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26일(토)■
(누가복음 8장) 49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 하거늘 50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51 그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52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53 그들이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54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55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시니 56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고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 (묵상/눅 8:49-56) ◆ 믿기만 하라 (50)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회당장의 이름은 야이로다. 그는 예수님께 와서 자신의 어린 딸이 죽게 되었으니 속히 와서 손을 얹어서 낫게 해달라라고 정말 많이 간구했다(막 5:22-23). 딸의 나이는 12살이었다. 예수님께서 그 간구를 들으시고 이동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동이 회당장이 보기에는 너무 느렸다. 딸의 목숨은 경각을 다투는데, 뛰지는 못하셔도 멈추어서는 안 되었다. 그런데 혈루증 여인 때문에 지체하셨다. 결국 집에서 사람이 뛰어왔다. 딸이 방금 죽었다고 한다. 알려온 사람이 말하길 '더는 선생님을 괴롭게 하지 마소서'라고 권한다. 예수님의 능력은 살아있을 때나 통하지 죽은 사람에게 통하겠는가?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신다. 놀라운 약속이다. 죽음도 아무 문제가 될 수 없다고 하신다. 얼마나 든든한 말씀인가? 사람들은 종종 '믿음' 자체에 초능력이 있다고 착각한다. 아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오해다. 믿음은 분명한 목적어가 필요하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이 목적어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없는 믿음은 자기 확신에 불과하고, 망상이 될 수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설정해놓고, 믿습니다를 반복했다고 해서 그것이 내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믿음은 확실한 목적어를 가진다. 주님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믿는다. 오늘 본문의 야이로는 주님의 약속을 받았다. 이제 야이로의 할 일은 단단히 믿는 것이다. 우리도 얼마나 많은 약속을 받았던가? 영생, 구원, 성령을 이미 받았고, 기도의 약속, 인도의 약속을 받았다. 약속조차 기억 못하는 내가 과연 제대로 믿을 수 있을까? 수 많은 약속이 있건만, 여전히 불평하고 있고, 여전히 염려에 휩싸여 있다. 우리가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말씀을 착한 마음으로 받고 확고하게 믿는 믿음이다. ◆ 아이가 잔다 (52)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아이가 죽었다. 정말 죽은 것이 맞다. 그런데 주님께서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신다. 사람들이 비웃었다. 과연 예수님이 틀린 것인가? 과연 주님께서는 아이가 죽었음을 정말로 모르시는가? 요한복음에 보면 나사로가 죽었을 때도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표현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 말뜻을 못 알아듣자 예수님은 밝히 말씀하시길 '나사로가 죽었다'(요 11;11-14)라고 하셨다. 즉 예수님께서 죽은 것과 자는 것을 혼동하심이 아니라, 믿는 자들이 죽음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교훈하심이다. 죽음과 잠은 어떻게 구별하는가? 영원히 깨지 못한다면 그것은 죽음이다. 그러나 깰 수 있으면 잠이다. 많은 사람에게 죽음이란 영원한 소멸, 영원한 절망이다. 그러나 부활을 믿는 성도에게는 죽음이란 긴 잠을 자는 것에 불과하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을 향해 '자는 자(those who fall asleep)'라고 했다(살전 4:13). 사도행전에서도 스데반이 죽었을 때, 잤다고 표현했다(행 7:60, 행 13:36). 초대 교회 성도들은 이렇게 죽음을 '잠'이라고 표현함으로써 부활 신앙을 드러냈다. 오늘 예수님께서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심은 그 아이가 부활할 것을 암시하심이다. 예수님께서는 아이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달리다굼'(막 5:41). 마가는 이 말을 '내게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라고 의역을 했다. 이 말은 당시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아람어로써 '달리다'는 어린 암양을 의미하는데, 당시 귀여운 어린 소녀에게 하는 애칭이라고 하며, '굼'은 일종의 명령어로서 일어나라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따라서 '달리다굼'은 마치 부모가 잠자고 있는 자기 어린 자식을 보고 몹시 귀엽다는 표현으로 '우리 강아지야 일어나야지'라고 하는 것과 같다. 수많은 사람들이 울고 있지만, 예수님은 귀여운 소녀를 보고 미소를 지으면서 부드러운 음성으로 '달리다굼'하시는 것이 상상된다. 과연 그 아이는 살아났고, 잠잔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이런 부활을 맛본 아이도 결국은 다시 죽을 것이다. 이런 부활은 미래에 일어날 성도들의 부활을 암시하는 일종의 예표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울릴 때, 모든 성도들이 부활할 때, 그 부활이 실체이며, 영원히 다시 죽지 않는 부활이 될 것이다(살전 4:17). 부활 신앙을 가진 성도는 믿지 않는 자들처럼 죽음을 지나치게 슬퍼하거나 절망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잠들었다'고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살전 4:13).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아멘, 주 예수여, 제가 이것을 믿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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