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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인 명설교편◑/유기성목사 명설교(199편)

율법주의자를 대하는 바울의 지혜로운 처신 행21:17~26

by 【고동엽】 2022. 2. 10.

율법주의자를 대하는 바울의 지혜로운 처신        행21:17~26  

 

 

사도행전 21장은, 사회/문화적인 배경이 없으면,

성경을 읽어도 무슨 내용인지 아리송 한데, 아래 설교문은 본문 설명을 잘 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 설명

 

본문은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에 도착하여, 선교 보고를 하는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에 이방인들에 대한 3차 전도여행 보고를 하였을 때,

야고보 사도를 비롯한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이방인 선교 보고를 기쁘게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너무 놀랍고

그리고 사도바울 같은 사람을 쓰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러나 마음이 편치만 않았습니다.

이유는 예루살렘의 유대인 교인들 중에

사도 바울을 싫어하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가는 곳 마다

“이방에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모세를 배반하고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절기와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수만 명의 신자가 생길 정도로 부흥하였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가 유대인들에게 복음 전할 때,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그들이 율법과 할례, 규례를 여전히 함께 지키는 일을 용납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율법을 생명과 같이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이유도, 율법을 어겼다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랬던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게 될 때

율법을 지키는 일은 다 청산하고, 이제 예수만 믿으라고 하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 전부가.. 율법 지키는 문화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율법도 지키고/ 할례도 하고/ 관습도 지키면서

예수도 믿으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예수를 믿기는 믿지만, 율법도 생명처럼 여기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도 바울에 대해서

대단히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번 오면 따질 거다!’ 이렇게 벼르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나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이 아주 난감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와서 선교 보고를 할텐데,

이것을 어떻게 수습을 해야 될까?’

그래서 야고보 사도가, 제안했습니다.

 

“사도 바울이여, 당신이 율법을 지킨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에게 좀 분명하게 알립시다!

지금 우리 중에 네 사람이 결례를 서원한 성도가 있어, 그들이 성전에서 결례를 행하게 되어있는데

당신도 같이 하시고, 그리고 그 결례에 들어가는 비용을 당신이 부담하세요.

그러면 우리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아, 사도 바울도 율법을 잘 지키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사실은 사도 바울이 율법 지키는 문제에 대해서

예루살렘 교인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은.. 좀 억울한 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율법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친 것은

<구원 문제에 대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일에 있어 율법을 지키느냐/안 지키느냐..

할례를 받았느냐/아니냐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에게는 이미 상식이지요?)

 

그러나 이 당시만 해도 그것은 굉장한 쟁점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복음을 믿기만 하면

누구나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다 구원을 받습니다.'

그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정확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이방인 선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율법을 지키는 전통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은 나쁜 것이니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도 율법을 지켰습니다.

 

겐그레아에서 서원한 것 때문에 머리를 깎은 적이 있었고,

디모데에게 할례 받게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단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증거하였을 뿐입니다.

문제될 것 없는 온전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온전한 복음, 그것이 문제가 되는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어쨌든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사도 바울로 인하여 난감하였습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사도 바울도 율법과 규례를 지킨다는 것을

유대인들에게 보여주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그래서 네 사람의 교인과 함께, 바울이 결례를 행하도록 합니다. 행21:22-24

그리고 그 비용을 바울에게 대라는 것입니다.

 

결례란 일종의 정결 예식입니다. 보통 한 달간 하는데

시작할 때와 끝날 때 머리를 깎고, 그 기간에는 금욕생활을 합니다.

결례 기간이 차면 제물을 드리는데, 그 비용이 만만치 않아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부담이 되며,

부자는 가난한 사람들의 결례 비용을 부담하는 것을 신앙의 덕으로 여겼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울이 율법을 경멸하는 자나, 반대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중히 여기는 자라는 인상을 심어주려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의 지혜로운 처신

 

이러한 제안을 받은 사도 바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크게 시험 들만한 일입니다. 바울은 전혀 잘못한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율법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특히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할 것도 없다.

유대인들이야 늘 율법을 지키며 살아왔으니까.. 율법 준수에 무리가 없겠지만,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강요하지 말자.”고 한 것입니다.

 

옳은 일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인 선교보다

율법 지키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니.. 이것은 본질을 왜곡시키는 것입니다.

 

문제가 있다면,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 교인들이고 그 지도자들입니다.

온전한 복음을 믿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서는 할 말이 많습니다.

 

온전치 못한 복음으로.. 예수를 믿는 예루살렘 교회의 개종한 유대인들이

오히려 온전한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을.. 지금 비난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게다가 그 힘들고 어려운 이방인 전도를 하고 왔더니,

칭찬은 고사하고 죄인 취급을 하는 것입니다. 힘이 빠지고 좌절할만한 일입니다.

 

정말 누가 잘못된 것인지 따져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굉장히 성격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논리적이고 치밀하고 공격적이었습니다.

 

게다가 이방인들에게 '율법 준수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고 가르쳤는데,

이제 자기가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모습을 보여주라니

거꾸로 이방인 교회 교인들을 혼란시킬 만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사역 전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유대인 교인들이 오해한다고

사도바울의 사역에 큰 지장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그 보다 더한 핍박을 받으면서도, 복음은 잘 증거 되었던 터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너무나 순순히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문제에 부딪혔을 때

놀랍게도 전혀 아무런 자기 주장도 하지도 않고, 논쟁도 하지 않고, 따지지도 않고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가 한 제안을 그대로 다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한 이 결정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처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아는 지식으로는, 이것은 싸울만한 일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대해서 한번 논쟁해 볼 만한 일입니다.

“아니 도대체 누가 옳은지 한번 따져봅시다!

예루살렘 교회가 옳습니까? 이방인 교회가 옳습니까?”

 

여러분, 지금은 결론이 났습니다. 이방인 교회가 옳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의 준수 없이도)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아직까지 그 점에 대해서

온전한 복음으로 서있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그렇게 따질만 한데, 또 사도 바울은 그만한 자격이 있습니다.

굉장히 논리적이고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을 읽어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일절 아무 말을 안 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의 제안을 다 받아들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도 바울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가르쳐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옳고/그름을 뛰어넘은.. 사랑의 마음이요, 지혜로운 처신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 예루살렘 교회가 처한 어려움을 이해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유대교의 총본산입니다.

그 유대인들에게 율법의 영향에서 벗어나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무리한 요구였습니다.

 

그들은 아직 온전한 복음을 받아들이고

오히려 기뻐할 성숙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의 수준이, 아직 그 정도인 것을 어떻게 합니까?

 

 

◑적용

 

여러분, 우리가 어떤 일에 대해서 무엇이 옳고/그른지를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면 안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랑을 갖고서, 지혜롭게 처신해야 합니다.

 

 

교회 분열을, 지혜롭게 잘 해결한 사연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 성경 진리를 믿는다고 하지만

얼마나 전통과 사회 분위기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있는지 모릅니다.


제가 부산에서 목회하다가, 예배 때 부를 찬송 때문에 큰 위기를 만났던 적이 있었습니다.

뜨거운 경배와 찬양을 드릴 것인가/ 경건하고 조용한 찬송가를 부를 것인가?

이것을 놓고 토의하다가, (바닷가에 사는 투박한) 교인들 사이에서, 육박전에 가까운 다툼이 생긴 것입니다.

 

저는 그 때 ‘경배와 찬양으로 교회를 뜨겁게 세워가자는데,

왜 일부 성도들이 이해를 못해주나?’ 하며 좌절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것이 있어서

찬송가로 다 바꾸었습니다. 다시 과거로 환원한 것입니다.

찬송을 바꾸는 문제로 싸울 바에는,

원래대로 하고 싸우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하나님이 지혜를 주신 것입니다.

 

문제 해결은 ‘시간’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니까 저절로 다 해결되었습니다.

불상사가 일어난 지 꼭 3개월 뒤에 장로회의에서

장로님들이 너무 쉽게 만장일치로.. 경배와 찬양 스타일로 예배할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반대하던 장로님께서 허락하여 준 것입니다.

뜨거운 찬양 스타일을 싫어하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찬양 스타일이 익숙하지 않았지만

찬송가로만 예배드리는 것이.. 예배 분위기를 너무 가라앉게 만든다는 것을.. 비로소 모두가 느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경배와 찬양'을 반대하던 분들이..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찬성으로 돌아섰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해결될 것을..

그때 만약에 성경대로 ‘이것이 옳습니다!’ 라고 주장을 굽히지 않았더라면

교회가 갈라졌을 것입니다.

이것은 싸워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제가 깨달았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것이 정말 옳다 하더라도

    교회 일은, 싸워서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 내가 정말 옳더라도

    주장하고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합의를 해야 하는구나!, 기다려야 하는구나!’

 

    부족한 제게 비로소 지혜가 생긴 것입니다.

    이렇게 갈등의 위기를 넘어서자, 교회는 급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에 보면 에베소 교회에 대한 성령의 칭찬이 나옵니다.

계2: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6절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에베소 교회가 어려운 가운데도 진리를 수호하였다는 것을 칭찬하였습니다.

무엇이 진리인 것을 잘 안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무서운 책망이 나옵니다.

4-5절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에베소 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지식은 있었지만.. 사랑이 빠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식의 은사'는 있는데, 사랑이 없으면.. 다툼이 생깁니다.

'지식의 은사' 등 모든 은사의 사용은, 반드시 사랑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사랑 없이 사용하는 '은사'는.. 오히려 사람을 해치는 흉기로 둔갑할 수 있습니다.  

 

 

 

▲지도자의 자질

신학교 때 [인간관계 훈련]이란 과목을 들었었는데,

한번은 교수님께서 어떤 문제의 답을 구하는데,

7명 정도의 그룹에서 토의를 거쳐 답을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조건은 30분 안에 풀어야 하고/만장일치여야 하고/정답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날 저의 조는 답을 얻는데 실패하였습니다.

30분 안에 만장일치를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나중에 정답을 확인해 보니 제가 주장한 답이 옳았습니다.

그래서 더 속상했습니다.

 

마음속으로 ‘거봐 내가 옳았잖아.’했습니다.

그런데 그룹 평가회 때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끝까지 반대한 학생이 발언하기를 토론 중에

제 주장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너무 강하게 주장을 해서

자신이 틀렸다고 말하기가 싫었다는 것입니다. 자존심이 상하더랍니다.

그래서 그룹이 실패해 점수가 깎이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의견을 꺾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때 받은 충격이 꽤 컸습니다.

‘정답을 안다고 다는 아니구나,

다른 사람에게 설득시키고 하나 되게 만드는 지혜가 없다면

아는 것만으로 소용이 없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무엇이 옳은 것이고 무엇이 바른 것이다 하는 것만으로는

지도자가 될 자격이 없구나.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키고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들지 못하면

지도자 자격이 없구나. 내가 아직 지도자 자격이 없구나.’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무엇이 옳은 줄만 알면 되는 줄 알았던 것입니다.

 

 

 

▲마치는 말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고전 9:19-23

 

옳고/그름의 분별도.. 사랑 안에서 처신해야 합니다.

 

우리도 이러한 자세로 모든 일을 판단하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성도들을 사랑하게 되면

(내가 진리를 알고 있고, 내 판단이 옳지만)

사랑으로 처신하는 지혜를 갖게 됩니다.

어떻게 행해야 되는지를 알게 된다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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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 채지 못하게 가르치십시오.                   (펀 글)

 

가르침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도 당신만큼 잘 알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리처드 바크 

 

 

 

알렉산더 포프는

‘사람을 가르칠 때는 그 사람이 눈치 채지 못하게 가르치고,

새로운 일을 제안할 때는, 잊어버렸던 것이 생겨난 듯이 말하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남에게 가르침을 당한다는 것을 꺼려합니다.

스스로 알게 된 것 처럼 해주는 배려가

결국에는 그가 배울 수 있게 도와주는 일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 교인들에게, 한 수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들의 입장을 일단 이해하고, 수용합니다.

 

    목회자, 교사..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 한 가지는,

    시도 때도 없이/어떤 상황에서라도.. 

    자기가 나서서 주위 사람들을 한 수 가르치려 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훈시 강박증'에 걸린 것처럼 보이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습관적으로 그렇게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남의 얘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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