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치유하라 요일5:18, 왕상3:6, 시26:1
요일5:18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우리가 살면서 아주 큰 문제라고 생각하고, 아주 심각해 하는 문제들이
실제로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문제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의 마음 속에, 마음을 무겁게 하고 힘들게 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주님으로 부터 분별을 받으실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진짜 그렇게 큰 문제인지...?'
우리가 요즘 겪고 있는 문제들의 상당히 많은 부분이 '돈'에 대한 문제입니다. 돈 걱정인 거죠.
뭐 정말 무서운 전염병처럼, 돈이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근데 이 돈 문제가 그렇게 큰 문젠가요?
성경을 가만히 읽어보면, 주님은 계속해서 '염려하지 마라, 먹고 사는 것 가지고 염려하지 마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이 보시기에는 이건 염려할 거리도 안 된다... 그런 뜻이죠.
사업을 하다가 부도난 집사님이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이 아내'였다는 거예요.
자기는 얼마든지 다시 일어날 자신이 있었지만,
'고생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아내가, 남편이 이렇게 사업하다가 부도가 난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아내도 물론 다 알고 있겠지만, 그 부도가 났다는 이야기를 집에 가서 할 수가 없어서,
그냥 자정이 넘도록 한강 변에서 '그냥 이렇게 죽어 버릴까?' 이런 생각까지도 했을 정도였다는 거예요.
부부 사이에도 말입니다. 돈 문제에 대한 염려가 서로 걸리면
이런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고, 자정이 넘어 집에 들어가니까,
아내가 집에 불을 다 켜놓고 남편이 들어오기 기다리고 있더래요.
남편이 방에 들어가니까, 아내가 꿀물을 타 가지고 와서 했던 말이
'나 고생할 각오 돼 있어요!' 였습니다.
그 남편 집사님은 정말 뭐라고 걷잡을 수 없이 통곡을 했대요.
자기가 왜 그렇게 그날 밤에 격하게 울었는지, 부끄럽기도 하고 이해도 잘 안 되지만,
그래도 아내가 '나 고생할 각오 되어 있다'는 그 말 한 마디에
그렇게 그냥 하염없이 울었답니다.
그렇게 울고 다시 일어났어요. 그 집사님이 다시 재기하고 교우들에게 간증 할 때,
그때 자기가 어떻게 다시 일어날 수 있었는지에 대하여
물론 하나님의 은혜지만, 아내가 '고생할 각오 돼 있다'는 그 말 한 마디 때문이었다고
그렇게 고백을 했었습니다.
여러분 '고생할 각오가 되어 있다' ... 돈 문제는 그러면 끝난 거죠.
'없으면 없이 살지 뭐!' 세상에 이렇게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가 있습니까? 그죠?
그렇게 간단한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큰 문제 같아 보여도,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문제가 많습니다.
그게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답답하신 거예요.
그리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고민 안 해도 될 거, 걱정 안 해도 될 것, 절대로 그것 때문에 망하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는
주님이 기도 중에 말씀으로 다 풀어 주십니다. 오늘 밤에도 그렇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아주 작은 문제 같은데, 굉장히 큰 문제가 있습니다.
아주 작은 문제 같은데... 이건 정말 잘 분별해야 합니다.
작은 문제처럼 여겨지니까, 우리가 기도도 안 하는데... 이건 정말 잘 분별 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자꾸 부부 싸움이 낮아지면... 부부 간에 언제부턴지 사랑의 감정은 다 식어버리고,
아내는 순종할 생각도 없고, 남편은 사랑할 마음도 없고...
언제부턴지 이렇게 되어 가고 있는 거... 이건 정말 심각한 문제거든요.
'뭐 살다가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이렇게 넘어갔다가는 큰일 날 문제입니다.
심각해져 있는 부부들 만나서 상담을 해보면,
'아, 처음에 문제가 생겼을 때, 이건 아닌데...'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그때 즉시 해결 했어야 되는 걸... '뭐 살다가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뭐' 이렇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가, 나중에는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어서야
이제 꺼내놓고 문제를 해결 하려니... 너무나 어려워지는 겁니다.
언제부턴지 기도가 안 되고 있어요.
오늘 이렇게 성령집회에 오셔도, 기도가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주여 삼창 부르고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또 기도제목을 가지고 교우들이 합심해서 기도하는 시간에도,
마음이 멀뚱멀뚱 ... 꼭 남의 일 같고 ... 뜨겁게 기도가 안 나오는 때가 있습니다.
'지금 그 기도제목을 위해서... 내가 기도할 마음이 안 생겨요!' 이런 사람이 있다니까요.
예를 들어 '우리가 군중 장교 수련회를 위해서 기도합시다!'
그래도 마음은 전혀 안 움직이는 사람이 있어요. 자기 문제도 아닌데, 뭐하러 기도하느냐는 거죠.
이건 절대로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 식어버린 마음 자체가 기도 제목이에요.
'하나님 제가 왜 이렇습니까? 어째서 성령의 역사에는 제가 전혀 반응이 안 되고,
내 마음이 영적으로 이렇게 돌덩어리처럼 굳어 있습니다...'
간만 굳어지는, 간 경화증이 큰 일이 아닙니다.
마음이 인색 해지는 거, 자꾸 부정적인 생각만 드는 거,
유난히 자꾸 까다롭게 되는 거,
'나도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 그렇게 가는 거' ... 이게 큰 문제입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 안에 굉장히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는 거예요.
영적으로 정상적으로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에게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니까요.
이런 일들은 당장 무슨 큰 일이 일어날 것 같지 않으니까, 심각하게 생각을 잘 안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작은 문제가 자라서... 나중에 큰 문제들이 생기는 거요.
▲이렇게 작아 보여도 매우 심각한 문제,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뭐냐면... 습관적인 죄의 문제입니다.
똑같은 죄를 계속 습관적으로 짓고 있는 거예요.
음란한 일에 빠져 있는 생활,
또는 혈기를 자꾸 내거나
말다툼을 많이 하고 소리를 지르는
거짓 말을 하는...
지금 직장에서 사업을 하거나, 또는 가정 안에서나,
내가 계속 똑같은 거짓말을 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아주 거짓 위에 살고 있어요.
이건 굉장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탐심도 그래요. 내가 손 대지 말아야 될 것들을 손 대고 있어요.
'이렇게 하면 안 되는데...' 이런 생각이 들면서도, 그걸 끊지 못하는 거죠.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계속 그 삶을 계속 지속하고 있는 거, 이건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 받았을 때,
우리를 이 습관적인 죄에서 건져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게 하시겠다고 약속 하셨어요.
'아휴, 죄 안 짓고 어떻게 살 수 있어?' 이런 생각이 얼핏 들기도 합니다.
저도 한동안은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저 자신도 잘 안 되니까...
'사람이 어떻게 죄에 안 짓고 살아?' 이런 생각이 제 속에 있었던 적도 있었어요.
근데 여러분, 이건 중요한 믿음의 문제입니다.
주일 예배 때, 우리가 교회에 이렇게 와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 회개 합니다. 제가 또 죄 짓고 왔습니다...'
여러분, 주일예배 때 회개기도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해요.
우리는 육신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아무리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우리는 늘 죄에 이렇게 넘어질 수 밖에 없어요.
그건 우리가 육신이 더러워 지는 것과 똑같습니다.
우리가 매일 씻는 것은, 몸이 계속 더러워 지니까 그런 거죠.
예수님이 부활 하실 때, 우리도 동 동일하게 부활할 것이다.. 라고 약속하셨어요.
그때 부활의 몸에 대해서 말씀하셨어요.
그 부활의 몸은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닙니다. 온전한 몸이에요.
그러나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몸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구원은 받았지만, 우리 몸은 여전히 육신이라서,
끊임없이 죄에 노출되어 있고, 죄의 유혹을 받고, 죄에 무너져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죄 짓고 회개하고, 죄 짓고 회개하는 생활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구원파에서는 이걸 완전히 반대로 가르쳐요.
'예수를 믿고 나면 더 이상 회개할 필요도 없다고!' 그건 무서운 이단이에요.
우리는 계속 회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에 와서 예배드릴 때 '하나님, 제가 지난 주간에 가만히 제 삶을 돌아보니까
또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여러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고백하고 회개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해요.
△그런데 이게 잘못된 경우가 어떤 경우냐 하면,
똑같은 죄를 반복해서 그냥 형식적으로만 회개하는 겁니다.
부부 싸움이 늘 잦았어요.
그래서 주일 날 교회에 와서 하나님께 회개합니다.
'용서해 주세요. 나도 잘못한 거 많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주일 저녁부터 또 싸워요.
아주 마음에, 교회에 와서 회개하면 자동으로 씻음받는 줄로 생각합니다.
이건 다른 문제입니다.
완전히 죄의 종노릇 하고 있는 겁니다.
끊임없이 같은 죄를 또 짓고 또 지으면서,
그저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 다 씻음 받는 줄로만 여기는 것은
회개를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왜곡하는 거예요.
우리가 주일에 '하나님, 내 죄를 용서해 주세요.'
이렇게 회개하고 고백하는 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고,
마음이 미어지는 일이어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주일에 하나님 앞에 회개했다'는 것 때문에
'내가 다시는 그거 돌아보고 싶지도 않다' ... 그러면 이 회개는 맞아요.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그런 회개를 통해서 우리가 정결함을 받는 거죠.
그런데 죄 짓는 거는, 우리에게 그냥 당연한 일이고,
하나님은 그저 자동적으로 용서해 주셔야만 되는 하나님인 줄로,
이렇게 생각해 버리고... 회개의 아픔도 없고, 눈물도 없고, 진정성도 없고,
도대체 뭘 정말 잘못한 것인지에 대해서 정확히 본인도 알지 못하고...
'아휴, 그냥 한 주간 동안 잘못 한 게 많았겠지...' 이건 진짜 무서운 겁니다.
그건 사실은 엄밀히 말하면, 진짜 회개가 없는 사람이에요.
▲여러분 복음은, 내가 늘 넘어지는 죄에서 우리를 건져 내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습관적인 죄를 짓지 않게, 우리를 자유하게 해줘요.
그렇다고 물론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이상,
우리가 전혀 죄에 안 짓고, 완전한 삶을 산다는 뜻은 아닙니다.
마귀가 더 이상 우리를 사로잡지 못하는 거예요.
한 번 유혹해서 넘어 드릴 수는 있어요. 근데 마귀가 우리 주인은 아니에요.
우리가 회개하고, 다시 정결케 되고, 다시 일어서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실제로는 마귀 종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건 다른 차원인 거예요.
-예수를 믿으면서 여전히 죄의 종노릇 하는 데서 그냥 살 수밖에 없느냐?
-또는 완전히 죄에서 자유하게 되느냐 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논쟁거리입니다.
흔히 법적으로는 죄에서 자유했고, 마치 칭의처럼 거룩하다 하는 자격을 얻었으나,
그 이후로는 이제 그 자격에 걸맞는 성화의 삶을, 일평생 추구하며 살아간다고 하죠.
저는 그걸 논쟁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성경의 약속을 보고 싶은 거예요.
주님은 뭐라고 했는지 말씀하는 거를 보고 싶은 거예요.
요일2:1절에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분명히 말씀은 그렇게 나와 있죠.
우리 주님은, 우리가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하십니다.
요일3: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낳음이라'
그러니까 여러분, 성경을 가만히 읽어보면
분명히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반복적으로 죄를 짓는 일에서 우리를 반드시 건지실'
것에 대해서 약속 하셨다는 거요. 뭐 더 이상 신학적으로 논쟁할 것도 없는 문제예요.
문제는 이제 우리가 그걸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겁니다.
▲시26:1절에 다윗이 아주 놀라운 고백을 하고 있는데
새번역성경으로 '나는 올바르게 살아왔습니다'
여러분 중에 아마 분노하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한 거, 우리아를 죽게 만든 거... 우리도 다 알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다윗이 '나는 올바르게 살아왔다'고 이렇게 말할 수 있냐 말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인데, '어떻게 올바르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나요?
근데 여러분, 시26편에 다윗의 고백은
다윗이 얼마나 의로운 사람인가를 말해주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가를 말해 주는 겁니다.
그리고 다윗의 믿음이 얼마나 큰 지를 말해주는 거예요.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리고 우리아를 죽게 만들었던 이런 큰 죄인입니다.
그런 다윗이 '나는 올바르게 살아왔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게 만드신 하나님이십니다.
'야~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우신가!'
우리는 다윗을 너무 잘 아니까, 다윗의 그 고백 속에서 놀라는 거예요.
또 더 놀라운 것은, 다윗의 믿음이에요. 아니, 자기가 어떤지 자기가 알 거 아니에요.
그런데 어떻게 그 입에서 '나는 올바르게 살았다고' 그렇게 고백할 수 있냐 말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그냥 한 말이 아닙니다. 뻔뻔하기 때문에 한 말도 아닙니다.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 인지를 자기가 잘 알아요.
그런데도 자기는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어요.
왜 그런가요? 주님 만을 의지하고,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주님만 계속 의지하고 살았어요.
이유는, 자기가 무서운 죄를 짓는 자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가 충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하고, 우리아를 죽도록 교사한,
그러면서도 자기는 그게 죄인지도 모르고 살 수 있는, 그런 자인 것을 자기가 알았기 때문에,
이후로 그는 더욱 주님만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솔로몬이 아버지 다윗을 굉장히 존경했던 것 같아요.
아들로부터 아버지가 그 신앙과 인격의 존경을 받는다는 것은
대단히 참 중요한 일인 것 같습니다.
솔로몬 성전을 짓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일천 번제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내가 너에게 뭘 해주기를 원하냐?' 하는 기가 막힌 제안을 받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솔로몬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왕상3:6 '솔로몬이 이르되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그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그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항상 주사 오늘과 같이 그의 자리에 앉을 아들을 그에게 주셨나이다'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 앞에서 행했던 사람'이라고 그렇게 기억하고 있어요. 그렇게 보였으니까요!
아들 솔로몬의 눈에 아버지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우리 아버지가 그랬다'고 고백하고 있잖아요.
어느 날 이 솔로몬이 만약 아버지 다윗 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시다.
'아버지도 죄 지은 적이 있어요?'
다윗이 뭐라고 대답 했겠어요?
'너가 태어나기 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
그럼 솔로몬이 뭐라고 대답 했겠어요?
'아버지 믿어지지 않아요. 아버지가 그런 사람이었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아요.'
이게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시려고 하는 거예요.
다윗이 얼마나 죄인이었음을 우리가 다 알잖아요.
그런데 그 아들 솔로몬의 눈에는, 솔로몬은 자기가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아버지가 남의 아내와 간음하고, 그 남편을 죽였던 일... 그 일 이후에, 솔로몬이 태어납니다.
솔로몬의 눈에 아버지 다윗은, '저 분이 어떻게 죄를 지울 수 있겠나?' 그런 분이었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주신 겁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약속입니다.
사람이 완전히 달라지고, 삶이 완전히 달라지는 거예요.
어떻게 그렇다고 그래서 완벽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욕심도 없고, 마음의 생각의 죄도 짓지 않고...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겠어요?
그럴 수는 없어도, 세상 사람들하고 비교해 놓고 보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에요.
습관적이고 은밀한 죄에서, 온전히 거듭 나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윗 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면,
그러면 누구나 다 습관적인 죄에서 벗어납니다.
시16: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시26:2~3 '주님, 나를 샅샅이 살펴보시고, 시험하여 보십시오. 나의 속 깊은 곳과 마음을 달구어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늘 바라보면서 주님의 진리를 따라서 살았습니다.' 새번역
다윗이 이렇게 살았어요. 그래서 다윗은 '나는 올바르게 살아왔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거예요. 하나님 때문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그렇게 바라보는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정말 습관적인 죄를 이길 수 있는 방법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고민하는 '내가 이 죄를 정말 이길 수 있을까? 다시는 이런 죄에 안 짓고 살 수 있을까?'
그런 죄가 만약에 있다고 한다면, 이렇게 해보세요.
오늘 저녁에 가족들에게 다 고백 하세요!
'내가 사실 이런 은밀한 죄, 습관적인 죄를 짓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이거 고치기 원합니다. 내가 이거 정말 해결하기 원합니다.
지금까지 내가 이런 걸 감추고 살았던 거, 정말 용서해 주시고
그리고 내가 다시는 그렇게 죄 짓지 않고 살도록 기도해 주시고, 그리고 계속 물어봐 주세요.
아침에 만날 때마다, 밥 먹을 때마다, 또 그 죄 지었냐? 하고 물어봐주세요. 계속 물어봐 주세요.'
또 교인들에게 속회에서 고백 하세요.
'제가 사실은 보기에는 이렇게 참 신실해 보이지만, 이렇게 엉터리 같은 죄를 짓고 살았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할 수 없는 이런 죄를 짓고 제가 살았습니다.
이제는 제가 여기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싶습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그리고 속회 때마다 계속 물어봐 주세요. 이번 주간에 괜찮았나요?'
영성일기를 제가 매일 매일 정직하게 쓸 텐데, 꼭 댓글로 달아주세요.
'그 죄에서 당신이 오늘은 깨끗하게 살았습니까?' 하고 물어봐 주세요.
그러면 어떻게 그런 죄를 또 짓고 살겠습니까?
사실 창피해서 말을 안 하니까 그런 거예요.
그 창피하다는 생각 때문에, 그런 죄를 전혀 안 짓고 사는 것처럼 이렇게 계속 사니까,
계속 그 죄의 종노릇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귀가 떠나지 못하는 거예요.
그런데 실제로 진짜 죽을 지경이 되면, 정말 그 죄를 벗어버리고 싶어요.
그럴 정도가 되면... (건강할 때, 그 죄를 버리는 게 낫겠죠)
여러분, 만약에 여러분에게 암이 있다고 진단 받았다고 해보세요.
암이 여러분에게 완전히 깨끗하게 떠날 수 있다면,
여러분은 뭐든지 하고 싶지 않겠어요?
죄는, 나병이나 암 병보다도 더 무서운 거거든요.
그것을 진짜 깨닫기 전이니까, 감추고 사는 거예요. 감추면 해결이 안 되는 겁니다.
'이게 암 병보다 무섭다. 이 죄를 가지고는 하나님이 나에게 복을 주실 수가 없다.'
그래서 이걸 진짜 해결 받고 싶으면요.
우리가 병원 가서 의사에게 다 벌거벗고 진찰 받는 것과 비교가 안 돼요.
그런데 사람에게 이렇게 고백하는 것도, 이렇게 참 놀라운 역사가 있는데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을 바라보는 영적인 감각을 키우는 겁니다.
사실 사람 의식하는 것도 이렇게 무섭다면,
나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이는 것은...
어떻게 그러고도 습관적인 죄를 반복해서 지을 수 있겠어요? 안 보이니까 그렇게 짓는 거예요.
주님이 안 보이니까!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게 안 믿어지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영적인 감각이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머리로 아는 정도지...
실제로는 믿어지지도 않고, 바라보아 지지도 않으니까, 그러니까 은밀한 죄에 묶여 사는 거예요.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이고 나면, 그런 죄를 지으라고 해도 안 짓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과 동행 일기를 쓰는 겁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영적인 감각을 키우기 위해서!
처음에는 나눔방 식구들이 더 의식이 돼요.
아직까지 주님을 바라보는 감각이 그만큼 안 되었기 때문에...
나눔방 식구들이라도 의식하면서라도, 내가 바로 살려고 노력을 해 보라는 거예요.
그럼 반드시, 더 이상 나눔방 식구가 없어도,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게 믿어 집니다.
근데 이제는 내가 다른 사람을 붙잡아 줘요.
아직까지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안 뜨 사람들,
그 사람과 같이 짝이 되어서 그를 계속 붙잡아 주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 성령님을 모시고 살지 않을 때는, '죄 안 지울 수가 없다'가 맞아요.
그런데 성령님을 모시고 살 때는, '죄 지울 수가 없다'는 게 맞아요.
어떻게 성령 하나님을 모시고 살면서, 죄를 지을 수가 있겠어요?
죄를 지었다가도 화들짝 놀라게 되는 거죠.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해서, 또는 완안함으로 인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 내 육신 대로 말하고 행동 해 버렸어요.
그러면 스스로 화들짝 놀라게 되는 거죠. 그리고 '주여,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애통함으로 주님께 나아가면, 약속 하셨어요. '즉시 씻어 주겠다'고.
그래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거예요. 이거는 습관적인 죄를 계속 짓는 것과는 다른 문제예요.
▲로마서 6:6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않도록,
우리 주님이 우리와 함께 십자가에 죽으신 거예요.
요일5:18절, 오늘 본문에도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하나님께로 나신 자가 나를 지킨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주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을 안다는 거예요. 믿어 진다는 거예요.
주님이 나와 같이 계시는 게 믿어 져요.
악한 자가 나를 더 이상 건드리지 못해요.
유혹은 옵니다. 전에 처럼 또 내가 죄짓는 유혹이 오긴 오지만
이제는 사람 의식하는 거 이상으로, 주님이 나와 같이 계신 게 믿어 지니까,
이제는 그 죄는 더 이상 나를 어떻게 하지도 못해요.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로, 십자가의 은혜로, 자유함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자유를 얻었어요. 죄에서 자유함을 얻었어요.
여러분 이 말은, 죄를 안 짓게 되는 능력을 가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제는 더 이상 죄 안 짓게 된다' 그런 말이 아닙니다.
'자유함을 얻었다'는 말은, 죄를 지울 수도 있고, 안 지울 수도 있는 사람이 됐다는 뜻이에요.
전에는 그냥 죄 짓는 사람, 죄에 안 지을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십자가의 은혜로 자유함을 얻어서,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안 지울 수도 있는 사람이 된 거예요. 그게 자유죠.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을 때, 아담과 하는 자유를 가지고 있었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있고, 마귀의 말도 따라갈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 상태로 돌아간 거예요. 마귀가 절대로 우리 주인이 아니에요. 이제는 유혹 자일 뿐이에요.
에덴동산에서 그랬죠. 마귀는 유혹 자였어요. 우리의 주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아담 하와가 그 자유를, 자기 육체를 위한 욕망을 위해 자유를 썼어요.
그래서 마귀를 따라 선악과를 따 먹죠. 그리고는 완전히 죄 종이 된 겁니다.
여러분, 우리도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가 지금 받은 것은 자유함 이에요.
죄를 따라갈 수도 있고, 안 따라갈 수도 있어요. 저절로 죄를 안 짓는 거 아니에요.
사도바울이 권합니다. '이 자유를 너의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아라'
갈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지금 이제부터 우리가 해야 될 일입니다. 더 이상 이제는 죄의 종노릇 하며 살면 안 되잖아요.
그렇죠. 더 이상 죄의 종노릇 하면서 살면 안 되잖아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자유를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이제는 주님을 따라가야 되잖아요.
그래서 '나는 죽었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겁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이 나를 죽이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를 죽이시면, 우리는 그냥 지옥이에요. 내가 나를 죽음으로 처리하는 겁니다.
그 때만 하나님이 우리를 받으세요.
우리가 진정으로 '나는 죽고 예수님이 내 왕이시라'고 이렇게 고백하고 살라는 거예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말씀을 오해 해요.
'아휴, 예수 믿었더니 예수님의 종이 되래.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래.
또 답답하게 어떻게 그렇게 살어?' 여러분 이건 완전히 오해예요.
우리가 '나는 죽었고 예수님이 나의 왕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더 이상 마귀의 종 되지 않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마귀의 종으로 살고 싶지 않으니까,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모시는 거예요.
이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자유로 인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놀라운 축복입니다.
'예수님, 나의 왕이 되셨습니다.' 이건 우리가 해야 되는 거예요.
저절로 그렇게 해주시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똑같이 예수를 믿어도, 예수님이 왕 이신 사람과,
여전히 자기가 왕인 사람으로 갈라지는 거예요.
예수를 같이 믿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다르죠?
이건 자기가 해야 됩니다. 우리 자신이 해야 되는 거예요.
'나는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왕이십니다.'
그 말은 더 이상 내가 죄 종이 되고 싶지 않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가장 심각하고 정말 심각하고 큰 문제가, 습관적인 죄를 짓고 사는 겁니다.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이 그 문제가 여러분 속에 있다면, 오늘 여러분이 여기서 벗어나야 됩니다.
주님은 이미 벗어날 길을 다 열어 주셨어요. 계속 그렇게 살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 '내가 더 이상 죄의 종으로 살고 싶지 않아?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기 까지 하셨는데
내가 또 다시 혈기에 사로잡히고, 음란에 사로잡히고, 거짓에 사로잡히고, 탐욕에 사로잡히고...
나는 절대로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여러분 단호해야 돼요. 그게 약속을 믿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시겠다고 하셨어요.
다니엘의 친구들이 금신상에 절하기 않기 위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단3:18절에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더 이상 죄에 고개숙이고 살지 않을 거예요... 라는 고백이죠.
계12:11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아무리 적그리스도가 나를 위협하고 유혹해도
'나는 죽을지언정 나는 절대로 너에게 절 하지 않아!'
'나는 더 이상 습관적인 죄의 종으로 살고 싶지 않아!'
이런 분명한 결단이 있어야 돼요.
이건 돈 문제나, 여러분의 진로 문제나, 여러분의 직장 문제나, 건강 문제보다
훨씬 중요하고 더 큰 문제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죄로 넘어졌다면, 즉시 회개하고, 주님으로부터 씼음을 받아야 돼요.
요일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근데 여러분 요즘 이 '회개' 문제 때문에, 사회적으로 논란이 벌어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죄를 지었는데, 그 사람에게는 회개 안 하고 있다가,
그가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고 그리고 세례를 받게 될 때,
그가 세례 간증을 하면서, 내가 죄를 지은 적이 있었는데,
내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말한 것 때문에
세상이 지금 발칵 뒤집혀져 있어요.
'아니,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를 구했다고 하면서
왜 정작 잘못한 그 당사자에게는 회개를 안 했냐?'
그래서 우리 기독교의 회개와 용서의 은혜에 대해서 사회가 막 시끄럽습니다.
회개는 분명하게 해야 돼요. 건성으로 회개하면, 이렇게 마귀가 참소합니다.
우리가 회개를 제대로 하지 않고 건성으로 넘기면, 마귀가 그거 절대로 그냥 두지 않습니다.
저는 그 일을 겪으신 그 분이 어떤 분인지 몰라요.
그렇지만 그분은 참 복이 있는 사람인가 봐요.
왜요? 하나님 앞에 갔을 때 드러나지 않고, 지금 드러났으니까!
그가 진심으로 '아, 내가 회개를 이렇게 건성으로 하면 안 되는 거구나' 깨닫고
진심으로 '내가 잘못했다, 용서해 달라' 그렇게 하면
그는 주님 앞에 설 때는, 이제는 정말 정결하게 서는 거죠.
그러나 그가 그렇지 않고 자꾸 숨기고 감추려고만 하면
그가 아무리 자기가 죄를 회개했다고 할지라도,
그건 하나님이 받으신 것인지는 알 수가 없는 노릇입니다.
▲어떤 분이 저를 찾아오신 적이 있어요.
목회 하면서, 굉장히 저를 힘들게 하셨던 분 이었는데, 뜻밖에 찾아오셨어요.
왜 찾아오셨는가 물었더니, 그때 자기가 잘못 하셨던 것들을 쭉 고백을 하셔요.
그리고 한 참을 우세요.
'목사님한테 그 고백을 드려야 자기가 마음이 풀릴 것 같아서...' 그래서 찾아오셨대요.
저와 그분이 같이 울면서 같이 기도하고, 정말 뜨겁게 끌어 안았어요.
뭐 별의별 일들을 많이 겪으니까, 누가 저에게 뭘 잘못한 게 혹시 있어도
마음에 두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지요.
근데 그 분에 대해서 내가 마음에 뭔가 섭섭한 걸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렇게 찾아오셔서 그분이 그렇게 고백을 하시니,
'하나님이 그 분 안에 맺힌 것을 다 푸시려고 하시는구나' 그렇게 생각하고서
진심으로 그 분을 축복해 드렸어요.
우리도 우리의 어떤 죄의 문제가 있으면, 사람에게 잘못한 곳이 있으면, 해결해야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진정으로 회개하는 삶을 살려고 하면
반드시 나를 사로잡고 있던 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사람에게도 회개하고, 주님 앞에서도 회개하고,
주님이 용서해 주신 들 정말 믿고... 계속 여러분이 이렇게 살면
그 다음에는 죄가 나를 넘어뜨리고 오지만, 더 이상 넘어지지 않습니다.
고전1: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이미 다 끝난 이야기예요.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의 의, 거룩함, 구원함이 되셨어요.
이미 끝난 이야기예요. 우리가 할 일은 그걸, 그 약속을 믿는 거예요.
예수님의 의로우심처럼, 거룩하심처럼 나도 그렇게 이미 되었어요.
이제는 그것을 실제로 내가 누리게 되는 일이 남아 있는 것 뿐입니다.
여러분! 이 말은, 어느 집에 양자로 들어간 고아가
양자가 되는 순간에, 그 집 가문에 이름이 올라가요.
그래서 나는 사실 고아이고, 제대로 교육도 못 받고, 생활 습관도 엉망이지만,
나는 그 집의 자녀로 법적으로 이미 인정 받았어요.
어디 가도 법적으로는 나는 그 집의 자녀 예요.
근데 그 집의 자녀로 잘 살지는 못해요. 왜냐면 과거에 하도 그렇게 안 살았으니까!
그러나 법적으로는 이미 나는 그 집의 자녀의 모든 권한을 다 누려요.
그리고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은 '내가 이 집의 자녀다' 라고 믿는 거예요.
'나는 이 집의 아들이요. 딸이다.'
그가 사는 거, 행동하는 거, 말하는 거 보면..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그래도 '나는 이 집의 아들이고 이 집의 딸이다'라는 사실을 믿고
그 집의 아들과 딸 답게 살아보려고 자꾸 살아가는 거죠.
그러다가 어느 날 어느 순간에 보니까 깜짝 놀랐어요. 의젖해 졌어요.
이제 이 집의 아들과 딸 같아요.
정말 말하는 거나, 행동하는 게... 그 집의 아들, 딸처럼 변화되었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이런 은혜 예요.
우리에게 죄를 이기는 완전한 은혜를 주셨어요.
그런데 아직 여전히 우리는 육신을 가지고 살아요.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어요.
예수님의 의가 내 의가 되고, 예수님의 거룩함이 내 거룩함이 되게 하셨음을 믿는 거예요.
죄의 유혹이 오고, 내가 혹시 넘어지는 순간이라도, 우리가 붙 잡아야 될 것은 믿음입니다.
'나는 죽고 나는 이제 예수님으로 삽니다.' 여러분, 이 점을 붙잡으셔야 돼요.
▲그러나 우리 목표는 '죄 짓지 않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목표는, 죄 짓지 않는 것을 목표로 삼으려고 하면, 사람이 이상하게 변질 돼요.
그러니까 율법주의자가 그렇게 됩니다.
율법주의자들, 제사장,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이런 사람들은
죄를 안 지어야 된다는 생각이 꽉 차 있었어요.
'나는 죄를 지으면 안 돼, 어쨌든지 율법을 어기면 안 돼!'
어쩌면 참 좋은 자세처럼 생각이 드는데,
예수님께서 그 율법 주의자 모순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이야기하셨어요.
강도 만난 자가 쓰러져 있는데 죽은 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시체를 만지면 안 돼요.
그러면 부정을 타서, 제사장 직책도 못 감당하게 되니,
제사장도 그 강도 만난 자를 보았는데, 자기 직책을 감당하려고
자기가 부정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그냥 지나가 버렸어요.
레위인도 그냥 가버렸어요. 이게 율법주의자 예요.
율법주의자는 죄를 지으면 안 돼요. '나는 죄 지으면 안 돼!' 항상 그러면서 살았어요.
또 남을 향해서도 '저 사람 죄인 아니야?' 이런 식으로 따지고 비판하고 했어요.
성경과 예수님은, 우리를 그런 사람(율법주의자)으로 만들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진짜 원하는 것은, 예수님과 동행하는 거죠.
예수님과 동행하면, 죄 지으라고 그래도 지을 수 없어요.
죄 짓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보다, 주님과 동행하려고 애쓰는 것이 정답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자기도 죄에서 벗어나지만,
죄 짓는 사람이 혹시 있으면, 주님의 마음으로 그를 긍휼히 여겨요.
자기도 육신의 속성으로는 똑같은 죄인 이니까, 절대로 그를 정죄하게 되지 않아요.
이게 바로 죄 짓지 않는 자의 진짜 모습이에요.
자기가 끊임없이 죄의 유혹을 받고 있음을 자기가 경험하고 아니까,
누가 죄에 무너진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을 정죄하기보다는,
어쨌든지 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고, 사랑으로 품어주고, 바로 세워주려고 하는 거죠.
예수님 안에 사는 자가 이런 사람입니다.
▲어느 분이 인터넷 뉴스를 이렇게 검색하다가, 어느 정도 좀 시간이 지나고,
그러다가 음란한 것을 보고 무너진 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인터넷 뉴스를 자꾸 이렇게 검색하게 되는 것이, 그게 뭐 죄 겠어요?
그런데 분별을 해봐야 됩니다.
'내가 왜 자꾸 인터넷 뉴스를 보지?'
자기 속에 허전함이 있는 거예요. 내 속에 허전한 게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꾸 무언가로부터 자극적인 것을 얻고 싶은 거예요.
이러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예요.
아니, 기도 제목을 찾으려고 뉴스를 볼 수도 있어요.
또 중요한 나라의 사건이 있으니까,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서 알아볼 수도 있고요.
그런데 그냥 계속 습관적으로, 여기 저기 기웃기웃 거리면,
내 영적인 상태가 주님으로 인하여 기쁘지 않다는 거예요.
예수님으로 인하여 만족이 없다는 거예요.
이거는요, 아주 작아 보여도, 굉장히 심각한 문제예요.
그러다 보니까 결국은 음란물로 가는 겁니다.
더 자극적이고 더 자극적인 것으로, 그리고 정말 비참하게 무너지는 거예요.
마귀는 막 깔깔대고 춤을 추고, 성령께서는 근심하고 탄식하시는... 이런 처지가 됐어요.
구원 받고 나서도!
그러니 여러분, 주님과 동행하는 이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아직까지 내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그렇게 심령이 기뻐하게 되면
인터넷 뉴스도 내가 통제, 절제할 수 있어요.
인터넷 뉴스를 보지만
성경 볼 시간, 기도할 시간, 그리고 사람을 만나야 될 시간, 사명 감당할 시간
그런 거 충분히 내가 다 낼 수 있어요. 그러면 괜찮은 거죠?
그런데 본인은 압니다.
본인은 '내가 요즘에 뭔지 모르게 내 심령이 굉장히 매말라 있다.
내가 왜 자꾸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있지?'
그렇다면 정신 똑바로 차리고 돌아와야 돼요. 주님을 다시 붙잡으셔야 됩니다.
▲영성일기를 쓰기 시작하는 어느 성도님이, 자기 일기를 쭉 이렇게 고백해 주셨어요.
「영성 위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내 안에는 나도 싫어하는 기질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일기를 쓰는 동안, 나 자신의 초라함만 드러난다.
지금의 나는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누리고 있다고 말할 수가 없다.
그러나 실패하지만 일기를 계속 쓰다 보면,
반드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 주실 것이다.
창세기 1:26절 말씀을 붙잡는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아멘!
'주님, 그리 해 주소서.'」
「10일 만에 다시 쓰는 일기다.
지난 10일을 돌아보면 영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멀어졌던 가를 느낀다.
조금만 흐트러져도, 예전의 나의 생각과 나의 모습으로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니
더욱 나를 쳐서라도 주바라기를 해야겠다.」
그리고 또 얼마 뒤의 일기입니다.
「교통 체증이 심하다. 다른 때 같으면 엄청 짜증 나는 일이었는데
오늘은 찬양을 들으며 운전할 수 있는 시간이 길어짐에 오히려 감사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생각 자체만으로, 마음이 훨씬 가벼워 짐을 느끼게 된다」
또 며칠 뒤 입니다.
「저녁 늦게 퇴근해서 가족 예배를 인도 하는데, 아이들의 짜증이 장난 아니었다.
순간 '예수님, 여기서 화내면 제가 사단에게 지는 거죠?'
바로 주님의 마음을 품어 본다.
아이들을 달래서 말씀 읽고, 묵상하고, 축복하고, 가정 예배를 마무리 지었다.
하루의 마지막을 주님께 영광 돌림으로 마치게 하심을 감사드린다」
변해요.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과 교재가 깊어지면,
처음에는 완전히 무너진 마음이,
이제는 더 이상 죄가 나를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 속에 작은 죄 같이 보여도, 그게 너무 고통스러운 것은.. 축복입니다.
무심히 넘기지 않으려고 하는 자세가 필요해요.
또 '습관적인 죄에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
하고 믿는 것은, 약속을 붙잡은 거예요.
오늘 이 밤에 죄에서 승리하는 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죄가 여러분을 더 이상 사로잡지 못 합니다. 예수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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