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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안에 있는 사람! (롬 8:1-11)

by 【고동엽】 2022. 2. 10.

예수 안에 있는 사람! (롬 8:1-11)

 

이어령 박사의 '아들이여, 이 산하를'이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어느 시골 마을에 수염을 길게 가꾸고 다니는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는데 동네에 사는 아이 하나가 할아버지 수염을 볼 때마다 궁금한 점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이는 할아버지를 만나 이렇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밤에 주무실 때 수염을 이불 속에 넣고 주무세요? 아니면 이불 밖에 내 놓고 주무세요?' 할아버지가 이 질문을 받고 금방 대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생각을 한번도 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말하기를 '얘야, 미안하다. 나도 미처 생각을 못해 본 일인데 오늘밤에 자보고 대답해주마'
할아버지는 그 날 밤 수염하고 씨름을 합니다. 수염을 이불 속에 넣고 자니까 답답하고 수염을 내놓고 자니까 이상하고 그래서 밤새도록 수염을 가지고 씨름을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30년 동안 달고 다닌 수염이지만 그 수염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예수 안에 있는지 예수 밖에 있는지. 진리 안에 있는지 진리 밖에 있는지' 알지 못한 채 믿는 신앙인의 태도를 풍자하는 그런 글입니다. /할/ ◀제목 소개!▶

 

여기 '예수 안에 있는 자'란 '성령의 역사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만인에게 유일하신 구원자로 알고 믿으며 그를 나의 생명의 구주로 영접하고 그와 연합하여 그의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할/ 우리 모두 예수 안에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①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1).
1절에서 '그러므로'라고 한 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의 결론이 무엇인지를 예고하는 그런 말입니다. 또 한 '이제'란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그 안에 있게 되기 전과 대비해서 우리가 그를 알고 믿고 그 안에 있게 되면서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을 언급하려는 확신을 알리는 그런 말입니다.
또한 '이제'라는 말은 앞으로 올 날 주님의 다시 오심과 함께 종말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완성이 어떤 것일지를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임을 알리기도 하는 그런 말입니다. /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누구인가?
⑴현재 나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맡긴 자를 의미합니다. 사람의 힘으로 못하기 때문에 주님께 전부 맡겨 버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저 사람을 용서 할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이 없습니다. 주님께 맡깁니다. 용서의 마음을 주시옵소서! 주님! 저는 이런 엄청난 큰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저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옵소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이 말씀을 굳게 믿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입니다. /믿/
⑵이런 자를 요15장에서는 포도나무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요15;5절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또 7-8절에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열매를 많이 맺어야 합니다. /아멘!/
⑶결코 정죄함을 받지 않는 자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가 뭐래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여기서 정죄란 법정용어로써 '당신은 이런, 저런 죄를 지었으므로 죄인이기에 몇 년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죄로 정하는 것입니다.
여기 '정죄함이 없나니' 이 말씀 속에는 '죄의 값을 치렀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예수 안에 정죄함이 없습니까? 예수께서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예수 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고소당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고소할 자가 없고 하나님 역시 우리를 죄인으로 보시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정죄함이 없다'는 말은, 예수 안에서 형벌이 없다는 뜻이며, 예수 안에 있으면 결코 멸망하지 않으리라는 뜻입니다. /할/


▶1절은 너무 중요합니다. 다시 한번 정리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셨습니다. 한 번 하나님이 선언하시면 취소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두 번 다시 우리에게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왜? 우리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까? 우리가 착하게 살아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에게는 반드시 정죄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옥에 던지움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할/
죽음의 사자가 애굽 땅을 지나갔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에는 죽음이 있었습니다. 큰 울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있는 집에는 아무런 일이 없었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피해 갔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집에는 어린양의 피가 칠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그 사람은 정죄함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멸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리고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기생 라합의 집에 있는 사람들은 살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집에 붉은 줄이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라합의 집에 드리워진 붉은 줄을 보고서 그 집은 멸하지 않았습니다. 그 외 여리고 성안에 있던 사람들은 다 죽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피난처가 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심판에서 생명으로 옮긴 자입니다. 지금 우리가 육신의 장막을 벗고 하나님 앞에 선다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질 것입니다. 내가 잘나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내가 착한 일을 많이 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기 때문에 주안에서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지은 죄를 자꾸 생각하면서 죄책감에 몸부림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간교합니다. 그래서 자꾸 우리를 정죄감 속으로 몰아넣으려고 합니다.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시험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말씀으로 이겨야 합니다. 말씀이 좌우에 날선 한 검이 되어서 악한 마귀의 궤계를 물리칠 수가 있습니다. /할/

 

②왜 정죄함이 없는가?(2)
여기에 두 가지 원리가 나옵니다. 하나는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죄와 사망의 법입니다. 바울은 똑같은 내용을 6;14절에서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은혜와 법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넘어가서 7;6절에서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영의 새로운 것과 의문의 묵은 것으로 대조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을 때는 법 아래 살았습니다. 우리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섬겼습니다. 벌을 받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떨면서 마지못한 마음으로 섬겼습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 얽매여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정죄함에 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율법의 모든 조항을 100% 완전하게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법 아래 살지 않습니다. 은혜 안에 살아갑니다. 우리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섬기지 않습니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깁니다. 기쁨이 충만해서 자발적으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주를 위해서 봉사하며 섬깁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에 따라서 살아갑니다. 심판에서 생명으로 옮겼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강물같이 흐르는 기쁨과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탕자의 비유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탕자가 집을 떠났습니다. 재산을 다 허비했습니다. 그는 뉘우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때 탕자는 마음속으로 이러한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아버지 앞에서 큰 죄를 저질렀지! 아버지의 재산을 다 허비했으니까 어찌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수 있으리요! 이제는 품꾼의 하나로 써달라고 말씀을 드려야지'
이것이 바로 율법적인 생각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떠한 모습을 보였습니까? 이미 아들을 다 용서하고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돌아옵니다. 아직도 상거가 멉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들을 얼른 알아차렸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뛰어갔습니다. 목을 안고서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갈아 입혔습니다. 살찐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할/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들이 돌아왔기 때문에 비로소 아버지가 아들을 용서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미 아버지는 아들을 다 용서하고서 애타게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잠시 뒤에 맏아들이 밭에서 일하다 들어왔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가 동생을 위해서 잔치를 배설한 것을 보고 원망했습니다. '아버지,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 아버지를 위해 지금까지 뼈빠지게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나를 위해 염소새끼 한 마리도 잡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와 더불어 탕진한 동생을 위해서는 살찐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베풀어주시는 것이 가합니까?'
이것이 바로 율법적인 생각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의 모습이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아버지가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얘야, 너는 나와 함께 있으니 나의 모든 것이 다 너의 것이지만 너의 동생은 잃었다가 되찾지 않았느냐? 죽었다가 되살아나지 않았느냐? 그러니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깨끗하게 용서해 주십니다. 두 번 다시 기억조차도 아니하십니다. /믿/
우리는 다른 사람하고 싸울 때 누가 우리에게 와서 잘못했다고 하면 말로는 용서해 준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그것을 완전히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한 번 써먹으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되 깨끗하게 용서하십니다. 두 번 다시 기억조차도 않으십니다.
우리는 더 이상 법 아래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가 과거에 지은 죄, 현재 짓는 죄, 미래에 짓는 죄까지라도 이미 다 용서하시고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와 사망의 법에 의해서 지배를 받습니다. 인생이란 죄를 범하면서 죽음을 바라보는 공포의 생애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죄인이라고 정죄를 받는 것은 죄와 사망의 법, 곧 행위 계약과 율법을 어긴 죄 값을 요구 당하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후손인 전 인류는 부지중에 이 법 아래 영육이 다 함께 죽었습니다. 여기 죄란 마음 속에 욕심이 뛰어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약1;15절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여기 '사망'이란 소멸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서 영원히 버림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양 사람이 흔히 말하기를 사람이 죽으면 혼을 하늘로 올라가고 육은 땅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 성경에 맞는 말입니다. 그래서 동양에서도 혼백이라고 합니다. 안식교인들은 영혼도 육체도 함께 죽는다고 합니다. 안식교에서 파생한 여호와의 증인들은 지상의 낙원을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 준 것은 사람의 육체는 죽고, 영혼은 낙원에 있다는 것을 부자와 나사로의 사건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는 것이 대를 이어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가 끊어지면 그 집안은 결손이 되어 죽는 것과 같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혼은 개인이 각각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윤회라는 것도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지옥과 천국이 있는데 예수를 믿는 사람은 천국으로,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지옥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지옥은 하나님과 단절된 곳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망은 하나님과 단절된 곳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죽어버리고 끝나버리면 예수 믿지 않아도 됩니다. 사망은 소멸이 아닙니다. 단절, 즉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와 사망의 법의 통치를 받는 불쌍한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른 법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의 저주에서부터 해방되는 구원의 복음입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 포로 되었던 우리에게 자유를 선포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사실을 믿기만 하면 '생명의 성령의 법'에 지배를 받게 됩니다. /믿/
새장 속에 갇혀 있는 새를 보면 안타깝습니다. 끝없는 창공을 훨훨 날 수 있는 새가 저렇게 갇혀있다니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어린 아들이 어디서 잡았는지, 새 한 마리를 잡아 귀찮게 합니다. 아버지가 그 새를 놓아주라고 해도 '아버지 내가 이 새를 잡으려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세요?' 그러자 아버지가 돈을 주면서 그 새를 놓아주라고 했더니 놓아주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새 값을 치르고 새에게 자유 함을 주었습니다.
바로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와 저주와 사망의 법을 자신의 몸을 바쳐 대속해 주시고 우리에게 자유 함을 주셨습니다. /아멘!/
사람이 새보다 더 갇혀 있기를 싫어합니다. 육신의 부 자유는 말할 것도 없지만, 인격을 무시당하면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를 원합니다. 우리는 과거 일본 놈들에게 36년 동안 모든 것을 압제 당하고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민족을 해방시켜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해방은 육신의 해방이지 영혼의 해방은 아니었습니다. 해방은 자유요, 자유는 기쁨이요, 기쁨은 승리인데 참 자유가 없고, 참 기쁨이 없고, 참 승리가 없는 세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바로 영적 자유를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대궐 같은 집에서 잘 먹고 잘 삽니다. 문명문화의 발달로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회가 더 큰 범죄가 일어나고,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마약에 히로뽕에 정신을 잃어버리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삶 속에 만족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진 자가 더 갖고 싶어합니다. 향락을 추구한 자는 더 큰 향락을 추구합니다. 가지고 가지면 뭔가 더 행복하고 보람이 있어야 하는데 그 영혼이 더 곤비함에 처하게 됨을 봅니다.
사실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적으로 이야기 해보면 삶에 아무런 기쁨이 없다는 것입니다. 죽고 싶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하나님은 인간을 영적인 존재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인간은 영적으로 만족하면 육적인 부족함이 있더라도 그의 생활은 기쁨이 있습니다. 영적인 기쁨은 누가 가져다줍니까? 천하를 지으신 만군의 하나님이십니다. /믿/
참된 자유는 죄에서 해방을 말합니다. 우리는 죽음을 제일 무서운 것으로 알고 있지만 더 무서운 것은 죄입니다. 죄는 양심을 마비시키고 영혼을 썩게 하고 나라를 망하게 하는 무서운 원인이 됩니다.
세상의 병중에 가장 무섭고 심각한 병이 바로 죄의 병입니다. 육신의 병은 앓다가 육신만 죽으면 되지만, 이 죄라는 병은 육신도 죽이고 영혼도 죽이는 무서운 병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죄의 병은 무서운 병입니다.
그러나 그 병은 못 고치는 병이 아닙니다. 이 병은 세상 권위 있는 의학 박사들이 고치는 병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보혈로만 씻음 받을 수 있습니다. /믿/
요8;32절에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계1;5절에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이제 본문은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할/

 

③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시기 위해 주님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3-4).
3-4절에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 즉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바를 다 지불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를 의롭게 하신 것입니다. /믿/
우리는 율법을 도저히 다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율법을 완성하심으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율법의 완성의 도가 이루어 졌다는 것입니다.
4절에서 '그 영을 좇아 행한다'는 것은 바로 '예수의 영, 보혜사 성령님의 법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감동, 감화주시고 은혜 주심을 알아야 합니다. /할/
▶4절에서 바울은 육신과 영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육신이라고 할 때, '인간의 몸, 살덩어리 인간의 생각, 판단, 인간관계'를 뜻합니다. 그리고 '부패한 인간의 악함, 무능'을 말합니다. 그래서 옛 습관을 버리지 못합니다.
4절에서 인간의 타락한 죄성인 육신의 영과 하나님의 영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육신을 좇지 않는 다는 것은 인간의 생각, 수단, 방법, 지식을 좇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을 좇는 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은 멀리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십니다.
본문은 육신이란 단어와 영이란 단어가 주류를 이룹니다. 생의 두 원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인생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는 인류 역사와 함께 끊임없이, 끊임없이 연구 되어온 과제입니다. 어느 철학,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인생이 무엇이냐를 파헤치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소위 '인간학'이라고 합니다.


▶이 인간학은 대체로 세 가지로 나뉩니다.
⑴인간을 완전히 육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이 사상을 학자들은 '유물사관'이라고 합니다. 이 사상은 사람들에게 정신이 있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 정신의 가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육체가 살아있는 동안만 육체에 매여 있는 하나의 기능의 발로라고 생각하는 학설입니다.
즉 정신을 육체의 기능 중에 하나로 보는 것, 인간의 모든 것은 육체 중심의 세계관으로 보는 것입니다.
⑵이원론적인 세계관입니다. 이 사상은 헬라를 중심으로 해서 많은 철학자들이 동의해 왔습니다. 불교사상이 이와 비슷합니다. 여기서는 육체와 정신, 몸과 영혼을 따로따로 분리해서 이원론적인 생각으로 인간을 봅니다.
그런데 표면적으로는 이원론적인 입장이지만 실제로는 육체적인 가치를 정신적인 가치에 비해 아주 낮추어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육체적인 것은 속되고, 더럽고, 추하다하여 입산수도를 하고 정죄하며 육체적인 욕망을 확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먹고 싶은 욕망은 나쁜 것이요, 생식본능은 아주 더러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형식적으로는 이원론적으로 말하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정신만이 본질이요, 육체는 가치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보통 '철학이다, 종교다' 하는 것은 모아 놓으면 이상 둘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⑶우리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간학은 어떤 것입니까? 즉 신앙적인 인간학은 무엇입니까? 기독교는 인간을 '정신이다, 물질이다'로 나누어 보는 것이 아닙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기독교의 인간학은 육과 영을 나누어서 생각하지 않고 합하여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육신도, 영혼도 종합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육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으로 나누어 놓았습니다. /할/

 

④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5-6).
사람들 중에는 영에 속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소속의 문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한 집에서 두 사람이 살고 있는데 한 사람은 이것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저것을 생각하며 산다고 합시다. 동상이몽이란 말이 있습니다. 한 이부자리에서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다르고 꿈이 다르고 관심이 다르면 운명까지 달라집니다.
남편은 주일날 세상으로 가고 싶고, 아내는 교회를 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결국 한 사람은 지옥으로, 한 사람은 천당으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본문의 내용입니다.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인데 소속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육의 사람이 아니고 영의 사람입니다. 육신을 좇아 살지 않고 영을 좇아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과 은혜를 받고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더 이상 육신을 좇아서 살지 말고, 영의 사람이 되어서 성령 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사는 삶이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습니다. 영으로 자기의 육을 쳐서 복종시키면서, 육의 사람이 아닌 영의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다는 것입니다. /할/
⑴여기 '육신을 좇는 자'란 육신의 부패성을 좇아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즉 타락한 성품대로 사는 사람, 죄(사탄)의 지배를 받는 사람, 삶의 중심을 자기중심으로 사는 자를 여기서 말하는 육신을 좇는 자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을 6절에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고 했고, 7절에서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고, 8절에서는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갈5;19절 이하에서 육의 생각은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 숭배, 술수, 원수를 맺는 것, 분쟁, 시기, 분 냄, 당 짓는 것, 분리함,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이라고 했습니다.
⑵'영을 좇는 자'란 예수 믿고 중생한 자로써 성령을 좇아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안에 있는 자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다'는 새 사람을 의미합니다. /할/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우리의 과거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기 전에는 육신을 좇아서 살았습니다. 육신의 일들을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영을 좇아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영의 일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육신의 일을 생각하면 잘될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6절을 보세요!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사망입니다. 그러나 영의 생각 속에 생명이 있고 평안히 있습니다. 여기서 '생각'은 원어 적인 해석에 보면 '마음'을 의미합니다. 생각은 곧 마음입니다. 생각은 마음의 흐름이요, 표현입니다. 생각이 가면 마음이 따라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영을 좇는 자는 그 마음이 항상 하나님께 가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분의 말씀대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을까?
영을 좇는 자는 생명과 평안히 온다고 합니다. 생명은 하나님과의 교재를 의미합니다. 또 평안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즉 화해의 결과로써 얻은 마음의 평안과 위로를 말합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면 평안히 없습니다. 성령을 좇아 살면 평안히 찾아옵니다. 집에 있는 자녀가 마음의 평안을 누리려면 부모와 충돌이 없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가 마음의 평안을 누리려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면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는가? 우리가 얼마나 성경을 따라 살았는가?'에 좌우합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서도 마음에 평안히 없는 이유는 성령을 좇아 살지 않고 육신을 좇아 살기 때문입니다.
▶어느 장로님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사업상 어떤 불이익이 와도 주일날은 골프를 치지 않겠다고 굳게 고백을 했습니다. 왜 이런 고백을 했겠습니까? 지난날 성령의 생각대로 따르지 않고 주일날 장로가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사업상 어쩔 수 없이 골프 모임에 가면 자신의 마음에 평안히 없다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에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가끔 주일 예배를 빼먹고 가족이 모여 산이나, 들로 소풍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들을 보면서 성령 님께서 얼마나 탄식하시겠습니까? 성령 님이 탄식하시는데 그들이 마음이 평안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영의 사람입니다. 성령이 이끄는 대로 살면 저절로 축복이 따라옵니다. 6절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할/

⑤육신의 생각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의사가 없습니다. 할 수 있는 능력도 없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과는 상반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육신의 생각에 이끌리게 되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법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까? 육신의 부모님에게도 말을 안 듣고 사고만 치고 다니며 애를 태우면 어떤 부모가 그 자식으로 인해 기쁨을 누릴 수가 있습니까?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할 때, 부모는 그 자식으로부터 기쁨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소요리 문답 제 1문에 '사람이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그 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겁게(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목적이 있습니다. 목적이 바로 서야 축복도 받습니다. 바울은 고전10;31절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고, 전12;13절에 보면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고 했습니다. /할/
▶하나님이 기뻐하는 생활은 무엇입니까?
⑴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삶입니다. 시29;2절에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⑵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아멘!/ 계1:3절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할/

 

⑥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9).
누가 그리스도의 사람입니까?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자가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아무리 윤리적으로 완벽하게 살고 도덕적으로 착하게 산다 할지라도 그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비록 부족하고 연약할지라도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요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는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애썼던 사람이었고 유대인의 관원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고 명망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또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했습니다. '랍비'였습니다. 백성들에게 삶을 가르쳤습니다. 종교를 가르쳤습니다. 도덕과 윤리를 가르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향해서 거듭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그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만일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들린 여자나 일곱 귀신이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그 말씀을 하였더라면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향해서 거듭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니고데모는 아직도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영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육에 속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니고데모처럼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완벽한 사람이 못될는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는 말씀은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더 깊이 음미해 보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성령이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심령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내주하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엎드려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감화를 소멸치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살전5;19절에서 '성령을 소멸치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다가도 성령을 소멸해 버리고 마음이 강퍅해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걸작품 중 '최후의 만찬'은 오랜 세월에 걸쳐서 그린 그림입니다. 다빈치는 예수님의 모델을 오랫동안 찾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로마의 어느 교회에서 성가대원으로 활약하고 있는 '삐에뜨로 반디엘'이라는 청년을 만났습니다. 이 청년은 모든 면에서 예수님의 모델로 제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청년을 모델로 해서 예수님의 모습을 완성시켰습니다. 그러나 10년이 지나도록 이 그림을 완성시키지 못했습니다. 모든 제자들을 다 그렸는데 예수님을 판 가롯 유다만 못 그렸기 때문입니다. 다빈치는 죄로 마음이 무디고 찌들어진 얼굴을 찾아 나서기 10년 되는 날 로마의 뒷골목에서 아주 보기 만해도 역겨운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가롯 유다의 모델로 그렸습니다.
작업이 끝나고 돈을 지불하면서 이름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몇 년 전에 당신이 나를 예수의 모델로 그린 '삐에뜨로 반디엘'입니다.' 보세요! 성령이 거한 사람과 성령이 떠난 사람의 차이가 이렇게 엄청납니다. /할/

 

⑦10절에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두 가지가 서로 예리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몸'은 '영'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죄'는 '의'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죽은 것'은 '산 것'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이 두 가지 가운데서 무엇을 택해야 마땅하겠습니까? 몸이 아니라 영을 택해야 할 것입니다. 죄가 아니라 의를 택해야 할 것입니다. 죽은 것이 아니라 산 것을 택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사람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 곧 부패한 육신의 행실을 좇아서 살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의를 인하여 산 것, 곧 영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영의 일을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진리는 죽는 것과 산 것입니다. 죽을 것이 아니고 죽은 것이고, 살 것이 아닌 산 것입니다. 완벽한 구원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학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예수 믿는 사람은 그때 벌써 죽었다는 것이요, 부활하실 때, 곧 하나님의 법대로 산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마28;20절에서 주님은 세상 끝 날까지 성도들과 같이 계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성도의 몸은 아직도 죄 아래 있고, 사망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영은 의로 인하여 산 것이니라' 여기 영은 성도들의 중생의 영을 의미합니다. 중생이란 죽었던 영이 살아난 것을 말합니다. 성도의 영은 의로 인하여 중생 하여 살아났으나 육은 아직도 죄와 사망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육신을 처 다스려야 합니다. /아멘!/

 

⑧부패한 인간의 육신도 주님 대림의 그 날에 홀연히 변화가 될 것입니다(11).
10절의 영혼을 살리신 하나님께서 11절에서는 우리 육신을 살리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앞으로 우리의 몸은 죽어 이 땅에 묻히기는 하지만 우리 주님 오시는 날 홀연히 변화되어 우리 육신이 부활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완성입니다. /할/
고전15;13절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또 고전15;20절에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였도다' /할/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우리의 부패한 육신도 변화가 될 것입니다.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으로 바뀔 것입니다. 육의 몸은 신령한 몸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우리는 육을 쳐서 복종시키며 영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은 육신에 속한 모든 일들을 더럽고 냄새나는 배설물처럼 여겨버렸습니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할/
우리 모두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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