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능력의 비밀 행14:1~18
저는 오늘 설교 준비를 하면서, 저 자신을 많이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참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14:3절,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저를 부끄럽게 한 첫 번째 구절은 바로 위 3절이었습니다.
성경은 이고니온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오래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래 있었다’는 것에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쓰신 것은 아닐까요?
사도 바울이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의 역사도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많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믿었지만, 훼방하고 핍박하는 이들도 일어났습니다.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선동하여
사도 바울과 바나바에게 악감을 품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은 이러한 방해와 핍박을 받으면서
그 도시에 오래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묵상하면서
‘핍박이 있는 중에 사도 바울이 이고니온에 오래 있었던 것이 참 놀랍다’
하는 것을 마음에 느끼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상황을.. 바로 내 이야기라고 생각해 봅시다.
만약에 나를 죽이려는 위협을 느끼는 곳이라면, 더 있고 싶은 마음이 있겠습니까?
그 곳에 있으면 위해를 당할 위기가 오는데, 누가 더 있고 싶겠느냐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목회를 하다가 교회가 어려우면
‘교회를 좀 옮겼으면..’ 하는 마음을 품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당했던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작은 어려움을 만나도
목양지를 포기하고 싶고, 떠나버리고 싶은 휴혹을 받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핍박하는 사람들이 있는데도
죽이려고 하는 위협이 있는 중에도.. 사도 바울은 그곳에 오래 있었습니다.
오래 남아 꾸준히 복음을 전하였다는 것입니다.
▲14:14, 옷을 찢은 두 사도
저를 부끄럽게 한 또 하나 구절은 14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왜 그랬을까요?
사람들이 찾아와서 자기들을 신으로 경배할 때에.. 자기 옷을 찢었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떠받드는 순간에 했던 행동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를 참 부끄럽게 하는 것입니다.
과연 나는 그렇게 했을까요?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왜 신으로 떠받들려고 했느냐 하면
루스드라에서 ‘걷지 못하는 사람을 일으킨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 때 바울은 자기 옷을 찢고서,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소리쳤던 것입니다. 14:14
저는 이 장면을 깊이 묵상해 보았습니다.
그때 옷을 찢을 필요까지 있었을까요?
그것이 뭐 그렇게 원통하고 억울하고 화가 나는 일이라고
나가서 소리를 지릅니까?
반대로 뒤돌아서서, 소리 없이 이빨 드러내고 웃을 일 아닙니까!
이렇게 막 자기들을 신으로 추앙하는 것을 이용해서
나중에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잘 사용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주님이 하신 일이라도
주님의 능력이 아무에게나 나타나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이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역사를 하셨지요.
제 자신과 너무 비교가 되는 것이
저는 사도 바울처럼 이런 능력이 나타나는 것도 아니었는데도,
주의 종이라고 교우들이 사랑해 주고 대접해 줄 때
그것을 그냥 마음으로 좋게 여기고 그리고 은근히 그것을 즐기던
제 자신과 너무 비교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을 때
은근히 그것을 즐기고 좋아했던 것,
사람들의 평판에 예민했던 것이.. 너무 비교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저에게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말씀 한 마디로 일으켜내는 그런 권능이 나타나게 된다면
아마 사람들이 저를 보는 눈이 더 달라질 것입니다.
그럴 때 사도바울처럼 옷을 찢고, 제가 소리를 쳤을까요?
저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사도 바울이 참 대단한 사람임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는 정말 인내와 겸손의 사람이었습니다.
▲14:3,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이, 저를 부끄럽게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위로와 힘도 얻게 해주었습니다.
역시 3절 말씀입니다.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사도 바울의 인내도 겸손도 사도 바울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를 힘입어’ 되어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깨달아진 것이 너무나 감사하였습니다.
제 모든 부끄러움이 변하여 소망이 되었습니다
본래 사도 바울이 담대하고 두려움도 없고
핍박 앞에서도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고,
주님을 힘입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는 말씀을 보면서
나같이 이렇게 부끄러운 자도.. 주님을 힘입는 데 소망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어떻게 주를 힘입어 사역할 수 있었을까요?
▲죽기를 각오한 사도 바울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있습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것이 사도 바울이 붙잡은 십자가 복음이었습니다.
그는 십자가를 ‘진짜 자기 죽음’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자아가 완전히 죽은 자에게는.. 세상에서 핍박도/성공도, 의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고니온에서 죽을 것 같은 위협 속에서도
주님의 싸인이 오기 전에는 계속 머물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각오가 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죽은 것을.. 또 죽는 것이 무엇이 겁나겠습니까?
그러고 나니까 오래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떠나라고 할 때 까지는 계속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있으라면.. 죽을 것 같아도 그 자리에 있고,
주님이 떠나라고 하시면.. 아무리 좋아도 떠나는 것입니다.
▲사람의 인기/평판은 급변합니다.
루스드라에서 사도 바울을 신처럼 떠받들려고 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사람들의 선동을 받아서)
사도 바울에게 돌을 던져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다 죽은 줄 알고, 내다 버릴 정도로.. 사도 바울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14:19
그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만약에 사도바울이 루스드라 사람들이 자기를 신처럼 떠받들 때
그것에 조금이라도 마음을 두었다면.. 아마 사도바울은 거기서 끝났을(죽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떠나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성도들을 넘어뜨리는 무기가 둘 있는데,
하나는 핍박을 통한 두려움이고, 또 하나는 성공을 통한 교만입니다.
두려움은 마귀가 가장 잘 사용하는 무기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마귀는 성공으로 성도들을 시험합니다.
성공은 핍박 보다 더 무서운 시험입니다.
핍박과 두려움의 시험도 크지만, 더 위험한 시험은 ‘성공’입니다.
사람들의 ‘칭송’입니다.
루스드라에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장애인을 고친 사건은
놀라운 승리의 사건이면서도.. 사도 바울의 위기였습니다.
만약 바울이 루스드라 사람들의 반응에 조금이라도 마음이 기울어졌다면
결과는 끔찍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떠나버리시는 것입니다.
만약 그랬더라면, 돌에 맞고 나서, 그는 낙심해서 집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무리들은 지금 환호하는 것 같아도 언제 돌을 치는 자가 될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할 때 무리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려 했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기대를 걸지 않고.. 소수의 제자들을 세우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사람’이 나에게 몰려오느냐/떠나느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떠나시느냐/ 나와 함께 계시느냐 ... 그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여러분도 사람들의 평판에 속으면 안 됩니다. 사람의 평판에 연연하면 안 됩니다.
정말 두려운 일은 사람이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떠나는 것입니다.
시51: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다윗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성령님이 자신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에게는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하느냐는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다가오기도 하지만 언제든지 떠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떠나시면 그것으로 끝장인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는 것 같다가
그만 사람들의 칭찬에 마음을 두어서 무너져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떠나십니까? 사람의 칭찬을 듣고 교만해지는 자입니다.
야고보를 순교시켰던 헤롯 왕이 행12장 후반부에 보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들에게 연설을 하였는데
백성들이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며 아첨을 떨 때,
헤롯이 그 말이 너무 듣기 좋아서 순간 스스로 신으로 착각하였습니다.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이 그를 치셔서 벌레에 먹혀 죽었습니다.
▲빌리 그레함 목사님의 일화
어떤 목사님이 빌리 그래함 목사님에게 질문했습니다.
“교회에 부흥을 일으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그 목사님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답니다.
“목사님 자신이 방해만 하지 않으면 됩니다!”
무슨 말입니까?
가정이나 교회나 직장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은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항상 자기를 드러내려 하고, 최고가 되고, 존경 받기를 바란다면
그 분이야 말로.. 방해가 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요셉을 보십시오.
▲요셉은 보통 사람
지난 지방 연합 부흥회 때, 강사님께서 요셉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셉이 애급의 총리까지 된 사람이지만,
요셉은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 근거로 창세기 39:3절 말씀을 들었습니다.
창39: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보디발이 여호와 하나님을 보았다고 했는데, 어떻게 여호와를 보았을까요?
요셉을 통하여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요셉은 별 볼일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보디발은 요셉이 어려서 종으로 사서 부린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능력이 있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에게 일을 맡겨보고서 깜짝 깜짝 놀란 것입니다.
요셉은 너무나 평범한 유대 소년인데,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잘남, 요셉의 똑똑함, 요셉의 유능함이 보이지 않고,
대신에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하심’이 보였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탁월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보통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스미스 위글스워스 목사님의 일화
20세기 초반 오순절 운동을 일으킨 스미스 위글스워스 목사님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고, 병고침을 받고,
14 명의 죽었던 자가 그의 기도를 통해 일어났을 정도로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았던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가 어떻게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부러울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비밀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처음에는 도무지 설교를 못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수줍어하고 내성적인 사람이라 사람들 앞에만 서면 아무 말도 못하였습니다.
그의 아내가 그를 설교하게 해 보려고, 얼마나 열심히 도왔는지 모릅니다.
“여보, 당신은 할 수 있어요. 저는 당신이 오는 주일에 설교하기를 간절히 원해요."
라고 이야기하곤 하였지만 번번이 실패였습니다.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동원해 보았습니다.
설교를 하기 위해 써보지 않은 방법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목사님들이 하신 설교들을 일주일 내내 적어 외운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설교단에 일단 올라서면 그 동안 적어놓았던 설교를 읽지는 않고
그 대신 “저는 설교 못하겠습니다. 저 대신 다른 분이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성령님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설교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스미스 위글스워스 목사님은, 설교할 때마다 성령님의 역사를 확신했습니다.
자기 힘으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더욱 믿음으로 사역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항상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도.. ‘자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병든 사람을 보고, 심지어 죽은 사람을 보아도
그는 하나님이 그를 살려내실 것이라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를 통해 역사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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