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해방
렘34:8-16, 롬8:1-2
오세원 목사
어제는 우리나라가 일본압제에서 해방된 지 64돌을 맞이한 광복절 기념 날이었습니다. 해방의 기쁨은 겪어보지 않으면 잘 모릅니다. 그러나 일상생활 속에서도 조금은 경험을 할 수도 있습니다. 남성들의 경우 군대에 입대하여 군복을 입고 다니는 것은 구속으로 생각됩니다. 제대하기까지는 구속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경우는 사람을 구분할 때 이렇게 구분합니다. 남자, 여자, 아줌마, 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한다면 군인입니다. 군복을 입고 걸어가면 사람이 걸어간다고 하지 않고 군인이 걸어간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구속의 삶 가운데 오로지 소망은 제대하는 것입니다. 군에 입대하면 제대날짜를 손꼽아 기다립니다. 제대할 때는 대대, 연대 신고를 거쳐 사단에 대기하면서 하룻밤 자는 것도 지겹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다가 사단장에게 신고하고 부대를 나올 때 그 기분은 군대 가서 제대해 해보지 않은 분들은 느끼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사실 군대 제대했다고 해서 완전한 해방이 되느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또 다른 것에 의해 묶입니다. 예비군에 묶이고, 민방위훈련으로 묶이게 됩니다. 인간은 관계성을 갖고 삽니다. 서로 엮어져 있습니다. 묶여 삽니다. 나는 ‘자유롭다’고 부르짖어도 역시 그 무엇에 묶여 있습니다. 사람이 아니더라도, 예컨대 관습, 제도, 법, 자기생각 등에 묶입니다. 결혼하면 배우자에게, 직장에 들어가면 직장에 묶입니다. 애기를 낳으면 애기에게 묶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다양하게 묶여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를 달라고 요청합니다. 우리가 해방되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직도 자유하지 못한 내용은 없는가? 자유롭게 산다고 하지만 왠지 구속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신은 무엇에 묶여 있습니까? 아니면 참된 해방을 맛보며 살고 계십니까? 무엇에서 해방되어야 참된 해방의 기쁨을 맛볼 수 있을까요? 우선 묶여 있는 삶을 살펴볼까요.
사람은 누구나 가족에 묶여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부터의 진정한 자유함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가족이 있다는 것이요, 가족이 있다면 책임과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좋든 나쁘든 묶여 있습니다. 묶여 있다는 것은 그 무엇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가족으로부터 묶여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한 생각은 아닙니다. 가족은 나를 지탱시켜 주는 관계지 나를 속박하는 관계는 아닙니다. 그런데도 묶여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아내들은 시갓집에 묶여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은 것 같습니다.
직장생활이나 학교생활도 묶여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학교 안다닐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의무교육은 받아야 합니다. 직장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직장에 따라 가기 싫은 이사도 가야 합니다. 직장에 따라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사적인 일이 많은 제약을 받습니다. 회사일 때문에 퇴근하고 싶어도 못하고 집안에 무슨 큰 일이 있어서 쉽게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직장생활이 나의 게으르고 나태함을 깨워주기도 합니다. 묶인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법에 묶여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 바리새인들의 문제 중의 하나가 법에 너무 묶여서 진정한 자유함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자유함을 주시기 위해 내려놓아도 되도록 하셨는데도 여전히 법에 묶여 있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안식일 법에 묶여 있었습니다. 해도 되는 일도 제대로 못하였습니다. 자기들만 묶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묶어놓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문제가 유발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보면 안식일 법으로 예수님의 사역까지 방해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일러주신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5:17말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그리고 하신 말씀이 요한복은 8:31말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여기서 진리는 복음이요, 하나님의 말씀이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묶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케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지키는 전통적인 관습이 우리를 묶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명절입니다. 어느 민족이든지 고유의 명절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명절은 대부분 영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명절 중에 가장 보편적으로 지키는 것이 설과 추석입니다. 추석 명절은 조상들의 묘소를 찾는 날이기도 합니다. 설에도 음식을 통해서 조상을 섬기는 기회로 삼습니다. 신자들에게 때로는 명절이 우리의 진정한 복음 안에서의 자유함을 박탈하고 있습니다.
한편 제사문화는 우리의 많은 것을 묶고 있습니다. 제사에 묶여서 요지부동인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제사를 위해 사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요즘은 물론 많이 달라졌지만 옛날에는 제삿날에 쓰는 그릇이 따로 있습니다. 대부분 놋그릇입니다. 놋은 푸른곰팡이가 생깁니다. 그러면 그것을 다 닦아야 합니다. 그래서 생긴 말이 있습니다. ‘없는 사람, 즉 가난한 사람 제사 다가오듯이 닥쳐 온다’어떤 가정은 제사가 매월 있기도 하고 1년에 명절까지 열두 번 드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가정의 맏며느리 머리에는 오로지 제사만을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제사를 잘 드릴까? 어떻게 하면 제사 잘 지내서 조상 덕을 볼까? 제사에 묶여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하고 예수를 믿고 싶어도 제사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자유함을 박탈당하는 경우는 식민지 생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를 보면 크고 작은 전쟁이 떠날 날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민족사적으로 보면 종살이를 크게 세 번 했습니다. 애굽에서의 430년, 바벨론 70년, 그리고 로마로부터 압제를 받았습니다.
첫 번째 종살이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구속사를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백성의 형성을 위한 종살이었다고 할 수 있는 애굽에서의 삶입니다. 야곱 때에 애굽으로 내려간 70명의 야곱 가족들이 430년이 지나서 돌아올 때는 무려 장정만 60여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크게 들어 사용하셨습니다. 요셉이 형님들에 의해 애굽으로 가는 상인들에게 팔아넘겨져서 애굽에 갔지만 요셉은 기근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하나님이 미리 준비시켜 주신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셉을 애굽에서 총리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총리의 자격으로 가족 70명을 고센 땅에 살도록 배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살아있을 때는 별로 문제가 없었지만 요셉이 죽고 애굽에는 다른 왕이 집권을 하기 시작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생길이 열렸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종살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을 많이 시키면 시키는대로 인구가 더 많이 불어납니다. 인구가 많이 증가하니까 애굽 지도자들은 두려워했습니다. 이들이 인구가 많아져서 힘을 과시하면서 자신들을 힘으로 밀어 붙일까 염려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더 많은 일을 시킵니다.
출애굽기1:10이하에 보면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 하고 /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가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을 엄하게 시켜 / 어려운 노동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일이 모두 엄하였더라”
이런 가운데서 애굽의 왕은 히브리민족이 아이를 낳을 때 잘 살펴서 남자면 죽여 버리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모세가 하나님의 은혜로 바로의 공주에게 안겨서 성장하였고 그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는 지도자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이런 일련의 여정 속에서 발생하는 일 중의 하나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 심한 고통을 받았습니다.
출애굽기2:23-25말씀,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해방시키기로 마음먹고 모세를 세워 해방을 위해 시도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애굽 왕이 말을 잘 듣지 않자 열 가지 재앙을 내리게 해서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지배에서 해방되어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이들이 가나안에 살면서도 애굽 생활을 제대로 버리지 못해 하나님을 저버리고 까불다가 하나님께 종종 얻어맞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때그때마다 사사들을 세워 위기가운데서 건져주시곤 했으나 솔로몬 아들 르호보암 왕때 남북으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르호보암 왕의 통치에 반기를 든 지파들이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아 세운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전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했습니다. 남 유다도 시드기야 왕이 예레미야 선지자의 경고를 무시하고 반바벨론정책을 쓰다가 주전586년에 결국은 망하게 됩니다. 그 내용이 오늘 읽은 예레미야의 말씀내용입니다.
8-11절 내용을 다시 읽겠습니다.
“시드기야 왕이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백성과 한 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계약을 맺고 자유를 선포한 후에 여호와께로부터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 그 계약은 사람마다 각기 히브리 남녀 노비를 놓아 자유롭게 하고 그의 동족 유다인을 종으로 삼지 못하게 한 것이라 / 이 계약에 가담한 고관들과 모든 백성이 각기 노비를 자유롭게 하고 다시는 종을 삼지 말라 함을 듣고 순복하여 놓았더니 / 후에 그들의 뜻이 변하여 자유를 주었던 노비를 끌어다가 복종시켜 다시 노비로 삼았더라”
이 내용의 역사적 배경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시의 유다 백성들이 동족을 노비로 삼음으로써 하나님의 율법을 범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포위 되었을 때 하나님의 긍휼을 얻기 위한 술책으로 노예해방 정책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 군대가 애굽 군대의 공격을 받자 애굽을 물리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예루살렘 포위를 풀고 떠났을 때(37:5), 이전에 맺은 율법에 대한 서약을 휴지조각처럼 저버렸습니다. 결국 유다는 하나님을 속이는 죄까지 점하게 되었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비록 죄인을 사랑하실지라도 죄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보응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12절 이하에 보면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이 선조들과 언약을 맺었는데 그 언약은 곧 같은 동족을 노예로 삼았으면 7년이 될 때, 즉 안식년이 되면 종에서 해방시켜 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시드기야 왕 때 이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종들을 풀어주지 않았습니다. 이 것으로 인하여 망할 것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사람들이 자유를 박탈당하거나 인권이 유린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항상 자유함을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유를 허락하지 않고 그들의 자유를 박탈한 자들에게는 역으로 자신들의 자유를 억압당하게 될 것임을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34:21-22말씀 “또 내가 유다의 시드기야 왕과 그의 고관들을 그의 원수의 손과 그의 생명을 찾는 자의 손과 너희에게서 떠나간 바벨론 왕의 군대의 손에 넘기리라 /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 성읍에 다시 오게 하리니 그들이 이 성을 쳐서 빼앗아 불사를 것이라 내가 유다의 성읍들을 주민이 없어 처참한 황무지가 되게 하리라”
예레미야를 통해서 주신 이 경고의 메시지가 39장에 가면 그대로 됩니다. 유다의 시드기야 왕의 제구년 열째 달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과 그의 모든 군대가 와서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치더니 시드기야가 왕권을 잡은지 제 십일년 4월 9일에 성이 함락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함락되니까 유다의 시드기야 왕과 모든 군사가 바벨론의 왕과 고관들을 보고 도망하여 아라바로 갔습니다. 바벨론 군대가 그들을 따라 여리고 평원에서 시드기야 왕을 잡아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로 데리고 갔습니다. 왕이 그를 심문한 후에 바벨론의 왕이 립나에서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그의 아들들을 죽였고, 왕이 또 유다의 모든 귀족을 죽였습니다. 또한 왕이 시드기야의 눈을 빼게 하고 바벨론으로 옮기려고 사슬로 결박하였습니다.
이미 예견된 일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경고의 말씀을 여러 차례 하셨습니다. 예레미야29장에 보면 바벨론에 잡혀가면 너희들은 바벨론에서 그 땅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이유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포로로 잡혀간 너희들도 평안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1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70년 동안 자유를 박탈당한 채 노예로 사는 삶이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떻합니까?
뿐만 아니라 영적 암흑기라 불리는 신구약중간시대 400여년동안 이스라엘은 선지자가 없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다가 주전63년부터 팔레스타인은 로마에 지배를 받기시작 했고, 드디어 하나님이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한 예수님이 탄생하셨습니다. 그분이 오시면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기쁨을 얻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주후70년에 예루살렘이 완전히 함락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1948년 독립할 때까지 서러움의 나그네 인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 유대인들만큼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뼈저리게 느끼는 민족이 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유를 지키기 위해 여자들도 군인으로 복무하는 것을 전혀 문제삼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힘을 기르고 막강한 힘으로 버티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스라엘에 비하면 얼마 안 되는 36년을 지배받았을 때 아직도 일제의 잔재가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때 자유롭지 못한 삶이 얼마나 힘이 들었든지 많은 지도자들이 자유를 찾기 위해 희생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백성들에게도 64년 전에 해방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렇게 찾은 자유를 아름답게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일본의 압제에서 해방된 기쁨도 중요하지만 참된 해방은 무엇인가를 남북한을 통해서 확연히 살펴볼 수 있습니다. 남북한이 똑같이 해방되었습니다. 그렇지만 1953년에 휴전협정을 통해서 남북이 갈라져서 각기 다른 나라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반세기가 지난 오늘 남북한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모든 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만 특히 체제와 경제의 차이입니다. 체제의 경우 남한은 자유민주주의이나 북한은 공산주의입니다. 창의성이 발달하기 위해서는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자유롭게 생각하고 표현하는 아이들이 창의적입니다. 시키는 대로만 하는 아이들에게는 창의성이 약합니다. 그래서 북한의 발달이 더딜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만들어진 그릇 안에 들어가는 일만 잘 하면 됩니다. 그리고 경제면에서 보면 남한은 자본주의를 표방하고 있으나 북한은 사회주의 경제입니다.
그로 인한 경제적 차이란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소득은 17배, 무역총액규모는 211배, 예산은 53배나 차이가 있습니다. 굶주리는 백성들과 굶어죽어 가는 자들이 속출하는 북한은 정치, 경제, 교육 등 모든 것이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런 차이가 왜 발생했습니까? 자유와 억압의 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차이는 종교의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종교의 자유함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남북한의 모든 차이는 결국 신앙의 자유가 있느냐 없느냐와 관계가 됩니다. 그들에게는 만복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한 내용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예레미야2:13말씀에 보면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는데 하나는 생수의 근원되는 주님을 버린 것과 두 번째는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라고 했습니다. 터진 웅덩이라는 것은 아무 것도 도움이 안 되는 물을 가둘 수 없는 우상숭배를 가르칩니다. 마찬가지로 북한은 그렇게도 한국의 예루살렘이라 일컬었던 평양, 성령의 부흥운동을 일으켰던 장대현교회가 있던 땅이 유물론 사상이 지배함으로 인해 하나님만 버린 것이 아니라 전혀 경제나 사회, 정치나 교육, 문화 등에 유익을 줄 수 없는 공산주의 사상이 지배함으로 인해 오늘의 현상을 가져왔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마음대로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복 중의 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의 가장 근본은 자유 입니다. 그 자유는 죄로부터의 자유 입니다.
신약의 본문 로마서8:1-2말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인해 우리를 죄에서 온전히 해방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죄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은 죽음에서의 해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생을 얻었습니다. 요한복음8:34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하셨습니다. 종은 주인과 함께 안에서 살 수 없고 밖에서 살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아들은 아버지 집에 영원히 거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아들이 죄의 종노릇 하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면 우리가 참으로 자유롭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죄의 종에서 벗어나 자유로우면 영생을 얻게 됩니다. 세상에서 죄로부터 자유로운 생활을 하다가 감옥에 갇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감옥에 갇혔다고 해서, 몸의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고 해서 영생을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참된 해방, 참된 자유로움은 죄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소련의 솔제니친이 감옥에 갇혀도, 해외에 망령생활을 했지만 그에게는 죄로부터 자유 함으로 인해 영생의 소망을 갖고 살았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어도 그는 매인바가 되지 않는다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 찬양과 기도를 드렸고 그로 인하여 옥문이 열리고 쇠사슬이 풀어졌으나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감옥에 갇혀 있다고 해서 묶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복음을 담대하게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죄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에 그가 어디에 있든지 갇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더욱 잘 전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죄문제로 고민하는 분 없습니까? 죄문제를 해결받지 못하는 신앙없는 북한 사람들의 삶은 비참하지만 죄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진 대한민국은 마을마다 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렇게 살기좋은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만하지 않고 죄의 종노릇하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기도하며 하나님이 이 민족에게 주신 해방의 기쁨을 갖고 단순히 자유함만 누릴 것이 아니라 해방을 시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 해방의 기쁨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아직도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북한 동포들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참된 해방, 죄의 해방을 맛볼 수 있는 날이 속히 오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통일의 기쁨을 갖고 그들에게도 죄로부터 자유함을 누릴 수 있는 복음을 듣고 믿게 되는 그 날이 속히 오도록 기도하십시다.
[출처] 한국교회 815 광복절 설교 (03)|작성자 성경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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