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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세 친구처럼 (단 3: 28-30)

by 【고동엽】 2022. 9. 27.

다니엘 세 친구처럼  (단 3: 28-30)

오늘은 다니엘 3장 28절에서 30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세 친구처럼"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세 친구처럼'이라는 제목에 한마디를 더 붙이면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이라는 말이 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 가운데 나오는 인물 중에 자신의 신앙의 모델로 삼아 보신 적은 없으십니까? 아브라함은 아브라함 나름대로 완벽하고 온전한 신앙의 모델은 되지 못할지라도 아브라함의 좋은 면, 요셉의 그 모습, 오늘 본문에 간접적으로 등장하는 다니엘을 모델로 하여 '나도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해 보신 적은 없느냐 라는 말입니다. 한번쯤 생각해 보셨을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교회의 '아무 아무개처럼 나도 저렇게 믿어 보았으면 좋겠다'라고 하면서 신앙의 모델로 정해 놓은 사람은 없으십니까?
저는 목사로서 이 세상에 많은 목사들이 있지만 그 중에 두 분의 목사님을 모델로 정하고 지금까지 살아왔고 '나도 저 분들처럼 될 수 있다면 좋겠다'라고 생각하고 지금까지도 변함 없이 모델로 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에 따라 본문에 등장하는 다니엘의 세 친구들의 믿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목적하는 세 친구 (28-)

결론부터 이야기를 하면 하나님을 목적으로 생각하는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하나의 수단으로 생각하는지에 따라서 우리의 믿음의 질은 하늘과 땅만큼 달라집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온갖 좋은 것을 주시는 축복이 목적이요, 하나님은 그 축복을 나에게 주시는 수단으로 생각한다면 잘 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만을 생각하고 하나님은 그 축복의 수단으로 여기는 신앙이라고 하면 그 신앙은 전혀 써먹을 데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리마대 사람 부자 요셉은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입니다 그 당시 유대 나라는 로마의 식민지로 있었기 까닭에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이 되면 유대인으로서는 최고로 출세하는 자리요, 부귀와 영화까지 따르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한 번은 밤중에 공회를 소집하여 나가보았더니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결정하기 전에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 처분하기로 먼저 결정을 했었습니다(요 9:22). 출교 처분이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무서운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은 72명으로 바리새파에서 절반이요, 사두개파에서 절반이었습니다. 만약에 출교 처분을 하면 절대로 다른 파에서 받아 주지 않고 공회 의원직과 아울러 모든 것을 박탈당합니다. 비참해진다는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합니다. 그럴 때 '내가 예수 편이요'하면서 예수 편에 서서 저들의 결의에 반대하고 나설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공회에서 하나같이 예수를 죽이자고 결정할 때 아리마대 요셉은 '아니요'하면서 예수 편을 들었던 사람입니다. 예수를 죽이고 내가 양심 팔고 또 예수 없는 부귀 영화 권세는 복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귀영화라고 하는 소위 세상에서 말하는 복이라는 것이 예수 보다 더 귀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차라리 이런 것들을 모두 빼앗길 망정 나는 '오직 예수'라는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를 목적으로 하였던 것이요, 수단으로 믿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즉 부귀영화와 온갖 축복을 목적으로 하고 예수님은 그 축복을 주시는 하나의 수단으로 믿었다면 그는 예수 편을 들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가 목적이기 까닭에 죽으나 사나 예수, 세상의 것을 다 빼앗겨도 오직 예수 편이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를 목적으로 했던 신앙인 이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8절을 보면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가로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그가 그 사자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 몸을 버려서 왕의 명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바벨론에서 유다를 침공해 들어와 멸망을 시킨 후 왕족과 귀족은 어린아이들까지라도 다 붙잡아 갔습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 백성들 중에서 쓸만한 사람들은 다 붙잡아 갔습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각국에서 포로로 잡혀온 소년들 중에 지혜롭고 총명한 소년들을 뽑았습니다. 유대나라 귀족과 왕족 중에서 10명이 뽑혔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소년이 다니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입니다. 뽑혀간 그들에게 진수성찬을 차려주는데 너무 푸짐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과 친구들은 먹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바벨론 왕궁에서 나오는 온갖 기름지고 풍성한 음식은 소년들에게 베풀어지기 전에 바벨론의 태양신에게 먼저 제물로 바쳐졌던 제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신앙양심상 먹을 수 없으니 우리에게는 채소만 주시오. 열흘 동안을 고기만 먹는 다른 나라 소년들과 비교하여 그들보다 못하면 책임은 우리가 지겠고 절대로 다른 나라 소년들만 못하지 않게 될테니 그리 알아주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런 태도를 취하기가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열흘 동안 시험했더니 고기 먹은 다른 나라 소년들보다 전혀 못하지 않게 건강했습니다. 왕의 부름을 받고 총명함이 뛰어난 그들이 왕의 마음에 들어 출세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한 번은 다니엘이 왕에게 불려갔습니다. 왕이 바벨론 나라에 있는 박사들과 술객들과 점쟁이들을 다 불러모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어젯밤에 내가 희한한 꿈을 꾸고 잊어 버렸는데 그 꿈을 찾아 낼 뿐 아니라 해석까지 하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못하면 전부 죽일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박사로 붙잡혀 갔던 다니엘에게 큰 변이 났습니다. 그 때 다니엘은 친구들에게 기도를 요청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함께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왕이 꾼 꿈의 내용을 환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는 해석도 아주 멋지게 하였습니다.
꿈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 모양으로 생긴 큰 우상이 있었습니다. 머리는 금이요, 가슴과 팔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동이요, 종아리는 철이요, 발과 발가락은 철과 흙이 섞여 있었습니다. 아무리 우상이 견고해 보여도 발과 발가락이 철과 흙이 섞여 있기 까닭에 얼마나 약한 것입니까? 그런데 사람의 손을 대지 않은 뜨인 돌 즉 산돌이 날아와서 우상을 박살냈고 바람이 불매 흔적도 없이 사라지더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꿈의 내용을 말했을 때 하나도 틀림없이 맞다고 하면서 해석을 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머리가 금으로 된 것은 느부갓네살 왕 당신의 시대입니다. 시대가 흘러가면 은의 시대가 오는데 이것은 메대 파사의 시대입니다. 배와 넓적다리는 동의 시대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헬라 시대입니다. 그리고 종아리는 로마시대입니다"라고 꿈 해석을 여기까지만 했습니다. 발과 발가락은 해석을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로마 시대는 벌써 끝났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발과 발가락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때 뜨인 돌처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재림을 하시면 세상이 끝나지 않습니까? 얼마나 희한한지 꿈 해석도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 왕이 다니엘을 총리로 세웠고 다니엘이 총리가 되지 마자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천거하여 바벨론 도의 일을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왕이 꿈에 본 우상을 생각하면서 두라 평지에 60규빗이 되는 우상을 그대로 세웠습니다. 1규빗이 45Cm입니다. 60규빗이 어느 정도가 될지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우상을 만들어 놓고 모든 관원들과 백성들에게 나와서 절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때 왕을 모셨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절대로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괘씸하겠습니까? 그래서 풀무불을 7배나 더 뜨겁게 해 놓고 절을 하라고 재촉하였습니다. 절을 하지 않으면 내 손에서 또 저 풀무불에서 누가 너희를 구원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세 친구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믿는 하나님이 구원해 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절대로 우상에게 절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일구월심 하나님뿐입니다"
그래서 세 친구를 결박하여 풀무불에 던질 때 오히려 던져 넣던 사람들이 타져 죽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세 사람을 결박해 놓았는데 결박되지 않은 네 사람이 풀무불 가운데서 돌아다녔습니다. 네 번째 사람은 "사람은 사람인데 신의 아들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역에 나타난 예수입니다. 하나님은 환란을 당하는 성도들을 구경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현장에 동참하십니다. 결박되었던 것도 다 풀렸습니다. '예수 결박 푸셨도다 모든 결박 푸셨도다 나의 결박 푸셨도다'라는 복음성가가 생각납니다. 빨리 나오라고 명하였습니다. 옷 하나도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바로 그 내용입니다. 저렇게 하나님만 의지하고 자기 몸을 버려서 즉 목숨을 내 걸고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께만 철저하게 예배하는 저 사람들을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기적 같은 구원과 축복이 그냥 놀고 먹다가 된 것입니까? 제멋대로 믿다가 된 것입니까? 하나님을 목적으로 하는 신앙인들에게 나타난 기적 같은 축복인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직 결혼하지 아니한 처녀 총각들에게 묻겠습니다. 결혼 할 때 무엇을 보겠습니까? 예를 들면 저 아가씨와 반드시 결혼해야 되겠다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저 아가씨네 집안이 큰 부자이기에 나에게 시집 올 때 한 밑천 떼 주지 않겠느냐?고 생각하여 결혼을 했습니다. 이 총각은 한 밑천이 목적입니다. 그 아가씨는 한 밑천을 떼어 내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장인 장모가 결혼을 한 후에 한 밑천 뚝 떼어 주겠지요. 그러면 이제는 목적이 이루어졌으니 수단은 필요 없지 않습니까? 그 결혼이 행복하리라고 보십니까? 아닙니다. 사람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수단으로 했기 까닭에 불행한 것입니다. "나는 저 아가씨가 좋다 재산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 나는 너 하나로 만족한다" 하면서 그 아가씨를 목적으로 결혼했다면 가난해도 좋고 부자가 되도 좋습니다. 건강해도 좋고 병들어도 좋습니다. 그 결혼은 행복한 결혼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목적으로 하는 신앙인이 되어질 때 이런 축복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 친구는 하나님을 목적으로 하는 신앙인 이었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보여주는 세 친구 (29-)

베드로와 요한이 제9시 즉 우리 시간으로 오후 3시에 성전을 찾았습니다. 오후 3시면 일하다 말고 잠깐 쉬면서 참을 먹는 시간입니다. 오후 6시면 그 날의 일이 전부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그 시간에 기도하러 갔습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는 앉은뱅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들어오며 나가는 사람에게 돈만 요구합니다. 돈밖에 모릅니다. 몇 발자국만 들어가면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는 예배당이건만 그 곳에는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고 들어가지도 않았습니다. 얼마나 좋은 조건입니까? 그럼에도 기도는 내 할 바 아니라고 하고 예수도 내 몰라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지 아니합니다. 돈만 있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한끼 한끼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그 때 베드로와 요한은 "내가 너에게 줄 돈은 없지만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고 하면서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랬더니 발과 발목에 힘이 오르고 그 때서야 성전으로 뛰어 들어가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 사람에게 누구를 보여 주었습니까? 하나님을 보여 주고, 예수를 보여 주었습니다. 즉 너도 그 예수를 만나 보고 체험하라는 뜻입니다. 그 예수의 능력, 그 예수의 축복, 그 예수의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만났고 체험했습니다. 그 결과 기뻐 뛰며 찬송을 했습니다. 예수를 보여주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9절을 보면 '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방언하는 자가 무릇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설만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으로 거름 터를 삼을찌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하고'라 하였습니다.

느부갓네살이 다니엘의 셋 친구를 통해서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구나'라는 것을 깨닫고 체험했습니다. 온 천하에 조서를 내렸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보여주신 그 하나님께 대해서 설만히 말하거든 몸을 쪼개 버리고 그 집에 불을 놓아서 거름 터를 만들어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을 저런 지경에서 구원할 다른 신이 천상천하에 없다는 것 때문입니다. 이런 신앙 고백적인 조서를 전국에 내릴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니엘의 세 친구를 통해서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즉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세 친구가 하나님을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 이웃에게 또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보여 주고 하나님을 보여 주어야 하는 신앙인 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자녀들을 보면 누구를 알 수 있습니까? 그 집의 부모를 알 수 있습니다. 아들 딸들이 인사성이 좋으면 그 부모는 제대로 된 부모입니다. 그렇게 교육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 부모는 두말 할 것도 없이 인격자입니다. 그러나 멀뚱멀뚱 바라보면서도 인사를 할 줄 모른다면 그 부모가 그런 정도의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부모 자체가 인사성이 없는데 그런 부모가 인사를 하라 한들 자녀들이 인사를 합니까? 자녀를 보면 부모를 알 수 있습니다. 자녀는 부모의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울을 보고 자기를 알 듯이 자녀를 보면 자기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 집 아들 딸 같으면 내 아들 딸도 교회에 보내야 되겠다. 저 사람 같으면 나도 예수 믿겠다"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에게서 예수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를 보여 주고, 하나님을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 2절에서 3절을 보면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이 편지를 통해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두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① '너희는 나의 편지라'는 것입니다.
편지를 보면 편지를 쓴 사람을 알 수 있습니까? 모릅니까? 잘 알 수 있습니다. 주소가 있기에 사는 곳을 알 수 있고 글씨 자체를 보면 성격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문장을 보면 그 사람의 실력을 알 수 있습니다. 편지를 읽으면 왜 편지를 했는지 목적을 알 수 있습니다. 편지를 보면 그 사람에 대해서 알만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를 세웠고 가르쳤고 키운 사람입니다. '너희는 내 편지라'는 말씀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보면 바울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교인을 보면 그 교회 목사를 알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영적으로 교인이 냉냉하다고 하면 목사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사람입니다. 교인이 뜨거우면 목사가 뜨겁다는 뜻입니다. 교인들은 목사이상 되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나의 편지라'고 하였습니다.
②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가르쳐 준 것은 전부 예수에 대한 것뿐입니다. 그래서 너희를 보는 사람마다 예수를 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 우리의 말, 우리의 태도, 우리의 인격에서 예수를 보여 주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신앙인이 되어도 크게 잘 되는 것입니다. 세 친구가 하나님을 보여 주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예수를 보여 주어야 하는 신앙인 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나중 형편이 더 좋은 세 친구 (30-)

지난주간에 강사로 오셨던 이성곤 목사가 마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처음에는 아주 쓸모 없던 인간이 나중에는 아주 유익한 신앙인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말은 비슷해도 내용은 다릅니다. 형편이 처음에는 말이 아니었는데 나중에는 그 형편이 점점 더 좋아져서 올라갈 곳이 없을 정도로 형편이 좋아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 믿고 형편이 좋아져야지 나빠져야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예수 믿고 자꾸 형편이 나빠져서 완전히 망하고 남의 신세를 지고 폐를 끼치면 되겠습니까? 예수 믿고 점점 형편이 좋아져야 합니다.

사무엘하 3장 1절을 보면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고 하였습니다. 사울은 왕으로서 온갖 것을 다 갖추었으나 다윗은 가난하고 비천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사울의 집은 점점 기울어지더니 나중에는 재기 불능상태로 망했습니다. 나중 형편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와 반대로 다윗의 처음 형편은 말이 아니었으나 나중에는 왕통을 이루었습니다. 나중 형편이 얼마나 좋아졌습니까?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울은 잘 될수록 하나님을 멀리하였으나 다윗은 항상 하나님을 가까이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괴로우나 즐거우나 항상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나중이 좋아야 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30절을 보면 '왕이 드디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도에서 더욱 높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아니하고 열흘동안 채소만 먹고 공부했던 유다 소년들이 기한이 되어 왕 앞에 섰습니다. 왕이 문답을 해 보니 세상에 이렇게 지혜로운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니엘 1장 19절을 보면 '왕 앞에 모셔 서게 하고'라 하였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청와대 비서가 되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왕을 곁에서 모시는 사람이 비서 아닙니까? 포로 소년들이 대 제국 바벨론 왕의 비서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포로로서 비참했으나 나중에는 보통 잘 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 다음으로 다니엘이 꿈 문제를 해결하고 국무총리가 되지 마자 나 혼자만 잘 될 수 없다 하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왕에게 추천했습니다. 다니엘 2장 49절을 보면 '바벨론 도의 일을 다스리게 하였고'라고 하였습니다. 도지사는 아닙니다. 예를 들면 도지사 밑에서 각 국장들 즉 산림 국장은 산림에 대해서 바벨론 도를 다스리고 세무 국장은 세무에 대해서 바벨론 도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도의 국장쯤 됩니다. 이것은 실권이 있는 직입니다. 요즘 세상이 이상해 져서 그렇지 비서는 본래 실권이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세사람을 통하여 풀무불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본 느부갓네살 왕은 이전까지만 해도 다니엘의 천거를 받았지만 이제는 자기가 직접 챙겼습니다. 바벨론 도에서 더 이상 올라갈 자리가 없을 정도로 높였습니다. 도백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방백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잘 되고 잘 되었습니까? 여러분 세 친구의 잘 된 것만 생각하고 그 자리만 달라고 하지 마십시오. 그네들이 어떻게 믿었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도 세 친구처럼 믿으면 나중 형편이 더 좋은 성도가 될 줄로 확신합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다니엘의 세 친구는 하나님을 목적으로 하는 신앙인 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수단으로 여기면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자기의 뜻이 이루어지면 하나님을 가차없이 버리고 맙니다. 이런 사람의 믿음은 어디를 가도 쓸데가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보여주는 신앙인 이었습니다. 세 친구는 풀무불 속에서 느부갓네살 왕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었고 느부갓네살 왕은 전국에 반포하는 신앙 고백적인 조서를 내렸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왜 이렇게 달라졌습니까? 세 친구가 하나님을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셋째 나중 형편이 더 좋은 신앙인 이었습니다. 잘 믿고 또 바로 믿어야 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믿으면 우리도 점 점 형편이 좋아진다는 것이 본문이 가르쳐 주는 축복인줄로 명심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한국교회 부흥설교 설교 정보수집 편집위원 협조와 추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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