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주심에 감사하자
고후3:12-18
김성기목사
광복 60년 격동 60년
오늘은 광복 60주년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60년 전 우리 민족에게 다가온 광복은 두 팔로 맞이한 감격의 소리였습니다. 잃었던 주권을 다시 찾은 지 60년. 감히 끝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제 36년, 각기 다른 삶의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느닷없이 찾아온 일본의 패망은 하나님이 이 민족에게 주신 엄청난 기적과도 같은 기쁨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찌 기쁨뿐이었겠습니까? 38선을 까맣게 태워버린 남침의 대포소리에 손에 잡힐 듯했던 희망은 여지없이 사라져 버렸지만 6·25 전쟁이 남긴 폐허 위에서 우리는 다시 희망의 씨앗을 뿌렸던 것입니다. 1950년대, GNP 30달러는 반세기가 지난 2000년대 초반에 1만 달러를 넘어섰지만 이후 저성장의 늪에 빠져 경제는 허우적거리고 사회의 이념적 갈등은 날로 고조되는 등 위기국면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사회 어른들의 입장은 한결같이 “자유민주주의의 뿌리를 굳건히 다짐으로써 진정한 광복을 맞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연세대 박준서 교수는 말합니다. “분명한 정체성을 가진 토대 위에서의 다양한 의견과 갈등은 조직을 건강하게 만들지만 증오와 분노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갈등은 국가 정체성의 뿌리를 흔들어 놓는다.” 광복절은 ‘얽매이는 것’에서 완전히 풀려나와 ‘자유’를 선언하는 날, 광복 60주년을 맞아 이 나라의 사회구조가 ‘증오, 분열, 구속’의 어둠에서 ‘사랑 ,화합, 해방’의 밝음으로 변화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광복 60년의 귀는 다시 역사의 맥박을 들어야 합니다. 광복의 감격은 아직도 거룩한 것입니다. 60년 전 이념에 따라 생기던 갈등현상은 지금도 변함이 없지만 이제 우리 사회가 성숙하면서 이념갈등이 깊어지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접점을 찾는 분위기로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광복절 두 음악회에 비친 한국 정치 모습
정부와 서울시가 광복절 저녁 불과 600m 떨어진 서울 남대문 광장과 시청광장에서 각기 갖기로 한 두 기념음악회는 한 치 타협과 양보도 없이 그대로 열리게 되었습니다. 저녁 7시에 열리는 숭례문 대중음악 공연의 요란한 마이크 소리와 30분 뒤 시작하는 시청의 서울시향 클래식 연주는 어지럽게 뒤섞이며 서로를 망치게 되었습니다. 정부와 지자체가 정책이나 제도를 놓고 싸우는 것도 아니고 나라의 생일이나 다름없는 광복절 축제까지 서로 경쟁하고 버티는 모습에 국민이 느끼는 것은 답답함뿐일 것입니다. 아무리 경쟁자 사이라도 지켜야 할 예의가 있는 법이고 해선 안 되는 일이 있는 법인데 어찌해서 이렇게 격이 없는 나라가 되고 말았는지 안타깝기만 합니다.
두 종류의 자녀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두 종류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한 자녀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이 땅에 온 이삭이고 한 자녀는 사람이 노력해서 만든 이스마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노력으로 애쓰고 수고해서 만든 이스마엘을 그 집에서 쫓아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너의 모습 중 어디에도 종의 형태는 갖지 않았으니, 온전한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온 세상의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서 자유를 누려라."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누구도 내 주인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셨으면 형제, 자매로 만나면서 이 자유를 누립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에 함께 있을 수 있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 사람은 손님입니다. 우리가 그 손님을 환대합니다. 음식도 대접하고 잠자리도 마련해줍니다. 그렇지만 손님은 자유롭게 냉장고 문을 열지 못합니다. 우리 집에 들어오면 자유가 없고 규칙 속에 살게 됩니다. 또 다른 한 종류가 있을 수 있는데 집에 와서 일을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과 같이 살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에게는 자유가 없고 규칙 속에 매여 있습니다. 그렇지만 공부하러 갔다 돌아온 아들은 오자마자 혼자 난장판을 피웁니다. 신발을 제 마음대로 내던지고, 들어오고 나가는 것도 제 마음대로이고 그리고 냉장고 문 여는 것도 제 마음대로입니다.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엄청난 자유를 누립니다. 그러므로 다시 하지 말아야 될 것 있는데 종의 멍에를 매면 안 됩니다. 우리들이 과거에는 죄의 종노릇할 수밖에 없었고 죄가 시키는 대로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랬던 우리에게서 그 죄의 사슬을 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죄로 규정하는 율법의 그 얽매임에서 풀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그 죄로 정하는 율법이 다시는 나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봅 바틀렛이라는 탐험가가 경험한 이야기입니다. 그가 외국을 여행하는 중에 아주 희귀한 새 몇 마리를 얻어 이것을 새장에 가두어 가지고 배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중에 그 중에 한 마리가 유난히도 시끄럽게 굴면서 새장에 갇혀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새장을 발톱으로 할퀴고 머리를 찧는 등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새장에서 계속 푸덕 푸덕거리며 몸부림을 치고 열광을 하다가 결국 문이 열려서 새는 망망한 대해 한 가운데로 도망하는데 성공을 해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새는 미친 듯이 기뻐하며 창공을 높이 높이 날아올랐고 새장은 텅 비어있었습니다.
그런데 몇 시간 후에 그렇게 날아올랐던 새들이 다시 배로 돌아와서 날개의 힘이 지쳐있는 상태로 그 갑판 위에 그냥 툭 떨어지는 것입니다. 저들은 자유를 얻었다고 날아올랐는데 망망대해에 발붙일 곳이 없었고 물론 먹을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죽기 살기로 온 힘을 다해서 이 배를 향해서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그런 다음 이 새들을 주어 담아 다시 새장에 집어넣었습니다. 더 이상 이 새장은 그들에게 감옥이 아니었고 그들의 안식처가 되었습니다. 끝없는 바다를 건너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이 새장에 있었습니다. 굶주린 배를 채울 수도 있고 편안하게 거할 수 있는 길이 바로 이 새장 안에 있었습니다. 새장은 그들에게 있어서 구원선이었습니다.
참 자유가 무엇입니까? 알면 자유이지만 모르면 필연이고, 알면 은총이지만 모르면 숙명입니다. 내가 처한 처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에 이것이 무슨 뜻이 있는지를 알면 그 어느 처지에 있든지 거기에 진정한 자유가 있고 거기에 행복도 있습니다. 푸른 창공을 향해 날아간다고 해서 그 것이 진정한 자유인 것만은 아닙니다. 참 자유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토마스 H. 그룸(Thomas H. Groome)이라는 미국의 교육학자는 그가 쓴 책에서 세 가지 자유를 말합니다.
첫째 생각하는 자유입니다.
가장 중심적이고 가장 핵심적인 자유는 생각의 자유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생각의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자신의 과거가 계속 자기를 어지럽히고 뒤따라 다니는 것은 아닙니까? 지난날의 자신이 경험했던 악몽이나 억울했던 한이 있고 또 지금도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는 동안 그 생각은 그 어디에 있든지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많은 근심과 걱정에 매일 때가 있지만 세상에 걱정처럼 불필요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걱정하고 나면 잠도 못 자고, 몸도 해롭고, 결국엔 감성이 약해져서 짜증도 나고, 백해무익한 것이 걱정인데 그 걱정으로 인해 생각의 자유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잊어버려야 될 것을 잊지 못하면 내 생각이 자유롭지를 못합니다. 생각 자체가 지금 무엇인가에 꽉 붙들려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생각이 문제인데 은총을 알면 자유로울 수 있고, 사랑으로 해석할 수 있으면 자유롭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곳에 있는 줄 알면 자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선택의 자유를 말합니다.
우리가 어떤 때에 자유 의지로 선택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깨끗한 양심을 따라, 신앙을 따라, 하나님 앞에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선택하느냐? 아니면 이권을 생각하고 명예를 생각하고 다음 일을 생각하고, 잡스러운 생각이 우리 마음을 붙들고 거기서 결정을 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의 결혼문제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순수하게 신앙과 그 인격을 보고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간혹 보면 이 분과 사돈 맺으면 내 환경이나 처지가 잘 풀려나가고 유리하게 될 것이고, 그 다음에 출세에 도움이 되는 등등의 순수하지 못한 생각들 때문에 판단이 흐려지고 선택이 빗나갈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선택은 얼마나 자유롭습니까? 여기에 진정한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셋째는 행동의지의 자유입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려고 할 때, 무엇엔가 또 끌리면서 자유롭지를 못할 때가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정치적으로, 또 많은 책임, 또 나의 나약함, 의롭지 못한 도덕성, 이런 것들 때문에 행동이 깨끗하질 못하고 과감하거나 담대하지 못합니다. 행동의지의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인간은 자유하지 못합니다. 물질, 환경, 욕망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문제입니다. 영혼이 자유하지 못하다는 것을 신학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수건이 쓰여져 있어서 자유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또 자기 자신을 바로 볼 수도 없고, 이성과 감성의지가 다 병들었기 때문에 결코 자유하지 못하는데 주께로 돌아가면 수건이 벗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비로소 우리 영이 자유해질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주는 곧 영이시다는 말씀이 있는데 주께서도 이 세상에 계실 때는 육체적 시간 공간의 제한을 받았지만 지금은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무한한 자유를 누리고 계십니다. 그 영적 존재에 대한 속성을 설명해주는 소중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다시 말씀합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함이 있다”. 이 자유문제는 몸의 문제나 정치 문제가 아니고 정신 문제, 가치의 문제, 영적 문제입니다.
요한복음 8장 34절에 보면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이다." 방종은 자유가 아닙니다. 탕자가 집을 나갔습니다. 집을 나가 사는 모든 생활은 자유가 아닙니다. 아버지 집에 돌아올 때까지는 절대로 자유인이 아닙니다. 32절에 보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오직 진리가 진리를 떠날 때 거기에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36절에 보면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아들이 자유케 하면,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그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 됨을 확증해 주실 때,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 될 때 성령은 계속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됨을 확증하십니다. 로마서 8장에서. 그런고로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 된 그 사랑을 확증 받을 때 거기에 자유함이 있습니다.
유명한 에밀 부르너(Emil Brunner)는 "인간은 자유롭다. 그러나 그 자유는 하나님께 얽매일 때 비로소 자유한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의 노예가 될 때 자유롭고, 진리의 노예가 될 때 자유롭고, 하나님의 은총에 사로잡힐 때 거기에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치도, 물질도, 지위도, 건강도 아닙니다. 자유는 오직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곳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은 사랑이요, 용서요, 희생이요, 겸손이요, 하나님의 거룩한 은총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고 그 영이 있는 곳에 오로지 자유함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제는 참 자유를 알고, 참 자유를 지키고, 그 자유 안에서 참으로 주의 은혜를 감사할 때 생명력이 넘치고, 소망이 넘치고, 창조적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오늘 이 시대에서 자유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데 빛과 방향을 제시해주는 기도문을 소개합니다.
오 예수님, 나를 구원해주십시오.
나를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높임을 받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명예롭게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칭찬 받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다른 사람보다 더 낳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다른 사람의 관심가운데 있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인기를 얻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낮아짐의 두려움으로부터 멸시받음의 두려움으로부터/
고통스러운 책망의 두려움으로부터 잊혀짐의 두려움으로부터/
실수의 두려움으로부터 조소의 두려움으로부터/
의심받음의 두려움으로부터 -마더 테레사-
[출처] 한국교회 815 광복절 설교 (03)|작성자 성경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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