고, 절망에 빠졌던 자들에게는 소망 가운데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우리를 죄에서 풀어 자유롭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구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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