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यू की-सेओङ

누가 정말 복된 사람인가 행4:32~37

by 【고동엽】 2023. 1. 14.

누가 정말 복된 사람인가       행4:32~37        

한국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면, 한국 교회가 성경과 많이 다른 교회가 되어 있다는 것이 
늘 마음에 안타깝습니다. 
성경 같은 교회가 아닌 교회가 됐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꼭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이 대표적으로 우리 한국 교회가 
성경과는 많이 다른 교회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본문이기도 합니다. 

행4:32절에 보면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그러면서 바나바 라는 사람이 자기의 밭을 팔아서 교회에다가 바치고 
그것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다 필요에 따라 나누어가졌다고 했습니다.  :36~37

그 결과로 34절에 보면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정말 놀라운 일이죠. 
그러니까 '초대에 예루살렘 교회 안에는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 
먹고 살기 어려운 사람이 없었다. 왜냐하면 서로 다 같이 나누어 살았기 때문이라'는 거죠. 

사도행전은 이것을 교회라고 말을 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어떤 것인가에 대한 너무나 중요한 정의죠. 
그리고 이것은 초대 예루살렘 교회만 그랬던게 아니고, 모든 초대 교회의 일관된 교회의 기준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보낸 서신에 보면 
거기도 교회는 이러해야 된다고 말을 하고 있어요. 

빌2:2절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를 돌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사도행전의 본문 말씀과, 위 빌립보서에 나오는 사도바울의 말씀이 똑같아요. 
솔직히 행4장에 나오는 이 말씀은, 사도바울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일입니다. 

사도바울이 아직도 회심하기 전에 일어난, 예루살렘 교회의 일이에요. 
그런데 그대로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회에게, 
마치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 있었던, 성령이 임하신 다음에 일어났던 
모든 재산까지 교인들이 다 같이 나누어 쓸 수 있을 정도의 교회여야 한다고 
그렇게 (빌립보 교회에) 권하고 있는 거예요. 

이런 교회가 될 수 있을까요? 지금 이런 교회를 꿈꿀 수 있을까요?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교회가, 그런 교회와는 너무 많이 다르다는 뜻이죠. 

저는 "로그인 교회"가, 이 비전을, 이 말씀을 꼭 붙잡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로그인 교회가 그와 같은 교회가 되기를.. 
로그인 교회가 교회 안에는 모든 성도들이 서로 유무상통하여 가난한 사람이 없다 하는 
그런 교회가 되기 위하여 기도하기를 축복합니다. 성경에 나와 있으니까 그렇게 되는 거죠. 

이런 형태의 교회는 공산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겁니다. 
왜냐하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이 나누어 쓰도록 내어놓는 것이 
강제적인게 아니었어요. 전적인 자발적으로 내놓는 것입니다. 

또한 도움을 받는 사람들도, 절대로 욕심으로 하지 않았어요. 
35절에 보면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 했는데, 
실제로 우리가 구제 사역을 해보면, 
사람들의 필요를 따라서 나누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게 돼요. 

왜냐하면 도움을 받는 사람들의 마음에도, 욕심이 있습니다. 
사람은 욕심 때문에, 나누어 주기도 어렵지만 
욕심 때문에 받기도 어려운 거예요. 

근데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주는 사람도 그랬고, 받는 사람도 그렇고.. 전혀 탐심이 없었어요. 
이게 정말 기가 막힌 거죠. 

▲중국이 공산당 지배 아래 들어갔을 때, 그때 중국교회가 지하교회가 됩니다. 
더 이상 그 핍박을 공개적으로 감당할 수가 없었죠. 
중국 공산당에서는 지하 교회인 가정교회들도 다 없애려고 했어요. 

어느 공산당 관리가 지하교회가 어느 과수원을 경영하면서 거기에 있다는 제보를 듣고, 
그 지하 교회가 있는 과수원을 찾아갑니다. 
거기에 있는 예수 믿는 사람들 다 잡고, 교회를 폐쇄시키려고 간 거죠. 

근데 가서 공산당 관리가 깜짝 놀라요. 
뭘 놀랐냐면, 과수원에 있는 사과가, 아직도 채 완전히 익지 않은 상태에 
이제 거의 다 익어가는 사과가 그냥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이 충격이었어요. 

그게 왜 충격이죠? 공산당의 그 집단 농장에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채 익기도 전에 사과를 다 따버려 챙겨가거든요.
그래서 과수원에 사과 열매가 맺혀 있을 수가 없었어요. 
'도대체 여기는 어떻게 사과가 이만큼 이었는데도 그냥 매달려있지?' 그게 충격이었다는 거죠.
(사과를 가진 자나, 가지지 못한 자다.. 둘 다 탐심이 없었다는 거죠)

공산주의 이론은, 가진 사람과 못 가진 사람으로 나뉩니다. 
그래서 가진 사람 것을 강제적으로라도 뺏어서, 못 가진 사람에게 주어서 
우리가 다 공평하게 살자...가 그 모토죠. 

그런데 초대교회는 그렇지가 않아요. 모든 것이 다 스스로 자원하는 마음이었고, 
가진 사람도 또 가지지 못했던 사람도, 그들은 전혀 탐심으로 반응하지 않았어요.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어떻게 이렇게 자신들의 소유를 다 나누며 살 수 있었을까요? 
우리가 먼저 주목해 봐야 될 것이 32a절입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이 말씀에 주목해야 됩니다.

그들은 재산을 내놓는게 먼저가 아니었어요. 
그들에게 있어서 먼저가 된 것은 '교인들이 한마음과 한 뜻이 된' 겁니다. 

한마음과 한 뜻이 되었기 때문에,  
비로소 먹지 못하는 사람, 가진게 없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게 된 거예요. 

그럼 어떻게 교인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될 수 있었을까요? 
처음부터 그랬던게 아니에요. 

사도들인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전에는 서로 다투고 굉장히 시기 질투했던 사람들이었어요. 
근데 그들이 한순간에 마음이 바뀐 거예요. '한마음 한뜻'으로 바뀐 거예요. 

그 이유는, 성령이 임하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마음속에 거하시게 되므로 일어난 일이에요. 

예수님이 그들의 마음에 거하시면서, 그들은 한 마음이 되기 시작한 거예요. 
정확하게 오늘 본문이 그것을 말씀하고 있어요. 

33절에 보면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라는 일은 그냥 열매인 거예요. 
'우리가 가난한 사람 없도록 합시다. 좀 가진 사람은 어려운 사람에게 나눠줍시다.' 
그래서 된게 아니라는 거죠.

아마 그랬다면 더 시험이 많았을 거예요. 공산주의 같은 방식인 거죠. 
'가진 사람들은 좀 내놓으세요. 없는 사람에게 좀 나눠주세요.' 
이런 식으로 분위기가 만들어져 갔다면, 완전히 공산주의 세상이 되는 거예요. 

초대교회는 그럼 어땠다는 거예요?
먼저 부활의 주 예수님을 증거하고, '큰 권능으로 증거됐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주님이 실제로 그들 가운데 임하셨다.는 거예요. 
그들이 그래서 큰 은혜를 받았어요. 

그리고 그들이 한마음 한 뜻이 된 거예요. 서로가 남남이 아니게 된 겁니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 서로 나누는 일이 자연스러워진 거예요. 

▲사도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갈등을 일으키는 유오디아 와 순두게 에게 권면합니다. 
빌4:2절에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같은 마음이 언제 이루어지죠? 우리가 각각 주 안에 거할 때,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신 것을 분명하게 믿고 그 예수님을 내가 알게 되면 
그러면 우리 각자가 다 주님 안에 거하게 됩니다. 

그러면 서로 성격도 달라요, 또 성향도 다르고, 또 주장도 다른 사람들이 
기가 막히게 하나가 됩니다. 

인도 선교사였던 스탠리 존스 선교사님이, '우리 기독교인들이 연합하려면 
그 무엇이 아니라, 그 누구를 목표로 해야 한다' 그런 말을 했어요. 

다시 말하면, '우리가 선교로 하나가 됩시다. 우리가 전도하는 일에 하나가 됩시다. 
우리가 어려운 사람을 돕는 봉사에 하나가 됩시다. 
우리가 다음 세대 교육을 위해서 하나가 됩시다.' 별의별 주제가 많지요. 

근데 그런 일들은 항상 싸우기 쉬워요. 모이고 난 다음에 얼마 지나지 않으면 다툼이 벌어져요. 
왜냐하면 '그 무엇이 목표였기 때문에!' 

그러면 어떻게해야 하나가 되죠? '예수 그리스도, 그분으로 우리가 하나가 됩시다' 
그러면 놀랍게도 하나됨의 역사가 일어나요. 

그리스도인들이 연합활동을 할 때, 그 무엇 (일)이 중심이 되면, 
그것이 아무리 훌륭하고 고귀한 것이라도, 반드시 분열을 가져옵니다. 
아주 사소한 것으로 갈라집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역사가 말해주고,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이면, 놀라운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그들이 서로 다른 것은, 오히려 아름다운 조화를 경험하게 해줄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되는, 진짜 하나되는 기적이 실제로 경험되면, 그게 너무너무 중요해요. 
그 다음에 서로 베풀고, 나누고, 돕는 일이 열매로 온다는 거예요. *오늘 본문

공산주의는 그게 안 되니까, 그러니까 실패로 나타나는 거죠. 
정말 끔찍한 나라가 되어 버린 거예요. 

사도바울은 하나되는 것조차도, 하나 되도록 노력하라고 하지 않았어요. 
'하나 된 것을 믿으라' (믿는 사람들은 이미 하나가 되어 있다는 거죠)

하나되는 것조차, 한마음이 되는 것조차 
'우리 한마음이 됩시다. 하나가 됩시다' 하고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돼요. 

제가 어릴 때 교회에서 중고등부, 청년부를 거치면서 
가장 많이 했던 프로그램이 '우리 하나 되기 위해서 친교회를 가집시다' 였어요. 

여러분 중에도 아마 학생회나 청년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아마 다 비슷한 경험일 겁니다. 
항상 '우리 하나 되자!'라는 목표를 정하고,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 
오락회를 하거나, 야유회를 가거나 늘 했어요. 그럼에도 하나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항상 그 문제는 계속되는 주제였어요. 왜냐하면 하나 되는 것이 어떻게 되는지를 몰랐기 때문에! 

엡4:3절에 보면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교회가 이 점을 명확하게 알아야 됩니다. 
우리는 이미 성령 안에서 하나 된 사람들이에요. 

우리가 할 일은, 마귀가 하나되는 것을 깨뜨리는 것을, 항상 경계하여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되는 것을 지키는 거지, 우리가 하나 되려고 애쓰는게 아닙니다.            

▲제가 선한목자교회에서 목회할 때, 교회 일을 장로님들과 의논하면서 
항상 만장일치로 모든 일을 결정을 했습니다. 

처음에 반대하는 장로님들이 계셨어요. 
'사람들이 모인 곳인데, 어떻게 만장일치가 될 수 있겠나요?'

그때 제가 말씀을 드렸어요. '우리가 사람들끼리 모이긴 했지만, 
우리가운데 주님이 계시잖아요. 우리가 다 주님 안에 거하기를 힘쓰면, 
그러면 주님이 우리를 하나 되게 만드시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주님은 한 분이시니까, 제 주님도 주님이고, 장로님들의 주님도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섬기는 주님이 한 분이시니까, 당연히 하나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 되는 것은, 노력이 아니고 믿음의 문제입니다.' 

장로님들이 제 말을 받아 주셨어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 회의할 때마다 '하나되는 원칙으로' 모든 일을 결정을 했는데 
굉장히 어려웠어요. 좀처럼 하나가 잘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조그만 십자가를 가지고, 그것을 돌아가면서 붙잡고 기도하면서 회의를 하기도 하고, 
또 조그만 종을 테이블에 앞에 놓고 '우리가 주님 앞에서는 이런 분위기일 수 없다' 그러면, 
누구든지 종을 치면, 중단하고 1분간 기도하고 또 계속 회의하기도 했어요.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된 것을 지키자' 그래서 선한 목자교회가 된 거예요. 
예수님께서 교회의 주님 되심을 드러내려고 했어요.
 
▲그렇게 예수님께서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시면, 반드시 나타나는 현상이 뭐냐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된' 것을 알게 해 주십니다. 행20:35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돼요. 예수님의 마음이에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라'  행20:35 

예수님께서 '주는게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러니까 초대 예루살렘 교회 안에, 이렇게 교인들 사이에 
서로 가진 것을 내어놓고 가난한 사람이 없는 교회가 된 것은 
'예수님께서 정말 초대교회 성도들 안에 임하셨다'는 확실한 증거예요. 

예수님이 그러신 분이었어요.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모든 것을 주셨어요. 
그리고 십자가에 피흘려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마음은 기쁨이 넘쳤어요. 
정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정말 기쁜 일이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다 똑같은 느낌을 가져요. 
받을 때보다 줄 때가 더 기쁜 거예요.

▲어느 목사님 한 분이 세례 받은 교인 한 사람 이야기를 이렇게 하더라고요. 들은 얘기입니다.
아내의 전도를 받아서 남편이 교회를 나왔는데, 심방을 갔어요. 그랬더니 그분이 묻더래요. 
'목사님, 예수 믿는 내 비용이 얼마나 듭니까?' 

목사님이 '왜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 그랬더니, 
자기가 교회에 나간다고 그러니까, 주변 사람들이 다 말리더래요. 
왜냐하면 돈 많이 든다고. 예수 믿으면 돈 많이 든다고. 

그래가지고 자기가 마음에 너무너무 걱정이 되는 거예요. 
교회는 나가게 됐는데, 비용이 얼마나 들지... 그래서 심방 오신 목사님께 물었던 거예요. 

그래서 목사님이 그분한테 '비용이 얼마 들면, 예수 믿으시겠습니까?' 그렇게 되물었대요. 
그랬더니 그분이 '담뱃값 정도면 내가 교회를 나가겠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그렇게 하시라고.. 담뱃값 정도 내고 교회 나오시죠.' 
그래서 이분이, 진짜 자기가 1년 동안 비는 담배값을 계산해서 
그걸 52주로 나눠 가지고, 교회 올 때마다 그 담뱃값 정도의 헌금을 하셨대요. 

그런데 도무지 세례를 안 받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또 물었어요. 
'왜 세례를 안 받으시려고 그러십니까?' 
'세례 받으면 십일조 해야 되잖아요.' 
또 어디서 들어가지고, 십일조를 해야 된다는 게 너무 부담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묻기를 '목사님, 수확의 십일조를 바쳐야 합니까, 
아니면 비용 빼고 순이익의 십일조를 바쳐야 합니까?' 

목사님이 그러셨대요. '수확의 십일조를 바쳐도 십일조고, 
비용 빼고 순이익의 십일조를 바쳐도 십일조입니다. 
그것은 성도님이 하시기 나름이지, 정해진 원리가 없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비용 빼고 남는게 별로 없는데요...' 혼잣말을 하시더래요.
그러고는 그해 가을에 쌀 두 가마니를 바쳤대요. 비용 빼고 수확의 십일조를 바친 거에요. 

그리고 그가 세례를 받았는데, 그 다음 해에 십일조를 쌀 10가마니를 바치더래요. 
자기가 수확한 것 그대로의 십일조를 바친 거예요. 그러면서 이야기하더래요. 

'목사님, 제가 예수를 비싸게 믿기로 했습니다. 
제가 인생을 살면서, 너무 이것저것 따지고 믿으니까, 제 존재 자체가 천해지는 것 같습니다. 
고귀하신 예수님이신데, 이제는 비싸게 믿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고백하듯이 말했다는 거죠. 
그리고 진짜 얼굴이 환해지더래요. 

예수 믿는 기쁨이, 그분에게 진짜 강요된 것이 아니고, 
자기 마음으로부터 그렇게 넘치는 것을 보았다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님을 진짜 믿게 되면, 사람이 그렇게 바뀝니다. 
그 전에는 아무래도 받는게 낫지요. 근데 이제는 주는게 더 나아요. 
하나님께도 바치는게 너무너무 기쁜게 되는 거죠. 

▲제가 선한목자교회 예배당 건축을 하고, 부채상환을 하는 그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참 어려웠던 것 중에 하나가, 도와달라는 요청이 많은 거예요. 

우리 교회 예배당은 멀쩡하게 다 지어졌으니까, 큰 교회니까,  
도와달라는 전화가 많이 오는 거예요. 

한 번은 아직도 공사가 마무리도 안 됐고, 부채도 많고 그런데 
어느 목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조금 들어보니까 내용을 알만해요. 자기 교회 예배당 건축이 많이 어려우니까 도와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중간에 말을 끊었어요.
더 들을 것도 없고, 왜냐면 그분에게는 입만 아픈 일이 되니까, 제가 못 도울 사정이니까요. 

'목사님, 제가 들어보니까, 목사님이 참 어려우신 형편이신 것은 알겠는데, 우리는 더 힘들어요.' 
그 목사님의 당시 겪고 있는 경제적인 어려움보다,
실제로 제가 겪고 있는 것은 더 어려웠거든요. 
그래서 '빨리 도와줄 수 있는 다른 교회를 찾아보세요' 그렇게 말씀드리고 전화를 끊었어요. 

근데 그때 갑자기 마음에 너무너무 자책하는 마음이 드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끄는 교회'라고 표어를 내걸었는데,
제가 예수님을 너무 초라한 예수님으로 만들어 버린 겁니다. 
'우리는 더 어려워요. 우리는 도울 수 있는게 없어요.' 

'아니 그러면 교회 주인이 예수님이신데...' 
내가 갑자기 예수님을 그런 초라한 분으로 만든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다시 전화를 드렸어요. 
'목사님, 제가 조금 전에 너무 잘못했어요. 우리 교회 여건이 쉽진 않지만 
그래도 목사님이 지금 겪는 것보다는 아직은 나으니, 저희들이 도울 수 있는 힘대로 돕겠습니다.' 

그렇게 전화 드리고, 우리 재정에서도 참 쉽지 않은 여건이지만, 일부를 지원해 드렸어요. 
그 뒤에도 계속 도와달라는 전화가 많이 왔어요. 
정말 솔직히 부담스럽고 많이 어려웠지만, 그 사건을 계기로 근데 마음의 생각이 바뀌었어요. 

'우리에게 복이 있으니까 도와달라는 거지..' 
'사람들이 보기에 복이 있어 보이니까 도와달라는 게지'
'저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인가 봐, 저 사람은 꽤 잘 사는 사람처럼 보이네..' 
그러니까 도와 달라는 거죠. 

여러분 노숙인에게 도와달라고 하겠어요? 
'아 그렇게 보시는구나.. 저를 복이 있게 보시고, 선한목자교회를 복이 있게 보시는구나..' 
그게 감사한 거죠.

그래서 도와달라는 부탁에 대해서, 싫은 마음을 다 버렸습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대로 정말 도우려고 애를 썼어요. 

그리고 진짜 교회가 엄청나게 힘을 많이 얻었어요. 
선한목자교회에서 예수님과 동행하는 목회를 힘쓰면서, 
주님께서 교회를 '재정적으로 한 몸 되는 공동체'로 또 만들어 가셨어요. 
지금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내용처럼요. 

▲그 중에 하나가 금요성령집회 때 연보하는 헌금이었어요. 
초대교회의 헌금은 어려운 사람을 돕는 구제비였죠. 그걸 연보라 그러죠.

우리가 금요성령집회만큼은 바구니를 돌리면서 헌금을 했습니다. 
왜냐면 다 참여하시자고... 기회가 혹시 놓쳐서 못하는 사람도 없도록 
다 참여하자는 목적으로 바구니를 돌렸고, 

그렇게 해서 모아진 연보는, 어려운 가정을 택해서, 그 가정을 돕는 일에 썼어요. 
영상 작업을 매주간 해서, 그 가정에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를 성도들에게 영상으로 보여주고, 
그 날 걷어진 연보는, 그 가정을 돕는 일에 썼습니다. 

그게 나중에는 어려운 교회를 돕는 일, 어려운 선교사님을 돕는 일로 확산되어져 갔어요. 
그러자 금요성령집회 때 재정이 엄청나게 늘었어요. 
코로나 때인데도 상상이 안 될 정도로 늘었어요.

그리고 또 하나가 <위드>라는 기부 플랫폼이 만들어진 거예요. 
한 성도가 어느 날 제게 메일을 보냈어요. 
'목사님, 교회 안에 어려움 당한 성도들이 있는데, 
그 성도를 교회 재정으로 돕는 일은, 여러 가지로 시험이 많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돕기는 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선한목자교회에서, 어려운 성도들을 
교인들이 소액으로라도 돈을 모으면, 한 가정에는 큰 돈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기부 플랫폼을 하나 만들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면서 1억을 헌금을 하셨어요. 
그래서 그 1억을 가지고 <위드>라고 하는 기부 플랫폼을 만드는 일을 의뢰해서 만들었어요. 

그 기부 <위드> 플랫폼 앱에 들어오면, 어려운 가정 소식이 이렇게 뜹니다. 
그러면 거기에 내가 얼마를 기부하고 싶으면, 거기 기부하면 돼요. 
5천원도, 1만원도, 3만원도... 어떤 때는 그 정도는 큰 부담 없이 도울 수도 있잖아요. 

근데 그게 모아지면, 그러면 500만원도, 1천만원도 돼요. 
급한 사정에 있는 성도에게는 큰 힘이 돼죠. 

제가 그 일을 하면서 너무너무 기뻤어요. 
왜냐하면 교회가 그렇게 해야 교회인데... 
그렇게 해서 교회다운 교회가 되는 일이 너무 좋았던 거에요. 

여러분, 은혜도 받으려고 하는 것보다, 주려고 할 때 더 풍성하게 받아요. 
오늘 여러분들이 다 은혜를 사모하시죠? 
그런데 여러분에게 묻고 싶어요. 받은 은혜를 나눌 곳이 있나요?  

많은 성도들이, 은혜 받기는 원하는데, 나눌 것에 대해서는 생각을 잘 안 하세요. 
부흥회를 가서 말씀을 전하면, 많은 교인들이 '큰 은혜 받았다'고 그래요. 

이번 부흥회에 무슨 은혜 받았습니까? 큰 은혜 받았습니다. 
그럼 제가 구체적으로 물어봐요. '구체적으로 무슨 은혜 받았습니까?' 
그러면 다들 눈만 껌뻑입니다. 그러다가 '몰라요. 그냥 큰 은혜 받았어요.' 이렇게 말하죠. 
그건 못 받은거나 마찬가지예요. 왜 이런 일이 벌어지죠? 

은혜를 받으려고만 하니까 그래요. 
만약에 우리가 주일 예배 드리거나, 또는 부흥회에 참석하면, 
내가 은혜 받은 것을, 누구에게 전해줘야 돼요. 오늘 내가 받은 은혜를! 

뭐 자녀에게든, 친구에게든지, 누구에게 이 은혜 받은 걸 전해주면, 
그러면 말씀 듣는게 확 달라요. 받은 은혜도 자기가 잊어버리지 않게 돼요.

하여튼 깨우쳐 주신 거, 회개하게 하신 거, 
알지 못했던 거 알게 된 거, 새롭게 눈 뜬 거... 다 적게 돼요. 
왜냐면 전해 줘야 되니까! 그러니까 자기가 은혜를 받는 거예요. 

그냥 받기만 하려고 그러면 다 놓쳐요. 
지나고 나면 분명히 은혜는 받았는데, 무슨 은혜 받았는지 구체적으로 기억이 안나요. 

'예수동행일기'가 은혜 받는데 굉장히 도움이 돼요. 
동행일기는 기본적으로 나누는 거에요.

동행일기 방에 내용을 올리게 되잖아요. 
'오늘 주일 예배를 드렸습니다...' 무슨 은혜를 받았는가 그 일기에 기록이 되잖아요. 
여러분 동행일기 써보시면 이제 아시게 될 거예요. 
은혜 받은 것을 기록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기록하니까 결국 그게 내 것이 되잖아요. 

여러분은 오늘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데, 
여러분은 기본적으로 받으려는 사람입니까, 주려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직장, 학교, 어디를 나가서 한 주간 동안 거기서 사시는데 
거기서 여러분은 받으려는 사람입니까, 주려는 사람입니까? 
여러분이 가정에서 여러분은 받으려는 사람입니까, 주려는 사람입니까? 

만약 여러분이 받으려는 사람이라면, 아마 여러분은 굉장히 힘드실 거예요. 
짜증나고, 불만이고, 그리고 (받을) 기회도 별로 없어요. 

근데 여러분이 주려는 사람이라면, 그런 (나눌) 기회는 너무 많아요. 
그리고 참 놀라웁게 기쁨이 넘치게 돼요. 

오늘도 여러분이 받은 은혜가 뭔지를 정확하게 붙잡으셔야 돼요. 
'하나님이 나에게 새롭게 깨우쳐 주신 것이 있는가? 
그리고 내가 회개한 것이 있는가? 
내가 하나님 앞에 돌이키려고 결단한 것이 있는가?' 

그러면 그것을 누군가에게 전해주세요.
정 없으면 일기에라도 기록하세요. 
그리고 그것을 나눔방에 올리세요. 
그러면 결국은 여러분이 다 그 은혜와 복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출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