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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경을 인도하는 소경(마태복음 15 : 12 - 14)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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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경을 인도하는 소경(마태복음 15 : 12 - 14)

 

이에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모든 비유가 다 그러하듯이 비유는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것을 설명하는 데에 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소경을 비유로 하여 영적인 진리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비유는 하찮은 동식물에서부터 우리 몸의 기능에 이르기까지 그 소재가 참으로 무궁무진하면서도 실제적으로 익숙한 것이어서 당시의 사람들은 물론 2천 여년이 지난 오늘을 사는 우리들까지도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그러면서도 깊은 진리를 말씀하고 있는 그 지혜와 말씀의 권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과 소경의 만남을 여러 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따르면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을 고쳐 주셨는가 하면 귀신 들려 벙어리 된 사람 등 어쨌든 앞 못 보아 고생하는 장님들을 만나실 때마다 눈을 뜨게 해주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 소경은 신체적으로 매우 불행한 사람들 중의 하나로 우리가 많이 볼 수 있는 그러한 시각 장애자인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소경을 비유로 하늘 나라 진리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먼저 이 장님에 대하여 조금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사람이 지식을 얻으려고 할 때에 필요한 기능의 첫째는 본다고 하는 눈이 아니겠습니까? 먼저 눈으로 본 다음에 나머지 오관으로 냄새를 맡아보기도 하고 만져보기도 하여 지식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한번 깊이 생각해 보면 가령 맛을 본다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은 입안에 들어가야만 알 수 있는 것이기에 완전한 것이 못됩니다. 또한 코로 냄새를 맡는다 하더라도 그 냄새가 코에게까지 옴으로 맡게 되는 것입니다. 손으로 만지는 감각도 내 손이 직접 닿아야만 그 촉감을 알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는 전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손으로 만져서 알 수 있는 것은 손을 통하지 않고는 알 수가 없으며 그러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이 손에 닿으므로 벌써 늦어지는 문제가 생기게도 됩니다. 그것은 아무 위험한 것이 손에 닿았을 때에는 이미 끝난 일이 되어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위험한 것은 손에 닿기 전에 알았어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하면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러면 보다 먼 것에 대한 감각 기능이 무엇이냐 할 때에 그것은 귀로 듣는 청각입니다. 귀로 듣고 가까이 오는 것과 멀어져 가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귀로 아는 것도 역시 내 인식의 대상으로부터 그 소리가 내 귀에까지 와서 닿아 울림으로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오관 중에서 인식의 대상은 움직이지 않고 자체의 기능만을 발휘하여 지식을 얻게 하는 것은 많은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 하나는 손으로 만지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식의 대상과 나 사이를 두고 생각할 때 예를 들어 여기 이렇게 마이크가 있지만 이 마이크가 마이크의 냄새를 풍겨 주지 않는 한 내 코는 이것을 알아보는 데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또한 이 마이크가 소리를 내어주지 않으면 귀는 여기에 대하여 있으나마나 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대상의 작용에 관계없이 능동적이고 일방적으로 알 수 있는 길은 손으로 만지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인식 활동을 하는데에 있어서의 기본적인 논리가 됩니다.

이제 이렇게 볼 때에 무엇보다도 이 눈이라는 것은 가장 멀리 있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감각 기능입니다. 그러면서도 또한 다른 오관에 비해 가장 완전하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다른 것을 보면 거의가 다 불완전합니다. ! 눈을 감고 손으로 만진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얼마나 알겠습니까? 또한 코로 냄새를 맡는다지만 눈을 감고야 얼마나 정확하게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 때문에 눈으로 아는 것이 제일 많이 아는 것이요, 또한 가장 먼 것까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으로서 가장 먼 곳의 것을 알아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태양보다도 먼 거리에 있는 별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별빛에 의하는 것이라는 다른 점이 있기는 합니다마는 어쨌든 이 눈으로 엄청나게 먼 곳까지를 볼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기능을 상실한 시각 장애자를 보게 되면 시각이 무능해진 대신 대체로 다른 오관이 매우 발달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나오시는 분 중에도 그런 분들이 몇 분 있습니다마는 잘 아시는 대로 손끝의 감각이 얼마나 예민한지 점차로 된 성경 찬송가를 손끝으로 더듬어 읽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보통 건강한 사람들보다 귀가 발달하여 놀랍도록 잘 듣고 섬세하게 분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각 장애자가 가장 불행한 것은 아무 것도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께서 소경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다 갖추었으나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가 없게 되면 나머지는 다 합친다 해도 절반의 역할을 못하고 비참해지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결국은 본다는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이에 오늘 본문 말씀에도 보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처지라면 어느 순간에 가서는 구덩이에 빠지는 결정적인 큰 실수를 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고 보면 더 발전시켜서 생각해 볼 때 이것은 경험 없이 즉, 손으로 만지지도 않고, 입으로 맛을 보지도 않으며 소리로 들은 바도 없이 알 수 있는 감각이 눈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이 시각 기능이 없다면 경험하지 못한 것은 다 모른다는 말이 됩니다. 한 마디로 말하여 내가 눈으로 볼 수 없는 처지에서 내가 만지는 것밖에 알 수 없다고 한다면 못 만진 것은 다 없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계가 얼마나 좁아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주 깜깜해져서는 이렇게 넓은 세상이 그에게는 아주 작고 좁은 세상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세상을 넓게 보고 넓게 인식한다는 것은 본다는 데에 기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봄으로써 이 세계가 넓고 아름다우며 먼 거리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안다는 것! 이 얼마나 중요하고도 즐거운 일입니까?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이것을 완전히 보지 못하는 사람들과 또한 보기는 보면서도 많은 장애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의 친구 중의 한 사람도 어렸을 때에 약을 잘못 먹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아무튼 책을 보면서도 20센티만 멀어져도 잘 보이지를 않아서 아예 코밑까지 바짝 대어놓고 읽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경을 껴도 그저 조금 나을 뿐이지 그 이상은 안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옆에서 보노라면 안됐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러나 그 본인은 그렇게 안되었다는 자체를 모르고 있어요. 왜냐 하면 온 세상을 뽀얗게 그러니까 대충 보고 사는 것이란 말입니다. 아무리 경치 좋은 곳에 갔어도 그저 그렇게 뽀얗게 보는 것으로 그 세계에 만족하며 익숙해져 있는 것입니다.

사실을 두고 생각해 볼 때 환하게 잘 볼 수 있었던 눈이 어느 순간 갑자기 그 시력을 잃고 깜깜해졌다면 이 얼마나 비참한 일이겠습니까? 반면에 시력이 나빠서 약간의 먼 것도 제대로 볼 수가 없어서 눈앞의 것만 대충 보며 살다가 어느 날 한 순간에 밝은 눈으로 환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면 그 얼마나 기쁘고 놀랍겠습니까? 그런데 고마운 것은 잘 길들여져서 그 이상은 모른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자기 세계가 이러니 다른 사람들도 그렇거니 하고 사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지금 말씀하시는 의도는 그 사람의 시각의 능력에 따라서 넓고 멀리 살수도 있고 아니면 좁고 답답하게, 비참하게 살수도 있다고 하는 말씀인 줄로 압니다. 이렇게 볼 때에 여기에서 본다고 하는 단순히 육체의 시각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더 중요한 시선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인 눈입니다. 그러면 이 영적인 눈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지식의 눈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안다는 면에서 지식을 놓고 볼 때에도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좀더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것 사이에는 그 결과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모르고 본다는 것은 아무 것도 못 보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지식이나 지혜에 있어서도 장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 못 보는 사람만이 장님인 것은 아닙니다.

제가 늘 생각하고 자주 하는 이야기입니다마는 우리 나라 고속도로를 다니다가 보면 중심부에 분리대를 만들어 거기에 잔디를 심었었는데 근년에 와서는 그것을 파내느라고 벌써 몇 년째 공사를 하고 있어서 차량 소통에 여간 불편을 주고 있지 않습니다. 그 많은 돈을 들여서 심을 때는 언제이고 이제는 그것을 일일이 파내고 콘크리이트를 하느라고 또 많은 고생을 하니 돈도 돈이지만 왜 이렇게 되었느냐 말입니다. 이 콘크리이트 분리대가 구미 각국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설치된 것이고 보면 이러한 현상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문제입니다. 이제 내 스스로 못하겠으면 남이 하는 것을 보고라도 했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모두가 다 지혜가 부족한 탓입니다. 그 때문에 아스팔트길을 잘 만들어 놓았다가도 얼마 안 가서 또 다시 그것을 파내는 장면을 대도시 한복판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는 곧 앞을 내다보는 지혜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그저 만들었다, 뜯었다하며 불편만 더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좀 멀리 바라보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안목이 없이 10, 20년 후 꼭 당하고 부딪힌 다음에야 아이고 이럴 줄 알았으면 그렇게 할 걸하고 나오니 이거야말로 비참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공부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그렇고 물질을 쓰는 씀씀이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그 때문에 이럴 줄 알았으면 공부할걸 한다든지, 돈 있을 그 때에 절약할 걸하고 후회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다 멀리 보지 못한, 지혜의 장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가장 귀중한 핵심적인 진리는 무엇보다도 영적인 장님을 말씀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 940절 이하에 보면 앞서 예수님께서 장님에 대한 거론을 하시자 이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이 "우리도 소경인가"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대답이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차라리 육체적으로 장님이 되었더라면 예수님 앞에 나와서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함으로 눈을 뜨게 되었을지도 모르겠으나 육적으로 눈을 뜨고 본다고 하니 죄가 그대로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은 문자대로 사실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 때문에 돈이 있다고 인격이 있는 것은 아니예요. 그런데도 돈이 몇 푼 있다고 인격이 있는 것으로 스스로 착각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알고 보면 사실은 그 돈 때문에 그 앞에 와서 존경하는 양 굽신 거리는 것이지 그 인격 앞에 굽신 거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인격이 대단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누가 보아도 착각입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의 유행어에 "착각은 자유"라는 말도 있습니다마는 그것은 분명 문제입니다.

그런가 하면 세상 지식을 풍부히 가졌다 하여 그것이 영적으로도 지식이 있는 것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신령상의 지식은 영점이예요.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 지식에 대한 공부는 그렇게 많이 하지 못했어도 영적인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세상 지식 좀 가졌다고 하여 이것 때문에 교만해져 있는 동안 어느 사이에 영적으로는 아주 비참한 소경이 되고 만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차라리 너희가 소경이었으면 좋을 뻔하였다. 그러나 본다고 하니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이 얼마나 귀중하고도 두려운 말씀입니까?

여기에서 오늘 본문 말씀의 사실상의 시작이 되는 151절 이하에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하면서 장로의 유전에 대한 질문을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께서는 이 외식주의자들을 앞에 놓고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는 말씀을 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영적으로 완전히 장님인 것입니다. 왜냐 하면 이는 151절로부터의 문맥에 잘 나타나 있는 대로 유전과 계명에 있어서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라고 계명을 저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장님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계명이지 유전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지 인간적 지식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적 지식과 합리주의를 따라가는 동안에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있으며 어느 사이에 다 잊어버렸으니 이게 바로 장님이란 말입니다. 중요치 않은 것을 중요하게 여기느라고 오히려 중요한 것은 중요치 않게 여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요즈음에도 많습니다마는 이것은 분명 가치관에 있어서의 소경입니다.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를 분별할 줄 모르는 정도라면 이 얼마나 비참한 존재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지금 예수님께서는 저들의 외식주의와 교만이 마침내는 저들로 하여금 영적인 장님이 되게 하였다는 것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의하면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면"이라고 하셨는데 여기에서 소경을 인도하는 그 소경은 직설적으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마는 전체적인 흐름으로 볼 때에 일단은 유대 사람들의 교만을 책망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에 로마서 217-24절 말씀을 보면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고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저들 유대 사람들은 자기들이 소경을 인도하는 사람으로 자부하고 있습니다. 이는 왜냐 하면 이방 사람들은 모두 소경이라는 것이지요. 소경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르고 우상을 섬기며, 도덕적으로 타락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지신이 짓고 있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안다면 그렇게 죄를 지을 수가 없는 것이기에 이방사람들이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한 모습을 장님이라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상대적으로 우리 유대 사람들은 눈뜬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소경을 인도하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더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들을 보는 사도 바울의 말은 너희도 꼭 같은 소경이더라 하는 판단과 책망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예수님의 대답도 그와 같은 말씀입니다. 유대 사람들은 분명히 종교적인 차원에서 이방 사람들을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즉 말하자면 소경을 인도해야 할 책임 있는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의하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으니 이는 곧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지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적어도 소경을 인도하는 자라면 그 자신은 소경이 아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엇보다 빛이 있어야 하고 빛을 보아야 인도하는 일이 가능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그는 소경을 인도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저는 한 12년 전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비모스 비이치라는 경치 좋은 마음에 있는 한 교회에 가서 결혼 주례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에 주례를 하면서 가만히 보니 오르간을 반주하는 분이 소경인데 아주 잘하는 솜씨였어요. 그리고 이 오르가니스트를 큰 세퍼어드 개가 인도하고 다니는데 얼마나 영리한지 목에 매인 줄 하나만 쥐고는 집에 가자하고 출발하게 되면, 신호등 앞에 가면 쉬어 가고, 오르간 연습을 하거나 할 때엔 "여기 앉아 있어"하고 한마디 하면 끝날 때까지 앉아 있는 겁니다. 이 개는 훈련을 많이 한 개로 값으로도 굉장히 비싸다고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개가 볼 수 있는 눈이 있기 때문에 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소경을 인도하려면은 비록 개라 하더라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입니까?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인도하는 지도자가 되려면 우선 자기 지식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 때문에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고집스럽다는 말을 듣기도 하는 것은 이는 자기 지식, 자기 의견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저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습니다 하는 식이 되어서는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지도자는 언제 어디서든지 자기 확신을 가지고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경은 그렇게 되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지도자로서 중요한 것은 자기가 먼저 경험한 바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따라가면서 뒤늦게 경험을 하느라 엎치락 뒤치락할 수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다음 또 한가지 지도자로서의 필수 조건은 멀리 내다보는 환상이 있어야 합니다. 소위 말하는 비젼(Vision)이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 됩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10, 20년 후, 가능하면 100년 후에까지라도 멀리 내다볼 수 있을 때에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아예 1년 앞의 일도 생각지 못한 채 그때 그때 닥치는 대로 엎치락 뒤치락한다면 어떻게 그것을 믿고 DTXT顫蕙箚¥ 수가 있겠습니까? 지도자로서 또 지도자와 마찬가지로 그저 눈앞에 놓인 현실의 일만을 하고, 경험한 일만 알 수 있는 정도에 그친다면 그에게는 결코 지도자의 자격은 없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지도자가 있다면 그의 지도를 받는 자나 하는 자나 다 함께 구덩이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결국은 둘이 함께 멸망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라는 이야기인데 우리는 결코 이렇게 끝을 맺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지도자만은 눈을 뜨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다 뜨고 있으면야 오죽이나 좋겠습니까마는 설령 다는 못 딴다 하더라도 지도자만은 눈을 떠야 그를 따르는 눈 못 뜬 사람도 눈을 뜬것과 같은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지혜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게 됩니다. 설령 우리가 지금은 눈을 뜨지 못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게 되면 거기에서 눈을 뜨게도 되고 또한 눈을 뜬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영적인 안목이 필요한 것입니다. 세상적 지식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영적인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영적인 안목이란 어떤 것이냐 할 때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첫째, 종말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마지막, 곧 이 세상 끝을 볼 수 있어야 하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위대한 지도자가 되시는 것은 바로 영원한 나라를 보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2천여 년 동안 우리를 인도해 오셨고 앞으로도 계속 인도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를 따라가는 일은 절대로 후회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 하면 예수님께서는 종말을 다 아시고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우리도 훌륭한 지도자가 되고 싶고 특별히 자녀들을 바로 인도하고 싶지마는 우리는 앞날을 알 수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쉬운 예로 대학 진학을 앞두고도 어느 과에서 무엇을 전공해야 미래에 유용한 공부가 될 수 있을 것인지를 이리 저리 간절하게 물어 보지만 자신있게 대답할 선생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왜 이겠습니까? 그 누구도 미래의 일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유행가 가사의 한 마디인 "케세라 세라"가 아직도 우리 입에서 "될대로 되라"는 말을 대신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할 것이냐 할 때에 그것은 될대로 되는 것뿐 아무도 거기에 대해서는 모른다니 이 얼마나 답답한 이야기입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은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소경됨을 어떻게 면할 수 있느냐 할 때에 그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소경을 면할 수 있는 길이요, 눈을 뜰 수 있는 길입니다. 내가 곧 길이다! 여기에 길이 있으니 이제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그 생활이 눈뜬 생활이 되는 것이며 만일 어느 순간에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등지는 날이면 그 순간으로부터 그는 장님이 되어 마침내는 구덩이에 빠지는 걷잡을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순간, 한시라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서는 아니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이 영적인 안목이란 하나님의 섭리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 곧 하나님의 심판이 어디에 있고 하나님의 구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조용한 것 같으나 무섭게 나타납니다. 정말 심는 대로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조심하여야 합니다. 말이 씨앗이 되어 그대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제 내가 남을 저주했다면 그가 저주받을 사람이 아닐 경우에는 결국은 그 저주가 나에게로 돌아옵니다. 내가 남을 업신여긴 적이 있습니까? 그랬다면 반드시 내가 그 업신여김을 받을 때가 돌아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민감한 영적인 감각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래도 저래도 괜찮으며 죄를 짓고도 잘만 살더라는 심사가 된다면 그것은 이미 장님이 된 것입니다. 진정 영적으로 눈을 뜬 사람은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 그리고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하나님의 심판이 훤히 나타나 있는 것을 보며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감각이 예민한 사람은 작은 한 사건을 보고도 거기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읽으며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영적인 감각이 둔해진 사람은 진작 발등에까지 왔어도 모르는 것이기에 두려움 또한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딱 하고 부딪히고 나면 그때에 가서야 이걸 어쩌나 하지만 그 때엔 이미 늦었어요. 이제는 회개할 기회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보는 민감한 감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볼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 : 28)고 말합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말입니까? 여러분은 매사가 합동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무슨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기다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 후에 분명히 보다 좋은 일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실패하심이 없으십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깊고도 넓은 섭리, 그 경륜을 아는 사람은 어떠한 좌절과 위험의 처지에서도 당황하지 않습니다. 이는 실로 눈을 뜬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이러한 감각, 이러한 눈이 없는 사람은 이 일을 당하면 이것대로 당황하고 저 사건을 당하면 또 그것대로 당황하여, 밤낮 죽겠다며 벌벌 떨고만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 그가 곧 소경을 인도하는 소경이요, 소경에게 끌려가는 소경인 것입니다. 당연히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아보는 눈이 필요했습니다마는 저들에게는 그러한 눈이 없었어요. 기적을 보고도 알 수가 없었고, 말씀을 들어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끝까지 표적을 읽는 눈이 없었기에 저들은 불행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밝은 눈을 뜰 수 있어야 하겠고 나아가서는 앞 못 보는 소경을 인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가 하면, 또한 소경에게 끌려가는 소경! 그러다가 마침내는 둘 다 구덩이에 빠지는 모습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말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의 모습이 거기에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제 우리는 밝은 빛에게로 나와서 눈을 뜨고, 나도 구원에 이름과 동시에 다른 사람, 곧 소경 된 자를 인도하는 밝은 눈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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