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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 나무의 비유(마태복음 21 : 17 - 22)
「그들을 떠나 성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애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에 나타난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한 마디로 말하여 이적으로 나타난 사건적 비유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는 직접 어떤 사건을 예를 들어서 말씀하신 비유도 있지마는 오늘 본문에 나타난 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사건을 만드시면서 말씀하신 비유입니다. 다시 말하면 씨 뿌리는 비유나 가라지 비유같이 누구나 볼 수 있는 것, 그리고 이미 있는 것, 혹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와 같이 이미 있었던 일, 또한 그물 비유를 말씀하실 때처럼 지금 현재 눈앞에 보이는 사건을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타난 것은 이미 있었던 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직접 행동으로 사건을 만드시면서 그것을 비유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 비유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그러한 만큼 일반적으로 오늘 본문 말씀을 난해한 구절이라고 말합니다.
그 결과 몇 가지의 의문을 낳게 하는데 그 하나가 지금 예수님께서는 심판을 하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예수님이십니다. 지금까지 용서와 화해와 사랑과 희생의 예수님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돌연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시어 매우 무자비하게 심판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받았던 예수님에 대한 인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인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사랑의 예수님께서 어쩌면 이렇게도 무자비하신 분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아심으로 제자들도 그러했지만 오늘 우리들도 이 본문을 대하면서 당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 또 하나의 의문은 자연을 저주하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자연은 죄가 없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를 향해 열매가 없음을 책망하고 계시는데 사실을 따져 말한다면 나무에 열매가 없는 것은 농부가 잘못한 때문이지 무화과나무가 잘못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지금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고 계시니 그것이 납득이 가지를 않습니다. 합리적으로 따지자면 주인이나 농부를 책망할 것이지 어떻게 무화과나무 자체를 나무랄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어디까지나 자연 그대로는 중립인 것입니다. 다만 악한 사람이 악하게 사용하면 악해지고 선한 사람이 선하게 사용하면 선해질 뿐 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자연으로서는 심판을 받아야할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심판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심판하고 계시는 것이란 말입니다. 여기에서 또 한번 의문의 요소를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의문점은 예수님 답지 못하다고 하는 점입니다.
이는 심리적인 문제로서 베다니에 가시어 유숙하시던 예수님께서 무슨 일로 이렇게 이른 아침에 떠나셨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웬만하면 베다니에는 예수님을 극진히 대접하는 마르다와 마리아가 있는 곳인지라 저들에게 미리 말씀하시어 내일 아침에는 새벽에 식사를 할 수 있게 해 달라는 부탁을 하실 수도 있었겠고, 아무러면 예수님을 그냥 이렇게 보낼 저들이 아닙니다. 그러고 보면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그저 가만히 계시다가 느닷없이 새벽에 일어나시어서는 "가자"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 시간의 예수님께서는 전혀 잡수신 바가 없이 시장하신 중에 예루살렘을 향하여 걸어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장면을 두고 생각해 본다면 다른 사람이 아닌 예수님 자신이 몹시 배가 고프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길가에 보이는 한 그루의 무화과나무를 보시고는 거기에 무슨 먹을만한 열매가 있나하여 가 보았으나 얻지 못하시자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는 무서운 저주를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일은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예수님 답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합니다. 혹시 남을 위해서라면 또 모르겠으나 내 배가 고픈 것 때문에 나무를 저주하면 어쩌자는 것입니까? 마태복음 4장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이나 금식하며 기도하신 이후의 배고픈 상태에서도 돌들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마귀의 시험을 받으시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며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시던 예수님께서 아무려면 자신이 배가 고프다고 하여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는 것이란 말입니까? 이는 실로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아닐 수 없으며, 전적으로 예수님 답지 못하신 처사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그토록 시장하신 중에서도 떡 한 개를 만들어 잡수시는 기적을 베풀지 않으시는 분이 어찌하여 오늘 여기에 와서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느냔 말입니다. 그것도 이제부터 영원토록 맺지 못하리라는 너무나도 가혹한 말씀으로 말입니다. 영어로 표현된 속담에 보면 "헹거 이즈 앵거(hunger is anger)" 즉 "배고픈 자는 분노자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배가 고프면 슬퍼지는가 하면, 반항하게 되고 그리고 분노하게 된다는 것은 일반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야 어떻게 그런 이유에서 분노하실 수가 있는 것이었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다음 또 하나의 의문은 같은 내용을 기록한 마가복음 11장 13절 말씀에 의하면 무화과의 때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열매가 없다고 나무랄 것이 못되지 않습니까? 마가는 여기에서 직설적인 한 마디로 표현을 하였습니다마는 한번 더 생각할 필요가 있는 내용의 말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무화과나무는 엄격히 따지면 1년에 두 번 열매를 맺습니다. 그 한번은 4월이 되면 갓 겨울을 난 낡은 가지에서 작고 시원치 않은 열매가 맺히는 것이며, 또 한번은 6월에 싹이 나기 시작하여 9월이 되면 완숙해지는 무화과입니다. 그러니까 가을에 완전한 제 맛을 내는 본격적인 무화과를 기준하고 보면 "무화과의 때" 곧 제철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대로 익지도 않고, 제 맛을 내지도 않는 그저 푸르고 볼품없는 열매가 4월이 되면 한번 맺힌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4월에 그런 것마저 맺혀지지 아니하면 가을에도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께서는 잘 익은 열매를 구하신 것이 아니라 아주 시원치 않은 열매를 구하셨으나 그것마저 없음을 보시고는 섭섭하게 여기셨고, 나아가서는 이 나무를 저주하시게 됩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하여 적어도 다음 몇 가지 점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 하나는 이 일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 중 최후 마지막 일주일 동안에 되어진 일 중의 하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완전한 권세와 완전한 계시를 행사하시는 기간에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그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계시로 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의사만이 아닙니다. 또한 5천명을 먹이셨다고 하여 거기에 예수님의 모습이 다 나타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왕이요 제사장이며 선지자입니다. 가르치기도 하셨고, 이적도 행하셨으며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돌아가시기도 합니다.
이렇게 보면 그 동안에 가르치시고 이적을 행하며 많은 놀라운 일을 해왔으나 마지막 일주일 동안의 사건에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제사장되심이 드러났으며, 그리고 심판을 행하심으로 비로소 왕권을 행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왕권에 대한 계시가 마지막 일주일 동안에 나타나고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말씀하셨는가 하면, 불신앙의 사람들, 특별히 외식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화 있을찐저!"라며 가차없는 심판의 말씀을 하시게 됩니다. 이러한 저들의 전부가 심판 주 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온전히 계시해 주는 장면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에 나타난 이 사건이 예수님에 대한 온전한 자기 계시의 기간에 일어난 것임을 전제함으로 그 의미를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다음에 생각할 것은 이 사건이 있기 직전 그러니까 바로 하루 전에 있었던 예루살렘 성전을 깨끗케 하신 일과 연결 지워 봄으로 보다 가까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치워져야할 더러운 것들을 다 몰아내신 다음 성밖의 베다니로 가시어 하루 밤을 쉬신 후 이른 아침 다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잘 아는 대로 길을 갈 때이면은 언제나 마음은 그 종착지에 대한 생각으로 채워지기 마련입니다. 그 때문에, 예를 들어, 내가 지금 교회로 간다고 하면 내 몸은 아직 여기 길에서 걷고 있지만 마음은 벌써 교회에 가 있어서 오늘은 무슨 말씀을 듣게 될 것인가? 그리고 누구를 만나게 될 것인가 하는 것 등, 완전히 교회 안에서 이루어질 일들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걸어가고 계시는 예수님의 마음 역시 이미 예루살렘 성전에 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하루 전날인 어제 예루살렘 성전을 매우 분노하신 가운데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면서 채찍으로 마구 내어 몰다시피 하여 깨끗이 해 놓았습니다. 이제 그렇게 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간다면 그렇찮아도 분해하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나와서는 무슨 권세로 이와 같은 일을 하느냐며 질문을 하고 나올 것이란 말입니다. 이러한 질문과 가증스러운 장면들을 미리 생각하고 가시는 중에 무화과나무를 만나게 된 것이며, 그리고 이를 저주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을 잘 생각하고 보면 누구를 향해 이 일을 행하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시는 도중에 계시면서 성전 안에서 될 일을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그 제사드리는 모습과 제사장들의 가증스러운 위선의 자태를 그려보는 것입니다.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기록에 의하며 18만 6천마리나 되는 많은 양을 잡아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며 그 피가 강과 같이 흘렀다는 것은 결코 가장된 말이 아닙니다. 다른 어떤 기록에는 25만 마리를 잡았다고도 하니 말입니다. 아무튼 피는 강같이 흐르고 연기는 계속하여 하늘로 올라가는 이 장엄한 제사를 예수님께서는 먼저 생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거짓되고 가증된, 그래서 더는 필요가 없는 제사! 그리고 무게 있는 예복을 입은 제사장들의 거드름과 그 위선적인 모습들을 생각하면서 분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마음에서부터 벌써 그들을 심판하고 계시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 나타난 말씀은 비유적 사건이며, 따라서 이 사건 속에 말씀이 있음을 알고, 그 뜻을 분명히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알아야할 바의 첫째는 무화과나무에는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지금 이 무화과나무에는 열매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목적에 따르는 그 결과가 없더란 말입니다. 이 무화과나무는 그 크기가 보통 15피이트에서 20피이트까지 자란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무의 모양을 보노라면 높이 커가기 보다는 옆으로 가지가 퍼지면서 손가락 모양의 넓은 잎이 꽉차게 그늘을 이루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무화과나무는 관상수도 아니요 재목으로 쓸 수 있는 나무도 아닙니다. 다만 열매인 무화과만을 필요로 하는 나무입니다. 그런데 그 열매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나무는 무용지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직 열매만을 위하여 존재하는 나무에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필요가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가하면 필요 없는 존재는 재앙을 초래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필요 없는 존재를 가려내어 처분하는 것이 재앙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위의 사건들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이 사건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말입니다. 열매가 없는 무화과는 존재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오늘 이와 같은 재앙을 불러 일으켜 심판을 받게된 것입니다.
또한 두번째로 생각할 것은 이 무화과나무는 많은 실망을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열매가 없을 것이면 차라리 잎도 없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렇지가 않았다고 하는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아예 잎이 없었더라면 가까이 가지도 않았을 것을 멀리서 보아도 잎이 무성한 나무인지라 꼭 열매가 있을 같아 가까이 가 보았는데 열매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열매 대신 실망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인심이 좋은 편이어서 길가에다 무화과나무를 심어 놓고 그 열매가 맺히면 가지고 가지 않는 한 누구나 그 열매를 따먹을 수 있도록 허락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오고 가는 사람들이 이것을 먹음으로 시장기를 끌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배가 고픈 처지에서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발견하고는 반가와 하며 단 한 개라도 따먹고 시장기를 끄겠다는 마음으로 가까이 가 보았더니 아무 것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면 배는 더 고파집니다. 그럴바에는 차라리 잎사귀마저도 없을 것이지 그것이 있음으로 이렇게 실망을 시키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럴 때에는 분노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비유컨대 가뭄에 비 없는 구름과도 같은 것입니다.
긴 가뭄에 비를 기다리는 중, 멀리 보이는 검은 구름을 보고는 비가 올려나 하고 좋아했는데 흐리기만 하고 싹 지나간다면 그야말로 사람 미치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목마른 사람에게 쓸모 없는 우물, 물 안나오는 수도꼭지, 전기 없는 전등 등 바로 이러한 것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저들에게 있어서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지금 유대사람들은 로마의 지하에서 심한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정권을 빼앗긴 속국이요, 경제적인 파탄은 물론 사회적인 무질서와 부도덕함이 만연 해 있었습니다. 이렇듯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저들이 가질 수있는 소망이란 예루살렘 성전 하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들은 열심히 예루살렘 성전을 찾았고 거기로부터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사회적으로 불안정 할 때이면 신앙의 형태도 이상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는가하면 사이비 종교 같은 이상한 것들이 날뛰게 마련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의 마음은 위로 받을 데는 없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부도덕한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보다 열심히 종교예식을 행하였습니다. 따라서 예식을 점점 더 요란하고 거창해지기 마련이었습니다. 아무튼 예루살렘 성전은 저들에게 있어서 유일한 모망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기대가 큰 만큼 실망 또한 큰 것입니다.
내용이 없는 종교! 영역과 영적 권세가 없는 교회! 이와 같은 성전! 종교 예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었습니다. 마치 길가에 서 있는 무화과나무와도 같이 말입니다.
다음 세번째로 생각할 것은 이것은 예언적 비유라고 하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당한 사건, 하신 말씀, 행하신 행동의 그 모두가 비유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예수님 자신이 배가 고프셨다는 것이나, 무엇인가 찾아서 잡수시려고 애쓰시는 그러한 마음과 자세, 그 형편까지도 모두가 예언적인 비유란 말입니다.
여기에 마치 예레미야서 5장 1절의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는 말씀과도 같은 장면을 연상케 하는 바가 있습니다. 너희는 빨리 왕래하며 찾아 보라! 마치 배가 고픈 사람이 단 한 개의 열매라도 얻고자 무화과나무를 애써 더듬는 것과도 같이 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이렇게 무화과나무를 찾으신 것은 하나님의 사람, 열매있는 사람을 찾는 것과 같은 그러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원하신 바 열매가 없기 때문에 실망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훗날 예루살렘은 예언하신 심판의 말씀 그대로 주후 70년에 완전히 망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이는 예언적이며, 예루살렘의 멸망과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네번째로 생각할 것은 여기에는 예표적 의미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실제에 있어서는 제사장과 성전 등, 이들 모두가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현재적으로는 무화과나무가 대신 심판을 받습니다. 이는 무화과나무가 받는 심판을 보면서 예루살렘이 회개할 것을 바라시는 회개에 대한 촉구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사건은 하나의 상징적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느 경우에서도 제사장을 직접적으로 저주하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들에게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을 따져 말하자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원흉이 다름 아닌 대제사장 가야바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단 한번도 "화 있을찐저 제사장들이여!"하는 말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시면서 대신 이 무화과나무를 예표적으로 심판하였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저들 제사장들 위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백성들 앞에서 제사장을 책망하시지 않았습니다.
이는 백성들 앞에서의 책망 뿐 아니라 제자들과 더불어서도 저들에 대한 비난을 하시지 않았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직접으로도 말씀하시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들이나 제자들 앞에서도 제사장을 비난하거나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와 같은 의도를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백성들 앞에서, 그 수천명이 모인 곳에서 "이 제사장들! 이 저주받을 사람들을 보라!"시며 책망을 하신다면 이는 백성들에게 보다 큰 실망을 하게 하는 일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위해서는 결코 보탬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가정에서 동생 앞에서 형을 꾸짖거나 아이들 앞에서 남편 혹은 아내를 원망하며 나무라서는 안 되는 이치와도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저들이 믿고 의지하며 따라가고 있는 종교 지도자들, 곧 직접적인 표현을 하자면 제사장들의 그 운명을 지금 심판하고 계십니다 마는, 백성들이나 제자들 앞에서 결코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외에 또 한가지 심리적인 이유를 든다면 만약 백성들 앞에서 제사장에 대한 책망과 심판을 말씀하시게 되면 백성들이 우리가 지금 당하고 있는 이 고난과 역경은 우리의 책임이 아니라 제사장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동안에 이미 자기 자신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나 자기의 도덕적, 종교적 책임을 외면하고 등한히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백성들이 회개할 것은 그들대로 회개해야 하는 것이지 자신으로 인한 불행을 제사장에게 그 책임을 전가시키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간접적이요 예언적인 심판을 하신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다섯번째로 생각할 것은 지금 이 시간 예수님께서는 심판주로 역사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용서와 사랑의 주님으로서가 아닌 왕권을 행사하시는 분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역사의 주인으로서 제사장들과 성전을 심판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너무나도 가혹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무엇을 뜻하는 말씀이이겠습니까?
이는 곧 회개할 기회가 여기에서 끝난다고 하는 말입니다. 이제 며칠후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그 순간부터 영원히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영원히 심판을 받게되는 것입니다. 진정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기회가 있으리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여서는 결코 안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볼 때 그쯤 되면 회개할 때가 된 것 같은데도 안하고 못하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그러기에 회개도 은혜를 주셔야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고 은혜를 주시며 믿음을 주시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용기를 주시는 것입니다. 결코 아무나 회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회개 자체가 은총이요 축복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단 한 마디의 말씀,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하시는 것으로 끝이나고 마는 것입니다. 이제는 회개할 수도 없고 열매를 맺을 수도 없습니다. 그 동안 참으로 오랜 세월을 두고 기회를 주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회는 예수님께서 이 한마디의 말씀을 하시는 순간에 끝이나고 맙니다. 이것은 현재적인 심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중심으로 회개의 기회는 종말적으로 끝이 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의하면 제자들이 이 장면을 보면서 이상하게 여겼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뜻을 생각하지는 못하고 그저 무화과나무가 즉시 마르는 것만 보면서 이상히 여겼다고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답답한 제자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부득이 말씀의 방향을 돌리시어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않는다면 이보다 더 큰 일도 다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엇보다도 그 의미를 알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그 의미가 나에게 주는 바가 무엇이며 또한 역사 속에 주어지는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았어야 합니다.
여러분, 믿으면 열매도 맺게 되지만 심판도 이루어집니다. 이는 실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열매 맺는 믿음! 그것이 더 필요한 것이었음을 이 사건 속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3장 4, 5,절에 기록된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는 이 말씀 역시 예언적인 사건이 아니었습니까?
오늘도 우리 앞에는 사건이 있습니다. 원자로가 터지고 비행기가 추락하며 이곳 저곳에서 지진이 납니다. 기근이 있고 한해와 수재가 있으며 화산이 터지고 가스가 폭발합니다. 아무튼 끊이지 않는 재난으로 하여 많은 죄 없는 사람들이 그대로 수천명씩 마구 죽어갑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와는 상관없는 강 건너의 불인 것입니까? 화산은 유독 그곳에만 터지는 것이며 전쟁은 저 먼 중동에만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과거에만 있었던 것입니까? 분명한 것은 우리 앞에 이러한 예언적이요, 예표적이며, 말씀적 사건이 계속하여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내 앞에 보이는 무화과나무가 말라 쓰러지는 것을 봅니다. 이는 그 뿌리에서부터 말랐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단 한마디에 완전히 말라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그렇게도 잎이 무성하던 나무가 삽시간에 메마른 고목이 되는 순간을 봅니다. 이 장면을 통하여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열매를 촉구하시면서 진실과 회개를 촉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께서 그 마음속에 예루살렘 성전과 제사장들의 모습을 그려보며 한 무화과나무를 향해 말씀하시던 그 사건을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으로 듣고 그 뜻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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