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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시4:1~8 16.01.24. 출처
제가 잠잘 때 ‘숙면’을 잘 못하는 아주 나쁜 버릇이 있습니다.
의사들의 말에 의하면 건강한 사람은 잠이 들면 일단 아주 깊이 빠져들었다가
새벽이 될수록 점점 얕아지면서 잠에서 절로 깨어나게 된다고 하는데, 저는 정반대입니다.
우선 자리에 누워도 얼른 잠들지 못하고 한참을 뒤척여야 하고
그렇게 간신히 잠든 뒤에도 밤중에 자주 깨기도 하다가
새벽기도 시간이 되어갈 때 즈음에서야 비로소 깊은 잠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평소에 제가 교역자들에게 ‘순교하는 대신에 새벽기도 드린다고 생각하고 일어나라.’고 다그치지만,
사실 저 자신부터가 거의 매일 새벽마다 그런 각오로 자신을 깨워야만 하는 형편입니다.
그런데 언젠가 원로목사님께서 제가 그렇게 잠을 잘 못 잔다는 것을 어떻게 들으시고
하시는 말씀이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 모든 근심 걱정 다 주님께 맡기면
편안하게 잠 못 잘 이유가 무엇이 있느냐?”고 야단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씀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실제로 제가 잠을 깊이 자지 못하는 이유가 잠자리에 누워서도
쓸데없는 염려와 근심을 많이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저 자신에게 꼭 해당되는 교훈의 말씀입니다.
이 시편 4편은 일명 ‘저녁의 기도’라고 불리는 다윗의 기도입니다.
그런 부제가 붙게 된 이유는 제일 마지막 절(:8)에서 “내가 평안이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라고 다윗이 고백하고 있는 대로,
다윗은 그가 잠자리에 눕기 전에 하루를 돌이켜 보면서, 이 기도를 드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시간 저는, 성도가 과연 어떤 기도를 올릴 때에, 복잡다단했던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서도
매일 밤마다 지극히 평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억울하고 괴로운 일을 당할 때에도 기도를 통해 주님께 완전히 맡겨 버리는 성도가
평안히 잠자리에 누울 수 있습니다.
1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2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겠는고(셀라)”
▲우선 2절부터 살펴보면,
여기서 다윗은 자기가 사람들로부터 어떤 부당한 고발을 당하고 있는지를 토로하고 있습니다.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란 말은 다윗의 명성을 더럽히는 고발을 뜻하며,
“허사를 좋아하고”란 말은 근거 없는 거짓말,
“궤휼을 구하겠는고”란 말은 악의적으로 꾸며낸 모함으로써 다윗을 괴롭히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사람이 근거 없는 헛소문 때문에, 혹은 의도적인 거짓말이나 악한 권모술수 때문에
오해를 당하거나 욕을 먹게 되는 것은 보통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다윗은 무엇을 했습니까?
그는 그처럼 분통이 터질 수밖에 없는 일을 당했을 때 잠자리에 들어서도 이를 갈거나,
그 억울함에 못 이겨서, 스스로 목을 매달고 죽을 생각 같은 것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바로 그런 자신의 원통함을 언제든지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호소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1절에서 다윗이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라고 탄원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즉 다윗은 지금 자기가 당하고 있는 억울한 루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변호해 주시고,
자기가 당하고 있는 거짓 모함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해명해 주실 것을 간구했던 것입니다.
그런 다윗의 기도를 받으실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해 주셨습니까?
바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1
‘너그럽게’라고 번역된 말은 ‘여유 있는 공간을 주다’라는 뜻입니다.
즉 다윗이 그런 곤란 때문에 마음이 답답해져 있다가도
기도로써 하나님을 부르기만 하면
그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즉시 평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아니 오히려 여유가 생길 정도로 정말 넉넉한 안위를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실로 다윗은 이와 같은 ‘저녁의 기도’를 통하여
그날 하루 동안 자기 인생에 쌓였던 모든 스트레스를 다 풀어 버렸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 풀어 버린 것이 아니라, 다 하나님께 맡겨 버린 것이었습니다.
자기에게 쏟아지는 온갖 비난과 욕설과 악의에 찬 유언비어들,
정치적으로 자기를 모함하는 갖가지 간계들,
만약 다윗이 그런 억울하고 괴로운 일들을 그대로 가슴에 품고 잠자리에 들었더라면
매일 밤 불면증 환자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라고 :1
그 모든 스트레스를 몽땅 다 하나님께 맡겨 버리고 나니,
그 많은 ‘곤란’ 중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음을 ‘너그럽게’ 만들어 주셨고
그 결과 그는 문자 그대로 단잠을 잘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성도의 편이시지 않습니까?
그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기도하기만 하면 당장 응답하시고
그 어떤 억울한 사정, 그 어떤 곤란한 형편 중에도, 전폭적인 지지와 즉각적인 도움을 내려 주십니다.
우리가 주일 성수 때문에 직장 상사에게 억울한 일을 당할 때에,
헌금 하느라고 불신 남편에게 핍박을 당할 때에,
천당 영생과 지옥 영벌을 전도하다가 욕을 바가지로 먹을 때에,
우리는 바로 그날 저녁에 그저 하나님께 기도라는 전화 한 통만 걸면 됩니다.
교회 안에서 무슨 헛소문이 돌거나 교역자들로부터 어떤 오해를 당하거나
혹은 믿었던 교인으로부터 어처구니없는 배신을 당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우리는 제일 먼저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 앞에 엎드리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인간사회와 사람 사이에서 흔히 발생할 수밖에 없는 온갖 ‘허사’와 ‘궤휼’로 인해, 수욕과 곤고를 당할지라도
하나님께 기도만 올리면 언제든지 우리 편이 되어 주시는 성부 하나님께서
‘조금도 염려하지 말라. 내가 다 해결해 주겠다.’라고 당장 응답해 주시는 음성을 반드시 듣게 됩니다.
이처럼 매일 저녁의 기도를 통하여 아무리 답답한 심정이라도
곧 너그럽고 여유 있게 만들어 주시며, 아무리 꽉 막혀 있던 마음이라도 활짝 열리게 하시고
지극히 가볍게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의 푸근한 위로와 든든한 격려를
꼭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자기가 그날 지은 죄를 반성하면서, 기도를 통해 회개하는 성도가 평안한 잠을 잡니다.
3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4 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셀라)”
▲3절,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라는 말씀은,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고 특별히 거룩하게 잘 살아서, 경건한 자의 그룹에 들어가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스스로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쓰시려고 세상 불신자들과 구별되게 뽑아서
경건한 사람으로 만들어 놓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처럼 경건한 자로 택함을 받은 성도들이
매일 저녁마다 절로 드리게 되는 또 하나의 기도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자신이 그날 저지른 죄에 대한 회개의 기도입니다.
▲4a절 절에 “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라고 했는데,
우리는 이 말씀을 흔히 ‘너희는 떨면서 범죄하지 말라’는 뜻으로,
즉 ‘흥분에 휩싸여 떨면서, 흥분을 못 이겨서 죄를 짓게 되면 안 된다.’는 의미로 해석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떨며’라는 동사는 ‘범죄치 말라’는 명령형의 동사를 수식하는 종속어가 아니라,
그 자체가 독립된 명령형의 동사입니다.
즉 ‘너희는 떨어라, 그리고 범죄치 말아라.’라고 번역되어야 하는 문장인 것입니다.
1)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떨어라. 그리고 범죄하지 말아라.’라는 문장이 될 수 있습니다.
2) 혹은 ‘분노로 떨다’라는 뜻을 취할 경우에는, '떨다'에 이런 뜻도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너희는 자신이 범죄에 빠지게 되는 것을 통분히 여기고 떨어라. 그리고 범죄하지 말아라.’
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느 쪽 해석을 택하든지 간에
늘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죄를 짓지 말아야’ 할 것을 강조하는 말씀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계속되는 4b절에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란 말씀은
‘잠자리에 누워서 하루 일을 스스로 반성해 보라’는 뜻입니다.
“잠잠할지어다”라는 말은 그처럼 자신을 반성하는 시간을 ‘조용하게’ 가져 보라는 의미로서,
보통 우리가 ‘quiet time’이라고 부르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 낮에 무슨 흥분될 만한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밤에 조용히 기도를 드리면서 자신을 반성해 보면,
자신의 가벼운 판단 때문에 저지른 시행착오나 욱하는 감정 때문에 튀어 나왔던 나쁜 말이나
성급한 오해 때문에 나왔던 미움들을 깨닫게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한마디로 말해서 곧 ‘매일의 회개’인 것입니다.
대부분의 불신자들은 이런 감정 조절을 완전히 거꾸로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떨 줄 아는 감정은 완전히 잠들어 있고,
그 대신에 사람 앞에서 참지 못하고 흥분하는 감정은 그야말로 건드리면 폭발할 만큼
최고로 민감한 상태로 항상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불신자들은 매일 매사에 범죄에 범죄를 연이어 저지르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경건한 신자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살아 계신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 앞에서 벌벌 떨 줄 알아야 합니다.
즉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눈앞에서는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단 하나라도
결코 숨길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늘 영적 두려움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와 같은 ‘하나님 경외’의 심령을 소유한 신자는, 또한 자신이 죄에 대하여
약하고 자주 범죄에 빠지게 되는 사실에 대해서 스스로 분노하면서 떨게 됩니다.
남이 내게 저지른 ‘티’와 같은 잘못을 두고 벌컥 화를 내는 본성적인 흥분이 아니라,
바로 내 속에 있는 ‘들보’와 같은 잘못을 깨닫게 되면서
그것을 두고 ‘내가 하나님 앞에서 이런 죄를 저질러 놓고도 태연하게 지나갔구나.’ 하면서
스스로 벌벌 떨 줄 아는 것입니다.
사실 원죄의 본성을 다 가지고 태어난 우리가 크든지 작든지
자범죄를 단 하나도 저지르지 않고 지나가는 날이 어디 하루라도 있겠습니까?
그러니 적어도 매일 밤 ‘자리에 누울 때’만큼이라도
‘스스로 심중에 반성해 보는 조용한 회개기도의 시간’을 꼭 가져야만 합니다.
우리가 그날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고 잠을 자게 되면
그 ‘토설치 아니한 죄’가 밤새도록 우리를 짓누를 것이지만,
우리 자신의 ‘허물을 자복하고 주께 다 아뢰고 나면’
우리는 그야말로 ‘발 뻗고 편안히’ 잠들 수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매일 저녁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떠는 마음으로 하루를 돌이켜 봄으로써
그처럼 하루하루를 회개로써 깨끗이 마감하는 경건한 자들에게 주시는
평안한 잠을 또한 만끽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주님과 동행한 기쁨의 삶을 돌이켜 보면서 기도를 통해
꼭 감사드리는 성도가 평안한 잠을 잘 수 있습니다.
5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뢰할지어다
6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
7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5절에, “의의 제사를 드린다" 함은, ‘올바른 제사’를 드린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 앞에서 바른 예배를 드리는 것을 최우선으로 했는데,
그것은 그가 압살롬의 난을 피해서 도망치던 생활을 하고 있을 적에도 변함없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을 점령한 반역자들은 성소와 법궤가 자기네 수중으로 들어왔다고 해서
마치 자기네들이 다윗이 하나님께 ‘의뢰할 수 있는’
즉 도움 받을 수 있는 길을 차단해 버린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자기가 성소를 떠나 그 어디에 있다 하더라도,
‘바른 예배’를 하나님께 올리지 못할 장소나 상황이란 것은 결코 있을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당장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이 아무 효과 없어 보이고
아무 응답이 없어 보이는 절망적인 상황이라 하더라도,
일단 ‘의의 제사’부터 먼저 드려 놓고, 그 다음에는 계속하여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하고 의지하는
예배중심의 생활을, 그 피난생활 중에도 결코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처럼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앞에서의 예배자적인 인격과 삶을 유지하던 다윗은
자연히 그 하나님을 아주 가깝게 뵈며 모시고 살게 되었습니다.
▲6a절에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세상의 불신자들이 마치 “어떤 정치가가 우리를 잘 먹고 잘 살게 해 줄 것인가?”라고 질문하며 찾는 것처럼,
“과연 어떤 신이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해 줄 수 있을까?”라고 질문하면서 신을 찾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무엇이 어찌되었든지 간에 일단 나한테 좋게 해 주어야 나는 그 신을 진짜 신으로 인정해 주겠다.’
- 정말 이보다 더 교만한 인본주의가 어디 있겠습니까?
다윗은 그처럼 ‘어떤 신이 우리에게 좋은 일을 보여 줄 수 있을까?’라고 마치 무슨 경매 입찰하듯이,
무슨 콘테스트를 하듯이 신을 찾는 교만한 사람들 앞에서,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라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6b
‘정말 사람에게 선을 보일 수 있는 신,
정말 사람에게 꼭 필요한 가장 좋은 것을 베풀어 줄 능력과 선하신 마음을 동시에 소유하고 계신 신이란,
단 한 분 여호와 하나님밖에 없다.’라고 그들 앞에서 자랑스럽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윗이 자기가 믿는 하나님께 바랐던 사실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냥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라는 사실뿐이라는 점에 주의해야 합니다. :6b
다시 말해서, 다윗은 다른 ‘여러 사람’들처럼 하나님께 무슨 요구를 하지 않고,
그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의 참된 신이 되어 주신 그 사실만 가지고도
이처럼 완전히 만족하며 말할 수 없이 행복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얼마나 차원이 다른 신앙입니까?
진짜 기독신자는 이처럼 ‘하나님께서 내게 무슨 선을 베풀어 주시기’ 이전에,
그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그 자체만으로 이미 충만한 은혜를 받으면서 매일매일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7절은 바로 그런 믿음이 다윗의 삶 속에 날마다 “기쁨”이 넘치게 만들어 주었음을 보여 줍니다.
불신자들은 그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만 기뻐할 줄 압니다.
즉 불신자들의 기쁨이란 것은, 울던 애한테 막대 사탕 하나 손에 쥐어 주면, 금시 ‘헤’ 하고 웃게 되는 것처럼,
무언가 자기에게 주어지는 것이 있을 때만 잠시 생기게 되는, 아주 유치한 기쁨인 것입니다.
그에 비해서 우리 신자들이 누리는 기쁨은 7a절에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즉 신자의 기쁨은, 불신자의 경우처럼, 무슨 물질적인 조건이 성립되어서 얻게 되는 일시적인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아예 상주하도록 채워 놓으신 기쁨’인 것입니다.
복음성가에 ‘내게 샘솟는 기쁨’이라고 노래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전천후 기쁨, 내 인생 주위의 기후 변화에 전혀 상관없이
항상 넘치는, 항상 싱글벙글 웃게 하고 항상 감사하게 만드는 기쁨인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런 다윗처럼 매일 기도를 드리면서
그날 하루 동안도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예배자적인 인격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뵈오면서 동행하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삶의 순간순간마다 넘쳤던 기쁨을 회상해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즉 우리의 저녁기도는, 항상 그날 하루 중에 있었던 일들 중에서 제일 기쁜 일들에 대한 추억과 감사로써
대단원의 막이 내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아, 오늘도 내가 아까 그 순간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낙심하지 않고 승리했었구나.”
이런 생각을 떠올리면 절로 기쁨이 충만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때는 몰랐었는데 지금 가만히 돌이켜 보니까
그 일이 벌어질 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해 주셨던 것이 틀림없구나.”
- 이것은 바로 그날 저녁에 꼭 기억해 내야지, 안 그러면 완전히 잊어버리게 될 소중한 추억이 아니겠습니까!
잠자리의 기도시간에 우리 심령에 이런 생각들이 떠오르게 되면
정말이지 한순간에 마음이 평안해질 것입니다.
이런 감사제목들을 하나하나 세어 보노라면 실로 행복하게,
아마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면서 잠이 들게 될 것입니다.
오직 기도하는 성도의 마음에 주께서 두신 이 기쁨을 저녁의 기도시간을 통하여 상기해 내고
그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밤에 잠자는 동안 내내 행복한 꿈으로 이어지면서
매일같이 평안히 잠들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레옹’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은 살인청부업자인데,
이 사람은 잠 잘때마다 항상 한쪽 눈은 뜨고 자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직업이 그러하니 자기를 노리는 사람도 많이 있을 것이고,
그래서 잠자는 동안에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그처럼 항상 긴장하고 준비하는 버릇이 생긴 것입니다.
물론 사람이 진짜로 한 쪽 눈을 뜨고 경계를 하면서 잘 수는 없는 것이고
영화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지만, 만약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게 어디 잠다운 잠이 될 수 있겠습니까?
다윗 역시 인간적으로만 생각해 본다면, 잠자리가 불안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젊은 날 사울왕에게 쫓겨 다니는 도망자 신세로, 10여 년을 살았었습니다.
왕이 된 후에도 압살롬의 난 때문에, 그의 신변의 위험도가 최고조에 달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처럼 외적 위험 요소들이 늘 그 주위에 포진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일 밤 지극히 ‘평안히 눕고 자면서’ 자신을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여호와’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매일 저녁의 기도를 통하여
자기 속에 아직도 남아 있는 근심걱정을 다 주님께 맡겨 버렸으며,
낮에 지었던 죄를 하나님 앞에서 떠는 마음으로 다 회개하고 용서를 받았으며,
또한 그날 하루도 주님과 동행하면서 누리게 되었던 기쁨을 감사드리면서,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루를 마감하는 방법치고는 정말 멋지고도 아름다운 습관이 아니었겠습니까?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라는 올해의 우리 교회 표어에 따른
세 번째 실천사항이 바로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속한 신앙공동체인 교회가 먼저 ‘평안’해야
그 교회에 속한 나 자신도 은혜로운 예배생활과 복스러운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교회의 지도자’들과 ‘영적 형제와 붕우’들을 위한 기도가 먼저 드려져야만
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 전체가 실로 만사형통의 가도를 달려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교회를 위하여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한’ 기도를 올리는 것이
결국에 가서는 자신의 개인적인 소원도 절로 응답받게 해 주는 제일 좋은 기도방법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매일 새벽에 교회에 나와서 드리는 공적 기도회를 통해서 뿐 아니라,
매일 저녁에 침상에 들기 전의 개인적 기도를 통해서도 그런 기도생활을 규칙적으로 지속해야 합니다.
저녁기도를 드리지 않으면,
그날 하루 동안 응어리진 것들이 밤새도록 우리 각자의 마음에 남아 있을 것이고,
단잠을 자지 못하게 될 것이며, 결국 새벽기도회에 일어나는 것도 더 어려워질 것 아니겠습니까?
저녁의 기도를 통하여 ‘곤란 중에도 우리를 너그럽게’ 만들어 주시는 여유를 찾고,
우리의 ‘심중에 남아 있는 죄가 없도록’ 깨끗이 용서해 주시는 후련함을 누리고,
그 대신에 ‘주께서 우리의 마음에 두신 기쁨’만을 되새기면서
실로 ‘평안히 눕고 자게 되시는’ 놀라운 은혜를 매일 밤마다 꼭 누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 : https://rfcdrfcd.tistory.com/15976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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