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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알의 비유(요한복음 12 : 20-26)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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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알의 비유(요한복음 12 : 20-26)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본문은 예수님께서 썩어지는 밀알을 비유로 자신을 설명해 주시는 내용입니다. 본문의 시작을 보면 헬라 사람 몇 명이 명절에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왔다가 특별히 따로 면회신청을 하고는 예수님을 뵙고자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사람들은 도대체 예수라는 분이 어떤 분인가 하는정도에서 뵙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정도의 관심이라면 어디에서든지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곳으로 찾아가 가까이에서 한번 뵈오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것이 아니었기에 굳이 빌립에게 교섭을 하면서 마치 니고데모나 사마리아 여인과도 같이 직접 가까이에서 예수님을 뵙고 말씀을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왜 이렇게 굳이 면회를 신청하고 예수님을 뵙고자 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 이유는 특별히 다른 데에 있지 않고 명절에 왔다가는 곧 돌아가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두고 데가볼리에서온 사람들이라 해석을 하는 사가들이 있는가 하면 전설적인 이야기에는 에데싸라고 하는 도시국가에서 왔다고도 하는데 이는 그렇게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전설적인 이야기가 마음에 들기도 합니다. 이야기의 내용을 보면 에데싸 왕의 아들이 문둥병에 걸려 고생을 하고 있는 터에 예수님께서는 문둥병도 고치신다는 소문을 듣고 이렇게 사신들을 보내어 특별 교섭을 하여 예수님을 모셔다가 왕의 아들의 문둥병을 고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전제조건이 있어서 정중히 모실 뿐만 아니라 듣자하니 예루살렘에는 예수님에 대한 핍박이 심하고 죽이고자까지 한다고 하니 그런 위험한 곳에 계실 것이 아니라 여기에 오셔서 이 문둥병만 고쳐주시면 왕의 고문으로 평생토록 편안히 모시겠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저들의 청이 허락될는지 안될는지는 모르지만 저들은 헬라식 이름에 호감이 갔던 때문인지 먼저 빌립에게로 가서 예수님을 뵙고자 한다는 청을 드리게 됩니다. 이에 빌립은 다시 안드레에게 이 일을 말한 후에 둘이서 이 사실을 예수님에게 말씀드리게 됩니다. 오늘 본분에는 그저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마는 이 정도로 단계적인 절차가 있었다면 저들이 왜 만나려고 한다는 그이유가 전해지지 않았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다고 할 때 우리는 그 다음에 이어지는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하는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에게 분수에 넘치는 칭찬이나 존경, 그리고 성공이 주어졌을 때에 조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로부터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하는 절정의 신앙 고백을 들으신 후에 베드로를 향하여 너는 반석이라시며 내가 천국열쇠를 네게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거기에 머무시지 않고 즉시 방향을 돌리시어 자기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많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마치 서로 상반되는 두 장면의 필름이 돌아가듯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는 고백을 들으심에 이어 곧 바로 십자가를 져야할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제가 전해드린 헬라 사람들에 대한 전설의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바가 아니지만 어쨌든 저들의 면담을 요청 받은 예수님께서는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노라는 귀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거기에 바로 이어지는 말씀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이렇게 생각하실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영광을 얻을 때에 십자가를 생각해야 하고 생명을 생각할 때에 곧 죽음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나의 배가 부를 때에 배고픈 자를 생각해야 하고 기쁜 일을 당할 때에 슬픈 이야기를, 그리고 앞에 있는 큰 고난을 함께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광을 생각할 때마다 영광에의 길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광만을 생각할 뿐 영광을 얻을 수 있는 길은 까맣게 잊어버리는 데에 잘못이 있습니다. 영광을 알고 영광을 생각했으면 영광에 이르는 길을 알고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길이 십자가의 길임을 함께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여기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이 밀알이란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밀알이라고 하는 것은 비록 조그마한 씨앗이지만 하나의 생명자체로서는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보기에는 딱딱하게 굳은 매우 작은 알맹이에 불과하지만 여기에는 모든 생명적 요소가 다 준비되어 있는 참으로 신비로운 무한한 생명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생명의 가능성을 충분히 담고 있는 이 밀 알을 알맹이 그대로 놓아둔다면 그 밀알은 언제까지나 알맹이 그대로 있을 뿐 생명의 새로운 역사는 이루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계란이 그대로 있으면 하나의 계란으로 남겨져 있다가 어느 때가 되면은 썩어서 쓸모 없는 계란이 되지만 그것이 암탉의 품에 들어가 품어지게 되면 마침내 거기에서 병아리가 나오게 되는 것과도 같습니다.

오늘 이 밀알은 생명은 생명이지만 내부에 준비된 자체만의 생명으로는 생명이 지속되지를 않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밀 알이 먼저 땅에 떨어져야함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곧 예수님의 성육신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함에 있어서 특별히 한 가지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라고 하는 죽음의 사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무덤 속에까지 내려가셨다는 그 사실까지를계속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그는 근본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6-8)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하여 죽는다는 문제를 강조하고 계십니다. 밀 알에 대한 표현이라면 그저 밀 알은 땅에 떨어져 흙 속에 묻히면 싹이 나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말씀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께서는 어떤 식물학적 원리나 농사하는 이치를 설명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신이 지실 십자가의 죽음을 말씀하려는 것이므로 굳이 죽는다는 말을 강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실을 생각해 보면 싹을 낸 밀 알을 두고 이것을 완전히 죽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비록 본래 형태의 밀 알은 없어졌지만 그 자체에서 이어진 생명의 싹이 나오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기에서 죽음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밀 알은 하나의 비유요 말씀하시고자 하는 내용은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묻혀서 죽어야 한다는 것이며 그렇게 할 때에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고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며 많은 사람이 살게되는 생명의 기적이 바로 거기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말씀하시려는 데에 그 의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것은 비유일 뿐 말 알에 대한 현상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꼭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땅에 떨어져서 흙 속에 묻히고 썩어지며 그 속에서 싹이 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얻어지는 것도 꼭 같은 밀 알이고 보면 이것도 썩고 저것도 썩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그런 상태를 두고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부활 이전의 몸과는 전혀 다른 몸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죽었다가 예수님 앞에서 부활할 때의 모습은 오늘 이대로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시 병들어야 하고 다시 죽어야하는 그런 육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께서 밀 알의 썩어짐을 비유로 말씀하시는 의도는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세워지고 많은 사람이 구원을 얻는 역사가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시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령한 의미에서 보는 추수의 원리를 생각하게 됩니다. 먼저 새로운 생명이 주어지기 위해서는 생명이 일단 떨어져야 하고, 묻혀야 하며 그리고 썩고 죽어야 하는 절대조건이 있습니다. 이 절대조건이 시행됨으로 비로소 생명이 다시 살아남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는 모든 식물들이 다 그렇습니다. 땅에 뿌려진 씨앗을 관찰해 보노라면 바깥 부분이 썩으면서 중심에서 싹이 살아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득이 내적인 생명과 외적인 생명을 따로 말하게 되는 것이며 내적인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외적인 생명이 죽어야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인 현상입니다.

이와 같이 일단은 묻혀야 하고 묻힌 다음에는 겉이 죽어 썩음으로 속이 살게 됩니다. 우리는 구약 성경 사사기(7:19-23)에서 기드온의 3백명 용사들이 미디안과 싸울 때에 빈 항아리 안에 횃불을 감추게 하였다가 나팔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항아리를 깨뜨리며 횃불을 높이 들고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하고 외치자 미디안의 군사들이 놀라 아우성을 치며 자기들끼리 서로 칼로 찌르는 혼돈 속에 모두가 달아나 버린 것을 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도 보면 항아리가 깨어짐으로 속에 있는 횃불이 솟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것도 오늘 비유를 위한 하나의 중요한 예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몸을 하나의 질그릇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보화가 질그릇 속에 담겨져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몸은 아무래도 흙으로 된 것이기에 자꾸만 부서지고 깨어지며 고장이 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깨어지면서 오히려 속에 있는 참 생명이 솟아납니다. 바꾸어 말하면 속 생명이 살기 위해서 부득불 겉 사람이 깨어져야 할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새로운 관계성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생명의 신비는 놀라운 것입니다. 이를 두고 사랑과 자아의 문제를 비교해 보면 사랑은 자신의 생을 자신 밖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따라서 자신 안에서는 살지를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갑니다. 자아는 자기 안에 거하기를 원하며 그렇게 살아갑니다. 또한 사랑은 소유하기 위해서, 그리고 살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합니다. 그러나 자아는 살기 위하여 사랑을 희생합니다. 신비롭게도 이렇게 하여 생명과 자아는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이 생명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할 것은 이 '죽는다'는 말의 의미가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를 말씀하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죽음이란 망각의 세계를 뜻한다거나 도를 닦고 무아지경에 들어간다거나 혹은 욕심을 다 버린다든가 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죽는 것을 말합니다. 그저 마음으로 죽고 생각 속에서 죽는 막연한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한 알의 밀 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하신 것은 그대로 죽는 것을 말씀함이지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상태나 과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이 기독교의 특징이요 기독교에서 말하는 근본적인 생명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죽음은 실제적인 사건이지 철학적이거나 관념적인, 혹은 도덕적인 수양의 자세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다는 것은 하나의 분명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 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바로 눈앞에 있는 십자가! 이 엄연한 죽음의 사건을 앞에 놓고 너무나도 초연하게 그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생각해야 될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죽음이란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분명한 사건으로 돌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도 아시다시피 예수님께서는 산에 올라가시어 명상을 하신 것도 아니요 마음속에 있는 정욕이나 욕심을 지워버렸다는 이야기를 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한 것은 그대로 십자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자 제자 중 하나가 칼로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그 귀를 잘라버리는 것을 보시고는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아라.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한다"고 하시면서 내가 청하기만 하면 열 두영, 12개 여단의 군대보다 더 많은 천사들을 당장에 보내시게 할수 있다는 것을 너는 모르느냐? 만일 그렇게 한다면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한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26:50-54) 이와 같이 예수님의 말씀은 그대로가 확실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구약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제물로 바쳐지는 어린양으로 묘사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은 세례 받으러 나오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며 그의 양되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 그대로 어린양이 되십니다. 의미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실제적인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구약에서 양이나 소를 잡아 제물로 바쳤던 것처럼 예수님 역시 실제적인 완전한 제물로서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죽을 자가 살기 위해서는 살 자가 죽어야 합니다.

이러한 이치를 이용하여 칼 맑스는 만유균형의 원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칼 맑스가 본래는 신학을 공부했던 사람이므로 기독교의 구원론으로부터 이 이론을 정립했을 것으로 보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아무튼 그 원리란 한편에서 일을 하지 않고 먹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한편에서는 일을 하고도 먹지 못하는 사람이 생기므로 일하고 먹는 사회가 되려면 일을 안하고 먹는 사람은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혁명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기독교 3원론과 같은 이론이라 하여 기독교에서 도용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마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죄인은 죽어야 됩니다. 그럼에도 죄인이 죽지 않으려면 대신 의인이 죽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의인이 죽었다는 것은 죄인이 살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죄 없이 죽으셨습니다. 이는 곧 죄인이 의인으로 살 수 있음을 말해 주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의 핵심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한 알의 밀 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실제적인 것이요 역사적인 것입니다.

우리 사람의 마음속에는 두 가지의 자아, 즉 두 가지의 내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육적인 자아요, 다른 하나는 신령한 자아입니다. 육적인 자아란 현재적인 것이요 거짓된 것이며 자기만을 위하는 육신에 속한 자아입니다. 그런가 하면 영적인 자아란 미래적인 것이요 영적인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참된 자아입니다. 우리는 이 두 자아에 의하여 이런 저런 모습으로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8:13)라고 하는 실제적인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부정할 수 없는 두 가지의 내가 있어서 나로 하여금 신령하게도 만들고 속되게도 만듭니다. 그 중에 분명 하나가 죽어야 내가 산다고 할 때 그 나라는 것은 속된 나, 죄인인 나를 말하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죠지 뮬러(George Muller) 목사는 고아의 아버지로 불려질 만큼 많은 일을 하면서 훌륭한 삶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한 번은 그를 존경하는 후배들이 "어떻게 되어서 평생을 이렇게 훌륭한 사람으로 일하게 되었습니까?"하고 물었더니 뮬러 목사는 "죠지 뮬러가 철저히 죽은 날이 있습니다"라는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가 한번 죽은 다음에는 죠지 뮬러의 기호와 욕망, 취미 따위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 중에서 모든 것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영이 살기 위해서는 육이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죽지를 않고 꿈틀거리고 벌떡거리면서 말이 많기가 그지없습니다. 여기에는 별다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꺾어지고 깨어지는 그 순간이 필요한 것이며, 그것이 있고야 비로소 영이 주도하는 인간이 되고 말씀 주도적인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에게 원망과 불평이 있고 눈물과 고민이 있다면 그것은 철저하게 죽는 계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회적인 것으로 보아도 그렇습니다. 프랑스의 마르세이유에 무서운 전염병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증세가 심했든지 의사들 마져도 환자를 만지기만 하면 죽게되므로, 병의 원인조차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계속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을 때에 기용이라는 한 의사가 매우 심각한 어조로 "내일 아침 날이 밝을 무렵이면 이 병에 걸린 사람을 해부한 기록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모든 의사들은 환자를 만져본 사람도 없는데 어떻게 기록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인가 하고서는 의아해들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한 기용 의사는 자기의 처소로 돌아가 밤이 깊도록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는 한 죽은 환자를 내어놓고 하나 하나 해부를 하면서 상세한 기록을 해 나갔습니다. 그 결과 그토록 무서운 전염병의 원인을 규명할 수가 있었으며 그리고 병에 대한 치료가 가능해 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가능해지게 된 바로 그 순간 이 의사는 죽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때로는 한 사람의 죽음을 필요로 합니다. 특별히 전도자들의 죽음이 그렇습니다. 베드로의 죽음이 그랬고 사도 바울의 죽음이 그랬으며 알고 보면 열 두 제자의 죽음 모두가 그랬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죽는 순교자가 없고서는 하나님의 선교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성경적 진리요 기독교 2천년사의 증언입니다. 자루 속의 밀 알은 아무리 많아도 그대로 있을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땅에 떨어져 썩어지는 밀 알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신 말씀임과 동시에 오늘우리들 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자세인 것으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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