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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료 18,185편 ◑/곽선희목사 설교 1,910편

말 아래 둔 등불(마태복음 5장 14절~16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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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아래 둔 등불(마태복음 514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리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불을 켜서 말 아래 두는 자가 없다-빛에 대한 이 말씀과 지난 시간에 살핀바 소금에 대한 말씀은 마치 쌍생아인 양 같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이 두 말씀은 같은 내용을 다른 표현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다같이 그리스도인의 본질에 대하여,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책임, 세상과 그리스도인과의 관계를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소금에 관한 말씀은 세상 속에 들어가 녹음으로써 세상을 변화시킨다고 하는 내적인 변화를 말씀하심입니다. 빛은 높이 있으면서 세상을 향하여 비칩니다. 고고한 자세로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빛에 대한 오늘의 말씀은 빛의 외적이고 사회적인 변화를 말씀함입니다.

우리는 빛을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연적인 빛입니다. 모든 자연적인 빛의 뿌리는 태양입니다. 우리는 태양계 안에서 태양의 빛을 받고 삽니다. 태양의 빛이란 아주 근본적이고, 매우 엄청난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그 빛을 받고 보고 먹고사는 것입니다. 빛의 에너지를 먹고사는 것입니다. 또한 빛을 향해서 자랍니다. 이렇듯 태양이 우리에게 주는 빛의 역할은 엄청난 것입니다.

둘째, 인공적인 빛이 있습니다. 우리가 편리하게 사용하고 있는 전깃불이라든지 촛불, 등불과 같은 인공적인 빛이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인간이 머리로 손으로 만든 것입니다.

세째는 영적인 빛입니다. 이 빛은 정신적인 것이요, 도덕적인 것이요, 신앙적인 것이요, 종교적인 것입니다. 내적인 빛을 말함입니다. 한 마디로 양심의 빛, 밝은 이성의 빛, 판단력을 가진 빛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 , 말씀, 또는 구약성경에서 늘 가르치는 율법이 곧 영적인 빛입니다. 율법이 우리의 마음을 비춥니다. 그래서 마음의 어두움이 밝아집니다.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비춥니다. 우리가 그 말씀을 듣고, 그 말씀과 가까워질 때에 우리의 마음이 밝아집니다. 우리의 생활, 우리의 정신, 우리의 육체가 모두 밝아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밝음의 근원을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밝음은 말씀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을 비교해보아도 확실히 예수 믿는 사람이 더 밝습니다. 이것은 당장 여러분의 주머니만 살펴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의 주머니는 지저분합니다. 담배 때문에 냄새도 납니다. 다른 사람뿐 아니라 자신도 고생입니다. 요즘은 금연구역을 설정하고 있는 공공건물도 많습니다. 제가 얼마 전 독일에 갔을 때, 프랑크푸르트 공항의 대합실에서 보니 거기도 '금연'이라고 써 붙여놓았습디다.

그렇게 넓은 대합실에 담배를 피우는 곳은 딱 한군데로 아주 조그마한 유리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곳에 몇 사람이 들어가 앉아서 담배를 피우는데 참으로 불쌍해 보입니다. 저런 노예가 되다니, 저런 천대를 받다니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잠시도 못 참아서 동물원 우리 같은 곳에 들어가 피우는 것을 보니 참 안되었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밝게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안 믿음으로 해서 우상을 섬기고 우상에 매이며 어둡게도 살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혼사(婚事)에도 어디 가서 물어보고 날짜를 잡는다, 궁합을 본다 하고 자못 번거롭고 야단스럽습니다. 이것이 모두 어두움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밝아지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큰 것이 여성들의 밤 외출입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 마는 될 수 있으면 여성은 밤 외출을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옛날 여성들은 해만 져도 밖에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예수님 덕으로 예수를 믿거나 믿지 않거나 밖에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밝은 세상을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어떤 것이 어두움입니까? 영적으로 어둡다는 것은 무지요, 무능이요, 혼돈이요, 우상숭배요, 싸움입니다. 더러운 행위요, 불화(不和)입니다. 악함과 허무와 저주, 공포, 그리고 이로 말미암은 죄이런 것들이 다 어두움입니다. 어두움과 밝음에 대한 말씀을 우리는 누누이 듣고 배웠으므로 다행히 이들을 쉽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밝고 저것은 어둡고, 밝은 것은 자유요 어두운 것은 속박임을 우리는 압니다.

여러분, 빛의 근원을 생각해봅시다. 창세기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제일 처음으로 창조하신 것이 빛입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자 빛이 생겼다고 창세기는 말씀합니다. 이렇듯 빛이란 모든 창조의 근원이요, 맨처음 있었던 것입니다. 빛이 근본입니다. 빛에 관한 자연과학적인 이야기나 생태학적인 이야기는 여러분이 더 잘 아실 테니 말씀드릴 것도 없겠지요. 우리는 다만 성경에 따라 말씀만을 생각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세상의 빛임을 거듭 강조하여 말씀하십니다.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빛이 세상에 왔으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다"-특별히 요한복음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친히 당신이 세상의 빛임을 밝히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신앙적으로 설명할 때에 흔히 헬라 철학적인 이원론적 세계관이 여기에 나타난 것으로, 헬라 철학적인 방법론이 여기에 비추어진 것으로 해석하려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헬라문화를 아는 사람들에게 신학의 소통을 위한 방편이 될지는 몰라도 예수님을 빛이라고 한 요한의 말씀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이 말씀에는 보다 생명적이고 보다 신학적인 의미가 들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바르다고 할 것입니다. 그 말씀 그대로가 신학적 용어요, 상징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빛이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을 의미합니다. 길이 곧 빛입니다. 우리 인생이 생각하는 길, 인생이 가는 길이 환하게 보입니다. 이렇듯 빛이란 생명과 진리의 길인 것입니다.

또한 빛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사도 요한이 가르치는 말씀 가운데 참으로 중요한 것이 바로 이 심판입니다. 빛은 심판입니다. 어두움에 대한 심판입니다. 빛이 있으면 어두움은 물러가야 합니다. 그리고 빛 앞에서는 모든 어두움이 노출되어야 합니다. 진리 앞에 거짓은 노출됩니다.

사실 앞에 허위는 노출됩니다. 모두 노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요 평화요 기쁨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앞에 모든 증오는 노출되고 맙니다. 슬픔과 탄식까지도 모두 드러나게 됩니다.

좀더 생각해보아야 할 중요한 철학적 문제가 있습니다. '본다'라고 하는 문제가 그것입니다. 우리는 빛이 있기에 사물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다'라고 하는 문제에 부딪혔을 때에 우리는 빛보다는 먼저 눈을 떠올리게 됩니다. 눈이 있어야만, 그리고 그 눈을 떠야만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눈을 떠야만 볼 수 있다'가 바로 '본다'라고 하는 문제의 첫 번째 조건입니다.

두 번째 조건은 빛입니다. 눈은 떴으나 빛이 없으면 아무 것도 볼 수 없게 됩니다. 지금이라도 정전이 된다고 합시다. 아무 것도 볼 수 없게 됩니다.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 보니 정전이 되어 주위가 온통 깜깜하더군요. 더듬어서 플래시 라이터(flash lighter)를 찾아 간신히 옷을 갈아입고 교회에 나왔습니다. 정전이 되어 어두운 교회에 나와 앉아 있으려니 때마침 발전기가 돌아가더군요. 5분 정도 지났을까, 불이 켜지면서 교회 안이 밝아졌습니다. 창문에 서서 밖을 내다보니 우리 교회에만 불이 들어와 있고, 다른 곳은 모두 어두웠습니다. 우리 교회는 자동 발전기가 있어 정전이 되면 자동적으로 4초 내에 그것이 작동합니다. 사람이 없어도 저절로 발전기가 돌아가 온 교회를 환하게 해줍니다. 종탑의 네온사인까지도 켜줍니다. 캄캄한 동네에 유난히 밝게 빛나는 종탑을 보노라니 새삼 빛의 소중함을 느낍니다.

보십시오. 이렇듯 빛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안보입니다. 내가 아무리 눈을 떠도 소용없습니다. 빛이 있어야만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지혜가 있고 똑똑하고 잘났다고 하더라도 마음에 빛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 지혜가 소용없고, 그 재주 역시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 힘도 소용이 없습니다. 삼손도 눈이 어둡고 보니, 그 엄청난 힘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삼손이 머리카락 잘려서 힘이 없어졌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러분, 장님이 되고 나서 힘이 없어졌다고 바꾸어 생각해보십시오. 다를 바 없습니다. 눈이 빠지고 나서 힘이 있으면 뭘 합니까? 장님에게 힘이 있어 무슨 소용입니까? 깜깜한 곳에서는 눈을 떠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결국은 빛이 있고야 만물을 볼 수 있고 알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데 우리는 평소 그것을 잊어버린 채, 모르고 살아갑니다. 모름지기 빛의 소중함을 알고서야만 비로소 나의 나됨(자기정체)이 확립되고, 내 능력과 지혜가 효용성이 있게 됩니다.

여러분, 힘을 생각해보십시오. 힘에는 완력과 지혜와 지식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지혜라고 하는 빛이 없다면 그 힘은 아무 소용없게 되는 것입니다. 지식은 지혜와 융화될 때에 효용이 있습니다.

지혜가 없는 지식은 허상에 불과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공부를 많이 했는데도 불구하고 실제 생활에서는 아무 일도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배운 것을 바로 꿰어서 사용하지를 못합니다. 지식만 있을 뿐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혜란 응용하는 힘입니다. 지식만으로는 응용이 불가능합니다. 발견과 발명의 차이점도 여기에 있습니다. 공부는 잘하는데 발명은 전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남의 것이나 간신히 모방하는 것이 고작이요, 창작이 없습니다. 창작 역시 지식이 아닌 지혜로써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 예배시간에도 다같이 찬송을 불렀습니다마는 이 찬송 역시 다른 사람이 만들어놓은 것을 우리는 단순히 부르기만 한 것입니다. 찬송가를 작곡하는 데도 지식이 아닌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식도 지혜와 함께 이루어질 때에 능력을 생산하는 것입니다.

용기를 보십시다. 용기에는 의지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물질도 의지하고, 재력도 의지하고, 근력도 의지합니다. 그렇지만 거기에 의라고 하는 빛이 없다면 용기 또한 생길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의로운 일이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릴 때에 용기가 나는 법입니다. 그러나 불의한 일이라고 하는 목소리가 들릴 때에는 용기가 생기지 않습니다. 힘이 생기지 않습니다. 말도 그렇습니다. 말하는 것도 가만히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기억하는 대로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반드시 생각이라고 하는 빛이 있어야 합니다.

자녀들이 시험을 보게 되면, 특히나 그 시험날짜가 가까워지면 부모님들은 걱정이 되어 저에게 찾아옵니다. 그 자녀들을 위하여 같이 기도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개중에는 기도하는 방법을 물어오는 부모님들도 있습니다. 공부 안한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합격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려니 하나님께 죄스러운 마음이 들어서 기도의 내용을 바꿔보았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께 이제 와서 공부를 안 했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어느 때에라도 한 번 본 것이라든지 기억한 것이 있거든 현장에서 혼돈 되지 않고 잘 생각나게 해달라고 기도해보십시오"라고 대답해주었습니다. 공부를 아무리 많이 했어도 시험장에서 생각나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이제까지만 해도 달달 외었던 것인데 막상 시험지를 받고 보니 도통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이 한가지만 생각나면 연달아 생각이 날 듯도 한데 안되거든요. 저는 노력해서 공부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시험을 잘보는 지혜는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번 스치듯 본 것이라서 평소에는 기억조차 못하던 내용도 시험장에서는 생각이 나거든요. 생각 역시 마음의 빛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마음이 불안하거나 공포에 떨게 되면 알던 것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지혜가 있고 빛이 있는 학생들은 평상시보다 20퍼센트나 높은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예수 잘 믿는 우리 학생들도 평상시에 받는 성적에 20퍼센트 가산한 점수를 실제로 받더군요.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런가하면 마음의 빛이 없어서 평상시 능력의 반도 못 미치는 성적을 받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지식과 지혜는 모두 빛이 있어야 제구실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14)"-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전면적으로 그 빛을 수용함으로써 빛으로 화하는 것이라고 말씀함입니다. 우리는 마치 보름달이 태양 빛을 받아 반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빛을 반사합니다. 우리는 달이 전면적으로 해의 빛을 받을 때에만 둥그런 달을 볼 수 있습니다. 달이 해의 빛을 반밖에 받지 못할 때에 우리는 달의 반만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전면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생각해야 하고,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앙망해야 하고,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내가 연합하게 될 때에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의 빛을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게 되고, 그리스도의 말씨를 닮게 되고, 그리스도의 행위를 닮게 됩니다. 이러한 반응이 나에게서 즉각적으로 나오게 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하신 말씀은 예수님 당신이 세상의 빛인 것처럼 우리도 세상의 빛이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바꾸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당연한 말씀이요, 마땅한 말씀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우리에게 귀중한 교훈을 줍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15)"-빛은 높은 데에 둔다고 하는 이 말씀은 아주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옛날에 우리는 쌀의 무게를 말()로 측정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 역시 이 뜻입니다. 여러분, 말밑에다 등불을 두는 사람은 없습니다. 마가복음 421절에는 '' 대신 '평상'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은 침대를 뜻합니다. 등불을 켜서 침대 밑에 두는 사람은 없습니다. 본문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불은 켜서 될 수 있는 대로 높은 데에 두어 전체를 밝게 비추도록 하는 것이지, 불을 켜서 말 아래 둔다든지 침대 아래 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 함이냐(4 : 21)." 이 말씀에서 우리는 세 가지의 중요한 의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항상 높은 데에 있다는 것은 빛의 따로 존재하는 성질을 말해줍니다. 빛은 초월적 존재입니다. 빛은 어두움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위를 보십시오. 세상과 너무나도 타협적인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신앙에는 타협이 없습니다. 흔히, 세상을 비타협적으로 살아가느라면 좀 교만하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조금 별스럽다는 말도 듣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조금 지나치면 돌았다고 하는 말까지 듣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주위사람들로부터 조금 고집이 있다고 하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세상사람들에게서 좋은 말 듣기를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나쁜 사람에게서 칭찬 듣는 사람은 나쁜 사람입니다. 나쁜 사람에게서 욕먹는 사람이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나쁜 사람에게서 어떻게 좋은 말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나쁜 사람으로부터 다 좋은 말을 들을 수 없습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익스클루시브(exclusive)합니다. 항상 배타적이요 비타협적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좋은 말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다 좋은 말을 들을 수는 없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로부터 좋은 말만 듣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아주 극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부득불 좋은 말을 듣지 못합니다. 비타협적이고 초연한 입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굽어도 자신은 굽지 않고, 세상사람들이 모두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살아도 자신만은 꿋꿋하게 삽니다. 더러운 자리에는 앉지도 않고, 오만한 자리에 앉아서 쑥덕거리지 않습니다. 더러운 음식도 먹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항상 깨끗합니다. 흔히들 그리스도인은 높은 데에 있다고 말합니다. 고고하다는 의미입니다. 무릇 사람이란 고고한 데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탐심이 없습니다. 세상사람들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 얻으려고 하는 견물생심(見物生心)의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가끔 돈을 주워 주인을 찾아 돌려주었다는 신문기사를 볼 때마다 조금 유감스러운 느낌이 듭니다. 언젠가도 자신의 택시에서 30만 원이 든 가방을 발견한 기사가 주인을 찾아 돌려주었다는 신문기사가 났습니다. 그 신문기사를 놓고 "30만 원이 들었으니 찾아주었지, 3천만 원이 들었어도 돌려주었을까?"라고 우스갯소리 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무슨 선행이라고 신문에 납니까? 내 돈이 아닌 것을 내가 갖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그것은 선행일 수 없습니다. 당연한 일이 신문에 난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습니까?

제가 아는 어떤 분이 스위스에 갔을 때에 실수한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공원의 벤치에 가서 앉으려고 보니 그 자리에 웬 지갑이 있어 얼른 주워 가지고 파출소에 갖다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경찰관이 고맙다는 말은 고사하고 오히려 책망을 하더랍니다. 그 자리에 놔두면 주인이 와서 가져갈 텐데 당신이 여기로 가져왔으니 그 사람이 얼마나 고생하겠느냐 하더랍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여간 부끄럽지 않았다고 털어놓더군요. 여러분, 남의 물건에 손을 대는 것은 분명 잘못입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탐심이 없어야 합니다. 혀만 닿으면 모두 먹어치우려 덤비고, 손만 닿으면 모두 가지려고 하는 도둑놈 심보는 없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빛과 같이 높은 데에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만족해야 합니다. 빛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습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빛은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행복합니다. 누구에 의해서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빛을 보십시오. 빛이 누구의 도움을 받습니까? 스스로 비칠 뿐입니다. 누가 도와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혼자 살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면 결혼할 자격은 더더욱 없습니다.

혼자 살 능력이 없어서 결혼하겠다는 사람은 분명히 잘못된 사람입니다.

스스로 행복할 줄 모르는 사람은 남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보십시오. 내 마음이 먼저 기쁘고 명랑하고 만족할 때에라야 누구를 만나도 기쁘게 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울적할 때에 만나는 사람과는 의견이 충돌하여 싸우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남에게 의존하지를 않습니다. 정신적으로 독립된 객관적 존재입니다. 빛은 객관화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것에도 의존을 하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습니다. 스스로 행복합니다. 이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의존적 존재가 아닙니다. 스스로 존재합니다. 세상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앞의 말씀에서 두 번째로 찾아낼 수 있는 중요한 의미는 모든 것이다 'open status'라는 사실입니다. 모든 것이 다 알려져 있어서 숨기지를 못합니다. 어느 구석으로 도망을 가도 다 알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가는 곳마다 인사를 해서 곤란할 때가 있습니다. 길을 나설 때마다 우리 교인을 만나게 됩니다. 얼마 전에도 비행기 안에서 우리 교회의 집사님을 만났습니다. 저는 일반석에 앉아 있었고, 그분은 일등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마음이 불편했던지 그 집사님이 저에게 자리를 바꾸자고 하시기에 거절했습니다. 옆자리가 비었으니 와서 같이 앉자고 다시 말씀하시기에 결국은 가서 같이 앉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식사는 1인분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식사시간에는 그 집사님이 제 자리로 가시는 것입니다. 제 자리에 가서 식사를 하시고 하며 왔다갔다하더니 나중에는 아예 오시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만 자리를 바꾸자고 했더니 거절하면서 말씀하더군요.

목사님이 십자가를 지시지요. 목사님은 일반석에 계시는데 집사가 되어 가지고 제가 어떻게 좋은 자리에 앉아 있겠습니까? 목사님, 다음부터는 이런 표 사지 마세요." 일리가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분은 아마도 당회장을 일반석에 앉혀놓고 자신만 편하게 일등석에 앉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셨나봅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여러 사람을 어렵게 만들고 있더군요. 저와 같이 다녀본 어떤 분은 목사님과 다니니까 하나도 재미없다고 말하더군요. 가는 곳마다 목사님 아는 사람들이 있어 인사를 하는 통에 자신은 멋쩍게 서 있느라고 힘들었다고 합디다. 그래서 저는 "이러나저러나 이제는 못된 짓도 못하겠군"하고 가끔 우스갯소리를 합니다.

다 드러나 있어 숨길 것이 없습니다. 숨을 생각은 아예 하지 말 것입니다. 숨겨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눈에 띕니다. 빛은 높이 있습니다. 세상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더 멀리서도 보입니다. 못된 사람이 너무나도 많은 세상이므로 눈곱만큼만 선한 일을 해도 높이 드러나 보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얼굴은 언제나 노출되어 있습니다.

, , 진리,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당연히 알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애써 숨기려고 합니다. 그러나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숨기려 해도 결국은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비난을 받는다면 그 이유도 이에 있습니다. 간혹 '예수 믿는 사람이 왜 저 모양인가' 하는 비난이 있습니다마는 그것도 사실은 예수 믿는 사람에 대하여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대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비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도 예수 믿는 사람만은 그렇게 살지 말아다오-은연중에 이런 기대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비난에 대하여 오히려 감사해야 합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교회에 대한 기대가 크게 적용합니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는 법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기독교인이 비난받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등경 위에 높이 있는 빛과도 같이 많은 사람들 눈에 띄게 살아가는 것임을 잊지 말 것입니다.

세 번째 의미는 모든 사람에게 빛은 비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빛을 비추면 어두움에 사는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느껴, 그 앞에서는 협잡을 못해야 합니다. 최소한의 못된 짓도 그리스도인이 없을 때에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을 어떻게 보기에 그 앞에서 별소리 다하고 협잡을 하는 것입니까? 어떻게 예수 믿는 사람에게 뇌물을 가져올 수 있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을 우습게 보아서 뇌물을 가져온 것입니다.

뇌물은 주는 것, 받는 것이 다 문제입니다. 흔히들 준 사람만을 탓하는 경우가 많은 편이지만 사실은 받을 깜냥이니까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빛입니다. 그러므로 그 앞에서 어두움은 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빛은 먼 미래와 길을 환히 보여줍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면 스스로가 어둡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빛으로 안 믿는 사람까지 앞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소망이 보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 때문에 아직은 소망이 있다고 생각하게끔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어두운 세상에 소망이 있다면 예수 믿는 사람 덕분입니다.

경제사가 토인비(Toynbee, A.)는 세상이 이렇듯 어둡고 절망적이지만 그래도 마지막 희망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마지막 희망이 기독교입니다. 지금은 많이 혼탁해졌지만 기독교가 정신만 차린다면 그 유일한 소망을 담당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만이 소망을 담당하고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소망을 걸어야 합니다. 빛을 보여주고, 길을 찾게 해주어야 합니다. 나 스스로는 어둡지만 예수 믿는 사람을 보고 그와 사귀면서 내 갈 길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예수 믿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소망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어렵고 부정이 있다 해도 "그래도 좋은 사람이 더 많이 있습니다"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 앞에서는 늘 기분이 좋고 소망이 생깁니다. 반면에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툭하면 말세 운운하며 걱정하는 어두운 사람이 있습니다. 데카르트는 "당신이 가진 의심을 말하지 마시오. 내가 가진 의심도 많으니까"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내 걱정도 많은데 남의 걱정 들어줄 시간이 어디 있느냐, 그 말입니다. 만나는 것만으로도 걱정을 떠 안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요 빛이 될 수도 없습니다.

모름지기 모든 사람에게 희망과 소망과 빛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비로소 다른 사람들이 날 만나는 것을 좋아하게 됩니다. 나로 인하여 그들에게 빛이 생기고 소망이 생깁니다. 이와는 반대로 만남으로 자꾸 마음이 어두워지고 심령이 답답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을 황폐하게 합니다. 그는 어두움이요 사단의 권세입니다. 여러분, 주위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절교를 할 것입니다. 사람은 유독 좋아 보이는데도 만나면 절로 마음이 어두워지고 신앙이 흔들린다면 손해입니다. 그런 쓸데없는 사람을 만남으로 손해보는 사람들이 우리의 주위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마침내는 교회에도 못나오게 됩니다. 이러한 어두움과 만남으로 자신의 심령과 신앙에 손해를 보게 됩니다.

누가 빛이겠습니까? 그를 만나면 어두웠던 마음이 밝아집니다. 사귀면서 저절로 환하게 밝아집니다. 그를 만남으로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게 되고, 창조적으로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깨닫게 됩니다. 그런 사람이 빛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겠습니까? 어두움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빛이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을 비취는 빛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빛은 지혜요 사랑입니다. 화해요 기쁨입니다. 빛은 힘과 능력입니다. 빛은 선행입니다.

본문은 말씀합니다.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16)"-내가 사람들에게 빛을 비춤으로 그 빛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고 말씀하심입니다.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빛을 향해야 하고, 스스로 빛된 자기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고고한 자기 위치, 초연한 위치를 지켜야 합니다. 객관화된 자기존재를 늘 확인해야 합니다.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말 것입니다. ''에는 상술(商術)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어떤 이득을 얻기 위하여, 자기 이익을 위하여 빛을 말 아래 감추어두는 것입니다. 이는 상징적이자 비유적인 말씀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자기 이익을 위하여, 필요에 따라 감추어두는 그런 어두운 행위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으로 높은 곳에서 모든 사람에게 비치어야 합니다. 어두움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빛으로 이끌어내어야 합니다. 이것이 참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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