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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비되지 않는 삶의 본질 P1 요일1:3~4, 시71:18. 출처 P2 P3
*久 제목 : 삶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John Piper / The essence of the unwasted life
◑우리가 ‘Desiring God’ 순회집회 사역을 계속하는 이유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요일1:3~4
▲사도 요한은, 먼저 자기가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사도요한은, 당시 여러 도시들과 그 교회들을 방문하면서
‘나는 여러분들과 주 안에서 사귀면서, 먼저 내 기쁨이 충만하다.’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나는 나 자신을 기쁘게 하려고 여기에 방문했습니다.
나는 내가 기쁘고자 왔습니다.(혹은 편지를 써서 보냅니다)’ .. 이런 뜻입니다.
이렇게만 보면, 이기적인 표현으로 우리 귀에 들립니다만... 물론 잘못된 생각 입니다.
우리 각자 자신에게 질문해 봅시다.
‘나는 어떤 때 더 사랑받는다고 느끼는가요?’
누군가가 나를 도우려고 하면서,
나를 돕는 것을 기뻐서, 자원해서 나를 도울 때인가요?
아니면 누군가가 나를 도우는 것이
그렇게 해야 하는 의무가 있기 때문에, 억지로 나를 도울 때인가요?
(물론 자원해서, 기뻐서, 나를 도울 때입니다.)
▲예를 들어서 설명해 봅니다.
한 늙은 할머니 앨런이 병원에 입원해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상태가 악화되어서,
목회자인 제가 즉시 할머니의 병원 심방을 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한참 우리 딸과 놀아주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즐거운 시간을 중지하고,
긴급하게 병원으로 달려가야 하는 마음이.. 썩 유쾌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병원으로 가는 길에,
주님이 제 마음을 바꿔주시도록 기도하면서, 거기로 갑니다.
양떼를 사랑하고 돌보는 목자의 마음을 달라며.. 속으로 기도합니다.
그런데 경험상, 보통 병원 엘리베이터를 탈 즈음이면,
주님께서 제 마음에 역사해 주십니다.
특히 병실 문을 열고, 환우를 볼 때는,
그 환우가 ‘영원의 문턱’을 한 발자국 막 남겨놓고 있는 순간을 볼 때는,
정말 사랑스런 목자의 마음이 생깁니다.
제가 다가가서 할머니의 손에 제 손을 대면,
할머니가 눈을 뜹니다. 할머니는 제가 누구인지 알아봅니다.
보통 이렇게 말하지요.
‘오, 목사님. 바쁘신데.. 안 오셔도 되는데요.’
만일 그때 제가 이렇게 말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예, 맞습니다. 저도 제가, 여기 오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여기 온 것은, 제가 당신이 다니던 교회의 목회자라서,
어쩔 수 없이 온 것입니다.’
여러분 다 웃고 계시네요.
예, 저는 그렇게 말하지 않고, 대신 이렇게 말합니다.
‘엘런 권사님, 제가 꼭 안 와도 당신에게 괜찮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병실에 들어와서, 당신을 보았을 때,
제가 기도로, 권사님을 축복해 드리고자 하는 마음에 소원이 샘솟았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제가 있고 싶은 곳은, 바로 여기 당신 곁이에요.’ 자발적입니다.
이 말↑이 과연 이기적일까요?
지금 사도요한의 심정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았습니다.
사도요한이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요일1:4
라고 말한 것은, 이기적인 표현이 아니란 뜻입니다.
▲사도요한은 지금 흩어진 교회들을 방문하면서, 혹은 흩어진 교회들에 편지를 써서
그들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위의 예에서, 제가 늙은 할머니를 심방했을 때의 느낌처럼,
그들을 심방하는 사도 요한의 마음속에는,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들을 심방해서, 그들을 기도로 축복하고, 그들의 믿음을 격려하는 것은,
참으로 깊은 은혜와 축복이.. 심방을 받는 환우에게 뿐만 아니라
심방을 하는 자신에게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1년에 2차례, 미국 순회 컨퍼런스를 개최하는 이유입니다.
(미국은 넓어서, 전국이 한 자리에 모이기 힘듭니다. 그래서 순회 집회가 활발합니다.)
저희들은, 이 순회 집회를 통해서,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게 하고,
이것을 통해, 우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고 합니다. 요일1:3~4
(물론 여러분도 기쁘실 것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받은 사명과,
또한 저희 교회의 사명 선언문,
또한 <하나님을 갈망함 desiring God ministries> *순회 컨퍼런스 개최 선교단체
의 사명은 똑같습니다.
제가 한 목회지에 있은 지 28년이 되었고,
어떤 사역을 12~15년 계속 하다보면,
목회자의 사명과 교인들의 사명이 하나로 합쳐집니다.
그래서 저희 베들레헴 교회의 모든 교인들은
이 사명선언문을 암송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 열정을 전파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만물 중에 하나님이 지존해 지셔서,
모든 민족이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골1:15~17참조
그 사명을 계속 감당하기 위해,
우리는 지금 이렇게 <Desiring God 순회 컨퍼런스>를 개최하는 것입니다.
저는, 저의 이 열정을, 여러분과도 나누기 원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음과 은혜와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이 높아지시고, 모든 민족이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처음에는 비록 냉랭한 마음으로 이 집회에 오셨더라도,
돌아갈 때는, 마음에 열정이 다시 불타오르기를.. 기대합니다.
바울이.. 디모데가 받은 은사를 다시 불 지피기 원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딤후1:6
여러분의 마음속에 작은 불씨라도 있으면,
저는 그것을 계속 불씨를 살려서, 큰 열정의 불을 일으키고 싶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순회 컨퍼런스를 개최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제 사명은, “다음 세대”에 관심 있습니다.
그저께쯤 제가 성경을 읽다가, 시편 71편을 읽을 차례가 되었습니다.
저는 성경 일독을 하다가, 시편 71편을 읽을 때,
항상 18절을 다시 암송합니다. 그래서 잊어버리지 않도록 합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 시71:18
저는 “다음 세대”에게,
주의 말씀과 능력을 전하게 해 달라고, 다윗처럼 늘 기도합니다.
‘주님, 제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다음 세대에게,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의 위엄을 알리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호흡을 허락하시는 한.. 말입니다.’
◑설교 주제 ‘삶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먼저 제 어릴 적 경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천국과 지옥’에 관해 조기교육을 철저히 받으며 자랐습니다.
제 John Piper 아버지는 순회선교자이셨고, 2007년에 소천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천국과 지옥이 생생한’ 가정에서 자라났습니다.
저는, 가정에서, 아버지의 말씀을 통해서,
어릴 적부터 늘 ‘천국과 지옥’에 대해, 생각하며 성장했습니다.
아버지는 늘 어린 제게,
사람은 천국에 가거나, 아니면 지옥에서 영원을 허비하게 된다고 말씀 하셨어요.
저는 인류가 그렇게 둘로 분류된다는.. 무서운 사실을 생각하며 자랐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저는 그 사실의 무게감을
생생히 느끼고 있습니다. 조기교육이 중요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도, 사람은 두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과, 지옥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영원히 천국에서 행복한 삶을 누릴 사람과,
영원히 지옥에서, 자기 영원의 삶을 허비할 사람.. 말입니다.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시면, 월요일에 제게, 복음의 승리에 대해 얘기하셨습니다.
그 중에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는 간증이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그 지역에 아직도 믿지 않는 한 노인을 두고서,
성도들이 합심해서 오래 동안 기도했습니다.
무려 25년 동안 이나, 그의 구원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그 노인에게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그가 정말 죽기 전에 예수를 믿을지.. 의문이 생기기까지 했습니다.
구원 받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그 교회에서 집회를 여셨고,
교인들은, 그 노인을 초청해서, 그가 이번 기회에 꼭 구원 받기를 기도했습니다.
부흥회 마지막 날에, 그 노인이, 강대상 앞으로, 초청에 응해 나왔습니다.
교인들은 다 크게 놀랐고, 모두 감격했습니다.
그 노인은, 울기 시작했습니다.
예배 후에, 아버지는 그 노인의 곁에 가서 앉았습니다.
아버지는, 개인적으로, 그 분께 복음을 더 자세히 전했고,
그 노인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노인은 계속 울면서, 이런 말을 계속 반복해서 했다고 합니다.
“나는 인생을 낭비했어.. 나는 인생을 낭비했어..”
아버지는 그 노인의 이야기를, 제게 여러 번 들려주셨습니다.
어린 제게, 그런 이야기들이, 마음 속 깊이 새겨졌습니다.
그리고 저 존 파이퍼는 굳게 결심했습니다.
‘나는 절대 내 인생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여러분의 인생을 지금 낭비하지 마십시오.
어릴 적 그 생각은, 제게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제 인생이 가치 있게 보내기를 원합니다.
지금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제 인생을 낭비하지 않게 해 주세요.’
▲우연히, 제가 고등학생 때 쓴 시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1964년에 제가 다닌 웨이트 햄프턴 Greenville South Carolina 고등학교의
문학잡지에 게시된 詩였습니다. 저도 지금까지 잊고 있던 터였죠.
훌륭한 시라서,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저를 깊이 감동시킨 주제를, 그 시가 담고 있어서, 소개해 드립니다.
당시 17살이던 제가, 이런 시를 다 썼습니다...
‘잃어버린 세월’
오랜 밤 지새워, 삶의 의미를 추구했네.
(삶의 의미를) 헛되이 찾으며, 나의 젊음을 보냈네.
이제 인생의 종착역에 이르러, 다시 찾아야 하네
왜 어린 제가, 이런 시를 썼을까요?
왜 제가 그런 생각을 다 했을까요?
우리 인생의 추구가 헛되게 끝난다면,
노인이 되어서.. 삶의 의미를.. 다시 찾게 되어 있다...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러므로 아예 젊어서부터, 젊음과 인생을 낭비하지 말자는 뜻이었습니다.
▲저는 지금 62세입니다.
저는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지금 여러분이 낭비하면.. 죽기 전에 다시 찾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는, 내가 인생을 허비했어! 하고
가슴을 치며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안 될 것입니다.
◑노인이 되어도.. 인생을 낭비하기 쉽습니다.
▲노인이 되면, 자기 생애가 얼마 남지 않아서, 인생을 소중하게 여길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노인이 되어도.. 영적으로 깨어있지 않으면, 인생을 낭비하기 십상입니다.
여러분, 노인이 되면, 왜 인생을 낭비하기 쉬운가 하면,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은 더 쉽게 피곤해지고,
자기도 모르게 안락한 소파에 앉아서 쉬고 싶은 생각이 종종 듭니다.
또한 실제로 그렇게 소파에 앉아 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집니다.
노인이 되면,
이제 자기가 노인이니까,
소파에 앉아서 오래도록 편히 쉬어도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노인 여러분, 인생을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휴식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저는 그게 무섭습니다. 제가 62세거든요.
노인이 되면, 모두가 자기를 정당화시킵니다.
‘나는 이제 쉴만한 나이가 되었어! 내가 쉰다고 해서, 누가 뭐랄 사람은 없어..
내가 그동안 일생을 일했으므로, 이제는 쉬어도 돼!’
▲그래서 노인들은, 호숫가나 바닷가에 가서, 편안한 의자를 펴놓고, 거기에 앉아서 시간을 보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만..
물론 저도 그렇게 ‘쉬면서’ 살기를 좋아합니다만..
저희 집 서재에는, 아주 오래된 액자에 이런 글귀가 벽에 붙어 있습니다.
‘단 한 번의 인생이 곧 지나갈 것이고, 그리스도를 위해 했던 일만 남을 것이다.’
그 액자는, 어릴 적에 저희 집 부엌에 붙여져 있던 것이었습니다.
제가 아직도 그 액자를 고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글귀가 여전히 저를 독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 삶을 낭비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고,
제 삶을 의미 있게 하려는 열정이 있습니다.
▲우리가 삶을 낭비해서 안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으로, 당신에게 주어진, 당신의 삶과 존재의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 마음대로 스스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당신의 삶은, 당신이 창조하지 않은,
즉 하나님이 창조하신 어떤 특별한 이유와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은 현대 기독교 (이 단락, 편집자가 풀어서 씀)
저는 1964~68년에 휘튼 대학을 다녔는데, 그 때는 미국에 사상적으로 격변기였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히피 문화’가 유행하던 시기였는데,
미니스커트, 히피 밴드, 맨발로 다니기,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반대, 반전운동 등이 유행했습니다.
또한 ‘실존주의’가 그 당시에 범람했습니다.
이 실존주의란.. 한 마디로 말하면,
신앙과 진리와 하나님의 절대 가치가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걸 없다고 부인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도 있습니다.)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 실존에 무슨 이득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와 상관이 있으면, 즉 나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면.. 내가 받아들이고,
그것이 나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면.. 비록 그게 절대 가치라 하더라도,
‘나하고는 상관없고, 내게는 별 볼일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가치관이 무서운 것은,
마치 ‘천동설 신자’처럼 ↔지동설
만물과 우주의 중심에 ‘자기’를 두고서,
자기가 하나님이고, 자기가 절대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독교 신앙이 참 진리라고 해도,
내게 유익이 되면.. 받아들이고
내게 유익이 안 되면.. 나는 관심이 없다는 태도입니다. '내'가 참으로 중요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아마 1960년대의 실존주의의 바탕으로부터
오늘날의 모든 기복주의, 번영신학, 성공주의가 발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성경과 하나님을 절대기준으로 두고서.. 자기를 그 기준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시대사조에 휩쓸려 은연 중에) 자기를 절대 기준으로 두고서..
성경과 하나님 가운데서, 자기에게 필요한 부분만 골라내서 관심 가지는 것입니다.
좋게 말하면, 그 전에 신학이 너무 탁상공론만 하면서,
현실의 삶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니까,
그런 실존주의적 영향을 받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듯이,
아무리 기독교 진리가 참 진리라 하더라도,
내게 도움이 안 되는 것들은.. 나는 아무 관심 없다는 태도입니다.
이런 실존주의 철학이 ‘신앙의 적용’차원에서는 다소 도움을 주겠지만,
결국은 ‘인본주의/자기중심적/기복주의/번영신학’의 근거가 되는 셈입니다.
▲기도
주여, 우리가 살다보면, 가끔 깜짝 놀랄만한 나쁜 소식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병원에서, 암에 걸렸다고 소식을 전해 줄 수도 있고,
직장에서, 정리 해고 되었다는 소식을 접할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 우리가 무슨 일을 겪든지,
우리가 그 일을 통해, 우리 인생을 허비하지 않게 하소서.
그런 일들을 계기로,
우리 각자를 주님께로 더욱 가까이 이끌어 주시고,
예수님 안에서 참 생명을 더 깊이 발견하는 계기가 되게 해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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