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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심장 (고전1:1-3절)

by 【고동엽】 2022. 9. 27.

바울의 심장  (고전1:1-3절)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성도로 직분자로 우리가 현재 서 있는 이 자리에 부름을 받았다. 하나님께 나오는 우리의 가슴 깊은 곳에는 과연 어떤 마음이 있는가?

도입) - 논지: 바울에게는 바울의 심장이 있다. 여기서 심장이란 예수를 만난 감격과 분명한 사명인식과 이 생명 다 바쳐 누가 뭐래도 이 길을 걸어 갈 수밖에 없는 주님 사랑에 대한 뜨겁고 진실된 마음이다. 침묵할 수 없는 주님사랑의 복음 열정이다.

"내가 예수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라"(빌1:8). 하나님의 사도로서 일생을 하나님께 드린 그에게는 분명한 사역의 방향과 목표와 자세가 있었다. 그는 주님의 제자요 구원받은 성도였다. 그리고 목회자요 전도자요 하나님의 청지기였다. 그의 삶에는 바울을 바울되게한 부동의 신념과 복음적인 철학이 있었다. 본문은 그의 심장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바울의 심장을 가져야 한다.
본문) 1. 의의 및 일반적인 평가:일반적으로 바울 서신의 첫머리부분은 서신의 인사말 또는 서론 이라고 불린다. 오늘 본문도 고린도 전서의 인사말 혹은 서두부분이란 설명이 붙어있다. 많은 신학자들은 따라서 본문을 관례적인 서신의 도입부로 이해하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다. 이들은 또한 바울 서신의 이 부분을 사도 바울 자신이 사도성에 대하여 의심받고 있는바 자신의 사도성을 변호하기 위한 목적에서 쓰여진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2. 반론: 1) 인사말에 대하여-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너무나 피상적이고 그야말로 사역의 무경험에서 나오는 사변적인 접근이 아닐 수 없다. 먼저 바울이 쓴 13개의 서신에는 내용의 길이가 다르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동일한 내용의 글이 서신의 맨 앞부분에 본문과 같이 붙어있다. 가장 먼저 쓴 편지인 데살로니카 전서에서부터 가장 나중의 기록인 디모데 전후서와 디도서에 이르기까지 이 부분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바울의 서신 전체의 일관된 진술이다. 편지를 받는 수신자가 각각 다른데 인사말이 크게 봐서 같다는 것이 문제이다. 수신자가 다르면 편지의 인사말도 다르고 편지를 쓰는 정황도 다르고 내용도 달라야한다. 그런데 수신자와 편지의 내용과 상황은 다른데 인사말이 같다는 것은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다. 그 이상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 본문은 바울 자신의 독백이다. 사도직에 회의가 들 때마다 고난과 시련이 올 때마다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고 또 다짐하는 독백과 결심같은 것이다.

2) 사도성 변호라는 입장에 대하여: 아울러 바울사도 자신이 사도성에대한 신뢰성에서 당시교회로부터 12제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또한 교회를 핍박했던 전력이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모든 서신의 앞부분 즉 서두 부분을 사도성 변호로 보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본 서두문은 로마, 고린도, 갈라디아, 데살로니카, 심지어 목회서신 즉 사도성 논란이 없는 디모데와 디도서에도 같은 맥락의 인사가 나온다. 더욱이 디모데와 디도는 자신의 아들이라 표현할 정도로 가장 사적으로 허물이 없는 관계이다. 아들인 디모데와 디도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사도라는 사실을 구차히 변명을 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13개의 편지를 쓸 때마다 번거롭고 구차하게 그것도 서신의 첫머리에서부터 자신의 사도성이나 변명하고 의미 없이 인사말을 했겠는가? 본문은 사도 바울의 심장을 보여준다. 여기서 심장이란 그의 사역의 방향과 목표 행동양식을 규정하는 근본 원리이다. 그의 심장이 독백처럼 나타나 있다.

1. 먼저 바울에게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었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이란 , 내 뜻이나 내 생각이나 내 지식이나 내 가치관에 대한 반대의 개념이다. 믿는다는 것, 사도가 된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일이다. 나의 권리를 포기하는 일이다. 고난과 시련이 있고 추위와 매맞음과 굶주림이 연속적으로 다가오는, 인간의 의지와 생각으로는 그 누구도 걸어 갈 수 없는 길이다. 사도가 된다는 것은 인간적인 지위를 누릴 수 없고 가정을 가지고 안락하고 풍요한 삶을 꿈꿀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생명까지도 내어 놓아야하는 험난한 길이다. 그는 고독하고 슬프고 비참했다. 이루 형용 할 수 없을 만큼 아프고 고통의 고비 고비마다 생과 사의 기로에 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주를 위하여 전에 자신에게 이롭게 여겨졌던 일체의 모든 것을 배설물과 같이 여겨야만 했다. 비천한 자를 얻기 위해서 그 스스로가 비천해지지 않으면 안되었다." 아시아에서 환난을 당하여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져 마음에 사형선고 받은 줄 알았다."(고후1:8) 그 때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입버릇처럼 말하였다.

예) 바울은 제1차 전도여행 중에 소아시아 루스드라에 들어갔다. 거기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고쳤다. 앉은뱅이는 걷기도 하고 즉시 뛰기도 하였다. 그때 예수복음을 전한다하여 바울을 시기하는 유대인들이 왔다.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부터 온 그들은 무리들을 사주하여 돌로 바울을 쳤다. 해가 지고 있었다. 어슴 프레하게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었다. 얼마나 매를 맞았던지 바울은 혼절을 하였다. 사주를 받아 매를 치던 자들은 그를 성밖으로 내던졌다. 그들은 바울이 죽었다고 했다. 쓰러져 긴 시간이 흘렀다. 의식은 혼미한데 싸늘해진 몸 위로 차가운 밤이슬이 떨어지고 있었다. 온 몸 각 마디 마디 마다 절리고 아프게 쑤셔왔다. 희미한 의식의 끝자락을 붙잡고 바울은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행.14:19) -예수님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다.... 고통과 시련이 다가와 견딜 수 없어 쓰러 질 때마다 부인 할 수 없게 그를 괴롭히는 것은 "여기서 그만두자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다"는 인간적인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도 인간인지라 그의 사도직에 고뇌와 회의가 없었을 리 없다. 그 위기의 순간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되 뇌이며 굳게 붙잡고 있는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뜻을 서신마다 첫머리에 쓰는 것은 그의 사역에서 경험한 살아있는 체험에서 나온 고백적인 증언이다. 이 길은 도저히 인간의 생각이나 힘으로는 갈 수 없는 길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도 성자로서의 고뇌가 있었다. 예) 겟세마네 동산의 고뇌에 찬 예수님의 기도가 이를 보여준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아버지여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마.26:38-39)

적용) 하나님의 자녀로, 성도로 부름을 받아 신자로 산다는 것, 교회에서 직분자로 봉사한다는 것, 장로님으로 집사님으로 권사님으로 수고 한다는 것 또는 단체의 책임을 맡아 일한다는 것에는 많은 고통과 시련이 있다. 모함을 받고 상처를 받고 이제 그만 교회를 떠나야하겠다고 마음까지 먹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 이 자리에 서 있기까지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신자의 삶과 교회생활에는 상처와 아픔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고난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오른쪽 빰을 맞으면 왼편도 돌려대고, 속옷을 달라하면 겉옷까지 주고. 오리를 가자면 십리를 가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고난과 핍박은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뜻을 찾고 또 찾아야한다. 내 생각 내 뜻으로는 한 순간도 이 자리에 설 수 없다.

2. 바울에는 '하나님의 교회'라는 분명한 의식이 있었다. '하나님의 교회', 이 말의 반대말은 '내 교회'이다.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이 교회의 주인이라는 것이다. 즉 소유권을 분명히 한 것이다. 바울 사도가 평범하게 '교회'라고 말하지 않고 강조하여 '하나님의 교회'라고 말하는 데에는 그의 경험적인 배경이 있다. 바울에게도 유혹이 있었다. 바울은 목회자로서 수많은 교회를 세우고 성장시켰다. 그 때마다 내 교회, 내가 주인이 되는 교회에 대한 욕심이 왜 없었겠는가? 그런 인간적인 생각이 들수록 그 자신 스스로 소스라치게 놀라 다시금 '하나님의 교회'를 말하곤 하는 것이다. 그에게 교회는 항상 하나님의 교회였다. 그가 이처럼 '하나님의 교회'를 좌우명처럼 말하는 것은 그 만큼 '내 교회'에 대한 유혹이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라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교회의 설립과 발전에 공이 많아도 내 것일 수 없다는 것이다. 교회를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한다. 이 말은 교회를 세우고 목회를 했던 바울이 경험한 교회의 위험성에대한 경고이다.

(1.) 개척교회목회자들의 위험: 이 시대 교회를 보자. 처음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를 하는 목회자의 의식은 내가 개척하여 성장시킨 것은 내 것, 내 교회란 의식이 팽배 해 있다. 따라서 은연중에 목회자 자신이 교회의 주인이 되어 있다. 모든 주도권을 혼자서 쥐고서 성도들에게는 불신과 상처를 준다. 교인들은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라기 보다는 목사님교회란 생각을 하게되어 교회에 소극적이고 냉소적이 된다. 내 것이요 내 교회이니 남에게 교회를 물려 줄 수는 없다. 따라서 교회야 갈라지던 말건 교인끼리 싸우건 말건, 기어코 아들에게 사위에게 교회를 줘야하겠다는 발상이 나오게 된다. 교회의 대물림은 그 중심에 교회의 주인이 하나님이신 것을 부정하고 사유화하려는 위험한 의식이 있다. 이것이 교회 공헌도가 있는 목회자들이 갖는 유혹이다.

(2.) 기존교회의 위험: 교회에 공헌도가 있거나 많은 봉사를 했거나, 오래 믿은 사람들 가운데는 교회 각 부서에서 마치 자신의 교회인 것처럼 행동하고 큰 기득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이때 신입 교우들과 교회기여도가 약한 사람들은 설자리가 없어 교회에 냉소적이고 소극적이 될 수밖에 없다. 교회에 충성하고 일찍이 몸된 교회를 섬겨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이다. 내가 주장하려는 마음이 교회에 공헌을 한 사람에게 다가오는 큰 유혹이다. 인간이 주인이 되는 교회에는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의 은혜가 설자리가 없어진다. 예) 행.20장: 눈물의 재상봉. -바울이 밀레도에 왔을 때 3년간 목회했던 에베소 교인들을 초청하였다."아시아에 들어온 첫 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다..나의 달려 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은혜의 복음증거하는 일을 마치려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 모두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끌어안고 입맞춤의 인사를 하였다.

예) 빌립보 교회- 여기에는 바울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그를 시기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 바울을 위하는 마음으로 바울이 없는 공백을 메우기 위하여 더욱 열심히 교회를 돌보고 전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바울을 미워하는 마음으로 바울이 없어도 교회가 잘된다는 것을 증명할 요량으로 더욱 열심히 전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때 바울은 자신이 미움받고 배척 당하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 도리어 나로 인해서 그리스도가 전파된다면 기뻐하고 또 기뻐하리라고 하였다. 바울에게는 항상 하나님이 문제다. 내가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의 교회 일 수 있다면 나의 자리는 문제가 아니다.

적용)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내 위치가 뭐냐? 내 자리가 어디냐에 관심이 크다. 그러나 내가 서있는 교회, 내가 속한 기관, 내가 봉사하는 부서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먼저 고려해야 한다. 내가 주인이 되기 전에 하나님을 먼저 주인으로 모셔야한다.

3. 바울에게는 '우리' 의식이 있다. 그에게는 우리가 있다. 그는 본문에서 '우리의 주', '저희와 우리의 주', '하나님 우리 아버지'등 우리라는 말을 세 번 이상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그에게서 우리란 개념은 특별한 것이다. 그의 13개 서신 전체에서 거의 예외 없이 서두 부분에는 우리라는 말이 강조되어 있다. 1) '우리의식'의 의미는 세상과 구분되는 새로운 질서를 의미한다. 우리라는 말은 울타리라는 뜻이다.. 우리의 준말 울은 울타리라는 의미이다. 울타리 안과 밖은 질서의 변화를 의미한다. 군부대의 울타리 안과 밖은 질서가 완전히 다르다. 바울 사도가 우리라는 말을 애써 강조하는 것은 우리는 새로운 질서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고 또한 새로운 질서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교회는 세상과 전혀 다른 질서 에 놓여 있다. 교회에 세상의 질서가 들어오면 교회는 빛을 잃게 된다.. 세상의 질서에 살면서 우리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과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2) 새로운 질서는 곧 동기의식, 형제의식, 지체의식이다. 우리의 주, 우리의 하나님이란 의미는 우리 안에 같은 주님과 같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에 대한 앎이 같다는 것이다. 나의 마음에 너의 마음에 사람은 달라도 지식이 같다. 같은 하나님이 계신다. 앎이 같다는 것은 '우리'를 만드는 중요한 조건이다. 예) 한 부모 밑에 자식이 10명이면 그 자녀의 관계는 형제의 관계, 한 동기의 관계가 된다. 동기란 한 분 부모님으로부터 생명을 나누어 받은 같은 몸이라는 의미이다. 동기가 동기일 수 있는 것은 단 한가지 조건에서 이루어진다. 자녀들의 가슴속에 같은 부모가 있다는 사실이다. 같은 몸이기 때문에 서로 아픔을 함께 나눈다. 서로 허물을 감춘다. 서로 위로를 준다. 서로 돕는다. 우리의 관계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라는 의미이다.

3) 새로운 질서란 자기부정의 질서이다. 서로 낮아지고 작은 자되기이다. 강자 되기 강함으로 무장하기보다는 스스로 약자가 되기이다. 이 세상은 모든 것이 서로 강함을 다툰다. 낮음을 싫어하고 높음을 바라본다. 그러나 주님은 인류의 시선을 정반대로 바꾸어 놓았다.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구유에 탄생 하심으로서 인간의 시선을 아래로 돌려놓은 것이다. 교회 울타리 안에서는 강성의 추구나 자기과시가 있어서는 않된다. 우리란 강한 사람이 둘 모여서 만드는 우리가 아니다. 서로 상대방에게 자신을 낮추고 자신을 부정하여 약한 사람이 되어 이 둘이 모여서 우리가 된다.
예) 바울의 자기부정: 바울은 자신을 죄인의 수괴라고 했다. 세상의 만삭되지 못한 나라고 했다. 모든 자 보다 더 작은 나 지극히 작은 나라고 했다. 만물의 찌꺼기, 배설물과 같은 나라고 했다. 바울은 자신을 부정함으로써 스스로 세상의 강함을 버리고'우리'의 새로운 질서에서 살기를 원했다. 이러한 자기부정의 신질서는 이 세상에는 없는 것이다.

4) 새로운 질서란 진정한 동역자의 질서이다. 바울에게는 큰 자 의식이 없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큰 자이다. 그래서 바울에게는 동역자의식이 강하다. 본문에도 '바울과 그리고 형제 소스데네'라고 말한다. 그리고의 관계는 동격이다. 그 외에도 바울은 많은 서신에서 자신과 여러 사람의 이름을 함께 그리고의 관계로 나열하고 있다. 더욱이 로마서 16장에는 35명 이상의 사람들을 언급하면서 나의 형제, 동역자로 부르면서 일일이 그 공로를 밝히면서 문안과 감사를 드릴 것을 로마교회에 당부를 하고 있다. 바울과 거론된 여러 사람의 비중은 분명히 다르다. 그러나 바울 자신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의 영광을 위하여 그 자신이 그들과 같은 열에 서기를 원한다. 기꺼이 형제요 동역자의 관계에 서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바울이 사는 우리의 삶이다.

결론) . 우리는 우리가 서 있는 부르심의 자리에서 아무런 의미 없이 서 있어서는 않된다. 바울 사도와 같이 뜨거운 심장으로 주님을 사랑하자. 바울의 심장 안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바울의 심장 안에는 하나님의 교회가 있다. 바울의 심장 안에는 '우리 의식'-동기의식이 있다.

출처:한국교회 부흥설교 설교 정보수집 편집위원 협조와 추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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