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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받는 요인(야고보서 1 : 13-15)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 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젊은 아이들을 보느라면 안쓰러울 때가 참 많습니다. 어느 때에는 사랑을 한다나 연애를 한다나 하고 밝게 지내다가도 또 어느 때에 보면 무슨 일로 인지 때아니게 훌쩍거리는가 하면 죽는다 산다 하며 속을 끓이고 안달복달합니다. 이런 경우, 제 깜냥에야 죽기살기로 매달릴 만큼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겠지만, 어른들이 그 꼴을 보면 쓴웃음이 나올 때가 많습니다. 자신도 젊은 날에 똑같은 일을 겪어보았기 때문입니다. 지내놓고 보니 별것이 아니거든요. 누구나 다 겪는 일인데도 나 혼자만 겪는 일인 것 같고, 철이 들고 보면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 일이 그 당장에는 그렇게도 심각한 것입니다. 이게 어디 젊은이들만 이겠습니까? 좀 외람 된 말씀입니다 마는, 저도 이제 목회생활 30여 년이 되고 보니 많은 교인들을 접하게 되었고, 그러느라니 이제 와서는 무엇인가를 좀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사람은 누구 할 것 없이 그 나름의 문제, 그 나름의 고민이 있게 마련입니다. 없는 사람이 없습디다. 어떤 사람은 이런 문제로 시달리고, 어떤 사람은 저런 고민을 안고 있습니다. 그런데 목회자인 제가 볼 때에는 이 사람의 이런 문제나 저 사람의 저런 고민이나 따지고 보면 모든 사람이 다 공통적으로 당하는 것에 지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당자는 생전처음 당하는 일인 것처럼, 그리고, 남들은 아무도 당하지 않은 일을 혼자서만 당하는 것처럼 심각하게 번민하는 것입니다.
예삿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무슨 시련을 만났을 때, 그 시련이 나에게만 있는 것이라고 착각할 때에 우리는 그 시련을 참고 견디기가 어렵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시험에 들었다" "시험에 빠졌다"라는 말은 이런 경우에 하는 말입니다. 결코 나 혼자서만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들도 다 당하는 시험을 나도 당하고 있을 뿐입니다.
앞서 말씀한 바와 같이, 사도 야고보도 오랜 목회생활을 통하여 많은 사람의 많은 문제를 보고, 듣고, 함께 기도하고, 해결하고 하는 동안에 '이것이 제일 중요한 문제로구나' 생각하게 된 것을 하나하나 다룸으로써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앞에 나아오고 또 바른 신앙으로 성장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야고보서를 썼던 것이고, 첫번째로 들고 나온 문제가 '시험' 이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시험' 때문에 고민하는 것을 그는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랜 목회 경험을 바탕으로 확신에 차서 권면 했습니다.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이렇게 긍정적으로, 밝은 면으로 말씀했습니다. '시험은 좋은 것이다' '시험은 두려워할 것이 아니다' '시험은 복된 것이다' '시험을 견디어내면 그 열매는 아름다운 것이다' 라는 것이 그 가르침이었습니다.
이에 반하여, 오늘의 본문에서는 이제 시험에 넘어지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시험' 에 대하여 부정적인 면, 어두운 측면을 들어 말씀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시험을 이긴 자와 그 결과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했으나, 오늘의 본문에서는 시험에 넘어지는 자에 대하여, 넘어진다면 그 시험이 문제가 되는데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지, 넘어지면 어떤 모양으로 넘어지는지-이런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시험에 대하여 경고(警告)하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야고보는 먼저 시험의 근원을 밝힙니다. 무엇 때문에 시험을 당하는가, 시험이 어느 길로 오는가, 그 길목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시험의 근본 원인은 나 자신이라고 그는 말씀합니다. 원인은 세상이 아니요, 환경도 아닙니다. 바로 나 자신인 것입니다. 시험은 바로 나 자신으로부터, 내 마음으로부터 비롯한다는 것을 명심하여 잊지 말 것입니다. 결코 시험이 다른 데로부터 비롯된다고 착각하지 말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심각하게 말씀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19절)." 반복해서 이 말씀을 하고, 그리고 깊이 탄식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24절)." 로마서 7장에는 이처럼 바울의 처절한 고통이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에게는 지금 두개의 내가 있다, 은혜로운 내가 있는가 하면 은혜롭지 못한 내가 있는 것이다.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채 줄곧 불의의 길로 유혹의 길로 이울어지는 성향이 있다. 아직도 뿌리뽑지 못한 것이 있다-그는 이러한 자신을 숨김없어 털어 내놓고 있습니다. 이런 솔직함에서도 바울은 위대하다 하겠습니다.
여러분, 모든 유혹의 원인, 미혹 당하는 원인은 근본적으로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이겨낸다 이긴다 하지만, 그실 제일 이겨내기 어려운 것이 나 자신입니다. 그러나 이겨내야 합니다. 유혹은 어느 것이나 매혹적으로 따라옵니다. 매혹적인 것이 유혹의 속성이요 특징입니다. 마음을 마구 끌어당기고 휘어잡습니다. 유혹은 아름다워 보이고 훌륭해 보입니다. 처음부터 이렇게 좋아 보이지 않는다면 뉘라서 유혹에 잡히고 시험에 들겠습니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창 3 : 6)" 그래서 넋빠져 쳐다보다가, 자꾸 그리고 시선을 빼앗기다가, 또 보고 다시 또 보고 하다가, 마침내 시험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모든 시험, 모든 죄악, 모든 유혹은 언제나 이렇게 매혹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지 말라(약 1 : 16)" 경고합니다. 조심하라고 경고합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14절)." 그런즉 나 자신을 잘 다스려 이겨내야 하는 것입니다. 끝내 나 자신을 이겨내지 못하고 한번 유혹에 빠져 시험에 들고나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처음에는 나 스스로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죄를 짓지 않을 수도 있고, 어느 정도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가 있었습니다마는, 한번 두 번 회개하지 않고 자꾸 끌려 들어가다 보면 이제는 아예 구제불능의 상황에 봉착하고 맙니다. 이제는 나오려고 해도 마음대로 나올 수 가 없습니다. 마치 함정과 같아서 일단 빠지게 되면 나오기가 여간 어렵지 않은 것입니다.
'회개에는 왕복거리가 필요하다' 라는 말은 유혹의 그러한 속성 때문입니다. 모름지기 회개에는 왕복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한두 걸음을 떼어놓은 상태라면 되돌아 나오기가 그런 대로 가능합니다마는, 서너 걸음이면 한두 걸음을 떼어놓았을 때와는 또 다를 것이요, 한참을 나아갔다면 되돌아 나오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깊숙이 빠져들어 가면 갈수록 회개하기가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나이 많은 재벌 한 분을 알고 있습니다. 교회를 좋아하고 찬송가를 좋아하여 가끔씩 듣기도 하는, 기독교에 대해서 대단히 호의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교회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무슨 모임에선가 우연히 제가 그분 옆자리에 앉게 되어 슬쩍 물어 보았습니다. "회장님, 교회에 나오십시오. 교회에 대해서 그렇게 좋은 뜻을 가지고 계시면 직접 나오셔야지요. 이대로 빨리 끝나버리면 어쩌겠습니까?" "물론 나가야 되겠습니다만……" 그러면서 나가지 못하는 이유를 솔직하게 털어놓습니다. "나는 워낙 죄가 깊어놔서 회개하기가 참으로 힘이 듭니다." "강도라도 주님 앞에 나오면 회개하고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강도라면 오히려 회개하기가 쉬울 것 같습니다. 나는 워낙에 농사를 잘못 지었습니다." 제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의아해하자 자신의 속 깊은 사연을 털어놓습니다. "내게 여자가 너무 많습니다. 돌아가면서 씨를 뿌려놓았어요." 농사를 잘못 지었다는 말은 알고 보니 서자(庶子)가 많다는 말이었습니다. 이제 와서 회개한다고 해도 그 여자들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요, 잘못 뿌려놓은 씨앗을 되 거둘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이들, 이제 내가 교회에 나가면 '죽을 때가 되니 천국에는 가고 싶은가보다' 라고 비웃을 것입니다.
또 그런 내가 교회에 나가면 교회도 망신을 당하고요." 가만히 보니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도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회개도 어느 정도라야 가능합니다. 너무 깊이 들어가 놓으면 청소하기가 이렇게 힘이 듭니다. 그래서 회개에는 왕복거리가 필요합니다. 본문은 말씀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15절)." 죄가 장성하면 끝입니다. 빠져나올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조심하라"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유혹은 어디로부터 오는가-이제 이것을 생각해봅시다. 앞서 말씀한 바와 같이 유혹의 원인은 근본적으로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내 마음의 자세가 문제입니다. 시험도 똑같습니다.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진실을 찾지 못하고, 죄를 남에게 전가하고, 핑계하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죄지은 아담과 하와의 경우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 명하신 나무의 실과를 먹은 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시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창 3 : 11)." 이때 아담이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제가 따먹었습니다”라고 솔직하게 자백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마는, 그는 죄를 하와에게 전가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창 3 : 12)." 하와 또한 뱀한테 원인을 돌리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된 뿌리깊은 죄악이 이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책망과 진노가 있었습니다. "제가 따먹었습니다. 제 아내의 잘못은 제 잘못입니다"-아담이 이러한 태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왔더라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적어도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는 일까지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애초에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따지고 들자면 아내가 준 것이라고 반드시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먹지 않으면 그만이 아닙니까? 그럴진대 무슨 딴소리요, 웬 변명입니까? 누구에게 죄를 전가하는 것입니까? 회개하지 아니할 때에 죄의 원인을 남에게 전가하려고 듭니다.
유혹이 참으로 무섭습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결과적으로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는 말입니다. '이 에덴동산에서 나 혼자 살도록 내버려두시지 왜 저 여자를 만들어주셔서 이런 일이 있게 하십니까?'-'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까지 하던 아담이 일이 이쯤 잘못되고 나자 하나님까지 원망하고 나옵니다. 함께 하라고 여자를 만들어주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무릇 원망은 자꾸 거슬러 올라가게 마련입니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남이 탓이요, 좀더 나아가면 조상 탓이요, 마침내는 하나님 탓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원망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됩니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원망하는 죄를 지으면 안 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지은 죄도 바로 이 원망입니다. 이것은 아주 치명적인 죄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죄를 짓고 나서 변명하고 핑계하는 것에는 심리학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먼저는 다른 사람의 잘못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담이나 하와도 같습니다. 나 때문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원인이 있습니다. 이렇게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변명이 있습니다. 혹 부부싸움을 하면서도 그렇습니다. 나야 본디 좋은 사람인데 당신하고 살면서 나빠졌다고, 그 성격 나빠진 것까지 상대방에게 원인을 돌립니다. 본디가 배냇병신이지 그것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탓이겠습니까? 그럼에도 남에게 전가하려고 합니다.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둘째는 도저히 어쩔 수가 없었다고 환경 탓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지요. 지난 다음에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진정 그 길밖에 없었습니까? 얼마든지 안그럴 수가 있었습니다. 환경 탓이 아니요 원인은 나에게 있습니다. 가난하면 도적질을 해도 됩니까? 화나면 살인을 해도 됩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절대로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원인을 환경 탓으로 돌리는 것은 잘못된 자세입니다.
셋째는 내 죄를 정당화하려는 것입니다. 나만 그런가요, 다 죄인이 아닙니까?-아주 보편화한 버릇입니다. 모두가 죄인이라고 해서 내 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내 죄는 내 죄입니다. 나 아닌 무엇이 핑계가 될 수는 없습니다.
넷째는 실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본디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만 정신이 깜짝하여 실수를 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연세대학교 앞에 있는 공중전화 부스에서 일어난 사건도 그렇습니다. 사람이 많이 기다리고 있으니 용건만 간단히 통화하자고 한 아주머니가 말하자 전화를 걸던 청년이 발끈하여 그 아주머니를 칼로 찔러 죽였습니다. 신문에 크게 나서 많은 사람들이 걱정을 하였습니다마는, 그 청년 이야기를 들어보면 참으로 한심합니다. 자기는 나쁘다는 말을 들어본 일이 없는 착한 사람이었는데, 그 순간에는 자기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순간적으로 저지른 실수였다고 하지만 그것이 과연 실수이겠습니까? 정말로 어쩔 수 없었습니까? 우리가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오랫동안 내 속에 누적되어온 것이 있습니다. 누적되었던 불만, 불평, 초조, 불안이 어느 순간에 터져버리는 것입니다. 본디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만 잠깐 실수한 것이다-통하지 않습니다. 알든 모르든 잠재적으로 누적된 죄의 원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일시적인, 우발적인 실수, 사람에게도 통하지 않지만 하나님께는 더더욱 통하지 않습니다.
다섯째는, 인간도 누구도 완전할 수 없다, 근본적으로 실수할 수 있는 존재다-이렇게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흔히들 '사람이므로'라고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막 14 : 38)." 이렇게 밀어붙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누구도 완전할 수 없다는 핑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 : 48)"라고. 우리는 충분히 시험을 이길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죄를 지은 것은 나이지, 애초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도록 창조된 것은 아닙니다.
여섯째는 마귀에게 원인을 돌리려는 것입니다. 마귀의 시험이 있어서 어찌할 수가 없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태도입니다. 또한 타의에 의해서, 압력을 받아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도 핑계합니다. 불가피하게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입니다. 몸은 불가피할 수 있어도 마음은, 곧 내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참으로 맹랑한 변명이 하나 있습니다. 저지른 것이 죄가 될 줄 몰랐다고 하는 변명이 그것입니다. 몰랐다고 하면 다 되는 것입니다. 정말로 몰랐다면, 그 모른 잘못도 있겠습니다마는, 모를 리가 있습니까? 다 알고 있었습니다. 사후(事後)에야 나는 몰랐노라 하고 변명을 하지만, 통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설사 몰랐다는 것이 정말이라 해도 통할 수 없습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의 뜻에서 멀리 떠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을 만큼 타락해 있다는 것의 반증이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보십시다. 이 모든 핑계를 종합해보면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요, 창조주를 원망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섭리를 원망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원망과 불평은 하나님 앞에 가당치도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큰 죄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이러한 시험과 유혹에 어떠한 자세로 임해야 합니까? 유혹을 당함에 어떠한 마음가짐이어야 하는가? 본문에 암시되어 있는 해답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우선은 나의 잘못이라고 인정하여야 합니다. 다윗 왕의 경우, 그의 위대한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다윗 왕은 훌륭한 사람이요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밧세바로 유혹에 빠져 죄를 짓고 말았을 때에는 그 역시 이렇게든 저렇게든 변명할 법했습니다. 나는 본디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만 깜빡 실수를 하였다. 나는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그여자가 나한테 눈치를 보였다, 내 앞에서 발가벗고 목욕을 하다니 요사스럽지 않은가-말하려들면 할 말이 있을 수 있는 다윗입니다. 그러나 그의 참회록을 보면 밧세바를 원망하는 소리는 한마디도 없습니다. 말끝마다 '내가 죄인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합니다. 다윗의 위대한 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어여삐 보셨습니다.
여러분, 나에게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내가 아무리 엄청난 죄를 지었다해도 그 책임을 남에게 돌리지는 말아야 합니다. 남에게 돌리면 회개가 안됩니다. 남의 책임까지 지지는 못할지언정 내 책임까지 남에게 전가해서는 안됩니다. 내 죄의 원인이 다른 데 있다고 핑계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내 죄를 먼저 인정하고 나의 책임 아래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세리의 회개기도와도 같은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첫번째 자세입니다.
또한, 불평과 원망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지은 죄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결과나 불행에 대해서는 내가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가만히 보면 죄를 지어놓고 회개한답시고 하면서 회개할 마음보다는 형벌을 피할 생각이 더 많습니다. 그저 아이들이 잘못을 저질러놓고 매 안 맞으려고 살살 빌며 도망가는 것과도 같습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회개란 '내가 잘못했습니다, 내가 맞아야 합니다, 얼마든지 때리십시오'라고 스스로 드러내고 자복 하는 것입니다. 때리지 마십시오,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이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태도입니다. 어떤 형벌이든지, 설령 내가 생각한 것보다 무겁다 해도 달게 받는 자세, 죽으라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내 죄를 용서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죄 용서받고 죽는다면 얼마든지 죽겠습니다-이것이 회개요, 그리스도인의 마음입니다.
탕자가 돌아올 때, 아무 조건이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나를 죽일 것인지 살릴 것인지 알 바가 아닙니다. 다만 '나는 죄인입니다. 아버지 뜻대로 하십시오.' 이런 마음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아무 조건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너무도 조건이 많습니다. 이유도 많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는 너무도 간사합니다. 진실하지 못합니다. 회개하는 데에 이유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옳으십니다. 원인은 내 욕심에 있습니다.
회개하지 못한 내 죄에 있습니다. 뿌리깊은 죄악에 젖어 있는 나에게 원인이 있습니다. 당신은 선하십니다. 당신은 오늘 나로 하여금 이 죄를 알게 하셨고 여기서 내 행위를 중단시키셨습니다. 내가 진실을 찾도록 해주셨습니다. 당신은 선하십니다. 하나님이 옳으십니다. 나를 때리신 것도, 나를 실패하게 하신 것도 잘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하나님의 선하심은 백 퍼센트 인정해야 합니다. 회개하는 중에나 죄악을 뉘우치는 중에 조금이라도 은혜를 부정하는 마음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 큰 은혜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섭섭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그래야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모름지기 단호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가져야 할 신앙이 있습니다. 죄악을 이길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내게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나에게 이길 힘이 충분하게 있습니다. 싸워보지도 않고 '인간이므로' 미리 넘어지고 지레 주저앉아 버렸습니까? 그래서는 안됩니다. 충분히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나는 가지고 있습니다. 어떠한 시험, 어떠한 유혹도 나는 이길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만일에 이기지 못할 것이면, 정녕 그런 시험이라면 피할 수 있는 길을 하나님께서 열어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믿고 출발하여 합니다. 미리부터 약한 마음으로 불가능할 것이라든가, 다른 사람도 다 넘어졌으니 나도 별수없이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새가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은 막을 수가 없지만, 내 머리 위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다'라고 마르틴 루터는 말했습니다. 어쩌다가 언뜻언뜻 지나가는 유혹이야 어쩌겠습니까마는, 그것에 집착하여 끝내 정욕이 되고 집념이 되고 의지가 되어서 죄를 짓게 되는것은 내가 막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욕심을 잉태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잉태하고 말았습니다, 잉태했다면 자라지 말았어야 하는데 장성합니다. 자꾸 자라고 있습니다. 필경은 사망에 일고 맙니다. 우리는 이를 단호하게 이기되, 말씀과 신앙으로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말씀에 의지할 때에 성령을 힘입어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유혹을 이기신 것처럼 우리도 말씀으로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거뜬히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마지막 네 번째로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막 14 : 38)." 무슨 말씀입니까? 나 혼자의 힘으로 이길 수가 없습니다. 기도로 능력을 얻어야 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주기도문을 외어야 합니다.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실 때, 비로소 내가 이길 수 있습니다. 내 힘으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또 하나의 교만입니다.
죄 중의 가장 큰 죄, 무서운 죄가 기도하지 않는 죄입니다. 나는 기도하지 않고도 시험을 이길 수 있다, 나는 기도하지 않고도 무사할 수 있다, 나는 기도하지 않고도 승리할 수 있다-참으로 가당찮은 교만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참으로 비참하게 실패했습니다마는, 9원인을 추궁해 올라가 보면 그가 시험에 넘어진 그 죄가 아니요 기도하라시는데 하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 실패의 원인이 기도하지 않은 데에 있다고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울적한 마음이니, 원인 모를 분노니, 이상한 생각이니 하는 것들이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임을 헤아릴 줄 모릅니다. "요즘 제가 기도를 게을리 했더니 이런저런 나쁜 생각이 들고 시험에 빠지는 것 같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을 만나보기가 어렵습니다. 누구 때문이라느니, 무엇 때문이라느니, 건강이 나빠져서 그렇다느니, 이 소리 저 소리 쓸데없는 소리가 많습니다. 다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중단했기 때문이요 기도를 게을리 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말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유혹에 대해서 말씀하는 가운데 대표적인 비유 두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잠언과 시편에서 볼 수 있는바, 첫째가 사냥꾼의 올무요, 둘째가 음녀(淫女)입니다. 사냥꾼이 올무를 던집니다. 올무는 미끼입니다. 미끼는 언제나 탐스러워 보이게 마련입니다. 이것을 물었다가는 대번에 낚아채입니다. 사냥꾼의 올무, 낚시 미끼와 같은 이것이 바로 유혹입니다. 또 하나, 길거리에서 남자들을 꼬드기는 음녀에 비유합니다.
이것들은 언뜻 보아 매력적입니다. 이런 것에 미혹되는 나약한 심령,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 향한 마음이 건강하지 못하기에 자꾸만 세상것으로 기우는 것입니다. 혹자는 '인간은 비탈이 놓여 있는 존재와 같다'라고 합니다. 위에서 잡아끌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위로 향하는 힘이 조금이라도 약해지면 밑으로 떨어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본문 13절에서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악한 마음으로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하여 시험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시험받는다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좀 어려운 일을 당하면 내가 십자가를 진다고 합니다마는, 그런 싸구려 십자가는 있지도 않습니다.
다 무엄하기 짝이 없는 태도입니다. 시험은 영어로 'examination' 입니다. 실력을 측정하는 것, 곧 'test' 입니다. 'Examination means test.'-시험은 테스트입니다 마는, 이 시험을 치르면서 삐끗하여 커닝을 하게 되면 그 시험은 'temptation' 이 되는 것입니다. 딴 생각이 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많은 시험을 당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의 자세요 내 신앙입니다. 내 신앙과 내 진실만 건전하다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신앙이 약해지고 진실에 문제가 있을 때, 시험에 넘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유혹'을 '욕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욕심, 헬라말로 '에피튀미아'라고 하는 이 말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필요'라는 뜻과 '욕망'이라는 뜻이 그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십시다. 잠자는 것은 정상적인 욕망입니다. 누구에게나 자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지나치면 게을러집니다. 잠을 좋아하여 늘상 자려고 듭니다. 이럴 때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먹고 싶은 욕망도 똑같습니다. 지나친 탐식은 병의 원인이 됩니다. 이 또한 죄입니다.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욕망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시험을 받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됩니다.
무릇 시험에 드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욕심 때문입니다. "원인은 내게 있습니다"-이렇게 고백할 때에 거기에 길이 있습니다. 모름지기 욕심을 잉태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잉태했으면 장성하지 못하도록, 자라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욕심을 내버려두고, 자라는 것을 내버려두고, 욕심이 의지하는 것을 내버려두는 즉 마지막에는 빠져 나올 수가 없게 됩니다. "사망을 낳느니라." 그러므로 단호하게 미리 차단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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