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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δεδομένα 18,185편 ◑/यू की-सेओङ

믿음으로 막힌 담을 헐라 요11:39-46

by 【고동엽】 2022. 5. 5.

믿음으로 막힌 담을 헐라   요11:39-46, 고전1:27~29, 벧전1:8~9
  
이번 부흥회가 하나님과 사이에 막힌 담이 무너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래서 
"막힌 담이 무너지는" 것을 주제로 정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에, 그동안 여러분도 모르는 사이에 막혀 있던 담이 뭔지 깨달아지고, 
또 그게 무너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이 있다면, 믿음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우리가 믿는 사람들이지만, 
실제로는 또 예수님이 안 믿어지는 영적인 답답함 속에 삽니다. 
그게 오늘 해결되기를 원하는 겁니다. 

우리는 다 예수님을 믿는데, 예수님께서 다시 재림해 오실 때 
'그때 믿는 자를 보겠느냐?' 그런 걱정을 하셨습니다. 
눅18:8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여러분, 이렇게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 
우리 대한민국만 해도 예수 믿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전 세계로 따지면, 뭐 말할 수 없이 많지요. 

그런데 주님은 '내가 다시 올 때에, 세상에서 믿는 자를 보겠느냐?' 
세상에! 왜 그렇게 말씀하신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과, 
주님이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목사 아들로 교회에서 자라면서 
'교회 다니는' 것이 믿는 건 줄 알았습니다. 
제 어린 시절에는 '예수님을 믿는다' 이런 표현도 잘 안 했습니다. 
그때는 그냥 '교회 믿는다' 그랬어요. 

"너는 절 믿지? 나는 교회 믿어!" 그랬다니까요. 
개념이 명확하지가 않았었어요. 
교회 다니면 당연히 예수님을 믿는 거로 여겼죠. 

저는 어릴 때부터 '착한 것이 믿음이 좋은' 건 줄 알았어요. 
교회에도 보면 '저 사람 믿음이 참 좋아, 저 청년 정말 믿음이 좋네' 
그러면 대부분 착한 사람들이에요. 
말 잘 듣고 시키는 대로 잘하는 사람, 그런 사람을 보통 '믿음이 좋다' 그랬어요. 

그래서 새해가 되면, 그런 사람 위주로 집사도 세우고, 권사도 세우고 했죠.
다 그게 믿음이 좋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근데 실제로 성경을 가만히 읽어보면, 착한 것이 나쁜 건 아니지만, 
꼭 믿음하고 연결되는 것은 아닌 걸 알게 돼요. 

'예수님께서 정말 나와 함께 계시는 것'이 
그게 바로 믿어져야, 그게 주님이 찾으시는 믿음이에요. 

예수님이 다시 재림해 오실 때, 우리에게 믿음을 찾으시는데 
그 믿음의 핵심은,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신 것이 분명히 믿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다닐 때, 어느 주일 날 
고후13:5절 말씀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너희 믿음을 시험하고 확증하라' 하는 
사도 바울이 하신 그 말씀을, 처음 설교로 들었습니다. 

중고등부 전도사님이 그렇게 설교하시는 거예요. '네가 진짜 믿는 사람이냐?'는 거죠.
'예수 믿는 사람 안에는 다 예수님이 계시는데, 그 사실이 확증되지 않으면,
만약에 예수님이 내 속에 계시지 않으면, 그 사람은 버림받은 자라'는 거예요.

저는 고등학생이던 그날, 기절하는 줄 알았어요. 
그때까지 저는 '예수님이 제 안에 계신다'고 실제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그냥 제가 목사 아들이고, 교회가 제 집(사택)이고, 
나는 늘 교회를 다니니까.. 나는 예수 믿는 거라고 생각하고 살았었는데, 
'예수님이 내 안에 계셔야 믿는 사람이라고?'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들은 거예요.
교회는 빠짐없이 다니고 있었지만, 그런 사실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던 터였죠.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면, 내가 모를 수가 없죠. 어떻게 나 몰래 계실 수 있겠어요. 
그럼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신 것을, 내가 확실히 모르겠다, 긴가 민가 하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도 아니래요. 
'세상에 이렇게 난감한 일이 있는가?' 

그래서 예배가 끝나고, 제가 전도사님을 찾아가서 상담을 했어요. 
"전도사님, 오늘 설교 중에, 모든 예수 믿는 사람 안에는 예수님이 계신다고 하셨는데, 
사실입니까?" 
"그렇다"는 거예요. 

"그럼 제 안에도 예수님이 계십니까?" 
"그래, 기성아, 네 안 해도 계셔!" 이러는 거예요. 

그런데 당사자인 저도 그 사실을 명확히 잘 모르겠는데, 
어떻게 그 전도사님이, 그렇게 단정적으로 이야기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제가 "전도사님, 제 안에는 예수님이 안 계십니다.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제 안에 계시면, 제가 모를 리가 없지요!" 이래야 되는데, 
도저히 그 말을 (넘사스러워서) 못 하겠는 거예요. 

그리고 한 편으로 이런 마음도 있었어요.
'아버님이 지금 목회하시는데, 제가 큰아들인데, 
아니 제가 도움이라도 돼 드려야지, 
목사님 큰아들이 예수 안 믿는다더라.. 이렇게 소문나면 어떻하지?'
그러니 더 솔직하게 이야기를 못 하는 거죠.

그때 제가 '나는 어떻게 해야 되나?' 그래서 제가 했던 길은 하나밖에 없었어요. 
"아~ 그렇군요!" 그렇게 제 안에 예수님이 계신 것처럼, 
제가가 믿는 척하고 넘어가는 수밖에 없었어요.
제가 믿는 척 하는게 두루 편하겠더라고요. 

▲후에 제가 목회하면서, 계속 그때 생각이 나요. 
왜냐면 교인들의 모습 속에, 예수님이 마음에 계신 것을 진짜 믿는 성도가 
너무너무 드문 거예요. 

대부분은 다 믿는 척 하는 거예요. 
물론 여러분은 다 예수님을 믿고 계시죠.
그런데 정말 믿느냐는 거예요?

이 교회를 다니시는 성도 여러분들은 부부싸움 안 하시죠?
이렇게 수준 높은 교회에 다시면서 부부싸움 안 하시겠죠.

제가 목회하면서 교인들에게 제일 많이 속은 것 중에 하나가 
집에서 부부가 그렇게 싸우시는 줄을 몰랐어요. 
왜냐하면 제 앞에서는 안 싸우니까요. 

심방을 가도 안 싸우고, 교회에서 만나도 안 싸우고, 부부가 싸우는 걸 본 적이 없어요. 
이유는, 목사님 앞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여 드리는 것은, 창피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싸우더라도 당신들끼리 조용히 싸우고, 
제가 심방 가면, 전혀 안 싸우는 척하고, 
교회에 와서도 전혀 안 싸운 척 하는 거예요. 

'아 우리 교인들은 부부싸움도 안 하고 잘 사시는구나' 그렇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까 엄청 싸우시는 거예요. 

여러분, 목사가 세요, 예수님이 세요? 

당연히 예수님이 세시죠! 

우리 한국 교인들은 정답 찾기에는 선수들이예요. 

약한 목사 앞에서는, 싸워도 싸운 것을 드러내는 일을 창피하게 여기면서, 
목사보다 훨씬 센 주님 앞에서는, 대놓고 싸운다면.. 그게 말이 됩니까?

차라리, 목사 앞에서는, 대놓고 싸우는 일이 있어도
그 센 주님 앞에서는, 조심하고 예의를 갖추어서 안 싸워야죠.

그런데 주님 앞에서 대놓고 싸운다는 것은.. 주님을 생각으로 믿을지 모르나, 
'현실적으로는' 안 믿는다는 거죠.

진짜 예수님이 마음에 계신 걸 믿으신다면, 부부싸움은 끝났잖아요. 
어떻게 예수님 앞에서 부부싸움이 되겠어요?

우리가 은밀한 시간에 혼자 있을 때, 쉽게 죄의 유혹에 빠집니다. 
주위에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그때 음란물이 있거나, 
그 때 유혹이 와요. 아무도 안 보니까! 

이건 세상 사람들 이야기죠. 세상 사람들에게는 아무도 안 보는 시간과 장소가 있어요. 
그렇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잖아요. 예수님을 영접했잖아요. 
우리에게는 아무도 안 보는 시간과 장소가 있을 수가 없잖아요. 예수님이 늘 동행하시니까!

그런데도 은밀한 죄가 있고, 은밀한 죄에 무너지면... 무슨 뜻이죠?
믿는 척만 하고 사는 거죠. 이건 정말 심각한 문제예요.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신 것이 정말 믿어지면, 그러면 불평 원망은 끝났지요. 
정말 기쁨과 감사가 넘치지요.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신게 정말이라면, 원수 같은 사람도 용서가 되고, 사랑이 되지요.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그 주님이 지금 나와 함께 계신데, 
이제 내가 누구를 도대체 원망하고, 비난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어요? 

고난이 닥쳐도 오히려 감사하죠. 주님을 바라보면서 십자가지는게 감사하고 영광인 거죠. 
편안한게 감사한게 아니고 고난이 감사하죠. 
은밀한 죄는 끝났죠. 

예수님이 진짜 내 마음에 계신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요! 
그런데 실제로 많은 성도들이, 신앙생활 자체가 그렇지 못한 거예요. 

가장 심각한 문제가, 성도들이 <생활 속의 염려 근심>에서 놓임을 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었는데, 예수님이 자기 마음에 계신데 
여전히 자기 마음에는 두려움과 염려가 많은 거예요. 

어느 선교사님이 암 수술을 받으려고 급히 귀국을 하셨어요. 
제가 병원 심방을 갔습니다. 말씀을 같이 읽었어요. 
벧전5:7절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선교사님, 염려를 주님께 맡기세요. 
수술은 주님이 의사의 손길을 통하여 직접 해 주실 겁니다. 
선교사님은 할 일이 아무것도 없어요. 선교사님은 그냥 믿는 것만 하시면 돼요." 

그렇게 제가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고, 선교사님이 "아멘!" 하시면,
제가 기도하고 심방을 마치면 되는데, 

선교사님이 "아멘!"을 안 하시는 거예요. 표정이 아멘 하려는 표정이 아니에요.
그래서 제가 다시 "선교사님, 염려를 다 주님께 맡기세요!"
여전히 묵묵부답인 거예요. 

그래서 제가 순간, 어떻게 해야 될지, 기도를 해야 될지, 설교를 더 해야될지... 난감했어요. 
그때 그 선교사님이 주저주저 하시다가 "그게 안 돼요..." 

제가 깜짝 놀랐어요. 그렇게 먼 오지에,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가서 복음을 전하시는 선교사님이 '염려를 주께 맡기라' 그게 안 된다니... 

여러분은 염려가 주님께 맡겨지나요? 
예수님이 여러분 안에 계시죠. 
그러면 여러분들의 삶 속에도 여러 많은 염려거리가 생길 텐데, 
그 염려가 주님께 맡겨지나요? 그게 안 되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데도 염려 걱정이 너무너무 많으신 거예요. 

▲여러분, 돈에는 염려가 맡겨지시죠? 
실제로 여러분이 돈을 현금으로 백만원씩 가지고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식당을 갔어요. 그러면 아무 걱정이 안 됩니다.
요즘 음식값이 많이 비싸지긴 했지만, 백만원 가지고 식당에 가면, 걱정될 메뉴가 없지요. 
구역 식구들과 같이 식당에 가도 '마음껏 시키세요!' 이러실 수 있을 거예요. 
이런 담대함이 어디서 나와요? 돈에서 나온다니까요. 
우리는 돈을 믿어요. 돈이 가지고 있는 힘을 믿어요. 

우리는 생각으로는, 돈을 믿지 않고, 예수님을 믿어요.
그런데 현실의 삶에서는, 우리는 예수님보다 돈을 더 확실히 믿고 살아요.

그래서, 돈이 많으면, 내 염려가 맡겨지는데, 
훨씬 힘이 세신 예수님께는, 염려가 안 맡겨지니 문제인 거죠. 
내 믿음의 문제인 거죠! 
(*이렇게 주님께 맡기는 믿음의 훈련을 작은 것부터 점점 해 나가야 하는 거죠. 체험적으로)

그러니 이게 바로 주님과 나 사이에 뭔가 딱 막힌 담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를 믿어도, 근심 걱정, 불평 원망, 사람에 대한 원망,
미운 사람, 원수 같은 사람, 그 문제가 해결이 안 되고, 사랑이 도무지 안 되고, 

고난이 닥치면 겁부터 나고... 
'왜 나에게만 이런 어려움이 생기나?' 하나님 원망하게 되고, 
'이게 예수를 믿는게 맞나?' 이런 문제가 생기게 되는 거예요. 

△어느 선교사님은, 과거에 자기가 초등학교 때부터 깡패였대요. 
'무슨 초등학생 때 깡패가 있나?' 그랬는데 
간증을 들어보니까 웃기는 이야기를 하세요. 

자기가 초등학교 때 아버님이 돌아가셨어요. 
아버님 돌아가시고 너무너무 당황스러운 것이, 
만나는 어른들마다, '엄마가 자기를 의지해서 산다'고 말하는 거예요. 

외삼촌을 만났더니 '아무개야, 이제 엄마가 너 믿고 살아!' 
깜짝 놀랐어요. 아니 엄마는 어른이고, 자기는 초등학교 학생이에요. 
'내가 엄마를 믿어야지, 엄마가 어떻게 나를 믿나?' 

근데 이모가 또 그래요. 
'아무개야, 이제 엄마가 널 믿고 살거야!'

교회 갔더니 장로님이 또 그러세요. 
'얘야, 엄마는 이제부터 너 믿고 살아. 공부 열심히 해야 돼!' 

담임 목사님도 그러시네요. '엄마가 이제 너 믿고(의지하고) 산다.' 

그래서 엄마를 찾아가서 말을 했대요. 
"엄마, 나 믿지 마! 그러면 큰 일 나!" 
아니 자기가 어떻게 엄마를 책임지냐 말이에요. 

그랬더니 엄마도 "아니야, 나는 이제 너만 믿고 살거야" 
자기는 엄마가 교회 다니니까, 하나님을 믿는 줄 알았대요. 
근데 자기를 믿는데요

그래가지고 '이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엄마가 날 믿으면 큰일인데...' 
그래서 '엄마가 나를 안 믿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 
해서 '깡패가 되어야 되겠다' 
그래가지고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동네 깡패 형들을 따라다녔대요. 

이유는 '엄마 봤지? 나 믿으면 안 돼. 나 믿으면 큰일 나!' 
물론 뭐 재미있게 표현하시면서 그렇게 말하셨는데 
다들 웃으시면서도, 마음에 찔림이 있으실 거예요. 

우리가 너무 쉽게 우리 아이들에게 그런 식으로 표현을 해요. 
"엄마 아빠는 이제부터 너만 믿는다. 
너 나중에 커서 잘 되면 외제차라도 사줘야 돼!"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몰라요. 
그러니까 애들이 어릴 때부터 독립군이 되는 거예요. 
'빨리 도망가야 되겠다. 잘못하다가 붙잡히면 큰일 나겠다...(정말 큰 부담이다)' 

오죽 하나님을 못 믿으면, 어린 애들한테까지 '널 믿는다' 그렇게 이야기할까요? 
대신에 "엄마 아빠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셔, 걱정하지 마! 
너희들이나 잘 살아!" 

그러면 아이들이, 출가를 했더라도 
'진짜 우리 엄마 아빠는 어디 믿는 구석이 있나 봐!' 
그렇게 부모가 믿음을 보여주어야 됩니다.

아이들이 어려도, 실제로 부모에게 근심 걱정이 있는 걸, 아이들이 다 알아요. 
'예수님을 믿는다는데, 하나님이 아버지시라는데, 
그런데 어째서 우리 부모님은 저렇게 염려와 걱정이 많으시지? 
예수 믿어도 별 소용없나봐!' 이런 모습을 보여주니까, 자녀 전도가 안 되는 거죠.
이게 얼마나 큰 문제인가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왜 이런 담이, 탁 가로막혀 있는 거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대신 죽어 주셨고 
성령께서 지금 내 마음에 와 계시는데, 
왜 내 마음에 염려와 근심이 해결이 안 되는 거죠? 

많은 교인들이 "힘들다. 어렵다. 죽겠다"가 그냥 입에 배였어요. 이건 심각한 죄예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만 보시는게 아니고, 
저 북한에 있는 지하교회 성도들도 보시고, 천국에 있는 성도들도 보세요. 

그런데 남한에 있는 성도들이 "힘들어요. 죽겠어요. 못 살겠어요" 그러면, 
북한에 있는 성도들은 뭐라 그래야 돼요? 

지금 우리가 "힘들다. 죽겠다. 못 살겠다. 뭐 어렵다." 그러면, 
지금 전쟁 중에 있는 성도들은 뭐라고 그래야 되는 건가요? 

초대교회 성도들, 
한국에 처음 복음이 전해졌을 때, 백년 전에 예수 믿었던 그분들, 
그분들은 뭐라 그래야 돼지요? 

지금 중국에 있는 성도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 대략 소문 들어 아시죠? 
일본 기독교인들이, 그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예수 믿는게 얼마나 힘든지, 
여러분 어지간히는 아시죠?

지금 대한민국에 사는, 여기에 예수 믿는 성도들... 
전 세계를 뒤져 보세요. 우리나라처럼 예수 믿기 좋은 나라가 또 있나요?

지난 기독교 2000년 세월을 돌이켜 보세요. 
지금 우리처럼 예수 믿기 좋은 때가 지난 2000년 동안 있었냐고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힘들다, 어렵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다 보시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예쁘게 보실까요?
아니면 한 대 쥐어박고싶다.. 그렇게 보실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힘들다. 어렵다"는 말을 조심해야 돼요. 
왜냐면 그건 우리의 상황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자기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고 내 안에 계시는 주님을 실제로 믿지 못하니까, 
그러니까 상황과 여건이 매일 어렵게만 느껴져요. 

나와 함께 계시는 주님, 그 사실이 진짜냐, 현실이냐 아니면 그저 생각으로만 믿느냐, 
만약에 믿음이 진짜라면, 현실이라면, 
주님과 나 사이에 막힌 담이 다 무너지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신게 진짜가 아니라면, 
그러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아직은 종교 생활을 하고 있는 거예요. 

▲한 번은 제 페이스북에, '제가 설교를 정말 못한다'는 글이 올라왔어요. 
뭐 제가 못하는 설교를 하고는 있지만, 
그걸 남이 또 페이스북에까지 올릴 건 아니잖아요. 

페이스북은 그래도 친한 사람들끼리 서로 소식도 나누고 하는 그런 공간인데 
거기에다가 누가 그렇게 썼어요. 

'많은 분들이 유기성 목사님 설교 들어보라 그래서 
내가 한번 들어봤는데, 진짜 끝까지 못 들어주겠더라'는 거예요. 
왜 그렇게 설교를 느릿느릿하게 하시는지...

'요즘 시대는 설교가 카리스마가 있어야 되는데, 
목사님 설교는 젊은 세대들이 전혀 못 알아듣는 설교입니다. 
말을 좀 빨리 해 보시라고.. 
목사님 설교는 노인들이나 듣는 설교라고... 
제가 끝까지 어지간하면 들어보려고 했는데, 도무지 들을 수가 없어서 
그냥 충고 삼아 말씀을 드린다고....' 그렇게 썼어요. 

제 페이스북이니까, 제 친구 관계에 있는 분들이 거기에다가 댓글들을 막 다셨어요. 
'유목사님의 딴 설교도 한번 들어봐라. 
어떻게 좀 은혜가 안 되는 설교를 하필 골라서 들었나 보다..
그러니 유목사님의 여러 설교를 들어봐라' 

'혹시 말이 느리게 들리면 1.5 배속으로 들어봐라' 

여러분 그런 댓글의 말 듣는게, 뭐가 기분이 좋겠어요?
그런데 사실 제게 큰 충격이 된 건 아니었어요. 

왜냐면 제 설교에 대한 열등감 문제를 
하나님이 제게 오래 전에 먼저 다루셨으니까요. 

제가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아버님이 6.25 때 부산으로 피난을 오셔서 
저 부산 영도 끝자락에 거기서 목회를 하셨어요. 

그러니까 저는 거기서 태어났으니 부산 사람이죠.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부산에서 살다가, 
이제 서울 감리교 신학대학교에 들어왔는데 
1학년 때 서대문교회 어린이부 설교를 했어요. 

신학생들이 순서를 따라 돌아가면서 설교를 해야 된다고 그래서 
어린이들 앞에서 설교하는 거니까, 
열심히 준비해서 하면 되리라고 생각하고 설교를 시작했는데 
애들이 다 뒤집어지는 거예요. 

제 경상도 사투리를, 서울 아이들이 그냥 못 받아주는 거예요.
제가 말 한마디 하면 따라하고, 또 한마디 하면 따라하고, 
설교가 진행이 안 되는 거예요. 

아니 설교를 시작했는데, 마쳐야 되는데 
도대체 어떻게 마쳐야 되는지 너무너무 난감한 거예요.

제 얼굴만 빨개지고, 수습은 안 되고, 
선생님들이라도 도와줘야 되는데, 선생님들이 더 웃고 난리더라고요. 

그때 제 마음속에 '아 나는 설교를 정말 못한다' 그런 마음이 확 들어왔어요. 
아 그건 정말 비참한 일이죠. 

앞으로 제가 목사가 되면 내내 제가 설교해야 될 사람인데 
'내가 이렇게 설교를 못하니, 어린애들까지 저렇게 나를 핍박하니... 
어른들은 하물며 어떨까?' 

그래서 제가 1년 동안 말투를 고쳤다니까요. 
사람들 앞에서 연습해서 고치려니 창피해서 못 하겠고, 
밤마다 라디오 들어가면서, 무슨 간첩도 아니고... 
하여튼 제가 밤마다 라디오 들어가면서, 
서울 억양하고 경상도 억양하고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그렇게 연습했다니까요. 

제가 가게에 가서 실습을 했어요. 서울 말로 "이거 얼마예요?"
주인이 "그냥 경상도 사투리로 하세요!" 

듣기에 더 이상하대요. 

그러면서 겨우 1년 만에 억양을 고쳤어요. 
근데 온전히 고쳐지지 않은게, 
여러 사람이 저한테 '충청도 사람이냐?'고 물어봐요. 

서울까지 못 올라오고, 충청도에서 머물렀던 거 같아요. 
말을 할때, 억양도 신경쓰고 하다보니, 제 말이 좀 느려진 것 같아요. 
그래서 '충청도 사람인가?'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더라고요. 
그런데 말투는 고쳤는데, 열등감은 해결이 안 되는 거예요. 

 

한번은 어느 집회에, 여러 목사님과 함께 설교하는 집회에 가서, 
제 마음속에, 제 앞에 설교하는 목사님, 제 뒤에 설교하는 목사님, 다 죽쑤기를 바라고 있더라고요. 
나만 죽쑬 수는 없잖아요. 다같이 죽쒀야지... 

두 분 다 설교를 잘하면, 나만 표시가 확 나잖아요. 
진짜 제가 보기에도 제가 무서운 거예요. 
아니 설교하는 목사가, 다른 목사 설교 죽쑤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 
그건 절대 정상이 아니죠. 

하나님 앞에 '하나님, 저 어떡합니까?'
이 열등감이 정말 무서운 거예요. 교만과 열등감은 사실 같은 겁니다. 

목회하면서도, 목사가 되고도, 
제 마음속에, 하나님과 제 사이에 해결 안 된 문제가 있는 거예요. 

그때 큐티한 본문이 고전1:27~29절이에요. 
여러분 중에도 혹시 열등감이 여러분을 괴롭히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한번 같이 한번 읽어 보실까요. 

고전1:27~29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이 말씀이 믿어지세요? 저는 잘 안 믿어지더라고요. 
이 말씀을 모르는 건 아닌데, 믿어져야 그 말씀이 효과가 있는 거잖아요. 

아니 하나님이, 이왕이면 능력이 있고, 똑똑하고 말 잘하는 사람을 쓰시면, 
훨씬 더 복음이 더 잘 전해지고, 하나님의 일이 잘 되지 않겠어요?

'아니, 왜 미련하고, 약하고, 없는 것, 천한 사람, 멸시받는 사람을 쓰신다고 하시나?'
'아니, 왜 성경에는 또 <것>이라고 번역해 놓았나?'

미련한 사람, 약한 사람, 천한 사람, 멸시받는 사람.. 이렇게 하면 될 텐데,
'미련한 것, 약한 것, 천한 것, 멸시 받는 것' .. 이런 '것'이라는 표현이, 
사람을 차별하는 표현 아닌가? (그래서 기분 나쁘다)

저는 이 말씀이 잘 안 믿어지는 거예요. 
'하나님이 어째서 약한 자를 들어 쓰시나?' 

3일 동안에 큐티가 안 돼요. 말씀이 적용이 안 되는 거예요. 
제 마음속에 '이 말씀은 믿을 거냐, 안 믿을 거냐? 그것만 우리에게 요구하는 거지, 
우리를 이해시키거나 설득시키는 말씀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하나님은 약한 자들을 쓰신다..' 믿을 거면 아멘이고, 
안 믿을 거면 말씀을 버리는 거예요. 

제가 하나님 앞에 성경책을 펼쳐서 한마디 고백을 했어요. 
'제가 믿겠습니다!' 
그리고는 정말 그 방바닥에 꼬꾸라져서 울었어요. 
성경책을 가슴에 끌어안고요. 

아니 하나님의 말씀을 믿겠다는데, 왜 그렇게 눈물이 나는 거죠? 
저는 그 전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게, 이렇게 엄청난 일이라는 걸 몰랐어요. 
그러니까 말씀을 듣고, 안 믿으면, 그냥 넘겨 버린 거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 중에 진리죠. 
우리가 당연히 믿어야 하는 거지요. 

그런데 실제로 제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만, 믿는게 아닌 상태에서 
그동안 산게 너무나 많았던 거예요. 

근데 '하나님이 약한 자를 들어 쓰신다. 아멘!' 이렇게 하고 나니까 
제가 자신이 완전히 고꾸라지는 거예요. 

'나는 죽고 예수로 산다' 그랬는데, 
그게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겠습니다.' 그게 '나는 죽었습니다' 라는 뜻이에요. 

▲제 부친이 굉장히 성품이 유하세요. 
한 번도 누구에게 큰소리 내신 적도 없고, 
저도 어릴 때 아버지 야단맞은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힘든 일, 어려운 일이 많아도 
한 번도 아버님이 얼굴 찡그리시거나, 또는 뭐 큰소리 내신 적이 없으세요. 
그래서 주위에서 다 성자라고들 이야기를 하셨죠. 

근데 목사의 아들로서 제가 보기에 
아버지는 너무 약해 빠지신 거예요. 

힘들지 않으시면.. 차라리 놀라우신 분이죠. 
근데 제가 아버지를 가까이서 보니까 알지요. 너무너무 힘들어하시죠. 
그러면서도 전혀 내색 안 하시고... 

저희 어머님은 제가 신학교 다닐 때 돌아가셨어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제 어머님 돌아가셨을 때, 저는 '아버지 때문'이라고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버지가 좀 강할 때는 강하게, 
뭔가 필요할 때는 울타리가 되어 주셔야... 
그래야 어머님이 숨을 쉬잖아요. 

아버님은 유하시고, 모든 힘들고 어려운 일은 어머님이 또 다 뒤집어 쓰시고 
제일 앞서서 그걸 부딪히셔야 되니, 결국 심장병으로 돌아가셨어요. 

보니까, 아버님의 친구 목사님들, 선후배 목사님들, 
다 아버님처럼 약하신 분이 아니더라고요. 

어느 부흥사가 한번 오셨는데, 제가 깜짝 놀랐어요. 설교하면서 막 욕을 하세요. 
그날 보니까, 교인들이 너무너무 은혜를 받으시더라고요. 

제가 그걸 보고, '아니 저렇게 막 욕하는 목사도, 저렇게 대접 받으시고 
부흥회도 저렇게 이끌어 가시는데, 우리 아버지는 뭐야?'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제 마음속에 '내가 목사가 되면, 나는 절대로 약한 목사는 안 될 거야, 
난 아버지처럼은 안 할 거야!' 

저는 약하면 죽는 줄 알았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처럼, 내가 약하면 내 아내가 죽을 거야, 
자식들 공부 제대로 못 시킬 거야, 교회도 부흥시키지 못할 거야...' 

그런데 설교가 안 되는 거예요. 
약한 목사가 안 되고 싶다고, 그렇다고 강한 목사가 되는 것도 아니더라고요. 
그게 제게 있어서는 너무너무 힘든 거예요. 
'야 내가 이렇게 밖에 못 하는구나...' 

근대 성경을 보니까 '하나님이 약한 자를 택하여 쓰신다니...'
(저희 아버지가 투영되면서)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느냐 말이에요.

도저히 안 믿어졌던 성경말씀을, 제가 그 날부터 믿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날 제 어깨에 둘러매고 있던, 나도 모르게지고 있었던 무거운 짐, 
열등감의 무거운 짐, 

우리 한국 분들은 대부분 다 그러실 거예요. 
어릴적부터 끊임없이 남하고 비교하고 살아왔잖아요.

그 무거운 멍에가 그날 통곡하고 울 때, 확 꺾어진 것 같았어요. 
뭔가 가슴이 확 터진 것 같았어요.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겠다'고 했더니 
그 다음부터 설교가 달라졌어요. 

그 전에는 '설교를 어떻게 하면 잘하나?' 그게 제 관심이었어요. 
근데 이제는 '하나님이 약한 자를 들어 쓰시고, 미련한 자를 들어 쓰신다니' 
제게 문제가 될게 없었어요. 

설교에 뭐 사투리도 섞여 나오고, 말도 청산유수처럼 잘하는 것도 아니고, 
무슨 비유를 기가 막히게 잘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하나님이 나를 쓰신다니까... 그러면 저는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를 정확하게 전하느냐' 그것만 저의 관심이에요. 

설교를 유창하게 잘 전하는 거는, 난 재주가 없어요. 
메시지를 정확하게 전하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요. 

△예를 들여, 만약에 지금 제가 여러분 중 한 사람에게,
'교회 사무실에 가서, 볼펜을 하나 좀 가져다 주세요'라고 부탁을 했어요. 

그러면 그 분은 교회 사무실로 가서 '강사님이 지금 볼펜 하나 달라고 하십니다'
그 말만 정확하게 전달하면 되는 거잖아요. 

근데 그 분이, 교회 사무실에 가서, 볼펜 하나 달라고 말하면서 
'나는 어떤 사람인가' 하고 자기 자신을 먼저 소개하고, 
제가 어떤 단점이 있고, 또 장점이 있는 사람이라고... 이렇게 소개한다면

교회 사무실에서 너무 답답할 거예요. 
'왜 그러시냐고, 도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시냐고?' 

그런데 말을 엄청 더듬는 사람이라도. 거기 가서 
"지금 가가가강사님이 그 보보보보 볼펜..." 
그러면 직원이 "아 알겠어요" 
말을 심하게 더듬어도 전달만 되면 된 거지요. 

'그렇게 하면 되는 거구나' 
설교자는 주님이 주신 메시지를 전달만 제대로 하면 되는 거죠.
성도들이 알아들으시면 되는 거죠. 
그 이후로 제 마음이 편안한 거예요.

그때부터 다른 목사님들이 설교를 잘 해도, 제 마음에 은혜가 돼요. 
그 전에는 설교 잘하는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 제가 속에서 화가 났어요. 
은혜가 되는게 아니라... '어떻게 저분은 저렇게 말씀을 잘 전하는 거지?'
그게 너무너무 힘든 거예요. 

근데 이제는 '그분은 그분대로 쓰시고, 나는 나대로 쓰시는 거지..'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때부터 제 말씀 전하는 사역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그 믿음이, 하나님과 저 사이에 뭔지 모르게 딱 막혀 있는 것들을 탁 풀어내 버렸어요. 

△한번은 어떤 분이 제게 그렇게 글을 써 보내셨어요. 
"목사님, 저는 목사님이 천천히 말씀해 주셔서, 너무나 은혜를 받습니다." 
그런 분도 계시네요. 천천히 말해줘서 은혜를 받는다니... 

또 어떤 분은 이렇게 썼어요. 
"저는 브라질에서 오래 살아서 한국말을 잘 이해 못 하는데, 
놀랍게도 주님이, 유목사님 설교는 다 이해하게 해주세요." 

'아, 나는 이런 분들한테 쓰임을 받는 모양이다. 
해외에 있는 1.5세, 2세들, 
한국말 많이 잊어버린 분들, 
그런 분들에게는 제 설교가 은혜가 되나보다...'

△얼마 전에 제 설교를 비판하던 분이 댓글을 올리셨어요. 
"예전엔 목사님 설교가 느리다고 생각했는데, 차분하신 순전한 설교시더군요. 
성질 급한 제가 미흡한 죄였습니다. 사과드립니다." 

뭐 꼭 그렇게 사과를 안 하셔도 되는데, 또 그렇게 보셨다니까 감사한 거죠. 

여러분, '진짜 내가 믿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받았나?' 
'내 안에 주님만 드러나시면 된다. 이제는 나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고...' 

예수님을 진짜 영접하고 나면, 
더 이상 자기 자신에 대해서 연련할 사람이 없어져요. 
'내가 이러쿵저러쿵 무슨 상관이 있어?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신데...' 
이보다 놀라운 일이 어디 있어요? 

▲오늘 본문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이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신 참 놀라운 기적의 사건인데,
이 본문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데 초점이 있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전갈을 듣고도 
즉시 나사로 집으로 오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늦게 가셔서, 나사로가 죽은게 아니에요. 
예수님은 이미 나사로가 죽은 걸 아셨어요. 

예수님이 거기서 조금 더 머무르시다가, 장례가 다 끝나고 난 다음에 베다니로 오셨어요.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는, 
그 사건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주시려는 교훈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게 뭐였냐면 '믿음'입니다. 

'아 이번 기회에 <믿음>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분명히 가르쳐야 되겠다'
그런 생각을 하셨던 거예요. 

요11: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될 때, 거기 계셨다면, 아마 나사로를 고쳐 주셨겠죠. 
근데 예수님이 거기 계시지 않는 바람에, 나사로가 죽었어요. 
예수님은 그걸 기뻐하셨다는 거예요.  :15

왜 예수님이 기뻐하셨나요?
'이는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하려 함이라' :15b 

말씀이 잘 연결이 안 돼요. 근데 주님이 말씀하신 의도를 여러분이 잘 좇아가셔야 돼요. 
예수님이 나사로가 죽은 것을 통해서 
'아 잘 됐다. 잘 죽었다' 이렇게 기쁘게 생각하신 게 아니고,

'친구가 죽은 게 슬프지만, 이왕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 잘 됐다.
왜냐면 제자들에게 이제 내가 믿음을 가르칠 수 있겠구나
그리고는 예수님이 나사로가 죽은 그 곳으로 돌아오세요. 

왔더니 이미 장례는 끝났죠. 예수님께서 그 나사로가 살던 동네로 오셔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는데,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데 목적이 있는게 아니고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게 돼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게 되었을 때, 
그때 제자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부활할 것이라고 믿을 수 있겠느냐?' 
제자들의 믿음을 걱정하신 거예요. 

그래서 이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통하여 
'아 예수님은 부활의 주님이시구나!'
이 사실을 명확하게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싶으셨던 거예요. 

▲또 하나,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난 다음에, 이제 제자들만 남았어요. 
자 초대교회가 시작이 됩니다. 그때 무서운 핍박이 일어나게 돼요. 
사도들은 다 순교합니다. 요한 사도만 맨 마지막까지 오래 살았죠.

다른 사도들은 다 순교했어요. 
자 순교하는 일들이 막 벌어지게 될 때, 
'그때도 죽음의 끝이 아니고 부활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느냐?' 
그 믿음을, 이 나사로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은 가르치려고 하신 거예요. 

40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아무리 절망적인 순간이라도, 모든게 끝난 거 같아도, 
이제 내가 죽을 것 같은 그 상황에도, 
'예수님을 믿으라. 예수님을 믿으면, 내가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그 말씀을 하고 싶었던 거예요.

마르다가 예수님이 베다니로 늦게 오셨을 때에, 마음에 좀 원망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계셨더라면 우리 오빠가 안 죽었을 텐데...' 
그러면서도 위대한 신앙고백을 해요. 

요11: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하나이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5~26

마르다는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27

대단한 믿음의 고백이죠. 근데 중요한 것은, 
이런 믿음의 고백을 했으면, 마음이 달라져야 되잖아요. 

마르다가 진짜 믿었다면, 그런 기가 막힌 상황에서도 
자기 마음에 평강과 기쁨과 감사가 넘쳐야... 진짜 믿음인 거죠.

말로는 '믿는다'고 고백은 했는데, 여전히 슬프고, 여전히 염려가 되고, 여전히 낙심이 되고, 
그러면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냐 말이에요.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신앙고백은 기가 막힌 고백을 해요.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시고. 예수님은 나의 구주시고.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이건 엄청난 고백이에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가 우리에게 있고...' 
문제는 그러면서도 왜 성도들이 여전히 근심 걱정 속에 사느냐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그 위대한 고백을 한 마르다에게 
'무덤의 돌을 옮겨 놓으라. 네가 그렇게 믿는다고 했으니 이제 무덤의 돌을 옮겨 놓으라' 
그랬더니 마르다가 뭐라 그랬어요?
'주여, 죽은지 나흘이나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39 

아니 그렇게 말로는, 엄청난 믿음의 고백을 해놓고 
예수님이 이제 나사를 살리시겠다고, 돌을 치워 놓으라 하니 
'주여, 벌써 시체가 썩어 들어갑니다. 안 돼요. 주님도 못해요!' 이런 뜻이잖아요. 

△여러분 이게 지금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마르다와 똑같죠. 

우리는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신 걸 다 믿어요. 
예수님은 나사로를 죽은 가운데 살리셨다... 다 믿어요. 

그런데 그 나사로를 살리신 주님이, 지금 내 안에 계시다... 그건 애매해 합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주님이 내 안에 계시다.' 
'오병이의 기적을 행하신 그분이 내 안에 계시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주님이 내 안에 계시다.' 
아니 이 사실을 진짜 믿는다면, 이건 얼마나 놀라운 일이에요? 

많은 분들이 예수를 믿어도 삶은 안 바뀐다고 이야기를 해요. 
여전히 자기 성질대로 믿는다고 그래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를 안 믿으니까' 그 성질이 안 바뀌는 거예요. 
예수를 진실로 믿으면 다 바뀌게 돼 있어요. 

△여러분, 담임 박목사님이 집에 심방 오시면, 너무 좋으시겠죠, 그죠?
예배 인도해 주시고, 축복기도 해주시고, 그럼 얼마나 좋아요?

근데 만약 심방 오셨다가 자기 집에 돌아가시지 않고,
계속 여러분의 집에 눌러 사신다면 어떨까요?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이제 TV 예능 프로그램도 제대로 잘 못 봐요. 
부부싸움도 끝났어요. 
애들한테 맘대로 소리 지르지도 못해요. 
매일 가정 예배 드려야 할 거예요. 

담임 목사님이 우리 집에 와서 사시면,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 가정의 모든 생활이 다 달라질 거예요. 

자 그렇다면, 예수님이 내 마음에 계시면 어떨까요?
 
아니 담임 목사님만 우리 집에 와서 사셔도, 생활이 다 달라질 거라면, 
예수님이 내 마음에 계신데, 어떻게 사람이 안 바뀌겠어요? 다 바뀌죠. 

그러니까 '예수를 믿고도, 사람이 안 바뀌었다'는 말은 무슨 뜻이에요? 
예수님을 진짜 믿는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냥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더라' 
그거 그냥 귀로 들어서 아는 거지, 
뭐 그 주님이 진짜 내 안에 계시는 게 아닌 거죠. 그 믿음이 생각일 뿐이지, 현실은 아닌 거죠...

오늘 이 밤에, 여러분이 뭘 해결해야 되는 거죠?
2024년 한 해는, 2023년과 달라져야 될 거 아닙니까?
여러분, 새해에 완전히 바뀌기 원하신다면,
전에 귀로 들어서 아는 주님을, 이제는 확실히 현실로 믿고 사시게 되시기 바랍니다.

▲제가 2007년 10월에 한 달 동안 병원에서 이런저런 수술을 하느라고 
주일 설교도 못하고, 모든 집회 다 취소하고 난리가 났었어요. 

'무슨 일일까? 무슨 큰 중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왜 이런 여러 수술이 겹쳐지면서, 설교도 못하고, 
그냥 병원에서 한 달 동안 꼬박 지내는...

하루는 아무도 없을 때 '기도해야 되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침대에 앉아서 기도하는데 갑자기 방언이 터졌어요.

너무 너무 애통한 마음이 들었어요.
'하나님 제가 왜 여기 있어야 됩니까? 무슨 뜻입니까?' 

제가 방언으로 무슨 기도를 하는지, 제가 다 알 수는 없지만 
기도하는 중에 주님이 제게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너는 설교하지 못해서 답답해 하지만, 
네가 설교하는 것과, 실제로 사는 것 사이에 틈이 생기는 것을 작게 여기면 안 된다.' 

제가 깜짝 놀랐어요. 저는 설교를 못해서 답답해 했는데, 
주님은 '네가 설교하는 것과, 사는 것 사이에 차이가 생기면 안 된다. 
설교한 대로 살지 못하고.. 사는 대로 설교 못하고..' 그게 더 심각한 문제라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이해하시죠? '목사가 설교를 할 때 
자기가 그렇게 살지 못하지만, 성경 말씀이 그러니까, 그대로 설교할 수밖에 없다... 
꼭 사는 대로 설교할 수는 없는 거다...'  

그런데 주님은 제게 '그러면 안 된다'는 거예요. 
저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어떻게 사람인데... 목사도 사람인데, 어떻게 설교한 대로, 그대로 살 수 있나?' 

'하나님이 그건 안 된다 그러시면, 그러면 나는 설교를 그만 내려놔야 되나? 
어떻게 말씀대로 그대로 살면서, 그렇게 설교할 수 있나?' 
제가 너무너무 답답한 거예요. 
수술 받은게 문제가 아니고, 이제 더 심각한 문제가 생긴 거예요.

그 2007년부터 한국 교회 안에 난리가 나기 시작했어요. 
유명한 목사님들이 이런저런 스캔들로 언론에 나오고...
그때마다 주님의 말씀이 제게 너무너무 두렵게 느껴지는 거예요.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건가!' 

▲근데 그때 하나님께서 제게, 
설교자가 말씀대로 살 수 있는 길이 뭔지를 깨우쳐 주셨어요. 

천안에 가면 '유관순 기념관'이라는 큰 체육관이 있습니다. 
그 체육관에서 연합집회가 열려서, 제게 설교를 해 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설교를 하러 갔더니, 체육관에 교인들이 꽉 들어찼어요. 
막 찬양을 하고 기도하는데... 보통 열기가 아니에요. 

'내가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해야 되다니...' 
거기 가서 기도하는데 정말 정말 마음이 쉽지 않더라고요. 

이제 순서가 되었다고 강단을 올라오래요. 
강단에 올라갔더니, 높은 곳에 강단을 만들었는데, 
거기에 뒤에 의자에 앉아 보니까, 교인들이 빽빽이 둘러서서 
강단에 올라온 저를 보고 있는 거예요. 

여러 카메라들이 저를 비추고 있어요. 
여러분, 그게 얼마나 두려운지, 여러분도 서 보세요.
이거 우황청심원 먹어야 되는 일인 거예요. 

그때 말씀이 생각이 나는 거예요. 
히12:1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여러분 우리는 절대로 혼자 있는 시간이 없어요. 
허다하게 많은 믿음의 증인들이 지금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어요. 

이 (신촌성결) 교회를 개척하신 이성봉 목사님을 비롯해서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다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고요. 

그걸 여러분이 진짜 믿게 되면, 
'하나님 앞에 있는 수많은 성도들이 나를 보고 지켜있다.' 
내가 믿음의 길을 가면, 우레 같은 박수가, 
내가 만약에 잘못된 길로 가면 탄식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그걸 여러분이 정말 알게 되면, 말씀대로 안 살 사람이 누가 있어요? 
히12:1b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정말 믿으면 다 그렇게 할 거예요.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보고 계세요. 
예수님은 지금 내 안에서, 내 마음과 생각까지도 다 살피고 계세요. 

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

그때 그 병실에서,
제가 육신적으로 여전히 죄성이 내 속에 있지만, 
'말씀 그대로 살면서 설교할 수 있는 길이 여기(히12:1~2)에 있는 거구나' 
그래서 그때부터 '예수 동행 운동'을 하게 된 거예요. 

'예수님과 동행합시다. 주님 바라보세요. 지금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허다하게 많은 증인들이 지켜보고있음을 아셔야 돼요.' 

그래서 영성일기를 매일 쓰도록 권면하고
'주님을 오늘 얼마나 주님을 생각하고 살았나? 
오늘 얼마나 허다하게 많은 증인들을 의식하고 살았나?'

이 믿음이 분명해져야, 주님이 나와 함께 해 주시고, 
또한 불평, 원망이 다 떠나가고, 염려, 근심도 떠나가고 
사랑하고 기뻐하고 감사하고, 고난도 오히려 축복이라고 믿어지고 
모든 은밀한 죄가 다 끊어지는 역사가 그렇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어디서 만났어요? 황량한 들판에서 만났어요. 
예배당에서 만난게 아니에요. 

모세가 어디서 하나님 만났어요? 늘 양치던 그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어요. 
사도바울이 어디서 예수님을 만났어요? 늘 다니던 다메섹 그 도상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어요. 

무슨 뜻이죠? 여러분이 예배당에서만 주님을 만나는게 아니라는 거죠.
이런 부흥의 때나, 기도원에 올라가서, 거기서만 은혜 받는 게 아니라니까요. 
일상생활 가운데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야 되는 거예요.

지금도 주님은 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눈을 감고 
'주님, 제가 사랑합니다. 주님, 나는 죽었습니다. 저는 주님께 너무 감사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고백만 한번 해 보세요. 그러면 느낌이 달라져요.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너무 힘들다. 죽을 것 같다. 미치겠다...' 하는 곡소리가 나올 때,
잠시 묵상하며 '주님, 제가 사랑합니다. 주님, 나는 죽었습니다. 저는 주님께 너무 감사합니다.' 
그 고백을 해보시라는 거죠.

그러면 달라지실 겁니다.
마음에 믿음이 다시 회복되실 겁니다.
주님이 내 곁에서 나와 동행하고 계심이 믿어지면서,
'지금 주님이 내 마음에서 역사하고 계시는구나' 하는 느낌이 올 거예요.

그러면 '예수, 우리 왕이여 이곳에 오셔서' 찬양도 부르시고요,
이 집회 시간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다 주님을 만나는,
그래서 주님과 나 사이에 막힌 담이 다 무너지고 없어지고,
정말 믿음으로 사는... 권위있고, 능력있고, 안정되고, 평안한... 성도님들 다 되기길 축원합니다.

벧전1:8~9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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