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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양식(요한복음 4:27-38)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너희가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어느날 예루살렘을 떠나 고향인 갈릴리로 내려가시게 되었습니다. 갈릴리로 가는 도중에는 사마리아라는 지역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몹시 경멸합니다. 그것은 오래 전부터 앗수르 사람들이 이 땅에 들어와 잡혼을 함으로써 이 사마리아 땅에 있는 사람들은 그만 혼혈 민족이 되어 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같은 형제지간이었지만 그 후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동물처럼 더러운 사람들이라고 취급하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갈릴리에 사는 유태인들인 예루살렘을 순례하러 갈 때에도 사마리아 땅을 거쳐가면 빠른데도 불구하고 더러운 땅을 밟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먼 길을 돌아서 다녔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고향으로 가시는 도중 이 사마리아 땅을 거쳐서 가십니다. 뿐만 아니라 수가성 가까이에 있는 야곱의 우물이라 부르는 우물가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하십니다. 그 때 시간이 "제6시"라고 하였는데, 이 6시란 우리나라 시간으로 낮 12시에서 1시 사이로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 풍습으로는 아침 해가 뜰 때를 1시라고 하고 해질 때를 12시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각은 사막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뜨거운 때입니다. 예수님도 사막의 뜨거운 열기를 견디기 어려워 우물가에 앉아 쉬고 계십니다.
그 시간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자신들의 음식을 구하러 성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이 음식을 사러 간 사이에 예수님이 계신 우물가로 어느 한 여인이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유대인의 풍습으로는 보통 아침저녁 서늘할 때에 수십 명의 아낙네들이 떼를 지어 물을 길러 나옵니다. 급한 일이 아니면 다니지도 않는 뜨거운 이 시간에 그것도 단 혼자서 물을 길러 나오는 이 여인은 반드시 어떤 곡절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이 어떤 여인인가를 즉시 알아보신 것 같습니다. 그 여인은 그 사회에서 소외당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내게 물을 달라." 불만에 가득차 있고 외부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있는 이 여인은 쉽게 물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유대인 남자로서 사마리아의 천한 여자에게 왜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목이 말라 죽는 한이 있어도 사마리아 여자에게는 물을 달라고 하지 않기 때문에 아마 이 여인은 오히려 의아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만일 너에게 물을 달라고 청한 자가 누구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너는 그에게 오히려 생수를 청했으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인은 호기심이 생겨 "두레박도 없고 또 물을 담을 그릇도 없는데 어떻게 당신이 물을 줄 수가 있단 말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강조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주는 물은 한 번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여인은 이 말씀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매일매일 이런 굴욕을 참으면서 물 길러 다니지 않아도 될 텐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그런 물을 나에게도 주시어 나로 하여금 물 길러 오지 않게 해주소서"라고 간청하게 됩니다 이로부터 대화의 문은 열려 예수님은 전도를 하기 시작합니다. 여인의 마음은 활짝 열리게 되고 예수를 메시야 구주로 고백하게 됩니다. "나의 과거와 소원까지 알고 귀한 말씀을 해주시는 당신은 바로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야이십니다"라고 외치며 갈급한 여러 가지 문제를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열심히 전도하고 계시는 동안에 성으로 음식을 사러 갔던 제자들이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낯선 사마리아 여인과 열심히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것을 보고 수상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만 예수님께 음식을 권하기만 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내가 먹을 양식은 따로 있다"며 또 한 번 제자들을 당황하게 하십니다. 그들은 "누가 음식을 갖다 드렸을까? 여기에는 사마리아 여인밖에는 없었는데…" 하면서 서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바로 우리가 오늘 생각해보아야 할 귀한 말씀입니다.
양식이란 무엇입니까? 어떤 의미에서 양식이란 곧 생명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먹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만큼 인간에게는 먹고 마시는 문제가 절실한 것입니다.
6․25동란 당시 피난길에 시계 하나를 주고 고구마 네 개를 얻어 먹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에 저는 시계가 전혀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나마 고구마 네 개 구한 것을 고마워했던 일이 기억납니다. 아주 절박한 상황에서는 다이아몬드나 진주가 귀한 것이 아니라 먹는 양식이 귀하게 됩니다. 이 양식은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자신을 양식으로 비유하여 우리에게 그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먹는 것은 생명과 직결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즐거움과 휴식을 줍니다. 유럽 사람들은 보통 저녁 식사 시간이 3시간 가량 됩니다.
그들은 긴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하면서 하루에 쌓인 피로를 푼다고 합니다. 제 친구가 프랑스 유학을 갔는데 프랑스 친구들이 왜 가려고 하느냐고 자꾸 묻더랍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한 시간이면 식사가 끝나지 않습니까? 요즈음 젊은 학생들은 학교에 늦을까봐 물에다 밥을 말아서 얼른 먹고 뛰어갑니다. 그들은 불행하게도 먹는 즐거움을 잃어버리고 산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일본 사람은 "천국은 같이 먹는 곳이다"라는 재미있는 말까지 합니다. 그들은 먹는다는 것이 그처럼 아름답게 생각되었기에 그렇게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양식은 우리를 소생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피곤하여 지쳐 있을 때 먹고 마심으로써 피로를 회복하여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요즈음 모를 심는 데 학생들이 동원됩니다. 그런데 동원되어 갔다 온 학생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것은 배가 무척 고프다는 것이었습니다. 옛날 시골에 살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모를 심으면 하루 다섯끼 식사가 모자랐는데 아무리 피곤하여도 먹으면 새로운 힘이 나서 다시 모를 심을 수 있었습니다. 비가 여러 날 오지 않아 가물었을 때에는 나무나 풀들이 기운을 잃고 흐늘흐늘합니다. 그러나 비가 내려서 초목들을 적시면 파릇파릇하게 소생하여 싱그러운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양식은 소생하게 하고 피곤을 없애고 새로운 힘을 주는 역할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는 대화를 통해 죄 많은 한 여인의 심령이 살아나고 소망을 얻게 되는 것을 보고 너무 기뻐서 피곤을 잊어버렸습니다. 배고픔마저 느끼지 않았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순간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죄인을 구하는 것을 자신의 생명처럼 여기셨습니다.
그는 일하지 않는 삶을 삶이라고 인정하지 않았고 사람이 먹어야 사는 것처럼, 일을 해야 산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일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진리를 본문에서 예수님은 보여주고 계십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 나를 보내신 목적을 이루는 것 그것이 바로 나의 생명이요 양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직 그 일을 위해서만 내가 존재하며 나의 삶의 목적과 일치된 일을 행하는 그 순간 그 속에서 삶의 보람을 찾을 수 있고 모든 피곤을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생활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을 통하여 그는 많은 즐거움을 얻었습니다.
사실 한 생명을 구한다는 것만큼 큰 즐거움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도 천지를 만드시고 그 창조된 만물을 보시고 심히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노력을 해서 무엇인가 이룩해 놓고 그것을 보고 큰 기쁨을 얻지 않습니까? 일하는 즐거움은 가장 큰 즐거움입니다. 먹는 즐거움과 일하는 즐거움을 비교해볼 때 먹는 즐거움에 일하는 즐거움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 먹는 일은 얼마나 비참한 것이 되는지 모릅니다. 일하면서 그 일 자체를 사랑하고 그 일에서 삶의 보람을 찾고 즐거움을 얻는 그런 생활이 아쉽습니다.
요즈음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에서 오히려 피곤만을 느낄 때가 더 많습니다. 어떤 때는 지금 하고 있는 일과 내 삶의 목적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 같고, 어떤 때는 내 의지에 의해 선택한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에 의해 끌려가는 듯한 삶을 사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스스로 자원한 일, 정말 하고 싶은 일, 내가 세상에 태어난 목적과 일치하는 일을 한다면 얼마나 즐거운 삶이 될까요? 그 일 자체가 휴식이며 그 일 자체가 즐거움입니다. 억지로 하는 일, 불가피해서 하는 일들은 참으로 괴로운 일입니다. 일을 즐길 줄 아는 사람, 일을 생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 일을 위해 태어났다고 할 정도로 일을 즐기는 사람이 아쉬운 세대입니다. 구원 사업, 전도 사업, 봉사와 희생 등을 즐기는 사람이 아쉽습니다.
어떤 사람의 수필에서 이런 대목을 읽었습니다. 여섯 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여행할 기회가 있었는데, 기차 안에서 어떤 사람과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 여섯 시간을 전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전혀 피곤을 느낄 수 없었고 오히려 몸과 마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한 심령을 구하고 봉사하고 소생하게 하는 일에서 즐거움을 얻는 생활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런 일에서는 즐거움뿐 아니라 새로운 힘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휴식을 필요로 합니다. 휴식을 통하여 새로운 힘을 얻습니다. 휴식의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육체적인 피곤은 정신적인 일을 하면서, 정신적으로 피곤할 때에는 육체적인 일을 하면서 휴식을 취하여 피로를 풉니다.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내려다보면 새벽부터 열심히 테니스를 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실 테니스 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이렇게 힘든 노동을 왜 그들은 휴식을 취하여야 할 휴일에 그렇게도 열심히 할까요? 그것은 정신적인 피곤을 육체적 운동으로 푸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휴식이란 잠을 자는 것만 뜻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일을 함으로써 휴식을 취함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으로 휴식을 취합니다.
그는 안식일도 이런 식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유대인들의 소극적인 해석으로는 안식일이란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지만, 예수님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표현입니까? 오늘은 주일입니다. 우리도 휴식을 취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휴식은 유대인 방식에 의한 휴식이 아니라 예수님 방식에 의한 휴식이어야 하겠습니다. 봉사하고 성도들을 방문하고 병으로 고생하는 분들을 찾아가 기도해주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해 줍시다. 서로 도와주며 밖으로 나가 전도를 합시다. 이것이 자들의 휴식이며 예수님이 가르쳐 준 휴식법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시원한 그늘에 누워 낮잠이라도 주무셔야 할 매우 피곤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는 죄 많은 한 여인의 영혼을 구제함으로써 모든 피곤을 물리칩니다.
미쉬레라는 역사가가 있습니다. 그는 책을 많이 본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책만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마침내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고 약을 먹으면서 치료를 하려고 노력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의사는 그에게 책을 절대로 보지 못하게 하고 6주간의 여행을 권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여행도 그의 병을 치료하지는 못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이제는 마지막인가 보다. 그 동안 공부한 것을 책으로 한 번 써보자"라고 생각하여 책을 쓰는데 혼신을 다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낫지 않던 그의 병이 어느새 깨끗하게 나았더랍니다.
참된 휴식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믿는 사람들의 휴식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사업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휴식과 새로운 힘(refreshment)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전도함으로 휴식을 얻는 안식법을 취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신령한 사업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긴 신령한 사업을 안식일에 행함으로써 새로운 힘을 얻도록 합시다. 공부하는 힘, 사업하는 힘, 노동하는 힘도 여기에서 얻도록 합시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런 일을 경험하였습니다. 집회를 인도하기 위하여 저는 몹시 피곤한 상태에서 부산으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까지 150여 교회에서 집회를 가져 보았지만, 그 때 부산에서의 집회만큼 많은 사람들이 모인 집회를 가져본 것이 없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긴 좌석 사이에는 조그만 의자들을 쭉 놓았고, 맨 앞바닥은 물론이요, 심지어 강대상 위에까지 사람들이 가득 찼었습니다. 교회밖에도 50여 명의 교인들이 있었고, 지하실에서는 스피커를 통하여 설교를 듣는 100여 명의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규모로 매일 새벽 4시 30분부터 새벽 집회를 인도하고, 아침 10시부터 12시 30분까지 성경 공부를 하고, 오후 3시부터 5시 30분까지 부산에 있는 후배들과 제자들에게 세미나를 해주고, 오후 7시 30분부터는 또 저녁 집회 설교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설교가 끝나면 10시 30분까지 찾아온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너무 바빠서 피곤할 듯하지만 피곤할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오히려 마음은 가볍기만 했었습니다. 1주일간의 집회를 끝내고 서울에 돌아오니 주위에 있는 분들이 모두 얼굴이 좋아졌다고 말합니다.
휴식은 절대로 누워서 가만히 쉬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 이 일을 위해서라면 이제 죽어도 좋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휴식이요, 그 일을 통하여 더 큰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물가에서 휴식을 취하지는 않으셨지만 참된 휴식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새 힘을 얻어 새로운 일을 바라봅니다. "눈을 들어 추수할 밭을 보라." 그의 눈앞에는 사마리아 여인이 성에 들어가 너무 감격하여 사람들에게 외치는 것이 보입니다. "내가 오늘 메시야를 만났다"고 목놓아 외치며 전도합니다. 놀란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 앞으로 몰려듭니다. 새로운 일, 눈을 들어 밭을 보라. 추수 할 곡식이 많도다. 구해야 할 많은 사람들이 사마리아 여인의 전도로 예수님 앞에 몰려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생활 철학이었습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면서 기쁨과 감격을 얻고 한 사람이 살아나는 가운데에서 참된 휴식을 찾았습니다. 이제 다시 새롭게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면서 힘을 얻던 예수님, 그는 아직도 물 한 모금 빵 한 조각 먹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혀 피곤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높은 생활철학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입니다.
기도: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자세가 희미해서 피곤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기도하오니 저희를 불쌍히 여겨주셔서 하나님의 그 거룩한 역사에 저희들의 온 삶을 위탁하면서 진정으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휴식과 양식을 얻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고 그의 뜻을 이루는 것을 양식으로 삼았던 주님처럼 우리도 우리 생애에서 참된 양식을 찾게 하시고 순간 순간 온 생을 기울이는 최대의 보람을 창조해 나가게 도와주시옵소서. 이러한 일을 주시고, 이러한 부름을 듣게 하시고 이러한 삶의 지혜를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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