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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 잃은 소금(마태복음 5장 13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역사적으로 볼 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언어를 소통하는 방법이 가지각색이었습니다마는, 그와 동시에 사람이 사람을 가르치는 교육에도 각양의 방법이 있어왔습니다. 교육이라고 하면 예컨대 예의범절을 가르치는 도덕교육이라든가 생을 사는 지혜를 심어주는 교육이라든가, 특별히 신앙을 제대로 심어주기 위한 종교적 교육을 위하여 가정을 통해서나, 교회를 통해서나, 그 밖의 특수한 경로를 통해서 다양한 방법이 있어온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모습에서 우리는 참된 교육의 본(本)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어로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행동으로도 가르치셨습니다. 때로는 당신의 침묵하심도 그대로가 교육이었습니다. 성경말씀을 들어 깨우쳐주시는가 하면 적절하고도 알아듣기 쉬운 각양 비유로 가르치시고 암시도 주시고 잠언(箴言)도 베푸셨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가르칩니다. 일컬어 가정교육이라 합니다. 이 경우, 부모된 자가 훌륭한 말로써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부모 스스로가 일상에서 본을 보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아무튼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은 사람으로 사람되게 하는 가장 중요한 길인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생각해보면 가르치고 배우는 길을 통하지 않고 되는 모든 일은 동물적입니다. 사람에게는 동물적 요소와 인간적 요소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특히 성도에게는 그리스도인 된 요소가 함께 있습니다. 사람은 분명히 동물입니다. 그러나 동물 아닌 인간입니다. 동물의 윗차원에 존재하는 인간인 것입니다. 동물적인 요소는 가르치고 배우지 않아도 발동합니다. 이같은 동물적 본능 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인간이 되게 하는 과정이 교육입니다. 같은 행위도 본능대로 따르게 내버려두지 않게 하는 것이 교육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자랍니다. 제멋대로 자라게 내버려두면 먹는 것도 입을 갖다대고 뜯어먹을 뿐 아니라 아무렇게나 뭉개고 아무데나 앉고 눕고 합니다. 앉아서 먹어라, 수저로 먹어라, 오른손으로 먹어라, 깨끗이 닦아라 하고, 아이들은 싫어해도 일일이 가르쳐주어야만 사람된 틀이 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두 발로 걸어다니는 것도 배워서 알게 됩니다. 가르치지 않으면 네 발로 깁니다. 따지고보면 우리가 자고 깨는 것도, 생각을 하는 것도 다 배워서 터득한 것입니다. 학교만이 가르치고 배우는 데가 아닙니다. 사람은 여러 모양으로 배웁니다.
인간이 철학을 시작하면서 비롯된 교육 방법 내지 교훈 방법에 속담(俗談)이 있습니다. 옛적부터 내려오는 민간의 격언으로 교훈, 풍자, 경험, 유희 등의 뜻이 담긴 짧은 말, 사리에 꼭 들어맞아 교훈이 될만한 짧은 말-이것이 속담입니다. 우리 나라에 속담이 많지요. '부뚜막의 소금도 입에 넣어야 짜다'라든가 제가 자주 인용하는바 '소금 섬을 물로 끓이라면 끓여라'라는 말들이 모두 속담인 것입니다. 우리네 농촌이나 도시나 할 것 없이 고래로 이런 속담들이 거두고 있는 교훈의 효과는 대단합니다.
가르쳐서 훈계가 되는 말을 특별히 잠언이라 합니다. 구약의 한 편(篇)도 솔로몬의 잠언입니다. 훈언(訓言)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영어로는 'proverbs'라 합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지혜를 가르칠 때에 쓰는 방법으로 역사상 가장 오래된 것이 이 잠언의 방법입니다. 옛적에는 속담을 많이 구사하는 사람이 곧 유식한 사람으로 통했습니다. 오랜 경험에서 지혜를 얻고 그 지혜를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데서 만들어진 말들인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은 하늘나라의 진리인 것입니다.
네 번째로, 인지'(人智)가 발달하면서 사람은 이른바 철학을 하게 됩니다. 속담이나 설화나 비유와는 달리, 사물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드는 것입니다. 합리성을 추구하고 설명합니다. 철학쯤 되면 적어도 고등학교 수준은 넘어야 이야기가 통합니다. 이른바 학문의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는 그림책을 좋아합니다. 글씨도 큰 것이어야 합니다. 성장하면서 그림은 자꾸 없어지고 글씨가 많아집니다. 동시에 글씨의 크기도 작아집니다. 생각을 깊이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로, 드라마가 있습니다. 연극이나 영화 같은 것이 이에 속합니다. 남의 일을 눈앞에 재현해 보임으로 무엇인가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시각적(視覺的)인 교육이라 하겠습니다.
여섯 번째로 그림과 상징이 동원됩니다. 기독교 역사상에도 많은 상징을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도 하나의 상징인 것입니다. 특히 가톨릭에는 상징물이 많습니다. 희랍 종교에는 그림이 많습니다. 상징물이나 그림이 의사 소통에 이바지하는 바는 엄청나게 큽니다. 결혼 때에 가락지를 끼워주는 것도 퍽 소중한 하나의 상징입니다. 신부가 흰 드레스를 입는다든가 머리에 면사포를 덮어쓰는 것도 그렇습니다. 결혼주례를 하면서 보니 형형색색의 꽃을 들고 나온 것도 많이 보는데, 이 꽃도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상징인 것입니다. 무언으로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요, 무언(無言)으로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는 'touch and tell'입니다. 이를테면 악수(握手)가 'touch and tell'행위입니다. 악수도 의사소통 행위인 것입니다.
이사람 저사람과 악수를 하다보면 어떤 사람은 손을 고이 쥐고 어떤 사람은 힘을 주어 꽉 쥡니다. 악수 한 가지에도 이렇듯 차이가 있습니다.
속담 다음으로 속담보다 조금 더 발전한 것이 설화(說話)와 우화(寓話)입니다. 만들어낸 이야기로, 옛날에는 황당무계한 내용도 많았지만 어떻든 그 속에는 깨우쳐주고자 하는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설화에는 단순하게 꾸민 이야기도 있고 신화나 전설 등을 줄거리로 한, 사실과는 거리가 먼 옛이야기도 있습니다. 우화는 어떤 교훈적인 내용을 다른 사물이나 동물에 비겨 만들어낸 이야기입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우가 하루는 포도원에 들어가 포도를 따 먹으려고 애를 씁니다. 키가 자라지 않아 껑충껑충 뛰어도 보지만 도무지 일이 되지를 않습니다. 하루종일 안간힘을 다 써보았지만 마침내 한 낟알도 따먹지 못한 채 돌아서고 맙니다. 맥없이 돌아서 가면서 여우는 투덜거립니다. "저 포도는 시다." 못 먹은 게 아니라 안 먹었다고 하는 자위(自慰)요 자기합리화인 것입니다. 설화건 우화건 동화건, 무릇 꾸며내는 이야기는 모두가 사람의 상상력을 한껏 동원해서 어떤 의미나 귀한 진리를 설명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속담 내지 잠언, 설화 내지 우화에 더하여 비유(比喩)라고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사물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와 비슷한 다른 사물을 빌어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인생은 가시밭길'이라든가 '독 안에 든 쥐'니 '우물 안 개구리'니 하는 말들이 비유법으로 하는 말입니다. 일상의 눈에 보이는 것, 이미 경험한 것 가운데서 소재를 얻어 가지고 그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사물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이요, 경험한 바를 가지고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씨뿌리는 이야기로 천국을 설명하신 것도 비유말씀입니다. 어디까지나 씨뿌리는 것에 대한 이야기뿐인데 저는 악수를 할 때마다 적잖이 곤혹스러워지곤 합니다. 상대방이 꽉 잡을 때에는 나도 꽉 잡아야 하고 상대방이 고이 잡을 때는 나도 고이 잡아야 하는데 이것이 잘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부드럽게 잡는데 나는 꽉 힘을 주어 잡는다면 밸런스가 맞지 않거든요, 힘주는 정도를 가늠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은 것입니다. 아무튼 악수를 해보면 이것이 형식적으로 하는 것인지 반가워서 하는 것인지 상대의 눈빛을 보고도 알 수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환자를 보시면 말씀으로만이 아니라 손으로, '터치'로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렇듯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 모든 언동이 그대로 사랑의 언어인 것입니다. 그러한 '언어'가운데 잠언이 있습니다. 이제 앞으로 한 1년쯤은 예수님의 잠언을 집중적으로 공부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2장 4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가리켜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솔로몬이 누구입니까? 지혜자요 현자입니다. 그는 삼천 잠언을 남겨 후세에 두고두고 크나큰 교훈을 베풀고 있는 지혜자입니다. 스스로 그 솔로몬보다 더 큰 사람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뿐 아니라 랍비로 생각합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을 '랍비'로, '선생'으로 지칭하는 대목이 45회나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랍비로 우리를 가르치심에 비유로도 말씀하시고 이적으로도 말씀하셨으며, 아울러 참으로 귀한 잠언을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그 귀한 비유말씀들과 상징으로서의 이적들에 대해서는 앞서 공부해본 터이고, 지금부터는 베푸신 잠언들을 하나하나 새겨서 공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사람들이 수학이라든가 영어라든가 과학이라든가 하는 학과목 공부는 많이 하는 편이지만 인생의 지혜를 일깨우는 속담, 격언, 잠언 같은 것은 넉넉하게 알고 있지 못한 경향이 있습니다. 이래서는 두루 인간관계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하기 어렵고, 스스로를 바로 다스리기가 어렵습니다. 시(時)의 고금, 양(洋)의 동서를 막론하고 무릇 사람이란 잠언을 많이 소화하고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부모된 자는 모름지기 자녀에게 지식에 앞서 지혜를 심어주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옛적부터 조상 대대로 경험에서 터득해온 지혜를 물려받고 물려주어야 하는데, 여기서 잠언이 형성되어온 것이므로 마땅히 많은 잠언을 가르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삶의 지혜가 되고, 이것이 도덕 교육이 되는 것이며, 특별히 히브리적인 잠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키우는 데 요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으뜸가는 지혜이니까요. 잠언은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지혜롭게, 의롭게, 공평하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어리석은 자로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솔로몬은 잠언 1장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잠언은 형식상으로 볼 때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단순하다는 점입니다. 긴 이야기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한 문장으로 끝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도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32절)"-간단한 한마디로 되어 있습니다. 외기 좋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일상화하게 만들고, 항상 명심하여 있게 하고, 생활 속에 실천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특징입니다.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을 말씀합니다. 매일매일의 일상적인 것을 소재로 그 일상생활에서 실천해야 할 사항들인 것입니다. 평범하고도 보편적인 소재를 들어 실제생활의 값어치를 높여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잠언은 예수님 스스로 창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사는 그 누가 들어도 당연하고도 상식적인 것이요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새삼스럽게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잠언이 지닌 또하나의 특징은, 알면서도 잊어버리고 있던 것을 다시 기억나게 해준다는 점입니다. 조상 대대로 물려온 잠언을 다시 상기시켜주십니다. 그리고 세째는, 그러한 잠언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신다는 점입니다. reinterpretation(재해석)을 하십니다. 옛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오늘의 이야기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째는, 기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십니다. 하늘나라 진리를 말씀하심에도 잠언을 통하십니다. 그런즉 예수님의 잠언은 형식적으로야 새로운 것이 없다 해도 그 내용은 새로운 것입니다. 말씀하시는 의도가 새로운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이미 있어온 잠언에다 당신의 깊은 복음적 의미를 담아서 효과적으로 설명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점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잠언을 사용하신 까닭인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잠언 가운데서 한 가지만을 상고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맛 잃은 소금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13절)"-성경말씀에는 많은 비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이상하게도 비유가 아닙니다. "너희는 마치 소금과 같다"라고 한다면 비유지만, "소금이다"라는 것은 격언입니다. 여기에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소금과 같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너희는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과 세상과의 관계를 설명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위치, 책임, 역할에 대하여 말씀하심입니다. 새삼스럽게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당연히 그리해야 한다는, 마땅한 사명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음이 이 말씀의 특징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봅시다. 소금은 아주 싼 것입니다. 아주 흔한 것입니다. 일상적인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는 말씀 대신 "너희는 세상의 다이아몬드니" "너희는 세상의 금덩이니"라고 말씀하셨다면 어떠할까요? 좀더 귀하고 소중한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사명에 대하여 말씀하셨다면 어떠할까요? 그러나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귀족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적어도 세상에서는 아주 흔하고 당연해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자라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소중하고, 꼭 필요한 절대가치를 지닌 자라야만 합니다. 없어서는 안됩니다. 절대 필요합니다. 이렇듯 값싸고 흔한가 하면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가치를 지닌 것이 바로 소금이요, 그리스도인입니다.
고대로마에서는 사람들에게 일을 시킨 다음 소금으로 품삯을 주었다고 합니다. 요새도 물물교환을 하는 사회가 많습니다. 그러한 곳에서는 돈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서로가 지닌 물건이 중요합니다. 중국에 갔을 때, 저도 북한사람과 중국동포들이 물물교환 하는 것을 직접 본 적이 있습니다 피차 복잡하므로 돈은 소용이 없습니다. 북한사람들이 중국에 올 때에는 주로 미역이나 명태를 가지고 와서 옥수수와 바꿔 갑니다. 이렇게 물건과 물건을 교환하는 것을 제가 직접 보았습니다. 화폐가 사용되는 지금도 물물교환을 하는 곳이 있으니 그 옛날에는 더했겠지요? 고대로마에서도 일을 시키고나면, 품삯을 줄 때에 돈 대신 소금을 주었습니다. 물론 요즘은 일한 삯을 돈으로 줍니다. 그것을 봉급이라고 합니다. 봉급을 영어로 salary라고 하는데, 이 말 역시 소금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따라서 직장인들이 받는 봉급의 내용은 물론 돈이지마는 그 이름은 소금인 것입니다. 그만큼 옛날에는 소금이 아주 소중하고 귀한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기술이 발달해서 대량으로 쉽게 만들어 귀한 줄을 모릅니다마는 옛날에는 그렇지를 못해서 소금이 아주 귀했습니다. 그리고 절대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소금에 대한 이야기는 성경의 여러 곳에 나옵니다. 소금은 생명과도 같습니다. 사람은 물론 모든 동물에게는 소금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것은 특히 유목생활에서 절실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양(洋)은 소금을 먹지 못하면 도통 기운을 못차립니다. 이처럼 소금은 생명과도 같이 소중한 것입니다. 또한 소금은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맛을 냅니다. 어떤 음식에겐 소금이 들어갑니다. 요즘은 식사를 대접하고 나서 "맛있게 드셨습니까?"라고 묻지마는 옛날 우리네 사람들은 "간이 맞았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왜냐하면 맛 가운데 절대적인 맛을 좌우하는 것이 바로 소금이기 때문입니다. 소금을 얼마나 적당히 넣느냐가 가장 중요합니다. 이것이 빗나가면 그 음식은 타작이 되고 맙니다. 아무리 잘 만든 음식일지라도 소금이 적당히 맞아 들어가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렇듯 소금이란 맛의 기준이 되고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에 자주 가던 커피 숍이 한군데 있었습니다. 미국사람들은 워낙 커피를 즐겨 마시기 때문에 그곳에는 커피 숍이 많이 있습니다. 커피를 즐겨 마시다보니 커피 숍마다 그 맛이 다름을 알게 되더군요. 이렇게 입맛이 까다로워지면 아무 커피 숍에서나 마시지 않고 내 입맛에 맞는 곳을 찾게 됩니다. 똑같은 커피라도 맛있는 집이 있는가 하면 맛이 없는 집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자주 가는 그 커피숍의 커피는 늘상 맛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그 주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이 커피맛의 비밀이 무엇입니까? 나는 외국사람이니까 가르쳐주어도 그 비결이 다른 곳으로 새지 않을 테니 말해주세요." 미국에서는 절대 말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고 나서야 그 비결을 가르쳐주더군요.
그 커피 맛의 노하우는 바로 소금이었습니다. 소금을 얼마나 적당히 넣느냐에 따라서 커피의 쓴맛이 가실 뿐만 아니라 그 맛도 좋아진다고 합니다. 이렇듯 커피까지도 소금으로 맛을 내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소금이 들어가지 않는 음식은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설렁탕은 소금이 없으면 숫제 먹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소금을 얼마나 적당히 넣느냐에 따라서 맛이 좌우되는 가장 대표적인 음식이랄 수 있습니다. 이렇듯 소금을 맛을 냅니다. 맛의 근본입니다.
또한, 소금은 제물입니다. 소제(素祭)나 번제(燔祭)를 드릴 때에 쓰는 제물에는 반드시 소금을 뿌립니다. 그리고 옛날에는 갓태어난 아기를 소금물에 목욕시키기도 했습니다. 이 때 사용되는 소금에는 악귀를 쫓는다는, 그리고 특별히 정(淨)하게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듯이 소금은 방부제로도 쓰입니다. 소금이 들어가면 좀처럼 썩지를 않습니다. 나아가 성경말씀에 따르면 소금은 우리를 고르게도 하고 화목하게도 합니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막 9 : 50)." 아무리 뻣뻣한 것이라도 일단 소금을 뿌리면 부들부들해집니다. 흔히 채소를 숨죽일 때에 우리는 소금을 사용합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고르지 못하고 되통맞은 사람은 소금을 쳐서 숨을 죽여야 합니다. 어딘가 모가 난 사람은 소금을 쳐서 고르게 해야 합니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 같이 하라(골 4 : 6)"-우리의 말에서 불순함이나 외설됨이 제거되고 순화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이렇듯 소금은 우리를 고르게 하는 방부제 역할을 합니다.
본문은 말씀합니다.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13절)"-소금이 소금되기 위해서는 먼저 짠맛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짜지 않으면 그것은 소금일 수 없습니다. 소금은 반드시 제 맛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둘째, 소금은 녹아야 합니다. 소금은 녹음으로 형체는 사라지고 본질만이 남게 됩니다. 이렇듯 본래의 모습이 없어짐으로 비로소 소금은 제구실을 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녹아야만 소금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된 우리가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때가 있습니다. 녹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녹을 줄 모르고 뻣뻣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세째, 소금은 절대 불변해야 합니다. 다른 것을 변화시킬 뿐입니다.
소금은 절대로 제 맛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소금이란 여기에 어떤 것이 더해졌다고 해서 신맛이 되거나 쓴맛이 되지 않습니다. 소금은 자신의 성질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다른 것을 변화시킬 뿐입니다. 한마디로 소금은 다른 것을 transforming할 수는 있어도 그 자신이 secularize되지는 않습니다. 즉 다른 것은 개혁하고 변화시킬 수 있지만 자신이 세속화되지는 않습니다. 자기본질은 항상 지키면서도 상대방을 변화시킵니다. 이것이 소금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정말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항상 지키고 있는가를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만나는 상대방에 변화하고, 내가 만나는 가정이 변화하고, 내가 있는 직장이 변화합니다. 내가 저들을 변화시킬 뿐입니다. 이것이 소금입니다. 소금은 언제나 자기역할을 충실히 담당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이러한 소금이 만약 제 맛을 잃으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이것을 조금 의역하면 짠맛을 잃어버리거나, 녹아야 할 때에 녹지 않거나, 스스로 변질되어버린다면 어찌하느냐는 말씀이 됩니다. 그러나 이미 말씀드린 대로 소금은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소금은 짜지 않을 수도 없고, 녹지 않을 수도 없고, 또한 그 자체가 변질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마땅히 그래야만 합니다. 여기에 무슨 이치가 필요합니까? 이 말씀이 비유가 아닌 격언이 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렇듯 소금이란 제 맛을 잃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 소금이 맛을 잃으면 어찌되겠냐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맛을 잃은 소금은 더는 소금이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소금이 아닌 것은 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본문은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하고 심각하게 말씀합니다. 제 맛을 잃은 소금은 다른 목적이나 용도로 쓰일 수가 없습니다. 밖에 내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히는 무용지물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그리스도인 된 본분을 다해야 할 것이로되, 만일 그리스도인답지 못하게 될 때에는 이는 안 믿는 사람보다도 못합니다.
정말 전혀 쓸데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 된 제구실을 할 때에만 비로소 나도 살고 남도 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간단하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매순간마다 '나는 세상의 소금'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잠자리에 들 때건, 식사를 할 때건 간에 '나는 소금이다'라고 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순간 remind하고, 새롭게 확인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이것은 우리에게 소금과 같이 세상을 윤택하게 하고 부패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는 말씀인 동시에 잠언임을 명심할 것입니다.
'맛을 잃은 소금'에 대해서는 유래가 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사람들은 주로 유목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치는 양에게 소금을 먹이려고 암염, 즉 소금기 있는 바위를 들판 여기저기에 박아놓습니다. 이렇게 해놓으면 양들이 풀을 뜯다가 그 냄새를 맡고 바위로 와서 소금을 한번씩 혀로 핥게 됩니다. 그런데 만일 비가 많이 오면 그 바위의 소금기는 모두 빠져나가고 돌만 남게 됩니다. 소금 구실을 못하는 바위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암염을 본 적이 있습니까? 6․25때 유엔에서 피난민들에게 배급 쌀을 주었습니다. 저도 그 당시 4개월 간 피난생활을 하면서 그 배급 쌀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쌀은 있지만 수저는 물론 그릇이 없으니 주로 주먹밥을 만들어 먹게 됩니다. 그런데 맨밥을 먹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반드시 소금이라도 있어야만 먹을 수가 있습니다. 그 당시는 소금도 무척 귀했습니다. 소금도 쌀처럼 배급을 주는데 가끔은 소금가루가 아닌 암염이 올 때가 있습니다. 바윗덩이 만한 암염을 깨면 주먹만해지는데 이것을 씻지도 않고 그냥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밥 한입 먹고 암염 한번 빨고 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이 암염은 소금기가 빠져나가고 나면 무용지물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유목민들이 양들에게 먹이려고 가져다놓은 암염이 비 때문에 소금기가 모두 빠져나간 돌덩이로 남았다는 것입니다. 소금이란 이렇게 맛을 잃어버리면 소용이 없습니다. 너무나도 평범하고 당연한 이치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여러분은 이 말씀에 담긴 귀중한 뜻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그리스도인 된 본질이 있습니다. 절대로 잃어서는 안 되는 본질입니다. 소금은 소금된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소금된 역할을 충실히 담당하라고 우리에게 분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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