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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갈라디아서 4장 12절~20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 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
채필근 목사님의 글 가운데 그분이 몸소 체험한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아직 목사가 되기 전, 시골에서 전도사 일을 보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노회(老會)에 참석하려고 짐을 꾸려 짊어지고 길을 떠났습니다. 교통수단이 발달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하루해를 잡고 걸어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저녁나절이 되자 갑자기 비가 쏟아져 더는 길을 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는 수없이 주막을 찾아들어 하룻밤을 묵어가기로 했습니다. 젖은 옷을 벗어 벽에 걸고는 보따리를 머리맡에 놓고 잠을 청하려는데 주인이 다른 사람을 하나 데리고 와서 이해를 구합니다. "빗속을 온 손님인데 어쩝니까? 죄송하지만 방이 하나뿐이니 함께 주무셔야겠습니다." 그래서 부득불 낯선 사람과 한 방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새로 들어온 손님은 호롱불에 어렴풋이 보이는 모습이 좀은 험상궂게 생겼습니다. 그도 간단히 목례를 던지고는 옷을 벗어 걸고 윗목에 누워 이내 잠을 청합니다.
방은 좁은데다 날씨는 궂고 몸도 젖어 좀처럼 잠이 들지 않습니다. 문득 목사님의 마음에 이상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저 사람이 도둑이나 강도는 아닐까?' 의심이 났습니다. 언뜻 벽에 걸려 있는 옷에 생각이 미칩니다. 주머니에 회중시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시계줄이 밖으로 흘러나와 등잔불빛을 받고 번쩍거립니다. '저 사람이 도둑이라면 저 시계는……' 일어나서 시계를 꺼내어 보따리 속에 집어넣습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기는 일반입니다. '보따리째 가지고 가면 더욱 큰일이 아닌가.'
잠은 천리밖으로 달아났습니다. 기분이 아주 고약합니다. 그런데 보아하니 그쪽도 잠이 오지 않는지 몸을 자꾸만 뒤척입니다. 그럴 때마다 목사님은 '나도 자지 않고 지키고 있소'하는 뜻으로 헛기침을 합니다. 그쪽이 부시럭거리면 이쪽은 헛기침을 하고 그쪽이 헛기침을 하면 이쪽이 부시럭거리고…… 밤새 그렇게 신경전을 벌이다가 날이 밝았습니다.
아침상이 겸상으로 들어왔습니다. 두 사람은 밥상을 가운데로 마주앉게 되었습니다. 식사기도를 드리려고 하는데 이것 좀 보십시오. 그쪽에서도 기도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까? 아차! 간밤의 일을 생각하니 목사님은 기가 찹니다. 사람을 터무니없이 의심했던 게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두 사람은 그제야 제대로 인사를 나누고 통성명을 합니다. 알고보니 그 사람도 어느 교회의 장로님이고 같은 노회에 가는 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 할 것 없이 일생을 돌아보면 부끄러운 일이 많을 것입니다. 당연히 믿어야 했는데, 충분히 믿을 수 있었는데 서로 의심하고 시기하며 원수로 대한 일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불신은 무지를 낳고 무지는 절망을 낳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인간은 그가 알고 있는 것으로 평가될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것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 사람의 값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많이 안다고 값이 높은 사람입니까? 지위가 높고 돈이 많아야 행복한 사람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그가 무엇을, 누구를, 얼마나 사랑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나 자신을 온전히 바쳐서 사랑할 만한 대상을 사랑하고 있는가, 사랑을 알고 사는가 ---- 인간의 가치는 이에 따라 평가되어야 합니다. 사랑의 질과 사랑의 지혜와 사랑의 도덕성이 문제입니다. 이기적인 사랑은 사람을 악하게 만듭니다.
무도한 사랑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괴롭힙니다. 잘못된 사랑은 나도 고생이요 남까지 괴롭게 만듭니다. 보아하면 사랑에 지혜가 없습니다. 사랑을 한다고 하면서 시기가 많습니다.
시기 질투는 나도 괴롭고 남도 괴롭힐 뿐입니다. 선한 사랑이어야 하고 지혜로운 사랑이어야 하고 거듭난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도 행복하고 남도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헬라어에는 사랑이 네 가지 차원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첫째로, 에로스(eros)가 있습니다. 우리가 에로틱이니 에로티시즘이니 하는 말을 많이 쓰지 않습니까? 이성간의 애정을 가리킵니다.
둘째로, 필리아(philia)가 있습니다. 친구를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말하자면 인간적인 사랑이 모두 필리아에 속합니다. 셋째로, 아가페(agape)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깨끗하게 사랑하시는, 희생적인 사랑을 뜻합니다.
넷째로, 스톨게(stolge)가 있습니다. 부모 자식간의 사랑, 곧 핏줄간의 사랑입니다. 독일 윈첼대학의 철학과 교수인 요하네스 로즈는 이 네 가지 사랑의 관계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에로스가 필리아를 통하여 정화하고, 필리아가 아가페를 통하여 고양될 때에 비로소 건전한 사랑을 이룰 수 있다. 아가페가 없는 에로스나 필리아는 타락하고 만다. 그러나 아가페 역시 에로스나 필리아 없이 개발될 수 없다." 우리가 사랑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있습니까? 나라 사랑한다는 말로 나라를 망칩니다. 애국이라는 말로 민족을 괴롭힙니다. 모든 사랑이 아가페 안에서 거듭나지 않고는 나라 사랑이고 형제 사랑이고 다 소용이 없습니다.
반갑지 않습니다. 더욱이 이성간의 사랑은 무척이나 복잡미묘합니다. 심지어 괴롭기까지 합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랑이, 에로스건 필리아건 스톨게건, 아가페 안에서 정화하고 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위스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말년에 온 세계를 두루 돌아다니며 강연을 하였습니다. 그때 강연한 원고를 모아 책으로 펴낸 것이 여러 권 됩니다. 그가 미국을 방문하여 강연을 할 때의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강연에 감동을 받고 모두들 이 노(老)교수를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강연을 성공적으로 마쳤을 때, 한 청년이 벌떡 일어나 질문을 합니다. "지금까지 박사님의 마음을 스쳐간 생각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이 무엇입니까?" 참으로 미국청년다운 질문입니다. 칼 바르트는 깊이 생각하고 짤막하게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나는 성경을 통하여 이 사실을 깨닫고 내 생활에서 이것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 이것을 깨닫고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지금 나에게 임종이 가까웠다고 생각해보십시다. 옆에서 아내가 웁니다. 자식들이 침통한 얼굴로 주위에 둘러서 있습니다. 그렇다고 위로가 됩니까?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재산이 많으면 뭘 합니까? 지위나 명예가 무슨 소용입니까? 오직 하나, 내 마음속으로부터 들려지는 음성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과거 어느 때에 내가 너를 사랑했고, 어느 때에 내가 너를 건졌고, 어느 때에 내가 너를 보호했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되는 것 이상으로 더 귀한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또한 사랑의 커뮤니케이션이 문제입니다. 사랑의 소통에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에 대한 믿음과 바른 지식이 없이는 사랑의 열매가 맺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름지기 사랑을 알아야 하고 사랑을 믿어야 하고 그 사랑에 내 생명을 통째로 위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알게 하고 믿게 하는 것이 으뜸의 덕이요, 으뜸으로 아름다운 일이 됩니다. 동시에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부모가 되어 자식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자식은 부모가 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때로 자식을 사랑하는 나머지 아픈 마음으로 매를 들기도 하지마는 자식은 그런 부모를 원수로 생각하는 수도 있습니다. 마음속에 원한을 품습니다.
이 얼마나 기막힌 일입니까? 부모가 드는 매에는 나의 이 아픈 마음을, 이 간절한 사랑을 알아달라 하는 뜻이 스며 있는 것입니다.
호세아 4장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다오(공동번역)." 사랑하는 자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의 언어가 바로 되려면 이해와 희생이 따라야 합니다. 상대방을 이해하는가, 상대방의 처지에서 사랑하는가, 상대방을 위하여 나를 희생하는가가 문제인 것입니다. 동시에 사랑받는 자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전적으로 믿었는가, 겸손하게 수용하였는가, 받은 사랑에 대하여 감사하고 있는가가 문제인 것입니다.
이 둘을 가능케 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와 사랑 받는 자 사이의 효과적인 소통방법은 바로 시련입니다. 부부지간에도 보십시오. 그저 사랑하는지 않는지 모르게 삽니다. 그냥저냥 살 때에는 사랑의 대화도 없습니다. 그러다가 누구 하나 덜컥 몸져누우면 그때서야 사랑하게도 되고,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도 되고, 사랑 받는다는 것을 느끼게도 됩니다. 인생 25시에서 비로소 사랑의 소통이 효과를 냅니다. 사업이 형통하고 바쁠 때에는 사랑을 하는지 않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실패하고 곤경에 처했을 때에야 '아, 이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구나. 내가 진정 사랑하는 사람도 바로 이 사람이구나'하고 깨닫습니다.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사랑의 소통이 이루어집니다. 자식과도 그렇습니다. 보통 때에는 덤덤하게 지내다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 그제야 진지한 사랑을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랑의 언어를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사랑의 언어의 절정, 클라이맥스는 십자가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을 보십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 그러나 이것을 불만으로 삼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면 내 손에 돈을 쥐어주셔야지, 내 소원을 들어주셔야지, 하나도 안 들어주시면서 나를 사랑하신다고, 엉뚱하게 십자가만 쳐다보라고? ---- 이러니 사랑의 언어가 통합니까?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지혜로운 사랑의 언어입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희생하노라,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아서 사랑을 보여주노라 ---- 그 내용, 그 방법 그대로를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에, 전적으로 믿을 수 있을 때에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이렇게 하면 그때부터 내가 사랑하마, 앞으로 내가 너희들을 이렇게 사랑할 것이다 ---- 이러한 말씀이 성경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이 말씀하는 복음은 이렇습니다. 이미 내가 너를 사랑했노라, 네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내가 너를 사랑했노라, 네가 나를 모를 때에 사랑했노라, 네가 죄 중에 빠져 있을 때에 내가 너를 사랑했노라. 영원히 망할 수밖에 없을 때에 내가 채찍을 들어 너를 일깨워 하나님께로 인도했노라, 그러니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라, 깨달으라, 믿으라 ---- 새로운 세계를 말씀하심이 아닙니다. 새로운 환경을 말씀하심도 아닙니다. 거기에 사랑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것뿐입니다. 내가 지내온 날, 내가 당면했던 구체적인 현실들이 하나님의 내게 향한 구체적인 사랑이었습니다. 분명코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것을 깨닫고 믿고, 당신께 전적으로 위탁하기를 바라시고 계십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왔습니다. 돌아왔기 때문에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용서하고 기다린 것입니다.
1953년의 어느 날, 미국 샌디에이고 근교에 있는 화려한 저택에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습니다. 그 집 안주인이 전화를 받습니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아들이 돌아와 해군본부에서 전화를 한 것입니다. "어머니, 제가 돌아왔습니다." 이 어머니, 반가운 나머지, 빨리 올 것이지 웬 전화로냐고 다그칩니다. "미리 전화로 알려드릴 것이 있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친구 하나를 데리고 가려 합니다." 물론 데리고 오라고 어머니는 말합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부상을 당해서 눈을 하나 잃었습니다. 팔과 다리도 각각 하나씩밖에 없는 불구입니다. 부모가 없어서 제가 데리고 함께 살려고 합니다." "암, 그래야지." 그리고는 한마디 실수를 합니다."얼마나 데리고 있을 생각이냐? 한 일 년 데리고 있을 거냐?" "아니예요, 일생동안 같이 살려고 합니다." "너, 군에 갔다오더니 감상주의자가 되었구나. 사랑이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란다.
처음에는 몰라도 점점 지겨워질 것이다. 더 있으면 짐이 되어 무겁게 느껴질 것이다. 그저 잠깐동안만 함께 지내기로 하거라." 어머니의 이 말을 들은 아들은 인사도 없이 덜커덕 전화를 끊어버렸습니다. 그로부터 몇 시간 뒤, 그 아들이 죽었다는 전보가 날아들었습니다. 깜짝놀란 어머니, 울며불며 한걸음에 달려가 죽은 아들을 얼싸안습니다. 그런데 죽은 아들은 눈이 하나 없고 팔과 다리가 각각 하나씩 없었습니다. 점점 지겨워질 것이고 짐이 될 것이라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이 아들은 호텔 12층에 올라가 투신 자살을 하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누구의 잘못입니까? 내가 건강하면 사랑하고 병신이 되면 내쫓는 어머니입니까? 내가 합당치 못하면 사랑이 변합니까? 이것을 시험하려 한 아들도 잘못이요, 무조건 받아들이지 못한 어머니의 마음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 언제는 우리의 자격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까? 사도 바울은 '내가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에, 내가 하나님을 모를 때에,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살 때에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깊이 깨닫고 그 사랑에 감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랑에 무슨 조건이 있었습니까? 내가 잘나서입니까, 내가 의로워서입니까? 본디 사랑은 절대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율법주의에 대한 변증의 말씀입니다. 율법주의는 사랑의 본질을 앗아갑니다. 어느 사이엔가 율법주의에 빠져 죄의 가책에 매이게 됩니다. 스스로 무자격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기증오에 빠지게 되고 자기교만에 빠지게 됩니다. 또한 관계보다는 업적에 매이게 됩니다. 급기야는 은혜와 사랑을 다 내버리고 맙니다.
실례되는 말씀입니다 마는 종종 이런 경우를 봅니다. 똑똑하고 예쁘고 상냥하고, 갖출 것 다 갖춘 부인인데 정작 남편의 사랑을 못 받는 부인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아무리 보아도 시원치 않은데 남편의 사랑을 듬뿍 받는 부인이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그런 부인은 남편을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기까지 합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고 제가 좀 연구를 해보았습니다. 여기에 신학적인 문제가 결부되어 있습디다. 똑똑하고 예쁜 부인들은 스스로 '나는 사랑 받을 자격이 있다'라고 생각하는 율법주의적인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당연히 받을 사랑을 받는 것이다, 이것도 부족하다고만 생각했지 고마운 줄을 모릅니다. 반면에 못생기고 무재주한 부인들은 데리고 살아준 것만도 고맙게 생각하고 남편을 섬깁니다. 하나에서 열까지가 모두 은혜입니다. 무조건 감지덕지합니다. 문제의 해답은 여기에 있습니다. 온전히 은혜의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만이 나도 행복하고 남도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다. 똑똑한 체하고 자로 재고 의심하고 비판해보았자 남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제가 개인적으로 매우 사랑하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은혜를 받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갈라디아교회에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는 말씀합니다.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13절)." 순수한 동기가 아니었습니다.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그 무엇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것은 육체의 약점, 곧 고질적인 병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바울을 사랑했습니다. 그런 그들을 두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14절)…" 이런 관계가 은혜의 관계입니다. 바울에게는 간질병이 있었다고 합니다. 갈라디아교회에서 설교를 하다가 갑자기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고 상상해봅시다.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종이 뭐 저런가" 하고들 언짢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믿음에 시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저들이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같은 저들의 사랑에 감격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15절)"라고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랑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정작 우리가 당신을 존경합니다. 당신을 위해서 눈이라도 빼어 드리겠습니다 했다면 그렇게까지는 고맙게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바울이 그렇게 생각하고 받아들인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사랑을 받아들이는 자입니다.
여러분은 아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남편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를 위해서 얼마나 희생할 것 같습니까, 얼마나 수고할 것 같습니까? 시험하려들지 마십시오. 나를 사랑하는 사람 얼마든지 많습니다. 오늘이라도 내가 고통을 당하면 당장 달려와 나를 위로할 사람 많습니다. 나를 위하여 희생할 사람 많이 있습니다.
내 영혼을 위하여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눈물 흘려 애도해줄 사람 얼마든지 있습니다. 고독해하지 마십시오. 내 마음이 은혜롭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을 받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여기에 있습니다. 성도의 사랑이, 가족들의 따뜻한 사랑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생각합니다. 저들은 나를 위해서라면 눈이라도 빼어줄 것이다----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 마음이 은혜요 사랑입니다. 내가 사랑해서 주노라, 내가 희생하노라 하고 큰소리치지 마십시오. 피곤하게 만드는 소리입니다. 나는 이렇게 큰 사랑을 받고 있노라, 이 엄청난 사랑 안에 내가 있노라----받는 마음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뿐더러 그 사랑의 응답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여기에 사랑의 참열매가 있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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